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시대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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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시대의 종말

격암(강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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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포퍼는 그의 책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플라톤을 비판면서 개인주의에 대해 논한 바가 있다. 그에 따르면 플라톤은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같은 것으로 표현했다. 그런데 이것은 오류다. 개인주의의 반대는 집단주의이고 이기주의의 반대는 이타주의이기 때문이다. 즉 개인적 이타주의도 가능하고 집단주의적 이기주의도 가능한데 플라톤은 이런 가능성을 무시하고 집단주의는 이타주의이고 개인주의는 이기주의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요즘도 흔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개인주의를 이기주의로 여긴다. 개인주의를 오해한다. 

 

 

만약 개인주의가 이기주의라면 개인주의가 서구 문명의 근본역할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개인주의의 진정한 의미는 '유효한 판단과 인식의 주체로서 개인을 인정하는 것'이다. 즉 하나 하나의 인간은 실수도 하고 입장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지만 유효한 판단을 하고 의미있는 인식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민주주의 제도는 개인을 기반으로 해서 기본적으로 다수의 뜻에 따라서 집단의 결정을 해나가는 것이다. 개인주의는 자기에 대한 존중인 동시에 타인에 대한 존중이다. 그래서 이타적 개인주의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내 삶을 아끼지만 타인과 타인의 삶을 긍정하는 사람은 이타적으로 행동한다. 

 

그런데 플라톤은 사람보다 진리나 지식에 더 집착했다. 이 세상에는 진리나 이데아의 세상이 있는데 그걸 본 사람도 있고 안 본 사람도 있다는 식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우리는 다수결이 아니라 진리나 이데아를 본 사람의 지휘에 따라야 한다. 진리를 보지 못한 인간은 유효한 판단과 인식의 주체로 여겨질 수 없다. 진리란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이므로 플라톤의 세상에서는 결국 전통은 변할 수 없다. 진리는 천년이고 이천년전이고 지혜로운 자에의해서 이미 인식되었어도 변하지 않는다.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가능성을 믿었다. 나는 진리를 본다라고 하는게 아니라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고 했다. 그는 위대한 개인주의자였다. 때문에 포퍼는 플라톤을 소크라테스의 배신자라고 부른다. 개인주의안에서 우리는 개개인의 가능성과 능력을 기본적으로 믿는다. 그래서 제일 학벌이 좋거나 권력있는 사람이 나라를 다스리는게 아니라 모든 조건과 상관없이 모두가 한표를 행사하는 민주주의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는 우리가 뭘 모르는지를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에 장사치는 천한 신분이었다. 그들은 현대사회에서는 상인의 역할이 농민이나 대학의 학자들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그러니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둥, 잘 아시는 분들이 판단하면 된다는 둥 하면 성리학이나 외치고 농사나 짓자고 하는 사람들이 경제발전을 가져 올 수 있었을리가 없다. 그때 천해 보였던 사람들이 미래의 지도자였다. 우리는 우리가 뭘 모르는지를 모른다. 지금의 사회적 패배자가 사실은 미래의 선구자일 수 있다. 포퍼는 개인주의는 서구 문화의 핵심에 있고 나아가 인류문명의 핵심에 있다고 생각했다. 몇천년전에 개인주의 혁명이 생기고 사회가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 바뀐 것이 문명의 폭발적 발전을 가져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현실도 플라톤의 태도와 순수 개인주의적 태도의 중간에 머물고 있다. 그리고 현대의 상황은 개인주의적 이상에 대해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어쩌면 개인주의를 그 근간으로 해서 발달해온 서구 문명이 망하는 패러다임의 변화기를 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개인주의의 반대는 집단주의이며 개인주의는 이기주의가 아니다라는 포퍼의 지적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개인주의가 망한다는 게 이기주의로 간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선 오늘날의 현실을 보자. 포퍼가 말했듯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간의 전쟁인 펠레폰네소스 전쟁을 개인주의를 그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혁명전쟁이라고 하면 그 혁명은 참 느리게 진행되었다. 여성이 참정권을 가진 건 지난 세기다. 노예 해방도 기껏해야 19세기 이야기며 사실 아직도 인종차별이 있다. 몇천년이 지났는데 말이다. 

 

