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 영남 선비가 걷던 옛 과거길을 걷다

                       제1관문 주흘관 → 제2관문 조곡관 → 제3관문 조령관


        

  우리나라의 큰 산줄기인 백두대간(白頭大幹)이 태백산, 소백산을 거쳐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죽령을 지나 대미산, 포암산, 주흘산, 조령산, 희양산, 대야산, 청화산, 속리산으로 이어져 소백산맥을 이루어 나간다. 삼국과 고려 때에는 문경 관음리에서 충북 중원군의 수안보로 통하는 큰길인 하늘재(계립령)가 있었고, 문경 각서리에서 괴산군 연풍으로 통하는 소로인 이화령이 1925년 신작로로 개척되어 지금의 국도3호선이 되었다. 옛날에는 1978~1979년 확장 포장된 이우리재(이화령)와 가은에서 충북 괴산으로 연결된 불한령, 문경군 농암에서 충북 삼송으로 다니던 고모령 등이 있어 신라와 고구려, 신라와 백제의 경계를 이루었다고 전한다.


문경관문의 연혁

        

  문경새재는 영남에서 한양을 오가는 중요한 교통로이면서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곳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조선시대의 가장 큰길[嶺南大路]이었던 곳으로, 과거 시험을 치기 위해 영남 일대의 선비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오르던 길이다. 또한 군사요충지로서 임진왜란(1592)때 왜장 고시니 유끼나가(小西行長)가 부산포에 상륙하여 한양을 향해 가장 빠른 길로 새재길을 택하여 쳐들어왔을 때 신립(申砬)장군이 천험의 요새인 이곳을 버리고 충주 탄금대에서 왜군을 맞아 싸웠다.

  후에 패전을 후회하고 그때에 새재 협곡을 이용하여 대적하였으면 왜군이 쉽게 새재를 넘지 못했으리라 여겨 선조(宣祖) 27년(1594)에 중성(中城:제2관,鳥谷關)을 쌓았다. 그리고 숙종 때에 남쪽과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해 각각 초곡성(草谷城:제1관,主屹關)과 조령산성((鳥嶺山城:제3관,鳥嶺關)을 축조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제1관문인 주흘관문은 문경읍에서 서북쪽으로 깊은 협곡을 따라 3.5km 지점이며, 여기서 3km 더 가면 제2관문인 조곡관, 이곳에서 3.5km 떨어진 곳에 제3관문인 조령관이 있다.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등 3개의 관문은 사적 제147호로 지정되어 있고, 이 일대를 198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했다.


주흘산(主屹山)과 문경새재

        

  문경의 3관문을 품고 있는 주흘산(1,106m)은 관문까지의 험한 계곡에 이루어진 풍치가 매우 뛰어나며, 여궁폭포, 혜국사, 용추를 비롯하여, 옛날의 유지(遺址)로는 원터, 교귀정, 봉수터, 성터, 대궐터 등이 잔존하고 있다.

        

  조령로의 번성을 말해 주듯 조령로변의 마애비는 관찰사, 현감 등의 공적을 새겨 놓았으며, 주흘관 뒤에는 선정비, 불망비, 송덕비가 비군(碑群)을 이루고 있다. 특히 옛날 선비나 상인들이 한양을 오르내리던 1관문에서 3관문에 이르는 길에는 현재 3개소 850m의 옛 과거길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이 소로(小路)를 밟으며 옛날을 회고해 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또한 주위의 주흘산, 조령산, 부봉과 각 골짜기마다 동·식물자원이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특히 최근에는 KBS 촬영장이 들어서 관광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우리 좋은 벗님네는 12월 중순 제1관문인 주흘관에서부터 제2관문인 조곡관을 거쳐 제3관문인 조령관까지 걸으며, 옛날 과거 보러 가던 선비의 과거길을 걸어보고 옛 군사 요충지로서의 산세도 구경하며, 겨울의 정취를 즐겨보기로 했다. 차량을 가지고 간 터라 일행 일부는 3관문 앞 주차장에 하차시키고, 남은 일행은 1관문까지 차량으로 이동하여 각각 반대방향으로 걷는 방법을 택했다. 차량은 서울을 출발하여 중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를 거쳐 중부내륙고속도로→수안보IC→3번국도를 이용했다.(1시간 40분 소요)


선비상과 문경새재박물관

        

  집단시설지구를 지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우측으로 올려다보니 주흘산 주봉(1,075m)이 머리 위로 높고, 좌로는 조령산(1,026m)의 이화령 산세가 압도한다. 관리사무소를 들어서니 신길원 현감비(申吉元 縣監碑)와 선비상이 보인다. 신길원은 45세에 벼슬길에 올라 선조 23년에 문경현감으로 도임하여 문경을 사수하다가 순국한 인물이다.

