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의 진실

'발해는 천하의 동쪽 대양', 현재는 중공과 남북한의 작은 만(灣)

작성일 작성자 anian

'발해는 천하의 동쪽 대양', 현재는 중공과 남북한의 작은 만(灣)

여러 역사기록들 속의 발해를 '베링해'로 대입해 보면 정확히 일치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플러스코리아타임즈=김종문] 1700년 이전에 제작됐다는 영문고지도들의 대부분에 MONGAL(몽골, 蒙古)은 현재의 유라시아 중앙이 아닌 만리동북 北海(북해)인근에 있었다. 遼東半島(요동반도)는 동서 수천리의 크기였으며 몽골의 남동쪽인 현재의 Bering Sea(베링해)지역에 있었다. 渤海(발해)는 요동반도를 흐르던 천하 3대강인 압록강의 하류이며 요수들이 모여 형성된 내해(內海)였다. 발해의 너비는 좁았고 여러 강들의 하류가 연결된 복잡한 해로였으며 커다란 하나의 포구(浦口)였다. 발해와 요동반도는 현재 동북아로 이동되었으며 관련된 지명들 또한 이동되었다.

참조기사:  '몽골', 17세기까지 1만리 떨어진 북해 근처에 있었다

참조기사:  '발해는 압록강 하류였다', 현재 동북아로 이동시킨 이유? 
 

 

▲ 1540 Orontius Fineus(채색) A: Mongal(몽고, 蒙古), B: BELOR DESERT(베얼사막), 1: Gronelant(그린란드), 2: Florida(플로리다), 3: Cuba(쿠바), 4: Pucatans(유카탄) 16세기 초중기 영문고지도들에 미대륙은 ASIA(아세아, 亞細亞)에 한반도(韓半島)였다. 16세기 미대륙지명들 중 중요지명들의 다수는 현재 동북아로 이동되었다. 몽골(蒙古)은 수많은 고지도들에 현재의 Bering Strait(베링해협)서쪽 북해(北海)인근에 표기되었다. 대요수(大遼水)는 역사상 몽골의 사막지대에서 남쪽으로 바다로 흘러서 遼西(요서)와 遼東(요동)의 경계가 되었다. 大遼水(대요수)는 세월이 흐르면 遼海(요해)와 渤海(발해)로 지명이 분리된다. 두 바다는 하나로 연결된 遼東半島(요동반도)의 內海(내해)들이었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요서에서 요동을 가려면 늪지대 이백리 통과해야

 

 

ASIA(아세아, 亞細亞)의 중원을 최초로 통일했던 진나라 시황제(始皇帝)의 전국통일(BC 221)이후 소위 中華(중화)라 자칭하던 세력들은 통일된 힘으로 동방을 침략하기에 열심이었다. 이들이 대군을 이끌고 육로로 요동을 공격하는 길은 너무나 험난하였다. 山海關(산해관)을 지나 廣寧(광녕)에서부터 遼澤(요택)이라 불리는 늪지대를 200리가량 통과해야 遼水(요수)를 건널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조기사: [고지도의 진실]몽골과 미대륙 사이에 '요동반도'가 있었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제8권 세기(世紀) 고구려(高句麗)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서기 645년 당 태종 이세민(唐 太宗 李世民)은 遼澤(요택)을 통해 高句麗(고구려)를 침공했다.)

 

"경오에 거가가 요택(遼澤)에 이르렀는데, 진흙 수렁길이 2백여 리나 되어 인마(人馬)가 통과할 수 없었다. 이에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이 흙을 뿌려 다리를 놓으니, 군사들이 쉬지 않고 행군하여 임진에 요택을 건너 동쪽으로 갔다. 《자치통감》"

 

당 태종은 5월 3일(경오)에 遼澤(요택)에 이르러 25일(임진)이 되서야 요택을 건넜다. 통과하는데 22일이나 걸릴 정도로 요택은 건너기가 어려운 늪지대였던 것이다.

