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내! 7년차 췌장암 부부가 살아가는 모습

부산 해운대서 목줄 한 대형견이 30대 남자 중요 부위 물어

작성일 작성자 꽃내


목줄을 한 대형견이 아파트 안에서 30대 남자 중요 부위를 물어 다치는 일이 발생했다.

부산 해운대경찰서에 따르면 11일 오후 9시 32분께 부산 해운대구 좌동 한 아파트 승강기 앞에서 여성 견주 B씨(29)와 함께 있던 대형견 올드잉글리쉬쉽독(길이 1m)이 A(39)씨 중요 부위를 물었다.

A씨는 병원으로 옮겨져 봉합 수술을 했으며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 당시 대형견은 목줄을 한 상태였지만 입마개는 착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견주 B씨를 과실치상 혐의로 입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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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국내 상장사들의 배당금이 30조원을 넘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빼고 계산하면 오히려 배당금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또 실적 부진 등의 이유로 배당을 하지 않은 상장 기업도 전체의 절반에 육박했다.


한국거래소는 11일 지난해 코스피·코스닥 상장사 1306곳의 중간·결산 배당금이 총 31조9436억원으로 잠정 집계됐다고 발표했다. 2017년과 비교하면 14% 증가했고, 2014년과 비교하면 약 두 배로 불어났다. 반도체 경기 호황으로 곳간이 두둑해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배당을 크게 늘린 데 따른 것이다. 실제로 이 2개 기업을 제외하면, 지난해 국내 상장사들의 배당금 총액은 21조2984억원으로, 전년보다 오히려 920억원 줄어들었다.

심효섭 KB자산운용 액티브운용본부 상무는 "올해 상장사들의 이익은 별로 늘지 않겠지만 개인부터 연기금까지 배당 요구가 늘어나고 있어 전체적인 배당금 규모는 작년보다 더 커질 수 있다"면서 "오는 7월쯤 삼성전자가 향후 3개년 주주 환원 방안을 내놓을 텐데 반도체 경기는 꺾였지만 배당금 규모를 크게 줄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빅2가 총 배당금의 33% 차지 "5% 배당 보고 들어왔다가 발목 잡혔네요."(투자자 김모씨)

정부가 최대 주주인 지역난방공사 주주들은 사상 최대 배당금 소식을 들을 때마다 속이 상한다. 회사 실적이 적자로 돌아서면서 회사가 주주 배당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무배당 정책은 지난 2010년 증시 상장 이후 처음이다. 한국전력 역시 실적 부진 탓에 배당을 하지 않기로 했다. 지역난방공사·한전과 같은 무배당 기업은 961곳으로, 전체의 46.7%에 달한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증시 역사상 최대 배당금 기록 경신은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배당금이 압도적으로 커졌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시가총액 1~2위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지난해 중간·결산 배당으로 지급한 금액은 총 10조6452억원이었다. 전체 배당금 총액에서 두 회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33.3%에 달한다. 2017년과 비교하면 약 10%포인트 증가했다.

상장사 현금 배당금은 지난해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지만, 배당성향(기업의 순이익에서 배당액이 차지하는 비율)은 높아진 관심과 요구를 따라가지 못하고 여전히 전 세계 바닥권이었다. 지난해 기준 한국의 배당성향은 20.7%로, 전 세계 평균(47.8%)에 크게 못 미쳤다.