        
        

   이곳에 선비상을 세운 것은 이 길이 영남 선비들의 장원급제길로 이용되었다는 상징적 이유 때문일 것이다. 선비상 주변의 조형물은 사회의 지도적 계층으로서 선비의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다. 길 건너 반대쪽에는 야외공연장이 있다.  

        
        

  선비상을 지나면 우측에 바로 문경새재박물관, 문경시가 운영하는 박물관은 현재 리모델링을 진행 중이다. 박물관을 지나면 바로 장승공원으로 이어지고 제1관문인 주흘관이다.


제1관문인 주흘관(主屹關)

        
        

  주흘관은 숙종 34년(1708년)에 축조되었고, 구한말 항일의병 전쟁 때에 일본군이 불태웠던 궁문을 1922년에 다시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협문이 2개가 있고 팔작지붕이며 홍예문은 높이가 3.6m, 폭 3.4m, 길이 5.4m이고,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가 11cm나 된다.

        
        

   좌우로 4m가 넘는 석성이 200m이 이어지고, 1-3m의 부속석성이 동서로 각각 500m 이어진다. 또한, 특이한 점은 개울물을 흘려보내는 수구문이 아직도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이 주흘관은 3개의 관문 가운데 옛 모습 그대로를 지니고 있고, 문경 쪽에서 접근하기도 쉬워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본격적인 문경새재 탐방은 이곳에서 시작된다. 새재로 가는 길에 접어드니 퇴계(退溪) 이 황(李滉)의 <鳥嶺途中:새재로 가는 길)이 생각난다.

            雉鳴角角水潺潺(산 꿩 꾹꾹, 시냇물 졸졸)
            細雨春風匹馬還(봄비 맞으며 필마로 돌아오네.)
            路上逢人猶喜色(낯선 사람 만나서도 반가운 것은)
            語音知是自鄕關(그 말씨 정녕코 내 고향 사람일세.)


  옛날과 달라 산 꿩 소리는 들을 수 없으나 오가는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하는 것은 예나 이제나 다름이 없으리라.  

        

   주흘관 안쪽 광장 끝에는 경북 100주년 타임캡슐 광장으로 명명하고 기념캡슐을 매설해 놓고 있다.

KBS 촬영장

        
        

  주흘관 광장에는 경북개도 100주년 타임캡귤 구조물이 있고, 개울 건너 용사골에는 KBS 드라마 촬영장이다. 이 촬영장은 한국방송공사가 2000년 특별기획 대하드라마 제작을 위해 설치한 것으로, 19,891평의 부지에 궁 2동(고려, 백제), 기와 41동, 초가 40동이 들어서 국내 최초의「고려촌」을 형성하고, 대규모 야외 촬영장을 갖추고 있다.

        

   촬영장을 문경새재에 설치하게 된 동기는 후백제의 왕 견훤의 출생이 문경 가은이며, 무엇보다 촬영장 뒤편의 병풍처럼 둘러선 조령산이 고려의 수도 개성의 송악산과 흡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동안 ‘태조왕건’, ‘제국의 아침’, ‘무인시대’ 등을 촬영하였다.


일렬로 도열한 선정비군(善政碑群)

        
        

  주흘관을 벗어나면 길가의 선정비군(善政碑群)이 도열하듯 우리를 맞는다. 본래 선정비는 왕이 승하하면 장사를 지내고 신하들이 임금의 덕과 공을 찬양하기 위하여 세우는 것이 원칙이나, 이것을 모방하여 선정을 베푼 군수나 현감에 대하여 비를 세워 공덕을 잊지 않게 하였다. 1관문 뒤에는 당초 있던 비석과 관내에서 발견된 몇 기의 비석을 옮겨 20여기가 있다. 허나 이곳을 지나는 이들이 선정을 베푼 이들의 공덕을 얼마나 헤아릴까 궁금하다.  


조산(造山)과 지름틀바위

        

  이어 길 양옆으로 조산과 지름틀 바위. 조산(造山)은 조령원터 아래에 있다. 조산은 말 그대로 인위적으로 조성한 산을 일컫는다. 풍수지리학에서 볼 때 어느 곳의 기(氣)가 약한 지점에 인위적으로 인공의 산을 만듦으로써 그곳의 기운을 보강하고자 하는 의식이 깃들여 있다.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에서일 게다.

