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義烈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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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의열단(義烈團)은 약산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는 아나키스트(영어: anarchism, 프랑스어: anarchisme, 무정부주의) 성격의 무장독립운동단체로 1919119일 설립됐다. 이들은 프랑스 조계지역(외국인 치외법권지역)인 중국 상하이에서 무력항쟁으로 일본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을 했다. 이들이 상하이에서 활동한 이유는 프랑스와 일본의 대립으로 인해, 프랑스 경찰이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의열단은 비폭력투쟁인 3.1운동이 일본의 폭력으로 실패한 것을 보았으므로 광복을 위해 무력만을 수단으로, 암살만을 정의로 삼아 5개소의 적 기관 파괴와 7악의 제거를 위해 파괴활동을 벌였다. 이때 5개소의 적 기관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경찰서· 기타 중요 기관이며, 7악은 총독부 고문· 군 수뇌· 타이완 총독· 친일파 거물· 밀정· 반민족적 토호· 열신(劣紳)이다. 말하자면 의열단에서는 폭력투쟁으로 일본의 지배, 착취, 친일파들의 일본과의 결탁에 맞선 것이다.




義烈団_初期 1920 년 봄 무렵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찍은 단체 사진이 첨부 된 의열단 단원 鄭利逍 일본 경찰 자료

 

의열단 창단

1919119일밤, 만주(滿洲) 길림성(吉林省) 파호문(把虎門)밖 중국인 반모(潘某)의 집에 강세우(姜世宇), 곽경(郭敬권준(權俊). 김상윤(金相潤). 김원봉(金元鳳배동선(裵東宣서상락(徐相洛신철휴(申喆休윤세주(尹世胄이성우(李成宇이종암(李鍾岩한봉근(韓鳳根한봉인(韓鳳仁13명이 모여 밤을 새워 가면서 숙의한 끝에 그 이튿날인 10일 새벽에 급진적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항일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하였다.“정의(正義)의 사()를 맹렬(猛烈)히 실행한다.”고 하여 의열단(義烈團)이라 이름하였다.

의열단은 당시 만주와 중국 본토지역에 조직된 많은 독립운동단체가 미온적이고 온건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보고, 이에 대한 반성으로서 과격하고 급진적인 폭력투쟁을 목적으로 하였다. 의열단 창단 당시의 단원은 대체로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중심이고 특히 밀양동화 학교 에서 수학한 김상윤, 김원봉, 윤세주, 이성우, 한봉근, 한봉인 등 6명의 동지들이 규합 함으로써 단장에는 밀양출신 김원봉이 선출되었다.

의열단의 창단 초기에는 성문화된 강령은 없었으나, 특히 구축왜노(驅逐倭奴광복 조국(光復祖國타파계급(打破階級평균지권(平均地權)을 단원들의 이상 이며, 강령과 같이 여기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은 민중직접혁명과 평등주의에 입각하여 당시 일부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 노선이었던 문화주의· 외교론· 준비론 등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폭력적 민중혁명에 의한 일제의 타도라는 전술을 통하여 독립의 쟁취를 목표로 한 것이다.

의열단은 창단 직후 공약105파괴’, ‘7가살(可殺)’이라는 행동목표를 기본규약 으로 삼아 독립운동의 지침으로 채택하였다. 공약10조는 천하의 정의(正義)의 사()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됨. 단의(團義)에 선()히 하고 단원의 의()에 급히 함.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하시 하지에서나 초회(招會)에 필응(必應).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 19를 위하여 91을 위하여 헌신함. 단의(團義)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

 

창립멤버


고문격

黄尚奎황상규

金大池김대지

尹致衡윤치형

具榮必구영필

 

신흥 무관 학교 동창

金元鳳김원봉

尹世胄윤세주

權晙권준

李鍾巖이종암

李誠宇이성우

姜世宇강세우

金相潤김상윤

申喆休신철휴

徐相洛서상락

韓鳳根한봉근

韓鳳仁한봉인

 

만주 길림성 합류

李壽澤이수택

李洛俊이낙준

郭在驥곽재기

裵重世배중세

 

의열단 활동

의열단은 조국독립을 위하여 과감하고 과격한 적극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고 있으며, 암살대상으로서 조선총독 이하 고관,군부 수뇌,대만총독, 매국노, 친일파거두, 적탐(밀정), 반민족적토호열신(土豪劣紳) 등을 지목 하였다. 한편, 파괴대상으로는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왜적 중요기관 등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관 및 그 관련기관의 시설에 대한 폭파를 목적으로 하였다. 의열단은 위의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우선 폭탄제조법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김원봉, 김상윤은 이미 신흥무관학교 학생 때 중국인 교관 주황(周況)에게서 폭탄제조 법을 배운 바 있었는데, 이 무렵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별동대인 구국 모험단 (救國 冒險團)의 김성근(金聲根)이 폭탄제조를 연구하고 있었으므로, 그를 길림으로 초빙하여 상해에서 익힌 폭탄제조법의 기술을 단원들에게 가르치기도 하였다.

 

밀양·진영 폭탄반입사건

일본 고관에 대한 암살과 중요관공서의 폭파를 목적으로 하는 의열단의 제1차 암살파괴계획은 19203월에 시작되었다. 우선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기 위하여 3월 중순경 의열단원 곽재기(郭在驥)가 만주 안동현(安東縣)에서 밀양의 김병완(金炳完)에게 보낸 폭탄이 경기도 경찰부에 탐지되어 수색한 결과 폭탄 3개도 압수되고, 폭파계획의 행동책임을 맡은 관련자 18명 중 곽재기 등 12명이 일본경찰에게 붙잡혔다.

