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asian]雨의 아버지와 인터뷰.200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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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rain★/ビ - Story

[3asian]雨의 아버지와 인터뷰.2003.12.17

keo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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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1때는 6인조 그룹사운드의 멤버로도 활동했다.
그룹에서 랩과 안무를 맡았지만 크게 빛을 보지는 못했다.
솔직히 아버지 정기춘씨는 아들이 뭘 하고 다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학교 생활을 충실하게 해 별문제가 없었다고 생각했던 것.
“지훈이는 성실한 아이예요. 용돈을 주면 절대 헤프게 안 썼습니다. 그래서 늘 통장이 불어났죠. 유일하게 신발 사는데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렇지만 신발 모으는 취미가 있었거든요. 그때 모아둔 신발들을 이제껏 제가 다 신고 있죠”
중고교 시절까지 어렵지 않은 형편에서 아이들을 키웠다.
아름다운 외모를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져 결혼한 아내와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두 아이를 키우기는 힘들지 않았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친건 99년 초부터. 일을 하던 아내가 손을 다쳤는데 피가 멈추지 않아 병원에 갔더니 당뇨병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평소 건강하던 사람이었기에 당뇨병이라는 진단을 받았어도 솔직히 크게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게 생명에 지장을 줄 수 있는 중병으로 여기질 않았던 것 같아요. 지금은 너무 후회됩니다.
“ 더더욱 가슴 아픈 것은 쉽사리 피로를 느끼는 병을 앓았는데도 아내는 평소와 똑같이 일을 한 것이다.
자신이 조금만 깨우쳤어도 아내를 쉬게 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그렇게 쉽게 합병증까지 얻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에 뭐라 할말이 없을 정도다.
아내의 병이 악화되면서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가게를 내놓아야 했다. 가게를 팔고 마땅히 할 일이 없었던 그는 친구에게서 브라질로 가서 2~3년 고생하면 1억원 정도는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브라질로 향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눈 딱 감고 고생하면 목돈을 만질 수 있다는 생각에 아픈 아내와 자식들을 남겨 두고 99년 7월 비행기에 올랐다.
출국 전 아픈 아내에게 타지로 떠난다는 말을 할 수 없어 당시 고등학교3학년이던 지훈이에게 편지를 쓰고 떠났다.
“얼마전 방송에서 지훈이가 그때 날 원망했고, 어느 정도 힘들었는지를 울면서 얘기하는 것을 봤어요. 아버지로서 너무 미안했지만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
고등학교 3학년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던 지훈이는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기에도 벅찬 시기였음에 분명하다.
그런 그에게 아픈 엄마와 어린 여동생을. 떡집을 처분한 얼마의 돈으로 가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던 것.
“지훈이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모든 것을 떠맡기고 갔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원망도 많이 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들어줬다고 얘기하더라구요”
브라질로 건너간 그는 친구말과는 전혀 다른 생활을 경험해야 했다. 2~3년에 1억이란 목돈을 벌려면 하루24시간 이상 일에 매달려야 가능했던 것이다.
서울보다 인건비가 싼 그곳에서 생활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두달만에 한국으로 되돌아 왔다.
귀국하자마자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남의 집에 월급을 받으면 떡 만드는 기술자로 취직을 했다.
 20년 이상 내 장사를 하다가 남의 일을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악화되는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 뭐든지 해야했다.
지훈이는 학교와 연습실, 그리고 병원을 오가며 고생했다.
딸 하나 역시 일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엄마가 있는 병원에서 생활했다. 그렇게 힘든 생활 속에 버틴 가족들이었지만, 아내는 2000년11월 심부전증에 의한 패혈증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그렇게 힘든 와중에도 지훈이는 자신의 목표를 향해 매진했다. 음악과 춤에 빠져 지내던 그는 박진영씨에게 직접 찾아가 오디션을 받고 발탁됐다. 고3때부터 안무 연습실에서 생활했다.