        
           

  지름틀바위는 조산과 조령원터 사이 길 옆(우측)에 있다. 이 바위는 옛날 기름을 짜는 기구와 흡사하게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길쭉하게 아래로 늘어뜨린 바위가 금방이라도 미끄러져 내려올 것만 같아 위태롭게 느껴지지만 잘 견뎌오며 오가는 길손들은 신기한 이 모양을 보고 발길을 멈추곤 한다.


원터(院址)

        
        

  지름틀바위를 지나면 우측 길 옆으로 장방형의 높은 돌담이 막아서는데 여기가 그 옛날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을 가기 위해 꼭 지나야 하는 조령원이 있던 자리 원터(院址)다.

  원(院)이란 옛날 출장하는 관원들을 위해 각 요로나 인가가 드문 곳에 두었던 나라에서 운영하던 국영(國營)의 숙식시설이었는데, 지금의 여관과 같았다. 권근의 기문(記文)에 의하면 나라의 들에는 10리 길에 여(廬-초막)가 있고 30리 숙(宿-여관)이 있었으며, 후세에는 10리에 장정(長亭-쉬는 집) 5리에 단정(短亭-쉬는 작은 정자) 하나씩이 있었는데 모두 나그네를 위한 것이었다. 나라에서 파발을 두어 사명(使命)을 전하고 원(院)을 두고 상인과 여행자에게 혜택을 주되 공과 사의 구별, 상과 하의 구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므로 파발에는 각각 관리가 있어 그 직책에 힘썼으나 원에는 다만 밭을 주고 사람을 모집하여 그것을 주관했을 뿐이다. 이 원은 산골짜기 외딴 곳에서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고 사람과 말은 지치고, 산적이나 야수의 습격 때문에 두려움을 느꼈던 길손들의 걱정을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다음은 율곡(栗谷) 이이(李 珥)의 시 <嶺鳥宿(영조숙:새재에서 묵다)>를 옮겨본다.

        

           登登涉險政斜暉(등등섭험정사휘) 험한 길 벗어나니 해가 이우는데
           小店依山汲路微(소점의산급로미) 산자락 주점은 길조차 가물가물.
           谷鳥避風尋樾去(곡조피풍심월거) 산새는 바람 피해 숲으로 찾아들고
           邨童踏雪拾樵歸(촌동답설습초귀) 아이는 눈 밟으며 나무 지고 돌아간다.
           口驂伏櫪啖枯草(口참복력담고초) 야윈 말은 구유에서 마른 풀 씹고
           倦僕燃松熨冷衣(권복연송위냉의) 피곤한 몸종은 차가운 옷 다린다.
           夜久不眼羣籟靜(야구불안군뢰정) 잠 못 드는 긴 밤 적막도 깊은데
           漸看霜月透柴扉(점간상월투시비) 싸늘한 달빛만 사립짝에 얼비치네.


  조령산성 안에 조령원(鳥嶺院)과 동화원(桐華院)이 있고 현의 서쪽 15리인 이화령 아래 요광원(要光院)이 있었고, 하늘재 밑에 관음원(觀音院)이 있고 현의 북쪽 4리에는 화봉원(華封院)이 있었다고 전하나 이 원터가 어느 것에 해당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977년 두 차례에 걸친 발굴로 온돌의 흔적과 기와, 토기, 자기편(片)을 비롯하여 살촉, 청동수저, 청동머리꽂이, 철재가위, 담뱃대, 부시, 손칼, 엽전, 말방울, 말발굽쇠, 정, 자갈, 마제도구, 문고리 등이 출토됐다고 한다.

  원터 앞에 세워 놓은 이정표에는 “해발 290m, 위쪽으로 교귀정 0.7㎞, 조곡폭포 1.5㎞, 제2관문 1.8㎞, 제3관문 5.3㎞, 아래로는 촬영장 0.9㎞, 제1관문 1.2㎞, 관리사무소 1.9㎞”를 알려 주고 있다.

   원터를 지나 우측으로 무주암 간판이 서있다. 간판 뒤로 들어가니 엄청난 크기의 바위덩어리가 평지에 놓여 있다. 산도 아닌데 평지에 덩그렇게 육중한 바위 하나가 놓여 있다는 게 신기하다. 팔왕휴게소, 마당바위를 지나면 주막이다.

