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의 진실

[고지도의 진실]1621년 COREA에서 연경까지는 5천650리였다

작성일 작성자 anian
[고지도의 진실]1621년 COREA에서 연경까지는 5천650리였다
현 북한의 평안도 선천에서 중공 연경까지는 1208km(약 2570리)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홍익/역사/통일=플러스코리아타임즈-김종문] 1700년 이전에 제작됐다는 영문고지도들의 대부분에 MONGAL(몽골, 蒙古)은 Bering Strait(베링해협)서쪽 北海(북해)인근에 있었다.蒙古(몽골)의 남동쪽 수천리에 있었던좌우천리의 거대한 백두산(白頭山)은 Alaska(알래스카)의 Mt McKinley(맥킨리산, 6168m)이다.

鴨綠江(압록강)은 白頭山서쪽에서 발원하였으며 서쪽으로 수천리를 흐르면서 여러 강들을 흡수하여 거대한 강으로 변하였다. 鴨綠江(압록강)은 역사상 天下 三大江(천하 삼대강)으로 하류의 너비가 50km에 달하는 거대한 강이었다. 압록강은 의주이남부터 바다라 불렸다.

참조기사: '몽골',17세기까지 1만리 떨어진 북해 근처에 있었다  
참조기사: 현 백두산은 조선의 백두산과 달라, '몽골의 동남쪽에 있었다'
참조기사: 천하 3대강 '압록강'은 북한의 압록강이 아니다  
참조기사: 조선의 압록강 하류넓이 50km, 북한의 압록강 고작 700m  

선천에서 연경까지는 5천 6백 50리

白頭山(백두산) 북쪽 滿洲(만주)에서 발흥한 여진족들은 1616년 누르하치의 지도 아래 흥경에 도읍을 정하고 後金(후금)을 건국한다. 大朝鮮(대조선)의 中朝(중조, 중국조정)가 있는 燕京(연경)으로 조공을 가던 COREA(동국조선, 東國朝鮮)는 광해 13년(1621년, 신유년)부터 해로로 登州(등주)를 가서 육로로 연경을 가게 된다. 그 거리는 5650리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제5권 사대전고(事大典故)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광해(光海) 신유년 이후의 항해노정(航海路程)은 선천(宣川) 선사포(宣沙浦)에서 발선(發船)하였다. 혹은함종(咸從)을 경유해서 가고 혹은 안주(安州) 노강진(老江鎭)을 경유하여 간다. 철산가도(鐵山椵島) 60리, 거우도(車牛島) 1백 40리, 녹도(鹿島) 5백리, 이로부터 요동땅이다., 석성도(石城島) 6백리, 장산도(長山島) 3백리, 광록도(廣鹿島) 2백리, 삼산도(三山島) 2백 80리, 평도(平島) 2백리, 황성도(皇城島) 1천리, 타기도(鼉磯島) 2백리, 묘도(廟島) 2백리, 등주(登州) 80리, 이상은 해로(海路)인데 3천 6백 80리이다.“

"황현(黃縣) 60리, 황산역(黃山驛) 60리 …중간생략… 대정점(大井店) 50리, 경도(京都) 40리이다. 이상은 육로(陸路)인데 1천 9백리이며, 합계 5천 6백 50리이다. 《고사촬요》 《통문관지》"

역사기록상 1621년(광해13) COREA의 조공로는 선천(宣川)에서 明(명)의 登州(등주)까지 해로(海路)가 3천 6백 80리이며, 등주에서 燕京(연경)까지 육로(陸路)가 1천 9백 리였다. 총 5천 6백 50리(약 2655km)에 달하는 머나먼 거리였던 것이다. 
 

▲  A: 東國朝鮮(동국조선)에서 中朝(중조, 중국조정)인 明(명)으로 가는 조공로(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B: 현재의 평안도(平安道) 선천(宣川)에서 연경까지의 조공로.  역사기록에 평안도 선천과 등주의 거리는 3680리(약 1729km)였으나 현재의 거리는 452km이다. 원래 등주에서 연경까지의 조공로는 1900리(약 893km)였으나 현재는 약 756km이다. 역사기록상 1621년의 조공로는 총 5650리(약 2655km)였으나 현 국사학계의 조공로는 1208km(약 2570리)정도로 역사기록들과 크게 불일치한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현재 東北亞(동북아) N. KOREA(북한)의 평안도(平安道) 선천(宣川)에서 CHINA(중공)의 연경까지의 거리는 1208km(약 2570리)정도이다. 역사기록상의 5650리의 반도 못되는 짧은 거리로 역사기록들과 완전히 불일치하지 않는다. 현재의 조공로를 역사기록들과 비교해 보면 곳곳에서 큰 차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압록강 하류의 바다는 조수가 심했다. COREA에서 연경을 가는 해로는 조수가 빠지면 배의 운항을 할 수가 없었다고 나온다. 

