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사

I. 역사에 나타난 루터의 모습과 최근의 루터연구동향 
  하인리히 보른캄(Heinrich Bornkamm)은 루터를 독일역사의 거울이라 했다. 루터교에 있어서 루터는 루터교의 교부이다. 1577년에 나온 협정신조서(Formula Concordiae)는 요한계시록 14:6에 나오는 영원한 복음을 전하는 천사를 루터로 보았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에 있어서 루터는 교회일치의 파괴자였다. 가톨릭 교회사학자인 헤르테(Adolf Herte)는 1943년 출판된 3권으로 된 저서인 '코클래우스의 루터 주석에 대한 파문에 나타난 가톨릭의 루터 모습'(Das katholische Lutherbild im Bann der Lutherkommentar des Cochl us, M nster)에서 근대의 문턱까지 카톨릭의 루터에 대한 평가는 루터의 동시대 사람인 코클래우스의 증오로 가득 찬 서술에 매어있었으며, 공지될 수 있는 소수의 예외들은 거의 모두 금서 목록에 있었음을 입증했다.
  레싱(Lessing)은 루터를 종교 자유의 투사로 보았다. 루터가 교회의 권위와 전통의 멍에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생각했다.
  나치 시대에 루터는 바로 독일인으로 평가받았다.
  1983년은 루터 탄신 500주년 기념의 해였다. 루터에 관한 학문적인 연구는 1883년에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때부터 바이마르판 루터 전집(Weimarer Ausgabe: WA)이 출판되기 시작되어 현재 100여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지금까지 계속해서 출간되고 있다.
  홀(Karl Holl, 1926년 사망)부터 루터 르네상스의 막이 열렸다. 이 후의 루터 연구가(제베르크, 보른캄, 뢰베니치, 에벨링, 히르쉬). 홀은 루터 연구의 획기적 논문들을 남겼는데 역사적이 아닌 조직신학적인 해석을 시도하였다. 1917년 10월 31일 베를린 대학에서 행한 종교개혁기념강좌: "루터는 종교를 무엇으로 이해했는가"(Was verstand Luther unter Religion). 여기에서 루터의 민족주의적인 영향을 가능하게 했다.
  히르쉬(E. Hirsch, 1899-1972)는 1926년에 홀의 루터 해석은 사상적으로 민족주의적인 루터를 의미한다고 했다.
  홀은 1922년 비텐베르크에서 행한 "루터와 광신주의자들"(Luther und Schw rmer)라는 강연에서 루터와 뮨처를 대조하였다. 홀은 뮨처를 신비적인 영성주의자로 이해했다. 광신주의자들의 정신은 사실 루터에도 있었으나 후에 여기에서 분리되었다고 본다. 홀은 루터를 독일의 심성의 원형으로 이해했다.
  트뢸취(E. Troeltsch)는 루터를 중세인으로 보았다.
  에어랑엔의 루터 학자들인 알트하우스(P. Althaus)와 엘어르트(W. Elert)는 루터를 민족주의적인 경향의 인물로 보았다.
  변증법적 신학자인 바르트(Karl Barth)는 루터를 비판하고 있는데 바르트의 비판은 후기 루터에 대한 것이다. 그는 전기(前期) 루터에 대하여 거의 다루지 않았다.
  루터에 관한 논쟁은 오늘날 압도적으로 그의 공적인 생활에 대한 위치에 관한 것이다. 이 논쟁의 쟁점은 농민전쟁에 있어서 루터의 태도이다. 이에 대하여 루터에 대한 비판은 대단하다. 루터는 사회 혁명의 법칙을 완전히 거부하였으며 제후의 종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1850년 엥겔스(Friedrich Engels)의 농민전쟁에 관한 논문에 기인하고 있다. 블로흐(Ernst Bloch)도 '혁명의 신학자로서 토마스 뮨처(Thomas M ntzer)'라는 책에서 엥겔스의 영향을 받아 농민전쟁에 참여한 토마스 뮨처를 혁명의 신학자로 보았다. 과거 동독(DDR)에서는 소수만 제외하고 루터 연구에 있어서 역사에 대한 공산주의의 견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막스(Karl Marx, 1818-1883)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루터를 민중의 배반자요 뮨처를 독일인의 참 선지자(예언자)로 여겼다. 포르테(Dieter Forte)는 '루터와 토마스 뮨처 또는 부기의 입문'(1971)에서 종교개혁과 루터에게 중요한 것은 자본이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푸거(Jakob Fugger)의 대자본주의가 역사를 지배하였다. 루터는 푸거의 자본주의에 봉사했으며 제후들의 시종이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뮨처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이 연극은 루터의 찬송가인 "내 주는 강한 성"과 그리고 그 목적을 내포한 거룩한 성직자회에 대한 신성모독적인 연도(Litanei)로 끝을 맺었다고 본다.
  20세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스칸디나비아에서는 루터를 투쟁의 모티브에서 연구했다. 이 투쟁은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투쟁이다. 독일에서 헤르만(R. Hermann), 볼프(E. Wolf), 에벨링(G. Ebeling) 등은 민족주의적 입장의 루터 해석은 루터를 잊고 있다고 보았다.
 
II. 루터의 성장과정. 수도원의 입회까지(1483-1505)
  - 출생, 부모의 가계(家系), 학교교육
  루터의 아버지의 조상들은 농부였으며 튜링엔 지역의 변방 서쪽 삼림지대인 공작령 만스펠트(Mansfeld) 출신들이었다. 루터의 어머니인 마가레테(Margarete Luther. geb. Linde- mann)는 아이제나흐(Eisenach)의 시민 계급 출생이었다.  
  루터의 출생 연도는 사실 정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1483년 11월 10일이라고 인정되어진다.  이것은 멜랑히톤이 산출해낸 것인데 날짜만은 정확하다.  그의 이름 Martin은 그가 세례 받은 날인 11월 11일, 성 마틴 축일에서 온 것으로 당시에는 태어난 다음 날 세례를 받았다. 루터가 태어난 곳은 아이스레벤(Eisleben)이다.  이곳에는 루터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엄밀히 말해서 Luther의 성은 Luder인데 1518년부터 Luther로 철자화 되었다. 튜링엔 (Th ringen)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이다.  루터의 반대자들 가운데는 루터가 슬라브족의 이주민의 자손이라 하는데 이것은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당시 독일은 상속권이 막내 아들에게 주어졌다.  그래서 막내가 아닌 한스 루터는 광부로서 일하였다.  그는 성실히 일하여 구리 광산의 광부에서 야금 공장장이 되었다(그러나 제련하는 불은 사실 자신의 소유가 아닌 Mansfeld 공작에게 속해 있어서 사용료를 내야 했다).
  루터는 만스펠트(Mansfeld, 1496-1497), 막데부르크(Magdeburg, 1497), 아이제나흐(Eisenach, 1498-1501)에서 라틴어 학교를 다녔다.
  루터의 가정 환경에서 오는 요인: 어떤 특별한 것은 없었다.  중세 후기의 평범한 가정 환경(사회적, 교육적, 신앙적 관점에서 볼 때). 
  에릭슨(E. Erikson)의 견해 - Luther에게 외디푸스 콤플렉스( dipuskomplex)가 있었다.  
* 외디푸스 콤플렉스: 테베의 왕 라이오스(Laios)와 로카스테(Lokaste)의 아들.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를 죽이고 스핑크스(Sphinx)의 수수께끼를 풀어서 테베의 왕이 되어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었다. 자식이 이성 어버이에 대해 갖는 애착과 동성 어버이에 대해 반발을 보이는 심적 항쟁. 
즉 루터의 하나님에 대한 상은 바로 자기 아버지 상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옳지 않은 너무 지엽적인 것이다.
  루터의 유년 시절은 중세 후기의 신앙심의 영향을 받았다. 의롭고 심판하시는 하나님. 세상의 심판주 그리스도. 그가 수도원에 들어간 것은 어렸을 때 받은 교육과 신앙심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1501. 4. 에어푸르트(Erfurt)대학 입학. 에어푸르트 대학에서는 초기 인문주의와 스콜라적인 교수법이 공존하였다.
둔스 스코투스(Duns Sscotus, 1270-1308)의 학문이 가르쳐졌다.
그당시의 교육
  Trivium (문법, 변증법, 수사학)
  Quadrivium (기하학, 산술, 음악, 천문학)
  에어푸르트 대학 예과 - 옥캄주의(Occamismus via moderna)가 주류를 이루었다.
  1502. 가을 - 문학사
  1505. 1. 7 - 문학석사
  1505. 5.20 - 법학 시작
III. 루터의 수도원 입회부터 박사학위까지(1505-1512)
 
 a) 수도사 생활과 사제 서품
 
  법학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안 된 1505년 7월 2일 루터는 그의 생애를 완전히 뒤바꾸어 버릴 사건에 접하게 된다. 루터는 만스펠트에서 에어푸르트로 돌아오는 길에 에어푸르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슈토턴하임(Stotternheim)이라는 마을 부근에서 굉장한 벼락을 만난  것이다. 번개가 그의 바로 옆에서 번쩍이며 땅에 떨어지고, 그는 기압에 의해 땅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그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성 안나(St. Anna)여 도와주소서, 그러면 수도사가 되겠나이다"라고 부르짖었다. 루터가 친구와 함께 가다가 친구는 벼락에 맞아 죽고 루터만 살아남아 성 안나에게 도움을 호소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것은 후대에 붙여진 하나의 전설적인 이야기이지 사실은 아니다. 성 안나는 성모 마리아의 모친으로 당시 산악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광부들의 성인(聖人)이었으며, 루터의 가정에서도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 이름을 불렀다.
  루터는 1505년 7월 17일 에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틴 은자(隱者)수도원에 입문하였다.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외적인 요인은 물론 벼락의 경험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배후에는 갑작스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죽음에 대한 아무런 준비 없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하는 것을 중세인들은 가장 두려워했다. 당시 에어푸르트에 만연된 흑사병으로 루터의 주위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으며, 루터 자신의 몸이 생명에 위태로운 부상을 당했다. 이에 루터는 죽음에 대한 위험을 느꼈으며 자신의 구원문제에 대하여 고민하게 되었다. 또한 루터는 선행을 통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옥캄주의의 가르침대로 수도사가 됨으로써 완전의 길을 통해 확고한 구원의 보장을 원했다. 이러한 여러 요인들이 루터를 아버지와 한 마디 상의 없이 수도원의 담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에어푸르트에 수많은 수도원이 있었지만 루터가 아우구스틴 은자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이유를 이 수도원이 가장 엄격한 수도원 중의 하나였으며, 이 수도원이 학문적으로 수준이 높아서 이곳의 공부는 바로 대학교의 공부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으로 사람들은 추정하고 있다.
  수도원에 들어간다고 해서 바로 수도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루터는 수도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훌륭히 마친 다음 1505년 9월 초 수도원 입문의 허락(Rezeption)을 받아 가입 선서식(Profe )을 마치고 1년간 수련수도사(Novitiat)로 지내게 되었다. 루터의 아버지는 루터가 수도사되는 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며, 이제까지 공들여 가꿔 온 자신의 모든 꿈을 상실한 것과 같은 허탈감을 느꼈다. 루터는 1507년 4월 에어푸르트에 있는 돔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1507년 5월 2일 신임 신부로서 첫 미사(Primiz)를 드렸다.
 b) 신학공부와 비텐베르크에서의 도덕철학 강사
  루터는 사제 서품 이후 신학공부를 하였다. 성직자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신학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비로소 종교개혁시대부터 이다. 루터가 신학공부를 할 때 주로 읽었던 책은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 1100-1160)의 '네권의 명제집'(Libri quattuor sententiarum)이다. 이것은 중세시대의 대표적인 교의학으로 다음과 같은 4가지 주요항목으로 이루어졌다: ① 하나님에 관하여(de deo) ② 창조에 관하여(de creatura) ③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de incarnatione verbi) ④ 성례에 관하여(de sacramentis). 그가 또한 읽은 책은  고대와 기독교적인 전통에 대한 해설서인 가브리엘 비일(Gabiel Biel)의 '콜렉토리움' (Collectorium)과 교의학에 대한 문제를 서술한 옥캄과 삐엘 다일리의 '쿠베스치오네스' ( Quaestiones)가 있다. 루터에게 성서통독이 금지되어 있었다는 것은 마테지우스(Mathesius)의 전설이다. 이와는 달리 루터는 성서를 열심히 연구하였다. 특히 루터는 성서연구를 위하여 스트라보(Walahfrid Strabo, 849년 사망)의 주석(Glossa ordinaria)과 리라(Nikolaus von Lyra, 1340년 사망)의 성서해석서를 읽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루터가 이미 성서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쌓았음을 볼 수 있다.
1508. 가을 - 1509 도덕철학 가르침 (비텐베르크 대학교 문학부에서)
1509 신학사 취득(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c) 에어푸르트로 귀환. 로마 여행
1510년 겨울부터 1511년 초까지 루터는 독일 아우구스틴 은자수도회 내부의 엄격파와 비엄격파의 문제 해결을 위해 엄격파의 대표로 로마 여행을 하였지만 문제의 해결을 보지 못하고 다시 독일에 돌아왔다. 루터의 로마여행은 그로 하여금 종교개혁을 일으킬 자극을 주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아직까지 루터는 철저한 카톨릭교도였다.
  d)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서신학 교수직과 박사학위
 1511 여름 루터는 요한네스 폰 슈타우피츠(Johannes von Staupitz, 1468-1524)의 주선으로 비텐베르크에 왔다. 슈타우피츠는 독일 아우구스틴 은자수도회 엄격파의 최고 책임자였다. 슈타우피츠는 1512년 10월 루터로 하여금 박사 학위를 받도록 고무시켰다. 루터는 슈타우피츠의 비텐베르크 대학 성서신학 교수직을 이어 받았다.
안페히퉁엔
  루터가 수도사로서 겪게 된 위기는 구원에 대한 절망적인 의심의 뜻을 지닌 '안페히퉁엔'(Anfechtungen)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루터는 아주 모범적인 수도사로서 경건 생활을 진지하게 했으며, 수도원의 교육은 자신을 깊이 성찰하도록 가르쳤다. 이 점에 있어서 역사상 그 어떤 인물도 루터처럼 철저하게 자신을 성찰한 사람은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루터가 수도원에서 겪은 영적인 투쟁은 그가 당시 교회의 '프락시스(praxis)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회의 요청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데서 시작되었다.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은 심령의 통회, 죄의 고백, 선행 그리고 사제로부터의 사면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을 때 루터는 구원의 확신에 대한 의심으로 괴로웠다. 참 회개란 인간에게 현재적인 것 뿐 만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는 죄에 대한 회개까지 요청한다. 이와 같은 완전한 회개란 루터에게 불가능하게 여겨졌다. 당시 아우구스틴 은자수도회 수도사에게 요구된 것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완전한 사랑과 심령의 완전한 통회였다. 루터는 이것을 완전히 성취하려고 하였지만 점점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에서부터 구원에 대한 의심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루터가 배웠던 스콜라 신학의 가르침이 그 의미를 갖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그 당시 인간이 자신의 선행을 통해서 구원의 길에 이른다고 가르쳤다. 이렇게 생각했던 펠라기우스는 이미 418년 정죄를 받았으며 이 정죄는 다시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루터가 에어푸르트대학교에서 심취했던 옥캄의 유명론(Nominalismus)은 인간이 먼저 자신의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먼저 행해야 한다(facere quod in se est)고 가르쳤다. 이 요청은 구원의 절대적인 조건으로서 구원에 있어서 행위를 정당화시켜준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실제로 유명론이 가르친 대로 모든 의를 성취할 수 없었다. 이러한 현실 아래 루터는 의롭고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심판자 그리스도 앞에서 두려움과 전율이 더해 갔다. 이것은 자신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절망이었다. 이 즈음 루터는 아우구스틴(Augustin)의 글을 읽게 되었는데 인간의 선한 행위나 의지와는 관계없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어떤 사람은 멸망으로 예정되어 있다는 아우구스틴의 예정론을 통해, 이 절망은 더해 갔다.
  루터는 이 절망에서 헤어나 마음의 평화를 찾고자 신비주의에도 심취해보았다. 그는 하나님이 신비적인 합일을 받아들인 자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보나벤투라(Bonaventura)가 하나님과 합일하기 위한 지침을 확실히 제시해주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루터는 자신의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몰입하면 인간 안에 있는 신의 본성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신비주의의 가르침이 가능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 안에 있는 가련한 자기,최고의 상태에 이를 수 없는 자기를 발견하였다. 그는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자기욕망'(Ich-Sucht)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자기욕망'은 루터에게 있어서 원죄로 간주되었으며 십계명의 제1계명을 범하는 것이었다.
  구원을 얻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왔으나 오히려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는 절망적인 의심 속에서 루터는 그의 선생이자 고해신부인 슈타우피츠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슈타우피츠는 루터에게 아우구스틴과 베른하르트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심판자로서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독생자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라고 일려주었다. 루터는 이 권고에 일시적인 안정을 찾았으나, 구원에 관한 결정적인 도움을 슈타우피츠나 신비주의나 스콜라 신학이 아닌 성서 연구에서 받게 되었다.
IV. 루터의 초기 강의들과 소위 말하는 종교개혁적인 인식의 출현
  a) 루터의 초기 신학 개요
 초기의 강의들: 시편 (1513-1515), 로마서 (1515-1516), 갈라디아서 (1516-1517), 히브리서(1517-1518)
  시편 강의.  4가지의 성서 해석에 있어서 의미 - 전통적으로 특히 루터는 문자적 의미(sensus litteralis)와 존재론적 의미(sensus tropologicus)에 중점, 가치를 둠.
  신비주의영향 - 겸비의 신학(Demutstheologie).  인간이 죄인으로 인식할 때 하나님께 인정됨.  겸손한 인간, 저주받은 인간이 의인으로 여김을 받게 된다.
  - Augustin의 영향 - 성서를 새롭게 발견 - 인식 'de spiritu et littera'.
 로마서 강의는 중요한 더 발전된 루터 신학을 제시하고 있다. 
  라틴어판 전집 제1권 (1545) 서문에서 루터는 과거에 대한 회상을 서술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iustitia Dei, 롬1:17)는 주격적 소유격(genitivus subjectivus)이 아닌 목적격적 소유격(genitivus objectivus)으로 이해되었다. 능동적인 의가 아닌 수동적인 의이다.
  b) 종교개혁적인 신학의 발견에 대한 연구 현황
  - 종교개혁의 발견 - 과정(1513-1518)
  포겔장(Erich Vogelsang)은 로마서 강의 (1516. 4월)
  비체(E. Bize) 1518.
  뢰베니치(W. v. Loewenich) 1513.
c) 논쟁들
 1) 사면부 논쟁
 ① 사면부(indulgentia)의 역사
  
   루터의 사면부 논쟁은 기독교 역사에 전환을 가져다 준 놀라운 사건이다. 면죄부로 번역된 라틴어의 "인둘겐치아"(indulgentia, indulgence, Abla )는 원래 "관용, 부드러움, 은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나중에 교회에서 "사면"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면죄부라는 용어보다 사면부라고 쓰는 이유는 "인둘겐치아"의 본래 의미가 '죄를 사해준다'는 면죄보다는 '죄와 벌을 면해 준다'는 사면이라는 뜻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먼저 사면부의 역사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사면부는 회개의 계율에 대한 실행이다. 신약성경에서 회개(Bu e)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심령의 일회적인 방향전환이었다. 고대 교회에서는 소위 말하는 "죽을 죄"(우상숭배, 간음, 살인)를 지은 사람들은 교회에서 추방을 당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이 세 가지 죽을죄도 용서받게 되었다. 중세 시대부터 공적인 회개 외에 신부 앞에서 개인적으로 회개를 하고 사죄를 받는 것까지 포함된 고해(Beichte)가 있었는데, 이것은 3단계로 구성되었다: ① 심령의 통회(contritio cordis), ② 입의 고백(confessio oris), ③ 선행의 보상(satisfactio operis). 선행의 보상으로 회개의 계율은 점점 약해지게 되었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회개(고해)는 성례의 위치로 승격이 되었다. 여기에서 신부가 "내가 너를 용서한다"(ego te absolvo)는 사면에 역점을 두게 되었다. 더 나아가 고해의 첫째와 셋째 부분이 완화되었다: ① 마음의 통회 대신 두려움으로 만족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신부를 통한 성례전적인 특성이 강조되었다. ② 11세기부터 죄의 용서 이후에 행해지던 보상이 기한적인 벌들의 면제로 이해되었다.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고해성사에서 죄는 사죄를 통해 없어진다. 즉 지옥에서의 영원한 벌은 죄의 용서로 받지 않게 된다. 그러나 전쟁, 병, 기근 등과 같은 세상에서 받게 될 기한적인 벌들은 아직도 남아있으며 이것은 사면부에 의해 탕감 받게 된다. 그러므로 indulgentia는 죄의 용서가 아니라(면죄), 기한적인 죄와 벌을 면제받는 것이다(사면).
   사면부 발행은 11세기 남프랑스에서 교회건축을 위한 사면부로서 시작되었다(부분적인 사면부). 교황 우르반 2세(Urban II.)는 1095년 제1차 십자군에 지원한 사람들에게 완전 사면부를 약속했다. 후고 폰 쌍트 케어(Hugo von St. Cher, 1263년 사망)는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잉여의 공로라고 하는 소위 말하는 "교회의 보화"(thesaurus ecclesiae)를 사면부의 근거로 삼았다. 교회의 보화의 자유로운 사용은 교황의 권한에 속한다. 교황 보니파츠 8세(Bonifaz VIII.)는 1300년에 소위 말하는 희년 사면부를 공고했다; 이 해에 로마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정해진 경건의 훈련을 받은 자는 이 사면부를 받았다. 이 희년 사면부는 100년에 한번씩 거행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곧 바로 이 기한은 50년으로 줄어들었고 나중에는 25년으로 줄어들었다.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는 1476년 연옥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사면부를 살 수 있다고 결정했다. 
   한 장의 사면부는 삶과 죽음의 위급한 순간에 지불할 수 있는 수표의 한 종류였다. 통회와 고해는 행하는 것이 아닌 지불해야 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사면부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교회의 높은 수익성의 원천의 되었다. 사면부의 부과는 교황청의 관할 하에 있었지만, 세속의 군주들은 자기들의 영토에서 사면부 판매를 금지할 수 있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사면부는 중세교회의 가장 심한 타락 가운데 하나였다.
  ② 사면부 판매의 배경                     
   알브레히트 폰 마인츠(Albrecht von Mainz, 1490-1545)는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 요한 치체로(Johann Cicero)의 아들로 영적인 일에 열심이 아주 미약하고 영적인 삶의 변화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1513년 막데부르크(Magdeburg)의 대주교와 할버슈타트(Halberstadt)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베틴가(Wettin)로부터 작센의 선제후들에게 속해 있었던 주교구 막데부르크를 빼앗았다. 그러나 호엔촐렌가(Hohenzollern)인 알브레히트와 그의 형인 브란덴부르크의 요아힘 1세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1514년 알브레히트는 대주교구 마인츠를 손에 넣음으로 1518년에는 선제후이며 동시에 추기경의 자리에 올랐다. 이러한 이중직이 교회법적으로 위반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알브레히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특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교황에게 이 대가로 뇌물을 주었다. 이 뇌물 외에도 알브레히트는 공식적으로 다른 대주교와 마찬가지로 교황청에 대주교직의 띠를 두르기 위해 돈을 바쳤다. 이 띠는 대주교직을 상징하는 것으로 20,000굴덴이었다(약 3억원). 알브레히트는 이 돈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독일 아욱스부르크에 있는 당시 유럽의 최대 거부인 푸거가문(die Fugger)으로부터 빌렸다.
   1515년 교황은 알브레히트에게 사면부를 그의 영토에서 판매할 수 있다고 허가하면서, 사면부 판매의 수익금 절반은 바로 로마로 보내고 나머지 절반은 푸거가에게 빚을 갚도록 해주었다. 공식적으로 이 수익금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의 신축을 위해 써야 했지만 교황레오 10세는 낭비벽 때문에 이 돈의 일부를 사사로이 사용하였다. 알브레히트는 "거룩한 사업"의 실행을 위해 사면부 설교가로 재능이 있는 요한네스 테첼을 채용하였다. 테첼은 10년 이상 사면부 설교자로서 혁혁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으며 사기성이 농후한 말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이 일로 그는 상당히 돈도 벌었으며 자기 하인에게 상당한 일당을 지불할 능력도 있었다. 라이프치히에 그의 사생아가 둘이나 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그는 여린 마음을 가진 청중들에게 호소하였다: 생각하라, 당신들의 부모가 당신들을 위해 했던 일들을! 이제 당신들은 조금의 돈을 가지고 연옥의 불에서 그들을 해방시킬 수 있다! "돈이 연보함에 떨어져 튀어 오르자마자 영혼이 연옥의 불로부터 튀어 오를 것이다."
   루터가 살고 있는 작센선제후국의 프리드리히 현공(Friedrich der Weise)은 테첼이 자기 나라의 영토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국민들의 돈이 호헨촐렌가로 새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테첼이 국경에서 가까운 위터복(J terbog)과 체릅스트(Zerbst)에서 활동할 때에 프리드리히의 비텐베르크 주민들은 그곳에 가서 사면부를 사왔다. 이들은 사면부를 사가지고 비텐베르크에 와서 시교회(市敎會)의 신부인 루터에게 고해성사시 그들의 죄에 대한 아무런 뉘우침이나 아픔도 없이 죄의 용서에 대한 선언을 요청했다. 진지한 신부였던 루터에게 있어서 이 일은 충격적이었다.
 ③ 루터의 사면부 논쟁(95개 논제)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오랫동안 망설여 왔고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 그리고 기도로 알브레히트 대주교에게 그의 이름으로 시행되고 있는 베드로 성당 사면부의 취소를 요구하는 편지를 썼다. 같은 날 루터는 자기가 속한 교구의 주교인 브란덴부르크의 히에로니무스 슐체(Hieronymus Schulze von Brandenburg)에게 편지를 썼다. 테첼이 이 교구에 나타나서 활동하는 것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 편지는 남아 있지 않다.
   루터는 이 편지들 외에 사면부 논쟁을 뜨겁게 불러일으키게 될 95개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교회의 문에 1517년 10월 31일 붙였다. 그 당시 성교회의 문은 비텐베르크 대학의 게시판이었다. 이 논제의 제목은 "사면부의 능력에 대한 논제"(Disputatio pro declaratione virtutis indulgentiarum)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적인 선언이나 교리는 아니다.
   루터가 사면부에 대한 논쟁을 하게 된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성 베드로 성당의 사면부이다.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a II., 1503-1513)는 성 베드로 성당 신축을 위한 사면부를 공고했다. 그의 후임자인 교황 레오 10세(1513-1521)는 이 일을 계승하고 이 사면부를 교회령인 막데부르크와 마인츠의 대주교 알브레히트에게 위임하였다.
둘째, 루터는 막데부르크 대주교의 문장이 새겨진 사면부 설교자들을 위한 교본(Instructio summaria)을 입수하였다. 이 교본에서 알브레히트는 사면부를 구입함으로써 얻게 되는 죄의 완전한 용서를 약속했다. 또한 죽은 자들을 위해 사면부를 사는 사람들에게도 통회나 고해가 필요없다고 했다. 국민들은 사면부를 사게 되면 구원이 확실히 보장된 것으로 믿고 있다. 그들은 사면부가 벌뿐만 아니라 죄까지도 면제해주는 것으로 믿고 있다. 이에 대해 루터는 침묵할 수 없었다. 루터는 교회의 책임 있는 선생으로서(신학박사로서의 의무) 이에 대해 의견을 표명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95개 논제의 제1항은 회개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우리의 주님이요 선생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회개하라…'(마4:17)는 것이다. 이 말씀은 신자들의 전 생애가 회개임을 알리시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응답이며 지옥에 대한 공포는 아닌 것이다. 제92항-95항에서는 기독교인은 벌 때문에 도피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따를 것을 주장하고 있다: "크리스챤은 벌이나 죽음이나 지옥을 통해서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노력해야 한다"(제94항). "위안보다는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는데 더욱 깊은 신뢰를 가져야 한다" (제95항).
   루터는 이 논제에 대해 누군가 토론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알브레히트측에서나 히에로니무스측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자 1517년 11월 11일 루터는 이 논제를 외부로 보냈다. 이에 대한 반응은 의외로 대단했다. 이 논제는 평신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논쟁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 논제는 몇 주가 지나지 않아 전 독일에 퍼졌다. 이에 대해 루터의 동시대인으로 종교개혁사를 서술했던 뮈코니우스(Friedrich Myconius, 1490-1546)는 "마치 천사들 스스로가 이것을 전하는 사자(使者)들 같았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뉘른베르크에서는 뉘첼(Kaspar N tzel)이 1517년 12월에 독일어로 이 논제를 번역하였다. 루터의 이 논제는 루터가 생각지도 않은 반향을 일으켰으며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④ 루터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반박
  루터의 95개 논제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반응은 당시 사면부 설교자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도미니크회 수도사인 테첼(Tetzel)로부터 시작되었다. 테첼은 루터의 95개 논제를 반박하는 글을 1518년 1월 오더강변의 프랑크푸르트(Frankfurt an der Oder) 대학의 빔피나( Konrad Wimpina)의 도움으로 작성하였다. 루터는 이에 대하여 1518년 2월 사면부 문제에 대해 학문적으로 다룬 글인 '사면부의 효능에 대한 논쟁의 해결'(Resolutioneos disputationem de indulgentiarum virtute)을 발표하였으며 1518년 3월에는 평신도들을 위해 '사면부와 은총에 관한 설교'(Sermon von dem Abla  und Gnade)를 통해 사면부를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로마 교황청은 도미니크 수도회의 신학자 프리에리아스(Silvester Prierias)를 통해 "교황이 교황의 자격으로 결정할 때는 오류가 없다. 그의 교리는 무오한 신앙의 통치이며, 성서의 힘과 권위도 거기에서 나온다"고 반박하였다.["교황권에 관하여"(De potestate papae)] 여기에서 교황이 카톨릭 교회의 최고 권위자이며 근본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한 것이다. 같은 도미니크 수도회 신학자인 에크(Eck)는 "오벨리스치"(Obelisci)라는 글을 통해 루터를 반박했으며 이에 대해 루터는 "아스테리스치"(Asterisci)라는 글로 응대하였다. 에크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일생동안 종교개혁에 반대하며 루터와 논쟁하게 된다.
  루터의 사면부 논쟁에 대해 로마 교황청은 처음에는 아우구스틴 은자 수도회와 도미니크 수도회 사이의 논쟁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느꼈는데 1518년 6월부터 독일 도미니크회의 밀고가 시작되었고, 루터는 이단으로 의심을 받게 되었다. 파문과 추방의 효력에 대한 루터의 의견 피력은 1518년 8월 법적으로 볼 때 이단임을 선고받게 했다. 그리하여 60일 이내에 루터는 로마에 나타나야만 했다. 이 때에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현공이 루터 문제를 독일 영토 내에서 다루기 위한 협상에 성공하여 1518년 10월  루터는 독일 아욱스부르크(Augsburg)에서 추기경 카예탄(Cajetan, 1469-1534)으로부터 심문을 받았다. 두 가지 중심 테마 : 루터는 교회의 보화가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공로와 동일하다는 것을 부인한다(제58항-95개 논제의).  루터는 제7항에서 성례전이 아닌 오직 믿음이 의롭게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가톨릭 교회의 성례전에 대한 가르침에 확실히 반대 입장에 있다. 루터는 카예탄의 심문에 굴복하지 않았으나 1518년 10월부터 1520년 6월까지 루터에 대한 판결은 약 2년간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신성로마제국의 새로운 황제 선출에 있었다. 1519년 1월 황제 막시밀리안(Maximilian)이 사망하자 교황청은 스페인의 칼(Karl)이 새 황제로 선출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하여 선제후 프리드리히를 황제 후보자로 세우려고 하였다. 교황청은 프리드리히의 국민인 루터를 문제삼음으로써 프리드리히의 기분을 언잖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 1520.6. 추방압력 교서"Exsurge domine"(주여 일어나소서)가 나오다
  - 1520.12.10. 루터와 그의 친구들은 비텐베르크의 엘스터토어(Elstertor)에서 교회법전들과 스콜라 신학의 책들을 불살라 버린다. 그리고 파문압력 교서의 사본도 불에 던졌다.
 d) 토론들과 1520년의 글들에 나타난 종교개혁적인 신학
루터의 초기 신학은 그의 2개의 논쟁과 3대 논문에 나타나 있다.
  - 하이델베르크 토론(Heidelberger Disputation, 1518.4).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 칭의와 십자가의 신학은 함께 있다.  타락 이후에는 자유의지란 아예 없다.  인간은 단지 악에 대한 자유만 있다(facere quod in se est).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의심에서 비로소(resignatio ad infernum)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된다.  영광의 신학은 하나님의 본질에 관해 사색적이다.  십자가의 신학은 권세와 세상의 지혜에 비해 연약함과 어리석음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한다.
 - 라이프치히 논쟁(1519.6.27-7.16)에서 루터는 교황과 공의회들의 권위에 대해 논쟁하였다.  에크(Eck)는 루터로 하여금 교황과 공의회들 이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특히 후스를 정죄한 콘스탄츠 공의회는 오류를 범한 것임을 유도하였다.  이로써 루터는 후스파 이단으로 몰리게 되었다.  라이프치히 논쟁으로 카톨릭의 교회관으로부터 단절이 나타난다.
 - 라이프치히 논쟁으로 루터는 인문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이 인문주의자들의 동아리로부터 이미 1518년 필립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이 왔다. 멜랑히톤은 브레텐(Bretten) 출신으로 하이델베르크와 튀빙엔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루터의 가장 중요한 동역자이자 친구가 되었다.
 - '선행에 관한 설교'(Sermon von den guten Werken)는 종교 개혁적인 윤리에 관한 글이다.  십계명에 의거하여 루터는 신앙선행에 관한 새로운 관련성을 제시하다: 최고의 선행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성.속 행위들 사이의 구별이 사라지다.
  - '기독교 구성원의 향상을 위해 독일의 기독귀족에게'(An den 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 von des christlichen Standes Besserung)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관한 프로그램을 전개하다: 로마교회의 세 개의 장막에 대한 분쇄; 세속 권력에 대한 교회 권력의 우위; 성서해석에 있어서 교황의 독점; 공의회의 교황 단독 소집권.  이에 대해 루터는 항의하고 있다: 세례를 통해 모든 기독인들은 사제직에 있다(신자의 일반 사제직, 벧전 2:9).  이로써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구별이 사라짐.  주교들이 거절하였기 때문에 루터는 세속의 권위에 요청하다.  이 글의 둘째 부분은 개혁 프로그램을 담고 있다: 교회국가, 성직자의 독신제 그리고 구걸의 폐지, 독점기업에 대한 투쟁.
 - '교회의 바벨론 포로'(De captivitate Babylonica ecclesiae praeludium)는 학문적인 글이다. 이 글은 특히 성례관에 대해 썼다. 성례는 약속(promissio)과 신앙(fides)에 의해 결정된다. 성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표식을 통해 증빙이 되는 약속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모든 선포와 마찬가지로 신앙을 요구한다. 이 신앙과 더불어 성례는 보이는 말씀(verbum visibiles)이다. 이것은 말씀과 동일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7개의 성례전이 다 인정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례는 오직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서 설립이 될 수 있으며 약속이 포함된 외적 표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세례, 성찬 그리고 회개는 성서적인 성례들이다. 성찬에서 그리스도는 요소에 현재적으로 존재한다.  이 성례의 은혜는 죄의 용서이다. 성찬에 있어서 로마 카톨릭의 세가지 포로: 평신도의 배잔금지, 화체설과 미사의 제사 성격, 이 글로써 루터는 중세 교회의 성례주의(Sakramentalismus)와 단절한다.
 - '기독인의 자유'(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 1520년. 늦가을)에서 루터는 "기독인의 삶의 전체"를 언급하고 있다. 이 글은 교황 레오 10세에게 드리는 편지이다. 이 글은 두 개의 역설적인 주제로 구분이 되고 결정이 된다: 기독인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인인 동시에 섬기는 종이다(고전 9:19에 의거). 칭의 신학과 기독론이 내적이고 외적인 인간의 긴장 속에 나타난다: 믿는 영혼은 자신의 죄, 불의 그리고 고통을 그리스도에게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모든 은혜에 참여하는 "기쁜 교환"을 통하여 소위 모든 경건한 행위들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섬기는 종으로서 외적인 인간은 선행으로 이웃을 섬긴다. 그러나 선행이 인간을 의롭게 만들 수 없고 오직 믿음이 의롭게 한다.
e) 보름스 제국의회(1521)
① 보름스 의회에서 황제 앞에 선 루터
  막시밀리안에 이어 새로 선출된 황제는 그의 손자인 칼5세 였다. 황제 선출 이후 루터문제는 또 다시 쟁점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1521년 1월 로마 교황청은 루터에 대한 파문장 "데체트 로마눔 폰티피쳄"(Decet Romanum Pontificem, 로마 대주교에 속하다)으로 루터를 교회로부터 파문하였다. 이 파문장으로 루터는 로마로 소환되어 교황의 심판대 앞에서야 했는데 프리드리히 현공이 루터의 판결을 독일 영토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은 정치세력의 신장으로 황제의 국민이 교황에게서 심문을 받기 이전 황제에게 호소할 수 있는 법적 장치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1521년 4월 루터는 보름스(Worms)의 제국의회서 칼 5세의 심문을 받았다. 루터는 보름스를 향해 가면서 "보름스에 있는 지붕 위의 기왓장들처럼 수많은 마귀들이  나를 겨냥하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나는 보름스를 향해 말을 타고 가리라"(Wenn ich gewu t h tte, da  so viele Teufel auf mich gezielt h tten, als Ziegel auf den D chern waren zu Worms, so w re ich dennoch eingeritten)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황제는 루터에게 그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지만, 루터는 성서 말씀의 증거가 확실하기 때문에 오도할 수 없으며 철회하는 것은 양심에 거역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철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Gott helfe mir, Amen!")이라는 말을 황제 앞에서 마지막으로 남기고 제국의회장을 떠났다.
②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 이후의 상황
 
