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하는 기계 : 7. 자아의 공중부양과 사이보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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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는 기계 : 7. 자아의 공중부양과 사이보그 2

격암(강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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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던가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하고 묻는다고 하자. 그렇다면 아마도 여러분은 스스로가 질문의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질문은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언어적인 혼란이 있다. 사이보그 1이란게 자연체 인간과 문자의 결합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 문자는 언어를 기록한다. 그러니까 정체성의 혼란은 사이보그 1 세계에서도 있게 된다. 그리고 앞으로의 세상에서는 질문들에 답하는 것은 훨씬 어려워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여러가지 방식으로 그리고 여러가지 이유로 나누고 변형시킨다. 그렇게 하는 한가지 예는 직업에서 발견할 있다. 내가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진한 스킨쉽을 가졌다. 그렇다면 이것은 불륜이라고 해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배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연기를 하고 있는 동안의 나는 내가 아니다. 그것은 대본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직업인으로의 나이며 배우자와 결혼한 나와는 다른 것이다. 

 

또다른 예를 생각해 보자.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 그렇다면 당신은 살인자인가? 하지만 당신이 사형수에게 사형을 집행하는 공무원이라고 해보자. 당신은 사형당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개인적 감정이 없다. 심지어 그를 사랑할 수도 있지만 당신은 직업적인 이유로 명령을 집행할 뿐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살인자가 아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나라는 자아에서 사형집행인이라는 직업인으로서의 나를 분리해 내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당신은 물리적으로는 사람을 죽였다. 하지만 행동을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내가 아니다. 

 

우리는 이제 아주 쉽게 아주 다양한 직업속에서 우리의 자아가 분리되는 것을 눈치 있다. 당신이 쇼핑몰에서 접객을 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이 손님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있는 것은 인사를 하는 사람이 당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레스토랑에서 손님과 종업원이 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역할극이다. 종업원은 어느 정도 종처럼 굴고 손님은 어느 정도 왕처럼 굴지만 그런 자아는 진정한 자아가 아니므로 식당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의 자아는 변한다. 오늘날 이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은 부하직원이나 비서를 자신의 개인적 노비쯤으로 생각하는 몰상식한 인간으로 여겨진다. 현대사회는 이런 역할극들로 가득 있다. 

 

자아의 분리와 변형에는 물리적인 예도 있다. 신경과학자들은 고무손실험이라는 것을 적이 있다. 실험은 피실험자가 있는 탁자위에 고무로 손을 놓고 실험자의 진짜 손은 탁자옆의 보이지 않는 곳에 놓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계속 고무손과 진짜손을 동시에 붓같은 것으로 자극한다. 그렇게 되면 실험자들은 붓이 고무손을 건드릴 때마다 촉감을 느낀다. 물론 실험자들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알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 고무손이며 자기 손이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런 자극이 계속되면 사람들은 시각및 촉감정보때문에 고무손을 자기손으로 착각하게 된다. 피실험자는 자기의 손이 이제 고무손의 위치에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고무손을 망치로 내려치면 피실험자들은 깜짝 놀란다.  

 

비슷한 방식으로 유체이탈같은 효과를 내는 실험도 있었다. 우리가 가지는 우리의 몸이 여기에 있다는 느낌은 생각처럼 단단한 것이 아니다. 이런 실험들을 우리는 우리가 개로 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도 얼마든지 가능할 수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눈에 적당한 시각정보를 제공하고 우리의 몸에 적당한 촉각정보를 지속적으로 제공한다면 우리는 가상현실 속에서 우리의 몸이 개로 변하는 것을 체험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로보트개를 빠른 무선통신으로 원격조정하는 것이 가능해 지는 그다지 멀지 않은 시대가 되면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로보트개가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냐는 질문에 당연히 로보트개의 위치를 말할 것이다.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그렇게 자명한 답을 가진 아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언어의 예도 있다. 일찌기 에리히 프롬은 그의 소유나 존재냐에서 현대인의 언어습관을 논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현대인은 과거보다 동사형을 명사형으로 쓰는 일이 많아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자아를 분열시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면 동사로 표현된 사랑과 나는 분리되지 않는다. 사랑은 본래 내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당신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라던가 당신에게 나의 사랑을 바칩니다라고 말하면 명사형으로 표현된 사랑은 마치 사랑이 나로부터 분리된 물건처럼 느끼게 만든다. 