 

▲ A: 현 국사에서의 요택, B: 역사에 기록된 요택지역의 강줄기들, C: 랴오닝성 판진시 늪지, D: 진저우시의 늪지. 현재 세계사에서의 요택은 遼寧省(요녕성)의 판진시와 진저우시에 위치하였다. 역사상 요서에서 육로로 요동을 갈 때에는 요택을 지나야만 요수를 건널 수 있었다. 현재의 동북아에 당과 고구려가 있었다면 현재 요택의 북쪽이 통행이 불편한 지역이 아니기에 수십일을 경과하여 요택을 지나야할 필요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원래의 요택은 진흙웅덩이들이 200리(약 111km)에 걸쳐 있었으나 현재의 요택은 200리의 진흙수렁지대 자체가 없다. 현재의 요택은 강폭이 100m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작은 강들의 하류에 형성된 약간의 갈대밭들과 갯벌이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역사기록상에 遼澤(요택)의 시작인 廣寧(광녕)은 북경에서 동쪽으로 1209리에 있었다. 북경은 몽골의 남쪽지경과 100리의 가까운 거리이면서 동쪽으로 천하의 항로인 거대한 通州江(통주강)이 있었다. 蒙古(몽골)이 Bering Strait(베링해협)서쪽 北海(북해)인근에 있었으므로 천하의 항로인 통주강은 베링해협이며 요택은 알래스카의 북서지역에 위치했던 것이다.

참조기사: 청의 북경과 통주는 '연속적 대지진으로 폐허', 현재의 북경은?

 

▲ 역사기록상에 요택의 시작인 광녕은 북경에서 동쪽으로 1209리에 위치하였다. 북경은 몽골의 지경과 100리 거리에 있었으며 몽골은 원래 베링해협서쪽 북해인근에 있었다. 요택은 몽골 남동쪽인 알래스카의 북서지역에 위치하였던 것이다. 요택은 진흙수렁들이 200리에 걸쳐 있었으며 예상지역인 1번 지역에는 역사기록들 속의 요택과 일치하는 진흙수렁들을 만날 수 있다. 18세기의 기록들에 산해관에서 심양까지 800리에 끝없이 바라보이는 바닷가 진흙 벌판이 있었다고 하였다. 현재 알래스카서부의 해안가에도 끝없이 넓은 진흙벌판이 있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원래의 요택은 18세기말 요동반도가 바다에 잠겨 사라지면서 함께 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현재의 물웅덩이들은 이후 새롭게 만들어진 山海關(산해관)에서부터 瀋陽(심양)에 이르기까지 있었다던 8백리의 바닷가 진흙 벌판들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요동을 공격할 때는 모두 발해를 건너서 요동반도를 공격했다.

 

 

임하필기(林下筆記)임하필기 제13권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있다.

“중국군대의 이동은 모두 바다를 경유해서 요동(遼東)으로 나왔는데, 한(漢)의 팽오(彭吳)가 예맥(濊貊)과 조선(朝鮮)에 침입했을 때에 중국의 연제(燕齊) 지방이 휩쓸리어 소동(騷動)이 일었다. 그리고 양복(楊僕)이 위씨조선(衛氏朝鮮)의 우거왕(右渠王)을 침공할 때에 발해(渤海)를 건너서 열구(列口)에 이르렀는데”

 

중국군대들은 山東(산동)에 齊(제나라)에서 발해를 건너서 요동을 공격하였다.

 

 

 

해동역사(海東繹史)해동역사 제40권 교빙지(交聘志)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들어 있다.

“《사기》의조선열전(朝鮮列傳)에는, “누선장군 양복을 파견하여 제(齊)로부터 발해에 배를 띄워 왕검(王儉)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왕검은 성(城)의 이름이니, 요동에 있는 바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자치통감(資治通鑑)》에 나오는 지리의 호칭에 대해서 정확하게주석을 낸 호신지(胡身之)가 ‘양복이 제로부터 발해에 배를 띄워서 조선을 토벌하였다’고 한 데에 이르러서는, “양복이 제로부터 발해에 배를 띄웠다고 하는 곳의발해는 대개 청주와 내주의 이북과 유주(幽州)와 평주(平州)의 이남지역으로, 모두 바닷가의 지역인바, 그곳을 통틀어서 발해라고 하는 것이지”

 

누선장군 양복이 발해에 배를 띄워 왕검성을 공격했으니 渤海(발해)는 王儉城(왕검성)이 있었던 遼東半島(요동반도)의 內海(내해)였다는 것이다. 발해는 청주, 내주의 이북에서 유주, 평주의 이남까지 요동반도의 내해의 총칭이었다.