 - 보름스 이후 종교개혁적인 사상에서 종교개혁 운동으로 되었다: 작센 선제후국, 高地 독일지역 그리고 자유도시 그리고 독일 국경을 넘어 종교개혁의 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네덜란드, 스위스,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그리고 동 프로이센까지 이 운동은 퍼져 나간다.
 - 루터 이외의 다른 종교개혁자들도 독자적인 길을 걷는다. 이들은 슈트라스부르크의 마틴 부처(Martin Bucer)와 취리히의 훌드라이히 츠빙글리(Huldreich Zwingli)이다. 보름스 제국의회가 끝나자 마자 종교개혁운동은 루터가 소위 "광신자들" (Schw rmer)이라고 일컬은 과격한 한 파를 갖게 된다. 이들은 무력으로 복음에 대한 직접적인 자유를 교회와 정치적인 프락시스에 이식시키기를 원했다. 이러한 개신교 내의 투쟁의 양상으로 로마교회와의 논쟁은 때때로 주춤하게 된다.
V. 바르트부르크 기간(1521/1522)
 a) 상황과 저술들
   루터는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황제로부터 심문을 받고 비텐베르크로 돌아오는 길에 선제후 프리드리히 현공의 계획 하에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 피신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는 루터의 신변에 곧 닥쳐 올 위험에서 보호하고자 오지인 바르트부르크로 루터를 납치한 것이다. 이곳에서 루터는 머리와 수염을 길고 호족 외르크(Junker J rg)로 변장하였다. 그는 바르트부르크에 1521년 5월 4일부터 1522년 3월 3일까지 머물면서 저술활동을 하는데 바로 이 때에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1519년에 나온 헬라어 신약성서 제2판에서 라틴어역을 참고하여 성경을 번역하였다. 이 성경은 1522년 9월 비텐베르크에서 출판되어 "9월 성경"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글들을 발표하는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라토무스를 반박하며'(성직자 독신제에 반대하는 글), '수도사의 서원에 관하여'(de votis monasticis). 비논쟁적인 글로는 '설교집'(Kirchenpostille)이 있는데 루터는 복음적인 설교의 모범을 이 설교집에서 제시하였다.
 b) 비텐베르크의 소요
 
 루터가 비텐베르크에 없는 동안 비텐베르크 교회에는 변화가 왔다. 루터의 동료인  칼슈타트의 영향 하에 실질적인 개혁이 추진되었다. 칼슈타트는 성직자 독신제, 미사와 성화숭배를 폐지하였다. 1521년 성탄절에 칼슈타트는 성찬식에서 성직자복을 입지 않고, 제사기도,     떡과 포도주를 거룩케하는 말 그리고 고해를 하지 않았다. 이러한 갑작스런 변화는 비텐베르크 교회에 큰 혼란을 초래하였다.
  또한 소위 "츠빅카우의 예언자들"이라는 스토르흐(Nikolaus Storch)와 드렉셀(Thomas Drexel) 이 비텐베르크에 와서 성령으로부터 직접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유아 세례의 폐지를 요구하였다.
  비텐베르크가 어려운 상황에 빠져있음을 전해들은 루터는 선제후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부르크를 떠나서 1522년 3월 9일부터 일주일간 인보카비트(Invokavit: 사순절 첫 주일)설교를 비텐베르크 시교회(市敎會)에서 하였다. 이 설교를 통해 루터는 종교개혁을 정상화시켜 놓았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내용이 아닌 방법에 대해 비판하였다.
VI. 예배의 개혁과 사회적인 개혁들
a) 예배의 개혁
- 비텐베르크에서는 칼슈타트를 비롯한 과격론자들의 개혁을 평정하기 위해 라틴어로 다시 예전을 행했다. 개인을 위한 미사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제사성격을 지닌 카논(Kanon) 미사는 허용되지 않았다.
- 뮨처는 1523년 알슈테트(Allstedt)에서 예배의 개혁을 위한 글인 "독일 교회 직무", "독일의 복음적인 미사"를 발표하였다.
- 이에 대하여 루터는 성인들과 마리아에 대한 축제일과 카논 미사가 없는 "미사 형식과 성만찬"을 1523년에 발표하였다. 
- "독일어판 세례예식서" (1523)
- "독일 미사" (1526): 이제까지의 미사 형식에 의존하고 있다. 카논 미사는 없으며 설교와 성만찬이 예배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새로운 교회를 위해 찬송가를 만들었다. 비텐베르크보다 진보적인 슈트라스부르크와 스위스에서 중세 후기시대의 설교, 찬송 기도가 중심이 된 설교예배가 드려졌다.
b) 사회적인 개혁
 - 1522: "결혼 생활에 대하여"(Vom eherlichen Leben).  결혼은 "하나님에게서 온 축복의 상태"이지만 "외적이고 육신 혹은 세상적인 일"이다. 이것은 신앙고백의 제1항에 해당된 것이지 구속에 속한 것은 아니다.
 - 1523: "교회의 헌금규정에 대하여"(Ordnung eines Gemeinen Kastens), 소위 말하는 "라이스니히 헌금규정"(Leisniger Kastenordnung). 라이스니히의 헌금이 사용되는 범위는 라이스니히 교구에 한정되어 있음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몇 가지 예외적인 조항도 있다. 루터는 이 헌금이 사용되어야 할 곳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① 목사를 위해서-연봉과 일년에 네 차례의 보조금.
  ② 교회의 사찰을 위해서-연봉과 일년에 네 차례의 보조금.
  ③ 학교를 위해서-교사들의 사례비-연봉과 일년에 네 차례의 보조금.
  ④ 장애자, 병든 자와 가난한 사람들, 병과 노년으로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열 명의 위원들이 매 주일 또는 부정기적으로 위와 같은 어려운 사람들       을 돌본다(이들이 살 수 있는 집, 옷, 먹을 것). 이렇게 함으로써 구걸행위를           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⑤ 버려진 고아와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서-이들의 교육과 생계를 돌보아야 한       다.
  ⑥ 구걸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⑦ 나그네들을 위해서
  ⑧ 교회당, 다리, 목사관, 학교, 사찰 사택, 구빈원의 건축과 유지
  ⑨ 비축할 수 있는 곡식을 사들이기 위해
 - 1523: "모든 교리를 판단하는 권한과 힘을 가진... 기독교적인 모임"(Da  eine christliche Versammlung…Recht und Macht habe, alle Lehre zu urteilen). 성서를 근간으로 한 새로운 교회규정.  교회의 권한은 교황과 주교의 직무보다 우선이다.
 - 1524: "상거래 행위와 고리대금에 관하여"(Von Kaufshandlung und Wucher). 초기 자본주의적인 경제양식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비판의 신학적인 핵심: 모든 것을 자신만을 위해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 1524: "기독교 학교를 세우고 보존해야하는...시의원들에게"(An den Ratsherren..., dass sie christliche Schulen aufrichten und erhalten sollen).  인문주의의 정신에서 온, 광신주의를 대항하는 종교개혁적인 교육프로그램.
 - 1523: "세속권위에 대하여, 세속권위에 얼마만큼 순종하는 의무를 가졌는가"(Von weltlicher Obrigkeit, wie weit man ihr Gehorsam schuldig sei).  이 글이 나오게 된 직접적인 동기: 작센의 제후 게옥(루터의 가장 심한 적수 가운데 한 사람)이 루터의 "9월 성서"(Septermbertestament)를 작센에 보급하는 것을 금한 데 있었다.  그 시대의 가장 중요한 글이며 세부분으로 구성되었다:
  ① 세속권위의 성서적인 근거(롬13)와 산상수훈의 말씀은 겉으로는 모순된다.  두 단계의 윤리(수도사의 길과 일반인의 길 "consilia", "concepta")에 대한 중세적인 대답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루터는 하나님의 왕국과 세상의 왕국,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지배와 영적인 지배를 구별한다. 검과 말씀은 하나님이 창조시 사용한 두 가지 매체이다.
  ② 세속권위의 한계들: 세속권위는 외적인 것, 육신에 대한 것에만 관계하지 영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 견해가 이 글의 주요부이다.
  ③ 제후들의 거울, 소위 정당한 전쟁에 대한 원칙들.
VII. 소위 말하는 종교개혁의 좌파
  종교개혁의 좌파라는 말을 사용한 학자: 독일의 A. Cornelis, 네덜란드의 Emil Egli.
종교개혁의 좌파들: 광신자들, 영성주의자들, 재세례파
① 뮨처와 츠빅카우의 예언자들: 1521년 비텐베르크
② 스위스의 형제들: 츠빙글리의 동아리에서 시작되었다. 1525년 Konrad Grebel은 취리히에서 재세례를 행하였다. 이들의 신앙고백서는 Confessio Schlatensis(1527)이며 1527년 츠빙글리, 1544년 칼빈으로부터 반박을 받았다.
③ 멜히오르파(die Melchioriten): Melchior Hoffmann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임박한 종말을 기다렸다.
④ Jan Mattis와 Johann Beukels는 독일의 뮨스터에 재세례파 왕국(1533-35)을 세우고 그리스도의 1,000년 왕국의 도래를 기다렸다.
⑤ 메노나이트파: 홀란드 카톨릭 신부인 Menno Simons(1496-1561)의 지도 아래 나타났다.
 a) 칼슈타트라 불리우는 안드레아스 보덴슈타인(대략 1480-1541)
 - 시민계급의 가문에서 태어났고 에어푸르트대학과 쾰른대학에서 공부를 한 후 1504년부터 비텐베르크에서 가르쳤다.  1512년 루터의 박사학위 지도교수였다.
 -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의 영향을 받은 칼슈타트는 1517년부터 어거스틴의 신학적인 입장에 서게 되고 루터의 협조자가 되었다.
-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루터와 함께 Eck를 반박하는 논쟁을 했다(1519).
- 비텐베르크에서 오르간과 성화를 제거하였다.
 - 비텐베르크의 소요 이후 칼슈타트는 1523년 오를라뮌데에서 목사로 일한다.  유아세례에 반대하는 글을 썼다. 농민전쟁 때 폭력에 대하여 거리를 두었다. 
 - 1529년 작센으로부터 키일(Kiel)로 추방되고, 그곳에서 재세례파의 설교가인 멜히오르 호프만(Melchior Hoffmann)을 만났다. 1530년부터 취리히의 츠빙글리에게서 지냈다. 바젤에서 신학교수로 세상을 떠났다.
 - 그의 급진적인 개혁은 축자적인 성서해석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십계명은 의식적이고 율법적인 규정들이 엄수되어야 함을 담고 있다(우상숭배금지와 주일 성수).  칼슈타트는 요소에 있는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하여 강한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인 후니우스(Hoenius)의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말씀의 상징적인 의미를 받아들였다.  성찬은 성령으로부터 인도함을 받게되는 내적인 회상의 만찬이다(신비주의의 영향).  또한 믿는 사람들에게도 율법은 의미가 있다: "율법의 제3의 사용"(tertius usus legis: 거듭난 사람에게는 율법이 여전히 법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 멜랑히톤과 Formula Concordiae에 따름).
- 칼슈타트는 루터와 반대적 입장에 섰다. 루터: 외적인 말씀에 대한 신뢰. 칼슈타트: 내적인 영의 소유(Geistbesitz)에 대한 신뢰.
- 루터는 1524/25년에 '하늘의 예언자를 반박(Wider die himmlischen Propheten)'이라는 책을 통해 칼슈타트를 "광신자(Schw rmer)"로 낙인찍었다. 루터는 칼슈타트의 영성주의(Spiritualism)를 비판하였다.
  b) 토마스 뮨처(대략1490-1525)
  뮨처는 1490년경 독일의 중부 산악지방인 하르츠의 스톨베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라이프치히 대학과 오더 강변의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헬라어 성서와 히브리어 성서 그리고 헬라 철학자들과 교부들의 글을 읽을 수 있는 실력도 갖춘 사람이었다. 그가 루터와 만나게 된 것은 1519년경으로 추정된다. 그는 사실 루터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지만 후에는 루터와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그는 루터의 소개로 1520년 츠빅카우에서 설교자로 활동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과격한 영성주의자들인 '츠빅카우의 예언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또한 뮨처는 중세후기의 신비주의(타울러)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는데, 이 신비사상들은 묵시론적이고 천년왕국적인 관점과 결합되어 있다. 그는 신앙이란 인간 안에 존재하는(내적인 말씀) 영적인 경험으로 구성되었다고 보았다. 이것은 언뜻 듣기에는 타당한 것 같으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신앙이 밖으로부터 즉 말씀을 들음으로부터 온다는 루터의 주장을 비판한 것이다. 뮌처는 자신을 "하나님의 선택된 종"이라고 여겼으며 새시대가 도래하기 때문에 루터가 아닌 자신을 지지해줄 것을 제후들에게 요청하였지만 아무런 지지를 받지 못했다(제후들에 대한 설교). 후에 뮨처는 농민전쟁에 가담하였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심판의 시작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농민전쟁의 사회적인 동기(Motiv)를 잘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결국 1525년 5월 프랑켄하우젠의 전투에서 참패하고 포로로 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참수형에 처해 졌다.
 - 주요 저서들: "프라하 선언"(Prager Manifest, 1521): 보헤미아인들을 설득하기 위함이었는데 무위로 끝났다. "독일 교회직무", "독일의 복음적인 미사"(1523); "제후들에 대한 설교"(1524); "비텐베르크에 편히 살고 있는 영이 죽은 육신에 반박하는 최고로 야기된 변명"(1524).
- 루터는 어거스틴적인 입장에 서 있었으며 중세적인 전통에 머물러서 최후의 심판과 세상의 종말을 기다렸다.
- 뮨처는 이 세상에서 1,000년 왕국을 기다렸다. 지금은 추수의 때이며 선택받은 자와 타락하는 자를 결정하는 시기이다. 뮨처는 자신을 도래하는 왕국의 예언자이며 마지막 시대의 싸움에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도구로 이해했다. 기드온의 말이 타락한 자에게 임했다고 보았다.
VIII. 츠빙글리(Huldreich Zwingli, 1484-1531)와 스위스의 종교개혁
 a) 츠빙글리의 성장과정과 신학사상
   루터와 동시대의 사람으로 스위스의 취리히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을 일으킨 츠빙글리(Huldreich Zwingli, 1484-1531)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비인(Wien)과 바젤(Basel)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을 따르는 고대의 방법(via antiqua)과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1506년부터 1516까지 글라루스(Glarus)에서, 1516년부터 아인지델른(Einsideln)에서 신부로서 일했다. 그는 에라스무스와 깊은 교제를 가졌는데 1516년에는 바젤에서 에라스무스와 만났다. 츠빙글리는 1516년 성서인식의 명료성에 도달한다: 문자적인 의미는 성서해석의 바른 관문이다. 츠빙글리는 에라스무스가 신약성서 원문 연구의 길을 개척한 것에 대해 사의를 표했다. 성서연구 외에 교부들 그 중에서도 어거스틴에 대해 특히 연구하였다.
   1519년부터 취리히에 있는 대성당 교구소속 신부가 되었다. 취리히에 부름을 받은 이후 이제까지 전통에 따라 설교본문을 오직 정해진 복음서 안에서만 해야하는 페리코펜규정(Perikopenordnung)을 무시하고 신·구약 전반을 본문으로 선택하여 설교하였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소시지를 먹는 일에서 발단되었다. 1522년 봄 츠빙글리의 추종자들이 로마 카톨릭 교회의 "금식규정"을 어기고 소시지를 먹자 콘스탄츠(Konstanz)의 주교가 그들을 고소하였다. 그러자 츠빙글리는 '음식의 선택과 자유'(Vom Erkiesen und Freiheit der Speisen)라는 글을 통해 이들을 변호하는 자신의 최초의 종교개혁적인 글을 발표하였다.
   스위스는 지리적으로 여러 나라에 둘러싸여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용병으로 나갔는데 1522년 츠빙글리는 소위 "용병으로 출전하는 것"(Reislauf)을 취리히 시와 현에서 금하는데 성공하였다. 1523년 구교회의 대표들과 성서의 원칙, 성상과 미사에 대해 두번에 걸쳐 논쟁을 하였다. 1523년부터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츠빙글리를 중심으로 목사들과 시의회 의원들의 위원회를 통하여 점차 진행되었다. 이 종교개혁은 로마 카톨릭의 예배의식과 법을 뿌리채 제거하는 과격한 것이었다. 이것은 성서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행해졌다. 그리하여 로마 카톨릭의 미사와 더불어 오르간, 찬송, 그리고 제단이 교회에서 사라졌으며, 더 나아가 성유물, 성상, 종부성사 등이 자취를 감추었다. 츠빙글리는 취리히의 개혁교회의 기반을 다진 것이다.
   1525년부터 복음적인 성만찬을 실시하였다. 이것은 교회의 갱신과 실제적으로 연관되었다: 미사의 폐지, 성서에 입각한 설교, 성상의 금지, 규칙적인 빈민구제, 유곽의 폐지를 통한 매춘의 폐지, 신학교의 설립(성서번역과 해석을 위한 소위 "예언자"). 1528년 소위 베른(Bern)의 논쟁이 있었다. 종교개혁이 베른에서 제네바까지 퍼졌다. 1529년 카톨릭 제후들의 "기독교연합"과 복음적인 스위스 사이의 무장투쟁은 제1·2차의 카펠전쟁과 스위스의 종파분열을 야기하였다.
   츠빙글리와 루터는 1529년 독일 말부르크(Marburg)에서 열린 성찬논쟁에서 결별하게 되는데 츠빙글리는 성찬의 제정어인 "이것은 내몸이요, 이것은 내피다"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이해했고 루터는 문자 그대로 떡에 그리스도의 몸이, 포도주에 그리스도의 피가 실재한다는 공재설을 주장하였다.
   츠빙글리는 1531년 로마 카톨릭 교도와의 제2차 카펠전쟁에서 나가 싸우다가 종군목사로서 최후를 맞이했다. 그 때 그의 나이 47세였다.
 - 루터와 다른점: 신부였던 츠빙글리는 개인 영혼의 구원에 대한 문제보다는 자기 민족의 어려움에 고통을 받았다. 카톨릭 교회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비판은 창조물의 신격화, 즉 우상숭배에 극을 이룬다. 이와함께 그는 선행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과 중세후기의 성례전주의(Sakramentalismus)를 반박한다. 복음은 인간의 삶 모든 영역에 관련된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갱신을 추구한 것이다.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작센 선제후국과는 달리 高地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사회적 정신사적인 영향을 끼쳤다: 통치적인 헌법규정들은 시민의 윤리적 정치적 책임을 강화했다. 종교개혁운동에 인문주의적인 영향을 강하게 끼쳤다.
- 츠빙글리의 대표작들: "음식의 선택과 자유"(1522) "결론의 해석과 근거들"(제1차 취리히 논쟁-1523.1.29-에 대한 67개의 결론, 독어로 처음 발표된 복음주의 신학의 교의학). "참종교와 거짓종교에 대한 해설"(1525)
- 츠빙글리는 종교개혁의 인식에 있어서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라이프치히 논쟁이후 그는 루터의 교황 교회에 대한 비판에 영향을 받았다. 츠빙글리의 신학은 다음과 같은 요소에 근거하고 있다: 고대의 방법의 의미에 있는 스콜라 철학, 인문주의(스토아적인 영향을 받은 덕의 이상, 성서의 원문연구), 교부연구, 특히 어거스틴.
 b) 재세례파와 영성주의자들
  일반적으로 '재세례파'라는 용어를 쓰는데 이것은 재세례파를 반대하는 측에서 붙인 이름이고 재세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재세례'라는 용어 대신 '신앙세례'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재세례파는 취리히의 종교개혁파에서 처음 분열되어 나왔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비판하였는데, 그 이유는 선악을 분간할 수 없고 신앙을 가질 수 없는 유아 때 받은 세례는 참세례가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유아세례를 부패한 교회의 근본적인 표식으로서 이해했다. 이들은 참 믿음과 성결의 표식으로 주는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 구성된 교회가 참교회라는 교회관에 뿌리를 두고 신앙세례를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1525년 1월 21일 취리히에서 처음 신앙세례가 행해졌다.
   재세례파 운동의 초기에 활동했던 두 사람으로는 취리히의 시민인 그레벨(Konrad Grebel, 1498경-1526)과 만츠(Felix Mantz, 1500경-1527)가 있다. 이들은 인문주의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에 동조했던 사람들이었다. 취리히에서 첫 재세례자인 만츠는 취리히의 현청으로부터 1527년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순교로 이 운동은 스위스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 남부 독일과 중부 독일로 확산되었다. 특히 도시에서 재세례파는 환영을 받았으며 이들은 여러 계층으로 구성되었다. 이 운동의 확산으로 영성적이고 신비적이며 묵시적이고 종말론적인 사상이 재세례파에 스며들었다.
   재세례파의 신앙고백서는 자틀러(Michael Sattler)에 의해 1527년 '슐라트하임(Schlatheim) 신앙고백'이라는 이름으로 작성되었다. 이 신앙고백서에는 초기 재세례파의 다음과 같은 표식들이 특징을 이루고 있다: 초기 기독교적인 모범에 따른 공동체적 교회, 로마 카톨릭 교회와 종교개혁적인 교회와의 경계, 세상과의 구별, 맹세, 전쟁출전의 임무와 이자지불에 대한 거절, 공무원의 직위를 갖지 않음, 공동체 식사로서 성만찬.
   재세례파와 더불어 '종교개혁의 좌파'로 일컬어지는 영성주의자들(Spiritualisten)은 모든 외적인 은혜의 수단들인 성례전과 말씀을 거부하고 특히 영혼의 내면에 있는 영의 활동을 주장하였다. 루터는 이들을 소위 "광신자들"(Schw rmer)이라고 일컬었다. 영성주의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독일 뉘른베르크에 있는 제발두스 학교의 교장인 한스 덴크(Hans Denck, 1500경-1527)와 제바스티안 프랑크(Sebastian Frank, 1499-1542)가 있다. 프랑크의 '터어키 연대'(1531)와 더불어 그는 영성주의적인 관점에서 최초의 복음주의적 사가이다.
   슐레지엔의 귀족인 Kaspar von Schwenckfeld(1489-1561)도 영성주의자에 속한다. 그는 영성주의적인 성찬론을 주장한다. 그의 추종자들은 슐레지엔, 남독일 그리고 후에 Neuen Welt에 모여들었다.
  그 이외에 재세례파에 속한 사람들: Balthsar Hubmaier(1528년 화형), Hans Hut(1527년 사망), Jakob Huter(1536년 인스부르크에서 처형당함).
IX. 종교개혁의 위기의 해 1525년
 a) 루터와 에라스무스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 논쟁
  1525년은 루터의 생애의 위기의 해였다. 농민전쟁과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이 그것이다. 루터는 농민전쟁으로 농민으로부터 지지를 잃게 되었고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으로 인문주의자와 결별하게 되었다.
  루터는 에라스무스와 대학개혁에 관해서 1517년 이전부터 슈팔라틴(Spalatin)과 랑(Joh. Lang)을 통하여 편지교환을 했다.
  루터에 대한 에라스무스의 견해: "소요"를 일으킨 자는 루터가 아닌 루터의 적수들이다. 루터의 대한 파문위협의 조서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했다(1520.6. Exsurge domine).
  사람들은 에라스무스를 루터 편으로 이해했다(루벵, 홀란드, 파리, 스페인, 이탈리아). 에라스무스가 루터의 이름으로 글들을 써서 발표한 것이라는 풍문도 나돌았다.
  에라스무스가 1522.3.30 프리크하이머(Willibald Prickheimer)에게 쓴 편지: "루터란들은 비방으로 나를 위협하고, 황제는 내가 루터 소요의 모든 머리요 근원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에라스무스는 두 파로부터 모두 불신임 당하고 있었다. 또한 루터를 반박하는 글을 쓰라는 위협을 받고 있었다. "왕들, 친구들이 모든 점에서 루터를 반박하는 글을 쓰라고 독촉했다"(1524.6.19).
 - 1524. 9. 에라스무스는 루터를 반박하는 글 "자유의지에 관한 논문(Diatribe de libero arbitrio)"을 썼다. 루터는 이에 반박하는 글인 "종의 의지"(De servo arbitrio)를 1525년 9월에 쓰기 시작하여 그해 11월에 완성하여 12월에 발행하였다. 늦어진 이유: 칼슈타트와 논쟁, 농민전쟁.
1526. 2. Erasmus는 이에 대해 답변하였다: "방패(Hyperaspistes)". 이에 대해 루터는 더 이상 답변하지 않았다.  대신 에라스무스에게 자신의 격렬함에 대해 사과를 했다.
 - 에라스무스의 글은 Diatribe: 서문: 보편적이고 방법론적인 문제를 다룸.
           설명: 자유의지에 관해서 구약과 신약의 근거를 들어 증명.
           자유의지를 반박하는 논지를 반박하는 글
           결론: 자신의 관점을 요약:  에라스무스에 의하면 자유의지란 인간이 구원으로 혹은 멸망으로 향할 수 있는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의지의 힘(Kraft)이다.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시작과 마지막에 하나님의 활동이 있지만 이 가운데 또한 인간이 무엇인가 해야만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의지의 협력이다. 
  에라스무스에게 극단적인 과격주의는 거리가 멀다.  에라스무스는 은총과 자연의 관계를 아퀴나스와 비슷하게 본다: 은총이 자연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한다(Gratia perficit naturam).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말하면서 이것의 근거로 구약과 신약을 든다.  그리고 그는 성경이 자유의지를 반대한다는 사실을 무력하게 만들려고 시도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반대자의 견해를 반박하며 자신의 견해를 요약한다.
 - 루터의 종의 의지
구성
서론: 보편적이고 방법론적이다.
보편적 서론: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회의론자임을 주장. 확신이 없는 기독인은 기독인이 아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비밀이 있지만 성서는 명료하다. 성서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다. 
방법론적 서론: 전통이 아닌 성서가 중요하다. 하나님의 교회는 역사적인 모습으로만 동일시 되어서는 안 된다. 전통에 의존하는 것은 교리적인 시금석이 아니다. 교리적인 진리를 위한 오직 두개의 척도가 있다; 성령의 내적 증거와 성서의 외적인 명료성이다.
이어서 성서의 증거; ① 자유의지를 주장한다는 성서의 증거에 대한 반박. 성서의 중심은 바울의 칭의론의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에라스무스는 율법과 복음, 계시된 하나님과 숨겨진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자체의 차이를 오해했다.
② 성서를 근거로 하여 자유의지 반박.
③ 바울과 요한의 글들을 통해 자유의지 반박.
  세가지 질문: 루터의 결정주의(Determinismus)
               숨겨진 하나님
               예정론
루터의 종의 의지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 주제가 담겨져 있다: 성서에 대한 인식, 교회론, 칭의론(인간론과 기독론), 하나님의 상(deus abscondifus et revelatus).
 - 루터는 성서에서 인간의 비자유의지를 확신한다. 그는 인간의 비자유에 대해 말하기 위해, 인간을 하나님이나 사탄이 타는 말로 비유하였다.  에라스무스와는 대조적으로 루터는 구원의 확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성서의 확실성과 하나님 한 분만의 역사를 주장한다.
 
