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燕山君) 1476~1506


울이 지나가고 봄을 맞게 되어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雨水) 이자 정월 대보름 날 

대구에도 고운 비가 내리는데 오랜만에 역사서(歷史書)를 써 본다.. 

이면 날씨가 많이 풀려 봄기운에 초목이 싹이 트고 

우리 선조(先祖)들은 우수가 되면 수달이 물고기를 잡아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또 기러기가 시베리아로 찾아가고, "우수 경칩이 되면 우주 만물이 소생한다.” 하였으니 

엄동에서 그렇게 기다려온 봄이건만, 희뿌연 황사와 미세먼지가 봄바람 타고 날아드니 

꽃비라도 내렸으면 좋겠다.


꽃비내리는 날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조선조 연산일기에는 연산이 꽃비를 소재로

 한 시가  있다. 피의 역사를 써 내려간 그의 악심에도 순수한 열정은 있었는 지 

외롭고 아픈 과거가 숨겨진 그의 회문고시(回文古詩)에 꽃비의 노래가 나온다. 


방수토화홍과우(芳樹吐花紅過雨)

연산군(燕山君)


방수토화홍과우(芳樹吐花紅過雨)-아리따운 나무 꽃을 토하니 비가 붉은 꽃비 되어 내리고


입렴비서백경풍(入簾飛絮白驚風)-버들솜털 날아들어 희고 고운 꽃바람 되어 춤을 추네


황첨효색청서류(黃添曉色靑舒柳)-누른빛은 새볔따라 버들잎에 푸르게 퍼지고


분락청천설복송(粉落晴天雪覆松)-꽃분이 하늘을 맴돌다 눈처럼 솔잎에 쌓이는구나.


연산은 폭군이지만, 시인이었다. 

한시중에도 고난도의 작품으로 일컬어지는 회문고시(回文古詩)를 잘 썼다.

회문시란 위에서 읽거나 아래에서 읽어도 뜻이 잘 통하는 시(詩)를 말한다.


조선 최고의 폭군으로 악명 높은 연산군은 성종의 맏아들로 세자로 책봉 워낙

성품이 포악하여 왕으로 등극하면서 어머님 폐비 윤씨가 성종의 후궁 정씨(鄭氏)

엄씨(嚴氏)의  모함으로 내쫓겨서 사사(賜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정씨 소실 안양군(安陽君) 봉안군(鳳安君)을 살해하는 등 갖은 포악한 짖을 다했다'

 

본래 성종에게는 정실소생으로 11대 왕인 중종이 있었으나 1483년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 될 때는 중종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의 무도함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세자로 삼았다고 한다.

연산군 재위기간 중 두 번에 걸쳐 무오사화(戊午士禍)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엄청난

사류(士類)를 죽였다.

 

무오사화(戊 午 士 禍 1498년)

 

1498년 김종직(金宗直) 김일손(金馹孫)등 신진 사류가 훈구파 유자광(柳子光) 이극돈(李克墩)에 의하여 화를 입은 사건(事件) 사림파가 중앙 관가에 등용하기는 성종 때 김종직(金宗直)이었다. 

그는 임금의 신임을 얻어 자기 제자들을 많이 기용 주로 3사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에 만연한

 세력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종래의 벌족인 훈구파를 욕심 많은 소인배라 하여 무시하기 시작했고 ,

훈구파는 사림파를 야생귀족(野生貴族)이라 하여 업신여기게 되니 이 두 파는 주의 사상

자부하는 바가 서로 달라 배격과 반목이 크다.

 

사림파의 김종직(金宗直)과 훈구파의 유자광(柳子光)은 사이가 좋지 않았고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과 훈구파의 이극돈 사이에도 틈이 생겨 때마침 1498년(연산군 4년) 성종실록이

편찬되자 당상관이 된 이극돈(李克墩)은 호조참판 암행어사로 유명한 김종직의 처남 

매계 조위(梅溪 曺偉)와 김일손(金馹孫)이 기초한 사초에 삽입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

이라는 글은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것이라며 이것을 문제 삼아 

유자광과 더불어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에 고해바쳐 연산군은 김일손 등  

심문하여 우선 이 일의 죄악은 모두 김종직(金宗直)이 선동한 것이라며,

 