5월 중순경에는 의열단원 이성우(李成宇)가 다시 폭탄 13개 및 권총 2점을 입수하여 안동현 이륭양행(怡隆洋行)을 통하여 경상남도 진영(進永)의 강원석 (姜元錫)에게 보냈는데, 이것이 일본경찰에 발견됨으로써 압수되고 이 사건의 관련자 윤치형(尹致衡) 6명이 붙잡혔다. 한편, 이 폭탄의 반입과 함께 의열단의 행동대원들은 파괴대상을 선정, 검토하면서 거사 준비에 착수하던 중 붙잡힘으로써 거사는 좌절되었다.

19206월에는 곽재기·이성우 등 전원이 검거되어 취조를 끝내고 10월에는 경성지방 법원검사국에 송치되었는데 이 사건의 관련자는 모두 26명이었고, 붙잡힌 단원은 18명이었다. 이때 함께 했던 김상윤과 한봉근은 왜경의 검거망을 피하여 중국 의열단 본대로 돌아가 김원봉과 함께 제2의 거사를 계획하여 실천준비 에 만전을 기했다.

의열단은 단원 중 모험가로 일컬어지는 김대지· 김상윤· 김천· 한봉근· 등이 중심이 되어, 창단된 지 얼마 뒤에 근거지를 길림에서 북경(北京)으로 옮기고, 다시 상해 지방에서 열렬단원을 포섭하고 세력확대에 힘썼다.

 

부산경찰서 폭탄투척의거

1차 암살파괴계획이 좌절된 지 얼마 안된 1920914, 이번에는 경상남도 부산경찰서가 의열 단원 박재혁(朴載赫) 에 의하여 폭파되고 하시모토(橋本秀平)서장 등 3명이 즉사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의거는 의열단에 의하여 계획된 암살폭파사건의 하나로 부산 출신의 의열단원 박재혁의 거사가 성공했다.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의거

부산경찰서 폭탄투척의거가 일어난 지 불과 3개월 만에 경상남도 밀양경찰서가 폭탄세례를 입은 사건이 일어났다. 김상윤과 이종암이 폭탄재료와 도구를 휴대하고 국내로 잠입하여 의열단 창단 이후 의열단에 입단한 김상윤의 고향친구이자 동화학교에서 함께 수학한 최수봉에게 거사지령을 전달하고 중국으로 돌아 갔다. 그러나 19201227일 오전 730분경 밀양경찰서 서장실에서 전 경찰서원이 모여 서장 와타나베 (渡邊)의 훈시를 듣고 있을 때 최수봉(崔壽鳳)이 경찰서 창 밖에서 이 기회를 노려 폭탄 2개를 연달아 투척하였으나 불발되어 최수봉은 붙잡혀 대구지방법원 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검사의 공소로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두 세 차례에 걸쳐 거사를 위해 국내로 잠입하였으나 많은 단원들이 피체 구금됨에 따라 김상윤은 왜경의 검거망을 피해 북경의 의열단 본대로 돌아가 김원봉, 윤세주, 이종암과 더불어 의열단 5인 참모부라는 사실상 집단 지도체제의 부장(副將) 자격으로 거사의 기획, 폭탄제조, 단원포섭, 단원교육, 자금조달 등의 중요한 책무를 수행했다.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1921912일 오전10시경 서울 남산 밑에 있는 왜성대(倭城臺) 총독부청사 2층에 있는 회계과와 비서과에 각각 1개씩의 폭탄이 투척되었다. 비서과의 것은 불발이었으나, 회계과의 것은 큰 폭음과 함께 폭발하여 건물의 일부가 파괴되었다. 이 의거가 일어나자 일본경찰은 비상령을 내리고 범인체포에 혈안이 되었으나 색출에 실패하였다.

 

상해 황포탄의거(上海黃浦灘義擧, 田中義一大將 저격의거)

1922328일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田中義一)가 기선편으로 상해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접하자, 의열단은 그의 암살저격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겼으나 의거는 실패로 돌아가고 3명중 김익상·오성륜이 일본경찰에게 붙잡혔는데, 같은 해 4월 오성륜은 탈옥에 성공하고 김익상만 일본 나가사키로 압송되어 사형언도와 무기징역을 거쳐 20년 징역형으로 감형되어 복역하고, 출옥한 지 얼마 안 되어 일본형사에게 연행된 채 암살당하였다.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및 삼판통(三坂通효제동 의거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및 삼판통(三坂通효제동 의거1923112일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의거를 일으킨 사람이 의열 단원 김상옥(金相玉) 이었음은 그가 순국할 때까지 당시의 일본경찰 당국도 몰랐다. 김상옥은 단신으로 두 손에 권총을 들고 일본경찰과 접전 3시간 반 끝에 서대문경찰서 경부 쿠리다(栗田淸造) 외 수 명을 사살하고 총탄이 다하여 최후의 일발로 자결하였다.