b) 농민전쟁
- 15세기에 무거운 짐에 대항하는 농민들의 동맹이 이루어짐. 농민들은 15세기의 변화된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상황들로 자기 인식을 하게 되었다.
- 1524/25. 바이에른과 북독일을 제외한 지역에서 농민봉기들이 일어났었다.
- 고지 슈바벤지역 농민들의 프로그램 글: "슈바벤 농민들의 12조항"(1525. 3). 작성자: Sebastian Lotzer와 크리스토프 샤펠러.  요구사항: 성직자 선택의 자유, 농노의 폐지, 세금의 부담 억제
- 루터의 답변: "평화를 위한 경고"(1525. 4).  루터는 제후들과 농민들에게 평화적인 해결을 촉구.  이 일은 세속의 법과 관련된 것이다.  제후들이 먼저 잘못했다.  그러나 농민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빌미로 하여 자신들의 요구를 내세울 권리가 없다.
- 튀링엔 지역의 봉기에 직면하여 루터는 부록이 포함되어 있는 자신의 두 번째 글을 발표하다(1525. 5). "또한 도적과 살인자같은 다른 농민들에 반대하며".  이 부록은 별도로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인쇄 되었다: "도적과 살인자같은 농민들에 반대하며". 이로써 루터가 단지 제후들의 편에 서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봉기를 일으킨 농민들에 대한 루터의 깊은 증오는 그의 종말론에서 온 것이다.  루터는 농민전쟁에서 복음의 승리를 반대하는 악마의 마지막 발악을 보았다.
- 1525. 5.14. 프랑켄하우젠(Frankenhausen)에서 농민들은 참패를 당함: 카톨릭과 종교개혁파의 제후들로부터 농민들은 완전히 멸절되었다. 약 6000명이 죽었다.
- 루터는 "농민들을 반박하는 편지"(Sendbnef von dem harten B chlein wider die Bauern, 1525년 7월)에서 자신이 농민들을 비판한 글들을 정당화 하였다.
- 농민전쟁이후 종교개혁은 "국민운동"으로서 계속되었지만 제후의 권력이 우선적이 되었다.
X. 종교개혁의 지역적인 성립(1526-1530)
 a) 정치적인 상황
- 1524-26 사이에 여러 형태의 제후동맹들이 결성되었다: 1524년 레겐스부르크 연맹(Regensburger Bund). 바이에른(Bayern)의 지도 아래에 있었던 카톨릭의 정치세력.
1525년 데사우 연맹(Dessauer Bund). 북독의 카톨릭 제후들의 정치 동맹.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선제후국 마인츠(Kurmainz),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뷰텔(Branschweig - Wolfenb ttel). 이에 대항한 루터파 제후들(헷센의 방백인 필립과 작센의 선제후 요한)의 토르가우 연맹(Torgauer Bund, 1526)이 있다.
- 제1차 슈파이어(Speyer) 제국의회는 보름스 칙령의 실행을 무력화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카톨릭의 제후들에게 이로운 상황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프랑스 왕 프란츠(Franz) 1세에 대한 칼 5세의 승리는 교황과 프랑스의 동맹을 야기 시켰다. 이것이 소위 꼬냑 동맹(Liga von Cognac)이다(1526년).
 b) 루터교의 초창기 지역교회
- 카톨릭 제후들의 분열로 1526년 슈파이어에서 타협안이 성립된다: 이 타협안으로 헷센과  작센(Sachsen)에서 독자적인 교회 개혁안을 이룬다.
- 1526년의 홈부르크(Homberg) 공의회는 헷센의 모델을 제시한다: 밑으로부터의 교회 구성, 개교회들이 총회의 대표들을 선출한다. 신앙의 공동체(Glaubeusgemeinde)와 시민 공동체(B rgergemeinde)의 확실한 차이.  신앙의 공동체는 순결, 그리고 성결 안에서 산다(엄격한 교회 규율). 루터가 항의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이 헌법은 바로 "율법의 무리"(Haufen Gesetze)였다.
- 작센 선제후국에서는 나라의 통치 위원회를 통한 교회 조직이다: 작센 선제후국의 교회와 학교 탐방이 1526-30에 이루어짐: 법률가들과 신학자들의 위원들이 통치자의 칙령을 통해 예배, 교리, 강의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였다.
- 루터 자신이 작센 선제후국 교회들에 대한 시찰을 야기 시켰다. 감독들이 거절하였기 때문에 제후가 비상 감독(Notbischof)이 되어야 한다.
- 작센의 모델이 채택되었다: 과도기적으로  통치자의 교회 지배 (landesherrliches Kirchenregiment)에 대한 규정이 되었다. 멜랑히톤(Melanchthon)이 이에 대한 신학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세속권위는 하나님의 계명들의 두 판의 보호자이다(custodia utriusque tabulae).
 c) 성찬논쟁
- 처음에는 루터가 칼슈타트와 논쟁하였다. 1526-1529년에 성찬논쟁은 루터와 츠빙글리 사이에 글의 논쟁이다.
- 츠빙글리는 1524년 말 성찬의 제정어를 상징적으로 주장하였다(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인 후니우스Hoenius의 영향으로  이다 est를  상징한다 significat로 이해하였다).  바젤과 슈트라스부르크의 종교개혁자들도 상징적으로 이해하였다: 외콜람파트( kolampad)와 부처(Bucer).
 - 중요한 논문들:
츠빙글리:  Amica exegesis (사랑받았던 해석).
루터: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말씀은 지금도 변함없으며, 광신자를 반박함 .
츠빙글리:  이 말씀들은  ... 영원히 과거의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
루터:  그리스도의 성만찬에 관하여. 신앙고백  (1528년 3월).
-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존엄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그에게 있어서 피조물에게 하나님이 직접 들어가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지상에 육신으로 임재한다는 것은 제외되었다.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하늘과 땅을 엄격히 구분하였다. 이에 반하여 루터는 자신의 성육신 신학을 세운다. 그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 이외에는 그 어떤 하나님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 1529년 성찬논쟁은 종교와 정치의 땔 수 없는 관계를 보여준 것이다. 1529년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는 1526년의 결정이 무효임을 선언했다. 이에 대하여 5개의 제후국과 14개의 자유도시들이 1529. 4.19 저항을 했다. 헷센, 작센 선제후국, 브란덴부르크-안스바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안할트(Hessen, Kursachsen, Brandenburg-Ansbach, Braunschweig-L neburg, Anhalt).
 d)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 결정에 대한 항거(1529)
- 이 저항에서 "프로테스탄티무스"(Protestantismus)라는 말이 왔다(Protestari = 복음에 관련하여 양심의 자유를 위해 증언함).
- 말부르크(Marburg)의 종교 회담(1529.10.1-4)에서 헷센의 필립(Philipp)은 이와는 반대로 성찬론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였다.  15개항은 일치하였다.  단지 물질에 있는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방법에 있어서 하나가 되지 못하였다. 마부르크에서 논쟁에 참여했던 사람들: Luther, Melanchthon, Zwingli, 외콜람파트( kolampad), 그 외에도 Jonas, Brenz, Osiander와 Bucer.
e) 아욱스부르크 제국의회(1530)
제국의회(Reichstag)란 무엇인가?
   14세기부터 점차 제국의회가 열림; 관할권과 절차와 마찬가지로 참여권과 참여의무는 오랫동안 확실하지 않았다. 1485-97년에야 Berthold von Henneberg의 인도 하에 제국의회 헌법의 완성을 이루었다. 제국의회는 이것을 소집하고 제안을 했었던 황제에 대한 신분 대표자들의 조직이 되었지만 심리들은 할 수 없었다. 제국의회는 독자적으로 협의를 하는 세 개의 의회(선제후, 제후 그리고 자유도시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의 결정들은 마인츠 선제후의 지도하에 차례차례 표결에 부쳐졌다; 이것들은 황제의 동의를 통해 효력을 발생할 수 있었으며 1497년부터 제국의회 결의 조례를 간행하였다. 종료에 임박해서 나온 문제들에 대해서는 위원회들의 조직에 넘겨졌다. 자유도시들의 의결권은 오랫동안 확실하지 않았다. 베스트팔렌 조약 때에야 자유도시들이 의결권(Votum decisivum)을 행사할 수 있었다. 제국의회의 결의가 참석하지 않은 신분 대표자들에게도 강제적인 힘이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미결정의 상태로 남아있다. 제국의회의 심의 사항들과 이에 따르는 입법은 실제적으로 독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법의 실행은 지역의 지배권할 아래 있어서 제국은 실제적으로 원칙만 줄 수 있었다.
아욱스부르크 제국의회가 열리게 된 이유
   1530년 2월 24일 볼로냐에서 독일황제의 마지막 대관식이 교황에 의해 거행되었다. 9년간의 부재 후에 칼 5세는 독일로 돌아왔다. 제국의회를 열어 터키에 대한 도움을 청하는 일 외에 종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터키 문제의 어려움 가운데 황제는 종교문제에 대한 평화적인 일치를 멀리할 수 없었다; 1530년 3월 11일 토르가우(Torgau)에서 제국의회 소집을 공고하는 글에서 그는 "각 사람의 판단과 견해 그리고 의견을 듣고 싶다"는 화해적인 어조를 띠었다.
- Melanchthon은  선제후 작센의 요한(Johann v. Sachsen)의 부탁으로 신앙고백서를 작성
-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Confessio Augustana: 약자 CA)이 1530. 6.25. 제국의회에서 낭독되었다.
- Johann Eck는 황제의 부탁으로 CA를 반박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반박'(Confutatio).
- Karl 5세는 CA를 거부하였다.
- Melanchthon은 그 이후 자신의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의 변증 (Apologie der CA)을 발표하였다.
- CA는 멜랑히톤의 평화적인 방법에 의해 나온 것인데 두 부분으로 내용을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 제1-21항. 신앙과 교리에 관하여. 종교개혁적인 입장은 성서와 고대 교회들의     신앙고백들과 일치함을 강조. 때문에 구교와의 논쟁은 단지 몇 가지 오류에 대한 것이다.
  둘째 부분: 제22-28항. 논쟁적인 문제들. 미사, 배잔금지, 독신제, 금식, 수도사 서원.
- Luther는 아욱스부르크 제국의회 기간 동안 페스테 코부르크(Veste Coburg)에 있었다.  그는 CA를 칭찬했지만 교황 수위권과 연옥의 불에 대한 비판이 없었음을 말하였다.
XIII. 1530년 아욱스부르크 제국의회 이후부터 1555년 종교 평화협약 이전까지의 종교개혁사
a) 슈말칼덴 동맹
- 아욱스부르크 제국의회(1530) 이후 루터파 제후들은 황제와 카톨릭파 제후들이 바로 무력으로 그들을 대항하리라고 믿었다. 제국의회 결정의 이러한 무력적인 행사를 방어하기 위해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의 서명자들은 1531년 방어동맹인 슈말칼덴 동맹을 1531년 2월 결성하였다.
- 동맹의 과업: 공격을 당할 경우 루터파 제후들은 그들의 단합을 지키기로 했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또한 무력으로 황제를 대항할 것을 결정하였다. 헷센의 방백(Landgraf)인 필립(Philipp)은 이 동맹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그는 명백히 反합스부르크적인 성향을 이 동맹에 부여하였다.
- 1531년 2월 작센선제후국의 국경인 슈말칼덴(Schmalkalden)에서 맺어졌다.  동기: 1530년 아욱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다시 유효하게된 보름스 칙령과 루터파 제후들에 대한 무력적인 격퇴를 방어하기 위함.
- 동맹의 임무: 방어를 해야할 때 서로 군사적인 도움을 줄 것, 동맹군의 창립과 종교개혁을 정지시키려는 제국의 대법원의 소송에 대항하는 공동의 행동을 보여주는 것.
- 동맹 가담국: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의 서명국(작센선제후국, 헷센 안스바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안할트); 북독일의 도시들 (뤼벡, 막데부르크, 브레멘)뿐만 아니라 남독일의 도시들, 특히 슈트라스부르크는 가장 선두에 서 있었다.  황제에게 충성하는 뉘른베르크는 동맹에 가담하지 않았다.
- 신학자들, 특히 루터는 황제를 반대하는 무력적인 행동에 동의하는 것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했다.  마침내 이들은 실질적인 권위는 제후들이며 황제는 단지 제후들에 의해 선거조약에 따라 선출되어지고 임명되어진다는 법률가들의 견해를 듣게 되었다. 근세초기에 형성되어 가는 제후국의 구조들이 나타났다.  슈말칼덴 동맹은 종교개혁사에 있어서 15년을 장식하고 있다.
b) 프로테스탄티즘의 지역적인 확대
- 슈말칼덴 동맹의 체결과 계속적인 터어키의 위협은 프로테스탄트 진영에  뉘른베르크 유예  (1532년)에서 최초의 기한부의 종교적인 평화를 보장하게 된다.
- 1534년 뷰르템베르크 제후국(Herzogtum)이 종교개혁 진영에 가담하였다. 제후 울리히(Ulich)는 3명의 종교개혁자들과 연합하여 종교개혁을 수행하였다: 암브로시우스 발라러 (스위스와 고지 독일지역의 종교개혁에 영향을 끼침), 에어하르트 슈넵(Erhard Schnepf)과 요한네스 브렌츠(Johannes Brenz, 1499-1570), 이 두 사람은 철저한 루터파이다.
- 1534년 종교개혁은 폼메른(Pommern) 제후국에 진입하였다. 요한네스 부겐하겐(Johannes Bugenhagen, 1485-1558)은 교회법을 만들었다. 그 이전에 부겐하겐은 브라운슈바이크의 교회법(1528년), 함부르크(1529년) 그리고 뤼벡의 교회법(1531년)을 만들었다. 후에 그는 덴마크의 교회법(1537년), 홀슈타인(1542년) 그리고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교회법(1543년)을 만들었다.
- 1539년 제후 하인리히(Heinrich)는 제후 게옥이 죽은 다음, 작센 제후국에 종교개혁을 받아들였다.
- 또한 1539년 선제후 요아힘 2세(Joachim II.) 치하 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도 종교개혁을 받아들였다. 이곳에서 종교개혁은 카톨릭의 예배의식과 구습을 지켜가므로 보수적인 성향을 유지하였다.
- 독일의 대부분 지역이 1540년대 초반에 루터파가 되었다. 또한 대부분의 자유도시들, 그리고 아욱스부르크도 루터파가 되었다.
- 이미 1520년대에 종교개혁 운동은 독일의 국경을 넘어섰다: 폴란드-리타우엔, 헝가리, 특히 지벤뷰르겐과 스칸디나비아.
  독일에서 종교개혁의 첫 번째 봄이 오는 동안 복음은 이미 독일의 국경을 넘어서고 있었다. 서구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복음은 개별적인 또는 집단적인 추종자들을 얻었다. 그러나 실제로 북구라파와 동북부에서만 복음은 지속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는데 단지 정부의 강권에 의해서 민족적인 재 각성과 연관되어 있었다. 1513년부터 스칸디나비아의 3개국에 대한 지배를 장악할 수 있었던 덴마크왕 크리스티안 2세(Christian II.)는 그에게 연루되었던 귀족과 교권에 대항한 싸움에서 이미 왕권 강화를 시도했다. 그의 국가 개혁적인 조처는 교회 생활에 깊이 관여되었는데, 예를 들면 로마에 호소하는 모든 행위를 금하고 죽은 자의 재산을 가지고 축적하는 것을 제한하였으며 고위 성직자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대하여 단호한 태도를 취하였고 수도원들을 감독들의 감독 아래 두었다; 그는 교회를 자신의 조세제도에 종속시켰다. 물론 그는 폭동이 일어나기 전 1523년 나라를 포기해야만 했다.
  프리드리히 1세 아래 루터교 선교는 덴마크에서 받아들여졌다; 수상인 요한 폰 란트차우(Johann von Rantzau)의 권고로 왕은 루터교를 허용했다. 프리드리히 1세가 죽자 카톨릭 성직자들이 크리스티안 2세(Christian II.)를 위하여 변호했지만 프리드리히의 아들 크리스티안 3세의 승리는 구교의 등극에 대한 루터교의 승리였으며 동맹으로 이루어진 농민혁명에 대한 승리를 뜻했다. 1536년 코펜하겐의 제국의회는 국교로서 루터교 교리의 제정을 결의했다. 부겐하겐(Johannes Bugenhagen)은 왕이 주교의 머리로 규정한 새 교회 헌법을 만들었다.
  스웨덴은 이와 반대로 종교개혁의 도움으로 덴마크의 지배를 벗어났다. 스웨덴에서는 대부분의 주교가 덴마크에 호의적이었는데 슈텐 슈투레(Sten Sture)가 1517년 스웨덴의 민족 왕정을 세우고자 했을 때도 이 태도를 고수하였다. 때문에 1517년 제국민족의회는 웁살라(Upsala)의 대감독을 체포한 뒤 파면시켰다. 교황은 이에 대해 스웨덴에 대한 파문을 결정했다. 이 파문은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에게 임무로 주어졌다. 이렇게 스웨덴에서 구교에 대한 문제는 덴마크의 지배와 뗄 수 없이 연관을 맺었다. 덴마크로부터 분리를 이루고자 했던 구스타프 바사(Gustav Wasa) 왕의 치하에서 올라우스 페트리(Olaus Petri)는 1524년 점차적으로 종교개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결정적인 밤은 1527년 베스트라스(Westras) 제국의회에서 일어났다. 스웨덴에서도 국가교회가 세워졌지만 왕은 주교단의 머리가 되지 않았다. 감독들은 더 많은 독립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개교회들은 성직자 선택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
   핀란드는 그 당시 스웨덴에 속했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종교개혁의 실시는 스웨덴의 역사의 흐름에 편승되었다. 구스타프 바사 왕 아래서 미카엘 아그리콜(Mikael Agricol)은 종교개혁의 승리를 이끌었다. 그는 번역가요 저술가로서 활동하였으며 또한 핀란드 문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 1525년 프로이센의 알브레히트(Albrecht von Pre en)는 수도국(修道國)을 세속적인 제후국으로 바꾸고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1544년 쾨니히스베르크(K nigsberg) 대학교가 강력한 정신적인 빛과 더불어 세워졌다.
- 1527년 스웨덴의 제국의회는 종교개혁을 선포하였다. 최초로 하나의 온전한 국가가 로마로부터 분리하였다.
- 1530년대에는 두 나라가 종교개혁에 가세하였다: 1534년 헨리 8세 하의 영국과 1536년 크리스티안 왕 치하의 덴마크 왕국, 그리고 동시에 노르웨이.
c) 뮨스터의 재세례파 왕국의 파국
- 힘이 없는 재세례파는 1529년 슈파이어 제국의회 이후 카톨릭은 물론 신교파의 통치자들에 의해 잔인하게 핍박을 받았다.    
- 모피 제조인인 슈베비쉬-할(Schw bisch-Hall) 출신의 멜히호르 호프만(Melchior Hoffmann, ca. 1500-1543)에 의해 묵시론적이고 열광적인 사상이 재세례파에 유입되었다. 이 사상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폭력을 통한 멸절을 요구한데서 극점에 도달하였다. 호프만이 스웨덴, 오스트프리슬란드, 네덜란드와 슈트라스부르크에 있은 다음 많은 추종자들을 얻었으며(소위 말하는 멜히오르파) 베스트팔렌 지역의 뮨스터(M nster)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렸다. 여기에서 설교자 베른하르트 로트만(Bernhard Rothmann)은 1533년 이후부터 재세례파적인 사상을 널리 전했다. 홀란드로부터 멜히오르파의 무리들이 옴으로써 시의회 의석의 대다수를 차지할 수 있었으며 주민들을 통치할 수 있었다(레이덴 출신의 얀 보켈손과 할렘 출신의 얀 마티스). 이들은 소유공동체, 일부다처제 그리고 폭력적인 통치를 표방한 묵시론적인 왕국을 세웠다.
- 1535년 뮨스터의 주교는 1년 이상의 포위를 통해 이 도시를 점령하였다. 잔인한 복수가 행해졌고 카톨릭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다.
- 뮨스터의 재세례파 왕국으로 말미암아 전체 재세례파는 엄청난 재앙을 겪었다; 뮨스터의 재세례파 왕국은 언제나 박해에 대한 구실이 되었다.
d) 1536년의 비텐베르크 신앙일치서
- 부처(Martin Bucer, 1491-1551)는 성찬 논쟁이후 비텐베르크(Wittenberg)와 고지 독일 사이를 중재하려는 시도를 했다
- 1536년 독일에서 성찬논쟁은 비텐베르크 신앙일치서로 막을 내렸다. CA를 인정하고, Apologie와 타협안 인정을 결정한다: 성례전적인 일치와 부적당한 사람의 먹음(unio sacramentalis; Manducatio indignorum). 성찬의 은혜는 받는 사람의 합당과 합당하지 않음에 좌우되지 않는다.
- 1540년 Melanchthon이 CA의 변형을 발표했다(CA-Variata). 여기에서 성찬에 관한 제10항은 CA의 항을 변형(Worms 종교회담).
- 취리히는 이 약정(합의)에 참석치 않았다. Zwingli의 후계자인 불링어(Heinrich Bullinger)는 1536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제1 스위스 신앙고백(Confessio Helvetica prior)"을 작성했다.
- 1549년 제네바와 취리히는 성찬론에 대해 "Consensus Tigurinus"에서 일치하다.
e) 공의회 계획들과 슈말칼덴 조항
- 1536년 교황 파울 3세(Paul Ⅲ.)는 만투아(Mantua)에 공의회를 소집한다. 1537년 2월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슈말칼덴 동맹회의에서 공의회 참석에 대해 논의한다. 그들은 공의회를 일방적인 것으로(als unfrei) 거절한다. 멜랑히톤의  교황의 권력과 수위권에 관한 논문 (Tractatus de potestate et primatu papae)이 받아들여졌다.
- 공의회를 위해 루터는 작센 선제후의 바램에 따라 고백서를 작성하였다: "슈말칼덴 조항"(die Schmalkaldischen Artikel). 1537년의 회의에 루터는 불참(심한 병 때문에): 멜랑히톤은 이 고백서가 정식으로 받아 들여지는 것을 방해하였고 단지 신학자들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1580년 협정신조서(Konkordienbuch)에서야 슈말칼덴 신조가 신앙고백서로서 채택된다.
- 루터는 이 고백서를 세 부분으로 나눈다:
1. 고대 교회의 모든 인정받은 고백서들(삼위일체론, 기독론)에 있는 교리적인 내용들.
2. 실천할 수 있고 토의할 수 있는 교리적 내용들.
3. 포기할 수 없는 항목들: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음. 미사제사의 거부, 재단, 수도원, 교황의 신적인 권리에 대한 거부
f) 종교회담들
- 공의회는 열리지 못함: 다시 고개든 터키 전쟁으로 황제는 루터파 제후들을 의지하였다. 프랑크푸르트 유예(1539년)는 Protestant에게 시한부적인 종교 평화를 가져다준다.
- Karl 5세는 종교 회담의 수단을 통해 Protestant를 카톨릭 교회로 회귀시키려 시도한다. 이 회담은 하게나우(Hagenau, 1540년, 성과 없었음), 보름스(Worms, 1540/41년) 그리고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1541년)에서 열렸다.
- 보름스에서 멜랑히톤과 에크(Eck)는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서에 의거하여 원죄에 대하여 토의하였으며 몇가지 항에서 양해하였다("보름스의 기록장", Wormser Buch).
- Regensburg에서는 칭의론에 관한 항에서 서로 양해를 했지만 화체론, 고해, 사면 (Absolution), 교황의 권위(교회에서)는 이견이 확립되었다.  종교회담은 무산되었다.
g) 슈말칼덴 동맹의 무력화와 슈말칼덴 전쟁
- 황제 칼5세가 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교황과 함께 트리엔트 공의회의 소집을 합의한 이후(1545년), 슈말칼덴 전쟁의 발발이 감돈다.
- 유리한 상황들이 칼5세를 도왔는데, 슈말칼덴 동맹의 두 명의 중요한 제후들을 고립시키게 된다: 헷센의 필립이 1540년 이중으로 결혼하여 제국법을 위반하게 되어서, 그는 황제의 눈감아줌에 빌미가 잡혀 루터파를 위한 정치에 괴리를 두어야만 했다.  또한 황제는 작센의 제후인 알베르트가와 선제후 에른스트가 사이의 과거부터 내려온 경쟁심을 이용하여 작센의 모리츠에게 선제후 직위를 주기로 약속하였다. 모리츠는 슈말칼덴 동맹에서 탈퇴하였다.
- 40년대 초기에 종교개혁이 다양한 지역들에 받아들여졌음에도 불구하고(남쪽에서는 레겐스부르크와 북쪽에서는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칼5세는 크레베 공을 1543년에 이길 수 있었는데 슈말칼덴 동맹이 힘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필립과 황제의 협정).  이로 말미암아 대주교 헤르만 폰 비트(Hermann von Wied)하에 있는 쾰른 대주교구에서 개신교의 노력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 1546년 황제는 작센과 헷센이 제국의 평화를 깨뜨렸다는 구실로 슈말칼덴 전쟁을 일으켰다.  슈말칼덴 전쟁은 황제와 교황이 루터파 제후들과 싸운 종교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남독일과 북독일에 걸쳐 일어났다.  작센의 모리츠가 황제의 편에 서서 싸웠기 때문에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가 로마우어 하이데 위의 뮬베르크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다(1547. 4.24).  1547년 5월 19일의 비텐베르크의 항복으로 요한 프리드리히의 선제후 직위가 작센의 모리츠에게 옮겨졌다.
h) 아욱스부르크 가협정(Interim)과 작센의 모리츠(Moritz von Sachsen) 하의 정치적 선회
- 1547년 교황은 공의회를 교회국에서 최남단에 위치한 트리엔트에서 볼료냐로 옮겨 열었다. 칼의 승리이후(슈말칼덴 전쟁) 교황은 황제의 세력을 두려워했다. 칼 5세는 공의회의 장소 변경에 대해 항의를 했고, 볼료냐에서의 회의는 보류가 되었다.
- 1548년의 아욱스부르크의 제국의회에서 "아욱스부르크 인테림"이 공포되었는데 이것은 공의회의 결정 때까지 효력을 지닌 황제의 성명이었다.  황제는 이제 다시 종교적인 문제를 손에 쥐게 되었다.
- "아욱스부르크 인테림"은 슈말칼덴 전쟁에서 루터파의 참패 이후 카톨릭교회를 다시 세우려는 시도이다.  무엇보다도 카톨릭 신학자들이 이것을 작성하였다(Pflug, Helding). 이것을 작성한 유일한 개신교 신학자: 브란덴부르크의 궁정 설교자인 요한 아그리콜라.
- 공의회의 결정이 있을 때까지 루터파들에게는 단지 두 가지 형태의 성례와 성직자의 결혼이 인정되었다.
- 남독일에서는 인테림에 대해 아무도 저항할 수 없었지만, 북독일에서는 특히 도시들에서(막데부르크) 두드러진 저항이 있었다.
- 작센선제후국에서는 1548년 12월 "라이프치히 인테림"이 나왔는데, 이것은 주로 멜랑히톤이 작성하였다.  단지 "중요하지 않는 것들"(Adiaphora), 즉 예식들과 의식들에 있어서만 받아들이되 중요한 신앙고백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표명되었다.
- "라이프치히 인테림"은 엄격한 루터파에게 강한 비판을 일으켰다(마티아스 플라치우스와 니콜라우스 폰 암스돌프).
- 1552년 개신교도들에게 정치적 전환이 왔다: "마이센의 유다"라 불리우는 작센의 모리츠는 황제를 대항하다.  이유: 황제 칼5세가 약속을 지키지 않음.  자기 장인인 헷센의 필립을 포로로 잡고 모욕을 함. 모리츠는 강한 군주적인 황제의 통치에 대항, 제후의 독립을 위한 방어의 대리인이 되었다.  근세 초기의 지역국가(Territorialstaat)가 나타난다.
- 1552년 2월 모리츠는 인스부르크에서 매우 놀랐지만 그래도 피신 할 수 있었던 황제를 기습한다.
- 파사우 조약으로 슈말칼덴전쟁 이전에 정해진 법이 다시 인정되어지고 "아욱스부르크 인테림"은 폐지되었다.
XIV. 칼빈주의
 