이미 죽은 김종직의 시체를 파내어 목을 베었고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

 이목(李穆), 허반(許盤) 등은 간악한 파당을 지어 선왕을 무록(誣錄)하였다는 죄를 씌워

죽이고 정여창(鄭汝昌), 강경서(姜景徐), 이수공(李守共), 강겸(姜謙), 표연말(表沿沫),

홍한(洪澣), 정희량(鄭希良), 정승조(鄭承租) 등은 난(亂)을 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귀양을 

보냈으며,

이종준, 최부, 이원,이주, 김굉필, 박한주, 임희재, 강백진, 이계맹, 강혼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 삽입을 방조했다는 이유로 역시 귀양을 보냈다.

 

한편, 이세겸, 이극돈, 유순, 윤호손, 김전,등은 수사관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파면당했다.

이리하여 사화의 단서가 된 이극돈은 파면되고 유자광 만이 그 위세를 더하여 감히 그의

뜻을 어기는 자가 없게 되고 사림은 모두 사기를 잃었다.

이 사건은 4대 사화중 제일 첫 사화(士禍)로 사초 문제로 발단 되었다고 해서 사화(史禍)

라고 쓴다.

 

갑자사화 (甲子士禍 1504년)

 

1504년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복위(尹氏復位) 문제로 연산군이 일으킨 사화 성종비 윤씨는

질투가 심하여 왕비의 체모에 벗어난 행동을 많이 하였다.

 

1479년 윤씨를 폐하였다가 다음 해는 사약을 내려 죽였다. 연산군은 임사홍(任士洪)의

밀고로 그의 어머니가 내쫓기고 죽게 된 경위를 알고 성종의 후궁 엄씨, 정씨 두 숙의를

죽이고 안양군도 죽였다.

 연산군의 포악한 행위를 꾸짖던 인수대비(연산군조모)는 병상에서 연산군에 맞아 죽었다.

연산군이 윤씨를 왕비로 추숭(追崇)하여 성종 묘에 배사코자 할 때 이에 반하여

 권달수(權達手)는 처형되었고 이행(李荇)은 귀양을 갔다.

 

또 윤씨 페사에 찬성했던 윤필상(尹弼商), 이극균(李克均), 성준(成浚), 이세좌(李世佐),

권주(權柱), 김굉필(金宏弼), 이주(李胄)등 10여 명이 사형 되었고 ,

한치형(漢致亨), 한명회(韓明澮), 정창손(鄭昌孫), 이세겸(李世謙), 심희(沈嶒), 이파(李坡),

정여창(鄭汝昌), 남효은(南孝溫) 등은 

부관참시(剖棺斬屍)에 처 하였으며 이들 가족에게도 벌을 주었다.

연산군은 이 두 사화 외에도 패륜적(的) 행위는 서섬치 않았다.

 

문신들의 직간이 귀찮다는 이유로 경연을 없애  학문을 멀리하였고 사간원을 폐지 해서

언로를 막는 등 온갖 상소와 상언 격고등 여론과 관련된 제도들을 모두 중단시켜 버렸다.

 

이처럼 쇠락의 길을 자초하는 정치는 극에 달했다.

이런 폭정 결과 그는 국민의 저항을 받는 희대의 폭군으로 인식되었고 결국 1506년

 성희안 박원종 등이 1506년 9월 중종반정으로 패왕이 되어  연산군으로 감봉이 되고

 강화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11월 31세에 병사하였다.

 

연산군의 묘소는 강화도 교동에 묻혀 있던 것을 도봉산 자락 방학동 77번지로 이장하였다.

 

                                                사적 362호 지정  

 

 

 

연산군(燕山君)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만년에는 더욱 황음무도(荒淫無道)하고 패악한 나머지 학살을 마음대로 하고 대신들도 

많이 죽여서 시종 가운데 남아난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담금질 하기 가슴 빠게기 토막짜르기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의 형벌까지

있어서, 라고 적혀있다.


연산(燕山)은 포악한 폭군이지만 연산의 묘소가 남아있으니 그 또한 역사(歷史)인가 보다.


                                    2019년  2월 일

昔暗 曺  憲 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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