 

 

 

현재 동북아세아의 남북의 한반도를 보면 왕검성은 요동반도가 아니라 북한의 평양으로 되어 있다. 위치부터 역사기록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 16세기 영문세계지도들을 참고하여 그린 지형. 전국시대의 제나라는 渤海(발해)서쪽 산동반도에 위치하였다. 산동반도 예상지역인 현 캄차카반도는 2000~4000m의 높은 산들이 동북쪽에서 남서쪽으로 길게 이어져있다. 遼東半島(요동반도)는 동서의 너비가 수 천리에 달하였으며 요동반도의 강들은 요수이며 천하 3대강인 압록강이라 불리었다. 遼水(요수)들의 하류인 大遼水(대요수)는 遼海(요해), 渤海(발해)등으로 불리었다. 중국군대들은 山東(산동)에서 출발하여 발해를 통하여 王儉城(왕검성)인 평양까지 곧바로 공격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현재 동북아에 산동반도와 요동반도의 거리는 100km이상의 거리이나 역사서의 발해는 산동에서 요동을 오가며 농사를 지을 정도로 가까웠다고 전하고 있다.

 

 

 

 

산동에서 발해를 건너 요동에서 농사를 지었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임하필기제13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제도부(齊都賦)에는 바다가 옆으로 삐죽 나온 것이 발해(渤海)인데 실로 이것은 하나의 큰 포구(浦口)라고 하였다. 《한서(漢書)》에는 제(齊)나라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가서 농사를 짓는다고 하였는데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면 그것이 상시로 왕래하는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으로 말하면 등주의 성산(成山)이 발해의 동쪽으로 가장 깊이 들어온 곳이고 우리나라로 말하면 장연(長淵)이 또한 발해의 서쪽으로 가장 깊이 들어간 곳이니 그 거리가 서로 가깝다고 하겠다.”

 

제도부(齊都賦)는 진(晉)나라 때, 임치(臨淄) 출신의 좌사(左思)라는 문인이 산동지방에 제나라(齊,서기전 1046~서기전 221년)의 도읍이었던 임치의 풍물을 노래한 서사시이다.

 

▲ 역사기록상에 遼東半島(요동반도)는 수천리의 크기였으나 현재의 요동반도는 100km정도의 작은 반도이다. 원래의 산동반도와 요동반도의 거리는 오가며 농사를 지을 정도로 가까웠으나 현재는 100km정도의 거리이다. 현재의 요동과 산동은 오가며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먼 거리이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역사상의 遼東半島(요동반도)는 수 천리의 크기였으나 현재의 요동반도는 100km정도의 작은 땅이다. 현재의 산동반도와 요동반도의 거리는 100km정도이다. 산동에서 요동으로 농사를 짓기 위하여 왕래하기에는 먼 거리인 것이다. 현재의 산동에서 발해를 건너 요동에 간다 해도 요동에는 산이 대부분인 작은 반도가 있을 뿐이다. 농사를 지을 땅들이 없다.

 

원래의 요동반도인 Bering Sea(베링해)지역을 보면 18세기말에도 수천리크기의 커다란 반도가 있었다. 18세기 초에 베링해의 대부분은 육지였으며 산동반도인 캄차카반도와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다. 요동반도가 거대했기에 농사지을 땅들이 많았을 것이며 오가며 농사를 짓기에 적합하였을 것이다.

