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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  「반죽의 형상」





N에게 말은 안했지만,
올해에도 나는

여름휴가가 시작되기 전부터
긴 휴가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것을 과연 휴가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휴가의 예감은

결투의 예감처럼
끔찍하고 달콤하다.

모욕에 결투로 응하는
풍습은 사라졌지만

그 깨끗한 변제에 대한 향수는
인류의 정신 속에

면면히 남아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결투는

모욕을 청산하는
가장 명쾌한 방식이다.

결투에는

상대를 몇대 패 주겠다거나
보상금 몇푼 받아내겠다는 식의

유치한 계산 찌꺼기가 없다.

나를 모욕한 자를 죽이거나
모욕 당한 나 스스로 죽는 것 만큼

모욕을 완전 연소시키는 방식이
또 있을까.

모욕이란 그런 것이다.

상대를 죽이거나
내가 죽거나.

칼이 둘 중 하나의 생명을 끊음으로써
모욕관계를 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내 휴가 또한 과거의 모욕에 대한

뒤 늦은
결투신청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날 아침

문득 골똘해 져
수십년 전 어떤 친구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나 행위에서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발견하고

불현듯 떨치고 일어나
결투의 편지를 써 보내는 늙은 신사처럼

내 결투신청에도
다소 우스꽝스러운 대목이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모욕이
즉각 교환되지 못하고

시간의 회로 속에서
길을 잃는 수도 있으니

아무리 늦어도
절박한 때가 적절한 때이다.

결투란

모욕이 가해 진 싯점이 아니라
모욕을 느낀 싯점에서 신청되는 것이다.



● 출전 :

『분홍 리본의 시절』,
창비 2007

● 작가 – 권여선 :

1965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1996년 장편소설『푸르른 틈새』로 제2회 상상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

소설
『푸르른 틈새』『처녀치마』『분홍 리본의 시절』등이 있으며,

오영수문학상 등을 수상함.

● 낭독- 서은경 :
배우. 연극 <관객모독> <냉정과 열정사이> <강철> <친정엄마> 등에 출연.



문장 하나하나에

‘통찰의 형상’이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휴가의 예감은

결투의 예감처럼
끔찍하고 달콤하다.

그럴 수 있지요.

결투는 모욕을 청산하는
가장 명쾌한 방식이다,

맞지요?
모욕의 완전연소가 결투다,

이 역시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대목입니다.

제게 가장 실감이 가는 부분은
결투의 편지를 써 보내는

늙은 신사에서
‘늙은’이라는 형용사입니다.

돈키호테가 연상되면서
우스꽝스럽지만

약간은
슬프게도 느껴집니다.

‘아무리 늦어도
절박한 때가 적절한 때’라는 말은

일상에 유용한
잠언 같기도 합니다.

문장을 읽어나가면서
통찰의 말들이 일제히

빠르고 힘 있게 달려가는 듯한,
기분 좋은 에너지가 느껴지는군요.


문학집배원 성석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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