        
        


주막(酒幕)
  
        
        

  원터를 지나면 왼쪽에는 주막(酒幕)이 있던 자리에 초가를 복원해 놓았다. 이 주막은 영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길로 오르던 선비들, 거부(巨富)의 꿈을 안고 전국을 누비던 상인들이 험준한 새재길을 오르다 피로에 지친 몸을 한 잔의 술로 여독을 풀면서 서로의 정분을 나누며 쉬어가던 곳이리라.

        

  지금은 인적이 없는 주막에 잠시 발길을 멈추고 조선 중기선조~효종조에 살았던 문신 고용후(高用厚)(1577년~1652년)의 시, <聞慶酒幕 奉寄月沙先生: 문경 주막에서 월사 선생께 드리다>를 읊어본다.

            幾年門下受恩私(문하에서 입은 은혜 몇몇 해입니까)
            主屹山前追棶馬時(주흘산 아래에서 풀 먹일 때지요)
            西望長安千里遠(서쪽으로 바라보는 서울이 아득하여)
            雪晴茅店自吟詩(눈 개인 주막에서 혼자 읊조립니다.)


  산수 경관이 수려한 곳에 자리 잡은 주막은 옛 형태대로 되살려 선조들의 숨결과 전통문화의 얼을 되새기고 있다.


용연-용추(龍淵-龍湫)

        

  주막 열 계곡에는 예로부터 시인(詩人)이나 묵객(墨客)이 즐겨 찾는 경승지(景勝地)인 용연-용추(龍淵-龍湫)가 있는데, 『동국여지승람』「문경현편(聞慶縣篇)」에 의하면 새재 밑의 동화원 서북쪽 1리에 있다고 쓰여 있다. 이 폭포는 사면과 밑이 모두 돌이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며, 용이 오른 곳이라고 전한다.(在鳥嶺桐院西北一里, 有瀑布四面及底背石, 其瀑不可測, 俗傳龍騰處)

        

  바위에 새겨진 용추(龍湫)라는 큰 글씨는 "구지정(具志禎) 숙종(肅宗) 25년(己卯, 1699)에 쓰다(己卯具志禎書)"라고 새겨져 있다. 이곳의 경관을 읊은 시(詩) <過鳥嶺龍潭: 새재의 용담을 지나며>가 전한다.

            雷雨包藏只一泓(우렁찬 폭포 소리 물속에 잦아들고)
            兩邊山木作幽情(에워싼 나무들로 그윽하고 깊어라.)
            問龍夙世脩何行(용아, 너는 예로부터 어떻게 닦았기에)
            今日深潭臥不驚(지금 여기 누워서도 놀라지 않느냐?)


                                                                        홍언충(洪彦忠)(성종4~중종3)


  용추는 특히 시인 묵객들이 많이 찾았던 곳으로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궁예의 최후를 촬영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교귀정(交龜亭)

        
        

  용연(龍淵-龍湫)위에는 교귀정(交龜亭)있다. 교귀정은 새재 1관문과 2관문 사이에 위치한 정자로 체임(遞任)하는 경상도 신구관찰사가 관인(官印)을 인수인계하던 교인처(交印處)이다. 문경현감이던 신승명(愼承命)이 건립하였는데, 조선후기에 소실되어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 새롭게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관이 아름답고 용이 하늘로 올랐다는 전설을 지닌 용연(龍淵)이 잘 바라다 보이는 길가에 자리를 잡았다.

  자연석으로 높지막하게 축대를 쌓아 터를 높이고 길과 나란하게 정자 한 동(棟)을 앉힌 다음 앞마당으로 오르내리는 계단을 좌우 양쪽으로 내어 두었다. 길에서 계단을 오르면 정자의 옆으로 널찍하고 길다란 대지가 2단으로 나뉘어 상승감을 느끼며 정자에 접근하도록 계획되어 있다.  

        

  지면에서 바닥을 높여 우물마루를 깔고 건물의 정면 어칸쪽에 자연석 장대석을 층층이 깔아 4단의 계단을 만들고 정자에 오르내릴 수 있게 하였다. 건물의 사면(四面)이 개방되어 있고 계자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현재 건물은 단청이 생략되어 있어 건물을 이루는 모든 목부재(木部材)가 풍우한설(風雨寒雪)에 노출된 채로 방치된 상황이다. 건물의 어칸 처마 밑에는 교귀정 편액이 걸려 있다.

