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의 진실

[스크랩] 黃河의 龍門`은 積石에서 北쪽 3千里, 現在는 東쪽 7千里

작성일 작성자 anian
黃河의 龍門'은 積石에서 北쪽 3千里, 現在는 東쪽 7千里
정약용,"황하 구곡은 곤륜산·권세성은 지수일곡, 용문산·영석성은 지근사곡"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홍익/통일/역사=플러스코리아타임즈 김종문] 歷史上(역사상)에 Huang He(황하, 黃河)는 天下 最大江(천하 최대강)이었다. 黃河(황하)는 回部(회부)인 西域(서역) Mt Kunlun(곤륜산, 崑崙山 7167m) 서쪽에서 발원하여 무려 3만 4천 3백리를 흘러 中夏(중하)에 닿았다. 그러나 현재의 황하는 발원처가 다르며 1만리 정도의 작은 강으로 원래 黃河(황하)의 支流(지류)였음이 밝혀졌다. 즉, 지금의 황하는 과거 황하의 한 지류에 불과하다. 

 

黃河(황하)의 상류는 回部(회부)인 新疆(신강)의 Eastern Turkestan(동 투르키스탄)인 Tarim Basin(타림분지)의 모든 강들이 모인 蒲昌海(포창해)였다. 蒲昌海(포창해)는 동쪽으로 복류하여 靑海(청해)로 흘러갔다. 靑海(청해)는 西域(서역)과 中夏(중하)의 경계선으로 靑海鎭(청해진)이 있는 거대한 鹽湖(염호)였다. 靑海(청해)를 지난 黃河(황하)는 동쪽으로 흘러 積石(적석)에서 북쪽으로 흐르던 金城河(금성하)에 합류한다. 金城河(금성하)는 黃河(황하)의 支流(지류)가 積石(적석)을 지나면서 휘돌아 북쪽으로 龍門(용문)까지 삼천리 가까이 흘러갔다. 현재의 黃河(황하)에도 그러한 地名(지명)들은 존재하나 歷史紀錄(역사기록)들과 완전히 不一致(불일치)한다. 

 

참조기사: 황하는 3만4천여리 천하 최대의 강, 현 황하는 1만여리

참조기사:천하 최대강 황하의 상류는 '포창해', 타림분지 모든 강 모여

참조기사:黃河의 靑海는 蒲昌海 인근, 現在는 數千里 떨어져 있어

    

▲ A: 漢西域諸國圖(한서역제국도, 南宋景定年間 1260-1264年), B: 積石(적석)지역인 Zhangye Danxia National Geological Park(장액단하지질공원, 张掖丹霞地质公园), C: 현 지형에 그린 黃河(황하)의 上流(상류) 강줄기들 역사기록상에 Huang He(황하, 黃河)는 靑海(청해)를 지나 동쪽으로 흘러 金城河(금성하)에 합류하였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지도설명: 金城河(금성하)는 서쪽에서 흘러오던 黃河(황하)의 支流(지류)가 積石(적석)을 지나면서 휘돌아 북쪽으로 龍門(용문)까지 3천여 리를 흘러갔다. 원래의 金城河(금성하)와 일치하는 강줄기는 현재의 Heihe River(흑하, 黑河)이며 積石(적석)은 Gansu(감숙성, 甘肅省)에 张掖丹霞(장액단하)지역에 위치하였다.] 

 

積石(적석)에서 西河(서하) 3천리 지나서 龍門(용문) 

 