 

▲ A: 현재의 베링해, B: 1716 Johann Baptist Homann, C: 1757 BuachePhilippe 1: 산동반도(山東半島), 2: 요동반도(遼東半島), 3: Canal et Detroit du Nord(북해로 통하는 운하) 위의 고지도들에 지형은 현재와 판이하게 다르다. 현재 최대수심이 4100m라는 Bering Sea(베링해)는 1780년경까지도 육지였다. 산동반도와 요동반도의 사이인 1번지역은 1716년경에도 농사를 지으러 바다를 오갈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베링해협과 베링해는 원래 배의 운항을 위하여 북해와 태평양을 연결한 Canal(운하)였다. 북경의 동쪽에 있다던 천하의 항로는 베링해협과 베링해를 말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천하의 동쪽 바다라는 발해의 동쪽에는 동방을 다스리던 동국조선 고려(COREA)의 한반도가 있었다. 현재 미대륙인 한반도는 동북아에 남북의 한반도로 이동되었다. 그와 함께 천하의 동쪽 대양(大洋)이며 한반도의 서해인 발해도 동북아에 작은 만으로 지명이동된 것이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발해는 천하의 동쪽 대양, 끝없는 바다물이 흘러내렸다.

 

 

현재 東亞細亞(동아세아)에 渤海(발해)는 남북의 한반도와 중화인민공화국(중공)의 사이에 작은 灣(만)이다. 그러나 역사기록들의 발해는천하의 동쪽 대양이라 불렸다. 발해가 천하의 큰 바다로 불린 것은 청나라가 몽골사막 너머에서 남으로 흐르던 通州江(통주강)의 수로를 확장하여 北海(북해)와 太平洋(태평양)을 통하는 천하의 항로인 Bering Strait(베링해협)을 건설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참조기사: [고지도의 진실]몽골을 이동시킴에 따라 북경과 통주도 이동시켰다

 

 

 

연행기사(燕行記事) 문견잡기(聞見雜記) 잡기(雜記)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지나다가 망해정(望海亭)에 올라 바라보니 금주(金州) 개주(蓋州)는 저 위에 있고 등주(登州) 내주(萊州)는 아래쪽에 있으며, 앞의 남쪽은 바라보아도 끝이 없다. 건너편 언덕은 곧바로 우리나라의 양서(兩西) 연변인데 한 바다가 서로 연하였기 때문에 물빛이 같고 조수도 왕래한다. 지금 이 발해를 천하의 동쪽 대양(大洋)이라고하는데, 우리나라 서쪽에 있고 물빛과 조수도 실상 우리나라 서해와 서로 통한다.”

 

渤海(발해)는 大朝鮮(대조선)의 中國(중국)이 점유하던 遼東(요동)과 大朝鮮(대조선)COREA의 兩西(양서)인 海西(해서, 황해도 해주)와 關西(관서, 평안도)의 사이를 흘렀다. 발해와 서해는 같은 바다이기에 물빛과 조수가 같았다.

 

 

연행기사(燕行記事)문견잡기(聞見雜記)[잡기(雜記)]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연경(燕京)은 옛날의 유주(幽州)이다. 역대의 연혁(沿革)을 따지면 명 나라 초기에 순천부(順天府)가 되었고 영락(永樂) 연간에 북경(北京)이 되었는데, 청(淸) 나라가 또 그대로 답습, 순천부(順天府)로 하여 경사(京師)에 예속시켰다. 지세(地勢)로 논하면 중원(中原)의 동북쪽에 위치하여 태항산(太行山)ㆍ연연산(燕然山)이 구불구불 북쪽을 두르고, 끝없이 넓은 바다가 그 동쪽에 흐르고 있어천하의 대세가 모두품 안으로 돌아온다. 참으로 패왕(伯王)의 도읍지이다.“

“(북경은) 몽고(蒙古) 달자(韃子)와 지경을 연하고 있어 가까우면 100리가 되고 멀어도 300리에 불과하다. ”

 

역사상 북경의 동쪽에 있었던 바다는 발해였다. 그런데 발해가 천하의 동쪽 대양이라 불린 것은 천하의 큰 바다인 北海(북해)가 Bering Strait(베링해협)으로 흘러내려왔기 때문인 것이다.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 (북경의 동쪽 통주에 흐르는 강인) 통주강(通州江)은 일명 노하(潞河)라고 하고, 속칭 외하(外河)라고도 한다. 수원(水源)이 멀고 흐름이 빠른데 모래 웅덩이가 많다. 여름이나 가을만 되면 폭우가 내려 터지기가 가장 쉽고 또 조금만 가물어도 얕아져서 배 다니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얕은 여울50여 곳을 파냈다. 이것이 곧 천하의 항로(航路)이다. 통주라는 이름도 이 때문에 생긴 것이라 한다.”

