최근에 진중권이 조국 사태와 관련하여 교수자리를 사퇴하고 유시민과 설전을 벌이는 등의 행동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그는 마치 과거에 자신을 쫒아다니며 시비를 걸던 변희재처럼 유시민이나 김어준에게 설전을 벌이자고 자꾸 충동질을 합니다. 아니 그것을 넘어서 마치 무슨 이종격투기 선수처럼 내가 링에 올라갈테니 싸울 사람은 나오라는 식으로 말을 합니다. 토론배틀로 승부를 가리자는 겁니다. 얼마전에 있었던 토론회에서 유시민을 향해 말하는 진중권은 보기 민망한 수준이었지만 여전히 말싸움은 자신이 넘치는 모양입니다. 


이런 상황은 진중권 개인에 대한 호불호를 넘어서 시대의 변화 혹은 미디어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즉 시대를 좌지 우지 하는 미디어의 변화에 따라 진중권과 같은 인물들이 그 시대의 사고방식을 대표하게 되었다가 그러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일찌기 미디어의 이해를 쓴 마셜 맥루한은 미디어를 인간의 확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우리는 미디어를 그냥 도구로 소유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자신의 일부로 가지게 되며 이에 따라 우리의 사고방식과 관점도 달라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사진첩으로 보는 사람이 있고, 세상을 글로 표현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사람이 있으며 또한 세상을 한편의 연극처럼 이해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의 사고방식도 변하게 되는 겁니다. 


맥루한은 한계에 달할 정도로 굳어진 미디어를 핫미디어로 부르고 아직 사용법이 굳어지지 않은 새로운 미디어를 쿨 미디어로 부릅니다. 쿨 미디어가 등장했는데 핫미디어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형식에 얽매여 문화적 빈곤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리고 핫미디어에서 쿨미디어로의 패러다임변화에 계속 적응하지 못하게 될 때 결국 적폐로 여겨지며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미디어에 연결된 사회적 구조에 주목하게 됩니다. 글자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써야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신문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독자에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나름의 제작 배포 시스템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미디어는 대중적으로 파급력있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구조가 필요합니다. 그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나 미디어의 특성이 결정하는 이 구조는 누가 스타가 될 것인지를, 나아가 사람들이 어떤 정신세계를 가지게 될 것인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군사독재시절 글로 유명해진다고 해도 그들은 대개 권력자가 만든 새장안에서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총든 사람앞에서 논리적 분석을 해봐야 두들겨 맞을 뿐이죠. 먹고 살기 바쁜데 회장님의 바보같은 소리를 누가 비판합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권위주의 사회에서는 교수나 무슨 단체대표같은 그럴싸한 직함이 있거나 박사같은 그럴싸한 학벌이 있거나 혹은 신춘문예수상같은 타이틀이라도 있어야 글을 써도 발표할 수 있고, 사람들이 읽어줬습니다. 그게 아니면 좋은 집안 배경이라도 있거나 말이죠. 그런 구조가 만든 새장속의 자유안에서 사람들은 자기 정신세계를 구축한 것입니다. 


게임의 법칙은 민주정부가 들어서면서 상당히 바뀌게 됩니다. 진중권은 서울대 미학과를 1986년에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석사학위를 하고 1993년에는 독일로 유학을 떠났죠. 어디에 선을 그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진중권이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1998년 무렵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김영삼의 문민정부를 지나 진짜 민주정부인 김대중 정부가 선 해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인터넷이 세계 어디보다도 더 빠른 속력을 자랑하던 때였죠. 한때는 세계 핫스팟의 절반이 한국에 있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미국은 아직 전화모뎀을 쓰고 유럽은 그보다 더 후져서 이메일도 잘 안될 때 한국은 ADSL이 깔렸죠. 


진중권은 한때 쿨미디어였던 초기 인터넷이 만들어 낸 스타중의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민주화와 인터넷의 가장 큰 혜택을 누렸습니다. 이 시기는 군사독재가 물러가고 민주정부가 세워졌으니 말과 글로 싸우는 논객의 시장가치가 올라갈 수 밖에 없는 때였습니다. 진중권은 보수주의 지식인을 비판하는 책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1998년에 출판했습니다. 이것은 군사독재 세력의 후예인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고 아고라 게시판의 미네르바가 구속되면서 권위주의 사회가 복원된 2008년의 10년전이었습니다. 이때는 진중권이 아직 독일에서 박사학위 유학중이었는데 그는 1999년에 학위없이 귀국해 버립니다. 그리고 홍세화, 김규항, 김정란과 함께 아웃사이더라는 격월잡지를 만들었습니다. 


