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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알고자 하면, 니체를 고찰하라.

작성일 작성자 jamie

Über-Nietzsche 

When thinking about happiness, consider Nietzsche

Published on August 22, 2010

브라운대 사회심리학자 요아힘 크루거의 글.



현대 심리학에 끼친 니체의 영향은 미미하다.  이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니체는 막연히 프로이드 정신분석학,

실존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등 기존의 사고체계를 무너뜨리려는 모든 사상의 선구자로 기억되고 있다.  그것은 마땅히 그럴만한 일이다.


현대 심리학은 행복과 도덕에 관한 연구에 다시 관심을 쏟고 있다.  니체는 이들 주제-특히 도덕에 관해 할 말이 많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니체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그의 저서는 19세기의 유럽, 특히 독일의 문화사에 낯설은 요즘 사람들이 쉽게 읽히는

내용이 아니기에, 양심상 니체의 작품집을 다 읽어보라 권하지는 못 하겠다.  하지만 니체가 만년에

쓴 글에 속하는 <도덕의 계보에 관하여>는 필독을 권한다.  이 책은 비교적 명료하고 (즉 다른 니체의 작품보다 덜 경구적임) 주제에 충실하다.  도덕에 관한 글은 다음편에 기고한다.

 

행복에 관해 생각해보자.  나는 쥴리안 영이 지은 니체의 훌륭한 전기로부터 사고를 풀어나가려 한다.  쥴리안 영은 니체의 사상 및 그의 사고의 진전을  니체의 인생사적인 문맥에서 되살려내고 있다. 

영의 설명에 의하면 니체는 어둡고 악마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간적인, 말 그대로, 참으로 인간적인 모습을 지닌다.


현대 심리학에는 행복에 관한 두 개의 학파가 있다.  첫번째 학파에 의하면, 행복이란 인간경험에

본질적인 것이다.  행복은 측량될 수 있고 극대화될 수 있다.  이 학파에서는 얼마만큼의 행복이

개인의 지배하에 있는지, 또한 더 많은 행복을 누리기 위해 정확히 무엇을 하면 되는지에 관해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두번째 학파에 의하면, 행복은 측량하기 힘들고 예측하기는 더더구나

힘들다, 특히나 자기 자신의 행복에 관해서는.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은 댄 길버트(하버드대

사회심리학 교수. Stumbling on Happiness라는 책을 씀)의 말대로 행복과 운좋게 마주치는 일일

것이다.  어떤 나라의 언어(일례로, 독어)는 행복과 행운간의 유대관계를 이해한듯, 행복과 행운에

같은 단어를 쓴다.


니체의 견해는 두번째 학파와 맥락을 같이 한다.  니체는 행복이란 패라독스(역설)에 민감했다고

쥴리안 영은 쓴다.  그 패라독스란, 행복을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이  행복을 창조하고자 온갖 노력을 하여도 행복해지기란 극도로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행복이 어떤 목적이나 행위에

부수적인 것이라면, 사람의 노력은 바로 그 목적이나 행위에 부어져야 한다.  니체의 해법은,

인간이 취득한 행복의 총량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인간의 삶이 일관된 정도에 의해 인생을 평가하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일관된 삶이란 가장 중요한 목적이나 임무에 헌신하는 것이며, 이 목적을

향한 개인의 행동이 적어도 그 자신의 주관적인 관점에서는 영웅적 행위로 해석되는 것이다. 

쥴 리안 영은 니체가 생각하는 일관성있고 영웅적인 삶의 본보기가  이태리의 애국자 Giuseppe Mazzini (1805 - 1872)였다고 밝힌다.  마찌니는 수많은 고난 끝에 자신의 염원이었던 이태리의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니체가 강력히 주장하던 것처럼 마찌니도 유럽 통일의 주창자였다는 것은 우연이라 하기에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 같다.



'인생--목적'이 라는 가설에 대해 두 가지로 해석해볼 수 있다.  첫번째 해석은 마찌니처럼 원대하고 숭고한 임무를 택하는 것이 개인의 이익을 극복하고 보다 큰 대의를 위한 헌신속에서 삶을 살아내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산다면 그 목적을 향한 헌신에 사심이 없어지고 나아가서 이타적이 될

것이다.  이런 자아의 상실에서 행복이 올 것이다.  나로서는이런 해석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니체가

염두에 두었던 것이 아니라 생각된다.  만약 행복이 궁극적으로 경험되어지는 것이고, 또한 부수현상으로만 오는 것이라면, 결국에는 자아가 도로 제 자리로 찾아들 것이기 때문이다.  두번째의 더욱

그럼직한 해석은 원대하고 숭고한 임무를 받아들여 그런 임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듬으로써, 커다란

사회 (일례로 이태리)의 이해가 나라는 개인의 이해와 합쳐지게 하는 것이다.  쥴리안 영은

인간 니체와 니체의 철학이 자기중심적(egocentric)이지 않음을 거듭 강조한다.  위와 같은 상태에서의 집요한 이기심의 추구나 개인적 성취를 위한 노력은 결국 사회를 향상시키기 때문이다. 


이제 핵심은 영웅적 행위를 수반하는 개인적 임무를 어떻게는가...이다.  니체는 안성맞춤의 방법을 제시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런 방법이 있을리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위대한 임무라는게

현실적으로 극히 드물다는 것을 간과하지 않았다.  니체의 철학이 귀족적인 철학이었음을 우리는

안다.  우수함, 혹은 덕은 필연적으로 드물기 마련이다.  모든 인간이 최상일 수는 없다.

.

가치있는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자아 실현의 지름길이다.  20세기 심리학자들이 출현하기 훨씬 전에, 이미 니체는 "인간이 되는 것,"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인간의 삶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규정했다.  두 가지 해석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면:  첫째, 참되고 진정한 자신은 개인안에 존재하며

해방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둘째, 참된 자아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  참된 자아는 노력해서 건설하는 것이다.  니체의 철학을 못마땅해하던 버틀랜드 러셀조차도 니체의

이런 견해에는 동조했다.  마음의 평안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행복의 추구와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다.



고대 그리이스인들에게서 보이듯, 니체는 일종의 균형감각을 지니고 있다.  만약 행복이란 것이 영웅적인 행위에 의해서만 얻어지고, 또한 그 행복감이 부수현상으로만 파생된다면, 그것은 인간을 위해

참으로 어두운 설정이다.  그리하여 니체는 훨씬 쉽고 느싯한, 마치 캘리포니아의 태양아래 사는 듯한 차선의 방법을 제시한다.  정원에 앉아서, 올리브 열매, 치즈를 씹고 와인을 마시며 친구들과 담소하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에피쿠로스(쾌락을 중시한 그리이스 철학자)에 의하면 이것이 행복이고, 그것은 전혀 나쁜 일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다.  영웅이 되어야만 행복한 것은 아니다.  이 글을 쓰다 생각하니, 이제 나도 친구들과 영화나 한 편 보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야겠다.  오늘 하루를 위한 투쟁은 충분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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