 

2차 암살파괴계획(黃鈺·金始顯 등의 폭탄반입사건)

1923년 초 의열단은 조선총독부 등 일제 관공서와 총독 사이토(齋藤實) 등 일제 고관을 대상으로 하는 제2차 파괴암살계획을 추진하였다. 19233712일 오전 6시 차로 김시현· 황옥· 김재진 (金在震) ·권동산(權東山) 4명이 폭탄 18개와 권총 5정을 가지고 톈진을 출발하여 서울로 향하고, 나머지 폭탄 18개와 유인물은 안동현 홍종우 집과 신의주 조동근 (趙東根) 집에 숨겨두었는데. 위의 4명 중 김재진이 평안북도 경찰부 고등과 김덕기 (金悳基)에게 매수되어 이 계획을 일본경찰에게 밀고함으로써 홍종우·백영무(白英武조동근· 조영천(趙英千) 4명이 체포되고 폭탄 10, 선언서·전단 691매를 압수당하였으며, 그 뒤 신의주에서 발견된 폭탄 8개와 합쳐 폭탄 18개를 압수당하였다. 또한, 경기도 경찰부에서는 서울에 도착한 김시현·황옥 등 10여 명을 체포하고 폭탄 18개를 압수하였다.

 

동경 니쥬바시 폭탄투척의거

192415일 동경 니쥬바시 사쿠라다몬 (二重橋 櫻田門)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의거는 의열단원 김지섭 (金祉燮) 에 의하여 감행된 것으로 일본 천황이 사는 궁성을 파괴하고자 한 것이다. 이 거사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실패에 돌아가고 그는 일본경찰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그는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을 선고 받아 복역 중, 20년으로 감형 되었으나 19282월 몸이 극도로 쇠약하여 옥사하였다

 

의열단의 해체

의열단을 이탈한 윤자영이 조직한 상해 청년동맹과 의열단의 알력다툼에 19245월 김상윤은 의열단 대표로서 민족주의 노선을 주창하며 의열단 재건에 열정을 다했으나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단체의 열악한 재정으로 위기를 맞이했다.

5년동안의 극렬한 무력항쟁을 위해 의열단 지도부로써 거사를 기획하고, 단원확충과 교육훈련은 물론 무기와 자금 확보 등 조직의 유지가 난관에 이르자 단장 김원봉은 독립운동 노선변경 및 조직 재정비를 명분으로 1925년 황포군관 학교 입교를 결정하였다. 김상윤은 황포군관학교 입교를 거부하고 창단정신의 급진적 민족주의 노선의 의열단 재건의지를 굽히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초기 의열단은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김상윤은 아나키즘 사상이 확장일로에 있던 중국 복건성 지역으로 거처를 옮긴듯하나 분명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최후

19271031세의 나이로 복건성천주(泉州) 설봉사(雪峯寺)에서 사인이 불명확한 체 사망한 기록이 있으나 유해를 찾을 수 없어 국내로 봉환하지 못하였다.

사후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 (1968)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1990), 독립유공자 예우법 개정에 따름.

2005년 경남 밀양 유지들이 뜻을 모아 출생지에 의열투쟁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2015년 중국 복건성 천주 설봉사에 유족들의 뜻과 설봉사와 중국정부의 배려로 김상윤 기적비(紀跡碑)가 건립되었다.

 

단원

창립을 함께 한 단원은 김원봉, 윤세주, 이성우, 곽경,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권준, 이수택, 이낙준이었다. 1923년 상해 일본 총영사가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의열단 단원이 천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926년 이후 많은 수의 의열단원들은 중국 국민당정부의 북벌을 위한 학교였던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정치교육을 받았다. 이후 이들은 의열단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조선민족혁명당이 각 파벌의 권력투쟁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아 의열단은 조선민족독립당으로 새출발을 하고 11명의 위원을 선출했다.

 

단원 중 박재혁은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橋本秀平)에게 폭탄을 투척하였고, 최수봉은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김익상은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또 김익상은 이종암, 오셩륜과 함께 상해에서 일본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 시도하였다. 김상옥은 종로경찰서에 폭탁을 투척하였고, 김지섭은 일본 동경 궁성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은 만주 봉천성 일본총영사관(總領事館)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불발되었다.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조직원




Kim_Won-bong_1김원봉

 

김원봉(金元鳳, 1898928(음력 813) ~ 1958)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호는 약산(若山),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1919년 아나키즘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였고, 황푸군관학교를 거쳐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임시의정원(경상도 지역구)의원, 한국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으로 활동하였고,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출됐다.

19462월 민족주의민주전선 공동의장, 6월 인민공화당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48년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에 그대로 북한에 남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 후 국가검열상, 조선인민공화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사위원회 평안북도 전권대표로서 후방에서 북한군의 군량미를 생산하는 일을 했다. 남파활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실제로 1954125일 김원봉의 직접 지휘 하에 대한민국 경제 혼란 및 선거 방해를 목적으로 남파된 간첩단 4명이 체포되었다. 이후 김일성과의 정치 암투에서 패배하여 195810'반국가적 및 반혁명적 책동의 죄'로 대의원 권한이 박탈되었고, 대한민국으로 망명하려다 체포되었다. 그의 사망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정치범수용소에서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김상윤(金相潤, 1897912~ 192710?)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 1897912일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밀양 동화학교 수학 중 일제에 의해 학교가 폐교되자 서울중앙학교에서 수학중 19193.1 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하였으며 이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우당 이회영이 중국 길림성에 설립한 신흥무관 학교에서 수학했다. 거족적인 3·1독립운동이 가시적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일제의 탄압만 극심하게 되자 일제의 무력에 대항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무력 독립운동단체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호는초산(楚山),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황상규