a) 칼빈의 생애(1509-1564)
- 칼빈(Jean Cauvin, John Calvin)은 1509년 7월 10일 북 프랑스 노용(Noyon)에서 주교의 재정고문인 G rard Cauvin과 그의 부인 Jeanne Lefranc의 아들로 태어났다.
- 노용에 있는 Coll ge des Cappettes에서 라틴어를 공부하고 1523년 (추측하건대) Coll ge de la Marche와 Coll ge Montaigu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 1528년 문학석사를 취득했다.
- 1528년 파리에서 오를레앙(Orl ans) 그리고 1529년 부르제(Burges) 대학교에서 법학과 인문주의를 공부했다.
- 1531년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파리에 왔다.
- 1533년부터 파리대학교의 인문주의자들 모임의 회원이 되었다. 이 모임은 종교개혁 사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Faber Stapulensis). 이 때에 에라스무스, 루터, 멜랑히톤의 글을 읽었다.
- "갑작스런 회심"으로 종교개혁적인 인식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1527/28년 혹은 늦게는 1533/34년).
- 1534년 말 칼빈은 프랑스와 1세 때 프로테스탄트 박해 때문에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 슈트라스부르크를 지나 1535년 바젤에 왔다. 여기에서 그의 처녀작이고 주요작이 나왔다: '기독교 강요'(Institutio religionis Christianae, 1536). 종교개혁 신학의 고전적인 작품으로 루터의 교리문답을 본받은 복음적인 가르침의 교리문답. 이 책으로 프랑스에 있는 복음주의자들은 자기들이 받고 있는 오해를 방어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판이 나왔다: 1539, 1541 그리고 1559년판.
- 북이탈리아와 남프랑스에 잠시 머문 뒤 도중에 제네바에 들러 파렐(Wilhelm Farel)로부터 이 도시에서 종교개혁에 함께 동참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제네바에 머물게 된다 (1536년). 칼빈은 1537년 제네바 교회법을 작성하여 시의회에 제출하였다. 시에서 시민들이 파렐과 칼빈이 제네바에 머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1538년 제네바에서 추방당했다.
-  마틴 부처(Martin Bucer)의 간곡한 부탁으로 슈트라스부르크에 있는 프랑스 난민들의 교회를 맡았다. 고등학교에서 신약성서를 가르쳤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독일의 종교개혁자들과 사귀게 되었다. 1540년대 초반 하게나우(Hagenau), 보름스(1540/41),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1541) 종교회의에 참석하여 멜랑히톤과 개인적인 교분을 가졌다. 로마서 주해.
- 제네바에서 칼빈의 추종자들은 그의 귀환을 성취하다. 자신의 교회법을 받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1541년부터 제네바에 다시 머물게되었다. 투쟁 하에서 그의 종교개혁적인 활동의 시작. 첫째 성과: 제네바의 교회법이 시의회에 받아들여짐, 'Ordonnances eccl siastiques'.
- 1553년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논쟁들은 반삼위일체론자인 세르베트(Michael Servet)를 반박하는 소송을 하였다. 이 소송은 세르베트를 화형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 1555년부터 칼빈은 자신의 적수들을 능가하였다. 그는 동서 유럽에서 복음주의자들의 종교개혁적인 지도자요 조언자가 되었다.
- 1559년 신학 아카데미가 제네바에 설립되었다.
- 1564년 칼빈은 제네바에서 세상을 떠났다. 베자(Theodor Beza, 1519-1605)가 칼빈의 후계자가 되어 제네바 교회를 지도하게 된다.
b) 칼빈의 신학에 있어서 근본적인 관점들
- 루터의 가장 위대한 제자인 칼빈은 조직신학자로서, 성서주석가로서 그리고 설교가로서 의의가 있다. 그는 종교개혁적인 신학을 마침내 완성하였다. 루터 이후 그의 신학은 어거스틴, 에라스무스, 부처 그리고 멜랑히톤의 영향을 받았다.
- 루터와는 상대적으로 칼빈에 있어서 신학적인 강조가 두 가지 면에서 다르다: 성서를 보는 입장에서 축자적인 관점과 신관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의 절대성, 영광의 강조.
- 구약과 신약에 있어서 전체 성경의 증언에 대한 교리적인 개관에 대해 칼빈은 특히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성서의 권위는 성령의 내적인 증거에서 싹이 튼다(testimonium spiritus sancti internum). 칼빈은 바울로부터 해석된 루터의 성서관의 단면성을 피하기는 했지만, 루터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서 사이를 구별했던 자유를 잃었다.
- 칼빈은 완전히 자유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다. 이 은혜는 말씀을 통한 부르심과 믿음에 선행한다. 또한 칼빈은 루터처럼 선택과 하나님의 의롭다하심과의 맥락에서 보지만, 1539년부터 멸망을 선택과 논리적으로 반대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중예정에 도달한다(praedestinatio gemina). 이것은 칼빈주의의 특이한 표식으로 내·외적으로 심한 논쟁을 일으킨다. 17세기의 칼빈주의에서 선택은 신앙의 순종에 대한 보이는 열매로 볼 수 있다는 관념을 세우게 된다(Syllogismus practicus).
- 칼빈신학의 윤리적인 강조는 신중심적인 특색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신앙의 순종은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에 속해야 한다. 그리하여 칼빈은 율법의 3중 사용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triplex usus legis). 율법은 의롭다함을 받은 인간의 새로운 삶에 있어서 유효성을 가진다.
- 성찬론: 칼빈은 그리스도의 실존성을 주장한다. 이 실존은 성령을 통해 나타난다(영적인 실존). 칼빈은  믿음없이 먹음 (maducatio impiorum)을 부인한다.
c) 칼빈의 제네바에서의 활동
- 칼빈의 교회관은 이미 1541년의 제네바 교회규정( Ordonnances eccl siastiques )에 나와 있다. 교회에 관한 조직 형태는 신약성서를 모범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네 개의 직무로 구성되어 있다: 목사, 교사, 장로와 집사. 특히 칼빈의 교회에서는 권징을 하고 평신도들에게 주어지는 장로직이 특색을 이루고 있다. 칼빈의 엄한 교회권징은 그리스도의 이름의 영광을 지키기 위함이다. 또한 가르침과 사회사업은 교회의 직접적인 실천영역이다.
- 칼빈 교회에 있어서 특색은 시민과 교회 공동체의 상호간의 침투이다. 칼빈은 대다수 교인들과 진실한 그리스도인들 사이를 구별짓지 않고 민족교회적인 구조를 고수하였다.
- 수많은 정치적이고 신학적인 논쟁 이후 칼빈은 마침내 제네바 교회를 서유럽에 있는 수 많은 교회들의 모범으로 만들었다.
d) 기독교 강요의 형성
- 칼빈은 자기 친구들과 믿음의 동지들에게 복음적 신앙을 변호하기 위하여 '강요'(Institutio)를 썼다. 그는 강요를 1534년 앙굴렘(Angoul me)에서 쓰기 시작하여 1535년 바젤에서 완성하였다. 제1판은 1536년 3월 라틴어로 바젤에서 발행되었다.
- 머리글은 프랑스왕 프란시스 1세에게 보내는 편지: 종교개혁을 변호하고 재세례파를 공격하기 위함이다. 종교개혁의 날카로운 적수들이 이미 프란시스 1세에게 그들의 책들을 헌정하였다. 그 가운데서 사돌레(Sadolet)는 자신의 로마서 강해의 서문을 프란시스 1세에게 보내는 편지로 썼다. 사돌레는 이단척결을 프란시스 1세에게 요청하였다. 종교개혁의 다른 적수인 부데(Bud )는 그의 책 '헬레니즘으로부터 기독교로의 과도기'(Transitus Hellenismi ad Christianum)에서 왕을 칭송하였다. 여기에서 부데는 "매우 혐오스러운 섹트의 가르침"에 대해 비판하였다. 사돌레와 부데는 복음적인 가르침을 비난하였다. 이런 일 때문에 칼빈은 강요를 프란시스 1세에게 헌정했고 새로운 가르침에 대해 몇가지 이야기하고 있다.
- '강요'는 교리를 가르치는 책으로 루터의 '소교리문답'의 형식을 빌리고 있다: 율법(Dekalog), 사도신경(Apostolikum), 기도(주기도문), 성례전(세례와 성만찬), 거짓 성례전들과 기독교의 자유.
- 라틴어판 제2판은 1539년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발행되었다. 불어판 제1판은 1541년 제네바에서 발행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교리 문답서가 아닌 교리서, 교의학책이다.
- 칼빈은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재세례파를 알았다. 재세례파와의 대화에서, 세르베트의 글에 나온 사상을 반대하기 위하여 칼빈은 삼위일체론을 부가하였다. 재세례파를 공격하기 위해 칼빈은 全章을 구약과 신약의 연관성에 대해 보충하였다. 이와 같은 목적에서 그는 유아세례에 대한 변증을 보충한다(구약과 신약의 관련 속에서).
- 라틴어 제3판은 1543년에 출판되었다. 이에 대한 불어판은 1545년에 나왔다. 새로운 장들은 직무에 대하여 쓴 것인데 신학적인 근거를 처음으로 제시한다.
- 라틴어 제4판은 1550년에 나왔다. 이에 대한 불어판은 1551년에 나왔다. 여기에는 성서의 권위, 성인 숭배와 성상 숭배 그리고 인간의 양심을 보충하였다.
- 라틴어 최종판은 1559년에 나왔다. 이에 대한 불어판은 1560년에 나왔다. 4권 80개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 신론(하나님, 창조주요 세상의 전능하신 주관자, 18장). 제2권 구원론(그리스도, 구원자, 17장). 제3권 성령론(성령, 인간 안에서 성령의 역사,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 25장). 제4권 교회론(교회와 성레전, 20장).
e) 서유럽에서 칼빈주의의 확산
 - 서유럽의 종파 싸움과 카톨릭의 재강화의 시대에 칼빈주의가 확산된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는 루터주의와 비교해볼 때 더 강한 공동체 정치적인 활동을 보여준다.
  1) 프랑스
 - 갈리아 신앙고백(Confessio Galicana, 1559)은 프랑스 개신교회의 근간이 되었다.
 -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대립은 8 번에 걸친 위그노파 전쟁을 낳게한다(1526-1598년).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박해의 극점은 소위 말하는 바르톨로메우스밤에 일어났다(1572년). 앙리 4세는 낭트(Nantes)칙령(1598년)에서 위그노파에게 양심과 종교의 자유와 함께 시민계급의 평등권을 승인한다.
 - 낭트 칙령 이후 프랑스에서 칼빈주의는 정신적이고 정치적인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루이 14세 치하에 새롭게 고난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루이 14세는 낭트 칙령을 1685년 폐지하였다. 수많은 위그노파 사람들이 프랑스를 떠나야 했고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1685년 포츠담 칙령을 통해 신앙의 난민들을 자기 나라에 불러들였다. 이 난민들은 이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문화와 정신적인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2) 네덜란드
 - 스페인의 지배(1566-1609년)에 대한 네덜란드의 독립전쟁과의 관계에서 칼빈주의는 -프랑스와는 달리-북부 지역들에서 국교의 지위를 획득하다.
 - 칼빈주의 교회의 기본적인 고백은  벨기에 신앙고백서 (Confessio Belgica, 1561년)이다.
 - 종파의 시대에 네덜란드는 종교의 자유를 가장 광범위하게 인정한 나라이다. 경제적이고 정신적 문화적인 비약이 17세기에 있었다.
 - 정통 칼빈 신학에 있어서 주된 논쟁은 예정론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었다. 소위 말하는 "아르미니우스 논쟁"(Jakob Arminius, 예정론을 가장 강력히 반대한 사람)은 도르트레히트 종교회의(1618/19년)에서 예정론의 확증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 종교회의의 결정은 전체 칼빈주의와 연관을 가졌다.
 - 새로 설립된 라이덴(Leiden), 그로닌엥(Groningen) 그리고 우트레히트(Utrecht) 대학에서 중요한 칼빈신학이 전개되었다. 주요한 신학자들:
푸치우스(Giesbert Voetius, 1588-1676): 네덜란드의 "정확주의"(Pr zismus)의 창시자(살아있는 구체적이고 확고한 경건에 대한 증명).
코케우스(Johannes Coccejus, 1603-1669): 성서의 계약(foedere)에 근거하여 구속사적인 신학을 세운 "계약신학"으로 유명하다.
후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 1583-1645)는 국민들의 협동적인 삶에 관습과 법의 보편적인 기초들을 세웠다. 이러한 기초들로 그는 유럽 계몽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3) 스코틀란드
 - 스코틀란드 왕국은 종교개혁자 낙스(John Knox, 1505-1572)에 의해 칼빈주의가 특히 엄격한 형태로 승리하였다. 스코틀란드 칼빈파 교회는 "스코틀란드 신앙고백"(Confessio Scotica, 1560)에 그들의 신앙고백의 기초를 두었다.
 4) 독일
- 서유럽에 비해 독일에서 칼빈주의는 비교적 상당히 약하다. 칼빈주의는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과 군주의 교회지배 아래에 있어야 했다.
- 1560년 이전에 루터교 지역인 팔츠(Pfalz)가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치하에서 칼빈주의를 받아들인다. 1563년 선제후국 팔츠의 교회헌법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포함하고 있는- (연합 교리문답으로 간주되어진다: 이중예정론이 없는 약화된 칼빈의 교리).
- 1613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인 요한 지기스문트(Johann Sigismund)가 정치적인 이유에서 칼빈주의 교회로 개종하였다. 그는 유스 레포르만디(ius reformandi)를 버리고 국민들은 루터교 교인으로 남아있었다.
- 그외의 칼빈주의 지역: 브레멘, 안할트, 헷센-카셀 그리고 리펜-데트몰트.
- 니더라인 지역에만 있는 원래 칼빈주의 지역: 클레베(Cleve), 윌리히(J lich)와 베르크(Berg). 여기에서 형성되어진 노회적(老會的)인 교회헌법은 19세기 독일 지역교회들(Landeskirchen)에 있어서 최초의 노회적인 구조들에 영향을 끼쳤다.
XV. 영국 성공회의 성립
a) 영국성공회의 시작
- 영국 국교회(성공회, Anglican Church)는 그 기원이 신학적인 새로운 인식이나 신앙의 새로운 형태에 있지 않고 영국이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이탈하는 교회정치에 있다. 이 분리는 헨리 8세(1509-1547)에 의해 1534년 최종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교황이 그의 이혼 청원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헨리 8세는 원래 성직자가 되려고 했으며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521년에 발표된 루터를 반박하는 그의 글 "7성사에 대한 주장"(Assertio septem sacramentorum)은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신앙의 수호자"(defensor fidei)라는 칭호를 가져다 주었다. 정치적 사안과 그의 결혼문제로 헨리는 교황과 결별하게 되었다. 그는 아라곤의 카타리나(Katharina von Aragon)와의 결혼에 혐오를 느끼고 궁녀인 안나 볼레인(Anna Boleyn)과 결혼하기 위해서 교황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이 결혼의 취소를 허락받기 원했다. 사실 카타리나와의 결혼은 교회법을 따르지 않은 것이었다. 카타리나는 헨리의 큰형인 아더(Arthur)의 미망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교황의 특례로 이 결혼을 인정해주었던 것이다.
- 영국의 수상이자 추기경인 올시(Thomas Wolsey)는 동시에 교황의 사절이기도 했다. 교황청에서는 독일 황제 칼(Karl) 5세의 압력을 받아 헨리와 카타리나의 결혼이 유효임을 주장하였지만(카타리나는 칼 5세의 백모), 올시는 이를 관철할 수 없었다. 1529년 올시는 면직되고 영국의 성직제도는 왕을 영국교회의 머리로 인정하였다(1531년). 이 무력적인 행위로 헨리는 1533년 카타리나와의 결혼에 대한 교회적인 분리와 안나 볼레인과의 결혼에 성공하였다(1536년 볼레인을 단두대에 보내고 결혼을 한다). 1534년 국회는 수장령(suprematakte)에서 왕을 영국교회의 머리(supreme head in earth of the Church of England)로 공포했다.
- 교회개혁에 있어서 헨리의 권위있는 조언자는 무자비한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이었다. 이 새로운 법안에 반대하는 자들은 잔혹하게 처형되었다. 1534-1539년 동안 수도원이 폐지되었다.
- 위클리프(1384년 사망)에게 있었던 지배세력적인 교회에 대한 예리한 신학적인 반대는 "롤라덴파"(Lollarden)의 사상에 의해 계승되었다. 롤라덴파 외에 영국에서는 인문주의가 교회의 개혁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 틴달의 번역성서는 번역에 수정을 가하여 오늘날까지 영국에서 읽혀지고 있으며 이것은 영국 종교개혁의 근원이었다. 그리고 또한 루터의 사상도 종교개혁의 도(道)를 영국에 전했다.
- 이러한 정신적인 운동들은 영국에서 단순히 분열로 머물러 있지 않고 종교개혁적인 사상이 일어나도록 했다. 이미 왕국 섭정관인 소머셋(Somerset)은 미성년자인 국왕 에드워드 6세(Edward VI. 1547-1553) 아래서 헨리 8세가 세웠던 영국의 "카톨릭적인" 국교회로부터 교리에서 명백히 복음적인 교회를 만들었다; 이것은 대륙의 개혁교회적이면서 또한 루터교적인 기초 위에 선 42개 신조가 증명하고 있다. 물론 루터교적인 견해가 때에 따라서 칼빈적인 것에 억지로 맞춰진 것도 있다. 성찬론과 기독론을 예로 들 수 있다. 오늘날 공적으로 인정받은 1562년의 39개 신조(1571년 승인됨)는 아주 적게 개정된 단지 42개 신조의 수정본이다. 이와는 반대로 예배 형식에서 에드워드 6세 때에 영국 국교회는 매우 보수적이며 매우 카톨릭적으로 남아 있었다.
b) 영국에서 새로운 정신적인 사조
- 엘리자베드(Elisabeth, 1558-1603) 여왕 치세 때 영국국교회는 교리에서 중도적인 칼빈주의를 취했다(1562년 39개조). 의식과 헌법은 카톨릭의 형태로 남아있었다.
- 16세기 중반부터 청교도주의 운동은 칼빈적인 사상을 택하였다. 특히 시민계급에서 엄격한 성결의 생활에 대한 원칙들이 전체주의적인 왕정정치와 영국국교회(성공회)에 대하여 반대 입장에 있다.
- 로마 교황편인 스페인 무적함대(armada cat lica: 5만 8천톤, 3만명과 포 2천 4백문을 수송할 수 있는 130척의 선박으로 구성됨)가 1588년 영국 해군에게 패배하였다. 이로써 영국내 로마 카톨릭은 침체하였다.
- 1603년 엘리자베드 1세가 사망하고 엘리자베드 부왕(父王)인 헨리 8세의 혈연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James VI)는 1603년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또한 즉위하였다. 제임스 1세는 모친 스코트랜드의 메리(친로마파)가 엘리자베드 1세에 의해 사형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성공회의 입장에 섰다. 그는 로마 카톨릭을 박해하지 않고 오히려 교황청과 성공회의 화해를 원했다.
-16세기 말 영국에서 성공회의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 사용과 사도적 계승의 주교직을 외면하고, 개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왕권을 대항하고 의회를 존중하는 청교도들의 열의가 상승하고 있었다. 제임스 1세는 본래 장로교 중심의 스코틀랜드 왕이었으나 잉글랜드 왕이 됨으로 청교도들은 왕의 교회 정책에 큰 기대를 걸고 왕에게 "일천명의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여기에서 청교도들은 영국 성공회의 기도서 사용에 반대하며 여러 가지 점을 제거해주도록 요구했다. 제임스 1세는 이 탄원과 간청을 1604년 Hampton 궁정회의에서 토의하도록 했다. 이 회의는 제임스 1세 자신과 주교, 청교도 지도자 사이에 열려 기도서와 교리부분에서 약간의 수정을 했고 성서의 새 영어 번역판(Authorized Version)을 내놓았다. 이 회의에서 청교도들은 제임스 1세에게 특별한 요청을 했다. 그것은 "안식일 엄수주의", 즉 주일에 모든 운동과 오락 등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제임스 1세는 "스포츠에 관한 담화문"(Decleation of Sports)을 1618년 발표하여 주일에 적절한 오락을 승낙하였다.
- 제임스 1세는 친(親)로마주의인 그의 어머니 스코틀랜드의 메리와는 달리 로마 카톨릭에 동조하지는 않았다. 제임스 1세는 성공회를 지원하였다. 그는 왕직과 주교직은 일치되어야 하는 것으로 믿고 왕은 하나님의 권능 아래 있고 교회는 왕권을 지원하며 왕은 교회를 도와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 청교도들에 대한 국가의 압력은 마침내 많은 사람들을 네덜란드로 이주하게 했고 그곳에서 1620년 영국의 청교도들과 합세하여 약 100여명이 같은 해 11월 11일 신대륙 미국의 Plymouth Rock에 상륙하게 되었다. 이후로 청교도들은 미국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역사에 영향을 끼쳤다.
- 1625년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를 통치했다. 찰스 1세는 독재를 했다. 1629년부터 1640년까지 의회가 휴회되었다.
- 1642년 국가와 교회의 지도자 그리고 청교도들 사이의 대립으로 야기된 시민전쟁이 일어났다. 스코틀랜드 장로교, 청교도 그리고 의회가 한파가 되었으며 청교도가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청교도인 올리버 크롬웰의 등장으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군을 차례로 패배시킬 수 있었고 찰스 1세를 처형하였다.
- 1642년 영국의 시민전쟁은 교회 권력층과 민병, 정계, 성공회와 개신교, 주교와 청교도 사이의 대립과 혼란상태를 야기 시켰다. 이 때 많은 교파가 생기게 되었다.
- 브라운주의자(the Brownists): 회중교회의 초기 호칭이다. 브라운(R. Browne, 1550-1633)이 청교도에서 분리하여 회중교회주의(congregationalism) 창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 회중교회: 각 개체교회가 자립적으로 영국 국교회에서 독립한 교회이다. 네덜란드와 미국에 퍼졌고 현재는 영국에서 장로교회와 연합되어 있다.
- 영국 침례교회: 브라운주의로부터 나왔다. 성공회의 성직자인 John Smith에 의하여 청교도들로부터 분리되어 네덜란드에서 무리를 거느리고 건너와 신자 집합과 상통하는 뜻에서 침례제도를 세웠다.
- 영국혁명으로 특히 퀘이커 교도들이 중요하다(진리의 공동체). 퀘이커는 구두공인 폭스(George Fox, 1624-1691)에 의해서 세워졌다. 폭스는 인간의 영혼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내적 음성을 발견하는 것을 진리로 주장하는 신비주의자였다. 퀘이커들은 관용에 대한 넓은 원칙을 통하여 근대의 사회사에 영향을 끼쳤다(여성 평등권, 감옥의 개선, 후에는 노예해방).
- 청교도적인 경건문학은 수많은 번역을 통하여 독일의 신학과 교회사에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독일 경건주의의 중요한 뿌리 가운데 하나다. 가장 유명한 청교도의 문학은 루이스 베일리(Lewis Bayly)의 '경건의 실천'(Practice of Piety)이다.
c)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
- 시민전쟁 시의 장군으로 청교도의 지도자요 영국의 통치자인 크롬웰은 1653년 12월 16일부터 1658년 9월 3일까지 호민관(Lord Protector)로 있었다. 크롬웰은 1599년 4월 25일 헌팅돈(Huntingdon)에서 시민계급으로 태어났다. 1616년 캠브리지에 있는 Sidney Sussex College에서 청교도인 Thomas Beard로부터 교육을 받았으나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
- 헌팅돈에서 1628/29년에 의회에 진출하였다. 1630년 회심을 체험하고 장기(長期) 의회(1640년 11월-1653년 4월)에서 청교도의 당원이 되었다. 1642년 10월 대위, 1643년 2월 대령, 1644년 준장이 되었다. 1644년 7월 3일 Marston Moor에서 의회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승리의 열쇠는 청교도적인 훈련을 받은 병사들에게 있었다. 그의 군대는 숫자는 적었으나 강력한 기병대가 있었다. 그의 군대는 성전(聖戰)에 임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시편을 노래하며 전쟁터로 달려가곤 했다.
- 1640-60년의 영국혁명에 청교도들은 또한 정치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은 비중있는 정치지도자로서 "거룩한 사람들"의 의회 무리들을 규합하였다. 크롬웰의 지도 아래 종교의 자유가 제한되었고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이루었다.
- 1645년 6월 14일 Naseby에서 왕군(王軍)을 무찌르고 승리했다. 승리 이후 의회와 군대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전쟁에서 이긴 의회는 청교도적인 정책을 채택하였다. 주일에는 반드시 종교적 행사만 시행하도록 하고 일절의 방탕한 오락을 금지시켰다. 의회의 대다수는 장로교 조직에 따른 정부형태를 주장했다. 즉 감독없는 국교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부에서는 독립파들이 득세하였다. 1646년 의회는 군대를 해산하고자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 장로교인(Presbyterianer)은 엄격한 청교도들(회중교회자들 혹은 독립교회자들)에 대립되어 있었다. 이 두 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1646)을 통해 교리에서 일치를 보았으나 교회관에 있어서 상이하였다. 회중교회 신자들은 개교회들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했으나 장로교인들은 시민공동체와 교회와의 연합을 주장했으며 노회로 된 교회창립을 요구했었다.
- 크롬웰은 찰스 1세가 참수형을 당한 뒤 영국의 호민관(Lord Protector)이 되었다.
d) 영국국교회의 공고화
- 크롬웰이 죽고 나자 감독제의 국가교회가 재건되었다. Monck 장군은 구(舊)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통해 새 국회를 구성하여 찰스 2세를 1660년 왕위에 복귀시켰다. 1649년 찰스 2세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이었으나 내전으로 네덜란드에 피신해 있다가 1660년 귀국하였다. 
- 찰스 2세는 1662년과 1672년 사면령을 내려 이교신앙에 대한 묵인을 발표했다.
- 1661년 사보이 회의(성공회 주교 12명, 장로회 12명 그리고 기타 관계자들이 사보이에 모여 기도서 개정을 시도한 회의)가 열려 청교도와 성공회 사이의 기도서 개정을 기도했지만 장로교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끝이 났다.
- 찰스 2세는 1662년 기도서 사용의 통일령을 내려 당시 의회에서 장로교가 주도세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회로 국교를 복귀시켰다. 이 성사의 배후에는 Hyde와 Clarendon의 역할이 있었다. 이에 반대한 장로교 성직자들은 다른 직업으로 전환하고 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 때에 청교도 성직자 700여명이 성직에서 면직되었다.
- 스튜어드 왕가의 재카톨릭화 시도는 무산되었다. 1689년 관용령에서 프로테스탄트 비국교들에게도 종교와 양심의 자유가 허락되었지만 시민권은 제한되었다. 카톨릭과 소지니안은 이 관용령 밖에 있었다.
 XV. 종교개혁 이후의 로마 카톨릭 교회
1. 카톨릭의 개혁과 반종교개혁
- 종교개혁 이후의 카톨릭교회는 카톨릭의 개혁과 반종교개혁이라는 이 두 개의 개념들로 함축성있게 나타난다.  반종교개혁 이라는 개념은 종교개혁과 루터의 등장이 16세기에 로마 카톨릭에 대한 중요한 사건임을 알게 한다. 로마 카톨릭은 이 세기의 후반기에는 전반기와는 전혀 다르다.
- 루터교와 칼빈적인 개혁교회의 종파형성의 관련 속에서 "카톨릭의 종파형성"이라는 개념은 카톨릭 자체의 고유한 권리를 가진데도 불구하고, "반종교개혁"이라는 개념이 불가피하다.
- 카톨릭 교회를 개혁시킨 힘의 근원이 어디 있었느냐에 대한 질문에 관해 여러 가지 답변을 들을 수 있다. 반종교개혁이라는 용어는 물론 한 가지 확실한 견해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을 반대함을 목적으로 일어난 활동일 뿐만 아니라 카톨릭 교회에 대한 위협을 대항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한데 모으는 본질적으로 종교개혁의 반대 입장을 지지하는 힘이다.
- 이러한 관점에 반대하면서 카톨릭의 역사학자인 얀센(Johannes Janssen)은 '중세 독일 민족사'(Geschichte des deutschen Volkes seit dem Ausgang des Mittelalters, 1876ff.)에서 카톨릭 교회는 이미 15세기에 개혁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루터의 등장은 이 힘의 성취에 심한 타격을 주었다고 한다; 16세기 후반에야 이 힘은 관철이 되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얀센은 이것은 반종교개혁이 아니고 카톨릭의 독특한 종교개혁이라고 주장하였다.
- 루터의 등장 이전에 개혁의 힘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힘의 진원지가 어딘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수십년 동안 사람들은 이 힘을 스페인에서 찾았다. 사실 15세기 후반 그곳에서는 페르디난드왕(카톨릭)과 추기경 시메네스(Ximenes) 사이에 개혁된 카톨릭 교회가 세워졌다. 예수회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온 것도 반종교개혁을 카톨릭 교회의 스페인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도 단편적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회의 이념은 사실 스페인에서 원래 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메네스 추기경이 실행했던 개혁에 대한 정신적인 힘도 스페인에서 온 것은 아니다. 브란디(Karl Brandi)는 이탈리아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러나 또한 네덜란드라 볼 수 있다. 네덜란드는 근대적 경건(devotio moderna)의 고향이다. 카톨릭 교회의 내면적인 갱신을 일으켰던 일반적이 아닌 구체적인 힘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갱신의 세력: 3개의 정신적 뿌리를 들 수 있다.
  ① 수도회의 규칙: 수도원 자체의 세력
  ② 근대의 경건(devotio moderna), 독일 신비주의의 후기 형태.
  ③ 인문주의
- 이 개혁은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이 개혁을 일으키게한 원천은 교회와 밀접한 연관을 맺은 스페인에서 일어난 신비적인 경건이다: 성 아빌라의 테레사(Theresa von Avila, 1515-1582). 그녀는 "맨발의 카멜수녀원"의 창설자이다. 카톨릭의 개혁은 특히 수도원의 창설 운동과 이미 있던 수도원의 갱신운동이다: 카프친 교단, 테아틴 교단, 하나님의 사랑회.
- 수도원 이외에 살라만카(Salamanca) 학교에서 신학의 갱신이 일어났다.
- 트렌트 공의회와 예수회의 활동은 카톨릭의 개혁과 반종교개혁의 관심사를 특히 나타낸 것이다.
2. 트렌트 공의회(1545-1563)
- 트렌트 공의회에서 카톨릭교회는 종교개혁의 도전에 대하여 교리와 개혁법령으로 답변했다. 개혁법령들은 근대 카톨릭주의의 역사를 열었다. 카톨릭 교리는 종교개혁 신학에서 제기되었던(칭의론과 성서론) 주된 문제에 대하여 비로소 개념이 세워졌다. 중세 신학에서 이 문제들은 최종적으로 결정이 되지 않았다.
- 트렌트 공의회의 칭의론은 종교개혁의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를 반대하며 또한 후기 스콜라 신학에 있어서 펠라기우스적인 경향을 반대한다(선행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공로를 입을 수 있는 가능성).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공로로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신앙과 칭의보다 앞선다. 그러나 칭의는 본질적으로 의롭게 만드는 것이다. 은혜를 부어주심은 성례전에 나타난다. 인간은 성결에서, 그가 의지적으로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일할 수 있다. 그러므로 트렌트 공의회의 칭의론은 신앙과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의 중도이다.
- 교회의 교리의 원천으로서 성서와 교회의 전통이 동일한 권위를 갖는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오직 성서로"(sola scriptura)를 반박하는 것이다. 성서와 전통에 "동일한 경외"를 표한다. 교회의 가르치는 직무는 성서의 권위적인 해석을 한다. 표준적인 성서는 라틴어역이다(Vulgata). 카톨릭의 세 가지 권위에 대하여 종교개혁의 "오직 성서"는 상반되는 것이다: 성서, 전통과 성직.
- 그외에도 원죄, 연옥 그리고 성례전에 대하여 말한다(7성사: 세례, 견진, 고해, 성찬, 혼인, 서품, 종부).
- 개혁법령들은 특히 주교직의 개혁에 있었다. 교황권에 대한 개혁은 전혀 없었다. 주교들에게는 교구에 거주해야 할 의무, 신부양성을 위하여 신학교를 설립하는 일, 종교회의의 개최 그리고 로마 탐방이 규정되었다. 그리고 오류들이 제거되었는데 특히 돈으로 살 수 있었던 사면부다.
- 공의회의 폐회 이후 개혁조치들: 트렌트 신앙고백은 사제에 의해 행해져야 한다; 금서목록, 개선된 성무 경본과 통일된 미사책(Missale Romanum, 1570).
- 교회개혁으로 개방된 교황주의는 공의회 결정들의 실행을 감독하였다.
- 공의회 정신의 주요 감독들: 칼 보로매우스(Karl Borrom us, 1538-1584), 밀라노의 대주교인 메스펠브룬(Julius Echter Mespelbrunn), 뷰르츠부르크의 대주교.
3. 로욜라와 예수회
-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von Loyola, 1491-1556)는 바스크족의 귀족출신이다. 그는 장교였다. 부상을 통하여 그의 생애에 일대전환이 왔다: 그는 자신의 과거 세상적인 것을 청산하고 영적인 책들을 읽고 방랑에 올랐다.
- 이 방랑의 경험들은 '영적훈련'(Exercitia spiritualia)에 나와 있다. 이것은 자기극복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완전한 복종을 목적으로한 영적인 훈련이다.
- 바로 이그나티우스는 그를 따르는 동지들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팔레스틴 선교에 대한 의무를 가졌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들은 교황에 대해 무조건 복종하기로 했다.
- 파울 3세는 1540년 예수회(societas Jesu)를 인가했다. 예수회는 엄격한 계급조직의 헌법을 가졌다. 수도회 제복의 사양과 수도원 밀실에서 공동기도, 교황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의 서약. 이로써 예수회는 반종교개혁의 실행에 있어서 주요도구가 되었다.
- 예수회의 주요활동으로는 중국과 일본에서의 선교활동, 자체학교, 대학, 대학교 내에서 교육사업, 목회, 국민들에게 고해성사를 집행하는 것과 제후들의 궁궐에서 고해성사 신부로 활동하는 일이다. 이것을 통해 예수회는 종종 교황청의 심부름 꾼으로서 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 트렌트 공의회 이후 카톨릭 주의는 외부에 대해서는 종교재판의 도움을 빌어 자연과학적인 세계상과 투쟁하였다(Giordano Bruno와 Galileo Galilei). 내부에 대해서 예수회는 얀센파의 개혁추진과 싸웠다. 얀센(Cornelius Jansen, 1585-1638)은 어거스틴의 죄와 은총론을 근거로 자기 시대의 교회와 신학에 있어서 개혁을 시도하였다.
- 예수회적 카톨릭주의는 빈민과 환자구제, 교회건축, 음악, 학문과 시의 영역에 괄목할만한 업적을 이루었다.
근대교회사
I. 서론
근대의 의미: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방법론적이 아닌 실제적인 점에서 나눈다. 두 가지 원칙은 실제적인 것과 연대적인 것
1559년 이후 'Magdeburger Zenturien': 고대, 중세, 근대 이렇게 시대구분을 하였다. 개신교 최초의 교회사이다.
1588년 이후 카톨릭 측에서 Baronius의 'Annales ecclesiastici'가 발행되었다.
근대의 시작을 언제로 볼 것인가?
Ernst Troltsch: 18세기. 루터는 그의 삶과 사상에 있어서 아직도 중세기 인물이다. 계몽주의부터 근대가 시작되었다. 문화사적인 관점에서 18세기를 근대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교회사가 루터로부터 근대가 시작된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
Karl Heussi: 16세기와 18세기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카톨릭 측의 Jedin은 17세기를 근대의 시작으로 보았다.
K. D. Schmidt, B. Moeller: 근대의 시작은 17세기이다.
1555년은 결정적인 중간휴지: 종교개혁과 근대초기이며 종파의 시대이다. 이것은 결국 1648년 30년 전쟁의 종결을 가져왔다. 경건주의와 계몽주의를 야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세기부터 근대라고 한다.
II. 종파의 시대에 대한 개괄
1. 아욱스부르크 종교평화협약 (1555년)
- 1555년 아욱스부르크 제국국회(칼 5세가 참석지 않고 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왕에 의해 진행)는 카톨릭파와 루터파 사이에 신앙고백이 다시 일치할 때까지 이 두 파간의 무기한의 종교평화협정을 결정하였다(1555. 9.25의 제국국회 의결).
결정된 내용들
- 종교의 자유는 이 두 파간의 선택에만 해당된다: 카톨릭과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과 이와 관련된 신앙고백.  재세례파, 반삼위일체론자들, 영성주의자들 같은 종교개혁의 측면 운동들과 츠빙글리파는 이 협약에서 제외되었다.
- 이 협약에는 보편적인 종교의 자유가 없었다.  cuius regio - eius religio(한 나라에 한 종파: 제후의 종파에 따라 그가 다스리는 나라의 종파가 결정됨)라는 원칙이 성립되다.  제후들은 두 종파 가운데 하나만 고를 수 있으며, 국민은 이곳에서 제후의 종파를 따라야만 한다(ius reformandi).
- 과거의 이단정죄법이 무효화되었다: 타종파의 국민은 이주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ius emigrandi). 자신의 종파에 속한 지역으로의 이주에 있어서 자신의 재산과 가족의 재산은 소유물 보호법 하에 있게 되었다.
- 성직자인 제후가 다스리는 제후국인 경우 예외가 적용되다: 소위 말하는 "Reservatum ecclesiasticum"(종교상의 예외).  성직자인 제후는 종파의 개종에 의해 사인이 된다.  그는 성직을 잃고 세속의 통치권도 잃게 된다.
- 두 개의 종파가 공존하는 자유도시들에 대해서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존속된다.
- 종교적인 제후국들 안에 있는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에 속한 도시들과 마을은 루터교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이 규정은 종교평화협약에 들어있지 않았지만 프로테스탄트파를 인정한 소위 "Declaratio Ferdinandea"라고 불리우는 페르디난트 왕의 개인적인 성명에 들어 있었다.
- 칼5세는 1557년 자신의 직위에서 물러나고 황제대관을 포기하였다: 그는 1558년 스페인에서 세상을 떴다.
- 아욱스부르크 종교평화협약으로 독일 제국에서는 통일된 기독교의 신앙고백이 종말을 고하고 종파의 시대가 시작된다.
2. 이 시대의 일반적인 성격
  아욱스부르크 종교평화협약부터 1648년의 베스트팔렌 평화조약까지에 걸친 시대를 일컫는 "종파의 시대"라는 개념은 이 세기의 종교사회학자인 트렐취(Ernst Troeltsch, 1865-1923)와 역사학자 브루너(Otto Brunner, 1898-1982)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종교개혁시대부터 1555년까지 그리고 이와 연결되는 반종교개혁 시대를 내포하였던 전통적인 시대구분에 있어서 1555년이 중간휴지(休止)성격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을 때, 일반사와 교회사의 서술에서는 이 개념은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독일 제국의 상황에서 아욱스부르크 종교평화협약이 체결된 1555년은 의심의 여지없이 그 시대의 종파적인 특징을 아주 확실하게 만든 한 중요한 분기점이다.
  중세후기와 종교개혁시대와는 달리 1555년부터 실제적으로 변화된 것은 모든 삶이 종파의 표시 아래 즉 종파적인 대립 아래 있게된 것이다. 중세후기의 종교적인 운동들과 종교개혁의 초창기는 이 종파적인 극화(極化)를 알지 못한다. 상반되게 구별되고 상이한 종파들과 교회들, 국가들과 정치적인 복안들 가운데서 중세 기독교적인 단일문화의 분열은 이 시대를 본래적으로 결정하는 요소이다. 이 시대의 종파적인 특징은 정치에서 16세기와 17세기에 일어났던 큰 전쟁에 나타나지만 기독교 선교와 타 대륙에 유럽 세력의 식민지 팽창에서도 보여진다.
  이 시대의 교회사에 루터파, 칼빈파 그리고 카톨릭파의 종파화가 일어난다. 그러나 이 시대의 종파적인 특징은 표면적으로 상반되는 과정, 즉 이 시대에 점점 확실시 되어가고 있는 세속화, 다시 말해서 모든 생활의 영역에서 세속화와 연관되어 있다. 종파화와 세속화는 서로 변증법적인 관계로 나타난다. 종파들과 이것들 상호간의 경계가 모든 삶의 영역을 강하게 결정하면 할수록 종교적인 동기를 가진 갈등들로부터 순수히 정치적인 논쟁들이 되었다. 30년전쟁은 독일제국에서 정치와 종교의 겹침을 보인 것이다. 이 전쟁이 오래가면 갈수록 순수히 권력의 이해관계가 더욱 확실히 나타났었다.
 종파적인 논쟁에 넌더리가 난 신학과 교회의 경건에 실제 삶에서 신앙의 사수는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경건주의는 독일 제국에서 현저하게 기독교의 탈 종파화에 공헌하였다.
 종파의 시대에 근대초기의 제후국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 중요한 사건은 종파화와 세속화의 관련을 확실히 하였다.
  종파적인 시대는 종파적인 경직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정신적인 활성화와 영적인 깊이가 있었다.
3. 종파로서의 루터교의 형성
1) 루터교 내부의 교리논쟁들
- 독자적인 루터파 교회로의 발전은 17세기가 지나는 사이에 긴 과정을 거쳐서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 발전에 대한 길은 맹렬한 신학적인 논쟁을 가져온다. 이러한 논쟁이 어느 정도 해명이 되고 난 후에야 루터교의 공통적인 기초가 발견되어질 수 있었다.
- 이 논쟁들은 정치적인 대립(예를 들면 작센 선제후국과 팔츠 선제후국 사이)과 신학적인 논쟁과 확실히 연관되어 있다. 루터와 멜랑히톤(인문주의적인 사상) 사이에 있어서 신학적인 시작의 차이들은 루터가 죽고난 다음 타인의 눈을 끌도록 한다.
- 논쟁은 멜랑히톤의 제자들(마요르: G. Major, 페핑어: J. Pfeffinger)인 필립파(Philippisten)와  원래 루터의 제자들(플라치우스: M. Flacius, 암스도르프: N. v. Amsdorf)인 순수 루터파 (Gnesioluthraner) 사이에 일어난다.
- 다음의 문제들을 가지고 이 양派가 싸우고 논쟁을 벌였다.
① 중요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논쟁(아디아포라 논쟁, Adiaphoristischer Streit,    1548-1552): 작센 선제후국에서는 1548년 12월 "라이프치히 가협정"(Leipziger Interim)이 나왔는데, 이것은 주로 멜랑히톤이 작성하였다. 라이프치히 가협정은 카톨릭 교회의 법과 예배 의식을 "중요하지 않는 것들"(Adiaphora)로 여기고 받아들였다. 라이프치히 가협정 이후 많은 지역에서 라틴어로 미사가 다시 드려졌으며 성화와 카톨릭의 축일(祝日)이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멜랑히톤의 견해에 따르면 이런 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또한 라이프치히 인테림은 교회의 교권주의와 7성사를 주변적인 것들로 인정하고 오직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된다는 종교개혁적인 주요 교리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에 대해 루터의 제자이며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신학부 교수인 마티아스 플라티우스(Matthias Flacius, 1520-1575)는 멜랑히톤과 이 가협정에 대해 승인하는 사람들에 대해 "신앙고백이나 악의 유혹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어떤 중간물도 있을 수 없다"고 강력하게 반박하였다. 플라티우스는 비텐베르크에서 막데부르크로 가서 암스도르프(Nikolaus von Amsdorf)와 루터의 제자들과 연합하여 가협정에 대한 어떠한 타협도 없는 투쟁을 벌였다. 이것이 아디아포라 논쟁이다.
② 마요르의 논쟁(Majoristischer Streit, 1552-1558): 아디아포라 논쟁 이후 종교개혁적인 칭의 교리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문제로 제기되었다. 멜랑히톤의 제자인 게오르크 마요르(Georg Major)는 순수루터파인 암스도르프를 반박하였다. 마요르는 구원을 받는데 선행(善行)을 필수적으로 보았고 이와는 반대로 암스도르프는 선행은 구원에 해가 된다고 보았다.
③ 神人協同說 논쟁(Synergistischer Streit, 1556-1560):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과정에서 인간의 의지가 어느 정도 작용하는가에 대한 논쟁이다. 멜랑히톤은 "하나님은 인간 자신의 행위의 공로에 의하여 인간을 의롭게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로운 하나님은 목재와 같은 인간과 협동하지 않고 그가 깨달을 수 있는 시기가 되면 그의 의지가 협력하도록 그를 끌어당긴다"고 주장하였다. 루터에 철저했던 제자인 플라티우스(Matthias Flacius)는 이와 반대로 인간은 회심에 있어서 목재(truncus)와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완전히 수동적이며 하나님의 사역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플라티우스는 자연적인 인간은 죄에 근거를 둔 악에 대한 의지에 의하여 사탄의 형상을 바꾸어 쓴 것임(ad imaginem Satanae transformatus)을 결론지었다. 이것은 하나님과 비례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과거부터 있어 온 논쟁이었다.
④ 오지안더의 논쟁 (1550-1556): 안드레아스 오지안더(Andreas Osiander, 1488-1552)는 뉘른베르크(N rnberg)의 宗敎改革史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1549년부터 쾨니히스베르크(K nigsberg)에서 가르쳤다. 그는 의롭게 됨을 信者의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의의 본질적인 내재로서 이해했다. 그리스도의 神的인 본성이 신자의 내면에 들어오며 신자는 이 내면을 따르게 된다. 이것은 의롭게 됨의 과정에 대한 신비적인 견해이며 멜랑히톤의 의미에 있어서 의롭게 됨의 견해와 정반대 되는 것이었다. 멜랑히톤에 의하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의롭게 됨은 그리스도의 義의 공로에 있다. 이것은 "法廷의 칭의론"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죄인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고 그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배당하는 의롭다함의 사건이 법정 앞에 열린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법정에서 고소받는 죄인들 앞에 나타났으며 하나님은 죄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의를 인정한 것이다.
⑤ 성찬의 이해에 대한 논쟁들: 칼빈주의에 대한 은밀한 호의는 멜랑히톤의 제자들에 대한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 크립토칼빈니스텐 Kyrptocalvinisten, 숨겨진 칼빈주의자들). 기독론 논쟁은 그리스도의 음부행과 높임을 받은 주님이 언제나 현존하고 있다는 것이다(편재설).
2) 협정신조(1577)와 협정신조서(Konkordienbuch 1580)
- 로마 카톨릭과 칼빈주의는 이미 교리의 조직적인 확정에 있어서 발전을 이루었다(트리엔트 종교회의와 칼빈의 "기독교 강요").
- 루터교에서 교리적인 일치에 대해서 주축이 된 것은 제후들이었다.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는 소위 토르크의 교리서를 만들도록 하였다. 가장 주동적인 신학자는 야콥 안드레애(Jakob Andreae. 1528-1590)이다.
- 이 문서는 루터적인 지역교회들에게는 교리적 근간이 되었고 조직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Solida Declaratio", "확고한 선언"(SD).
짧은 개요가 이 선언 앞에 수록되어 있다.  짧은 개요와 SD와 함께 협정 신조(Formula Concordiae, FC)를 구성하고 있다.
- 협정신조는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Confessio Augustana: CA)에 대한 최종적이고 포괄적인 해설서이다.  이것은 독창적인 고백서는 아니다
- 이것의 내적인 목적: 상이한 입장을 통일함
외적 목적: 로마 카톨릭과 칼빈주의에 대한 교리적인 확실한 경계
- 협정신조(Formula Concordiae: FC)의 중요 결정: 성경은 모든 교리들과 선생들을 판단하는 유일한 규범이요 표준이다.  고대 교회의 세개의 고백서(사도신경Apostolicum,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우스신조)와 종교개혁 시대의 루터교의 신조들은 진리의 증거(testes veritatis)이다.  성서는 신앙 진리의 근본이요, 신앙고백들은 이 신앙진리에 대한 길을 열어준다.  루터 신학의 도움으로 FC는 인간의 회심과 중생에서 자유의지를 거부한다.  FC는 멜랑히톤의 의미에서 칭의의 법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 화체론, 미사의 제사와 평신도에 대한 배잔금지는 영적이고 상징적인 성찬론과 함께 거절된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요소에 있다는 현존론(Realpr senz)이 루터교의 성찬론이 된다.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것과 믿음 없이 먹고 마시는 것(manducatio indignorum, manducatio impiorum)이 성찬의 효력에 예속되지 않게 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칼빈의 예정론이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gratia universalis)로 표현된다.
- CA의 50주년 되는 해에 Dresden에서 협정서가 나왔다. 이 책은 루터교 지역을 위해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서들을 한데 묶은 것이다:
고대 교회의 3가지 고백서(사도신경,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아타나시우스신조);
CA 와 Apologie;
루터의 슈말칼덴 고백서;
멜랑히톤의 논문 "De potestate et primatu papae" 교황의 힘과 수위권에 대하여, 루터의 대·소교리 문답; 협정신조.
- 모든 루터교가 FC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루터교의 지역 교회이면서 FC를 받아들이지 않은 교회: Pommern, Holstein, Branschweig-Wolfenb ttel 과 뉘른베르크, 헷센 카셀과 안할트에서는 칼빈주의가 밀고 들어 오려고 하였다.
3) 루터교 정통주의
- 루터교 정통주의는 16세기후반과 17세기 구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의 한 부분이다. 주된 표식은 순수 교리에 대한 몰두와 로마 카톨릭과 칼빈주의의 공격에 대한 방어이다.  교리와 논쟁이 이 신학의 주된 원칙이다.
- 진리의 가르침을 위해 싸운 루터로부터 루터교 정통주의의 길이 시작된다.  칭의론은 루터교 정통주의 신학의 중심에 서 있다.
 - 루터교 정통주의의 중요한 안내자는 멜랑히톤이다.
그의 "Loci theologici"(1521)는 초기 정통주의의 중요한 서적들의 제목과 방법론의 모범이다.
Martin Chemnitz(1522-1586): Loci theoloigici
Leonhard Hutter(1563-1616): Compendium locorum theologicorum
Johann Gerhard(1582-1637): Loci theologici(1610-1625), 루터교 정통주의의 주된 교리서들이다.
- 이 교리서들은 멜랑히톤이 신학적인 교리의 체계를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사용한 것을 따르고 있다. 신학적인 주요 개념들에 논리적인 규칙을 도입하였다(Loci- Methode).
루터교 정통주의의 주 표식은 루터교 신학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도입이다.  이것은 후기 인문주의의 정신과 반대자들의 공격을 정확한 개념화로 방어해야 하는 필연성과 관계가 있다.
- 정통주의의 주요학자들:
Johann Andreas Quenstedt(1610-1688)
Abraham Calov(1612-1688)
David Hollaz(1648-1713)
이들은 소위 말하는 분석적인 방법에 열심이다.  신학은 구원의 길의 질적인 학문으로 이해되었다. 조직적인 짜임으로 교리적인 내용이 조직적으로 창조에서 완성까지, 구원의 목적인 영원한 복락까지 실려 있다.
- 신학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재등장 이후에 성서에 대한 정통주의 교리는 루터교 정통주의의 기초이다.  성서 원칙에 대한 가르침은 성서에 대한 원칙의 아리스토텔레스 범주의 상용에 있다: 성서는 그 자체가 참이며 더 이상의 논증(Beglaubigung)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서는 권위(auctoritas), 완전한 진리(perfectio), 만족(sufficientia)과 명료함(perspicuitas)을 가지고 있다. 성경전체는 낱말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영으로 영감 받은 것으로 이해되었다(口頭靈感設, Vebalinspirationslehre).
- 논리적으로 짜여진 정통주의 성서관은 성서의 역사적인 비평에 대한 문을 열어 주었다. 왜냐하면 정통주의의 성서관의 시작 자체가 성서에 대한 이성적인 비판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4) 게옥 칼릭스트(Georg Calixt)와 소위 말하는 혼합주의 논쟁
- 게옥 칼릭스트(1586-1656)는 당시 중요한 헬름슈테트대학교(헬름슈테트 신학)에서 가르쳤다. 루터교 정통주의의 아성(牙城)인 비텐베르크대학교와는 대조적으로 이곳에서는 후기 인문주의의 정신이 명백하게 나타났다.
- 물론 칼릭스트는 정통 루터교 신학자였지만 멜랑히톤에 기인하여 기독교 종파 싸움의 극복에 관심을 가졌다. 30년전쟁이 가져다 준 황폐의 흔적을 보고 그는 모든 종파들이 공동의 근본으로 되돌아 가기를 원했다. 그는 사도신경과 제5세기까지의 교리적인 결정에 근원이 있음을 깨달았다. 이 소위 말하는 5세기 동안의 일치(Consensus quinquesaecularis)는 비텐베르크에 있는 정통주의 신학자 칼로프(Abraham Calrov)로부터 종교적인 혼합이라는 반박을 받았다.
- 1654년 토른(Thorn) 종교회담 이후 혼합주의 논쟁은 격렬해졌다: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자들은 칼릭스트가 루터와 종교개혁을 상대화시켰다고 비난하였다. 이 논쟁들과의 연관 가운데  루터교 의 개념이 세워졌다.
- 칼릭스트는 자신의 신학에서 특히 윤리를 강조하였다. 물론 교의학과 윤리학이 분리되어져서는 안되지만 두 개의 신학과목으로서 나누이게 된 것은 그에게 기인하고 있다. 또한 그가 종교개혁자의 신학이라고 간주하지 않았던 신앙에 대한 기본적인 고백의 항목과 덜 기본적인 항목들 사이의 구분으로 칼릭스트는 이미 새시대의 과도기에 서있다.
5) 루터교 정통주의 시대의 경건과 개혁의 노력
- 루터교 정통주의의 시대는 경건문학, 신앙 그리고 영적인 시의 전형적인 시대이다. 1600년경 이 경건문헌의 全盛은  경건의 위기 와  경건의 전환 (W. Zeller)과 연관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형이상학의 도움으로 점점 이성적으로 되어가는 신학은 살아있는 신앙, 경건의 욕구에 어떠한 자극도 주지 않았다. 신학과 경건은 종교개혁 이후 3대째의 세대에 특히 논쟁을 하게 되었다. 1600년경을 중심으로 경건운동의 발단에 있어서 엄청난 반대자들(적그리스도로서 교황청)에 대한 두려움과 종말에 대한 위협적인 징조에 대한 공포가 밀려올 수 있게 된다. 그 위에 죄인에게 돌려진 의로 새롭고 거룩한 생활을 체험할 수 있게 되리라는 멜랑히톤적인 틀에 있는 칭의론은 얼마 안되는 공간을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신앙의 내면화, 구체화 그리고 개인화의 필요를 만족시킬 수 있게 하기 위해 고대교회, 중세 전성기와 중세 후기의 신비 또한 자연철학적인 사조에 있는 모방이 받아들여지게 되었음이 납득되어 진다.
 ① 요한 아른트(Johann Arndt, 1555-1621)
루터와 아른트를 객관적으로 동일시하는 견해는, 스스로를 진리증언의 대열에 선 마지막 사람들이라고 했던 경건주의의 지도자들인 슈페너, 프랑케, 친첸도르프와 벵엘의 역사적인 자기이해(Selbstverst ndnis)와 상응한 것이다. 쾨텐(C then) 부근의 에드다이츠(Eddeitz) 출신인 요한 아른트는 발렌슈테트(Ballenst dt) 부근의 바데보른(Badeborn)에서 안할트(Anhalt) 지역의 목사로서 직무를 시작했고(1583년), 그곳에서 1585년의 루터교의 성찬고백서의 철저한 고백자로서 서명하였으며, 그곳 지역교회(Landeskirche)의 세례의식에 마귀를 쫓아내는 의식과 성호를 긋는 의식(루터는 세례의식에 마귀를 쫓아내고 성호를 긋는 의식을 넣음: M. Luther, Das Taufb chlein verdeutscht 1523, in: WA 12, S. 38-48)이 없는 칼빈주의의 도입을 거부하였다. 그 결과로 그는 그곳에서 목사직을 잃게 되었고, 1611년 첼레(Celle)에서 총감독(Generalsuperintendent)이 될 때까지, 쿠베들린부르크(Quedlinburg, 1590년부터), 브라운슈바이크(Braunschweig, 1599년부터), 그리고 루터의 출생지인 아이스레벤(Eisleben, 1608년부터)에서 일했다. 묵상과 명상에 몰두했던 아른트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1606년부터 수많은 판을 거듭했고, 설교에 그 근원을 둔 경건서적(Andachtsbuch)인 '참기독교에 관한 네 권의 책들'(Vier B cher vom wahren Christentum, 1605-1610)에 서술되어 있다. 이 책에 대한 여러 가지 비판이 브라운슈바이크에서 최초로 제기되었고 얼마동안 끊임없이 계속되었지만, 루터교 지역에서는 그의 모든 작품 중 첨단의 위치에 있었다. 이 책은 1600년경의 경건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책으로 19세기까지 널리 읽혀졌다. 아른트는 루터의 칭의론의 토대에 의거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생활화하려고 하였다 . 이로써 아른트는 오늘날 경건역사적인 관점에서 경건주의의 창시자로 간주된다(J. Wallmann).
젊은 시절에는 정통 루터교의 입장을 고수하였으며 그 일 때문에 희생이 되기도 했던 아른트는 여기에서 주저하지 않고 신비주의의 넓은 경향 뿐 아니라, 신플라톤주의 그리고 베르나르의 클레르보(Clairvaux von Bernhard) 이후 실로 유일하게 아가서를 애정적인 방법으로 주석하는 법을 루터교 안에 도입하였다. 그와 나란히 위대한 찬송작시자 필립 니콜라이(Philipp Nicolai, 1556-1608)가 베스트팔렌(Westfalen) 지역의 우나(Unna)와 함부르크(Hamburg)에서 같은 영향을 끼쳤다.
아른트의 `참 기독교'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며, 죄로 인하여 이 형상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이것을 이제 다시 찾아야만 한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었다. 창조주에 의하여 피조물에 새겨진 고귀한 성품은 잃어버릴 수 없는 지참금을 뜻했다: 신적인 성품에 동참하는 것, 이것이 인간존재의 목적이었다. 이것은 플라톤적인 유비사상(Analogiegedanke)을 가지고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표현한 것이 명백했다. 즉 이것은 죄가 초래하였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보다는 유사성을 더 강조한 것이었다. 그는 인간이 분명히 변해야 됨을 깨달았다. 인간은 회심을 통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부인을 통하여, 옛 피조물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 피조물로의 부활을 통하여 신적인 영역으로 올라오지 않으면 안되었다. 완전한 변화로서의 거듭남이 여기에서 특히 강조되었다: 거듭남은 사랑 안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과 그 자신의 삶을 통하여 보여주셨던 것처럼,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세상을 멀리하고 내면의 깊은 곳으로, 자기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서,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밖으로 눈을 돌려 이웃과 사귀면서 겸손, 사랑, 온유 그리고 온전한 화평을 행하면, 그는 거듭남에 충분히 도달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결국 내부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하나님과 영, 영과 하나님 - 이 주제가 `참 기독교`의 실제 내용을 이루고 있었다.
- 아른트 외에 경건운동의 중요한 대표자들과 그들의 저술이 있다:
프레토리우스(Stephan Pr torius, 1536-1603): '영적인 보고'(Geistliche Schatzkammer, 1636).
니콜라이(Philipp Nicolai, 1556-1608): '영원한 생명의 기쁜 거울'(Freudenspiegel des ewigen Lebens, 1599).
헤르베르거(Valerius Herberger, 1562-1627): '심령의 설교'(Herz-Postillen).
요한 게하르트(Johann Gerhard, 1582-1637): '거룩한 명상'(Meditationes sacrae, 1606).
특히 게하르트에게 있어서 경건과 학문적인 신학은 결합되어 있음이 확실하다.
- 이 경건은 수 많은 개혁경향과 관련을 맺고 있다: 아른트의 문하생 안드레애(J.V. Andreae, 1586-1654)와 코메니우스(J.A. Comenius, 1592-1670). 교회적이고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현실들이 자주 날카롭게 비판되었다(고발문). 여기에 슙(J.B. Schupp, 1610-1661), 그로스게바우어(Th. Gro gebauer, 1627-1661: 황폐된 시온에서 온 파수꾼의 소리), 자우베르트(J. Saubert, 1592-1646), 딜헤르(J.M. Dilherr, 1604-1669), 요한 슈미트(Johann Schmidt, 1594-1658).
- 루터교의 경건서적은 파울 게하르트(Paul Gerhardt, 1607-1676)의 영적인 시에 또한 감화를 끼쳤다. 이 위대한 프로테스탄트의 찬송시 작가에게 17세기 전체를 표시하는 정통주의와 동시에 진심어린 경건의 긴밀한 맺음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게하르트의 많은 찬송시들은 아른트의 경건, 특히 그의 '낙원의 정원'(Paradiesg rtlein, 1612)에 새겨져 있다. 요한 아른트의 신비적으로 채색된 경건의 언어는 바하(J.S. Bach)의 칸타타와 수난곡의 가사에도 영향을 주었다.
- 루터교의 경건서적에 신비적 영성주의의 글들도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인 사람들: 발렌틴 바이겔(Valentin Weigel, 1533-1588); 베트케(Joachim Betke, 1601-1663); 호부르크(Christian Hoburg, 1607-1675). 사색적이고 신비적인 사상의 세계와 더불어 괴어리츠(G rlitz)의 야콥 뵈메(Jakob B hme, 1575-1624)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4. 30년 전쟁
 1) 전쟁의 배경
 ⓛ 1608년과 1609년 대립적인 두 파 사이의 정치적이고 종파적인 동맹이 형성되었다. 열렬한 카톨릭 제후인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Maximilian)이 개신교 자유도시인 도나우뵈르트(Donauw rth)에 대한 강압이었다. 막시밀리안은 독일 제국국회에서 이 도시를 추방시키고 카톨릭을 다시 세워 이 도시를 바이에른으로 귀속시켰다. 이에 대하여 수많은 루터파와 개혁교회파 제후들이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4세의 지도 아래 1608년 아하우젠(Ahausen)에서 연맹을 맺자,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편과 세속적인 통치권을 가지고 있는 카톨릭 성직자 제후들이 1609년 동맹을 맺었다. 팔츠는 개혁교회 국가였으며 라인강 중부를 건너서 전략적으로 위치하고 있었고, 팔츠 선제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한 7인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중요했다. 개신교의 제후들은 지원을 얻기 위하여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의 헨리 4세와 협의하였다.
 ② 윌리히(J lich)와 클레페(Kleve) 지역에 대한 상속권은 새로운 분쟁을 가져왔다. 여기에는 서로 다른 종파들이 다투었는데 결국 반대파들은 일시적인 분할에 합의하였다(이 분쟁 중에 팔츠-노이부르크의 볼프강 빌헬름 Wolfgang Wilhelm은 카톨릭으로 브란덴부르크의 요한 지기스문트  Johann Sigismund는 개혁교회로 개종했다).
 ③ 합스부르크가 국가들 안에 있는 정치적인 갈등이다. 여기에 능력이 없는 황제 루돌프 2세(Rudolf II.)는 제국의 제후들로부터 반란을 불러일으켰다. 수년 동안 계속된 혼란 속에서 제후들은 루돌프의 형제인 마티아스(Matthias) 뿐만 아니라 루돌프 자신으로부터 개신교도들을 위한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종교의 자유를 얻었다(마티아스는 1606년의 비인의 평화에서 먼저 헝가리, 후에 모라비아와 오스트리아에, 루돌프는 1609년의 칙허장 Majest tsbrief에서 보헤미아에 신앙의 자유를 허락했다; 동시에 슐레지엔에 있는 개신교들은 안전을 보장받았다).
 2) 30년전쟁의 진행
  1618년 체코의 보헤미아인들은 자기들의 프로테스탄트적 자유가 상실될까 두려워 합스부르크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마티아스(보헤미아의 국왕이기도 함)가 보낸 밀사와 교섭했는데 이 나라에서 가끔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황제의 사신을 창밖으로 내던짐으로써 태도를 표시했다. 이 사건 이후 국왕·황제는 자기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고 이에 보헤미아인들은 그를 추방하고 새로운 국왕을 선출했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트의 원조를 얻기 위해 팔츠 선제후를 택했다. 그는 보헤미아에서 프리드리히 5세 칭호를 받았으며 프로테스탄트 연맹으로부터 보헤미아인들에게 원조를 제공했고 네덜란드인은 화폐를 보냈다. 마티아스 후계자인 페르디난트 황제는 교황으로부터 온 화폐, 밀라노로부터 파견된 스페인의 군대, 카톨릭인 바이에른의 군대의 도움으로 1620년 봐이서 베르크(Wei er Berg)에서 프리드리히 5세를 이겼다. 이로써 겨울왕 프리드리히의 지배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페르디난트는 다시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보헤미아 귀족의 약 절반의 토지를 몰수했다. 그는 이 토지를 카톨릭 교회교단, 수도원에 기부금으로 증여하거나 그를 도왔던 사람들에게 분배했다.
  1621년 프로테스탄트 연맹도 해체되어 프로테스탄트의 주도권은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한 국가인 홀슈타인 제후이기도 한 덴마크 국왕인 크리스티안 4세(Christian IV.)가 장악했다. 그는 독일에서 몇몇의 주교관구를 획득하여 자기 아들에게 줄 왕국을 세우려고 했다. 그는 네덜란드인과 영국인으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아 이 전쟁에 참전했다. 그에게 대항하여 황제는 발렌슈타인의 알버트로 하여금 개인적으로 군대를 일으키도록 위임했다. 발렌슈타인은 온갖 국적을 가진 직업 군인을 모집했는데 이들은 보수에 의해서보다는 약탈로 생활했다. 발렌슈타인과 카톨릭 제국의 다른 장군들은 덴마크 국왕을 패배시키고 발틱 해안에 이르러 덴마크 반도까지 침입했다.
  1629년 복권칙령(復權勅令)에 의하여 황제는 1552년 이래 세속화된 영토를 자동적으로 카톨릭교회로 복귀시켰다. 두 개의 대주교구, 12개의 주교구, 이전에 수도원과 종교단체에 속해 있던 100개 이상의 작은 영토들이 포함되었다.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프 아돌프(Gustav II. Adolf)는 최상급의 능력을 가진 군주로 스웨덴에 있는 모든 당파들을 화해시키고 의회와 조화를 이룸으로 해외에서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기지를 만들었다. 그는 발틱해 동쪽 해안에서 스웨덴의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는 네덜란드와 다른 군사 전문가들을 이용하여 강한 훈련, 고조된 용기와 기동성있는 대포로 이름난 당대의 가장 근대적인 군대를 창설했다. 그는 자신의 군대로 하여금 루터의 찬송가를 부르면서 전장으로 진군케 했다. 그는 1630년 독일에 상륙하여 독일의 프로테스탄트를 구했다. 1631년 브라이텐펠트(Breitenfeld) 전투에서 카톨릭의 틸리(Tilly)를 이김으로 남부 독일을 수중에 넣을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프랑켄 지역의 주교관구들, 마인츠, 아욱스부르크, 뮨헨을 차지했다. 그는 1632년 뤼첸(L tzen) 전투에서 피살되었다. 그의 재상 옥센스티에르나는 그를 이어 전쟁을 계속했다. 1635년 독일의 작센은 스웨덴을 배제하고 황제와 프라하의 단독강화(Separatfriede von Prag)를 맺었다.
  이 전쟁의 최후 단계는 합스부르크의 황제(Ferdinand III., 1637-1657)와 스페인과 더불어스웨덴과 프랑스의 전적인 정치적인 싸움이었다.
 3) 베스트팔렌 평화조약(1648)
  평화회담은 1644년 베스트팔렌, 즉 뮨스터와 오스나브뤼크의 두 도시에서 시작되었다. 베스트팔렌에는 수 백명의 외교관들과 협상자들이 제국과 그 회원국들인 스페인·프랑스·스웨덴·네덜란드·스위스·포르투칼·베니스와 다른 수 많은 이탈리아인과 교황을 대표하여 모였다. 신성로마제국은 1648년 구체화된 뮨스터와 오스나브르크의 두 조약에서 타결에 동의했다. 이것이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이다. 이 조약은 독일의 반 종교개혁에 대한 전반적인 저지를 의미했다. 이것은 독일의 모든 국가들에게 자기의 종교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허락하여 아욱스부르크 종교평화협약의 조항을 경신할 뿐만 아니라 루터교와 로마 카톨릭 외에 개혁교회도 인정을 받았다.
 네덜란드와 스위스의 여러 주는 주권국과 독립국으로 인정되었다. 네덜란드는 포르투칼로부터 브라질과 인도네시아에 있는 전진기지를 소유할 권리를 얻었다. 프랑스는 알사스에 있어서 권리를 얻었다. 신성로마제국 안에서는 브란덴부르크가 막데부르크의 대주교구와 두 개의 주교구인 동부의 폼메른을 획득하고 바이에른은 신성로마제국의 영토 팔츠 일부와 전제후국의 한자리를 획득하여 8명의 선제후가 되었다.
  독일은 이 전쟁 중에 인구의 약 1/3이 죽었다. 독일은 물질적으로 파멸되고 정치적으로 작은 부분으로 분단되어 오랫동안 유럽문제에 있어서 어떤 역할도 못하였다.
III. 경건주의
1. 슈페너와 독일 경건주의의 발단
 1) 경건주의의 발단에 대한 논쟁
- 최근의 경건주의 연구에 의하면 경건주의는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서 가장 의미있는 종교적인 갱신운동이며 경건운동이다(J. Wallmann과 M. Brecht).  개인의 신앙체험, 구원 그리고 실천이 있는 신앙, 경건의 실천이 경건주의적 신앙, 사상 그리고 행위의 중심이다.
- 17세기 초 거의 동시에 영국, 네덜란드 그리고 독일에서 경건주의의 역사가 유럽의 계몽주의와 함께 진행된다.  경건주의는 스위스, 스칸디나비아, 동유럽 그리고 북아메리카에 퍼졌다. 
- 독일에서 루터교 경건주의의 전성기는 슈페너와 프랑케가 활동했던 시기인 1675-1720년 사이이다.  실천적인 개혁운동으로서 경건주의는 독일에서 계몽주의와 유사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경건의 실천, 사회윤리적 자극, 교파 논쟁의 극복(그러나 로마 카톨릭에 대한 거리가 전보다 강화됨).  죄, 은혜 그리고 칭의에 대한 이해에서 경건주의와 계몽주의는 구별이 된다.
- 확대된 의미에서 경건운동으로서 경건주의는 요한 아른트와 그에게서 나온 자극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생활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교리의 종교개혁을 보충
- 구체적 의미에서 사회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경건주의 운동으로 필립 야콥 슈페너(Philipp Jakob Spener)는 루터교에서 경건주의의 창시자이다.
- 두 가지 표식에서 경건주의는 정통주의와 태동하는 계몽주의와 두드러진 특징을 가지고 있다.  교회에서 알곡회중으로서 경건한 사람들의 모임(ecclesiola in ecclesia)과 세상에서 교회를 위한 임박한 개선에 대한 희망, 즉 가까운 최후 심판 날의 기대로부터의 전향(J. Wallmann).
- 교회적인 경건주의는 민족교회(바벨론)로부터 탈퇴를 요구한 과격한 경건주의와 구별이 된다.
- 영국의 청교도적인 경건 서적과 중세 후기의 신비주의와 16,17세기의 신비적 영성주의는 경건주의의 뿌리에 속한다. 그러나 경건주의와 신비주의 사이의 관계에 대해 리츨(Albrecht Ritschl) (Geschichte des Pietismus)이 주장한 바는 오늘날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세상 도피적이고 신비적인 경향이 경건주의를 지배하지 않고 사회 윤리적인 자극이 지배하고 있다.
2) 필립야콥 슈페너 - 그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개략
- 슈페너의 생애에서 경건주의의 시작에 관여된 많은 자극들을 볼 수 있다.
- 1635년 엘사스에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슈페너는 청교도주의적인 경건서적들과 요한 아른트의 '참 기독교에 대한 네 권의 책'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다.  철학(Justus Lipsius)과 자연과학에 있어서 그 당시의 지식에 대한 자신의 관심은 대학에 다니기 전부터 싹텄다.
-1651년부터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1653년 철학석사 학위를 받음(토마스 홉즈에 대한 비판)
- 철학과 역사학의 공부 이후 1654-59년까지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함. 철저한 루터교 신학부의 중요한 교수들: 요한 슈미트(J. Schmidt), 제바스티안 슈미트(S. Schmidt), 단하우어(J.G. Dannhaner). 루터교 정통주의 교의학에 있어서 근본적인 교육.
- 바젤에서 히브리어를 더 배우고 제네바에서 네덜란드의 개혁교회에서 분파적인 경건주의의 창시자인 라바디(Jean de Labadie, 1610-1674)를 만난다.
- 로스토크(Rostock)의 신학자인 그로스게바우어(Th. Grobgebauer)의 개혁서 "황폐된 시온의 파수꾼의 소리"를 통해 슈페너는 민족교회의 부패를 접하게 되었다.
- 1663년부터 슈트라스부르크 대 교회의 부목사로 일했으며 1664년 신학 박사가 되었다(논문은 요한 계시록에 대한 것이다).
- 1666년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 루터교 목사단의 대표로 부임하였다.
- 바리새인의 거짓 의에 관한 설교(1669) 이후 진실한 기독교인의 모임이 소규모로 이루어졌다.  1670년 프랑크푸르트의 콜레기움 피에타티스가 생기다.  경건주의는 이것으로 교회의 개혁으로서 첫 발을 내디딘다.  프랑크푸르트의 콜레게움 피에타티스(Collegium Pietatis)의 주동자는 법률가인 슈츠(J. J. Sch z)이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모임에 라바디의 사상(교회 밖의 작은 교회, ecclesiola extra ecclesiam)의 주요 중개자이다.  1675년부터 소위 잘호프 경건주의자들이 모이다.  이들은 후에 분리하여 나갔다. 
- 아른트(J. Arndt)의 복음서 설교집-신판의 서문으로 1675년 '경건한 소원들'이 또는 '참 루터교회의 하나님께 합당한 개선을 진심으로 요망'이 나온다. 이것은 후에 별권으로 발행되었다.  이 책은 소위 경건주의의 프로그램 책이다.
- 1686-1691년까지 슈페너는 선제후 게옥 3세의 궁이 있는 드레스덴에서 궁정 수석 설교자였다.  성인과 어린이들에게 공개적인 교리문답 교육을 통한 개혁의 노력들. 라이프치히와 함부르크에서 루터교 정통주의와 경건주의 운동 사이의 논쟁들.  슈페너와 선제후 게옥 3세 사이의 긴장들.
- 1691-1705년 슈페너는 베를린의 교회 협의회 위원과 니콜라이 교회의 감독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교회에 영향을 끼치는 최고봉에 도달했다.  광범위한 서신 교환.  1694년 잘레 강변의 할레에 프로이센의 개혁적인 대학이 세워짐.  이 대학은 슈페너와 프랑케의 경건주의에 특히 영향을 받았다. 
-1705년 슈페너는 "경건주의의 아버지"로 세상을 떠났다.
경건한 소원들(Pia desideria) - 경건주의의 프로그램서
- 이 책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교회의 세 계층의 부패된 상태에 대한 진단(지배층, 성직자와 일반 교인들)
2. 예측: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성서적인 약속에 근거한 지상의 교회에 대한 더 나은 시대의    희망(유대인 선교와 교황권의 멸망)
3. 교회의 개혁을 위한 6가지 프로그램
  1) 성서를 열심히 읽는 것과 교회의 공예배 이외에 성서를 공부하는 모임을 만드는 일(기       도회 모임 제안)
  2) 신자들의 만인 제사장직의 실현
  3) 기독교 신앙은 이론보다는 실천에 관한 것이다.
  4) 신앙적인 논쟁은 필요한 경우로만 제한 한다.
  5) 교회 개혁의 핵심으로서의 신학 교육의 개혁. 체험있는 신앙은 배운 지식보다 중요하       다.
  6) 설교는 신앙의 촉진과 열매를 위해 쓰여져야 하지, 설교자의 허영과 학식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3) 슈페너 신학의 개요
- 슈페너의 신학은 특히 그의 설교집에 나타나 있다(복음적 신앙교리, 1688, 일년간 설교한 것의 모음). 근본은 종교개혁적인 칭의론이다. 슈페너는 이것을 무엇보다도 중생의 개념에서 요약한다. 그는 중생을 성결과 구별하였다. 슈페너는 하나님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중생을 조건으로, 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성결을 믿음의 성장을 위한 근본으로서 이해한다. 경건의 실천은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없는 완전에 이르고자 하는 여행이다. 슈페너의 교회관(ecclesiola in ecclesia)은 중생과 성결의 차이에서 온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이미 거듭난 기독교인의 개선을 강조하고 있다. 루터교의 칭의론에 대한 고수와 신비적인 영성주의로부터 선을 그은 것은 확실히 칭의에서 시대의 요청으로 성결을 강조하는 바를 옮겼음을 나타내고 있다.
  루터와 아른트에 기반을 두고 있는 슈페너의 개혁을 위한 제안들은 전통적인 것과 새로운 관점을 나타내고 있다. 루터교 정통주의에 비해 새로운 것: 지상의 교회를 위한 더 나은 시대들의 희망(온건한 천년왕국설)과 고린도전서 14장에 근거한 사도시대적인 교회모임의 재정비. 1676년부터 슈페너는 "에클레시올라 인 에클레시아"(ecclesiola in ecclesia)라는 형태로 자신의 교회개혁지침을 요약하였다. 그는 경건하지 않은 대다수의 신앙 향상과 촉진을 통하여 교회의 개혁을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경건한 사람들의 모임과 촉진을 통해 기대한다.
2. 아욱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와 할레의 경건주의
 1) 프랑케의 생애와 업적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는 1663년 3월 22일 법률가의 아들로 뤼벡에서 태어났다. 프랑케가 태어난지 3년 후 그의 부친은 작센-고타(Sachsen-Gotha)의 에른스트 信公(Herzog Ernst d. Fromme)의 신하가 되었다. 그의 부친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프랑케는 고타에서 자신의 훗날의 개혁 프로젝트에 대한 자극을 받았었다. 에른스트 신공은 그의 재상인 제켄도르프(Veit Ludwig von Seckendorff, 1626-1692)와 함께 30년 전쟁(1618-48)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하는데 매진하였다. 이 두 사람은 종파간에 있는 증오의 극복과 어린이 교육의 개선에서 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위한 중요한 실마리를 인식하였다.
   프랑케는 유명한 고타 고등학교(Gothaer Gymnasium)를 졸업하고 16세에 에어푸르트(Erfurt)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이 대학교에서 별로 만족을 얻지 못하고 키일 대학교(Universit t Kiel)로 옮겼다. 키일 대학교에서 그는 특히 교회사가이며 실천신학자인 코르트홀트(Christian Kortholt, 1632-1694)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프랑케는 외삼촌이 설립한 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공부했다. 이 재단의 장학금은 학자가 되거나 성직자가 되려는 학생들에게 지급되었다. 조카의 영적인 발전과 모든 행동에 대해 만족을 갖지 못한 그의 외삼촌은 1682년 더 이상 장학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프랑케는 키일 대학교를 그만두고 함부르크에 있는 유명한 오리엔탈 학자인 에드차르두스(Esdras Edzardus, 1629-1708)로부터 히브리어를 배운 후 패배한 학생으로 고타에 돌아왔다. 2년 동안 집에서 공부하면서 보냈는데 경제적인 어려움이 그를 압박했다. 마침내 어느 학생에게 히브리어를 개인교수하기 위해 1684년 라이프치히에 갔다. 그곳에서 프랑케와 이 학생은 슈페너의 사위이며 신학교수인 아담 레헨베르크(Adam Rechenberg)의 집에서 살았다. 프랑케는 다시 공부를 시작하여 1685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철학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것으로 성서에 대한 언어학적이고 성서주석 강의를 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프랑케에게 있어서 스페인의 신비주의자에 대한 몰입은 정적과 은거에서 내적인 정화에 대한 욕구를 강화하였다. 1687년 프랑케는 회심 이전에 스페인의 신비주의자인 몰리노스(Miguel de Molinos, 1628-1696/97)를 알게 되었다. 프랑케는 라이프치히의 루터교 정통주의자의 동의 아래 몰리노스의 몇 개의 글들을 이탈리아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했다. 프랑케는 몰리노스의 입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나 겸손의 실천, 참회를 받는 신부를 위한 조언, 하나님께 가는 유일한 길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사상 그리고 의심에 대한 조언의 체험을 배척할 수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성서에 근거하고 있고 교리에 위반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프랑케는 파울 안톤(Paul Anton)과 함께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콜레기움 필로-비블리쿰'(Collegium philo-biblicum)을 만들었다. 이것은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젊은 석사들의 모임으로 매주 모여 구약과 신약의 한 장을 해석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이 모임은 매우 주목을 받았다. 왜냐하면 당시 대학교에서는 단지 교리적이고 논쟁적인 신학 강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행해진 성서해석은 엄청난 학생들을 불러모았으나 또한 프랑케에게 내적인 위기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1687년 가을 뤼네부르크(L neburg)에서 이 위기는 일어났다. 이것은 학문과 경건, 자신의 더 존귀한 영광에 대한 학문의 현존 혹은 이웃에 대한 의무에 있어서의 삶 가운데 결정을 해야할 문제였다.
   라이프치히에서 학문적인 성과가 있었기 때문에 프랑케는 1687년 다시 외삼촌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뤼네부르크에 있는 잔드하겐(Caspar Hermann Sandhagen) 감독에게서 성서 해석을 교수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프랑케는 외삼촌의 명령을 기도의 응답으로 여겼다. 왜냐하면 뤼네부르크에서 그는 내적 정화에 대한 필요한 안식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이 도시에 있을 때 그는 요 20:31에 관한 설교를 부탁 받았다. 원래 그는 살아있고 자신이 체험한 믿음과 죽었으며 가르침을 받은 믿음 사이의 차이에 관한 설교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주어진 본문에서 자신과의 관계를 숙고하면 할수록, 자신에게 내적인 신앙의 확신이 결핍되어 있음이 분명해졌다. 그는 기독교인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고 했다. 유대인들은 탈무드를 그렇게 생각하고 터키인들은 코란을 그렇게 생각한다. 그가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지 없는지를 누가 알 수 있는가? 불확실함은 점점 커져가고 마침내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게 되었다. 전적인 불확실함의 상황 가운데 공허함과 이제 까지 자신의 삶에 대한 무의미함이 그에게 엄습해왔다. 높은 망루에서 전 도시를 관망하는 어떤 사람 앞에 있는 것처럼 자신의 전 과정이 그의 앞에 놓여졌다. 의심은 점점 커져갔다. 프랑케는 계속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나 더 이상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다. 설교를 3일 앞두고 마침내 변화가 일어났다. 가득한 행복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확신이 섰다. "바로 나의 모든 의심은 사라져 버렸다."
   프랑케는 1687년 뤼네부르크에서 있었던 자신의 유명한 회심의 체험을 1690/91년에 기록해 놓았다. 그를 무신론적인 회의론자로 만들었던 이성은 다시 신앙에 대한 시녀가 되었다. 루터의 로마서 서문의 글로 프랑케는 이 "내적인 거듭남"을 서술하였다: "믿음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 사역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나게 하며 옛 아담을 죽이고 우리를 마음, 기질, 감각 그리고 모든 힘에서부터 전혀 다른 인간으로 만든다."이런 점에서 쿠르트 알란트(Kurt Aland)는 프랑케의 회심을 루터와 비교하고 있다. 즉 신앙의 본질을 루터의 로마서 서문으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그의 안에서 타오르는 경건과 학문 사이의 갈등이 이제 실천적인 기독교에 근거하여 결정되었다. 그는 세상이 인정하는 것에 대해 더 이상 가치를 두지 않았다. 이것은 그에게 "냄새나는 분뇨 웅덩이"로서 나타났다. 새롭게 얻은 내적인 독립과 확신이 그에게 반박을 제기하고, 적대 관계를 견디어 내고 박해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데퍼만(K. Deppermann)은 프랑케의 뤼네부르크의 회심을 세 가지 특징으로 말하고 있다:
① 프랑케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루터처럼 죄의 용서에 대한 체험이 아니라 무신론적인 의혹으로부터의 승리였다. 의혹은 무엇보다도 세 개의 대표적인 유일신론적인 종교에 대한 부정에서 시작되었다.
② 의심의 극복은 논리적인 것이 최종방법이 아니라 더 이상의 논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정서적인 체험에서 찾은 것이다. 프랑케가 계몽주의의 자연신학에 대한 통로를 결코 발견하지 못하였음은 이것과 확실하게 연관되어 있다. 자연신학은 그에게 정도를 벗어난 것으로 보였다.
③ 신앙의 확신에 대한 체험은 계속되는 삶의 방식에 유효한 결론을 주었다. 이웃에 대한 실제적인 봉사는 이제 프랑케에게 있어서 자신의 명성을 위한 학문적인 성과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다.
 