        

  1616년(광해군 8)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대제학,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이명한(李明漢)(선조28~인조23)은 문경 사또 남진과 이별하다(次南聞慶 鎭 韻爲別)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綠陰千頃萬頃(녹음은 천 경 만 경으로 펼쳐졌고)
            黃鳥一聲兩聲(꾀꼬리는 꾀꼴 꾀꼴 울음을 우네)
            主人今宵盡醉(주인은 오늘밤 술에 흠뻑 취했고)
            客子明日將行(나그네는 내일이면 길 떠나간다네)



  어디 그뿐인가. 1559년(명종 14) 정시문과에 급제한 후 대사간, 부제학 등을 역임했던 신응시(辛應時)(중종37~선조18)는 문경사또와 이별하며(別辛聞慶 瑞 赴任)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別意江之水(이별의 기분은 강물 같은데)
            歸程嶺以南(영남으로 그대는 떠나간다네)
            西風一杯酒(서풍을 맞으며 술 한 잔 마시거니)
            日暮正難(해가 저무니 이 일을 어찌할거나)

  
  관직이 그렇고, 모든 인간사가 그러하듯이 이별의 자리에는 남다른 회포가 있고, 별리(別離)의 아쉬움이 깃들기 마련, 술로 달래던 옛 선인의 모습들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교귀정을 지나 오르막 길을 조금 오르면 돌멩이를 쌓아 만든 탑들이 시선을 끄는데 가까이 다가서니 소원성취탑이란다. 아마도 과거길에 오르는 선비들이 이 오르막 길에서 잠시 쉬면서 돌을 가져다가 과거급제의 소원을 담아 하나씩 돌무더기를 쌓았으리라. 예나 이제나 출세를 위한 염원은 마찬가지였을 게다.


꾸구리 바위와 산불됴심비

        
        

  교귀정을 지나 조금 오르다 보면 조곡관 조금 못 미쳐 왼편 개울에 있는데, 이곳에는 재미 있는 전설을 지닌 ‘꾸구리 바위’라는 것도 있다. 이 바위 밑에는 송아지를 잡아먹을 정도로 큰 꾸구리가 살고 있어 지나가는 아가씨나 젊은 새댁들을 희롱했다고 한다. 꾸구리는 잉어과에 속하는 한국 특산어류. 지금도 이 바위에 동전을 던지고 소원을 빌면  한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근처에 있는 산불됴심비도 눈여겨 볼만하다. 다듬지 않은 높이 183㎝, 폭 75㎝ 정도의 자연석에 고어체로 음각된 이 비석은 오가는 길손들에게 산불조심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하여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자연보호의 시금석이고 ‘조심’을 고어인 ‘됴심’으로 기록한 유일한 한글비석으로 가치가 있어 지방문화재 자료 제266호로 지정됐다.

        
        
  
  산불됴심비에서 200m 위치에 있는 조곡폭포(鳥谷瀑布)는 산수 수려한 주흘산 깊은 계곡에서 떨어지는 20m의 3단폭포이다. 조곡폭포를 지나 청정한 계곡물을 건너면 좌우의 계곡이 갑자기 좁아지며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이 나타난다. 비록 군사작전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당장 이곳이 천혜의 요새임을 느끼게 하는 곳으로 기암절벽이 조곡관을 굽어보며 우람하게 서 있다.


중성(中城)인 조곡관(鳥谷關)과 그 주변

        
        

  제1, 제3관문이 조선 숙종 34년(1708)에 세워진 반면, 이 조곡관은 1594년에 설치, 임진왜란을 겪은 후 숙종(肅宗)때에 관문 없이 성곽만 개축하였고 ,1907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면서 이 성마저 파괴하였으나 1975년에 완전 복원하고 옛 이름인 조동문을 버리고 조곡관이라 이름하였으며, 지금의 누각은 정면이 3칸 측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 있고, 팔작(八作)지붕이다. 부속산성의 길이는 동쪽으로 400m, 서쪽으로 100m이다.

        
        

  조곡관 뒤편 우거진 송림(솔내숲)은 신립장군의 한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가로이 산들바람에 춤을 춘다. 이곳은 쉬면서 마음의 여유를 가다듬을 수 있는 공간이며,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인 계곡사이로 흐르는 용천수인 조곡약수(鳥谷藥水)는 물맛이 좋아, 길손의 갈증과 피로를 풀어주는 영약수(靈藥水)로 알려져 있다. 조곡관을 지나 약 600m쯤 가면 도로변에 자연석을 깎아 새겨놓은 문경새재 민요비(民謠碑)를 만나게 되는데, 어디선가 촌로의 애절하고 구성진 민요가락이 들려와 탐방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 / 방망이로 다 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홍두깨 방망이 팔자 좋아 큰 애기 / 손길에 놀아난다.
           문경새재 넘어갈 제 구비야 구비야 / 눈물이 난다.