역사기록상에 龍門(용문)에 물길을 만든 것은 夏(하)나라 시조인 禹(우)임금이다, 五帝(오제)의 한 사람인 堯(요)임금의 말년에 洪水(홍수)가 일어났다. 이어 舜(순)임금시기에 9년 洪水(홍수)로 大陸(대륙)이 물에 잠기었으며 鯀(곤)은 당시 治水(치수)를 담당하던 관리였다고 한다. 禹(우)는 鯀(곤)의 아들로 鯀(곤)의 뒤를 이어 대륙 각지에 물길을 내어 치수(治水)에 성공하였고 그 공적에 의해 舜(순)임금으로부터 나라를 물려받아 夏(하)나라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 A: 大禹治水像(대우치수상), B: 黃帝軒轅(황제헌원)의 고대 그림(Chinese history of fifty centuries, vol.ⅠANCIENT TIMES 1973 CHINA ACADEMY 44p) 禹(우)임금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왕조인 夏(하)나라의 시조로 전해지는 인물이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사진설명: 司馬遷(사마천)의 史記(사기)에 의하면 禹(우)의 아버지는 鯀(곤)이며 곤의 아버지는 五帝(오제)의 한명인 顓頊高陽氏(전욱 고양씨)이다. 顓頊(전욱)이 黃帝軒轅氏(황제 헌원씨)의 손자이므로 禹(우)는 黃帝(황제)의 고손자가 된다는 것이다. 楚史(초사)에 "황제는 백민을 낳았다. 동이에 속했다. 黃帝生白民…自屬東夷"고 하였다. 歷史上(역사상) 中華(중화)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血統(혈통)을 東夷(동이)인 黃帝(황제)에 連結(연결)하기 위하여 努力(노력)하였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권29 하거서(河渠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들어 있다.

“그러나 황하(河)는 범람해 수재를 몰고 왔고, 중국에 입힌 피해가 대단히 심했다. 그래서 우(禹)는 황하를 다스리는 일을 가장 큰 임무로 알고 황하의 물줄기를 이끌어 적석산(積石山)에서 용문산(龍門山)을 거쳐 남쪽으로 화음(華陰)에 이르게 하고, 거기서 동쪽으로 지주산(砥柱山)으로 내려와 맹진(孟津)과 낙예(雒汭)에 이르고 대비산(大邳山)에까지 이르게 했다.”

“然河菑衍溢, 害中國也尤甚. 唯是爲務. 故道河自積石歷龍門, 南到華陰, 東下砥柱, 及孟津、雒汭, 至于大邳.” 

 

禹(우)임금은 黃河(황하)의 洪水(홍수)를 다스리기 위하여 적석산(積石山)에서 북으로 용문산(龍門山)까지 산을 깎고 땅을 파서 水路(수로)를 내었다. 

 

홍재전서 제93권 경사강의(經史講義) 30 서경(書經) 1 우공(禹貢) 중 다음의 기록이 있다.

“이미 적석으로부터 비롯되었다면 또한 마땅히 서하(西河)가 경유하는, 예를 들면 화음(華陰)과 맹진(孟津) 등 3천 리나 되는 먼 길을 기록했어야 될 것인데, 다만 곧바로 용문(龍門)에 이어 쓴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만일 거칠고 먼 변방에 있다 하여 생략하였다고 생각한다면, 옹주(雍州)의 공물을 바치는 길이 적석에서 배를 타고 온다고 말한 것으로 볼 때 이를 거칠고 먼 변방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며, ”

“旣自積石始則又當書西河所經如華陰孟津。而三千里之遠。但以一筆接于龍門何也。若以爲荒遠在所略。則雍州貢道浮于積石。未可謂荒遠也。” 

 

積石(적석)에서 북쪽으로 흘렀던 黃河(황하)인 金城河(금성하)는 동쪽으로 흘러오던 靑海(청해)의 黃河(황하)와 合流(합류)하여 巨大(거대)해지며 西河(서하)라 불렸다. 西河(서하)는 3천리의 거리를 흘러 龍門(용문)에 닿았다. 

 

積石(적석)과 龍門(용문)은 現在(현재)의 黃河(황하)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現在(현재)의 龍門(용문)은 積石(적석)에서 東(동)쪽에 치우쳐 水路(수로)로 7천리가량이나 떨어졌으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2천리 가까이를 내려온다. 現在(현재)의 龍門(용문)은 距離(거리)와 方向(방향) 자체가 역사기록과 不一致(불일치)하는 것이다. 

       

▲ 禹貢所載隨山浚川之圖(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 南宋嘉定二年(1209年)) 禹(우)임금 시기의 黃河(황하)는 崑崙山(곤륜산)동쪽에서 發源(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積石(적석)에 닿았다.  黃河(황하)는 積石(적석)을 지나면서 북쪽으로 수천리를 흘렀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지도설명: 西河(서하)는 龍門(용문)을 통해 中夏(중하)의 지역으로 들어오기 전의 黃河(황하)를 말한다. 북쪽에 이른 西河(서하)는 東(동)으로 흘러 龍門(용문)을 지났다. 龍門(용문)이후 黃河(황하)는 여러 갈래로 나뉘면서 大陸(대륙)의 江(강)들을 吸收(흡수)하여 巨大(거대)해졌다. 黃河(황하)의 本流(본류)는 東亞細亞(동아세아)의  東北(동북)쪽으로 흘러갔다.]