   뤼네부르크에서 회심을 체험한 이후 프랑케는 함부르크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슈페너의 친구 중의 한 사람인 요한 빈클러(Johann Winckler, 1642-1705) 목사가 세운 자선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쳤다. 이것은 그의 외삼촌을 다시 노하게 했다. 그는 이러한 일을 비합리적인 광신의 표시로 여겼다. 빈클러의 교육에 대한 자극들은 프랑케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나타난다. 함부르크에 있을 때 프랑케는 드레스덴에 있는 슈페너에게서 두 달 동안 지냈다 (1689년 1월/2월). 프랑케와 슈페너는 긴밀한 우정을 맺었다. 1689년 2월 프랑케는 라이프치히로 돌아왔다.
   바로 프랑케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성서 주석 강의를 맡았다. 그리고 그의 새로운 정신은 즉시 확실히 나타났다. 교리적이고 신학 논쟁적인 강의 시간은 이제 모든 학부의 학생들을 위한 부흥의 시간이 되었다. 또한 도시에 있는 수공업자들과 시민들도 청강을 하였다. 수십 개의 소그룹과 기도 모임이 생겨났다. 교수들 스스로 조직적인 학술 연구, 학문의 활기찬 활동의 종말로 대학교의 몰락을 두려워했다. 물론 여기에 상처받은 자부심과 수업료의 감소도 한 몫을 하였다! 수공업자들은 물론 여자들도 신분이 높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소그룹에 참여하였다. 왜냐하면 기도 모임 참석자들은 일반적으로 공 예배를 무시하거나 꺼렸기 때문에, 이 새로운 운동은 라이프치히에 있는 목사들과 반대 입장에 서게 되었다. 이 운동은 학생들이 목회적인 차원의 환자심방을 했을 때에 그들의 활동 그룹 내에서 갈등을 겪었다. 정통주의자들은 새로운 경건운동을 "경건주의자"라는 별명을 붙였다.
   1690년 라이프치히의 소요가 일어났다. 슈페너의 프랑크푸르트 '콜레기아 피에타티스'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콜레기아 비블리카'가 되었다. 프랑케는 법적으로 이 일에 아무런 권리를 갖지 못했다. 라이프치히 대학교 신학부는 1690년 3월 프랑케에게 모든 성서 주석 강의를 금했지만 그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대단한 소요가 대학교에서 일어났으며 마침내 유명한 법률가인 토마시우스(Christian Thomasius)가 법률고문으로 상담하게 되었다. 법적인 고려에서 이 위대한 계몽주의자는 교황청 같은 루터교 신학부에 완전히 냉소와 경멸을 퍼부었다. 그러나 토마시우스의 평가서는 프랑케를 이롭게 하기보다는 더 어렵게 했다. 왜냐하면 그가 드레스덴의 궁전으로부터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슈페너는 작센의 선제후에게 광범위한 평가서를 통해 라이프치히의 경건주의를 후원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샤데(Johann Caspar Schade, 1666-1698)와 프랑케의 친구들은 라이프치히에서 추방을 당했다. 선제후의 정부는 1690년 3월 10일 라이프치히에서 기도 모임을 금지했다. 라이프치히 사건에서 비로소 경건주의 운동이 전 독일에서 루터교 정통주의에 대해 날카롭고 화해하기 어려운 대립이 되었다.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신학부는 라이프치히 대학교 동료들과 더불어 경건주의자들에 대한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전까지 슈페너의 개혁 제안들은 광범위하게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었다. 이제 슈페너와 프랑케는 비텐베르크의 종교개혁의 파괴자로 보였다. 물론 이것은 경건주의자들을 토마스 뮨처와 동일 선상에 놓은 것이었다.
   프랑케는 라이프치히를 떠나 에어푸르트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드레스덴에 있는 슈페너처럼 프랑케도 에어푸르트에서 자신의 설교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기 위해 어린이와 성인을 위한 교리문답 교육을 실시하였다. 여러 교회에서 사람들이 경건의 모임에 참석했다. 교구에서는 이 일을 등한시하고 있었다. 프랑케가 에어푸르트 대학교에서 자신의 강의에서 몇 명의 동료들과 성공적으로 경쟁하였을 때,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기독자의 완전, 직통 계시에 대한 신앙 그리고 선행의인과 관련하여 다시 그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프랑케는 결국 얼마 오래 머물지 못하고 에어푸르트를 1691년 10월 14일 떠났다.
   이제 슈페너는 프랑케를 구하는데 관여해야 했다. 1691년 늦가을 프랑케는 베를린에 있는 슈페너에게 머물었다. 당시 슈페너는 드레스덴의 궁전 수석 설교자에서 바로 베를린의 교회 평정관이면서 니콜라이 교회의 감독교구장 이었다. 당시 베를린의 궁전에서는 할레에 새로운 대학교를 세울 계획을 하고 있었다. 슈페너는 프랑케를 정치가들에게 소개를 시켰으며, 프랑케가 이 새로운 대학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베를린에서는 할레에 세워지는 새 대학교를 통해 엄격한 루터교적인 대학교인 비텐베르크와 라이프치히에 대한 정신적인 견제를 이룰 수 있을 것을 믿었다. 이미 비텐베르크와 라이프치히에서 사람들은 1613년부터 브란덴부르크의 왕실이 고백한 칼빈주의와 투쟁했다. 할레 대학교의 설립으로 루터교 내에 관용 정신이 확산되기를 기대했으며, 그리하여 경건주의자들을 할레 대학교의 교수로 초빙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루터교와 칼빈주의 사이의 교리적인 차이는 어떤 본질적 역할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믿음으로 거듭난 것이 제일 중요했다.
   할레의 경건주의의 활동은 "인간의 변화를 통한 세상의 변화"(M. Schmidt)라는 표어로 요약될 수 있다.
 2) 프랑케 신학의 개요
  프랑케 신학 또한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과 죄의 깊은 이해를 강조하는 루터의 전통에 서 있다. 프랑케에게 있어서 특히 구원사실의 존재적인 관계는 특히 개인이 중요한 것이다. 회개의 투쟁과 일회적이고 증거할 수 있는 회심의 강조를 통하여 루터적인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라는 사실을 관철할 수 없는 인간론적이고 심리학적인 관찰방법이 나타난다. 이것은 루터 신학의 본질적인 것에 강조의 옮김을 뜻한다.
3. 고트프리트 아르놀트(1666-1714)와 신비적 영성주의의 신학
 1) 고트프리트 아르놀트(Gottfried Arnold)
  아르놀트에게서 신비적 영성주의가 경건주의에 미친 영향이 보여지고 있다. 슈페너와의 접촉외에 아르놀트는 일찌기 급진적 경건주의적으로 교회에 대해 비판하였다(바벨론의 만가, Babels Grablied).
  아르놀트의 교회 역사철학적인 두 권의 중요한 책: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공동체들의 첫번째 사랑'(Die erste Libe Gemeinden Jesu Christi, 1696), '비당파적인 교회와 이단의 역사'(Unparteische Kirchen- und Ketzerhistorie, 1699/1700).
이미 첫번째 작품에서 아르놀트는 소위 말하는 타락 이론(Verfallstheorie)을 적용하였다: 믿음과 사랑 안에서 서로 결속된 사람들의 참 교회는 십자가와 박해 아래 있으며 초대 기독교 이후 점점 더 많이 세상에 빠졌다.
  '비당파적인 교회와 이단의 역사'에서 아르놀트는 이 타락사상을 교회사 전체에 적용시킨다. 기독교는 특히 콘스탄틴 황제 이후부터 더 많이 퇴보하였다. 그 이유: 교회가 국가와 동맹을 맺음. 교권주의와 교리의 억압. 이 타락은 교황의 교회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적인 교회들에게도 해당된다. 침묵하며 평화를 사랑하고 믿음으로 사는 기독교인들은 "장벽교회들" (Mauerkirchen)과 대조를 이루는 내적인 심령의 교회를 이룬다. 제도적인 교회로부터 이단자들과 이탈자들로 정죄를 받은 사람들이 이 기독교인들이지만, 이단자들이 단순히 성인들로 표현되지 않는다. 아르놀트에 있어서 척도는 "비당파적인", 즉 종파들을 뛰어넘는 기독교의 개인주의적인 모습을 정당화 시키려는 관찰방법이다. 아르놀트는 교회사에 있어서 오류를 제기하였으며 기독교의 역사에서 평신도들과 여성들의 영향에 눈을 뜨게 하였다.
아르놀트의 이 작품은 계몽주의와 고전주의 시대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 경건주의 역사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이다.
 2) 신비적인 영성주의
  교회 중심적인 경건주의의 역사에는 처음부터 또한 민족교회(Volkskirche)로부터 분리를 불러일으킨 교회 비판적인 경향들이 있다. 이 경향들의 사회적인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세상으로부터 단절하는 것과 결혼을 포기하는데 까지 이르는 극단의 개인주의와 같은 공동체 형성이 있다. 급진적인 경건주의자들은 제도뿐만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비판한다: 주요 표지들은 천년왕국에 대한 기대를 가진 천년왕국설적인 미래의 희망(계시록 20장), 의롭게 만듦의 의미에 있어서 칭의론에 대한 비판과 만인구원론, 즉  영원한 지옥의 벌들 에 대한 부정.
이 급진적인 경건주의와 신비적 영성주의의 경계는 자주 뚜렷하지 않다.
- 급진적인 경건주의의 대표자들:
슈츠(J. J. Sch tz, 1640-1690);
페터센(J.W. Petersen, 1649-1726)과 그의 부인(J. E. Petersen, geb. von und zu Merla, 1644-1721);
에파 폰 부틀러(Eva von Buttler, 1670-1721).
고트프리트 아르놀트도 결혼하기 전 그리고 루터교 목사로 목회하기 전에는 급진적인 경건주의자였다.
 4. 친첸도르프와 헤른후트 형제교회
1) 친첸도르프의 생애와 업적
- 친첸도르프 백작(Nikolaus Ludwig Graf von Zinzendorf, 1700-1760)은 슈페너, 프랑케 그리고 아르놀트 다음으로 독일 경건주의의 4번째되는 주요인물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헤른후트 형제교회의 창시자이며 인물로서 역사에 그의 신학과 경건에서 의미를 가졌다.
- 루터교 신앙 때문에 작센으로 이주하게된 오스트리아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친첸도르프는 1700년 드레스덴에서 장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오버라우지츠(Oberlausitz)에 있는 그의 외할머니 게어스도르프 남작부인(Freifrau Henriette Katharina von Gersdorf)의 영지에서 아른트와 슈페너의 얼 속에서 자랐지만 또한 신비적이고 영성적인 영향을 받았다. 친첸도르프의 외할머니는 당시 교육을 받은 부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 1710년부터 1716년까지 친첸도르프는 할레에 있는 프랑케의 학교(P dagogium)에 다녔으며 프랑케와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 할레의 경건주의의 선교활동에 의하여 지속적인 영향을 받았다.
-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법학공부를 한 후에 서유럽으로 연수여행을 하였다; 초기 계몽주의, 칼빈주의 그리고 얀센주의와의 만남.
- 그의 신학과 경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백작궁 로이스-에버스도르프(Reu -Ebersdorf)와의 교통이다. 다양한 그리스도인들의 초교파적, "형제애적 공동체"(philadelphische Gemeinschaft)는 후에 헤른후트 형제교회의 모델이 되었다. 1721년부터 드레스덴에서 궁중고문관이며 법률고문관으로서 그는 형제애적인 공동체를 모으고 경건주의적인 글을 쓰는데 활동하였다.
- 1722년부터 친첸도르프는 모라비아의 신앙망명자들이 오버라우지츠(Oberlausitz)에 있는 자기의 영지에 이주하는 것을 허락한다. 이것이 목수인 다비트(Christian David) 지도 하에 헤른후트 취락의 시작이다. 이 망명자들은 후스파 운동에 기원을 둔 형제단의 후손들이었다.
- 내부적인 어려운 갈등 후에 이 교회는 1727년 8월 13일 공동 성만찬 예식에 의해 내적인 신생을 경험하였다. 친첸도르프의 영향으로 루터교의 지역교회와 연합이 이루어졌지만 과거의 독자적인 교회의 전통 또한 갱신되었다.
- 헤른후트 형제교회의 표식: 죄의 형벌에서 구원하시고 자비로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열어주신 구세주와 밀접한 연합에 대한 인식. 감사와 활동을 압박하는 종교적인 체험에 근거한 뚜렷한 교회인식. 새로운 예배의식: 애찬과 세족식. "쾨레"(Ch re) 안에서 성과 가족 상황(기혼과 미혼을 표시)에 따라 그리고 "반덴"(Banden) 안에서 개인적인 선호에 따른 교회 구조. 일용할 양식의 실천(Lospraxis): 성구 한 구절이나 찬송가 가사를 다음 날의 표어로 삼음(1728년 5월 3일 저녁 모임에서 친첸도르프가 다음 날을 위한 찬송가 가사를 선택).
- 헤른후트 경건주의의 세상에 대한 활동은 자율적이고 교회로부터 나온 선교운동에 있다. 선교지 교회에서 교파적인 특징의 단념 그리고 식민지 세력으로부터 독립에 의해 헤른후트 선교는 곧 바로 할레의 선교를 능가하였다. 서인도와 그린란드에서 시작한 선교는 1760년까지 200명이 넘는 선교사들을 지구의 곳곳에 파송하기에 이르렀다.
- 헤른후트의 친첸도르프는 슈페너가 의미한 교회 속의 작은 교회(ecclesiola in ecclesia)로서 형제교회를 형제들의 자기 인식 때문에 현실화 시킬 수 없었다. 많은 긴장과 갈등 후에 1747년 작센에서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의 동류로서 인정받았다.
- 친첸도르프의  비유이론 은 헤른후트의 입장을 종파적인 교회주의로 묘사하고 있다: 기독교의 종파들과 단체들은 하나님의 각기 다른 교육방법들(               )이다. 새로운 종파가 아니지만 종파들 가운데서 하나의 종파로서 헤른후트 형제교회는 기독교의 모든 축복에 대한 특별한 공동체로서 활동하고자 한 것이다. 친첸도르프의 수 많은 여행을 통해 헤른후트의 지교회들이 생겨났다.
2) 친첸도르프 신학의 개요
- 친첸도르프의 신학은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을 새롭게 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오직 십자가에 있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존재한다. 자연적인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거부: "하나님을 머리로 아는 사람은, 무신론자가 될 것이다", "예수가 없이는 나도 무신론자가 되었을 것이다." 기독자의 구원에 대한 확신은 십자가에 달린 사람과 자신을 대신하여 형벌의 고통을 당하는 것에 대한 감정적인 경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구원에 대한 확신은 종교적인 감정의 체험에서 표현된다("피와 상처의 신학").
헤른후트 형제교회 뿐만 아니라 친첸도르프의 신학도 계몽주의와 고전주의(레싱, 괴테 그리고 헤르더) 그리고 19세기의 신학사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자신을 가리켜 "더 높은 차원의 헤른후트"라고 했다.
5. 뷰르템베르크의 경건주의
  