 

실제로 효과는 누구나 쉽게 느낄 있다. 동사형으로 말하는 것보다 명사형으로 말하는 쪽이 훨씬 부끄럽지 않고 적은 용기가 필요하다. 마치 남의 일을 말하는 것처럼 말할 있다. 이것이 바로 언어 속에 포함되어져 있는 자아의 분열이다. 우리는 유체이탈 화법으로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의 자아에서 분열시키고 있다. 

 

그리고 물론 우리의 자아와 언어의 관계는 이보다 훨씬 깊다. 실상 우리의 자아는 대부분 언어로 이뤄졌다고 있다. 우리의 자아는 우리의 몸이 아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아주 작은 일부이며 특히 미래에는 점점 작아져 부분일 뿐이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자아는 우리가 어떤 권리와 의무를 가졌는가에 대한 우리의 관념에 훨씬 가깝다. 

 

당신은 아마도 한국인이고 어떤 가족의 일원이며, 어떤 직장을 가졌고 어떤 학벌이나 자격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들의 의미는 결국 언어로 표현된 관념들이다. 관념들이 당신의 자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만약 한국인으로서의 자아가 강하다면 어떤 한국인이 패륜적인 행동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당신이 그걸 하지 않았는데도 부끄럽고 화가 것이다. 그걸 일본인이나 나이제리아인이 했다는 말을 들을 때와는 다르다. 결국 우리가 주로 문자라는 벽돌로 쌓아올린 관념들이 우리 자아의 경계선들을 설정한다. 말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어떤 일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커지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의 자아는 실상 끊임없이 확장되고 붕괴되고 있다. 우리의 자아, 사이보그 1 자아는 상당부분 언어로 구성된 관념이다. 

 

모든 예들은 자아라는 것은 유동적이고 분열하는 것을 보여준다. 요즘은 미디어의 발달로 완전히 고립된 시골을 없지만 그런 고립된 시골이 있다고 하자. 그런 시골에서 살던 사람이 도시로 올라온다면 그는 스스로가 바보가 것같이 느낄 것이다. 거의 부족사회처럼 오랜간 같은 관계로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는 나의 자아내지 정체성은 쉽게 변형되지 않는다. 막내 아들은 막내 아들이고 이장은 이장이며 부자는 부자고 가난뱅이는 가난뱅이다. 후배는 언제나 후배다. 모든 것이 고정되어 있다. 

 

하지만 도시는 다르다. 번화한 도시에 올라온 시골촌뜨기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힘들다. 도시의 예절이란 위선에 가득 것으로 보이고 도시 사람들의 말도 허풍과 거짓이 가득한 것같다. 이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여러가지 상황에서 여러가지의 역할극을 수행하면서 복잡한 예절을 지키는 도시 사람의 삶을 시골 사람이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론 시골 사람의 눈에는 위선이고 거짓처럼 보일 있고 실제로도 그럴 있다. 그들의 말들은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개방적인 도시 아가씨가 하는 말과 행동을 기반으로 시골의 총각이 아가씨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일은 얼마나 쉽겠는가. 도시 아가씨는 아마 그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했을지 모른다. 상대방이 축구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알면서도 야구를 한다면 그것은 사기다. 

 

하지만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온 사람이 당황만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훨씬 다채로운 가능성들과 접촉하면서 전에는 자신도 알지 못했던 자신을 찾게 수도 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자기처럼 식물에 정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생각보다 자신이 굉장히 잘생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이 사교적 능력이 뛰어나고 용감하다는 것을 알게 수도 있다. 

 

시골과 도시의 차이가 이런데 지금과 미래의 차이는 어떨까? 사이보그 2 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직업이 하나가 아니라 개가 되고 그를 넘어 다수의 직업을 동시에 가지는 시대에 우리의 자아는 어떻게 분열해 것인가. 완전히 새로운 직업은 어떤 자아를 만들어 가는가. 19세기의 사람들이 21세기에는 유튜버로서 그저 음식을 먹는 것을 보여주는 먹방을 해서 돈을 버는 사람이 있다던가 직업 게이머로서 온라인 게임을 해서 돈을 벌고 존경을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있을까? 

