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달동

[스크랩] 일제 강점기 일제 맞전 열혈 열사님들 무장 독립군

작성일 작성자 김종일
  • 일제 강점기 일제 맞전 열혈 열사님들 무장 독립군
  • 어린 시절 나폴레옹을 꿈꾸다 김경천(金擎天, 1888.6.5~1942.1.2) 선생의 본관은 김해이며, 본명은 광서(光瑞)이다. 서울에서 1888년 6월 5일 출생하였으며, 본적은 서울 사직동 166번지이다. 선생의 어릴 때 이름은 현충(顯忠)이다. 부친은 김정우(金鼎禹, 1857-1908)이며 어머니는 윤옥연(尹玉蓮)으로, 5남 1녀 중 막내아들이었다. 선생의 아버지 김정우는 갑오개혁 발발 이후인 1894년 11월 경무청 총순서 판임관(警務廳 摠巡敍 判任官)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895년 5월 당시 35세의 만학의 나이로 일본에 유학하여 경응의숙에 입학, 동년 11월 21일 경응의숙에 입사(入社)하였다. 부친은 군기(軍器)에 대한 전문가로서 구 한국육군의 최고위층의 인사였다. 선생은 부친의 영향을 받아 군인이 되고자 하였던 것 같다. 특히 어려서부터 나폴레옹을 흠모하였다고 전한다.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을 존경하였던 점도 있지만 선생의 집안이 무인 가계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이러한 데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군인이 되고자 하는 꿈을 이루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손자녀들이 작성한 [김경천에 대한 회고]에서도, 그런데 그의 경우 이를 위해서는 멀리 나갈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증조부, 부친, 숙부가 병조판서를 지낸 무인의 가계였기 때문이다. 그의 형들 역시 모두 장군이었다. 정말 한 가족에 있어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김경천은 집안의 다섯 번째 장군이었다고 했다. 바로 이러한 생의 열망으로부터 김경천은 일본어를 철저하게 익히면서 지원자들에 대한 면밀한 심사에도 불구하고 일본육사에 입학하였다. 정말 당시의 경쟁률은 100:1이었다. 라고 했듯이 선생은 결국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는 꿈을 이루었다. 선생은 1909년 12월 한국인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육사 제23기생으로 입학하여 1911년에 졸업하였다. 일본육사에 진학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부친 김정우가 일본에서 유학한 군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육군사관학교 재학시절 군사교육뿐만 아니라 중국어, 러시아어 등 어학도 교과과정에 편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교육은 훗날 선생이 일본의 전략, 전술, 일본인의 심리상태 등을 이용하여 보다 효과적인 투쟁을 전개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을 키워내다 1911년 5월 육사를 졸업한 선생은 동경 제1사단 기병 제1연대에서 근무하였다. 그 때문에 육사 26ㆍ27기 후배들과 자주 접촉하게 되었다. 1916년 12월 26ㆍ27기생 가운데 홍사익(洪思翊), 이응준(李應俊) 등 동경 제1사단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장교들이 발기인이 되어 친목단체인 전의회(全誼會)를 만들었을 때 선생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3·1운동이 일어난 직후까지 회지를 발간하여 동창 상호간의 친목을 돈독히 하는 한편, 회원 소식을 알려주기도 하였다. 선생에게 결정적으로 마음의 변화를 준 것은 동경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2·8독립선언이었다. 시베리아로 인터뷰를 하기 위해 찾아 온 <동아일보>(1923년 7월 29일자) 기자와의 면담에서 선생은, 일천구백십구년에 전무후무한 세계적 회의가 열리고 각 약소민족에게도 권리를 준다 함에 우리 동경유학생이 독립운동의 첫소리를 발하였소. 이때 나는 동경에서 사관학교를 마치고 일본육군기병 제1연대 사관으로 있을 때이라. 꿈속같이 기쁜 중에도 불 보듯 하는 마음을 참을 수 없었소. 그리하여 병으로 수유를 얻어가지고 이월 이십일에 경성에 도착하니 도처에 공기가 이상스러웠소. 라고 하여, 2·8독립선언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그 영향으로 병을 칭하고 서울에 돌아왔음을 밝히고 있다. 이때 육사 3년 후배인 이청천과 이응준도 귀국하였다. 이들은 매일같이 사직동에 있는 선생의 집에 모여 나라의 일에 통분을 나누기도 하고, 자신들의 갈 길에 대하여 토론도 하였다. 그리고 국외로 탈출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자고 결의하였다. 김경천 선생 보도기사,<동아일보> 1923년 7월 29일자“빙설(氷雪) 쌓인 시베리아[西伯利亞]에서 홍백전쟁(紅白戰爭) 한 실지 경험담(實地 經驗談)”이라는 제목으로 선생의 간단한 이력과 러시아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을 벌인 일을 자세히 보도하고 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만주로 망명하기로 결심한 선생은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표면적으로는 당구를 치고 밤에는 술집을 드나들면서 헌병대의 눈을 속였다. 사전에 철저한 계획 하에 만주로 탈출하기 위한 시나리오에 따르는 주도면밀함을 보였던 것이다. 1919년 6월 초 만주로의 망명 기회를 잡은 선생은 평양에 있던 이응준에게 연락하였다. 그러나 이응준은 일정 및 코스의 변경으로 함께 가지 못하였다. 1919년 6월 6일 선생은 이청천과 함께 만주로의 망명을 단행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동아일보> 기자와의 면담에서 보면, 그러더니 삼월 삼일에 독립선언이 터지니 이때 우리 군의 몇 사람은 장래 조선민족이 독립운동을 하자면 아령과 남북만주를 중심 삼지 아니하면 아니되리라 하고 동지 이청천과 함께 협의하고 국경을 넘으려는데 당시 경계가 심할 때이라. 잘못하다가 잡힐 염려가 있으므로 6월 6일에 우리 두 사람은 군복을 벗고 보통양복을 갈아입은 후 자동차를 타고 수원을 갔었소. 그리하야 수원에서 차를 타고 그대로 남대문으로 오니 해가 지고 어둡디다. 그대로 신의주까지 와서 자는 데 밤중에 경찰의 조사가 있으므로 그 밤을 자지 못하고 처음에는 일인이라고 대답한 후 정거장에 가서 차를 타고 국경을 넘었습니다. 라고 하여, 장래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만주와 러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인식하였던 것 같다. 이들의 망명은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3·1운동 후 많은 한인청년들이 만주로 망명하게 한 도화선이 되었다. 또한 이들은 현역군인이었으므로 피체될 경우 군법회의를 통하여 사형에 처해졌을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명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이는 일본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군은 이들의 체포에 혈안이 되어 현상금 5만엔을 내걸었다.