 

龍門(용문)은 陜西(섬서) 西安(서안)에서 3백리, 中夏(중하)의 서쪽에 위치

 

史記(사기) 제29권 하거서(河渠書)에는 다음의 기록이 들어 있다.

"태사공은 말했다: 나는 남쪽으로는 여산(廬山)에 올라 우(禹)가 소통시킨 구강(九江)을 보았고, 또 회계(會稽)의 태황(太湟)에 이르러 고소산(姑蘇山)에 올라 오호(五胡)를 바라보았다. 동쪽으로는 낙예(洛汭), 대비, 영하(迎河)를 살폈고, 또 회수(淮水), 사수(泗水), 제수(濟水), 탑수(漯水), 낙수(洛水)를 순시했다. 서쪽으로는 촉(蜀)의 민산(岷山)과 이대(離碓)를 보았고, 북쪽으로는 용문(龍門)으로부터 삭방(朔方)에까지 가보았다. 

"太史公曰:余南登廬山, 觀禹疏九江, 遂至于會稽太湟, 上姑蘇, 望五湖;東闚洛汭、大邳, 迎河, 行淮、泗、濟、漯洛渠;西瞻蜀之岷山及離碓;北自龍門至于朔方."

 

龍門(용문)은 中夏(중하)의 서쪽에 위치하였으며 朔方(삭방, 북쪽지방)과 가까웠다.

 

사계전서 (沙溪全書) 제14권 경서변의(經書辨疑) 서전(書傳) 우공(禹貢) 중 다음의 기록이 있다.

“적석에서 배를 띄워 용문 서하에 다다른다.[浮于積石 至于龍門西河]의 주에 나오는 용문은 풍익에 있다.[龍門在馮翊]” 

“임무숙(任茂叔) -숙영(叔英)- 이 말하기를, ‘살펴보건대, 용문은 한대(漢代)의 풍익군 하양현(夏陽縣)에 있었다. 하양현은 오늘날 합양(郃陽), 한성(韓城) 등 지방이며 모두 섬서(陜西) 서안부(西安府)에 속하니, 부(府)와의 거리는 겨우 300여 리이다.’ 하였다.” 

 

西安(서안)은 中夏(중하)의 서쪽 지역으로 前漢(전한: BC206년~AD 8년)의 수도였던 長安(장안)이 위치했던 지역이다. 龍門(용문)은 西安(서안)에서 3백여 리이며 積石(적석)에서 북쪽으로 3천리 가까운 거리였다. 現在(현재)의 西安(서안)과 龍門(용문)은 현재의 積石(적석)에서 北(북)쪽이 아니라 東(동)쪽에 位置(위치)하였으며 水路(수로)로 7천리 가까운 거리이다.

  

▲ 現在(현재)의 黃河(황하)와 元來(원래)의 黃河(황하) 歷史上(역사상) 西河(서하)는 積石(적석)에서 北(북)쪽으로 三千里(삼천리) 가까운 거리를 흘렀다. 西河(서하)는 龍門(용문)을 지나서 동쪽으로 흘렀다. 龍門(용문)은 西河(서하)가 中夏(중하)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하였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지도설명: 龍門(용문)은 西安(서안)에서 三百里(3백리)의 가까운 거리였다. 그러므로 西安(서안) 은 積石(적석)에서 北(북)쪽으로 수천리에 위치하였던 것이다. 현재의 西安(서안)과 龍門(용문) 또한 3백리의 거리이나 積石(적석)에서 북쪽이 아닌 동쪽으로 7천리에 위치하였다.] 

 

西安(서안)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龍門(용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龍門(용문)은 黃河四曲(황하사곡), 山脈(산맥)을 쪼개어 만들어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제8권 대책(對策) 중 다음의 기록이 들어있다.