 

사이보그 1 수렵채집을 하던 자연체 인간과는 매우 다른 환경에서 사는 것처럼 사이보그 2 사이보그 1과도 상당히 다른 환경에서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도 인간의 중요성은 감소하기는 커녕 증가할 것이다. 

 

기계의 발달 특히 인공지능의 발달은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에는 인간은 쓸모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수렵채집인들이 문명화된 인간을 보면 자신들이 쓸모없어졌다고 느낄 것이다.  이상 그들의 삶의 방식은 통하지 않고 사이보그 1 되지 못한 그들은 새로운 사회에서 아무 쓸모가 없다고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부심을 가졌던 사냥기술이나 옛날 사회에서의 지위는 이상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수렵채집시대를 끝으로 인간은 멸종했는가? 인간의 가치가 사라졌는가? 오히려 사이보그 1 인간은 번성했고 수가 늘었으며 인간을 세상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문자가 세상을 지배하게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이보그 1이다. 

 

현대인이 사이보그 2 되어야 하는 이유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지식의 누적으로 사이보그 1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에도 인간의 중요성은 증가한다. 다만 인간은 사이보그 2 뿐이다. 사이보그 2 날아오르기를 거부한 사이보그 1들만이 비합리적인 판단의 결과 멸종할 뿐이다. 

 

엄청나게 발달한 듯한 지금의 인공지능은 분명한 한계도 가지고 있다. 개리 마커스와 어네스트 데이비스는 그들의 리부팅 에이아이에서 사람들은 지금의 인공지능을 과다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인간들은 지능적인 것같은 행동을 보면 금방 그런 행동을 하는 기계나 동물이 인간같은 지능을 가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같은 행동을 하는 개체는 내적으로는 매우 다를 있다는 사실을 잊고 행동주의적으로 대상을 쉽게 판단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인공지능은 인간이 가진 상식을 가지고 있지 않고 언어를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구글이 내놓은 시리나 IBM 개발한 인공지능 왓슨은 대단한 성과를 보이는 것같으면서도 한계도 분명히 보이고 있다. 시리는 아직 그다지 쓸모가 없고 왓슨의 진단 서비스도 성과가 별로 없어서 퇴출되는 일이 많다. 

 

지금의 인공지능은 대단하기는 하지만 거대한 데이터를 통계적으로 분석하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어떤 슈퍼지능을 만들던 슈퍼지능을 만드는 기본적 데이터를 생산하는 존재는 주로 인간이다. 인공지능은 앞으로 한없이 인간과 비슷해 지겠지만 인간을 흉내내는 존재는 결코 인간에 도달할 없다.

 

산수는 기계가 인간보다 잘할 있다. 산수는 규칙이 명백하다. 규칙이 명백한 바둑도 기계가 인간보다 잘한다. 하지만 운전은 규칙이 명백하지 않아서 인간의 운전 데이터를 기반으로 인공지능이 운전을 배운다. 그러므로 오직 예기치 못한 상황을 제거한 인공적인 환경에서만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운전할 있다. 

 

단순한 통계적 분석과 세계에 대한 이해는 같지 않다. 과학자만 해도 수없이 많이 존재하는 데이터보다는 예외적인 사건에 주목하는 일이 많다. 그렇게 해서 과학자들은 새로운 이론,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빈도수가 높은 데이터의 영향에 휘둘릴 밖에 없는 딥러닝 알고리즘 같은 것은 소수의 데이터에 주목하는 이런 특징이 없다. 때문에 테슬라의 자율운전 프로그램 오토파일럿은 아주 자주 일어나는 상황에서는 안전한 운전을 있지만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돌발상황에 대처하기 힘들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내적 세계를 가지지 않는다. 기계는 인간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도 없다. 인간의 말과 글은 자신의 내적 세계에 대한 불완전한 표현이다. 물론 기계는 인간의 말과 글을 흉내낼 수는 있지만 인간의 내적 세계를 가지지 않기 때문에 흉내의 한계는 명백하다. 그들이 하는 것은 내적 세계의 불완전한 묘사를 다시 불완전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배우는 기계가 인간없이 홀로 세익스피어가 되고 비틀즈가 수는 없다. 