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일단 신의주 맞은편 안동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한독립청년단 단원들과 함께 1919년 8월에는 안병찬 외 28명의 연서로 ‘중화민국 관상보(官商報) 학계제군에게 고함’이란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에서는 민족의 요구가 국제연맹 회의에서 원만한 해결을 얻지 못하면 혈전을 도모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한중연합을 강조하며 한중공수동맹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한독립청년단의 활동도 동년 8월 총재 안병찬의 체포 이후 세력이 약화되자 크게 위축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선생은 보다 효율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서간도 유하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이청천과 함께 독립군을 양성하며 시기를 엿보았다. 이 학교에는 구한국군관학교 출신인 신팔균(申八均)도 있었다. 세 사람은 조국을 위해 투쟁할 것을 맹세하고 맹세의 뜻으로 다 같이 천자(天字)가 붙은 별호를 가지게 되었는데, 동천 신팔균, 경천 김광서, 청천 지석규(池錫奎)라고 했으며, 이들을 남만주 3천이라고 하였다. 그때 장길상이 배천택을 시켜 5만원이라는 거금을 군자금으로 보내오자 이 돈을 3인이 공동관리하며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1920년 3월 1일을 기하여 국경지대인 자성, 후창, 또는 혜산진 중 어느 한 곳을 점령해서 국내에 3·1운동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정신적 자극을 주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신동천은 남만주 한인사회의 지원을 얻기 위해, 이청천은 상해임시정부와 연락하기 위해, 그리고 선생은 노령으로 무기구입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각각 이동하였다. 한편 노령지역으로 이동하던 선생은 우선 중간 기착지로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북간도를 택하였다. 단신으로 북간도로 간 선생은 그곳에서 동지들을 규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방파벌간의 갈등으로 정착하지 못한 선생은 러시아 연해주지역으로 재차 이동하였다. 러시아를 누비며 ‘김장군’으로 활약하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선생은 그곳에서 독립운동의 기회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일본군의 감시와 조선인 체포가 심해 활동을 전개하기 어려웠다. 이에 선생은 산림지대인 수청지역으로 이동하여 산림 속에 일단 피신하였다. 처음에는 수청지역의 창해청년단에서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면서 수청지역의 마적소탕에 전력을 기울였다. 결국 선생은 1920년 수청지역에서의 마적퇴치활동으로 시베리아지역에서 큰 명성을 얻었고, ‘김장군’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경천아일록] 중 일부. 김경천 선생이 회고록과 일기형식으로 선생의 생애를 기록한 글이다. 1921년 봄 연해주 수청군 인접지역인 올가군에서 3백여 명에 달하는 통합빨치산 부대가 조직되자 선생이 지도자가 되었다. 선생은 수청의 아누치노(도비허) 구역에 있는 백군 까벨 부대와 전투를 벌였다. 또한 까르뚜크 마을의 치열한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수청 다우지미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생은 1921년 초 수청고려의병대에 초빙되어 군대의 총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수청의병대의 지도자가 된 선생은 계속해서 수청지역의 마적 퇴치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동아일보> 1923년 7월 29일자에 보도되고 있듯이, 수청의병대는 1921년 여름 러시아 적군 사령관의 도움으로 의복을 지원받고 수청지역에서 횡행하는 마적들을 소탕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1921년 8월 수청의병대는 연해주에 있는 적군과 무장연합을 추진하였다. 당시 러시아 적군과 한인독립군간에 공동의 적은 일본군대였다. 수청의병대에서는 부대장 이철남을 아누치노로 파견하여 연해주 무력혁명위원회 위원장 월스키와 부위원장 룹쪼브를 만나 무장부대 연합회담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상호간에 연합할 것을 합의하였다. 1921년 10월 선생의 부대는 러시아 적군과 연합하여 수청에 주둔한 백군을 공격하여 수청 신영동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패하여 일본군과 백군의 추격을 받게 되자 선생은 기병을 데리고 이만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피눈물 나는 이만으로의 이동상황을 선생은 <동아일보>에서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때 우리는 적군과 행동을 같이 하였으므로 백군이 조선군이라고 만나기만 하면 죽일 때이오. 이때 연해주에 적군이 전멸함에 다시 쫓기어 돌아가는데 강낸이죽을 먹어가며 겨울에 박착을 하고 이만 강가으로 이백리를 행군하여 가쏘. 그래서 필경 어떤 산에 가서 얼음과 눈으로 요새를 만들고 지키고 있으니 만일 이때 일본군이나 백군이 들이치면 배산일전하려 하였소. 이만으로 이동한 선생의 부대는 1922년 정월 이만에서 백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적군의 사령관이 백군에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말을 타고 비 오는 듯한 포탄을 무릅쓰고 수청의병대와 더불어 러시아 적군도 함께 지휘하여 이만을 점령하였다. 선생의 지휘 아래 2백여 명의 군사로 백군 7백 명이 지키는 이만을 점령한 것은 러시아 지역에서 전개된 한인 민족운동사상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숫적 열세와 배후의 일본군 때문에 이만에서는 전략상 퇴각하고 말았다. 이어 선생은 1922년 3월 러시아 적군과 연합하여 약골리가를 공격하였다. 이에 러시아 백군은 우수리스크 쪽으로 쫓겨났다. 백군이 한반도 쪽으로 퇴각할 듯 보이자 선생은 이들을 추격하기 위하여 일본군의 경계선을 뚫고 추풍 지역으로 돌격하였다. 선생은 당시의 상황을 <동아일보> 1923년 7월 29일자에서 “이것은 범의 허리를 밟고 지나가는 듯한 장쾌한 모험이었소”라고 하고 이어 당시의 상황을 “불빛에 뻔히 비치는 일본 보초병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흰말을 포장으로 덮어서 데리고 강을 건너는데 강에 배가 없어서 어찌할 수 없었소. 마침 19세 먹은 소년 기병 1인이 자원하고 강 위에 가로 질린 철사에 매어 달리어 십여 간이나 되는 강을 건너가서 배를 가지고 와서 전 군대를 건너게 하니 이 때 발각만 되면 몰살이라. 더욱 소년을 구사일생의 경우에 보내고 매우 염려되었었소. 건너간 후 그 날 밤으로 취풍 우리 독립군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소”라고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선생이 이처럼 승리를 거두게 되자 1922년 7월 연해주의 혁명군사위원회는 선생을 포시에트 군사구역 조선 빨치산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1922년 9월 경에는 포시에트로 이동 중 상부 시지미촌에서 백군 패잔병들과 전투를 전개하였다. 수청의병대는 선생의 지휘 아래 기마 공격을 강행하였고, 승리하였다. 1922년 러시아와 중국 국경지방에 있는 단체는 각 단의 통일을 도모하는 동시에 장정의 모집과 무기의 수집에 힘써 1922년 10월 일본군의 철퇴가 완료되기 직전에 고려혁명군을 조직하였다. 고려혁명군 총재는 이중집(李仲執)이며 소재지는 추풍이었고, 고려혁명군 동부사령관을 선생이 담당하였으며 본부는 그의 근거지인 수청에 두었다. 