 

황상규(黃尙奎, 1890~ 1941)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창원. 호는 백민(白民). 경상남도 밀양 출신이다. 의열단에서 활동했다. 경남 밀양(密陽) 사람이다. 일찍이 교육사업에 뜻을 두고 밀양에서 고명학원(高明學院)에 교사로 재직중 동국사감(東國史鑑)이란 역사교재를 저술하였다. 또한 전홍표가 경영하던 동화학원(東和學院)을 인수하여 청년학도 200여명을 배출시켰다. 그러나 일경의 탄압으로 1918년 만주 길림(滿洲 吉林)으로 망명하였다. 이곳에는 일찍부터 여준(呂準유동열(柳東說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 등의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있어서, 이들과 함께 3·1독립선언서에 앞서 독자적으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고, 19194월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에 가담하여 회계과장(會計課長) 일을 맡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Yun_Se-ju 윤세주

 

윤세주(尹世胄, 1901624~ 194263)는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다. 경상남도 출신으로 본명은 윤소룡, 호는 석정(石正)이다. 약산 김원봉의 동향 사람으로 함께 의열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백범일지에는 석정으로 기록되어 있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경상남도 밀양 태생이다. 세살 위인 김원봉과 같은 마을에서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으며, 이후 평생 함께 독립 운동을 하는 동지가 되었다. 1910년 일본에 나라가 강점되는 경술국치를 맞자 김원봉과 함께 일본어 시간이 있는 날은 학교에 가지를 않았고,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에 학교에서 일장기를 나누어주면 화장실에 넣어 버리는 등 어릴 때부터 강한 민족의식을 나타냈다. 보통학교를 자퇴한 후 밀양의 민족주의적 사립 학교인 동화중학을 입학했다. 당시 교장 전홍표는 유명한 항일 인사로서 "빼앗긴 국토를 도로 찾고, 잃어버린 주권을 회복하기 전에는 우리 민족의 운명은 언제나 슬프고 비참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목숨이 있는 동안 강도 일본과의 투쟁을 한때라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고 강조했다. 이런 영향을 받은 석정은 약산과 함께 역무단이라는 비밀 조직을 만들었고 여기서 개천절 기념행사를 가지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동화중학은 폐쇄되게 된다.




이종암

 

이종암(李鍾巖, 1896112~ 1930528)은 대한제국의 항일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는 남산(南山산남(山南부재(溥齋(潽齋우강(雩岡운강(雲岡). 중화민국 거주 시절 사용한 중국어 가명은 량젠하오(梁健浩)이다. 19172, 경상북도 대구은행 행원 사직한 그는 대한 독립 운동을 하기로 결심하여 19175, 중화민국 둥베이 지방을 왕래하며 대한 독립 운동에 뜻을 둔 동지와 함께 대한 조국 광복 투쟁을 결의, 비밀결사(秘密結社)를 조직하여 경상남도 밀양에 거주하던 김대지(金大池구영필(具榮泌) 등의 동지를 얻었다. 그 후 그는 191712, 부산연합은행 금고 속에 있는 만 구백원의 돈을 꺼내, 동지들과 함께 처음에는 원래 미주(美洲) 국가로 유학코자 하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화민국 장쑤 성 상하이(上海)를 거쳐 중화민국 둥베이 지방 지린 성 지린으로 갔다. 특히 둥베이 지방에서 그는 지린 성 닝안 현 둥징청(吉林省 寧安縣 東京城)의 간민소학교(墾民小學校)에 급사 직으로써 주소를 두고 19182월에는 중화민국 둥베이 지방 펑톈 성 퉁화 현(奉天省 通化縣)에 있는 무관학교(武官學校)에 입학하였다. 이어 19193·1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이 발발하자, 직접 대한 독립 운동에 참여하기 위하여 교관인 서상락(徐相洛) 등의 동의를 얻어 무관학교를 그만두었다.이어 1919119일 길림성 파호문(巴虎門) 밖에서 김원봉(金元鳳이성우(李誠宇황상규(黃尙奎) 등과 함께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였으며 그와 김원봉은 상해(上海)로 가서 불란서 조계(租界)에 사는 김성근(金聲根)에게 폭탄제조방법을 습득하였다. 그리고 의열단원 곽재기(郭在驥이성우(李誠宇) 등은 중화민국 장쑤 성 상하이에서 폭탄과 권총을 구입하여 이를 국내로 반입하여 앞으로 있을 거사에 대비하였다. 이종암이 대구은행에서 가져온 돈은 이러한 의열단의 활동 관련 자금으로 유용하게 쓰여졌고, 그 일부는 동지인 구영필(具榮泌)에게 전해져 중화민국 둥베이 지방 펑톈 성 펑톈(奉天)의 비밀 결사 단체인 삼광상회(三光商會)를 설치하는 자본금으로 쓰여졌다고 한다.