◇사상 첫 2%대로 올라선 시가배당률 지금까지 유가증권 시장 상장사들의 평균 시가 배당수익률(한 주당 배당금을 현재 주가로 나눈 비율)은 2015년 1.74%, 2016년 1.8%, 2017년 1.86%로 1%대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2018년 배당수익률은 2.15%를 기록하면서 사상 처음으로 2% 선 위로 올라섰다. 지난해 기준 은행들의 1년 정기예금 이자(연 2.02%)를 웃도는 수준까지 올라선 것이다. 배당 수익률이 정기예금 이자를 웃돌게 되면, 배당주의 투자 매력은 더 커진다. 김재은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주주 행동주의 열풍이 거세지면서 대주주 몫은 줄어들더라도 일반 주주는 챙겨주는 차등배당 확대 가능성도 높다"면서 "배당 포트폴리오를 구성할 땐 배당금이 깎일 가능성이 있는 업종이나 종목은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연구원에 따르면, 배당이 앞으로 높아질 업종으로는 자동차, 음식료·담배, 제약·바이오 등이 꼽혔다. 물론 배당 수익률이 높은 곳이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투자처라고 보긴 어렵다. 향후 사업이 축소되면서 실적이 나빠질 듯한 한계 기업이 배당을 많이 한다고 해도 큰 의미를 부여해선 곤란하다는 얘기다. 배당주 직접 투자가 서툴다면, 전문가들이 운용하는 배당주 펀드나 증권사들이 운용하는 배당주 랩(Wrap)이 대안이 된다. 낮아진 예금 금리에 실망한 투자자들은 배당 쪽으로 자금을 옮기고 있다. 최근 1년간 국내 주식형 펀드 중 자금이 유입(2595억원)된 유형은 배당주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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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이태원·경리단길 상권이 최근 속앓이 중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입소문을 타고 방문객이 늘며 인기 상권에 등극했지만 최근 손님이 줄며 폐업이 늘고 있다. 그럼에도 임대료는 아직도 천정부지라 상인들의 한숨은 늘었다. 골목은 여기저기 빈 점포가 널렸고 어깨를 부딪치며 걷던 거리는 너무 한산해 적막감이 감돈다. 상인들은 밤에는 여전히 사람들로 붐비지만 미군기지 이전 등 고정수요가 크게 줄어 매출이 예전만 못하다고 토로한다. 이태원·경리단길에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한산한 거리, 이태원 맞나요?

“여기 이렇지 않았는데 사람 너무 없네요.”

자영업자 A씨는 오랜만에 이태원 엔틱가구거리를 찾은 소감을 이같이 말했다.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아 가끔 이곳을 찾아 가구를 둘러본다는 그는 불과 몇개월 새 동네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며 놀라워했다.

A씨는 “가구거리에도 골목 곳곳에 맛집이 많아 항상 사람들의 발길이 잦았다”며 “아무리 대낮이지만 이렇게 한산한 모습을 보니 이태원이 아닌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태원 엔틱가구거리는 좁은 2차선도로 양옆으로 약 300여m 남짓한 거리로 형성됐다. A씨처럼 인테리어 등에 관심이 많은 사람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령층 및 외국인이 자주 찾는 곳으로 알려졌지만 이제는 명맥만 유지하는 상황.
이태원 상권의 빈 점포. /사진=김창성 기자

가구거리를 둘러보다 이태원역이 있는 근처 이태원로로 이동했다. 이곳은 6호선 지하철이 지나는 이태원상권의 메인도로이자 거미줄처럼 연결된 이태원 일대 상권을 연결하는 중심도로다.

이곳의 분위기는 가구거리보다는 나았다. 도로 양쪽으로 자리한 옷가게, 각국 음식점, 화장품가게, 성인용품점 등 상권의 종류도 다양했고 오가는 사람도 많아서다. 다만 처진 분위기는 이곳에서도 감지됐다. 골목뿐만 아니라 메인도로인 이태원로에도 빈 점포가 눈에 띄었다.

상인 B씨는 “둘러보면 알겠지만 최근 들어 빈 점포가 늘면서 상권 분위기도 많이 가라앉았다”며 “손님이 줄어 매출이 하락세인데 임대료는 아직도 비싸서 버티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또 다른 상인 C씨 역시 같은 생각. 그는 “워낙 외국인 관광객이 많다보니 딱히 유행을 타는 상권은 아니지만 그래도 요즘은 이마저도 끊기는 게 아닌가 걱정된다”며 “잘나가던 유명 방송인 홍석천씨 가게도 치솟는 임대료를 못 버티고 문 닫는 마당에 우리 같은 소상공인이 무슨 수로 오래 버틸 수 있겠냐”고 씁쓸해 했다.

상인들의 말대로 이태원 일대 상권 임대료는 혀를 내두를 정도다. 이태원역 인근 D공인중개업소에 따르면 역세권 상가 1층(약 70평)의 경우 보증금 3억원에 월 임대료가 2000만원, 역 뒷골목 점포(약 60평)는 보증금 1억원에 월 임대료 600만원 수준이다. 이보다 작은 지하(약 26평)는 보증금 3000만원에 월 200만원, 1층(약 26평)은 보증금 7000만원에 월 400만원이다.
경리단길의 빈 점포. /사진=김창성 기자

D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점포 크기와 입지 등에 따라 가격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이태원 상권은 대체로 시세가 비싼 편”이라고 설명했다.