   독일의 모든 지역 가운데 특히 뷰르템베르크는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은 곳이다. 사색적이고 사변적인 이곳에 신비적이고 명상적인 요소들이 합류하였다. 중요한 인물: 요한 알브레히트 벵엘(Johann Albrecht Bengel, 1687-1752)이 있는데 그는 성서학적인 저술들로 의의가 있다(헬라어 신약성서 1737년, 신약성서 주해 Gnomon Novi Testamenti 1742년). 또 한사람은 야콥 뵈메(Jakob B hme)의 영향을 받은 프리드리히 크리스토프 외팅어(F.Chr. Oetinger 1702-1782)이다.
- 외팅어는 경건주의의 독창적이고 열광적인 인물이다. 벵엘이 성서신학자라면 외팅어의 체계는 신학적인 것만이 아니라 신지학적인 체계였다. 외팅어는 자연의 법칙을 도입했다. 그에게는 자연과 계시 모두 중요하였다.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 1702년 괴핑엔에서 시 서기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로부터 엄한 교육(체벌, 암기를 강요)을 받았다. 수도원학교에서 경건주의의 정신과 만났다.
- 외팅어의 주요저서: Theologia ex idea vitae deducta, 1765
 * 카발라: "전통을 통해 이어 받음"의 의미가 있다. 13세기 유대교의 신비적이고 신지학(神智學)적인 비밀의 가르침이다. 카발라는 탈무드주의와 이성주의의 반동으로서 13세기에 스페인에서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이후 수백년 동안 유대교 신비주의의 산실이 되었다. 카발라는 아브라함이 쓴 것으로 간주되어지는 예지라(Jesira, 창조)를 내포하고 있다. 이 책에 의하면 세상은 10개의 신적인 유출(Emanationen)과 히브리어 알파벳 22개의 조합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창조부터 종말까지의 과정과 사건들을 해석. 아주 복잡한 수학적인 체계와 종말에 대한 예언이 수록되어 있다. 1492년 스페인에서 유대인들의 추방은 이제까지 비밀교리의 카발라에 새로운 전성기를 가져다주었다. 특히 메시아니즘은 카발라에 의해 새로운 자극을 받게 되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도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는 말이 있으며 전세계에 이 책을 해독할 수 있는 랍비는 극히 소수이며 그 내용, 특히 종말론이 너무 무시무시하여 감히 말하지 못한다고 한다.
* 신지학: 야콥 뵈메(Jakob B hme)의 철학체계. "거룩한 철학"(philosphia sacra)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으로 성서적인 계시를 해석.
   