광복을 보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숨을 거두다 1922년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자 1922년 12월 말, ‘조선인 유격연합대 해산 및 국민전쟁 참가자 귀가’에 대한 우보레비츠 총사령의 명령이 내려졌다. 적군은 지금까지의 동맹군인 한인독립군에 대해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선생은 실의에 빠졌다. 이러한 때에 상해에서 독립운동단체들이 모두 모여 재기를 모색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선생은 1923년 2월 상해에 가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으나, 이 회의는 선생의 마음에 흡족하지 못하였다. 결국 1923년 4월경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로 다시 돌아와서 구로지코 부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려고 계획하였으며, 사관생도의 교재용으로 일본 육사의 교과서와 전범령(典範令)을 번역한 것을 사용하고자 하였다. 일제의 조선군 참모부는 1923년 7월 5일자 ‘조선내외일반의 정황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근래 러시아령 연해부 및 우수리 지방에서의 김광서(김경천) 세력은 점차 문창범, 이동휘의 세력을 능가하리라고 한다. 그는 지금 이만 부근에 1천여명의 일단을 편성하여 둔전조직에 의한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부대가 과연 적군의 일부인지, 아니면 적군 양해하에 성립된 순수한 불령선인단체인지 미심스럽다. 또한 선생은 1924년 3월에는 한족군인구락부를 조직하여 본부를 블라디보스토크에, 지부는 니콜스크에 두는 등 자못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도 러시아 당국의 대한인정책과 노령 출신 2세들과의 갈등으로 점점 쇠퇴하고 말았다. 김경천 선생의 사진<출처: 국가보훈처> 1926년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윤해ㆍ김규식 등과 함께 민족당 준비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또한 1930년대 전반기까지는 한족군인구락부를 통해 산산이 흩어진 조선항일역량을 다시 수습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군사학과 일본어를 가르쳤다. 선생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한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를 앞두고 간첩죄로 체포되어 1936년 9월 29일 원동지방 국경수비대 군법회의에서 3년형을 받았다. 그리고 2년 반의 형을 복역한 후 1939년 2월 4일 카르라가에서 석방되었고, 가족을 찾아 카자흐공화국 카라간다주 텔만스키 구역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코민테른 집단농장에서 채소작업원으로 1달여 동안 일하였다. 그러던 중 1939년 4월 인민의 적이라는 혐의로 러시아편에 섰던 한인들에 의하여 다시 체포된 후 동년 12월 17일자로 간첩죄로 유죄판결을 받아 교정강제노동수용소 8년 금고형을 선고받고 카라간다에 있는 교정강제노동수용소에서 복역하였다. 이때만 하여도 선생은 부인 유정화와 편지 왕래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한 다음에는 시베리아로 이감되었으며, 편지 왕래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 후 선생은 1942년 1월 2일 소련의 북동쪽 끝 꼬미자치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으로 유배되어 아르항겔스코에주 금고지에서 심장질환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스탈린이 지배하던 시기라 정확한 사망일시나 장소, 사망원인 등은 알 수 없다. 스탈린이 사망한 후인 1959년 2월 16일 선생은 모스크바 군관구(軍管區) 군법회의에서 심리되어 동년 2월 19일 사후에 복권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천도(天道)가 순환하고 민심이 응합하야, 아(我) 대한독립을 세계에 선포한 후 상(上)으로 임시정부가 유하야 군국대사를 주하며, 하(下)로 민중이 단결하야 만세를 제창할 새 어시호(於是乎) 아(我)의 공전절후(空前絶後)한 독립군이 출동되었도다(…)당당한 독립군으로 신(身)을 탄연포우(彈煙砲雨) 중에 투하야 반만년 역사를 광영케 하며, 국토를 회복하야 자손만대에 행복을 여(與)함이 아(我) 독립군의 목적이오 또한 민족을 위하는 본의라. - 대한독립군 대장으로서 선생이 공포한 유고문(諭告文) 중에서 (1919. 12) 15세에 평안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 홍범도(洪範圖, 1868. 8. 27∼1943. 10. 25) 선생은 1868년 평남 평양에서 가난한 농부 홍윤식(洪允植)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여천(汝千)이다. 선생은 매우 어렵게 성장하였다. 태어난 지 7일만에 어머니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하여 동네 부인네들로부터 젖을 얻어먹으며 자랐고, 또 9살 되던 해에는 부친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선생은 작은 아버지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지내다가 어느 부잣집의 머슴 노릇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선생은 15살이 되던 해인 1883년 나이를 두 살 올려 평안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하게 되었다. 3년여 간의 병영생활은 선생에게 생활의 안정을 가져다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모순을 체험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군대의 핵심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보위하여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진 군교들의 부정과 비리를 목격하게 된 것이었다. 결국 선생은 날로 심해가는 군교들의 부정부패와 사병들에 대한 학대를 보다 못해 그 가운데 한 사람을 구타하고 병영을 탈출하고 말았다. 평양성을 빠져 나온 선생은 황해도 수안군 총령(悤嶺) 아래에 있는 제지소에서 노동자로 3년간 일하기도 하였고, 또 1890년부터 약 1년 반 가량 금강산 신계사(神溪寺)에 들어가 지담대사의 상좌승으로 수도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이 때 선생은 이순신의 후손이기도 한 지담대사로부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을 비롯하여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등의 활약상을 듣게 되었다. 이 같은 경험은 개항 이후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침략하는 일제의 행동에 분노하고 있던 선생의 반일의식을 더욱 증폭시켜 갔다. 1895년, 선생은 파계한 뒤 신계사에서 멀지 않은 강원도 회양군 먹패장골이라는 곳에서 남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군대에 있을 때 익혔던 사격솜씨로 사냥하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즈음 일제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중 자국 상인과 거류민 보호를 이유로 군대를 파견하더니, 그 해 6월 21일 경복궁에 난입하여 무력으로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친일정권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청나라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우리 민중의 자주적 근대화 운동이요, 방일 민족운동인 동학농민운동을 탄압하였다. 