박재혁

 

박재혁(朴載赫, 1895517~ 1921527)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橋本秀平)에게 폭탄을 투척하고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 받고 단식(斷食)해서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김익상

 

김익상(金益相, 1895~ 194366)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평양의 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기독교계 학교에서 교직에 종사하다가 서울에 올라와 광성연초공사에서 일하던 중 1920년 펑톈(奉天)지점으로 전근 하였으나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철혈단(鐵血團, 의열단)에 가담하였다. 단장 김원봉으로 부터 일본기관의 파괴, 요인 암살이 곧 조국독립의 첩경이라는 설명을 듣고,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고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할 것을 결심하였다. 폭탄과 권총을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 1921912일 건물수리공을 가장하여 조선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비서실에 폭탄을 던진 후 다시 베이징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암살은 실패하였다.

이듬해인 1922328일 중국 시찰차 들어오는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암살하고자 상하이 세관부두에서 오성륜·이종암(李鍾岩) 등과 함께 권총으로 사격하고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하여 체포되었다(오성륜은 41일 탈옥함). 일본 나가사키로 호송되어 공소원(控訴院)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이후 20년 징역으로 다시 감형되어 1943년 출소, 귀국하였으나 또 다시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음으로 또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오성륜

 

오성륜(吳成崙, 1898~ 1947)은 한국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무정부주의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의 단원이었던 그는 김익상, 이종암과 함께 19223월 상하이의 황푸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암살시도사건에 참여했다. 하지만 탄환이 빗나가는 바람에 계획은 실패했으며, 일본영사관내의 감옥에 갇혔다. 이때 같이 수감된 일본사람 다무라의 아내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탈출하였다. 상하이에서의 일본인 대장 암살이 실패하자, 오성륜은 모스크바로 건너가 동방노동자공산주의대학에서 공부하였는데 이는 무정부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념을 바꾸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1923년에는 고려공산당의 집행부대 성격을 가진 적기단에 가담했으며, 이듬해에는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간의 좌우합작으로 운영되던 황푸군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한다. 하지만 1927년 중국공산당의 광저우점령사건인 광둥코뮌 가담으로 광둥의 하이루펑 소비에트로 활동지역을 옮겼다. 이듬해 하이루펑 소비에트가 붕괴되면서 1929년에서 1930년 사이에 만주의 지린성 판스현에서 활동했다.이는 중국 공산당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조선사람인 오성륜의 중국 공산당에서의 활동은 1930년 코민테른에서 중국공산당은 만주내 조선인 공산주의 단체들을 흡수하라고 지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1년 오성륜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판스현위의 무장조직인 적위대(赤衛隊)를 결성하였는데, 후에 동북항일연군의 모태가 되었다. 이때 그와 만주성위의 서기 나등현은 일제를 적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보았으나, 중국 공산당에서 이를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중국인 지주들을 상대로 계급혁명을 벌였다. 하지만, 지주들의 저항으로 계급혁명은 실패했고, 오성륜은 적위대를 노농반일의용군으로 개칭했다. 또한 일제에 대항하는 비적인 상점대와 연합했으나,내부에서 항의가 있어서 조직이 분열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만주성위에서는 중국인인 양징위를 대표로 파견, 지도기관 개조를 시작한다.(193211). 양징위는 의용군과 상점대의 분리를 항일운동 지속을 위해 거부하는 오성륜을 판스현 당대회에서 비판과 함께 반석현위 서기직에서 해임시켰다.

중국공산당에서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로서의 뜻을 펼칠 수 없게 되자, 그는 1934117일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의 제2사 정치부 주임으로 활동하였다. 독북인민혁명군은 남만주의 공산주의계 무장단체를 통합한 연합무장단체이다. 1935년 코민테른에서 계급혁명노선에서 반제국주의 인민전선전술로 활동방향을 바꾸면서 재만한인조국광복회를 19366월에 결성한다. 또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군수처장으로 승진하였으나, 동북항일연군은 일본의 겨울진압전과 집단수용시설인 집단부락 건설로 인한 민중들의 지원단절로 세력이 약해졌으며 오성륜 자신도 포위당한다. 결국 19411월 항복하였으며 일본에 협력하고 말았다. 그래서 일본이 패망한후 팔로군에게 처형당한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1947년 네이멍구 자치구에서 병사하였다. 오성륜의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로서의 업적이 김일성의 업적으로 둔갑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이를 근거로 김일성이 조국광복회를 결성했다고 기록해 왔다는 주장이 있다.




류자명

 

유자명(柳子明, 류자명, 1894113~ 1985417)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이다. 본명은 유흥식(柳興湜)이고 본관은 문화이며 호는 우근(友槿)이고 유자명(柳子明)은 별명이다. 충청북도 충주 출신이다. 충주농업고등학교의 전신인 충주간이농업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19193·1 운동에 가담했다가 육로를 통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후 무장 항일 투쟁에 뜻을 두고 김원봉의 의열단에 가입하였으며, 이회영, 김창숙, 신채호 등과 더불어 아나키스트 노선에서 활동했다. 1924년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설립에 관여했다. 19304월에는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서 아나키스트운동의 강령과 규약을 발표했다.

중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중국인, 인도인들과 함께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김규식이 회장을 맡았으며, 기관지 동방민족한국어, 중국어, 영어로 발행했다. 유자명은 조선혁명자연맹, 남화한인청년연맹, 불멸구락부 등의 독립 운동 조직에 꾸준히 가담했다. 1930년대에는 조선의용대 지도위원, 1940년대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학무부 차장을 역임하였다. 유자명은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1923) 기초에 참가했을 만큼 아나키즘 이론에 밝았으며 탁월한 어학 실력과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독립 운동계의 일급 참모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중국인과 다시 결혼한 뒤 광복후 한국 전쟁 등으로 귀국 시기를 놓치면서 사망할 때까지 중국에서 원예학자로 활동하였고 후손들도 대부분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있기 때문에 그동안 활동 내역이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었다.