조경일록(朝京日錄) 중에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들어 있다.

1636(인조 14) 7월 25일
"(신도근처에서)조수가 물러가서 모래밭이 드러났으며, 바람이 순조롭지 않으므로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뱃사람들이 바다로 내려가서 맨손으로 홍어(洪魚) 10여 마리를 잡아왔다."

현재의 신도는 탁트인 바다에 있다. 조수가 물러가서 모래밭이 드러나고 물이 들어올 때까지 배가 설 리는 없는 지형인 것이다. 1636년의 사절단은 10월 2일 영원위 앞바다에서도 조수가 빠져나가서 배가 종일 멈추어 있었다. 

1636(인조 14) 10월 2일
"해 뜰 무렵에 배를 타고 성중(城中)으로 가려고 하였는데, 조수가 빠져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멈추어 버렸다. 저녁때 조수가 들어오고 바람이 순하여 돛을 걸어 달고 바다를 지나면서 배 위에서 신에게 제사 드렸다."

1636(인조 14) 7월 20일
"10여 리를 채 가지 못했을 때 조수가 거슬러 오므로 배를 멈췄다."

"달이 뜨고 조수가 밀려오고 동풍이 또 일어서 돛을 달고 떠나 2경(二更)에 피도(皮島) 앞바다에 당도하니,"

▲ 영문고지도들로 복원한 16세기 지형과 요동반도의 지명들  원래의 압록강은 베링해 지역을 동에서 서쪽으로 수천리를 흘렀으며 강의 하류가 길어서 조수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역사기록상에 동국조선COREA와 明(명)으로 가던 조공사절단들은 조수로 인해 바다가 얕아져 운항를 못하는 날들이 많이 있었다. 그것은 요동반도와 평안도 사이에 있었던 바다가 실은 바다처럼 넓은 압록강의 하류였던 때문이다. 압록강은 하류의 너비가 50km에 달하는 거대한 강이었으며 의주이남에서 서쪽으로 수천리를 흘러 남대양인 태평양으로 흘러갔던 것이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COREA의 압록강은 천하 3대강이라 불렸다. 압록강은 하류가 너비가 50km에 달하는 거대한 강으로 바다라 불렸으며 압록강의 하류는 바닷물이 수천리를 들어오고 나갔던 것이다. 바다라 불렸으나 실은 강이었기에 조수가 빠지면 수심이 낮아져 배가 바다 중간에 서곤 했으며 조수가 거슬러 오면 운항을 멈추곤 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사례들은 여러 기록들에 나탄다. 

광록도를 지나 바닷가 연해에 수백리의 땅이 있었다.

1636년 북경을 가는 사신들은 宣川(선천)에서 서쪽으로 1800여리를 가서 廣鹿島(광록도)를 지나서 육지에 내리게 된다. 당시 연해 수백리의 땅은 後金(후금)으로 인해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었다고 한다. 

조경일록 병자년 (1636, 인조 14) 8월 1일 기록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광록도를 지나서 오시에 복자산(福子山)에 당도하니, 바람은 잠잠하고 물결은 고요하여 만 리가 1개의 거울 같은데, 드디어 돛을 내리고 노를멈추었다. 뱃사람들은 육지에 내려 촌락의 빈 터로 가서 복숭아를 따오기도 하였는데, 담장과 주춧돌, 섬돌이 완연히 옛 모습 그대로였고 또 맷돌[石磨] 등이 있었다. 수전(水田)과 육전(陸田)은 모두 말라묵은 황무지였고 사람의 자취가 없었다. 대개연해 수백 리의 지경이 전연 거주하는 백성이 없는 공허한 땅이 되어 있으니,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역사기록상에 선천에서 광록도까지의 거리는 1800리(약846km)이나 현재의 거리는 226km밖에 되지 않는다. 광록도를 지나서 연해에 수백리의 땅이 비어있다 하였으나 현재의 광록도 서쪽에는 좌우 20km정도의 작은 반도와 바다가 있다. 거리가 전혀 맞지 않으며 수백리의 땅 자체가 없는 것이다. 
 