이 민주정권의 시기는 문자논객의 시기라고 부를만 합니다. 이 시기에는 잡지 신문은 물론 각종 게시판이나 정치포털이라 불리는 사이트에 글쓰는 사람들도 아주 많았습니다. 노무현대통령의 탄생에는 온라인의 네티즌참여가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인터넷없이는 노사모의 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15년전만 해도 유튜브는 없었습니다. 팟캐스트도 없었습니다. 인터넷은 기본적으로 문자로 채워졌습니다. 


비록 그것이 문자로 채워진 것이었을 망정 초기 인터넷도 역시 당시에는 쿨 미디어였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인터넷 공간에서 무슨 거창한 학벌이나 직위가 없어도 자기 생각을 발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슨 문학상같은 것을 받아서 등단하지 않아도 자기 소설도 발표했습니다. 애초에 등단한 작가와 일반인을 나누는 선도 애매해 졌고 조선일보에 정치평론을 쓰는 사람과 일반인을 나누는 선도 애매해 졌습니다. 인터넷은 권위주의 사회를 개혁했습니다. 인터넷을 다 통제하는 것이 무리였기 때문입니다. 


진중권은 대표적 문자논객이었습니다. 진중권은 책이나 잡지에도 기고하는 일을 많이 했지만 그가 성공하는데에는 인터넷과 말싸움분야가 크게 기여합니다.  진중권은 조선일보 게시판같은 곳에서 무차별 싸움으로 보수성향의 네티즌과 싸우기도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토론의 달인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고 어떤 의미로 인터넷이 오프라인으로 쏘아보낸 이종격투기 챔피언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런 시기의 끝에 탄생한 최고의 스타가 국회를 들썩이게 했다는 미네르바였습니다. 당시의 그는 그 어느 대학교수보다도 더 영향력이 있어보였죠. 하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고 미네르바가 체포당하는 일까지 생기게 되자 문자논객의 시기는 끝납니다. 진중권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중앙대 겸임교수 재임용에 실패합니다. 정치시사게시판들은 대개 생기를 잃어버렸습니다. 박근혜정권쯤이 되자 기자는 질문하는 법도 잊어서 오바마대통령이 한국기자에게 질문해보라고 기회를 줘도 침묵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경쟁이 지상지고의 선이며 따라서 극한 경쟁인 개싸움을 해서 살아남는자가 가장 강하다는 착각에 시달립니다. 사람들은 종종 이것이 진화론의 교훈이라고 생각하지만 진화는 가장 뛰어난자, 가장 훌룡한 자가 경쟁에서 살아남는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환경이 승자를 결정한다는 것이죠. 가치 판단이 없습니다. 살아남는 자가 가장 훌룡한게 아닙니다. 어떤 환경에서는 가장 훌룡한 자가 가장 먼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현대에서 살아남는 전문가란 사실 사회적 시스템이 무차별 경쟁을 제거해줬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따라서 법과 관습이 안정된 사회를 만들지 않으면 전문가는 시들어 죽어버립니다. 뛰어난 운동선수나 예능인도 나올 수 없습니다. 그들은 금방 권력자가 사용하고 버리는 도구가 됩니다. 아니 사람들은 애초에 그런 전문인이 되고자하지 않습니다. 가장 뛰어난 학자, 배우, 사상가, 운동선수, 예술인은 사실 가장 연약한 DNA를 가져서  환경이 조금만 달랐더라면 바로 도태되어졌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토론을 무차별 이종격투기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검투사를 스타로 만드는 풍토는 진짜로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아버릴 수 있습니다.  싸움은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과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더 많은 싸움이 반드시 더 큰 진보를 가져올 거라는 믿음은 틀린 것입니다. 싸움과 투쟁이 세상을 바꾸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도 틀린 것입니다. 우리는 나라를 지키는 군인을 지지해야 하고 감사해야 하지만 군인이 가장 훌룡한 시민이라는 생각은 군사독재적인 사고입니다.  싸움은 때로 어쩔 수 없어서 필요한 필요악일 뿐입니다. 박근혜를 탄핵했던 것은 폭력혁명이 아니라 대중을 하나로 만든 평화집회였습니다. 