199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19783급 국기훈장을 수여받아 남북 양 체제에서 동시에 인정 받은 독립 운동가가 되었다. 유해는 참여 정부 시절에 봉환 해 국립대전현충원에 한국인, 중국인 부인과 합장되어 있다.

 

저서로 회고록 나의 회억(1984)이 있으며, 전기로는 행동하는 지식인 류자명 평전(원제 불멸의 지사 류자명 평전)(류연산 지음, 충주시 예성문화연구회, 2004)이 발간되었다.




김상옥

 

김상옥(金相玉, 189015~ 1923122)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다른 이름은 김영진(金永振), 아호는 한지(韓志의엄(義嚴)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호적상에는 조선개국498년 즉188915일생으로 나와있다. 지금까지 각종 전기 등에 1890년 생으로 씌어있고, 집안에서 1890년 생 범띠로 알고 있다고 하나, 동지 한훈과 "동갑이었다"고 했다는 점 등을 보아 1889년생인 한훈과 같이 김상옥도 호적상의 1889년생이 틀림없다.(이정은의 김상옥 평전에서의 주장.) 그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한성부 어의동에서 군관을 지낸 김귀현(金貴鉉)과 김점순(金占順)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병조판서 김영정의 15대손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면서 한학을 수학하는 동시에 어의동보통학교를 다녔다. 10대 중반부터 기독교에 입문하고 서울 동대문감리교회를 다녔다. 야학에 다니면서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이고 경상북도 풍기군에서 결성된 대한광복단에 참가하는 등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실제로 김상옥의 철물점은 (명칭:영덕철물상회) 한 때 종업원만 50명에 가까울 정도로 컸었다. 김상옥은 이를 모두 독립운동에 쏟았다. 19193·1 운동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에 뛰어들어, 반일 비밀 조직인 혁신단을 결성한 뒤 지하 신문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해 배포했다. 3·1 운동 당시 만세를 외치던 여고생을 살상하려고 한 일본군경을 저지 및 폭행하고 군경의 검을 탈취하여 자신이 보관하였다.

다음 해에는 풍기 시절부터 동지인 한훈 ,북로군정서의 김동순과 함께 요인 암살을 위한 조직을 만들어 구체적인 암살 계획까지 세운 것이 드러나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이 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이시영, 신익희, 이동휘, 조소앙 등과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기독교인이었던 김상옥은 192255일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 등 신사상에 접했으며, 한살임 정강 및 선언을 통해 종교를 배경으로 한 민족 혁명에서 유물론적 계급 혁명으로 사상이 변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192210월 권총 3정과 실탄 800발 및 폭탄 그리고 항일 문서를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한 뒤 1923112일 독립운동 탄압의 본산으로 악명이 높았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인 경찰 및 어용신문 매일신보사의 사원 1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고 알려져 있다. 투척 사건 이후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피신하던 중, 사이토 총독이 회의에 참석하러 도쿄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암살할 목적으로 서울역 주위를 수일간 배회하다가 종로경찰서 무장 경찰 20여 명에게 포위되었다. 김상옥은 그들과 총격전을 벌여 유도사범이자 형사부장인 다무라를 사살하고 경부 20여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고봉근의 집에서 경부 20여명에게 포위당한 후, 반격해 중상을 입혔다. 김상옥은 1923122일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1천여 명의 일본 군경에게 포위당해 민가의 지붕을 뛰어다니며 일본 군경 4백여 명과 3시간동안 총격전을 벌이다 총알이 다 떨어지자 남은 한발로 자결하여 의젓하게 최후를 마쳤다.

의문과 논란

김상옥이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의 장본인 인지에 대한 의혹은 풀리지 않았다.

김상옥의 시신에는 11발의 총알이 몸에 박혀있었다. 총알을 맞아가면서도 그 정도로 싸웠으니 매우 전투능력이 뛰어났음을 알수 있다. 생포가 목적이었는데, 의열단원 김상옥이 일본 군경들과의 교전 중 자결했기 때문에 일본 군경들은 과연 김상옥이 폭탄을 투척하였는지에 대해 심문해 볼 수 없었다. 효제동 총격전 직후 314일 총독부 경무국의 야마구치 고등과장은 사건 전모를 발표하면서 김상옥이 폭탄투척 사건의 범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공식 발표했다.