▲ 역사기록상에 廣鹿島(광록도)는 선천(宣川) 선사포(宣沙浦)에서 서쪽으로 1800리(약 846km)정도에 있었다. 현재 남북의 한반도에 광록도는 선천에서  226km정도로 1800리에 크게 못 미친다. 조경일록에 사신이 광록도를 지나 연해에 내려서 인근 수백리가 인적이 없다 했으나 현재의 요동반도는 광록도를 지나면 좌우 약 20km(약 42리)정도의 좁은 땅과 바다이다. 연해에 수백리의 땅 자체가 없다. 역사기록상에 광록도에서 평도의 거리는 480리(약 225km)였으나 현재의 평도는 120km정도의 거리에 있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지명과 역사기록들이 불일치하는 사례는 현재의 발해만에 있는 조공로의 중요지명들 대부분에서 보인다. 平島(평도)는 廣鹿島(광록도)에서 480리 거리에 있었으나 현재의 평도는 260리(약 120km)정도의 거리에 있다. 480리와 260리는 크게 다른 거리이다. 평도를 지나 등주 또한 크게 다르다.

등주(登州)는 평도(平島)에서 1480리

燕京(연경)을 가는 COREA(동국조선, 東國朝鮮)의 사신들은 平島(평도)에서 1480리(약 710km)를 북상하여 登州(등주)에 닿았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제5권 사대전고(事大典故)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광록도(廣鹿島) 2백 리, 삼산도(三山島) 2백 80리, 평도(平島) 2백 리, 황성도(皇城島) 1천 리, 타기도(鼉 2백 리, 묘도(廟島) 2백 리, 등주(登州) 80리 이상은 해로(海路)인데 3천 6백 80리이다.“

平島(평도)에서 登州(등주)까지의 거리는 1480리(약 710km)였다.

조천항해록(朝天航海錄) 1624(인조2년) 8월 중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들어 있다.

20일(임인)
"조금 후에 동풍이 안개를 걷어 보내고 바다가 청명하니,"

"바람이 세차게 불어 삼산(三山)이 홀연히 뒤로 가고 평도(平島)가 앞에 나타났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 물새가 집을 찾아들 무렵에 여러 선박에 함께 정박했다. 이날은 600여 리를 갔다."


8월22일

"머리를 돌리자 여순(旅順)이요, 눈 깜짝할 사이에 황성도(皇城島)에 다다랐다."

"여러 번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5일 만에 광록도(廣鹿島)에 다다랐는데, 단숨에 묘도(廟島)에 닿았으니 실로신의 음덕이로다."

"이날은 1000여 리를 갔다."


평도를 지나서 하루를 쉬고 22일廟島(묘도)에 닿았다. 평도에서 묘도까지의 거리는 1480리(약 710km)였으며 뱃길의 종착지인 등주에서 80리 거리였다. 
 
▲  A: 황여고(皇輿考)에 실린 海運圖(해운도), B: 현재의 평도와 등주  평도는 현재 요동반도의 남서쪽 가까이에 있다. 역사기록상에 평도와 등주의 거리는 1480리(약 710km)이나 현재의 평도와 등주는 100km정도의 거리이다. 원래의 등주는 평도의 북쪽에 위치하였으나 현재의 등주는 남쪽에 위치하였다. 위의 해운도는 현재의 동북아에 발해만의 지형과 비슷하며 현재의 국사와 일치한다. 그러나 대조선COREA의 역사기록들과는 불일치한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현재 평도와 등주의 거리는 212리(약 100km)정도로서 1480리(약 710km)정도라는 역사기록과 완전히 불일치한다. 뿐만 아니라 원래의 등주는 평도의 북쪽에 위치하였으나 현재의 등주는 남쪽에 위치하였다. 역사기록과 정면 배치된다
 
등주는 평도의 북쪽에 있었다.

COREA사신들이 평도에서 등주를 갈 때는 동남풍을 타고 갔으며 돌아갈 때에는 서남풍과 북풍을 타고 갔다.