 

그저 알파벳이 있다고 함무라비 법전이 나오고 세익스피어의 작품이 나오는게 아니다. 우리가 오래된 고전들 안에서 아무리 대단한 인간의 위대성을 발견한다고 해도 글자와 인간이 따로 따로 존재하거나 글자가 인간보다 먼저 인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인간이 참여해서 만든 것이다. 

 

인간이 이제까지 이뤄온 것은 사회적 의미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는 물론 인간의 사회를 말한다. 고전은 그냥 고전이 아니다. 읽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도 우주속에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기에 고전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떤 글이나 책이 중요한 첫번째 이유는 단순히 책을 수없는 사람들이 읽었기 때문이다. 마치 어떤 언어가 중요한 첫번째 이유는 언어를 아주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과 같다. 이런 의미에서 고전은 사람에 의해 집필되었으며 완전히 새로운 내용을 가지고 있던 것이라고 해도 사회적 창작물이다. 누군가의 영감에 의해서 그것이 집필되었건 그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것은 사회가 그것을 알아봐 주었고 사람과 사회가 그로 인해 변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글도 만약 10억명이 글을 읽는 다면 글의 자체의 가치에 상관없이 굉장히 중요한 문화유산이 것이다. 

 

이런 전례를 바탕으로 그리고 우리가 이미 경험하기 시작하고 있는 현시대를 바탕으로 우리는 사이보그 2 시대가 어떤 시대이며 사이보그 2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상상해 있다. 

 

예를 들어 여기 가상의 사건을 하나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노인을 알고 있었는데 노인이 사고로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자. 그걸 여성은 노인의 사연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리고 글을 많은 사람들이 사연을 추천하고 퍼나르게 되었다. 중에는 자동번역을 통해서 외국에서도 소식을 알게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다가 노인을 돕자는 모금운동이 벌어진다. 사방에서 모금액들이 모였는데 중에는 한국돈뿐만 아니라 쇼핑몰이나 포털의 포인트로 만들어 돈도 있었다. 그렇게 빠르게 모여진 돈으로 노인은 다행히 다시 일을 있을 때까지 살아남을 있게 되었다. 

 

언뜻 보면 요즘에는 흔한 별거 아닌 일인 것같지만 생각해 보면  사건은 사실 대단한 것이다. 첫째로 사건의 배후에 있는 것은 물론 페이스북같은 SNS 인터넷이다. 빠르게 소식을 듣고 반응할 있는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달할 있는 기술적 환경이 마련되어 있기에 이것이 가능했다. 물론 이것은 소식의 전달 뿐만 아니라 모금과정에서도 그렇다. 망을 통해서 돈이 쉽게 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기여가 모여들 있는 환경이기 때문에 이런 기부가 쉬워진다. 어쩌면 어떤 사람들은 돈이 아니라 자원봉사나 치료봉사 혹은 물품기여등으로 이런 기부에 참여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데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100원을 기부하기 위해 천원이나 만원을 관리비용으로 쓰게 되어 실질적으로 이런 일을 없다.  

 

두번째는 누구나 그런 소식을 전하기만 하면 돈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정보의 분석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소식을 전한 여성을 우리는 믿을 있을까? 여성은 솔직하게 소식을 전했을지 모르지만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일까? 현재의 상태가 제대로 분석되었다고 해도 지금 어느 정도나 비용이 필요한 것인지 추정할 있을까? 그리고 최종적으로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해도 기술을 모두가 활용하는 것이 아니므로 어떤 방법을 쓰면 돕는게 가능한지를 계획하는 일도 필요하다. 