더구나 1895년 8월 일제는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을미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지방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양력 사용을 강용하고, 단발령을 강제 실시하는 등 우리나라의 주권을 제약하여 갔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뒤, 의병활동 시작 이와 같은 상황이 도래함에 따라 각지에서 국모보수(國母報讐)와 축멸왜이(逐滅倭夷)를 위한 의병 봉기가 이루어졌다. 선생 또한 1895년 11월 강원도 회양에서 김수협과 의기상통하여 봉기한 뒤, 경기, 강원 지방과 관북지방을 연결하는 길목인 철령에 매복하여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소총과 탄약 등 전리품을 노획하여 함경도 안변의 학포(鶴浦)로 이동한 뒤, 여기에서 12명의 동지를 모집하여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최초의 홍범도 의병부대로 불린 이 부대는 안변의 석왕사에 주둔하면서 1896년 8월 북천지계(北遷之計)에 따라 북상하던 유인석 의병부대와 연계하여 일본군과 세 번의 전투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 와중에서 김수협은 전사하고 나머지 의병들 또한 전사하거나 도주하여 선생 혼자 남게 되었다. 때문에 이후 선생은 1897년까지 평남과 함남, 그리고 황해도 접경지역에서 일본군을 살상하고, 친일 관리와 부호들을 응징하는 등 단독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선생은 함남 북청에 정착하여 1907년 후반까지 북청군 안산사 노은리에 거주하며 사냥과 농사에 종사하였다. 특히 이 때 선생은 안산사 일대 포수들의 동업조직인 포연대(捕捐隊)의 대장으로서 포수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선생은 포연대를 주축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포수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여 갔다. 한편 망국적 상황에서 포수들의 반일의식을 더욱 부채질한 것은 1907년 9월 3일 제정 공포된 ‘총포 및 화약류 취체법’의 강제 시행이었다. 이 법의 주요 내용은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무기와 탄약 및 무기가 될 수 있는 모든 장비를 정부와 관청에서 거두어들이고, 그 위반자를 처벌하도록 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법은 일제가 이 시기 전국적으로 파급되던 의병전쟁을 봉쇄하고 탄압할 목적으로 강행한 것이었지만, 총으로 수렵하여 먹고 살던 산포수들에게는 매우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때문에 산포수들은 일제의 침략에 대해 민족적 분노와 더불어 생활상의 위협을 직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같은 상황이 전개되자 선생은 일제 침략자를 쳐부수고 자기의 생존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궐기하자고 포수들을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1907년 11월 15일 선생과 차도선은 북청의 안산사와 안평사 포수들의 동업조직인 포계를 주축으로, 화전 농민과 광산노동자, 그리고 북청 진위대의 해산군인 등 70여 명을 모아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봉기하였다. 이 의병부대는 선생과 차도선의 지휘 아래 봉기 직후 일진회 회원이며 친일 관리인 안평면장을 처단하면서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날으는 홍범도’ 여러 곳에서 일본군 격파 홍범도 부대가 사용한 수류탄과 탄환 사진 선생의 의병부대는 같은 달 22일 포수들의 총을 압수하여 북청으로 반출하는 일본군을 후치령에서 습격하여 적군 2명과 일본인 순사 1명을 사살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 25일에도 이곳에서 미야베(宮部) 대위가 지휘하는 일본인 군경 70여 명과 3시간 동안 격전을 벌여 적군 30여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선생의 의병부대는 1908년 11월 선생이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 1차 망명하기까지 수십 차례 일본군과 격전을 치르며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선생의 의병부대는 삼수성과 갑산읍을 탈환하기도 하고, 헌병분견소, 순사주재소, 우체국, 일본군 관사 등을 습격 소각하기도 하고, 일진회 회원, 친일 관리와 부호, 일본인 군관민 등을 응징 처단하기도 하고, 일본인 금광을 습격하여 금괴를 빼앗아 군자금으로 이용하는 등 실로 대담무쌍한 활동을 벌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날으는 홍범도’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국내에서 활동이 어려워 1908년 11월 만주를 거쳐 노령 연해주로 망명한 이후에도 선생은 의병활동의 재기를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군자금과 무기를 조달하기 위해 선생은 연추에서 이범윤을 만나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유인석과 항일투쟁의 방략을 논의하기도 하면서 재기를 도모하였다. 그러던 중 선생은 추풍에서 최원세의 도움으로 군자금을 마련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무기를 구입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1910년 4월 초순 선생은 러시아에서 구입한 총기로 무장한 30여 명의 의병부대원들과 함께 추풍을 출발하여 국내로 진격하였다. 그 해 4월 중순 간도를 거쳐 함북 무산에 진입한 선생의 의병부대는 5월 초순까지 무산과 종성 일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수 차례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처음 의병전쟁에 참가한 병사들이 많았고, 병력 또한 적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체포되어 전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그 해 5월 중순 다시 만주의 안도현과 길림을 거쳐 러시아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의병과 계몽운동의 공동전선 모색 재차 노력 연해주로 망명한 선생은 유인석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13도의군(十三道義軍)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13도의군은 의병 지도자들이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의 의병을 하나의 군단으로 통합, 작전과 지휘를 단일 계통으로 통일하기 위해 1910년 6월 결성한 것이었다. 이 조직은 실제 전투력을 지녔던 창의군과 장의군 두 부대로 편제되어 있었다. 이범윤이 창의군총재, 경성의병 출신의 이남기가 장의군총재로 각기 선임되어 도총재 유인석의 지휘를 받았다. 그리고 이상설은 외교통신원으로 13도의군의 사무와 조직을 관리하는 실질적 책임을 담당하였다. 선생은 이진룡, 이갑 등과 함께 동의원(同義員)으로 선임되었다. 선생과 이진룡 등은 의병장 출신인데 비해, 신민회의 핵심인물들이었던 안창호와 이갑 등은 무장투쟁노선과는 종래 그 성격을 달리하던 계몽운동 계열이었다. 