“황하(黃河)의 구곡(九曲)에 대해서는 그 말이 《하도강상(河圖絳象)》에서 나왔는데, 곤륜산과 권세성(權勢星)은 지수 일곡(地首一曲)에 해당하고, 용문산(龍門山)과 영석성(營石星)은 지근 사곡(地根四曲)에 해당합니다.” 

“黃河九曲 其說出河圖絳象 山昆侖而星權勢則地首一曲也 山龍門而星營石則地根四曲也”

 

黃河(황하)는 유명한 계곡이 9개가 있었으며 龍門(용문)은 4曲(곡)이었다.

 

사계전서 (沙溪全書) 제14권 경서변의(經書辨疑) 서전(書傳) 우공(禹貢) 중 다음의 기록이 들어 있다. 

“이진기(二秦記)에 의하면, ‘용문 밖 양 곁에 산이 솟아 있어 강이나 육지로 통할 수 없어서 물고기들이 올라갈 수 없는 까닭에 강하의 큰물고기들이 용문에서 뺨이 부어오르는 어려움을 겪는다.’ 한다.”

 

성호사설(星湖僿說) 제30권 시문문(詩文門) 구루비가 중 다음의 글이 들어 있다.

"…거룩하신 상제께서 정성에 감동하여 / 有皇上帝爲感動 

낙수의 물가에서 구주를 내리셨네 / 用畀九疇洛之滸 

성낸 파도 약속하여 지휘에 따르게 하고 / 約束怒浪隨指揮 

신부를 이용하여 용문산맥 뚫었네 / 鑿開龍門用神斧 

구하가 길이 잡혀 대륙이 드러나고 / 九河旣道大陸土 

천지가 평성되어 만문이 보였다오 / 地平天成萬物覩...” 

 

禹(우)임금은 9년의 홍수(洪水)를 다스리면서 龍門山脈(용문산맥)을 쪼개어 물길을 내었다. 龍門(용문)은 여울과 물살이 매우 거세어 배가 다닐 수 없을 정도였고 폭포가 三段(삼단)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龍門三級(용문삼급)이라 불렀다. 그럼 현재의 龍門(용문)은 어떤지 살펴보자

 

▲ A: 현 Huang He(황하, 黃河) Yu Men Kou(용문구, 龍門口)지역, B: 9월 수량이 풍부할 때의 龍門口(용문구) 역사기록상에 龍門(용문)은 龍門山脈(용문산맥)을 깎아 만들어진 수로로 폭이 좁았고 물살이 거센 계곡들이 연이어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용문은 그러한 계곡들이나 산을 깎은 흔적들이 보이지 않는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홍재전서(弘齋全書) 제117권 경사강의(經史講義)54 강목(綱目)8 당 현종(唐玄宗) 중 다음의 기록이 들어 있다. 

"용문의 험한 지세는 우(禹)임금 때부터 이미 그러했으니, 홍수나 가뭄으로 수위가 낮고 깊어지는 것 때문에 험이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요, 조수(潮水)의 들고 나는 것 때문에 험이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龍門之險。自禹已然。非可以水旱淺深而有所險夷也。非可以潮之上下而有所險夷也。”

 

龍門(용문)이 홍수와 가뭄에 관계없이 험하였던 것은 산맥을 깎아 만들어 폭이 좁았으며 비탈진 계곡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現在(현재)의 龍門(용문)은 물고기가 오르지 못할 정도의 계곡들이 연이어 있는 地形(지형)이 아니다. 그럼 積石(적석)북쪽 元來(원래)의 龍門(용문)지역을 보자

    

▲  A: 2000 Klett Perthes 용문예상지역, B: 현지형에 확인되는 강줄기들, C: 3번지역( 41°55'4.88"N 102°23'15.17"E), D: 4번지역(41°48'20.23"N 102° 2'53.38"E), 1: Eriyang Chuanjiyin Nao'er 龍門(용문)은 積石(적석)에서 북쪽으로 3천여 리에 위치하였다.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사진설명: 지도상의 1번에서 3번은 현재도 강줄기가 있다. 2번에는 西河(서하)인 Heihe River(흑하, 黑河)에서 흘러왔던 강줄기가 확인이 된다. 강줄기들을 보면 黃河(황하)인 黑河(흑하)의 수량이 풍부했던 과거에는 2번에서 3번으로 흘러갔음을 알 수 있다. 歷史上(역사상)에 龍門(용문)은 龍門山脈(용문산맥)을 쪼개서 만들어진 수로였다. 폭이 좁은 계곡이 많았으며 급류가 많았다고 한다. 3번지역에는 그러한 폭이 좁은 계곡들이 여러 곳이 있다. 4번지역을 보면 상류의 강줄기들이 60m 36m인데 하류는 25m로 폭이 좁았다. 장마가 들면 역사상의 龍門(용문)처럼 급류를 형성하였을 것이다. 4번지역 동쪽에는 현재의 고비사막으로 흘러내린 수많은 강줄기들이 확인된다.]