◆폐업 점포 속출, 경리단길

“하루에 아이스크림 20개 팔기도 힘들어요.” 상인 E씨
“저도 가게를 곧 접을까 생각 중이에요.” 상인 F씨

근처 경리단길 상권 상인도 한숨만 내쉬었다. 이태원 상권 못지않게 분위기가 가라앉아서다. 맛집으로 소문나 평일 낮에도 수십미터의 대기줄이 있던 경리단길 골목의 한 식당은 ‘점포임대’라는 안내문이 붙어 파리만 날렸다. 식당이 없어진 줄 모르고 방문한 이들이 발길을 돌리는 일도 종종 목격됐다.

대학생 G씨는 “올 때마다 긴 대기줄 때문에 발길을 돌렸는데 결국은 가게가 없어져 음식 맛도 못 보게 됐다”며 “예전보다 분위기가 썰렁해져 이제는 다시 안 올 것 같다”고 말했다.

골목뿐만 아니라 도로가에 위치한 점포도 텅텅 비었다. 어떤 곳은 텅 빈 점포 6개가 연달아 줄지어 선 곳도 있어 경리단길 상권의 심각한 최근 상황을 짐작케 했다.

경리단길은 SNS 입소문을 타고 서울의 대표 랜드마크 상권으로 떠올랐지만 거품도 순식간에 빠졌다. 이태원 상권보다 전철역과 멀고 언덕이 많아 접근성이 다소 떨어졌지만 어느 순간 너도나도 가고 싶은 상권이 된 것도 잠시, 곳곳에 폐업이 속출한 평범한 상권으로 전락했다.

상인 H씨는 “사실 경리단길은 대단한 상권도 아니다. 어쩌다 입소문을 타고 방문객이 늘자 너도나도 가게를 하겠다며 뛰어들었고 늘어난 방문객만큼 임대료가 치솟았다”며 “곧 거품이 꺼지면서 상권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임대료는 여전히 버티기 힘든 수준”이라고 토로했다.
경리단길의 빈 점포. /사진=김창성 기자

또 다른 상인 I씨는 “기본 상권 분석 없이 급하게 장사에 뛰어든 상인도 문제지만 뜨는 상권이라고 무분별하게 임대료를 올린 건물주도 문제”라며 “매출이 줄어 임대료 낼 돈이 막막한 상황이라 같이 사는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데 이미 지는 상권이라 하루 빨리 발을 빼는 게 상책인 것 같다”고 씁쓸해 했다.

이처럼 경리단길 역시 비싼 점포 임대료가 상권의 침체를 부추겼다. 인근 J공인중개업소에 따르면 경리단길 초입의 1층(약 10평) 상가는 보증금 3000만~5000만원, 월 임대료 150만~200만원, 20평 이상은 보증금 5000만원, 월 320만원 이상으로 시세가 형성됐다. 1층 60평 상가의 경우 보증금 1억~1억5000만원, 월 임대료 550만~600만원인 곳도 있어 텅 빈 상권 분위기에 비해 아직도 시세는 콧대가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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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딱 100주년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좀 특별한 분을 초대했는데요. 일본 동경에서의 2. 8 독립선언에도 참여하셨었고 독립운동에 앞장서시다가 해방 이후에 반민족특위특별위원회의 반민특위 위원장을 맡으셨던 김상덕 선생님. 그분의 친 아드님이십니다. 지금 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을 맡고 계신데요. 김정륙 부회장님을 스튜디오에 직접 모셨습니다.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세요.

◆ 김정륙> 안녕하세요.

◇ 정관용> 아버님 생각 많이 나시겠어요, 오늘.

◆ 김정륙> 우리 집에 아버지 영정을 모시고 있는 만큼 아침마다 제가 인사를 합니다. 아버지하고 어머니. 그래서 항상 생각이 납니다. 그립고요.

◇ 정관용> 아버님께서 바로 임시정부에서 문화부장도 맡으셨더라고요.

◆ 김정륙> 맞습니다.

◇ 정관용> 그리고 일본에서 유학하셨고요. 유학 중에 바로 1919년 2. 8 독립선언에 참여하셨죠.

◆ 김정륙> 그렇습니다.

◇ 정관용> 그리고 그다음에는 만주로 가서 주로 만주에서 독립운동하셨나요?

◆ 김정륙> 네. 만주 독립운동 단체가 굉장히 많았거든요. 그중에서 가장 세가 큰 독립운동단체가 세 곳인데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그중에 정의부에 아버지가 참여를 하게 됩니다.

◇ 정관용> 그리고 중경 임시정부 문화부장으로 계시다가 해방을 맡고 맞고 귀국하신 거예요. 우리 김정륙 선생님께서는 중국에서 태어나셨죠?