  어느 고장이나 고개에는 떠나는 이와 남는 이가 엮어내는 이별의 정한이 서려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의 한풀이가 바로 민요 ‘아리랑’이었다. 강원도의 ‘정선아리랑’, 전라도의 ‘진도아리랑’, 경상도의 ‘밀양아리랑’. 문경새재에도 마찬가지로 아리랑이 있다. 가슴에 하나씩 사연을 품고 새재를 넘을 때 고되고 적막한 길 위의 피로를 옛사람들은 아리랑 가락을 흥얼거리며 풀었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아리랑이 그렇듯이 거기에는 노래하는 이의 사연이 어딘가 한 소절씩은 담겨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숱한 사람과 그들의 이야기가 담긴, 우리 민족의 고개가 바로 문경새재이다.


시(詩)가 있는 옛길

        
        

  제2관문에서 문경새재 아리랑비가 있는 길옆의 오솔길은 문경새재를 소재로 한 시들을 돌비에 새겨 놓고 <시가 있는 옛길>로 조성해 놓았다.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쓴 시 <겨울날 서울 가는 길에 새재를 넘으며(冬日領內赴京 踰鳥嶺作)>는 다음과 같다.  
  
         嶺路崎山虛苦不窮(새재의 험한 산길 끝이 없는 길)
         危橋側棧細相通(벼랑길 오솔길로 겨우겨우 지나가네.)
         長風馬立松聲裏(차가운 바람은 솔숲을 흔드는데)
         盡日行人石氣中(길손들 종일토록 돌길을 오가네)
         幽澗結氷厓共白(시내도 언덕도 하얗게 얼었는데)
         老藤經雪葉猶紅(눈 덮인 칡넝쿨엔 마른 잎 붙어있네)
         到頭正出林界(마침내 똑바로 새재를 벗어나니)
         西望京華月似弓(서울 쪽 하늘엔 초승달이 걸렸네)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宿鳥嶺:새재에서 묵다>는 해가 기운 밤 새재의 풍관을 노래했다.  
  
         登登涉險政斜暉(험한 길 벗어나니 해가 이우는데)
         小店依山汲路微(산자락 주점은 길조차 가물가물.)
         谷鳥避風尋去(산새는 바람 피해 숲으로 찾아들고)
         邨童踏雪拾樵歸(아이는 눈 밟으며 나무 지고 돌아간다.)
         羸伏啖枯草(야윈 말은 구유에서 마른 풀 씹고)
         倦僕燃松冷衣(피곤한 몸종은 차가운 옷 다린다.)
         夜久不眠靜(잠 못 드는 긴 밤 적막도 깊은데)
         漸看霜月透柴扉(싸늘한 달빛만 사립짝에 얼비치네.)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은 <踰鳥嶺 宿村家:새재를 넘어 시골집에 묵다>라는 시를 남겼다.  
  
         嶺分南北與選(새재는 남북과 동서를 나누는데)
         路入靑山中(그 길은 아득한 청산으로 들어가네.)
         春好嶺南歸不得(이 좋은 봄날에도 고향으로 못 가는데)
         啼盡五更風(소쩍새만 울며불며 새벽바람 맞는구나.)


  또 조선 중기의 학자인 류성룡(柳成龍)은 <宿鳥嶺村店:새재에서 묵다>라는 시는 덧없는 세월이 기울어 몸은 불편해지고 벼슬마저 덧없이 느끼지는 소회를 읊고 있다.  

        
        
  
          林風起(살랑살랑 솔바람 불어오고)
          溪響生(졸졸졸 냇물 소리 들려오네.)
          幽懷正遞(나그네 회포는 끝이 없는데)
          山月自分明(산 위에 뜬 달은 밝기도 해라.)
          浮世身如寄(덧없는 세월에 맡긴 몸인데)
          殘年病轉(늘그막 병치레 끊이질 않네.)
          南來還北去(고향에 왔다가 서울로 가는 길)
          簪笏愧虛名(높은 벼슬 헛된 이름 부끄럽구나.)