또한 후에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고 진술한 자가 없었다. 의열단원들도 여러가지 이유에서 그가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사건의 주인공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윤익중 - 재판정에서 "그날 그 시각 김상옥과 함께 종로대로를 걸었다, 그때 종로서를 지나온 학생들에게서 폭탄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김상옥은 그런식의 폭탄투척은 그리 좋다고 (효과적이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라고 진술했다. -다른 동지들의 증언도 같은 의견이었다.- 조선일보는 316일 신문에서 이 진술을 기사에 실었고, 이와 함께 "김상옥은 정녕 폭탄 범인이 아니다."라고 분석하여 전했다. , 그 때 김상옥은 사이토 암살 계획 실행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경찰 추적과 경계, 감시를 강화시킬 일을 스스로 자초했을 가능성은 적다. 전에도 이런식의 치밀하고 영향력 있는 사건이 일어난 후 일본군은 비상경계 상태를 취했었으며, 종로경찰서 폭탄사건 후 역시 다르지 않았다. 당시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이견이 많이 제기됐었으며, 미와 경부보도 이에 대한 확답을 하지 못했다. 마지막 은신처는 혁신단 시절의 동지인 이혜수의 집이었는데, 효제동은 그의 생가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종로경찰서 사건에 대해서는 김상옥이 결행했다는 설이 정설이나, 오래 준비해 온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을 앞두고 일어난 일이며, 목격자가 없다는 점에서 다른 조직의 소행이라는 이설도 있다.




황옥

 

황옥(黃鈺, 1885~ ?)은 일제 강점기의 경찰이었다. 서울 출신으로 일본 경찰에서 경부(경감급)라는 중간간부 직위까지 승진하였다. 1920년 경기도에서 근무하다 의열단 단원 김시현과 접선해 의열단에 가입했다. 1923년 김상옥이 일으킨 종로경찰서 투폭사건 이후에 사건 관련자를 색출한다는 구실로 중국으로 출장을 가서 톈진에서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만났고, 폭탄 36개와 권총 5정을 수령, 김시현, 김재진, 권동산 등과 함께 물건을 단둥, 신의주를 거쳐 경성까지 밀수했다. 의열단은 황옥, 김시현 등이 밀반입시킨 무기류를 통해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 등을 동시에 테러하는 제2차 국내 거사를 준비했지만 김재진이 밀고하여 실패했다. 김재진은 재판 이후 흔적이 증발하는데, 유석현은 1983년 중앙일보에 기고한 회고록에서 김재진은 가명이고 권태일이 본명이라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김원봉, 김지섭 등 소수만 탈출했고 황옥, 김시현, 김진기, 조동근, 홍종우, 홍종무, 유석현 등은 1923315일에 체포당한다. 황옥은 재판정에서 자신이 일본 경찰의 지시를 받고 의열단에 프락치로 잠입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유죄를 선고받고 1924년 징역 12년형에 처해졌다(황옥 경부 폭탄사건). 1924년 김지섭이 도쿄 어소 투폭사건 때 사용한 폭탄도 황옥이 총독부 물건이라는 소인을 붙여 세관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후 결핵으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192512월 가출옥하였다가 19285월 재수감, 1929년 다시 가출옥한 이후 해방될 때까지 행적은 불분명하다. 일본 제국이 패망한 뒤 반민특위, 조선독립운동사편찬발기인회에서 활동하다가 1950년 한국 전쟁 때 납북되어 이후 생사를 알 수 없다. 경기도 경찰부장 시로가미 유키치는 황옥이 자신의 재가를 받은 작전에 따라 활동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하지만 김원봉과 김시현은 황옥이 의열단원이 맞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상호 증언이 엇갈리고 있기에 황옥이 의열단원이었는지, 일본 경찰의 프락치였는지, 또는 양자에 모두 발을 걸친 이중간첩이었는지 여부는 아직까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1983년 서울대학교 도서관 건물에서 추락사한 민주화운동가 황정하가 황옥의 손자이다.




김시현

 

김시현(金始顯, 1883~ 196613)은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며 정치인이다. 자는 구화(九和), 호는 하구(何求)이다. 의열단원으로 김원봉과 사상적 동지였고, 상하이 고려공산당,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러시아어: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Кореи, 영어: Communist Party of Korea)의 정치인이였다. 일본 메이지 대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3·1 운동 후 만주에서 의열단 활동 등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하고 수차례 투옥되고 풀려나길 반복하였다. 옥중에서 광복을 맞고 풀려났으며, 그 후 제2대 안동군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1920년 김규식(金奎植여운형(呂運亨) 등과 함께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혁명단체대표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19209월경 의열단이 국내에 들어와 전국적인 규모의 폭동과 요인 암살 및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할 목적으로 국내에 폭탄반입을 시도할 때 이에 가담하다 대구에서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년간 투옥되었다. 1952625일 부산에서 열린 6·25 기념식장에서 유시태로 하여금 이승만 대통령을 암살하도록 하였으나, 권총이 불발에 그쳐 실패하였다. 이 사건의 주모자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4·19 혁명과 함께 복역 만 710개월만인 1960428일에 석방되었다. 그 후에 제5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독립유공자 서훈은 받지 못했다. 19607월 민의원에서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1표를 얻었다.