 

사람들이 망으로 연결되어 유효한 인식과 판단을 하고 의미있는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신뢰가 필요하다. 신뢰란 그냥 믿는 것도 아니고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말도 안되는 일을 해주겠다고 하는데 그냥 덥석 고맙다고 해서는 이런 프로젝트가 인터넷에서 실행될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타인을 믿지 않고 이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것도 어렵다. 결국 시스템과 기술이상으로 소통과 검증을 통해 만들어진 신뢰망이 형성되어 있으니까 이런 프로젝트가 진행가능해 지는 것이다. 

 

이제 대단해 보이는 예를 하나 들어 보도록 하자. 2020 현재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기업이 있다. 바로 테슬라다. 테슬라는 한가지 특징이 있다. 그것은 바로 광고를 하지 않는 자동차 회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테슬라하면 엘론 머스크를 떠올리게 되는데 일론 머스크가 나와서 신제품을 발표하거나 미래 계획을 전달하는 행사가 없었다면 테슬라는 도무지 물건을 없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광고없이 차를 파는 테슬라는 최근 토요타를 제치고 주가총액 기준으로 세계 최대의 자동차 회사가 되었다. 

 

테슬라의 성공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한가지는 바로 테슬라가 위에서 말한 특징때문에 다른 자동차 회사와는 전혀 다른 회사라는 것이다. 테슬라는 다른 회사와는, 특히 다른 자동차회사와는 개방성이 전혀 다르다. 테슬라는 시민들과 망을 형성하고 같이 성장할 것을 주장하는 회사다. 그래서 머스크는 언뜻 보면 기업가가 아니라 시민단체 대표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머스크는 한때 테슬라가 존재하는 이유는 전기차 시대로의 전환이 빨라지게 만들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자동차 회사가 테슬라의 자동차보다 좋은 차를 만든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라는 말을 적도 있다. 그래서 테슬라가 망해도 전기차 시대만 온다면 성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론 머스크가 사업을 하는 방식이란 이렇다. 그는 사람들을 설득할 비전을 제시한다. 우리는 전기차를 타야만 하는가. 이런 전기차가 가능한데 만들면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찬동하는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다. 사람들이 테슬라를 선전해 준다. 사람들이 테슬라를 산다. 그리고 사람들이 테슬라의 주식도 산다. 일론 머스크의 비전에 강하게 공감하는 사람들이 유튜브 방송을 하고 댓글을 다는 등의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테슬라는 망했을 것이다. 테슬라는 일론 머스크 이상으로 소비자나 비전에 공감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성장하고 지켜졌다. 

 

결과 뛰어난 성능을 가졌지만 전기차가 만들어 졌다. 그리고 거대 자동차 회사에 비하면 너무나 작았던 회사가 이제 시가총액으로 세계 1위를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사실 자동차 산업은 생산, 판매, 관리등 워낙 많은 분야가 관련되어 있어서 테슬라처럼 튀면서 혼자 성장할 수가 없는 분야다. 그래서 아주 오랜동안 사람들은 테슬라가 자동차를 만든다고 때마다, 예를 들어 모델 S 모델 X 모델 3 만든다고 때마다 자동차는 실제로는 판매되지 못할 거라는 예측을 하곤 했다. 그리고 그들의 예측은 매번 틀렸다. 

 

테슬라의 뛰어난 성장은 기업환경의 변화를 느끼게 만든다. 테슬라는 클라우드 펀딩으로 돈을 모아다가 제품을 만든다는 아주 작은 중소기업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기업을 하는데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되었다. 사실 테슬라 이전에는 애플이 있었다. 애플도 스티브 잡스를 내세워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되었다. 

 

가난한 노인을 돕기 위한 페이스북에서의 프로젝트와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는 너무나 스케일이 다르다. 하지만 나란히 놓고보면 상당한 유사점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발견하게 된다. 무엇보다 기술이 전부가 아니며 인간간의 신뢰가 중요하고 그러기 위해 개방성이 요구된다는 점이 명백하다. 

 

중요한 것은 이런 프로젝트들은 유명인이 관련되기도 하고 유명인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학벌이나 직함같은 기성사회의 딱지가 핵심적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기억할지 모르지만 저런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로 망에서 이력을 쌓는다. 예를 들어 프로젝트에서 홍보나 번역에 기여를 했던 사람은 다른 프로젝트가 생기면 도움을 요청받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때문에 두번째나 세번째 프로젝트는 훨씬 쉽게 커질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들은 공유경제 사업같은 것을 하는 기업을 만들지도 모른다. 