  이밖에도 조임도(趙任道)는 <鳥嶺路上偶吟:새재 길에서 문득 노래하다>에서 높은 산과 계곡 사이로 난 새재길을 숨차게 오르고 있는 모습을 노래했다.      

          流水蛟蛇走(흐르는 시냇물 뱀처럼 날래고)
          奇峯劒戟森(기이한 봉우리 창검을 세운 듯.)
          秋風西去路(찬바람 맞으며 서울로 가는 길)
          匹馬費長吟(필마는 숨이 차서 헐떡거리네.)


  이들 외에도 조선시대의 서거정(徐正巨), 홍귀달(洪貴達), 김안국(金安國), 목대흠(睦大欽), 조태억(趙泰億), 권섭(權燮) 등의 학자, 문신들이 새재를 넘으며 남긴 글들이 지나는 길손의 발길을 잡는다.

        
        

  시가 있는 옛길을 지나면 바위굴과 바위굴에 얽힌 전설 즉 새재우(雨)의 간판이 서있고, 귀틀집도 보인다.  귀틀집은 옛 가옥구조의 한 모습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길을 따라 양은 적지만 계곡물이 흐르고 수줍은 듯 색시폭포도 숨어 있다.  


신립 장군의 이진터(二陣址)

        

  시가 있는 옛길이 끝나는 곳에 이진터(二陣址)가 자리 잡고 있다. 임진년(壬辰年, 1592) 왜장(倭將)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18,500명의 왜군을 이끌고 문경새재를 넘고자 진안리에서 진을 쳤을 때 선조대왕의 명을 받은 신립(申砬) 장군이 농민 모병군(募兵軍) 8,000명을 이끌고 대치하고자 제1진을 제1관문 부근에 배치하고 제2진의 본부를 이곳에 설치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신립(申砬) 장군은 천혜의 요새인 새재에서 왜적을 막자는 김여물 부장 등 부하들의 극간을 무시하고, 이곳 조령산 능선에 허수아비를 세워 초병으로 위장하고 충주 달천(탄금대) 강변으로 이동하여 배수진을 쳤다. 그런데 왜군 초병(哨兵)이 순찰할 때 조선 초병 머리 위에 까마귀가 앉아 울고 가는 것을 보고 위장인 것을 알아차리고 왜군이 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결국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친 신립(申砬) 장군의 조선 농민군은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맞아 끝까지 싸웠으나 모두 장렬히 전사하였다.


장원급제길과 동화원(桐華院)

        
        

  이진터를 지나면 조금은 가파른 길이다. 조선조 선비들이 장원급제를 꿈꾸며 과거차 한양으로 넘나들던 옛적 그대로의 길이 진행된다. 영남대로인 문경새재는 문경의 옛 지명인 ‘문희’에서 드러나듯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 하여 영남은 물론 호남의 선비들까지 굳이 먼 길을 돌아 이 길을 택했던 것이다. 또한 택리지에 “조선 선비의 반이 영남에서 배출되었다"라는 구절이 있음을 볼 때 참으로 수많은 선비와 길손들이 이곳을 왕래하였음을 헤아릴 수 있고, 아울러 장원급제한 선비들도 많아 이 길을 장원급제길이라 부르게 되었다. 길이 좀 가파른 것은 장원급제가 그리 쉽지 않음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것일까? 숨이 차다.

        

  장원급제길 우측으로 갈림길에 동화원 팻말이 보이고 건물 하나가 보인다. 동화원이다. 동화원은 옛날 새재길을 다니던 과객들이 묵던 주막이었다. 현재는 관광객과 등산객을 위한 식당과 매점으로 쓰인다. 대부분 등산객들이 많으며, 이들이 음식이나 술을 먹기도 하고, 음료수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전설이 깃든 책바위

        
        

  장원급제길에서 동화원으로 들어가는 길을 지나면 길 왼쪽 길가에 책바위라 이름을 붙인 돌무더기가 있다. 돌을 책처럼 쌓아 놓은 책바위는 지름 2m, 높이 2m 크기의 돌탑. 뒤편장대 위에 기러기 모양의 새를 나무로 깎아 만든 20여점의 솟대는 희망과 경사를 상징한다.

