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와 중국의 유학자를 제사하는 묘당(廟堂), 서울 문묘(文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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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중국의 유학자를 제사하는 묘당(廟堂), 서울 문묘(文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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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명륜동의 성균관대학교 내에 자리한 서울 문묘(文廟)는 공자(孔子)를 위시하여 우리나라와 중국의 유학자의 명현 위패를 봉안하여 제사하는 묘당(廟堂)으로, 시설물 일체가 사적 제143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울 문묘는 1398(태조 7)에 완성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1(선조 34)에 중건한 뒤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정전(正殿)인 대성전(大成殿)과 더불어 명륜당(明倫堂)동무(東廡)서무(西廡)비천당(丕闡堂)신삼문(神三門) 등의 건물이 있다.






 

우리나라 문묘의 시작은 714(통일신라 성덕왕 13)에 김수충(金守忠)이 당()에서 공자를 비롯하여 1072제자의 화상을 가지고 돌아와 왕명에 의해 국학에 두면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국자감(國子監) 내에 설치하였고 조선시대에는 1398(태조 7)에 유학의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에 마련하여 현 위치에 건립하였으며, 지방에는 성균관제도를 모방하여 330여개의 향교를 설치하였다.







 

성균관(成均館)은 유학교육과 함께 선현(先賢)의 제사를 받드는 두 가지 기능을 갖고 있으며, 또한 주자학 정신에 입각한 관리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조선 5백 년 동안 정치사상을 확립하고 관료체제를 형성하였다.

 

원래 성균(成均)’이라는 명칭은 주례(周禮)大司樂掌 成均之法 以治建學之學政(대사악장 성균지법 이치건학지학정)’에서 나온 것이며, 1298(충렬왕 24)에 성균감으로, 1308(충선왕 원년)에 성균관으로 고쳐 부른 것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것이라 한다.








성균관은 1894년 갑오개혁에 과거제가 폐지됨으로써 기구를 새로 개편하고 3년제의 경학과(經學科)를 설치하였으며, 근대화에 대처하기 위해 유학 외에 지리산술 등의 과목을 교육하였다.

 

일제의 침략으로 1911년 성균관은 경학원(經學院)으로 고쳐져 최고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으며, 문묘의 제사와 유학기관의 재산관리만을 담당하는 곳으로 전락하였다.

 

1945년 광복으로 명륜전문학교가 부활되었고 이듬해 유림들의 성금으로 국립대학의 전통을 되살리고 근대식 교육을 지향하고자 성균관대학교를 건립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비천당(丕闡堂)은 임금이 성균관에 친림(親臨)하여 과거 시험장소로 사용되던 곳으로, 비천당이라는 이름은 주자(朱子)의 글 중 丕闡大猷(비천대유)’라는 글귀에서 인용된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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