IV. 유럽의 운동으로서 계몽주의
 1. 계몽주의의 전제조건들과 특성
  17세기의 역사적인 조건들로부터 경건주의 뿐 아니라 계몽주의도 유럽의 운동으로 두드러진다. 계몽주의는 17세기에 시작된다. 계몽주의(독: Aufkl rung, 영: enlightenment, 불: les lumi res, 이: illuminismo)는 암흑의 시대를 전제로 한다. 인간이 어둠을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성은 이 시대를 전체적으로 특징짓는 것이며 불어로 철학적인 시대(Le sc cle philosophiqe), 이성의 시대(L'age de la raison)로 표현된다.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새로운 과학과 철학은 중세의 교회에 의해 보증된 보편적인 질서에 문제를 제기했다. 종교개혁은 새로운 문화의 탄생을 가져온 교회 내부의 종교적인 운동이었다. 그러나 근대 이전의 세계에 대한 해석과 세계의 권력을 아직 직접 극복하지는 못했다.
  절대국가에서 인간은 이론적으로 이성적이고 사회적인 동물(animal sociale et rationale)이였다. 절대국가는 국민들을 실제적으로 절대국가에 의해 공적으로 인정받은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훈련시켰다. 경건주의가 이성에 세워진 국가에 대해 종교의 질서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참 기독교"에 상응되는 경건의 실천을 실행하는 엘리트 그룹을 관철시키시려고 노력하는 동안, 계몽주의에 의해 시민문화의 형성이 이루어졌다. 이 시민문화는 이미 있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시로부터 경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활의 영역을 유효하게 추구하였다.
  인간의 의의와 탐구는 무엇보다도 현세의 복락에 대한 필요에 있었지 영원한 구원에 대한 약속은 약화되었다. 바울과 어거스틴적인 종교개혁의 죄론과 은총론은 자연신학에 의해 위협을 받았다.
  * 자연신학(종교): 이미 영국의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7/78-1535)의 유토피아에서 이상적이고 자연종교의 근본이 발전되었다: 하나님은 그의 본질에 있어서 창조주로서 그리고 세상의 지배자로서 도달할 수 없는 힘이다.
 2. 서유럽의 계몽주의
1) 홀란드
- 홀란드에서는 근대의 철학적인 체계가 탄생한다. 스페인을 대항하여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 후기 인문주의('신스토아주의')와 무역을 하는 시민들로 부유하게 된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성장은 양심의 자유와 관용에 대한 조건들을 충족시켰다. 홀란드는 유럽에서 "핍박 받는 자의 방주"가 되었다.
- 프랑스인 데까르뜨(Ren  Descartes, 1596-1650)는 그의 철학에 근대적인 인간의 자아인식을 가져다 주었다. 이성에 입각하여 그는 자신을 확인하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자신의 능력 안에 있는 객체로서 이해한다.
급진적인 의심이 인식, 자신의 인식 원리가 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하나님의 존재는 이성으로 증명할 수 있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로부터(aucilla theologiae)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관찰과 이성적인 원리에 근거한 학문의 기본 원리가 된다.
-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에 있어서 기독교의 전통에 대한 비판적인 정신이 나왔다.  주요저서: "신학과 정치적인 논문"(Tractatus theologico-politicus, 1670).  기독교는 사랑, 경외, 자유와 관용에 세워진 것이지 교리와 기적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구약은 그에게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책이다. 데카르트에 있어서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에 대하여 스피노자는 하나님을 자연 그리고 본질과 동일시 한다: (하나님과 세계의 구별에 대한 폐지) 새로운 신학과 정신사에 강한 비판적인 도전이 되었다.
2) 영국
- 새로운 정신은 영국에서 이미 17세기에 남의 눈을 끌었다: 체버리의 허버트(Herbert of Cherbury, 1581-1648)는 자신의 저서 '진리에 관하여'(De veritate, 1625)에서 자연종교의 근본을 제시하였다.
- 철학자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영국의 경험철학의 전형적인 대표자이다.  그의 기독교 이해는 관용, 덕 그리고 도덕 위에 기초한 것이다. 계시와 이성의 관계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신앙의 진리들은 초이성적인 것이지만 반이성적이 아니다.
- 로크의 두 가지 주된 성향: 기독교의 이성적인 것과 성서적 원시 기독교로의 회귀는 1700년경 영국 이신론의 목적이다. 그러나 영국의 이신론자들은 언제나 맹렬히 성서비평을 하였다: 성서는 그들에게 더 이상 이성과 자연을 능가하는 계시의 문서가 아니었다. 이신론은 창조신앙을 굳게 잡았지만 세상의 경과에서 하나님의 관여를 부인한다.
- 영국 이신론의 두 개의 중요한 글들: 톨랜드(J. Toland)의 '신비적이 아닌 기독교'(Christianity not mysterious, 1696)와 틴델(M. Tindal)의 '옛 것으로서 그리고 창조로서의 기독교'(Christianity as old and as creation, 1730). 기독교는 인간의 이성에 반대되는 불가사이한 아무 것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신약성경의 기적들에서 부활의 보고에 이르는 특히 구약 성경에 대한 비판을 뜻한 것이다. 이신론적이고 반이신론적인 논쟁글들에서 문제되었던 것들은 특히 성경에 나온 기적과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구약성경의 예언들에 대한 이해와 정경의 개념에 대한 것이었다. 이것은 18세기 유럽의 성서신학의 중심문제이다.
-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이신론적인 논쟁의 영향이 본질적으로 영국에서 보다 더 강했다. 영국의 국교회는 급진적인 교회비판을 물리치기 위해 완전히 강화되었다. 영국의 신학에서는 역사적 사고가 일찍 확고한 기반을 차지할 수 있었는데 성서의 축자영감설이 독일에서 처럼 지배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3) 프랑스
- 프랑스의 계몽주의는 절대적인 통치권과 교회의 전통적인 지배와 아주 철저하게 관계를 끊었다. 앙시앙 레짐(Ancien R gime, 프랑스 대혁명 이전의 구체제)과 교회와의 밀접한 관계는 교회로 하여금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의 대원수가 되게 하였다.
- 나중에 홀란드로 피신했던 프랑스인 피엘 벨(Pierre Bayle, 1647-1706)은 유럽 계몽주의의 비판적인 근원적인 저작 가운데 하나인 '역사와 고증의 사전'(Ditionnaire historique et critique, 1695-97)을 저술하였다.
- 프랑스 계몽주의의 주된 대표자는 볼테르(Voltaire, 1694-1778)이다. 정신의 자유, 관용 그리고 인권을 위한 선구자로서 프랑스 시민계급에서 강한 영향을 끼쳤다. 영국의 이신론의 추종자로서 그는 1726-1728년까지 영국에 머물었으며 이신론의 사상을 프랑스로 가지고 와서 카톨릭 교회에 대한 투쟁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crasez l'inf me! ). 그는 영국의 정치적인 상황을 모범으로서 제시하였다. 그의 '도덕에 관한 에세이'(1754-58)는 이제까지 성서적인 경향의 인류역사를 깨뜨리고 이상적인 척도 없이 문화적인 상이점을 비관적인 관점으로 명백히 제시하였다.
- 35권으로 된 '백과사전'(편집: 디데로 Diderot와 알렘베르 d'Alembert)은 계몽주의적인 이상을 프랑스의 시민들에게 전달해주었다. 보편적인 신에 대한 신앙을 고수했던 반기독교적인 볼테르로부터 시작하여 사람들은 바로 무신론과 유물론까지 나아가게 되었다(디데로, 드 라메뜨리 de Lamettrie, 드트리히 폰 홀바흐스 남작 Baron Dietrich von Holbachs '자연의 체계' Syst me de la nature[1770]).
-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는 다른 방법으로 계몽주의적인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인간의 행복에 대한 원천은 이성적인 인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인간의 감정과 정서의 힘에 있는 것이다("자연으로 돌아가라!"는 프로그램). 원래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하다고 한다. 사회, 문화, 국가 그리고 종교는 인간의 천부적인 선한 성향을 망쳐버린다. 인간의 양심에는 보편적인 의지(volont  g n rale)가 자리잡고 있다.
루소는 두 개의 저서를 통해 큰 영향을 끼쳤다:
'Du contrat social'(1762): 이상적이고 자연적인 국가 질서의 프로그램.
'에밀'(Emil, 1762): 자연을 따르는 교육의 이상.
루소의 이상에 반대되는 장애들은 만일의 경우에는 제거되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루소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적인 아버지로 간주된다.
3. 독일의 계몽주의
1) 독일 계몽주의의 특색
- 독일에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계몽주의는 서유럽에 비해 특징적인 차이가 있다. 이성과 계시는 긴장으로 가득찬 대립에서가 아닌 조화적인 보완에 의해 결정되어 진다. 계몽주의적 사상들이 독일에서 근본적으로 서유럽과 다른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없는 것이 있다면 정치적인 폭파력과 교회에 대한 비판적이고 원수적인 태도이다.
- 이 차이에는 신학적인 것과 같이 일반 역사에 원인이 있다: 30년 전쟁 때문에 독일의 발전은 서유럽에 비해 상당히 퇴보되었다. 이것은 종파적이고 정치, 문화적인 파멸을 가져오게 되어서 독일의 계몽주의는 특히 개신교 지역, 제후들의 거주지 그리고 대학에 퍼졌다. 그러므로 독일 계몽주의의 주된 대변자들은 대학 교수들과 절대주의 아래 있는 계몽되었던 지배층이었다.
경건주의와 계몽주의는 독일에서 거의 동시에 등장했다. 정통주의에 대한 경건주의의 싸움은 실제적인 개혁 목적에서 독일의 계몽주의에 본질적으로 진로를 터주었다. 신학적인 계몽주의는 독일에서 신학적인 과정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경건주의처럼 실제적인 개혁운동이었다(K. Scholder).
2)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 독일에서 계몽주의의 시작
-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는 신학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독일의 계몽철학의 시작에 자리를 잡고 있다. 플라톤 경향적이고 포괄적인 사상과 함께 그는 유럽 일류의 철학자였다(베를린과 성 페터스부르크에 있는 학문의 아카데미 설립에 동기를 부여하였다).
 - 라이프니츠에게 있어서 신앙과 이성의 일치가 중요하였다. 이성과 계시, 철학과 신학, 육과 영은 조화로운 결합 안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예정조화, pr stabilierte Harmonie).
- 이 조화에 있어서 결합이 필요불가결하고 영원한 진리와 실제적인 진리의 구별이 있다. 라이프니츠는 기하학적인 법칙 그리고 완전한 진리,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전자에 넣는다. 여기에는 계시와 이성 사이의 모순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성은 이 진리들을 사고에 불가결한 것으로서 증명하기 때문이다. 분명 이와함께 계시는 이성에, 신학은 철학에 종속되어 있다.
실제적인 진리에 있어서(예를 들면 자연법칙) 더 상위의 규칙에 관철, 자연법칙의 어김이 나타날 수 있다. 그리하여 라이프니츠는 기적의 초이성화에 대한 생각이 가능한 것이라고 언명하는 시도를 하였다.
- 하나님, 세상 그리고 인간에 관한 포괄적인 사고는 라이프니츠에 있어서 그의 단자론에 나타나 있다. "단자들은 자연의 참원자들이며 언어를 가진, 사물의 요소이다(Die Monaden sind die wahren Atome der Natur und mit einem Wort, die Elemente der Dinge)." 단자의 개념에서 라이프니츠는 영혼, 생각 뿐 아니라 힘, 실제를 총괄하였다. 단자는 모든 것에 결합되어 있으며 여러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로써 라이프니츠는 철학적이고 이상적인 세계 관찰과 마찬가지로 기계적인 자연과학을 인정할 수 있었다.
- 하나님의 은총의 단자는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의 기초가 되어 있다. 라이프니츠는 변신론(辯神論, Theodizee)에 대한 문제, 세상에 있는 악에 대한 하나님의 의를 우리의 세계는 "가능한 모든 세상의 최고"라는 논제로 푼다. 또한 악은 세상에 속하여 있으며 이것은 유한한 존재의 한계 안에 근거하고 있다. 이성은 세상의 원래 모습으로서 선과 신적인 것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라이프니츠의 낙관적인 세계관은 죄를 단지 불완전한 선으로서 이해할 수 있게 했다.
 