하루 8시간 춤을 췄고, 밤에는 노래 연습을 했다.
“지훈이가 그래요. 너무 힘든 시기였지만 춤과 노래외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아예 없었다고요, 그래서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다고요, 사춘기를 그렇게 넘긴 거죠”
박진영은 “ 한 달에도 수백 명의 가수와 팀이 나오는데 성공한 팀은 거의 없다. 그 안에서 성공하려면 실력을 갖춰야 한다. 지금 연습을 같이 하고 있지만 내가 원하는 실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앨범을 내준다는 약속도 할 수 없다. 그러니 열심히 해라” 며 지훈이를 자극했다.
한창 연습을 하던 시기에 어머니의 병이 악화되자 지훈이는 박진영에게 엄마 이야기를 했다.
병세는 악화되었지만 병원비가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지훈이의 엄마를 본 박진영은 환자를 곧바로 서울대병원으로 옮겼다. 하지만 병원비를 걱정말라는 박진영의 말을 뒤로 한 채 엄마는 ‘아들에게 부담 줄 수 없다’며 퇴원을 강행하기도 했다.
엄마를 잃은 지훈이는 더 연습에 전념했다.
하루에 2~3시간 자고, 연습에 몰두해 코피 쏟기도 여러 차례였다.
혹독한 연습은 2년여 동안 이어졌다.
중간에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지훈이는 프로듀서 박진영을 믿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 번도 앨범 언제 나오냐? 고 묻지 않았고, 아들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을 인내한 지훈이는 작년 4월 드디어 첫 앨범을 녹음하고, “비”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정기춘씨(47세)를 만난 날은 마침 장날이었다.
아침부터 장에 내다 팔 떡을 준비하느라 정신없는 모습이었다. 신세대 가수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스타 비의 아버지가 모자를 눌러쓰고 다양한 떡을 빠른 손놀림으로 만들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들이 유명해지면서 tv출연을 한 탓에 얼굴이 알려져 이미 동네에서는 그의존재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
사진 촬영을 할 때도 동네 분들이 포즈가 그게 뭐냐?며 한마디를 던지곤 했다. 생각보다 훨씬 젊고, 출중한 외모?였지만 아들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지훈이는 친할아버지를 많이 닮았어요, 저는 쌍꺼풀이 있고 키도 그리 크지 않은데 할아버지는 키도 크셨고, 쌍꺼풀 없이 큰 눈이셨어요”
충남 서산이 고향인 그는 결혼과 동시에 서울 용산구에 터를 잡았다.
떡집을 하던 이모댁에 놀러 갔다가 생각지도 않게 배워 떡을 만들게 됐고, 아내와 함께 시장에서 떡집을 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생활했다.
아들 지훈이와 3년 터울로 딸 하나를 낳았다.
추운 날 가게에 출퇴근을 할 때는 늘 정씨가 어린 아들 지훈이를 데리고 다녔다. 대부분은 유모차를 이용했는데 어린 아들은 엄마 아빠가 일할 때 울지도 않고 유모차에서 잠을 잤다.
주위 사람들이 아이가 순해 돈벌어준다고 했을 정도다.
“서너살 때 신촌에서 한 번 아이를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하루종일 찾고 돌아다녔는데 저녁때가 다 돼 동사무소에서 아들 찾아가라고 연락이 왔어요. 지훈이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것을 동사무소 직원이 데리고 와서는 아이가 너무 예쁘다고 퇴근 할 때까지 데리고 있었던 거죠”
지훈이는 누구보다 평범하게 자라주었다.
떡집을 하는 통에 설날이나 추석 등 바쁜 날에는 으레 가게에 나와 엄마 아빠를 도와 주었다.
설날 기계를 이용해 가래떡을 써는 일은 고등학교때까지 아들이 도맡아 했다.