◆ 김정륙> 제가 중국 남경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 중국 수도였습니다. 남경이.

◇ 정관용> 몇 년에 태어나신 거예요?

◆ 김정륙> 1935년.

◇ 정관용> 35년. 그리고 아버님이 그렇게 독립운동 하고 계실 때 어린 시절이지만 혹시 기억이 나세요?

◆ 김정륙> 중경에서부터 기억이 납니다. 5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장면이 기억나거든요, 생생하게. 지금 제 손주들 보면 그 나이에 어떻게 그걸 기억하나 싶어요. 아마 충격의 현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 정관용> 어머님 돌아가시고 아버님은 같이 살지도 못하셨죠?

◇ 정관용> 저런저런. 그리고 아버님은 며해 주칠에 며칠에 한 번씩이나 집에 오셨어요?

◆ 김정륙> 그리고 아버님은 한 달에 2번 정도 들어오셨어요. 중국 중경이라는 곳이 고온다습한 곳이거든요. 양자강하고 가능강을 끼고 있어서 항상 연무 같은 그런 게 끼고 그래서 음식이 오래 견디지 못합니다. 아버지가 임시정부로 들어갈 때 곡식 같은 걸 놔두면 문제는 간단한데.

◇ 정관용> 그런데 밥을 해 먹을 수가 없잖아요.

◆ 김정륙> 우리가 해 먹을 수가 없으니까 그게 안 되고 그래서 가장 오래 견딜 수 있는 음식이 따빙이라는 따빙이라는 빵입니다, 빵. 한 일주일 정도 잘하면 견딜 수 있어요. 아버지가 한 3일 정도는 우리 음식을 만들어주니까 되는데 나머지 한 5일이 빕니다. 그래서 이 5일 동안 제가 해결했어요.

◇ 정관용> 어떻게요?

◆ 김정륙> 우리가 중경에 가서 민족혁명단은 손가화원 이라는 곳에 정착을 했거든요. 거기에 민혁당 본부가 있습니다. 어느 역사 학자가 꽃 집이라고 역사책에다가 썼더라고요.
반민족특별조사위원회 김상덕 위원장 (자료사진)



◇ 정관용> 그런데 꽃집이 아니에요?

◆ 김정륙> 참 이 학자한테 연구비가 나올 텐데. . .

◇ 정관용> 손가화원은 손씨 성을 가진 사람의?

◆ 김정륙> 꽃밭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 정관용> 그럼 뭐가 있었어요?

◆ 김정륙> 거기는 작물단지가 굉장히 넓습니다. 복숭화 단지, 사과 단지 무화과 단지, 배 단지, 이렇게 단지별로 잘 되어 있어요. 거기에 숨어들어가서..

◇ 정관용> 서리해 오시는 군요?

◆ 김정륙> 실례를 하는 겁니다.

◇ 정관용> 알겠어요. 참 그렇게 7살, 5살 어린데도 돌봐주는 사람도 없이 그렇게 지내셨다, 중국에서. 그렇죠? 그리고 광복을 맞고 아버님하고 같이 한국으로 돌아오신 거죠.

◆ 김정륙> 아버지가 먼저 들어오셨어요.

◇ 정관용> 그러셨어요.

◆ 김정륙> 아버지는 11월 23일 1진이 들어올 때 백범 김구 주석하고 김규식 박사하고 그 편에 같이 들어오시고 저희 가족은 3월 10일에 서울 새벽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하고 아버지하고 연락이 닿아서 숙소로 들어간 곳이 바로 경교장입니다.

◇ 정관용> 경교장으로. 그리고 이제 아버님이 반민특위 위원장을 맡으셨는데 친일파들이 아버님을 해치려고 암살하려고 막 그랬었다면서요?

◆ 김정륙> 네 암살, 그래서 반민특위에서 아버지를 보호하는 경호팀을 뒀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경사 한 분, 순경 두 분이 칼빈총을 무장을 하고 집을 지켰습니다.

◇ 정관용> 그렇군요.

◆ 김정륙> 나중에 이승만 정권 그리고 친일파들이 굉장히 우리가 볼 때 바라지경입니다. 그 상태로 들어갈 때는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아버지가 하나 있는 아들 지키기 위해서 저 정릉 골짜기 안에 숨겼습니다. 그 당시 그리고 아버지도 종로1가에 연고가 있는 모처로 몸을 숨겼습니다.

◇ 정관용> 숨어다니셨군요.