진중권은 문자가 지배하던 초기 인터넷시대의 군인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잘싸우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짜로 중요한 것은 싸움이 아니라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이었고 그걸 허용해준 사회분위기였죠. 그도 그런 변화덕분에 등장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지나고 나자 다시 민주정부가 섰지만 미디어 환경은 이미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말싸움은 이제 전만큼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칼질하고 총질하는 것이 특기인 사람은 그걸 할 대상을 찾기에 바쁜 법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꾸 대중에게 욕을 먹게 됩니다. 


이제 인터넷은 동영상과 이미지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유튜브와 팟캐스트의 시대입니다. 진중권이 가장 실패하고 있는 점은 대중과의 소통입니다. 대중과의 소통에는 문자논객에게는 그다지 많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들이 더 필요합니다. 그것은 겸손이고 공감능력이며 이 모든 것이 즐거움과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발상입니다. 


문자논객은 흔히 보편적 진리를 말하는 식으로 정보를 대중에게 뿌립니다. 과학도였던 제가 보기에 문자논객들은 대개 과학자인것처럼 논쟁하고 시공을 초월하는 법칙이나 지식을 추구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사회가 이렇다던가, 정의가 이렇다던가 할 때 말입니다. 그래서 논쟁이 아주 중요한 부분으로 떠오릅니다. 이공계분야에서도 당연히 그렇습니다. 이 분야들에서는 누군가가 논문을 발표하면 그 오류를 지적하는 것은 당연하니까요. 

하지만 과학논쟁과 인문 사회 분야의 논쟁은 전혀 다릅니다. 과학은 내가 맞으면 너는 틀리다는 배중률적인 논리가 통합니다만 인문사회분야에서는 정의나 국가나 평등같은 우리가 논하는 주제를 구성하는 단어들 자체가 정의가 애매해서 대화를 하는 사람들도 이 말을 100% 이해하지 못합니다. 과학에서 말하는 법칙과 인문사회분야에서 말하는 법칙은 그 정확도가 전혀 다른 이야기이며 보편과 특수의 문제도 있습니다. 모든 수소원자는 다 같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이러니 저러니 하지만 개인들 사이의 차이는 경우에 따라서 한없이 큽니다. 예를 들어 내가 결혼하는데 사회적 평균은 어떤 의미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지요. 내 결혼은 내 문제고 나는 단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문자논객은 유튜브 시대의 스타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진중권이 시비걸기 좋아하는 김어준이 그렇죠. 김어준은 말싸움으로 큰게 아니라 나꼼수라는 방송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진중권과 김어준의 공통점이 없지 않고 진중권이라고 해서 팟캐스트나 유튜브 방송을 안하는 것도 아니고 김어준이 말싸움을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김어준은 말싸움으로 대판 싸워 이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실 유튜브 시대에 말과 글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동이고 생산입니다. 말싸움에 이기는 것은 그다지 도움이 안되고 컨텐츠 생산자는 그런 투사 이미지가 오히려 위험합니다. 말싸움 한번 지는 것으로 모든 신뢰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누군가가 싸워보자고 해도 피하는 겁니다. 득될 것이 없고 손해될 것은 많기 때문입니다.  


백종원도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과 싸우지 않습니다. 득될게 없으니까요. 백종원이나 김어준같은 사람은 자기 컨텐츠 즉 자기 이야기를 만드는데 더 집중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내 취향이나 말이 진리로 통할 거라고 주장도 안합니다. 반대로 내 이야기를 좋아하면 내 컨텐츠를 즐기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야 말로 이들을 포함해서 유튜브 컨텐츠 생산자들 모두의 승리입니다. 


문자논객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무기는 넓은 지식이었습니다. 좋은 기억력으로 많은 것을 기억하면 지식인 대접을 받으며 경쟁자들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자논객은 유튜브 컨텐츠 생산자가 되는데 종종 실패합니다. 문자논객은 흔히 보편을 좋아합니다. 즉 그들은 기본적으로 '이게 옳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종종 네가 사회주의가 뭔지 모르는구나 그건 이거야라는 식으로 우리의 의지와 마음에 무관한 정보를 전달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미네르바 현상도, 노사모도 예측못했을 뿐만 아니라 촛불혁명도 BTS도 예측못한다는 사실을 잊고 자꾸 그들의 단어들에 집착합니다. 