  이곳에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옛날 인근에 살던 부자가 천신만고 끝에 얻은 아들이 몸이 허약해져 용한 도사를 찾아 물으니 "담장을 헐어 책바위 뒤에 쌓아 놓고 지극 정성으로 기도하라"고 하였다. 부자는 그 말을 듣고 돌담을 헐어 3년간 돌을 책바위까지 날랐다. 그러던 중 몸이 튼튼해졌고, 공부를 열심히 해 장원급제까지 했다고 한다.

  이후 조선시대 문경새재를 넘어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들이 이곳에서 장원급제의 소원을 빌었고, 현대에 와서도 해마다 입시철이면 하루 평균 400명 정도가 이곳을 찾아 합격을 기원한단다. 책바위를 지나면 마지막 관문인 제3관문 조령관(鳥嶺關)이다.


제3관문 조령관(鳥嶺關)

        

  조령관은 새재 정상에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해 선조 때 쌓고 숙종초(숙종 34년 : 1708)에 중창하였다. 1907년에 훼손되어 육축만 남고 불탄 것을 1976년도 홍예문과 석성 그리고 누각을 복원했다. 이 누각은 정면이 3칸, 측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 있으며 팔작지붕이다. 좌우의 석성은 높이 4.5m, 폭 3.2m 길이 185m이고 부속산성이 이어져 있다.  

  3개의 관문 중에서 가장 멋있고 웅대한 조령관은 성곽과 함께 새재의 험한 자락을 감상하기에 가장 적당한 곳이다. 조령관 앞에는 넓은 잔디밭과 휴게실, 조령약수기 있고, 조령관을 지키던 군사(軍士)들의 대기소(待機所)였던 곳으로 전해지는 군막(軍幕)터가 있다.

        

  조령관을 기준으로 남쪽은 경상북도 문경 땅이고 북쪽은 충청북도 충주 땅이다. 이곳에서 북쪽으로는 마폐봉을 지나 북암, 동암문, 부봉, 주흘산으로 가고 남쪽으로는 깃대봉, 조령산 공산진, 이화령으로 이어진다. 조선 후기의 문신 김성탁(金聖鐸)은 이 조령관에 올라서 한 편의 시를 남겼다.

           踏雪緣氷上鳥關(눈을 밟고 얼음 잡으며 조령관에 올라)  
           關頭杳杳見鄕山(관문 위에서 가물가물 고향을 바라보네)
           遙知一抹雲橫處(아득히 먼 구름 한 점 놓인 저 먼 곳에)  
           老母憑門望早還(노모께서 문에 기대어 날 바라고 계시리)

                                                                 - 조령관에 올라서(上鳥嶺關)


        

  관문에 올라서면 전망이 좋아 머나먼 고향을 떠올리며 고향에 계신 노모(老母)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것이다. 제1관문~제3관문까지 왕복한다면 13km, 4시간 30분이 소요되나, 우리는 다음 일정 때문에  제3관문에서 충주 쪽으로 내려오기로 했다.    


조령산 자연휴양림

        
        

  조령관에서 충주 쪽으로 내려오는 길은 문경 쪽에서 오르는 길보다 가까우나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있어 단조롭다. 그 때문인지 최근에 도로 옆으로 걸어서 내려갈 수 있는 산책길을 새로 내었다. 또 이 길을 걷기 싫은 사람들은 조령산 자연휴양림 안으로 난 길을 따라 숲 속을 걸을 수도 있다. 조령산 자연휴양림은 산막과 야영장이 잘 갖추어진 삼림욕장으로 인기가 높다. 산막은 4인용과 5-8인용 그리고 25평의 단체숙소가 있다. 조령산 자연휴양림은 신선봉, 마역종, 조령관, 치마바위봉에 둘러싸여 있으며, 서쪽 고사리 쪽으로만 드나들 수 있다. 이곳은 고속도로에서의 접근성이 좋고 인근에 수안보온천과 스키장이 있어 사시사철 관광객이 찾는다.

        

  자연휴양림에서 신혜원 고사리 마을까지는 음식점들이 있어 이 지역의 토속음식을 맛볼 수 있다. 마을로 내려오다 보면 오른쪽으로 큰 대문이 보이고 그 안에 꽤 큰 건물이 보인다. 이곳이 이화여대(梨花女大) 고사리 수련원 별관인 금란서원(金蘭書院)이다. 옛날 이대총장과 문교부장관을 지냈던 김옥길 선생이 거처했던 곳으로 지금은 이대 교직원들의 숙소로 쓰인다. 고사리 주차장에 이르면 길은 더 넓어져 시내버스와 같은 대형차들이 운행한다.

출처 :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 글쓴이 : 무심재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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