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94주년 맞아
- 애국지사들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을 기리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국내외 애국지사들 사이에서는 독립운동을 확대해 일제의 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고, 빼앗긴 국권을 되찾아 나라의 자주독립을 이루자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상해(上海), 한성(漢城), 노령(蘆嶺) 등 7개의 임시정부가 국내외에 수립됐다. 각 도 대의원 30여 명은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했다. 이어 가장 많은 독립지사가 집결해있던 상해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합해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선포됐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행정수반인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추대하고,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에 김규식, 군무총장에 이동휘, 재무총장에 최재형, 법무총장에 이시영 등을 임명했다. 또한 국내외 동포를 모두 관할하기 위한 기구로 통신담당 기관인 교통국과 비밀연락망 조직인 연통부를 두고 군자금 모집, 국내 정보수집, 임시정부 문서 국내 전달, 독립군 발굴 및 무기수송 등의 활동을 했다.

이와 함께 일제의 침략사실과 대한민국 역사의 우수성을 설명하기 위해 1921년 7월 사료편찬부를 설치하고 전 4권의 <한일관계사료>를 간행했으며, 기관지로 <독립신문>, <신대한보>, <신한청년보> 등을 발행해 국내외에 독립정신을 널리 알렸다. 아울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정부조직으로서 미국, 중국 등을 대상으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했으며, 재정 확충을 위해 인두세를 걷고 국내외 공채를 발행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부>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기 무장 독립투쟁은 만주의 독립군 단체들을 측면 지원하는 수준에 머물렀으나, 1931년 10월 김구가 한인애국단을 결성한 이후 이봉창, 윤봉길 등의 잇단 의거로 대한민국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게 됐다. 또한 1940년에는 한국광복군을 창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얀마, 사이판, 필리핀 등지에 파견됐다.

1945년에는 국내 진입작전의 일환으로 국내 정진군 총 지휘부를 설립하고 미국의 OSS부대와 합동작전으로 국내에 진입, 독립운동을 펼치려던 계획을 진행하던 중 8·15광복을 맞았다.

광복을 맞이하자 중국에 체류 중이던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부는 귀국준비에 들어갔다. 국무회의 명의로 당면정책 14개조를 발표, 임시정부 지도부 입국·각계 대표자회의 소집, 과도정부 수립 전국 보통선거 실시 정부 수립 등의 정부출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정통성을 주장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자격으로 귀국하길 원했던 지도부는 미 군정청의 반대로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는 비운을 맞았다. 나라 안팎의 혼란한 시국으로 인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책과 내각은 계승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숭고한 지도이념이었던 자유주의와 삼균주의(三均主義,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에 완전한 균등을 위해 정치·경제·교육적 균등을 실현해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정치사상) 이념은 1948년 대한민국헌법에 반영돼 광복 대한민국의 기초이념이 됐다.

또한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여…’라고 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대한민국 건국의 정신적·사상적 기반이 됐음을 명시했다. 이를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13일,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서울 효창공원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기념일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하나씩 올라가 봐야겠습니다.

임시정부 기념일 관련 바로 잡아야할 부분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nurimedia0&logNo=4020502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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