  

龍門(용문) 예상지역을 보면 평평한 돌산들이 5km너비로 40km정도 연결되어 있다. 西河(서하)는 그로인해 물의 흐름이 막히어 수위가 상승했을 것이다. 그래서 물이 잘 흘러가도록 山脈(산맥) 여러 곳에 수로들을 만든 것으로 판단된다. 해당지역의 수로들 중 커다란 줄기 위주로 표시해 보았다.

 

▲ A: 龍門山脈(용문산맥) 예상지역에 물길을 채색한 모습, B: 1번( 41°57'31.89"N 102°20'3.14"E ), C: 2번( 41°57'59.76"N 102°21'29.99"E )   龍門(용문)은 龍門山脈(용문산맥)을 쪼개어 만들어진 수로였다. 龍門(용문)으로 예상되는 지역에는 너비 5km정도의 산맥이 40km정도가 이어져 있다.     ©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사진설명: 龍門山脈(용문산맥)에 물길을 내어서 黃河(황하)의 물이 흘러갔듯 山脈(산맥)에 물길을 내어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수많은 강줄기들을 만들었다.  1번 지역에는 도로 옆으로 물을 막기 위한 堤防(제방)이 보인다. 산맥의 아래에는 너비 20m정도의 구조물들이 십수km가 이어져 있다. ]  

 

龍門山脈(용문산맥)으로 예상되는 지역에는 西河(서하)가 흐르면서 만들어진 수많은 水路(수로)의 흔적들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歷史上(역사상)에 龍門(용문)지역은 북방 유목민족들의 지역과 가까이 있었다. 산맥의 서북쪽으로 보이는 구조물들은 군사적인 목적인 長城(장성)의 흔적들로 판단된다. 

 

黃河(황하)는 龍門(용문)을 지나며 세 갈래로 갈라져 

 

홍재전서(弘齋全書) 제117권 경사강의(經史講義)54 강목(綱目)8 당 현종(唐玄宗) 중 다음의 기록이 들어 있다. 

황하(黃河)가 용문(龍門)에 이르러 세 갈래로 갈라지기 때문에 삼문(三門)이라고 하는 것이다."

삼문의 물은 동서로 갈라져 흐르다가 탄적(灘磧)을 벗어나면서 차츰 평온해지는데, 혹 가을과 겨울 동안에는 수심이 낮고 험하지만 맨몸으로 건널 수 있고, 봄과 여름 동안에는 깊어져서 소통되어 배로 실어 나를 수 있습니다." 

河至龍門。分爲三派。故謂之三門。” 

三門之水。東西割流。離灘磧稍平緩。或險於秋冬而可以徒涉。通於春夏而可以舟載。”

 

黃河(황하)는 龍門(용문)을 지나서 세 갈래로 나뉘어 大陸(대륙)의 각지로 흘러갔다.

 

홍재전서(弘齋全書) 제93권 경사강의(經史講義)30 서경(書經) [우공(禹貢)]중 다음의 기록이 있다.

“황하가 천 리를 흐르면서 이리 굽고 저리 뻗어 비록 천 리를 흘러 동쪽으로 나아가고, 천 리를 흘러 남쪽으로 나아가지만 그 줄기는 하나입니다. 용문(龍門)에 이른 이후에 물줄기가 비로소 나뉘어져 남쪽으로 양주(梁州)의 화음(華陰)에, 동쪽으로 예주(豫州)의 낙예(洛汭)에 이르고, 또 기주(冀州)의 대륙(大陸)에 이르기도 하고 또 나뉘어져 연주(兗州)의 구하(九河)가 되기도 합니다.