결국 이들이 13도의군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때까지 민족운동선상에서 의병 계열과 대립 혹은 갈등 관계에 있던 계몽운동 노선이 의병과 합일, 공동전선을 모색하여 간 증거인 것이다. 엄인섭(좌)과 선생(우). 엄인섭은 1908년 노키예프스크에서 동의회를 조직하였고 1911년 권업회 결성에 적극 가담하였다 선생이 참여하였던 13도의군의 활동 기간은 8월 국치 때까지 불과 2, 3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이 기간 유인석과 이상설은 대규모 항일전을 전개할 계획 아래 광무황제에게 연명상소를 올려 내탕금으로 군자금을 지원해 줄 것과 연해주로의 파천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내외의 의병 통합을 표방하고 편성된 13도의군이 미처 항일전을 개시하기 전에 조국이 병탄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생을 비롯한 13도의군의 간부들을 중심으로 성명회(聲明會)가 조직되었다. 성명회는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 조치에 강력히 항의하고, 그 부당성을 천명하기 위해 조직된 항일결사이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소식이 연해주에 전해졌다. 이 소식에 충격을 받은 선생을 비롯한 민족운동자들은 한인학교에 모여 비상시국에 대처할 방안을 논의한 결과 ‘대한의 국민 된 사람은 대한의 광복을 죽기를 맹세하고 성취’할 것을 결의하고 성명회를 조직하였다. 8월 26일 다시 모인 선생을 비롯한 성명회의 주요인물 50여 명은 빗속에서 조국독립의 결의를 거듭 다짐하면서 독립 전쟁의 방략을 논의하였다. 이후 성명회는 취지서와 각종 격문을 중국, 러시아에 산재한 한인사회에 배포하는 등 그 활동을 확대해 나갔다. 선생을 비롯한 한인동포들이 성명회를 조직하여 이처럼 활발한 반일운동을 전개하자, 일제는 러시아 정부에 강력히 항의를 제기하였다. 동시에 선생을 비롯한 유인석, 이상설, 이범윤 등 주요 인물들의 체포 인도를 요구하고 나왔다. 이에 러시아 당국은 핵심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고 항일운동을 탄압함으로써 성명회는 1910년 9월 해체되고 말았다. 권업회와 노동회 조직, 투쟁역량 배양 이후 선생을 비롯한 러시아의 한인 민족운동자들은 현실적이고도 장기적이며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방략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을 비롯하여 이종호, 이상설, 최재형 등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민족운동자들의 발기로 ‘조국독립’을 최고 이념으로 하는 자치결사로써 권업회가 1911년 5월 연해주에서 창립되었다. 권업회의 목적과 이념은 한인사회의 권익을 증진시키는 ‘실업(경제)’ 문제와 독립운동을 강력히 추진하는 ‘항일(정치)’ 과제를 결부시키는 전술을 취하면서 조국독립을 달성하려는 데 있었다. 선생은 처음에는 권업회의 부회장, 나중에는 사찰부장에 선임되어 활동하면서 신문발간 사업, 민족교육 사업, 그리고 한인의 경제력 향상 및 권익 보호에 심혈을 쏟았다. 선생은 권업회에 관여하면서도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회원들 모두가 노동하면서 그 노임의 일부를 독립전쟁을 위한 군자금으로 비축하는 노동회를 1912년 조직하였다. 이 회의 회장으로서 선생 또한 1913년부터 약 3년 동안 연해주 지역의 항구와 금광 등을 전전하며 노동하여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이 자금으로 선생은 소총과 탄약을 구입한 뒤, 이를 숨겨놓고 동지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국내 진공의 기회를 엿보았다. 연해주 한인 빨치산 간부 사진(1922). 뒷줄 제일 오른쪽이 선생이다 대한독립군을 편성, 봉오동전투에서 대승거두다 그러던 중 국내에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이제야 말로 독립전쟁을 전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당시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던 노령 대한국민의회의 군무부와 상의하여 그 해 8월 마침내 항일무장투쟁의 길로 다시 나서게 되었다. 선생은 우선 간도로 가서 그곳에서 독립군 병사들을 추가 모집하여 부대를 확대한 뒤 국내로 진공할 예정이었다. 이에 따라 선생은 노령에서 대한국민의회 군무부 소속 군대의 일부를 인솔하고 그 해 9월 간도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의 부대는 간도 대한국민회의 재정 지원과 인원 지원을 받아 대한독립군을 편성한 뒤, 본격적으로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 초기 대한독립군은 3개 중대에 약 300여 명의 병력, 소총 200여 정과 권총 약 30정의 화력, 그리고 지휘부는 사령관에 선생, 부사령관에 주건, 참모장에 박경철로 구성되어 있었다. 선생이 지휘한 대한독립군은 1920년 초반 경부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와 연합하여 대규모 국내 진공작전을 감행하였다. 이 같은 대한독립군의 활동은 다른 독립군 부대에도 영향을 주어 끊임없이 국내 진공작전이 수행되었다. 그리하여 일제의 경비 강화에도 불구하고 독립군 부대들은 국내 진공작전을 계속 결행하였고, 그 전과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효과적이었다. 독립군의 국내 진공을 방어하기 위하여 군사 및 경찰력을 대폭 강화했음에도 대대적인 기습을 받게 된 일제는 ‘조선군’ 제19사단 소속 남양수비대의 1개 중대와 헌병경찰 중대로 독립군을 추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추격군은 삼둔자의 서남방에 매복해 있던 최동진의 군무도독부 소속 독립군에게 재차 격퇴당하고 말았다. 독립군에 의해 연달아 참패를 당한 일제는 이번에는 약 250명의 병력으로 ‘월강추격대’를 편성하여 1920년 6월 7일 봉오동(鳳梧洞)으로 진군해 왔다. 이곳에는 이미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선생의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및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이 통합하여 조직한 대한북로독군부군(大韓北路督軍府軍), 그리고 이흥수가 이끄는 대한신민단이 일본군 침입자들을 맞아 전투를 벌일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선생이 지휘하는 독립군 통합부대는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지형의 봉오동 골짜기 안으로 일본군 추격대를 유인하여 격파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다. 선생이 이끈 독립군 통합부대가 승전하게 된 요인은 지형을 이용한 전술 구사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독립정신이었다. 1 봉오동 전투 지역 사진. 당시 일본군은 봉오동 상촌의 독립군이 잠복해 있는 포위망 가운데로 들어왔으며 홍범도의 명령에 따라 독립군은 동, 서, 북 3면에서 일본군을 협공, 격파하였다 2 일본군이 작성한 봉오동 전투 약도로 독립군의 진공로를 표기하고 있다 (1920. 12. 25)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57명이 사살되고 수많은 인원이 중경상을 입었고, 독립군측은 4명의 전사자에 2명의 중상자만을 내었을 뿐이었다. 독립군의 빈번한 국내 진공전에 의해 큰 피해를 입게 된 일제는 1920년 8월 소위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작성하고 첫 단계로 ‘훈춘사건’을 조작하였다. 