“돌이켜보면 부모님이 떡집을 한다는 것을 창피스러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전혀 내색 안 했어요. 그래서 저희가 신경을 안 쓴 부분도 있었겠지만요.”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내는 줄 알았던 아들은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불쑥 “제가 안양예고 합격하면 허락하실 거에요?” 라고 물었다.
평소 아들에게 네가 하고 싶은 일은 말리지 않겠다. 라고 말해오던 그는 쉽게 허락했다.
당시 예고의 경쟁률은 대단했지만 지훈이는 합격 통지서를 받아들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당시 지훈이의 담임 선생님이 지훈이가 합격하면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농담을 할 정도로 어려운 관문이었다.
지훈이가 지금까지 잊지 못하는 선생님은 바로 그 중3때의 담임이다. 합격못한다는 선생님 말에 자극받아 더 열심히 이론과 실기 시험에 대비했던 것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지훈이는 자기 방 천장에 ‘안심하면 무너진다’라는 글을 써서 붙여 놓았다.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스스로의 긴장을 늦추지 않았던 것이다. 지훈이의 좌우명은 ‘끝까지 인내하자. 끝까지 겸손하자. 끝까지 노력하자’다. 아버지의 기억으로는 중고교 시절부터 지훈이 직접 만들어 새기던 말이다. 지금의 지훈이를 보면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요즘 애들은 연예인이 되겠다고 학원도 다니고 그런다는데 지훈이는 순전히 혼자서 모든 걸 알아서 했다.
부모가 걱정할 만한 행동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목표를 향해 달렸다.
“정말 제 아들이기 이전에 지훈이를 보면 많이 배웁니다. 내가 지훈이처럼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았는가?하고 묻기도 여러 번이었어요. 제나이 마흔이 넘었는데 해 놓은게 없습니다. 흐지부지 그렇게 인생을 살았던 거 같아요. 그런데 지훈이를 보세요. 자기 목표를 정하고 노력해서 되고 싶던 가수가 되었잖아요. 저는 지훈이는 걱정 안해요. 아들이기 이전에 참 괜찮은 사람입니다.”
아들을 보며 인생을 깨닫게 되었다는 그는 그래서 고향도 아닌 충청도 무극에 떡집을 차렸다.
제일 잘할 수 있는게 떡만드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지금 살고 있는 서울 용산 집고 1시간 반정도의 거리.
거의 출퇴근을 하고 있는 그의 떢집앞에는 아들인 지훈이의 큼지막한 브로마이드 사진이 걸려있다.
“떡을 만들다가도 지훈이를 보면 힘이 나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얼마 전 지훈이는 아빠! 한번 내려갈까? 친한 god형들하고 내려가면 좋을 것 아니야? 하고 물어오기도 했다.
그는 절대 내려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아들을 상업적으로 이용한다는 이야기도 듣기 싫을 뿐더러 늘 미안한 아들에게 부탁할 일도 아니다 싶어서였다.
“남들이 쳐다보는 가수가 돼서 아빠가 떡집 한다는 걸 부끄러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본인이 먼저 그렇게 물어오니까 정말 자식 하나는 잘 키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바쁜 아들 신경 쓸까 문자메시지로 서로 안부를 묻는다는 그는 얼마 전 목돈이 생겼다며 아빠 통장에 입금시켜주겠다는 아들의 전화를 받기도 했다.
“네가 어렵게 번 돈이니 네가 알아서 하라고 말했어요. 음악 프로듀서나 패션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니까 나중에 필요한 자금으로 쓰라고 말이에요. 지훈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고야 말 테니까요” 곧 지금의 떢집을 처분하고 고3이 될 막내딸과 함께 지내면서 멋진 퓨전 떡집을 낼 것이라는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세상 모든 부모의 바람은 하나가 아닐까 나보다는 자식이 더 건강하고, 멋진 성품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인정 받는 이로 자라는 것, 마흔이 넘도록 하나도 해놓은게 없다는 그의 말은 어쩌면 큰 거짓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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