 

通州江(통주강)은 몽골사막 너머에서 발원하여 수원의 시작이 어디인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몽골의 사막은 물이 귀한 지역으로 통주강을 천하의 항로로 만들 수 있는 물 자체가 없었다. 있다면 몽골사막 가까이에 북해인 것이다. 통주강은 17세기 중반에도 도보로 건널 수 있었다. 그런데 18세기 초의 기록들에는 유속이 빠르며 임진강처럼 수량이 풍부한 거대한 강이라 하였다. 통주강이 천하의 항로라 불린 것은 북해로 연결된 강바닥을 파내어 운하를 확장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발해는 서남으로 만리가량 이동되어 현재 중국 동북방과 남북한 서북쪽에 위치해 있다.

 

 

현재의 북경과 발해를 보자 어디에 천하의 큰 바다가 있고 끝없는 바다가 흐르는가? 현재의 북경에는 동쪽에 너비 100km 정도에 작은 만이 있을 뿐이다. 천하의 큰 바다도 없고 끝없이 넓은 바다가 흐르지도 않는다. 여러 역사기록들 속의 발해를 베링해(Bering Strait)로 대입해 보면 위의 기록들이 정확히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발해는 한반도인 미대륙의 역사를 동북아에 남북의 한반도로 이식하면서 함께 이동된 것으로 판단된다. 발해는 몽골과 함께 만리가량 서남으로 이동되었다. 결과적으로 유라시아 대부분을 의미하던 천하는 현 중공의 작은 땅으로 축소된 것이다. 그래서 역사기록들은 현재의 지명들과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 역사기록상 渤海(발해)는 天下(천하)의 동쪽 대양(大洋)이라 불리었다. 즉 발해의 서쪽에 천하가 있었다는 것이다. 수많은 고지도들에 MONGAL(몽골, 蒙古)은 Bering Sea(베링해)의 서북쪽 북해(北海)인근에 있었다. 몽골은 천하의 북동쪽지명이며 몽골의 동남쪽 100리 거리에 북경은 있었다. 북경의 동쪽으로는 끝없는 바다가 발해로 흘러내렸다. 끝없는 바다는 북해이며 발해는 현재의 베링해인 것이다. 韓半島(한반도)가 미대륙에서 동북아로 이동되면서 몽골과 발해 또한 이동된 것이다. 현재의 발해는 천하의 동쪽 大洋(대양)도 아니며 주위에 끝없는 바다도 없다. 현 세계사는 천하를 동아세아에 중화인민공화국 좁은 땅에 이식한 것이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渤海(발해)는 遼東半島(요동반도)를 흐르는 遼水(요수)들이 모여 형성된 大遼水(대요수)가 변하여 형성된 內海(내해)였으며 천하 3대강인 鴨綠江(압록강)의 하류였다.

 

 

渤海(발해)는 원래 폭이 매우 좁았다. 그래서 山東半島(산동반도)의 인민들은 배를 타고 遼東(요동)을 오가며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현재 동북아의 산동과 요동의 거리는 100km이상의 거리로 오가며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원래의 발해인 베링해의 대부분은 18세기 말까지도 육지였으며 18세기 초까지도 폭이 매우 좁았다.

 

 

渤海(발해)는 天下(천하)의 동쪽 大洋(대양)이라 불리었다. 明(명)시기 天下(천하)를 다스리던 大朝鮮(대조선)의 中國皇帝(중국황제)는 천하의 동북쪽인 발해의 서쪽 北京(북경)에 있었다. 발해로 천하의 큰 바다가 흐를 수 있었던 것은 北海(북해)로 연결된 通州江(통주강)이 Bering Strait(베링해협)이 되어 북해가 발해로 내려왔기 때문인 것이다.

 

 

현재의 발해가 수많은 역사기록들과 불일치하는 것은 한반도인 미대륙의 역사를 지우고 동북아의 남북한 땅에 '한반도'를 삽입시키면서 몽골, 북경과 함께 이동된 지명이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원문보기: '발해는 천하의 동쪽 대양', 현재는 중공과 남북한의 작은 만(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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