일제는 중국 마적을 매수하여 1920년 10월 2일 훈춘의 민가와 일본영사관 분관을 습격, 13명의 일본인과 한국인 순사 1명을 살해하고 3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일제는 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중국측에 그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였다. 나아가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그들 자신이 직접 병력을 투입하여 마적단을 토벌하겠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중국측의 답변이 있기도 전에 일제는 대병력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켰다. 독립군의 항전사상 가장 빛나는 승첩인 청산리대첩은 이 같은 일본군의 간도 침입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훈춘사건’이 있기 이전에 독립군측은 일본군의 간도 침입을 이미 간파하였다. 그리하여 독립군 부대들은 근거지에서 대규모의 일본군과 정면 승부할 경우 본영은 물론이고 간도지역의 한인들도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하여 백두산록 서쪽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20년 10월 20일 선생의 대한독립군을 비롯한 북로군정서, 대한신민단, 국민회군 등의 독립군 부대는 백두산록으로 향하는 길목인 화룡현 2도구(道溝)와 3도구에 집결하게 되었다. 독립군의 이러한 동태를 첩보원의 보고에 의해 파악한 일제는 침략군의 일부를 2, 3도구 방면으로 진입시켜 독립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따라서 독립군과 일본군은 이곳에서 피할 수 없는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전투가 일어난 지역은 한인마을이 있던 청산리 일대였다. 첫 전투는 3도구 방면에서 포진하고 있던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일본군 야마다(山田)토벌대 간에 10월 21일 오전 8시경부터 전개된 백운평 전투였다. 김좌진이 지휘하는 독립군은 일본군을 백운평 골짜기 깊숙이 유인하여 섬멸함으로써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선생이 사령관으로 지휘하는 독립군 통합부대는 2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 일본군에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선생이 지휘하는 독립군 통합부대와 북로군정서는 합동으로 10월 26일까지 천수평, 어랑촌, 맹개골 만기구, 천보산, 고동하곡 등지에서 일본군과 10여 회의 격전을 치렀다. 이들 전투에서 독립군과 일본군 양측의 전과 및 피해는 자료마다 서로 다르지만 임시정부가 조사하여 발표한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의 전사자는 1,200여 명에 부상자는 2,100여 명이었고, 독립군측은 전사자 130여 명, 부상자 220여 명뿐이었다. 자유시 참변 후 한인 권익보호운동 이후 선생은 700여 명의 독립군 통합부대를 이끌고, 일본군 간도토벌대와 격전을 치르면서 1921년 1월 하순 우수리강을 건너 러시아령 이만을 거쳐 자유시로 들어갔다. 이 시기 연해주 각지의 한인 무장부대와 간도 독립군은 자유시 일대로 집결하고 있었다. 그것은 각지에 흩어져 있던 한인 부대의 전격을 통합하고 볼셰비키 정부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항일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결한 한인 부대의 통솔권을 둘러싸고 지도부간에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다. 국동공화국 한인부에서 조직한 전한군사위원회 산하의 대한의용군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후원 하에 조직된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지도하는 고려혁명군 간의 군권대립이 그것이다. 전한군사위원회는 상해 임정과 연관을 가지고 있었고, 중심 인물은 이용, 채영, 박일리아 등이었다. 군정의회에는 김하석, 오하묵, 최고려, 유동열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선생은 처음 대한의용군에 참여하여 부총재로 선임되기도 하였으나, 6월 초 예하 부대원 440여 명을 대동하고 군정의회측에 가담함으로써 고려혁명군 제3연대로 편성되었다. 6월 28일 군정의회 지도부는 완강한 대치상태에 있던 대한의용군의 무장해제를 결정하였다. 장갑차 등 중화기까지 동원한 고려혁명군은 대한의용군이 주둔한 자유시 부근의 수라세프카 일대를 포위한 채 대규모 공격을 가하여 쌍방간의 대충돌이 발생하였다. 자유시사변으로 불린 이 같은 한인 무장세력 간의 분쟁으로 사상자가 속출하고, 대한의용군 부대는 사방으로 흩어짐에 따라 독립군의 투쟁역량이 크게 훼손되었다. 자유시사변 이후 한인무장세력은 러시아 공산당의 강력한 통제로 인하여 활동에 많은 제약이 가해졌고, 이로 인해 선생도 항일무장투쟁의 꿈을 간직한 채 이만, 연해주 등의 집단농장, 협동농장 등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농민층의 생활 향상과 한인동포들의 권익보호에 힘썼다. 그 후 1937년 9월 스탈린에 의한 한인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선생은 연해주를 떠나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선생은 1943년 10월 25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7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약력 1907 함경도 갑산 등지에서 의병활동1910 러시아로 망명, 성명회, 권업회, 대한국민의회 등 활동1920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으로 봉오동전투 대승, 청산리전투 참가 다시 한번 마음을 진정하고 반성함으로써 냉정한 이성을 회복하여 한결같은 민족적 양심으로 정성 단결하여 다같이 자주통일의 길로 총 진군 할 수 있는 날에 비로소 이 겨레의 앞에는 통일과 자유의 서광이 비칠 것이다. - [민성(民聲)] 誌 (1949. 7)에서 - 타락한 과거제도에 실망, 동학군의 선봉장이 되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 7. 11(음)~1949. 6. 26) 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基洞)에서 부친 김순영과 모친 현풍 곽씨 낙원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이명으로 창암(昌巖), 창수(昌洙), 두래(斗來), 구(龜), 구(九), 자는 연상(蓮上), 연하(蓮下), 호는 백범(白凡)이다. 선생의 가문은 경순왕의 자손으로서 ‘김자점의 난’으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자 서울 부근에 이사하였다가 다시 황해도 해주로 이주, 양반의 신분을 감춘 채 11대에 걸쳐 그곳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선생의 부친은 가난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강한 자존심과 저항정신의 소유자였고 어머니는 한번도 자세를 흐트린 적 없는 강한 신념과 인내심을 지닌 대표적인 한국의 어머니였다. 이러한 가정에서 태어난 선생은 선천적으로 강인한 체질과 대담 솔직한 성격이었으나 말동무나 같이 놀아줄 친구가 없다는 외로움과 가난이라는 굴레는 훗날 과묵한 성격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4세 때에 당시 열에 아홉은 사망하였다는 천연두를 앓았으나 천행으로 목숨을 건졌으며 9세가 되던 해에 비로소 가난과 양반들의 속박 밑에서 국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는 길만이 양반들로부터 모욕과 천대, 멸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사랑채를 서당으로 만들고 이생원(李生員)을 초빙하여 공부를 시작하였다. 