유럽의 종교개혁은 1517년에 있었는데 여기에는 몇가지 주목할만한 뒷이야기가 있다. 첫째 이때 금속활자라는 기술이 있었기에 종교개혁이 가능했었고 둘째 독일어로 된 성경이 퍼져서 읽혔기에 종교개혁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맨 뒤에 가면 우리는 다시 읽고 쓰는 능력과 만난다. 유효한 판단과 인식의 주체로서의 인간이란 현실적으로는 쓰고 읽을 수 있는 인간을 의미한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문자는 인간을 완전히 다른 생명체로 만들어서 나는 이걸 인간은 문자로 인해 사이보그가 되었다고 말하곤 한다. 그리고 개인주의나 민주주의란 이 사이보그들의 문화다. 또한 역사를 보았을 때 개인주의나 민주주의의 보급이란 결국 대중이 읽고 쓰는 시대가 오는가에 크게 달려있다. 읽고 쓰지 못한 사람은 합리적 판단을 하지 못한다는 인식은 어린이와 어른의 분리를 만들었다고 닐 포스트만은 주장한다. 즉 모든 대중이 읽고 쓰지 못할 때는 성인과 어린이의 구분이 없었다. 그런데 대중학교가 세워져서 읽고 쓰기를 배운 어른과 어려서 아직 그런 걸 배우지 못한 어린이가 달라지자 아직 학교를 마치지 못한 사람을 말하는 어린이라는 개념이 보편화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서구의 역사지만 요즘도 우리는 성인이 되지 못한 인간은 유효한 판단과 인식의 주체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 그들은 투표권이 없고 재산권도 제한받는다. 하지만 물론 요즘의 성인기준은 시대에 뒤져있다. 중학생은 몰라도 고등학생 정도는 권리와 의무를 모두 지게 만들어야 한다. 

 

개인주의와 민주주의의 예외는 또 있다. 그건 바로 과학이다. 과학은 거의 플라톤의 이상국가처럼 돌아간다. 과학은 전체주의적이고 독재적이다. 당신이 남과 다른 과학을 믿을 권리를 주장하면서 학교에서 뉴튼 물리학 뿐만 아니라 음양오행설도 옳고 풍수지리설도 옳다고 가르치자고 할 수는 없다. 과학의 세계에는 증명할 수 있다면 단 한명의 천재가 천만명의 인간보다 옳다. 그런데 우리는 과학기술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절대나 절대에 가까운 진리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개인주의의 이상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투표로 지구가 평평한지 둥근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당신 스스로는 한국도 떠나본적이 없더라도 당신은 과학자의 말을 외워야 한다. 포퍼는 과학이 아닌 유사과학인 역사주의가 과학인 척 하는 것이 열린 사회에 대한 공격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민주주의와 개인주의는 확대되어져 왔다. 우리는 성차별과 인종차별의 극복을 인류문명의 위대한 성취로 배운다. 그건 옳은 일이지만 그래서 우리는 개인주의를 절대진리처럼 여기는 문제도 가지게 되었다. 개인주의는 진리가 아니다. 왜 그럴까?

 

무엇보다 먼저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주의는 그저 인간이면 모두 유효한 판단과 인식의 주체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현실적으로 개인주의나 민주주의는 교육과 문화를 요구한다. 그래서 의무교육제도가 있기도 하다. 최소한의 학습은 권리 이전에 의무라는 것이다. 당신은 나는 개인주의와 민주주의의 신봉자이며 학벌과 문화로 사람을 차별할 수 없다고 쉽게 말하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당신은 7살 먹은 아이가 참정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지만 만약 우리나라에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은 초등학교도 겨우 나오고 문화적으로 야만적이라고 하자. 그들이 대놓고 빵한덩이에 표를 팔아버리고 있다고 하자. 혹은 사이비종교 교주의 말에 충성해서 표를 던진다고 하자. 당신은 정말로 그들의 한표가 당신의 한표와 같은 의미가 있다는 신념에 계속 동의할 것인가? 

 

여기서 잠깐 지적해 두자면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이것을 민주주의 부정으로 여기지는 말라는 것이다. 그게 바로 개인주의나 민주주의에 대한 중독이다. 뭐든 절대로 여기면 그것에 시비를 거는 것은 악으로 판단하게 되기 쉽다. 그것은 그늘을 만들고 비극을 만든다. 나는 지금 그 그늘이 이미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늘어났으며 앞으로 더 그럴 거라는 이야기를 여기서 하고 있다. 나는 민주주의를 부정하는게 아니다. 민주주의가 뭔지 좀 더 배워 보자고 하는 것이다. 

 

필요한 교육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사실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교육 수준은 점점 더 늘고 있다. 때문에 나는 머지 않아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학은 망할 수 밖에 없다고 믿는다. 애초에 필요했던 건 그저 읽고 쓰는 능력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건 빠른 아이는 유치원수준에서도 배운다. 보통의 학벌은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되고 다시 고등학교가 되더니 이제는 대학도 필수인 시대가 되었다. 불과 백년전만 해도 고등학교 졸업생은 지식인이었는데 말이다. 우리는 물론 학벌로 시민권을 제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교육기간은 점점 늘어만 간다는 사실, 다시 말해 그저 평범한 시민이 가졌을 것으로 생각되는 교육기간이 늘어만 간다는 사실이 무의미하지는 않다. 그건 모순의 축적이다. 