 

일론 머스크는 세계에서 손가락에 드는 부자고 유명인사지만 그는 유튜버를 기꺼이 만날지 모른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티비 광고를 중심으로 사업을 하지 네티즌을 상대로 대화하는 것에 주력하지는 않는다. 

 

사이보그 2 시대는 망으로 연결된 인간과 기계가 전과는 차원이 다른 데이터 처리 능력으로 하나의 슈퍼지능을 가진 시스템이 되는 시대다. 우리는 망의 시대를 이제 겨우 시작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망은 지금 이순간에도 빨라지고 커지고 있으며 무엇보다 크고 작은 프로젝트들을 실행하면서 자기 테스트를 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들은 마치 하나의 뇌에서 신경세포들이 서로에게 연결되듯이 많은 연결방식으로 연결되면서 조직화되고 조직은 조직의 기억도 가지게 것이다. 

 

사이보그 2 시대에 사업의 의미와 방식은 변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머스크가 테슬라의 창업자가 아니고 투자자일 뿐이며 앞에 나와서 머스크가 떠든다고 해서 테슬라가 성장하게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비슷한 이야기가 애플의 스티브 잡스에게도 있었다. 스티브 잡스가 컴퓨터를 만들고 디자인을 하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상업의 중요성을 모르고 농민이 천하의 근본이라고 말하던 조선시대 사람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기업이 없고 상업이 없는데 오늘날 농민들이 물건을 팔고 생산할 있을까? 기술이나 지식이 궁극적인 상품의 내용이라고 해도 그것들이 합쳐지고 발달하게 만드는 것은 망이고 비전이다. 지금도 농업은 중요한 산업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하지는 않다. 마찬가지로 망의 시대에 가장 원천적인 기술이나 지식을 생산하는 사람 노벨상 수상자들 같은 사람은 중요성이 지금보다 떨어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있는 기술들을 조합하는 , 그리고 없는 기술들에 투자해서 개발하게 하는 판단이다. 

 

지금도 우리는 상온핵융합이나 인공지능 그리고 수소차나 그래핀같은 여러가지 신기술에 대한 뉴스를 듣는다. 그들이 우리나라 나아가 세계를 구원할 거라는 과장된 말도 듣는다. 물론 그런 신기술들을 연구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은 매우 매우 전문화된 지식에 대한 것이다. 우리 시대에 그런 것에만 신경쓰는 것은 농업이 천하의 근본이라는 말에 매달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상을 구할 진짜 힘은 망으로 연결된 사이보그 2들이 만들어 내는 슈퍼지능에서 나온다. 슈퍼지능이 없이는 뛰어난 신기술은 기름을 팔아서 돈을 버는 산유국이 정치적으로는 후진국일 있듯이 오히려 독이 있다. 슈퍼지능은 훨씬 방대한 데이터와 지식을 다루는 것이다. 슈퍼지능은 조직화된 시민이다. 조각나고 전문화된 지식은 거대한 사회적 조류앞에서 무력하다. 

 

이미 약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채렵수집을 하던 인간이 사이보그 1 시대에 겪은 일처럼 학벌이라던가 국적같은 사이보그 1 시대의 증명서는 사이보그 2들이 성장함에 따라 힘을 잃어가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연결이고 창의력이다. 사이보그 2 사이보그 1 보면 불가능해 보인다고 상상을 마법과 같은 능력으로 현실화시킨다. 예를 들어 사이보그 1 화성으로 우주여행을 떠나지 못했지만 사이보그 2 화성을 개척할지도 모른다. 사이보그 1 돈을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에 따라 살았지만 사이보그 2 데이터가 기반이 되는 우리가 없는 세상에 것이다. 수렵 채집인과 추상화된 세계의 사이보그 1 다른 가치관을 가지듯 사이보그 2 지식이 아니라 데이터에 기반한 사회에서 급격한 추상화의 증가로 인해 사이보그 1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대답의 답은 변화끝에 양극화될 것이다. 사이보그 1 사이보그 2 대답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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