Kim_Jisup 김지섭

 

김지섭(金祉燮, 1885~ 1928220)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호는 추강(秋岡)이며, 경상북도 안동(安東) 출생이다. 상주보통학교 교원을 거쳐 금산지방법원 서기, 김응섭(金應燮) 법률사무소 상주출장소원을 지냈다. 19193·1 운동 때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활약하다가 1920년 중국으로 망명,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상하이·베이징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4년 제국의회에 참석하는 일본 고관들을 저격하고자, 19231220일에 상해를 출발하여 31일 후쿠오카에 도착하였다. 이때 고바야시 간이치(小林貫一)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192413일 도쿄에 잠입하였으나, 제국의회가 무기한 연기되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계획을 변경하여 일본 궁성(宮城)의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 3개를 던지기로 했다. 15일에 왕궁진입을 시도하며 폭탄을 던졌으나, 3개 모두 불발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의 변호사 후세 다쓰지는 "조선 민중 전체의 의사를 대표한 사람"이고 폭탄이 불발했으니 불능범이라 무죄를 주장했으나, 검찰은 사형을 구형하고 재판부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러나 1928220일에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복역 중 사형 당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나석주

 

나석주(羅錫疇, 1892~ 19261228)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 황해도 재령 출생이다. 16세에 재령군 북율면 진초리의 보명학교에 입학해 2년간 수학한 뒤 농사를 지었다. 23세에 만주로 건너가 북간도 나자구의 독립군 양성학교인 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20년 김덕영, 최호준 등 50명의 동지들과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국내에서 부호들을 상대로 반강제적으로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금하고, 평산의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여 경찰관과 면장을 살해한 뒤 중국으로 피신했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에서 하북성 한단에 있는 중국 한단 군관학교 육군 제1군사강습소의 군관단을 졸업해 한동안 중국군 장교로 중국 군대에서 복무한 경력이 있었다. 그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김구(당시 경무국장)의 경호관,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1926년 의열단의 고문이기도 했던 김구, 김창숙 등과 논의한 뒤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일제의 식민지 수탈 기관의 파괴를 목적으로 중국인으로 위장한 채 국내에 밀파되었다. 그해 1228일 조선식산은행,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 경찰과 대치하던 중에 가지고 있던 총으로 자결을 시도하다 총상을 입고 일경에 의해 병원으로 후송되어 고등계 미와 경부에게 심문을 받던 중 자신이 나석주임을 밝히고 사망했다. 진남포에서 살던 나석주의 장남 나응섭은 잠적한 뒤 중국으로 망명했으나, 일경에 체포되어 다시 진남포로 압송되었다. 나석주 열사의 상, 서울 중구 명동, 외환은행 본점 옆에 있다. 나석주 의사 의거 기념터. 서울 중구 명동, 외환은행 본점 앞에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명동의 동양척식주식회사 자리(KEB하나은행 본점)에 동상과 표석이 건립되어 있다.




현계옥

 

현계옥(玄桂玉)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가난한 집안에서 성장하였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17세 때 대구기생조합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고 타고난 미모에다 풍류가무에 뛰어났다고 한다. 대구 기생집에서 근무하던 중 손님으로 온 현정건을 만났고 현정건의 영향으로 독립운동가의 길을 가게 되었다. 대구가 고향이었던 현정건은 소설가 현진건의 사촌 형이자 일본과 중국 등에서 유학한 지식인이었고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3·1운동 이후 독립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한국에 잠시 들린 현정건을 따라 21세의 나이로 만주를 거쳐 상하이로 떠나 의열단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의 길에 들어섰다. 의열단장 김원봉으로부터 폭탄제조법과 육혈포 놓는 법을 배웠고, 만주와 상하이를 오가며 목숨을 건 비밀공작활동을 수행하였다. 외국어에 능통하여 영어뿐 아니라 일본어, 중국어까지 유창하게 해 폭탄을 운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28년 시베리아로 망명하였고 모스크바로 가서 공산대학을 졸업했다.

 

 

주요사건

1920914: 박재혁이 부산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서장을 폭사시켰다.

19201227: 최수봉이 밀양경찰서 소속 모든 경찰이 모인 가운데 폭탄을 투척하였다.

1921912: 김익상이 조선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폭탄을 던졌다. 폭발로 청사 일부가 부서졌다.

1922328: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이 상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었다. 오성륜 의사는 가까스로 탈옥하고, 김익상 의사는 1943년 처형되었다.

1923112: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192415: 김지섭이 도쿄의 궁성 정문 앞 이중교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하였다.

192461: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친일파 정갑주와 가족을 사살하였다.

19246: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이토 히로부미 수양녀이자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일본경찰에 넘기던 밀정, 배정자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함(배정자가 은퇴하게 된 사건임), 친일파 조직인 일진회 이용구 회장 암살 시도중 부상만 입힌 채 실패함

192467: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이 봉천성 일본 총영사관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불발로 실패, 대서관, 금정관에서 군자금 탈취하다 현장에서 김광추는 총에 맞아 순국, 김병현과 박희광은 체포되었다.

19261228: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습격하였다.

의열단의 의열투쟁은 김지섭의 도쿄거사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김원봉 단장은 무장투쟁이 단원들만 희생된 채, 큰 성과를 내지 못함에 따라, 의열단의 투쟁노선을 재정립하고 방향을 전환할 것을 검토했다. 이후의 활동들은 의열단 지휘부의 체계적인 투쟁이 아닌, 개별적인 투쟁이었다. 1928년 의열단은 '창립 9주년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서를 내고, 향후 대중의 지지에 기반한 투쟁에 역점을 두어 활동하겠다는 점을 밝혔다.




1927년_9월_13일자_동아일보 1927년 9월 13일자 동아일보. 조선공산당 검거와 재판을 다룬 당시 신문기사다. 본래 이 검거사건은 1925년 말에 일어났는데, 일제의 보도 통제로 전혀 보도되지 않다가 1927년에 가서야 처음으로 신문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기사 내용은 책임비서 김재봉을 비롯한 재판을 받은 관계자들의 사진과 조직표가 신문 전면을 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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