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굴러가유~~

밀양 表忠寺(표충사)에는 눈물 흘리는 表忠碑(표충비)가 없다

작성일 작성자 돌 굴러가유~~


밀양 表忠寺(표충사)에는

 눈물 흘리는
表忠碑(표충비)가 없다



Music : Rose Of Tralee
Nightnoise
(스마트폰은 ▷ 를 누르세요)


표충사의 편액은
정조대왕의 친필이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연히 앞장 섰던 승병대장
사명대사의 구국의지를 기리기 위해

조선조 선조대왕은
명을 내렸다.



『사명대사의 고향에
전각을 세우고

그 곳에
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여

훗 날까지
스님의 충혼을 모시도록 하라.』



임금의 명이 떨어지자
사명대사의 출생지인

경남 밀양군 무안면 산강리에는
사당이 세워 지고

스님의 영정이 봉안됐으며,

선조는 이 전각을
「표충사」라 사액했다.



누구든
이 표충사 근처를 어지럽히거나

신성시 하지 않을시는
엄히 다스리도록 하라.

친히 사액한 선조는
고을 원에게 이처럼

신신당부하여
사명 스님의 호국정신을 치하했다.



그로부터
관료는 말할 것도 없고

백성들까지도
그 사당 앞을 지날 때는

늘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를 올렸다.



그렇게
백 여 년의 세월이 흘러

당우가 퇴락하자

사명 스님의
5대 법손인 남봉선사는

표충사를
중수하는 동시에

스님의 공적을 기리는
표충비를 세웠다.

때는 영조 14년,
1738년 이었다.



스님의 표충비를 세울
돌을 고르기 위해

경상도 경산까지 가서
높이 3.9m, 폭 97cm, 두께 70cm 크기의

돌을 구해 온 남봉 스님은
당시 정승 이익현에게

비문을 부탁 했다.



내 본시
승려의 부탁으로

글짓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나

오직
대사님의 사정이 간절하여

이를 물리치기 어려워
특례로

곧 비에
글월을 새기는 것입니다.



배불숭유 정책으로
불교를 탄압했던

당시의 정승 역시
사명대사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외면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표충비가 세워지고
다시 백 년 후,

그러니까
조선 제24대 헌종 5년(1839)

사명대사의 8대 법손인
월파선사는

표충사를
밀양 영정사로 옮기고

절 이름을
「표충사」로 바꿨다.



표충서원을 옮겨 가자
사명 스님의 고향엔

표충비만 남게 됐다.

그러니까,

표충사에 가서는
표충비를 찾을 수 없고,

사명스님의 고향에 가야만
표충비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지방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지난 날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는
이 비석은

현재 몸체에 금이 간 채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비석 몸체에
금이 간 것은 일제 때였다.

사명대사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일본 사람들은

잔꾀를 냈다.

일본인들이
사명대사의 혈맥을 끊기 위해

비석 옆에다
창고를 세우던 날이었다.



비석은 마치 살아있는 듯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한 동안
못 견딜 정도로 몸부림치니

비석 몸체에
마치 피를 흘리는 듯한 형상으로

「쫙」금이 갔다.



일본 사람들이
표충비를 무서워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임진왜란 때 왜구를 물리친

용맹스런
승장의 비라는 점도 없지 않으나

마치 스님의 구국혼이
비석에 어린 듯

나라에
큰일이 일어날 때면

비석에서
땀이 흐른다는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 진 것이다.



예전 것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비석이 세워진 후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땀을 흘렸다는 첫 기록은

1894년 갑오경장이
일어나기 7일 전으로 되어 있다.



비석이 있는 곳을
지나 던 한 아낙은

매서운 겨울 날씨인데도
비석 몸체에서 땀이 흐르듯

물기가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낙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 역시
가만히 두고만 볼 일이 아니다 싶어

관가로 달려가 고했다.

당시 비석이 흘린 땀이
3말 1되나 된다고 한다.



그 뒤,
군지(郡誌)에 기록된

표충비의 땀 기록은
경술합방, 기미독립만세운동,

8·15 해방, 6·25 동란,
4·19 학생의거, 5·16 혁명 등

여섯 차례이다.



그 중
가장 많은 땀을 흘린 것은

기미년 만세사건 때와
5·16 혁명 때로,

기미독립운동 때는
19일간에 걸쳐 5말 7되를,

5·16 혁명 때는
5일간 5말 7되를 흘렸다.

군(郡)의 공식 기록은 없으나
육영수 여사가 입적한 다음 날도
 
비석은
땀을 흘렸다고 한다.



이렇듯
나라에 중대사가 있을 때면

미리 땀을 흘려
어려움을 예고해 주니,

마을 사람들은
비석의 영험을 받아 들여

대소사에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됐다.

6·25 동란 때는
전쟁이 일어나기 25일 전부터

3말 8되나 흘렸다.



표충비가
땀을 흘린다는 소문이

동네에 나돌기 시작하자,

주민들은
아무래도 무슨 변이 있을

조짐인 듯하다며
양식이며 비상약품 등을 준비했지요.

6·25 무렵을 회고하는
주민 이씨의 말처럼

마을 사람들은
땀 흘리는 비석의 영험을 믿으며

크고 작은 일에
조심하고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



우리 마을에선
사명대사의 구국 충혼이

이 표충비에
서려 있다고 믿고 있지요.

매년 관광철이면
이 비석을 보려고

1백 여 명의
관광객이 들르는 데

주민들은 너나없이
사명대사의 호국정신을 강조하며

자랑스럽게 안내 합니다.

사명당 추모회
구장회 회장의 말처럼

마을 주민들은
사명대사의 정신을 이어

대체로
정의감이 강하다는 소문이다.



비석이 땀을 흘릴 때는
사람이 땀 흘리는 형상과 똑같아서

앞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뺨으로 흘러 내리는 듯,

비석 전후면
머리 쪽에서 땀이 나와

비문 글귀 사이를 타고
흘러 내린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외지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기후·습도 운운하지만

여러 차례
땀 흘리는 광경을 목격한 우리들은

사명대사의
충혼이 서리지 않고는

일어 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을 촌로 한 분은
자신의 믿음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1962년 장마 때는
보리가 썩어 나갈 정도였는데도

비석엔
습기 하나 차지 않았다." 며

사명대사의
높은 도력을 거듭 강조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앞으로는
이 비석이 나라의 경사로

땀 흘리는 일이 많기를
발원 하고 있다.



우리 님들~!

공감! "콕"
눌러 주시길 부탁 드리구요!!

健康조심하시고
親舊들 만나

茶 한 잔 (소주 한 잔)나누시는
餘裕롭고 幸福한 나날 되세요~^




10월 2주 이 블로그 인기글



맨위로
통합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