◆ 김정륙>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한 수장이 친일파한테 쫓겨서 숨어다니는.. 이게 나라가 그 당시 그랬습니다.

◇ 정관용> 또 반민특위위원장으로 활동하시던 당시에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찾아왔었다면서요?

◆ 김정륙> 이 박사가 반민특위 활동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제동을 겁니다. 친일 경찰 다 풀어줘라. 그리고 특위 활동을 자제해 달라 이겁니다. 고등계에 있었던 가장 악질적으로 친일 경찰활동을 했던 사람들, 우리 독립운동가를 잡아다가 갖은 고문, 고통을 줘서 죽음으로 몰아간 그런 사람들 우선해서 잡아들이는데 풀어주라는 겁니다. 그걸 받아들이면 반민특위가 있을 의미가 없거든요. 국회도 그렇고 반민특위도 그렇고 그 무례한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에죠. 없었죠. 그러자 이 대통령이 성명서를 냅니다. "무고한 양민을 잡아다 구타를 하고 불법 행위를 반민특위가 하고 있다." 이렇게 거짓 성명을 냅니다. 국민하고 이간질시키는 것이거든요. 그때 반민특위에서 해명 성명을 내요. 그런 사실이 없다. 그런데 그러든가 말든가 계속해서 음해성 성명을 내니까 김병노 대법원장이 도저히 이거 그냥 묵과할 수 없어서 정리를 합니다. "반민특위가 무고한 양민을 잡아다가 고문한 사실이 없고 특별법에 의거한 정당한 활동을 지금 하고 있다"

◇ 정관용> 대법원장이 딱 판정을 해 주셨군요.

◆ 김정륙> 그렇게 성명을 냈어요.
1945년 11월 3일, 중국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구선생 바로 뒤쪽에 서있는 인물이 김상덕 선생이다. (사진=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 정관용>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민특위 안에 공산당, 빨갱이가 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냥 강제침탈을 해 버려서 반민특위가 거의 없어지지 않았습니까?

◆ 김정륙> 이 대통령 성명이 안 먹혀들어가니까 국민들이 바보가 아니잖아요. 이거 분별을 못 하겠어요? 생각을 바꿉니다. 49년 5월 말에 경무대에서 반민특위 관사로 은밀한 전화가 한 통 와요. 대통령이 저녁에 갈 테니까 그렇게 알고 기다려달라. 그리고 조금 있으니까 경무대 경호팀들이 확 들이닥치면서 우리 경호실, 경호팀을 외곽으로 쫓아내버리고 안팎을 둘러싸버렸어요. 그때 굉장히 과잉한 액션을 취하더라고요, 사람들이. 그래서 우리 가족들이 그 당시 느낀 건 가족들을 겁박해서 아버지한테 은연 중에 압력을 넣는 걸로 우리는 받아들였습니다. 그러고 조금 있으니까 이런 사전작업을 하고 난 다음에 이 박사가 조용히 나타났어요. 응접실에서 밀담이 벌어졌는데. 나중에 들어보니까 친일 경찰 전면 방면하고 반민특위 활동을 슬슬 하면서 시간 끌다가 특위활동 기간이 만료되면 내각에 들어오는 게 어떻겠느냐.

◇ 정관용> 장관 자리 주겠다고 회유를 했군요.

◆ 김정륙> 감투를 가지고 회유하러 온 겁니다.

◇ 정관용> 그런데 아버님은 그걸 거절하셨고.

◆ 김정륙> 바로 거절해 버렸죠. 그러니까 이 박사가 판단을 잘 못한 겁니다. 끝까지 항일독립운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그런 유혹에..

◇ 정관용> 넘어가지 않죠.

◆ 김정륙> 일제시대에 조선총독부가 임시정부 요인급이 일제로 전향을 해 들어오면 호의호식이 보장되어 있었거든요. 임정 요인들이 그 길을 안 갔거든요. 풍찬노숙의 길로 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런 유혹을 단번에 물리쳤죠.

◇ 정관용>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강제로 침탈당해서 반민특위는 없어져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반민특위가 없어지고 아버님이 혹시 우리 부회장님한테 특별히 하신 말씀 없으셨어요?

◆ 김정륙> 아버지는 지금 과묵한 편이었어요. 집에 들어와서 굉장히 속상했하셨죠. 그럼 가족들은 그걸 다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 고통을 알죠.

◇ 정관용> 그리고 한국전쟁이 터지고 아버님이 납북 당하셨죠? 그 후에는 어떻게 사셨어요?