조천항해록(朝天航海錄) 1625(인조 3) 3월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22일(경오)
"이제 돌아가는 돛대 다시 옛날 묘도(廟島) 앞 다다랐는데, 양양(洋洋)한 신의 모습 위에 계신 듯하니,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도와주리로다."

24일(임신)
청제(靑帝 동방을 맡은 신(神))가 직무를 닦아 바야흐로 동남풍이 불고 있으니, 서쪽으로 가는 자 순풍 만났도다. 이치가 순환하여 그다음은 우리 차례이니, 신이 굽어살피사 백제(白帝 서방을 맡은 신(神))와 상의하여 서남풍 보내 주소서.”

25일(계유)
"아침에 서쪽에서 순풍이 불어오므로 뱃사람들을 독촉하여 닻줄을 거두고 돛을 달며"

평도에서 등주를 가려면 동남풍이 순풍이었으므로 내려갈 때에는 반대의 바람은 서북풍일 것이나 절기에 따라 부는 바람이 다르므로 3월의 사신들은 서남풍을 원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  16,18세기 영문고지도들을 참고하고 16세기지형을 그려보면 위와 비슷하다. 역사기록상에 大朝鮮(대조선)의 中朝(중조, 중국조정)인 明(명)은 燕京(연경)에 있었다. 1629년 燕京(연경)을 갔던 東國朝鮮(동국조선)의 조공사절단은 평안도 선천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2520리(약 1184km)를 이동하여 平島(평도)에 이르렀다. 이후 1480리(약 710km)를 북상하여 登州(등주)에 이르러 육로로 1천 9백 리를 가서 연경에 도착하였다. 합계 5천 6백 50리(약 1202km)의 머나먼 길을 갔던 것이다. 그러한 기록들은 동북아에 남북의 한반도와 발해만에는 완전히 불일치하며 원래의 압록강이 있었던 베링해지역에는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조천항해록(朝天航海錄) 1625(인조 3) 3월 29일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바다에 안개가 모두 사라지고 북풍이 크게 일어나므로 사공들이 배를 띄웠는데, 겨우 10여 리를 가자 홀연히 역풍이 불어오므로 뱃머리를 돌려 도로 석성도 내항으로 들어왔다."

연경에서 귀국하던 사신들이 북풍을 타면서 내려오다 남풍이 불자 되돌아갔다. 현재의 등주가 원래의 등주라면 남풍을 타고 북쪽으로 COREA로 돌아갔을 것이다. 원래의 등주가 평도의 북쪽에 있었기에 북풍에 내려왔던 것이다. 이후 평도에 이른 사신들은 서풍을 타고 동쪽으로 수 천리를 이동하여 귀국을 하였다.

1644년 이전 大朝鮮(대조선)을 다스리시던 聖天子(성천자)가 계시던 中朝(중조, 중국조정)는 燕京(연경)에 있었다. 동국조선은 중국조정의 조회에 참석하지 않고 스스로 聖敎(성교)를 행하는 동방의 황제국이었으나 개국 초부터 3대황제인 세종대왕까지만 399회에 달하는 조공사절을 보내었다. 당시의 관례는 조공을 가서 방물을 바치면 중국조정은 몇배의 가치가 있는 회사품(回賜品)을 주어야 했다. 동국조선이 조공을 너무 자주 온다며 불평하였고 동국은 온갖 구실을 대면서 수많은 조공사절단을 보내었었다. 

동방을 다스리던 동국조선은 대조선의 중조에게 믿음직한 나라였으며 수많은 조공으로 중국의 부를 빼가던 부담스런 나라였던 것이다. 

역사기록상 COREA의 1621년 해상조공로는 평안도 선천에서 연경까지 5650리였다. 현재 N. KOREA(북한)의 평안도 선천에서 CHINA의 연경까지의 실제 해상조공로는 1208km(약 2570리)이다. 역사기록의 반도 못되는 짧은 거리인 것이다. 

앞서 보았던 여러 지명들의 차이와 역사기록을 대조해 보면 현재의 역사교과서인 국사가 거짓임을 알수 있지 않을까? 현재의 국사가 진실인가? 하는 의문을 갖기에 충분할 것이다.

역사는 진실을 담고 있어야 가치가 있다고 한다. 진실이 아닌 역사는 거짓 소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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