“河流千里。一曲一直。雖千里而東。千里而南。其流則一也。至于龍門而後派始分。可以南至于梁州之華陰。可以東至于豫州之洛汭。又可以至于冀州之大陸。又可以播爲兗州之九河。”

 

역사상의 冀州(기주)는 周(주)나라의 幽州(유주)이며 漢(한)나라의 右北平郡(우북평군)이었다. 黃河(황하)는 遼西(요서)가 위치한 대륙의 동북쪽으로 흘러갔다. 

 

표해록(漂海錄) 제2권 무신년(1488) 2월 27일이 다음의 기록이 들어 있다.

“신이 부영에게 묻기를, “‘우공(禹貢)’을 보면 황하(黃河)는 적석(積石)ㆍ용문(龍門)ㆍ화음(華陰)ㆍ지주(底柱)ㆍ대비(大邳)의 여러 산을 지나고, 또 강수 대륙(洚水大陸)을 지나 구하(九河)가 되고, 병하(迸河)가 되어 동북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臣問諸傅榮曰。以禹貢觀之。黃河過積石,龍門,華陰,底柱,大伾諸山。又過洚水,大陸。爲九河爲逆河。東北入于海。” 

 

黃河(황하)는 山東(산동)서남쪽 兗州(연주)에 九河(구하)를 거쳐 바다로 들어갔다. 현재의 黃河(황하)에도 그러한 지명들은 存在(존재)한다. 그럼 現在(현재)의 黃河(황하)는 龍門(용문)이후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자 

 

▲ 歷史上(역사상)에 天下最大江(천하 최대강)인 Huang He(황하, 黃河)는 龍門(용문) 이후에 물줄기가 나뉘어 졌다. 그러나 現在(현재)의 黃河(황하)는 龍門(용문)을 지나서 물길이 나뉘지 않는다. 현재의 黃河(황하)는 冀州(기주)로 흐르지 않으며 兗州(연주)에 九河(구하)를 형성하지도 않는다. 현재의 黃河(황하)는 대부분의 江幅(강폭)이 수백m에 不過(불과)하며 동쪽에 黃海(황해)로 직진한다.   ©김종문 고지도전문위원

  

歷史上(역사상)에 龍門(용문)은 積石(적석)에서 北(북)으로 약 3천리에 위치하였다. 現在(현재)의 龍門(용문)은 現在(현재)의 積石(적석)에서 東(동)으로 7천여 리이다. 더욱이 北(북)에서 南(남)으로 2천리 정도를 흘러서 龍門(용문)으로 내려온다. 

 

龍門(용문)은 禹(우)임금이 龍門山脈(용문산맥)을 쪼개어 만들어 폭이 좁았으며 물살이 거세어 배의 운행이 어려웠다. 龍門(용문)은 龍門三級(용문삼급)이라 불리던 세 단계의 瀑布(폭포)가 있었다고 한다. 강해(江海)에서 모여든 수천 마리의 대어(大魚)들 중에 이곳을 오르면 용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었을 정도로 龍門(용문)은 물살이 거세었다. 용문의 물살이 가뭄이 들어도 거세었던 것은 용문의 지세가 가파른 때문일 것이다. 현재의 龍門(용문)에는 그러한 急流(급류)와 瀑布(폭포)들이 보이지 않으며 山脈(산맥)을 깍은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積石(적석)이후 북쪽으로 흐르던 黃河(황하)는 西河(서하)로 불리며 龍門(용문)은 西河(서하)가 中夏(중하)로 오는 길목에 위치하였다. 西河(서하)는 龍門(용문)의 좁은 수로들을 통해 東(동)으로 흘러갔다. 龍門(용문)이전 하나의 줄기로 흐르던 黃河(황하)는 龍門(용문)을 지나며 세 갈래로 나뉘었다. 세 갈래는 다시 여러 갈래로 나뉘어 大陸(대륙)의 곳곳으로 흘러갔으며 주위의 여러 강들과 합류하여 天下(천하)에서 가장 巨大(거대)했던 大黃河(대황하)를 形成(형성) 하였다.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출처: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51601

 

 


 

출처 : 고지도와 사서의 진실-세계사는 조작되었다(고지도) | 글쓴이 : 요수 | 원글보기



맨위로
통합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