16세 때에 당시(唐詩), 대학(大學), 과문(科文)을 익혀 17세(1892)가 되던 해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당시 매관매직으로 타락한 과거에 실망을 느꼈다. 이후 풍수, 관상에 관한 책과 손무자(孫武子), 오기자(吳起子), 육도(六韜), 삼략(三略) 등의 병서를 섭렵했다. 이듬해(1893) 동학에 입도하여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사람으로 뽑혔으며 1894년 충북 보은에서 최시형 대수주(大首主)를 만나 팔봉도소접주(八峰都所接主)란 첩지를 받고 동년 9월 탐관오리의 척결과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기치아래 동학군의 선봉장으로서 병사를 지휘하여 해주성을 공략, 탐관오리들을 추방하려 했으나 관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헌신할 것을 결심 1895년 동학의 기강이 점점 무너져 규율을 잃고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되자 선생은 연소의 몸으로 이를 수습하기 어려움을 깨닫고 신천군에 사는 진사 안태훈을 찾아가 몸을 의탁하였다. 당시 그의 아들 안중근은 16세의 어린 나이로 부친을 따라 동학군 토벌에 전념하고 있었으니 두 사람의 만남은 매우 미묘한 것이었으나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같았다. 이곳에서 선생은 당시 명망이 높은 해서(海西) 거유(巨儒) 고능선(高能善)의 지도로 한학을 배웠다. 하루는 고선생이 아래와 같이 말씀하였다. “예로부터 흥해 보지 않은 나라도 없고 망해 보지 않은 나라도 없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는 데는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 있고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다. 의(義)로써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망하는 것은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요, 또 백성이 여러 패로 갈려서 한 편은 이 나라에 붙고 한 편은 저 나라에 붙어서 망하는 것은 더러운 것이다. 이제 왜의 세력이 궐내까지 침입하여 마음대로 하고 있으니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일사보국(一死保國)하는 길밖에 없다.” 이에 선생도 비분에 못이겨 “망하는 나라를 망하지 않도록 붙들 도리는 없습니까?”라고 물으니 고 선생은 “청국이 갑오싸움에 진 원수를 반드시 갚으려 할 것이니 우리 중에 상당한 사람이 그 나라에 가서 국정을 조사하고 그 나라 인물과도 사귀어 두었다가 뒷날 기회가 오거든 서로 응할 준비를 하여 두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니 선생도 이에 동감을 표시하고 청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이리하여 선생은 하직 인사차 안진사에게 들렀다가 그곳에서 만난 김형진과 같이 평양, 함흥, 갑산을 지나 압록강 기슭을 돌아 임강, 환인을 거쳐 관전에서 임경업 장군의 비각을 보고 삼도구에 다다라 그곳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고 있던 의병장 김이언 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선생은 김이언 의병진의 소속으로 1895년 동짓달 초에 고산리 승리의 여세를 몰아 강계(江界)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게 되자 할 수 없이 고향을 향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헌신할 것을 다짐한 선생은 해서 거유 고능선 선생의 말을 듣고 청국을 조사하기 위해 떠나기로 한다. 인사차 진사 안태훈(안중근의 아버지)에게 들른 선생은 그곳에서 만난 김형진과 함께 길을 떠났다가 의병장 김이언 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기도 한다. 선생의 사진(왼쪽)과 임시정부 주석 시절에 선생이 서명한 태극기(오른쪽) 일본 중위 쓰치다(土田讓亮)를 국모시해죄로 처단하다 1895년 일제가 궁궐을 침입하여 국모를 시해한 을미사변 이후로 한민족의 분노는 전국적인 의병항쟁으로 분출되었고, 을미사변에 뒤이은 김홍집 내각의 단발령으로 의병항쟁은 더욱 거세게 불타 오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생은 한반도를 둘러싼 정국의 변화를 관망하기로 하고 안악으로 되돌아 오던 중에 1896년 2월에 치하포 주막에서 변복한 일본인 쓰치다(土田讓亮)을 만나게 되었다. 선생은 보통 무역이나 장사를 하는 일본인 같으면 이렇게 변복하고 다닐 까닭이 없으니 이는 필시 국모를 시해한 삼포오루(三浦梧樓) 놈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의 일당일 것이요, 설사 이도 저도 아니면 우리 국가 민족에 독균임이 분명하니 저놈 한 놈을 죽여서라도 국가의 수치를 씻어 보리라 결심하였다. 선생은 그가 차고 있던 칼을 빼앗아 그를 찔러 죽이고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놈을 죽였노라’라는 내용의 글과 함께 ‘해주백운방기동 김창수(海州白雲坊基洞 金昌洙)’라는 서명까지 한 후에 이 포고문을 길가에 붙이고 유유히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3개월 후(1896. 5. 11) 철퇴와 철편을 든 수십 명이 선생의 집에 난입하여 ‘내부훈령등인(內部訓令等因)’이라는 체포장을 내어 보이고 선생을 쇠사슬로 포박 후 해주옥에 가두었다. 선생은 동년 7월에 인천 감리영(監理營)으로 이감되어 경무관 김윤정의 심문을 받았다. 이때 선생은 방청을 감시하는 일인 경관 도변(渡邊)에게 “소위 만국공법 어느 조문에 통상화친하는 조약을 맺고서 그 나라 임금이나 황후를 죽이라고 하였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감히 우리 국모 폐하를 살해하였느냐 내가 살아서는 이 몸을 가지고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맹세코 너희 임금을 죽이고 너희 왜놈들을 씨도 없이 다 없애서 우리나라의 치욕을 씻고야 말것이다”하고 소리 높여 꾸짖자 도변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김 경무관은 사건이 중대하다고 판단하고 감리사 이재정으로 하여금 직접 심문케 하여 감리사가 심문을 개시코자 함에 선생은 먼저 그를 향해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나 김창수는 산촌의 일개 천생이나 국모께옵서 왜적의 손에 돌아가신 국가의 수치를 당하고서는 청천백일하에 제 그림자가 부끄러워서 왜구 한 놈이라도 죽였거니와 아직 우리 사람으로서 왜왕을 죽여 국모의 원수를 갚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거늘, 이제 보니 당신네가 몽백(국상으로 백립을 쓰고 소복을 입었다는 뜻)을 하였으니 춘추대의에 군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는 몽백을 아니 한다는 귀절을 잊어버리고 한갓 부귀영화와 총록(임금님의 총애와 봉급)을 도적질 하려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긴단 말이요?” 1942년 중경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측되는 선생의 모습 그러자 감리사, 경무관, 기타 청상에 있는 관원들이 말을 듣는 기색을 살피건대 모두 낯이 붉어지고 고개가 수그러졌다. 이때 감리사는 선생에게 하소연 하듯 “창수(昌洙)가 지금 하는 말을 들으니 그 충의와 용기를 흠모하는 반면에 황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비길데 없소이다. 그러나 상부의 명령대로 심문하여 올려야 하겠으니 사실을 상세히 공술해 주시오.”