 

무엇보다 지식의 성장속도가 너무 빠르다. 세상은 점점 더빠르게 더 복잡해져 왔고 지금도 그렇게 되고 있다. 예를 들어 반세기전에는 컴퓨터란 전문가의 기계였는데 요즘에는 스마트폰 사용법을 모르면 세상 살기가 힘들다. 본인확인이 안되고 쇼핑도 못할 지경이다. 소식도 너무 늦기 쉽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우리 시대에 컴맹이나 기계치가 과연 '유효한 판단과 인식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문제는 컴맹이냐 아니냐 수준이 아니다. 이번 코로나  19사태가 그걸 잘 보여준다. 문제는 집단지성이다. 코로나 19처럼 위험하고 빠른 변화가 왔을 때 그 사회의 방향타를 잡고 있는 몇몇 관료들의 인식수준은 그것에 대처할만큼 빠를 수가 없다. 그 관료가 무능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요즘처럼 복잡한 세상에서 우리는 모두 특정분야에만 전문화되어 있다. 그리고 조직은 관행에 따라 움직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너무나 많은 진짜 그리고 가짜 정보들은 빠르게 분석되고 조합되어져야 한다. 더구나 그것들은 새로운 것이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메뉴얼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 코로나 19같은 사회적 문제에 대응할 수 있다. 물론 세상에는 전문가들이 있다. 하지만 진실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이 모두에게 퍼지는 것도 아니고 전문가가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것도 아니다. 서구에는 과학자가 없어서 마스크 쓰기가 늦게 퍼졌을까? 일본이나 유럽에서 코로나에 대해 했다는 방송을 보면 기가 차는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공통적인 것은 그들의 관료시스템은 느리고 그들의 경각심이 올라가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것이다. 코로나 말고 다른 문제가 생긴다고 해보자. 예를 들어 기후문제로 인한 재해가 오는 것이다. 서구 사회를 보면 저렇게 느려서야 다음번 재해도 뻔히 보면서 당할거라는 생각이든다. 세상은 바뀌는데 그들의 조직은 너무 느려서 판단이 엉망이다. 

 

지식은 이제 너무 흔하다. 오늘날 지적 권위는 이제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트럼프가 과학자들을 묵살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런 일은 단순히 트럼프가 무식해서가 아니다. 현대사회의 복잡성은 전문가를 취약하게 만든다. 댐을 만드는 일에 대해서 전문가의 지적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겠지만 첫째로 댐을 포함한 많은 사회사업은 너무나 많은 방면에 관계되어서 특정분야의 전문가라고 해도 다른 분야에 무지하기는 마찬가지고 둘째로 세상이 빨리 바뀌기 때문에 전문가도 전에 없던 일이 꼭 불가능하다고만은 단언할 수 없다. 어떤 주장이든 심지어 지구가 평평하다는 반과학적인 주장도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시대라서 전문가는 그렇게 강한 발언권을 가지지 않는다. 

 

오늘날 한 인간이 가지는 인식지평은 사회 전체를 보기에는 세상이 너무 복잡하다. 그래서 심지어 전문가 조차도 자기 관점에서는 옳은 이야기지만 더 큰 지평에서 보면 엉터리 같은 이야기를 하는 일이 생긴다. 그가 세운 인식 지평, 내가 말하는 무지의 벽 너머에서는 훨씬 더 엄청난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게다가 지식이 흔한 시대에 전문가는 좁은 분야를 파느라 종종 비전문가보다 시야가 좁은 일도 많다. 

 

그래서 집단지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개인주의의 이상은 결정적으로 실패한다. 오늘날 한 개인이 독자적으로 '유효한 판단과 인식의 주체'가 되는 것이 한없이 불가능해져 가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주체적으로 개인적으로 판단한다고 착각하기도 하지만 실은 어떤 뉴스 소스를 믿는가, 누구의 판단을 신뢰할 것인가에 따라 우리의 판단은 크게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망이 필요하다. 우리는 올바른 망을 구축해야 하고 그 망에 연결되어야 한다. 

 

서구 국가들의 실패는 그들이 이제까지 만들어 온 정보처리망 혹은 사회적 판단기계가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의 경우는 최근의 정치적 투쟁으로 인해서 그 망이 새롭고 빠르다. 월가를 점령하라는 구호를 외치던 시위가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던 일이 있다. 하지만 그때도 맨하탄에 모였던 사람은 수천에 불과했다는 말을 들었다. 광화문에 백만이 모여서 평화집회를 하고 박근혜를 탄핵시켰던 한국의 민주시민들이 이루는 망과는 차원이 다르다. 우리는 다시 길거리에 나갈 준비가 되어있다. 

 

물론 이런 우위가 언제까지 지속될런지는 확실하지는 않다. 모든 것은 유동적이다. 한국의 시민사회도 그렇고 외국의 시민사회도 그렇다. 하지만 누가 더 뛰어난 사회망을 건설하던 확실한 것은 개인을 '유효한 판단과 인식의 주체'로 보는 것에 집중하는 시각은 이제 낡았다는 것이다. 이제 관점은 좀 더 망으로 가야 한다. 망이 없이는 유효한 판단과 인식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망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무지를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편하게 살 수도 있다. 개인이 다 판단하려고 하니까 공부할 것이 너무 많지 않은가. 개인주의는 그 화려한 전성기를 끝내고 이제 망해가고 있다. 지금은 망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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