◆ 김정륙> 살 길이 막막했죠. 방황을 하게 되죠. 살 곳도 없고.
김정륙 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김상덕 위원장 아들) (사진=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제공)



◇ 정관용> 그래도 공부를 해서 사법시험을 보려고 하셨는데 그걸 못 보게 되셨다고요?

◆ 김정륙> 전혀 몰랐어요. 전혀 모르고 고시 준비하고 삼덕을 마친 뒤에 첫 도전에 제가 들어갔어요. 서류가 호적등본하고 신원보증서, 관급 신원보증서가 있어야만 취직도 되고 응시가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호적 떼서 갔더니 빨간줄이 그어 있더라고요. 연좌제에 걸려서 발행불가로 나오더라고요. 그때부터 좌절의 시간을 제가 겪었습니다.

◇ 정관용> 아버님은 북한에 끌려가셔서 무슨 북한 정권에서 무슨 요직을 맡았나요?

◆ 김정륙> 아니요.

◇ 정관용> 전혀 그런 것도 없는데 연좌제에 걸렸다고요?

◆ 김정륙> 전혀. 취직은 안 되고 기피업종은 취직서류 없어도 일이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뒤지다 보니까 공사판 일용직. 공사판 일용직으로 들어갔습니다.

◇ 정관용> 고생 많으셨는데 아버님이 이 독립유공자로 대한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으신 게 1990년이 되어서야 받으셨습니다. 그렇게 늦게 가서야 왜 그렇게 훈장을 받으시게 됐죠?

◆ 김정륙> 아버지가 훈장을 받았다기보다 제가 훈장을 쟁취했다고 하는 게 나을 겁니다.

◇ 정관용> 끊임없이 요청하고 요청해서. 그렇군요. 아니, 독립운동 일선에서 활약하시고 2. 8독립선언의 주역이셨고 그리고 중경 임시정부의 문화부장까지 지내셨고 그 전에는 임시정부의 의원도 지내셨고 게다가 반민특위 위원장까지 하셨는데 이 나라가 그 분한테 훈장 주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립니까?

◆ 김정륙> 납북인사에게는 서훈이 안 됐습니다. 제외시켰어요.

◇ 정관용> 얼마 전에 정치권에 나경원 원내대표 이런 사람이 반민특위 때문에 그때 국론분열이 있었다는 식으로 발언하고 막 그랬잖아요. 그런 뉴스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 김정륙> 기가 막히죠. 그리고 나경원 대표가 하는 말.. 계속 말을 바꾸지 않습니까? 역사에 대해서 무식한 사람 같아요. 역사를 아는 사람은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반민특위가 제대로 못한 게 아니라 반민특위가 제대로 할 수 없게끔 이승만 정권하고 친일파들이 파괴시킨 겁니다.

◇ 정관용> 그리고 그 당시 반민특위 활동을 반대하던 친일파들도 반민특위가 활동하면 나라가 분열된다 그랬다면서요?

◆ 김정륙> 별소리 다 했습니다.

◇ 정관용> 그 논리랑 사실 비슷한 거 아닙니까?

◆ 김정륙> 저는 지금 나경원 의원이 하는 말이 더 심각하게 들립니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지난 3월 14일 "해방 후에 반민특위로 인해 국민이 무척 분열했던 것을 모두 기억할 것"이라고 말해 논란이 일은 바 있다 (사진=윤창원기자)



◇ 정관용> 더 심각하다?

◆ 김정륙> 반민특위가 분열을 일으켰다고 단정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당시는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친일척결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대다수였습니다. 경우가 다릅니다.

◇ 정관용> 그렇죠. 지금 임시정부기념사업회의 부회장을 맡고 계신데 중국에는 그래도 임시정부 청사들이 그대로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임시정부 기념관조차 하나 없었어요. 이제 땅을 마련해서 이제부터 짓겠다고 하는데 감회가 어떠세요?

◆ 김정륙> 저희 임시정부기념사업회 숙원사업이었습니다. 지금 저희가 최대한 건립을 위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임시정부 기념관이 개관되는 그날이 몹시 기다려집니다.

◇ 정관용> 참 훌륭한 아버님을 두셨습니다마는 저희들이 못나서 우리 김정륙 부회장님 그 온갖 고생을 다 하시도록 만든 거 정말 제가 죄송스러운 마음밖에 안 듭니다. 오늘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정륙> 고맙습니다.

◇ 정관용> 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정륙 부회장 반민특위위원장 김상덕 선생의 아드님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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