안타깝지만 문자논객은 종종 감정불구입니다. 그건 보편이라는 구조에 감정이 편입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시나 소설을 쓰는 사람들을 보면서 감정이야 말로 글쓰는 사람에게 풍부한 것이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데 바쁘신 분들은 논객이 되는게 아닙니다. 논객은 뭔가와 싸우고 뭔가를 논리적으로 정리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 보편성속에서 그들은 개인적 감정이 있어야 할 곳을 찾지 못합니다. 게다가 한국의 문자논객은 종종 그 좋은 기억력으로 서구가 만들어 낸 개념을 삼키는데도 바빴습니다. 그러니 그걸 우리 감정으로 이해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들의 멋진 말은 김치맛을 한번도 보지 못한 유럽인이 김치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것과 같은 면이 있습니다. 서구인이 그들의 개념을 보편으로 포장하지만 그것들도 그들의 역사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유튜버에게 중요한 것은 창의력이고 감정이며 공감입니다. 유튜버는 '나는 이게 좋다'내지는 '이게 재미있다.'라고 말합니다.  유튜버에게 감정은 가장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공감하고 즐기는 것이 빠지면 모든 일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문자논객에게 이 세상은 '응당 그렇게 되야 하는 방향으로 움직어야 하는' 곳이라면 유튜버에게 이 세상은 '우리가 좋다고 느끼는 방향으로 바뀌어야'하는 곳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미디어 환경은 자연스레 우리의 의지를 더 강조하게 만듭니다. 정보를 계몽하는 시대가 아니라 공감을 호소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니 상대방을 멸시하고 잘난체 하는 것은 유튜버에게 금기죠. 싸움에 이겨도 전략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진중권은 여기서 주로 실패합니다. 뭐든지 자신이 정의를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니까요.


진중권과 유사하게 그 시작은 문자논객이었지만 그 한계를 거의 뛰어넘은 사람도 있습니다. 유시민입니다. 어떤 의미로 30년전에는 유시민과 진중권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 둘은 같은 서울대 출신일 뿐만 아니라 유시민도 1992년에 독일유학을 가서 1997년에 돌아왔으며 글로 유명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유시민도 건방지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으며 1997년에는 김대중이 대선에 이길 수 없다고 책까지 써가며 단언해서 두고 두고 유시민이 확언이 맞는게 아니라는 증거로 지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유시민은 자신의 문제점을 깨닫고 조금씩 변화했습니다. 그는 논객출신의 작가로서 말에 대한 중독과 사랑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진짜 세계는 말 안에 있지 않으며 말이 보여주지 않은 세상이 있어서 미래에 대한 예측이 계속 틀리게 된다는 것을 이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포용력을 늘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비록 정치가로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대중적 인기를 이어가고 유튜버로서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반면에 포용력으로 가면 진중권은 낙제점이죠. 그는 김어준도 포용하지 못하면서 정의로운 사회를 말합니다. 그가 상상하는 미래는 오지 않겠지만 그런 미래가 온다면 그것은 아무도 포용되지 못하고 진중권이 독재하는 미래겠지요. 그는 모두를 죽이고 스스로도 죽이고 말겁니다. 


무력이나 돈의 힘이 제외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합리성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미디어 광신이 또다른 불합리를 만듭니다. 지금 여기서 말하는 미디어 광신은 문자 중독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이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다는 것을 거듭 확인하는 상황에서도 몇몇 문자논객은 흑백으로 세상을 가르고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놓습니다. 그리고 끝없이 뭐뭐란 무엇인가를 외치는 본질론으로 빠져듭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시 맥루한의 책을 떠올리게 됩니다. 낡은 미디어에 갇힌 그는 불행하게도 낡은 사고로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새로운 것은 불온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태극기집회와 촛불집회의 차이를 보지못하고 노무현과 이명박의 차이를 보지 못합니다. 그는 이 모든 집단을 부흥회니 광신도니 하면서 욕을 퍼붓고 자신이 낡은 적폐와 싸우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실은 그 스스로가 새 시대에 적응하기를 실패하여 이미 낡은 적폐가 되어버렸는데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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