하고 경어를 쓰니 옥 사정들의 대우는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선생을 존경하게 되었다. 선생은 옥중에 있으면서 중국에서 발간된 태서신사(泰西新史), 세계지지(世界地誌) 등을 탐독하여 신학문에 눈을 떠 서양이란 무엇이며 세계형편이 어떠하다는 것을 아는 동시에 선생 자신과 우리나라에 대한 비판도 하게 되었다. 사형 직전 고종의 특사로 형집행이 정지되다 사형은 면하였지만 석방은 되지 않자, 선생은 탈옥을 감행한다. 그리고는 충남 공주의 마곡사에 들어가 법명 원종으로 출가하게 된다. 사진은 마곡사의 모습 선생은 1897년 7월 사형을 언도 받고 동년 8월 26일 사형집행이 확정되었으나 광무황제의 특사로 사형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짐에 따라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선생이 사형을 면하고 살아 난 데에는 두 번의 아슬아슬한 일이 있었다. 법무대신이 선생의 이름과 함께 사형죄인 명부를 가지고 입궐하여 황제의 칙재를 받았다. 황제께서는 다 재가를 하였는데 그 때문에 입직하였던 승지 중의 하나가 선생의 죄명이 ‘국모보수(國母報讐)’인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서 이미 재가된 안건을 다시 가지고 나아가 임금께 보인 즉 황제께서는 즉시 어전회의를 열어 사형 직전에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승지의 눈에 ‘국모보수’라는 네 글자가 아니 띄었더라면 예정대로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전화가 인천에 가설되고 감리서에 개통된 것이 사흘 전이었다고 한다. 만일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 개통이 늦게 되었던들 황제의 명령이 인천에 도착하기 전에 벌써 사형이 집행되었을 것이다. 광무황제의 특지로 사형은 면하였으나 일제의 눈치 때문에 석방이 되지 않자 선생은 왜놈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탈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1898년 3월 9일 밤 탈옥하여 수원, 목포를 거쳐 함평에 도착, 그곳에서 15일간 묵었다. 그리고 보성, 화순, 순창, 담양을 거쳐 올라와 충남 마곡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모든 세상의 잡념이 식은 재와 같다라는 생각이 들어 출가(법명: 원종(圓宗)하게 되었던 것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예불법이며 천수경, 심경을 외우고 보각서장을 배웠다. 다음 해에 평양의 영천암의 주지가 되었지만 출가생활은 은신하기 위한 방법이었으므로 선생의 본색이 들어나 반년도 못되어 환속해서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교육 구국운동의 일선에서 계몽운동에 진력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1900년 다시 방랑길에 올라 강화에서 김두래(金斗來)란 이름으로 바꾸고 생활하였다. 그 뒤 김창수라는 본명으로 행세하기가 곤란하여 이름을 거북 구(龜)자 외자로 하고 자를 연상(蓮上), 호를 연하(蓮下)라고 고쳐 지었다. 1901년 12월 부친께서 돌아가신 후 숙부 준영을 도와 농사일을 하며 지내다 교육사업에 전념하기 위해 장연읍으로 이사하여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오순형과 함께 아동교육에 힘썼다. 선생이 장연에서 교육사업에 전념하고 있을 무렵 국내사정은 서구 열강의 끊임없는 세력다툼으로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을 야기시킨 후 ‘한일의정서’, ‘한일협정서’ 등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상의 자주권을 박탈하는 등 침략의도를 드러냈으며 마침내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을사조약의 체결 소식이 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통하여 알려지게 되자 선생은 진남포 예수교 교회 청년회의 총무자격으로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리는 전국대회에 참석하여 이준, 이동녕 등과 함께 을사조약 폐기를 상소하는 등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교편 생활 시절의 선생(맨 뒷줄 오른쪽 첫 번째)의 모습. 해서 교육총회 학무총감 재임 시 광진학교에서 촬영한 것이다 상소투쟁이 효과가 없다고 판단한 선생은 장기적인 구국운동은 청소년의 교육에 있다고 생각하고 황해도로 내려와 문화권 초리면의 서명의숙과 안악의 양산학교에서 교원을 지냈으며 최광옥이 세운 면학회 사범강습소 강사, 재령의 보강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여 교육 구국운동의 일선에서 계몽운동에 몰두하였다. 또한 1908년 최광옥과 함께 해서교육총회를 조직하여 학무총감에 추대되기도 하였다. 미천한 백정(白丁)의 ‘백’과 범부(凡夫)의 ‘범’을 따서 호를 삼다 1908년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맹렬한 구국운동을 전개하던 중 1910년 국권이 침탈당하자 신민회의 황해도 간부로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 이동녕, 안창호, 이시영, 안태국 등과 함께 비밀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일제가 서울에 총독부를 두었으니 우리도 서울에다 도독부를 두고 각도에 총감이라는 대표를 두어서 국맥을 이어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만주에 이민계획을 세워 무관학교를 창설하여 광복전쟁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로 하고 각도 대표를 평안남도에 안태국, 평안북도에 이승훈, 강원도에 주진수, 경기도에 양기탁, 황해도에 선생을 선정하였다. 대표들은 각각 맡은 지방으로 돌아가서 황해, 평남, 평북은 각 15만원, 강원은 10만원, 경기는 20만원을 15일 이내로 준비하기로 결정하였다. 안약으로 돌아온 선생은 기부금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1911년 1월 5일 일제는 소위 보안법을 적용하여 신민회원들을 일망타진하게 됨에 따라 선생도 일경에 피체되어 서울 경부총감부로 압송되어 2년 형을 언도 받았으며 수감 중에 안명근 사건에도 관련되었다고 하여 15년 형이 병과되어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옥중에서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바꾸었다. 이름을 고친 것은 왜놈의 국적에서 이탈한다는 뜻이고 백범이라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미천하고 무식한 백정(白丁)의 백(白)과 범부(凡夫)의 범(凡)자를 따서 호를 삼은 것으로 천한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선생 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뜻으로 우리동포의 애국심과 지식의 정도를 그만큼 높이지 아니하고는 완전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망명길에 올라 본격적으로 뛰어든 임시정부 활동 1919년 3월 1일 빼앗긴 국권과 민족을 되찾기 위하여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선생은 국내에서는 활동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재목상과 좁쌀 장사로 가장, 사리원, 신의주를 거쳐 중국 안동에 ...더보기

출처 : Daum 지식 | 글쓴이 : 피지컬러닝님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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