3)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f, 1679-1754)와 신학적 볼프주의
- 라이프니츠의 노선에 선 철학자 크리스티안 볼프는 특히 독일 계몽주의의 영향을 널리 끼친 사상가였다. 그는 1707년부터 할레대학교에서 가르쳤다. 할레대학교와 괴팅엔대학교는 독일 계몽주의의 정신적인 중심지이다.
- 볼프의 철학은 확실한 개념에 논리적인 증명과 이것의 완전한 연관에 세워진 것이다. 반대되는 개념(Widerspruch), 다양한 근거들에 대한 명제(Satz)의 도움으로 그는 포괄적이고 합리적인 형이상학을 세웠다. 이것은 그의 증명방법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이성적인 통찰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될 수 있다. 계시는 이성을 보완하며 이것은 이성을 반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계시는 초이성적이기 때문이다. 볼프는 계시의 내용적인 가르침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성은 계시에게 이것의 가능성과 한계를 밝혀준다. 기독교에 대한 그의 이해는 인간 안에 있어서 도덕적인 능력의 강화에 세워져 있었다. 기독교는  초자연적인  계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 볼프에 있어서 하나님의 완전에 대한 증거는 소위 말하는 물리신학(Physikotheologie)에서 보여진다. 이 신학에서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완전에 관한 거울로서 나타나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하나님으로 정해진 목적을 가지고 있어서 창조는 창조주의 완전을 반영하고 있다.
- 계몽주의와 경건주의 사이의 대립은 특히 할레대학교에서 볼프의 해임에 여실히 반영되어 있다(1723년). 중국의 윤리론의 예를 들면서 볼프는 도덕이 단지 계시와 독립되게 이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어떤 강연에서 증명하였는데 이것은 프랑케의 심각한 반대를 불러 일으키게 하였다.
- 볼프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신학자들은 소위 말하는 볼프주의 또는 과도기적 신학에 속하게 되었다. 이것은 18세기 전반기 경건주의에서 계몽주의의 과도기에 있는 신학자들이다. 이들은 정통주의적이고 경건주의적인 전통뿐만 아니라 이성과 자연 종교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는 시도를 하였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차이가 있으며 볼프에 대한 입장도 상이하다.
- 중요한 인물은 바움가르텐(Siegmund Jakob Baumgarten, 1706-1757)이다. 그는 할레대학교에서 젬믈러의 선생이었다. 바움가르텐은 할레의 경건주의 출신이었으며 볼프의 "시위방법론"을 가지고 정통주의 교리의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서술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성서의 구두영감설에 확고히 서 있었으나 자연적인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계시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확신하였다. 그는 서유럽의 성서신학에 대한 비평적인 글들을 '할레 도서관의 소식'(Nachrichten von einer Hallischen Bibliothek, 1748-1751)을 통하여 독일에 소개하였다.
- 그 이외의 신학자들:
라인베크(J. G. Reinbeck, 1683-1741), 베를린 교구 감독,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에 관한 영향력 있는 저서를 남김.
슈미트(J. L. Schmidt, 1702-1749), 베르트하임(Wertheim) 성경의 저자,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 성서의 예언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것은 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라이마루스(H. S. Reimarus, 1694-1768), 함부르크 인문계 고등학교 교사, 베르트하임 성경을 통해 자신의 고등 비평적인 '하나님에 대한 이성적인 숭배자를 위한 변증 또는 보호의 글'을 쓰는 동기를 부여 받았다.
- 위의 마지막에 언급된 두명의 비평적인 볼프주의자들 외에 과도기 신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볼프로부터 선을 긋고 있다. 이들은 성서적이고 교회사적인 연구로 주목을 받았다.
부데우스(J. F. Buddeus, 1667-1729);
모스하임(J. L. von Mosheim, 1694-1755): 헬름슈테트와 괴팅엔 대학교에서 활동하였고 실용적인 방법론을 교회사에 도입하였다. 이와 더불어 그는 새로운 교회사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파프(C. M. Pfaff, 1686-1760)와 발히(J. G. Walch, 1693-1725)는 대루터전집의 편집으로 유명하다(1740-1753).
4) 요한 잘로모 젬믈러와 신신학
 
- 신신학(Neologie, 新神學)은 18세기 중반에 독일 계몽주의 신학의 극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성과 계시와의 관계에서 비판적인 이성의 고유한 중량이 점점 강해졌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구 프로테스탄트의 성서론을 공격한다.
- 독일에서 역사적 비평적 신학의 창시자는 젬믈러(J. S. Semler, 1725-1791)였다. 그는 독일 계몽주의의 가장 중요한 신학자였다. 그의 저술과 더불어 구프로테스탄티즘에서 신프로테스탄티즘으로의 전환이 나타난다. 역사 비평 방법의 일관된 적용을 통해 젬믈러의 신학은 정통주의와 경건주의와 확실한 경계를 긋게 된다. 그러나 또한 과격한 계몽주의와 자연주의에 대해 젬믈러는 "경건한 계몽주의자"로 불러진다. 그리하여 독일 계몽주의의 특성은 젬믈러에게서 확실히 보여진다.
- 1725년부터 할레대학교에서 가르쳤던 젬믈러의 주저서는 '정경의 자유로운 연구에 대한 논문'(Abhandlung von freier Untersuchung des Kanon, 1771-1775)이다. 상대적으로 늦게 형성된 역사적 조건을 가진 신약성서 정경에 관한 인식은 법적인 정경 이해와 구두영감설의 과제를 가져왔다. 정경이 되었던 성서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포함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성서와 동일하지는 않다. 성서 해석에 있어서 또한 "적용"(Akkomodation)이 유념되었다. 즉 예수와 사도들은 초대 교회의 종교적인 모범의 지평에 적용되었을 것이다. 유대교와 이교도에서 온 영향들이 나온지 얼마되지 않은 기독교에 유입되었다.
- 젬믈러는 이 역사적인 작업을 신학과 종교의 차이로 표현했다. 그는 두 가지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였다. 이것은 계몽주의 이래 학문적인 신학 작업에 있어서 길을 제시하는 구분이 되었다. 신학은 이제 목사와 교사에 있어서 변할 수 있고 수정을 요하고 발전이 가능한 과목이다. 이와 반대로 종교는 성서적인 종교, 신앙 그리고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일로서 이웃사랑에 대한 근본 진리에 대한 합의이다 젬믈러는 이 구분으로 두 가지 목적을 이루었다: 신적인 계시의 개념으로서 "구원의 순서" 이전의 동시적인 고려에 있는 학문적인 신학에 대한 자유.
- 젬믈러는 신학과 종교의 구분에서 한층 더 나아가 공적인 종교와 사적인 종교로 구분하였다. 공적인 종교는 근본을 신앙고백에 두고 있는데 비해, 사적인 종교는 기독교 신앙의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형태를 묘사한다. 젬믈러는 기독교의 개인 종교의 자유를 대변하였고 '자유로운 신학적인 가르침의 시도'(Versuch einer freieren theologischen Lehrart, 1777)에서 신학 연구의 자유를 요청하였다. 동시에 그는 냉소적인 개인주의에 기독교 신앙을 전달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젬믈러는 1788년의 뵐른(W lln)의 종교칙서를 인정하였다. 뵐른의 종교칙서는 신앙고백서들에 대해 목사와 교사의 가르침을 요청하였다.
- 젬믈러 이외의 신학자들은 부분적으로 전통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보편적인  복지와 인간애에 대한 비교의적이고 도덕적인 기독교의 촉진에 대한 목적에 있어서 일치하였다. 중요한 신신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자크(A. F. W. Sack, 1703-1786); 예루살렘(J. F. W. Jerusalem, 1709-1789)의 '종교의 우수한 진리에 관한 고찰'(Betrachtungen  ber die vornehmsten Wahrheiten der Religion); 슈팔딩(J. J. Spalding, 1714-1804)의 '설교직의 유용과 장려' (Nutzbarkeit der Predigtamtes und deren Bef rderung); 퇼러(J. G. Toeller, 1724-1774)와 텔러 (W. A. Teller, 1734-1804). 대부분 교회의 직무를 가진 신학자들은 그들의 설교를 통하여 기독교에 대한 시대에 맞는 사회 윤리적인 해석의 의미에서 활동하였다.
5) 단편논쟁(Fragmentenstreit)과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
- 독일에서 초자연적인 계시를 부인하고 이성주의로부터 영성주의 그리고 스피노자주의까지 진전한 급진적인 계몽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에게 속한 사람들로는 슐츠(J. H. Schulz, 1739-1804)와 만년의 텔러이다.
- 기독교에 대해 과격하게 공격한 독일에서 무엇보다도 '익명의 단편들'(Fragmente eines Ungenannten)의 발행으로 일어났다. 1774년과 1778년 사이 볼펜뷔텔(Wolfenb ttel) 도서관에서 레싱(G. E. Lessing)은 함부르크의 고등학교 교사이며 동양학 학자인 라이마루스(H. S. Reimarus)의 '하나님에 대한 이성적인 숭배자를 위한 변증 또는 보호의 글'(Apologie oder Schutzschrift f r die vern nftigen Verehrer Gottes)로부터 발췌를 출판하였다. 이미 1768년 고인이 된 라이마루스는 이 글에서 날카롭게 성서비평을 하였으며 복음서 안에서 상반되는 것들을 강하게 표출시키고 기만논제를 세웠다. 이에 의하면 기독교의 탄생은 완전히 제자들의 사기였다는 것이다. 예수는 정치적인 메시야로서 좌절되었고 그의 제자들은 그의 죽음 이후 그들의 명의상의 실망을 극복하고 세상에서 주목을 받을 수 있도록 부활을 날조하였다는 것이다. 레싱은 이 책의 발행으로 기독교의 본래의 의미와 본질에 관한 토론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후기 정통주의와 이상주의적인 계몽주의 사이의 대립은 더욱 깊어졌다. 이 '익명의 단편들'의 발행은 논쟁을 일으켰으며 이 논쟁에는 함부르크의 주목사(主牧師)인 괴체(Goeze)와 젬믈러가 참여하였고 레싱은 개인적으로 공격을 받았다.
- 레싱의 견해는 그의 유명한 문장에 나타나 있다: "필요한 이성적인 진리들의 증명은 우연한 역사적인 진실이 결코 될 수 없다"('영과 능력에 대한 증명에 관하여', 1777). 여기에서 레싱은 라이프니츠에 있어서의 이성적인 진리와 실제 진리 사이의 차이가 결합되어 있다. 성서의 역사적인 진리는 영과 능력의 증거를 이끌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진리는 무조건적인 필요에 비추지 않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종교들은 신적인 교육과정을 위한 장소이며 이 교육과정의 목적은 사랑과 이성의 참 종교이다('인류에 대한 교육', 1780). 이것은 'Nathan'의 반지 비유에도 나와 있다. 기독교 계시의 역사성에 대한 라이마루스의 날카로운 비판은 레싱에게 있어서 원래의 결정적인 종교는 사랑과 이성으로 보여질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 계몽주의 세기의 한 가운데서 또한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이 뚜렷이 나타났다. 이 비판은 과거의 입장으로부터 온 것이다. 이것은 계몽주의의 문제 제기를 극복한 사상가의 새로운 정신이다: 하만(Johann Georg Hamann, 1730-1788). 이성과 계시, 죄와 은총의 관계는 완전히 새로운 단계로 올라가게 되었다. 하만은 집중적인 성서 읽기를 통하여 1758년 런던에서 회심을 경험하였다. 이 회심은 그를 새로운 자기인식으로 이끌었다: 신앙밖에 있는 추상적이고 이론에 서 있는 이성은 우리 존재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다. 우리 모두의 인식은 하나님의 인간되심, 육신과 이 세상 존재의 구체화로 나타난 하나님의 강림에 해결점을 가지고 있다. 하만은 18세기 루터 신학에서 가장 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글은 19세기에야 심오한 영향을 발휘하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V. 프랑스 혁명 이후의 교회의 상황
  프랑스 혁명 전의 전체 역사적인 상황과 그 이후 이것의 결과는 아주 심한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을 당연히 1800년의 시대, 깊은 중간 휴지라고 말하게 된다. 계속되는 역사 발전이 지속적으로 이 시대로부터 결정되었다.
  전체주의 국가의 몰락과 국민의회에 의한 공화정의 선언은 결정적으로 정치적 변혁을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귀족의 국가에 있는 통치권이 시민계급으로 이양되었다.
  국가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에서 지금까지의 상황의 혁명적인 변형은 변화의 관계 안에서 이해되어져야만 한다. 이 변화는 경제와 사회의 영역에서 이미 18세기와 연결되어 있다. 기계의 발명들은 산업생산의 조건을 만들었고, 이것은 도시와 농촌에서 인간의 생활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또한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면에서 프랑스 혁명은 1800년대의 교양인들에게 적극적인 승인이거나 괴로운 거부를 체험하게 하는 결과를 냈다. 이 혁명의 이전에 있었던 멀리 거슬러 올라가 본 정신사적인 전통, 즉 중세의 교회비판적인 경향, 르네상스, 인문주의 그리고 유럽의 계몽주의 철학은 프랑스에서 혁명적인 사건과 함께 직접적인 연관을 맺을 수 있었다. 마침내 이 이념들은 정치적이고 결사적인 구체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혁명의 전개와 독재자의 공포적인 통치력과 프랑스의 지배적 세력 아래 있는 유럽의 국민들에 대해 무거운 멍에였던 그 결과는 혁명이전의 상태로 복귀를 추진했던 다각도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1. 프랑스 혁명부터 비인회의까지 - 1800년대
 1) 프랑스 혁명
- 18세기에서 19세기로의 변화는 결정적인 교회사적 분기점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을 1800년의 시대라고 말한다.
- 사회적인 갈등들과 프랑스 계몽주의의 결사 정치적인 폭파력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을 일으키게 했다. 전제적인 국가의 분쇄와 시민계급에게 통치권의 인수됨과 더불어 구정권과 깊게 연결된 교회는 또한 국가와 사회적인 생활로부터 제외되었다. 이로써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수 백년 동안 지속되어오던 국가와 교회의 관계가 해체되었다. 프랑스와는 달리 이미 프랑스 혁명 이전에 국가와 교회 사이의 성공적인 분리는 미국에서(1776년 영국으로부터 분리됨) 교회와 적대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다. 미국에서 기독교와 국가로부터 독립된 교회는 오히려 국민과 정치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 국민의회의 교회정치적인 중요한 조처(1789-1792): 교회재산에 대한 국가재산으로의 귀속, 모든 수도원과 재단의 해체, "성직자에 대한 시민헌법". "시민헌법"의 내용: 교회의 국가 행정기관에의 예속, 시민에 의한 주교와 성직자의 선출, 성직자의 급료에 대한 확정, 시골이외에서 성직자 권세에 대한 복종으로부터 해방(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반대, 갈리아적인 전통!), 모든 성직자에게 국가와 헌법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요구. 이 지시에 대한 성직자들의 맹렬한 저항이 있었다.
- 국민의회의 反교회적이고 反기독교적인 조치들(1792-95): 기독교적인 연도(서력기원) 사용과 기독교의 축제 폐지; 혼인 선포에 대한 순수한 민사적인 업무, 수많은 교회를 황폐시킴, 예술품에 대한 약탈과 파괴.
- 로베스삐엘(Robespierre) 아래에서 1794년 이성과 지고의 존재에 대한 숭배의 새로운 제식(祭式). 반교회적인 조치들은 국민들 사이에서 상당한 저항을 받았다.
- 1795년 공포정치가 끝나고 난후 종교의 자유가 다시 주어졌다. 국가와 교회의 분리의 지속.
-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은 1801년 7월 15일의 협약에서 카톨릭 교회를 회복하였다: 카톨릭 교회는 프랑스 국민의 대다수 교회로서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았지만, 국가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다. 국가는 성직자의 봉급을 책임지게 되었고 교황은 새로운 주교들을 임명하였으나 혁명에 의하여 잃어버린 교회 재산을 승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2) 1803년 레겐스부르크의 제국 대표자 결의
-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은 또한 舊독일제국의 종말을 정했으며 국가와 사회에 대한 교회의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프랑스 혁명이 독일에 직접 번짐으로 상이한 사회와 단체의 구조가 저지되었다(국가적인 사분오열과 시민사회의 약한 위치). 그러나 혁명적인 프랑스에 대항한 동맹전쟁에 의해 독일은 바로 변화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었다.
- 1797년 독일제국은 라인강 서쪽지역을 프랑스에 양도했다. 이것은 특히 세곳의 카톨릭 대주교가 다스리는 선제후국인 마인츠, 쾰른 그리고 트리어에 해당되었다. 이들에게 속한 라인강 서쪽지역의 상실에 대해 선제후들은 라인강 동쪽지역에서 손해배상을 받아야 했다.
- 프로이센에서 연맹이 이루어지기 바로 전에 나사우(Nassau) 공국(公國)에서 두 개의 종파가 완전히 통합되었다: 행정, 예배의식 그리고 교리에서 일치.
VI. 19세기의 신앙과 신학사
 
 1. 슐라이에르마허
  19세기에 있어서 전체적으로 역사에 적용되는 것은 또한 개신교의 신앙사와 신학사에 적용이 된다: 19세기는 우리에게 아주 복잡한 세계로서 만나진다. 이 세계 안에서 수많은 개별현상들과 사건들로 이루어진 소위 말하는 외적 역사는 아주 여러 모습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바로 신앙과 신학의 역사이다.
  19세기의 초반에 "19세기의 교부"로 불리어지는 프리드리히 다니엘 에른스트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가 활동하다. 이 칭호에는 먼저 19세기 신학자들 가운데 슐라이에르마허에 대한 논쟁의 여지없는 중대한 의미가 나타나 있다. 그러나 또한 비판적인 견해도 이 많이 인용되었던 진술에 함께 울리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어떻게 19세기의 신학 주류에  서느냐에 따라, 이 위대한 발의자 슐라이에르마허가 평가되기 때문이다.
  - 슐라이에르마허는 1768.11.21 브레슬라우(Breslau)에서 태어났다. 그의 모친과 부친 모두 개혁교회 신학자 집안 출신이다. 그의 외조부는 베를린에서 궁정설교자요 감독이었고, 그의 외삼촌은 할레 대학교의 신학교수였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과격하고 경건주의적인 교회와 힘든 종교적인 싸움을 해야만 했다. 슐라이에르마허 아버지는 과격한 경건주의에서 계몽주의의 합리적인 신학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헤른후트의 확고 부동한 신봉자가 되었다. 슐라이에르마허가 태어날 당시 그의 아버지는 프로이센의 군목이었다.
  - 슐라이에르마허는 헤른후트의 형제교회의 정신 안에서 교육을 받았다. 1783년 오버라우지츠(Oberlausitz)지역의 니스키(Niesky)에 있는 학교에 들어갔다. 어머니의 죽음. 자기 삼촌인 슈투벤라우흐(Stubenrauch)와 더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1785년 막데부르크(Magdeburg) 부근의 바르비(Barby)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슐라이에르마허는 헤른후트의 설교자가 되어야 했다.
  - 니스키에서 완전히 헤른후트의 경건성의 영향 아래 있었으나 슐라이에르마허는 바르비에서 이 경건성으로부터 힘든 싸움 아래 빠지게 된다. 이 위기에 관한 문서들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편지에 주고받은 내용이다. 이 위기의 원인: 공부하는 것에 대한 심한 압박과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화목제물로서 죽은 것에 대한 의심. 내적인 의심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게 할레 대학에서 신학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 헤른후트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적인 유년기의 발전에 중요하였다: 종교적인 개인과 종교적인 공동체의 풍요로움에 있어서 지속적인 의미. 1802년 자매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슐라이에르마허는 고백하고 있다: "내가 모든 것 이후 다시 헤른후트 사람이 됨으로써 나는 더 높은 차원에 관해서만 말할 수 있다."
  - 1787-89년 할레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특히 에버하르트(J.A.Eberhard, 1739-1809)에게서 철학을 공부하였다. 
2. 자유 신학(Die liberale Theologie)
 
 - "자유 신학"이라는 개념은 젬믈러(Semler)의 책 "더욱 자유로운 신학 교수법의 시도(Versuch einer freieren theologischen Lehrart)" (1777년)에서 유래한 것이다. 자유 신학의 역사적 경향의 작업은 그 뿌리를 계몽주의에 두고 있으나 19세기에는 신앙과 역사의 문제 앞에 있는 첨예화한 형태에 있게 된다.
 - 다비트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 , 1808-1874)는 헤겔의 영향을 받은 그의 책 '예수전'(Leben Jesu) (1835년)으로 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 논쟁의 원인: 복음서에 나온 예수에 대한 묘사는 역사적이 아니라 신화적이다. 첨가된 신화들이 예수의 역사적인 모습에 덧입혀졌을 것이다. 슈트라우스에게 있어서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르치는 인간적인 교사였다.
슈트라우스는 神人間의 관념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에서 보았다. 이 관념이 초대 기독교에 현실화 되었으며 예수의 삶에 첨가되어 생산적인 모습으로 보여지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이성적으로 밝혀질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관념은 관념의 채움을 개체의 표본에 붓지 않고, 무한한 것은 유한한 형태로 이해되지 않는다.  신약 성서의 기독론적인 언급은 인류의 발전을 총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 슈트라우스의 '예수전'은 모든 신학적인 경향으로부터 강한 반박을 받았다. 저자 또한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당했다.
 - 바우에르(B. Bauer, 1809-1882)는 극단적인 관점을 가졌다. 그는 신약 성서의 형성을 제2세기로 잡았고 예수의 역사성을 의심하였다.
 - 19세기에 신약 성서와 교회사와 교리사의 역사적 연구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의미는 페르디난트 크리스티안 바우르(Ferdinand Christian Baur, 1792-1860)에게 있다. 바우르는 슈트라우스의 선생이며 헤겔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1826년부터 튜빙엔 대학교의 교수였다.
 - 바우르는 신약 성서를 초대 기독교의 역사적 정황에 배열하는 것을 시도하였는데 이런 점에서 그는 새로운 역사 비평적인 신학의 창시자이다. 그가 세운 기본 명제: "기독교는 유일하게 기독교의 창시자의 인물을 통해 이것이다라는 모든 것이다(Das Christentum ist alles was es ist, einzig durch die Person seines Stifters)." 요한복음이 아닌 공관복음에서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한 예수의 모습이 탐구되어질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참 의에 대한 설교가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이 가르침은 그의 인격 안에서 현실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 바우르는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헤겔의 변증법적인 역사에 의거하여 설명한다: 正으로서 유대 기독교에서 사도 바울의 활동을 통하여 反으로서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고 보편적인 이방 기독교로 이어진다. 영지주의적인 경향의 공동의 적과 마르시온에 대항하여 초기 카톨릭 교회는 合으로서 발전되었다. 신약 성서는 이 발전 과정에 따라 배열되어져야만 했다. 그리하여 바우르는 신약 성서에 대하여 "경향적인 비평"(Tendenzkritik)을 요청하였다.
 - 바우르는 교리사에 대한 새로운 과목을 창설하였다. 그는 교리의 형성을 포괄적 정신적인 발전 과정에 대입시켰다. 이 발전 과정은 고대 교회의 교리들의 진리를 이것들의 필요한 진보와 더불어 인식하게 한다.
바우르의 주요 저서들:
'화해에 관한 기독교의 가르침'(Die christliche Lehre von der Vers hnung), 1838; '삼위일체와 성육신에 관한 기독교의 가르침'(Die christliche Lehre von der Dreieinigkeit und Menschwerdung Gottes), 1841-43; '교회사 편찬의 시대'(Die Epochen der kirchlichen Geschihtsschreibung)', 1852; '초기 제3세기까지의 기독교와 교회'(Das Christentum und die christliche Kirche der ersten drei Jahrhunderte), 1853.
 -1870년부터 신학분야는 그의 죽음이 한참 지난 후 자유 신학으로 여겨졌던 사람인 알브레히트 리츨(Albrecht Ritschl, 1822-1889)에 의해 각인 되어졌다. 신학 발전에 있어서 칸트, 슐라이에르마허 그리고 바우르로부터 영향을 받은 리츨은 기독교를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고 개인의 신앙 체험에 집중하는 신학을 발전시켰다. 신약 성서는 확실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참 계시를 증거한다. 리츨은 기독교를 두 개의 과열점의 한 생략(Ellipse)으로 묘사한다: 모든 인간의 도덕적 목적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칭의와 화해"로서 구원. 윤리적인 행위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인간 의지의 변화와 방향 전환이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각 사람의 구원의 핵심이다. 이리하여 리츨의 신학은 본질적으로 세 가지 요소로 결정되어 진다: 윤리의 강조,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증거와 확실한 인식에 있는 신앙 체험. 신비주의, 경건주의, 사색 그리고 카톨릭의 제식신심(祭式信心)에 대한 그의 반박에서 리츨은 시대에 맞는 "문화프로테스탄티즘(Kuturprotestantismus)" 신학자이다. 1864년부터 그는 괴팅엔 대학교 신학부에서 가르쳤다.
주요저서: '칭의와 화해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 (Die christliche Lehre von der Rechtfertigung und Vers hnung, 1870-1874), '기독교 강의' (Unterricht in der christlichen Religion, 1875).
- 리츨의 신학은 19세기가 저물어 가는 때에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특히 1886년부터 라데(M. Rade)에 의해 편집된 학술지인 '기독교세계' (Die Christliche Welt)는 다양한 리츨 문하생들의 기관지(機關誌)이었다.
- 1879년부터 말부르크 대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인 헤르만(Wilhelm Herrmann, 1846-1922)은 리츨보다 더 강력하게 예수 인격에 감격하여 개인 신앙체험을 강조했다. 이로부터 윤리적 진지함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주요저서: '윤리'(Ethik, 1901). 불트만(Rudolf Bultmann)처럼 바르트(Karl Barth)도 말부르크 대학교에서 헤르만에게서 배웠다.
- 자신의 시대에 가장 유명한 신학자인 교회사가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0)은 고대 교회사가요 교리사가로서 리츨의 역사 경향적인 작업을 계승하였다. 이것은 이미 1892년 하르낙이 신앙고백 내용들의 역사적인 뿌리에 대한 주위를 환기시켰던 사도신경에 관한 논쟁에서 나타나고 있다. 역사적인 현상으로서 초기 기독교와 예수의 원래적인 가르침에 대한 인지는 하르낙을 비교리적인 기독교에 대한 요구로 이끌었다. 그는 고대교회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을 복음의 토양 위에 있는 헬라 정신의 산물로 여겼다.
하르낙은 1888년부터 베를린대학교에서 활동하였다. 주요저서: '교리사'(Lehrbuch der Dogmengeschichte, 1885ff.).
 3. 중재신학
- 신학적인 자유주의와 신앙고백주의 사이에 많은 신학자들이 헤겔과 슐라이에르마허와 연결하여 중재를 시도했다.
- 헤겔로부터 두 명의 사색적인 신학자인 다우프(K. Daub, 1765-1836)와 마르하이네케(Ph. Marheineke, 1780-1846)가 유래하였다.
- 특히 슐라이에르마허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와 근대 문화에 다리를 놓으려고 했던 사람들을 중재신학자라고 한다. 이들의 기관지는 1828년부터 발행된 '신학연구와 비판'(Theologischen Studien und Kritiken)이었다.
- 여러 가지 경향을 받아들이는 중재신학자들과 약간 동질 그룹에서 탁월한 사람은 로테(Richard Rothe, 1799-1867)이다. 로테는 부흥운동, 슐라이에르마허, 헤겔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근본 사상은 교회 안에서 예수로부터 온 공동체 생활의 윤리적 완전의 과정이 국가 안에서의 완성에 있다. 교회와 국가가 경험적인 단체로서 이해되지 않는다. 그는 기독교의 역사와 제도로서의 교회의 역사 사이를 엄격하게 구별한다. 기독교의 원칙은 모든 현세적인 상황을 그의 힘으로 달성하는 것이다.
주요저작: '신학적 윤리'(1845-48).
- 니취(C. I. Nitsch, 1787-1868)는 교회와 신앙고백의 연관을 절대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가운데 연합을 위하여 싸웠다.
주요저작: '기독교 교리의 체계'(System der christlichen Lehre, 1829)와 '실천신학'(Praktische Theologie, 1847-67).
 4. 성서신학
- 모든 신학의 성서적인 기초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강조했던 인상 깊은 신학자들을 여기에 요약해본다.
- 1843부터 튜빙엔 대학교에서 가르쳤던 베크(J. T. Beck, 1804-1878)는 성서축자주의(Biblizismus)와 벵엘의 구속사적 신학으로부터 왔다. 성서에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단계를 전개한 하나님의 계시가 근본적으로 드러나 있다.
주요저서: '성서에 나타난 기독교의 교의학'(Die christliche Lehrwissenschaft nach den biblischen Urkunden, 1847).
- 1860년부터 할레 대학교에서 활동한 캘러(Martin K hler, 1835-1921)는 신앙과 역사의 관계의 근본문제를 선구적으로 파악하였다. 1892년 "소위 말하는 역사적 예수와 역사적이고 성서적인 그리스도"(Der sog. historische Jesus und der geschichtliche biblische Christus)라는 강연을 했다. 이 제목은 중요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역사적 예수가 아닌 교회에 의해 설교되고 증거된 그리스도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다. 역사적인 예수의 모습을 그려내기 위한 시도들은 잘못되었다. 복음서를 "교회에 기초를 둔 설교의 문서들"로서 이해해야만 한다. 확실히 캘러에게 있어서 설교되어진 그리스도는 바로 역사적인 예수였다.
- 이미 20세기까지 영향을 끼친 슐라터(Adolf Schlatter, 1852-1938)는 1898년부터 튜빙엔 대학교의 교수로 일했다. 그의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신약성서 신학과 고대 유대교의 종교와 역사 연구 영역에 있다. 그의 주석 연구에서 그는 소위 말하는 "목격행위"(Sehakt)와 "삶의 행위"(Lebensakt)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단순히 인간적인 학문으로부터 주석을 지키고 주석을 전적으로 사실, 즉 "그리스도의 역사"와 연관시키려고 했다.
수많은 저작이 있으며 특히 그 가운데서도 신약성서 주석이 있다.
 5. 종교사학파
- 1892년 봐이스(Johannes Wei )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설교' (Die Predigt Jesu vom Reiche Gottes)라는 작은 책이 출판되었다. 순수하게 주석적으로 그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는 종말론적 성격을 가졌다고 확신하였다. 이것은 리츨의 윤리적인 발전 사상을 극단적으로 반박한 것이다.
- 이것은 괴팅엔 대학교의 일련의 젊은 주석 신학자들의 서막이었다. 이들은 이스라엘과 초대 기독교의 관계를 고대 종교사와 더불어 문서비평과 양식사(Formgeschichte)에 기초하여 연구하였다. 이들은 다음과 같다: 군켈(H. Gunkel), 부세(W. Bousset), 그레스만(H. Gre mann), 다이스만(A. Dei mann), 브레데(W. Wrede).
- 성서적이고 성서 밖의 종교사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다양한 유사성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과정 가운데 성서적인 종교의 특별한 종류를 드러냈다. 근대적인 관념에 대한 성서적 선포의 낯설음이 명백해졌다. 이와 함께 성서적인 선포로부터 직접적인 다리를 현재에 놓으려는 자유 신학의 시도들은 의문시되었다.
- 이것은 특히 종교사학파의 한 조직신학자를 반사하고 있다: 트뢸취(E. Trorltsch, 1865-1923)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교수였으며 후에 베를린 대학교의 철학교수가 되었다.
- 역사가이며 또한 종교철학가요 종교사회학자로서 트뢸취는 자신의 문제제기로 오늘날까지 영향을 끼치는 학자이다. 근대 문화에 대한 기독교의 관계에 관한 문제, 계시와 역사 그리고 개인의 결정의 자유와 특히 근대의 역사에서 공동체의 조건과 같은 것들은 트뢸취가 문제를 삼은 연구 영역이었다.
교회사에 있어서 중요한 점: 그의 위대한 연구 결과인 저작, '기독교 교회와 단체들에 대한 사회학'(Die Soziallehren der christlichen Kirchen und Gruppen, 1912).
-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필연적 종말론"(konsequente Eschatologie)이라는 명제로 활발한 토론을 불러 일으켰고 예수의 생애에 대한 역사적 서술의 불가능함을 증명했다. 이것은 특히 그의 저작에 나타나 있다: '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 까지'(Von Reimarus zu Wrede, 1906), 이 책은 1913년의 제2판부터 '예수 생애 연구의 역사'(Geschichte der Leben-Jesu-Forschung)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6. 독일의 부흥운동과 루터교의 교파주의
  1) 부흥운동의 일반적 성격
- 부흥운동이란 19세기 초반에 있었던 교파를 초월하는 종교적인 출발을 의미한다. 시간적으로 영국과 미국의 부흥운동은 독일의 부흥운동보다 앞섰다. 프랑스, 네덜란드 그리고 스위스의 개신교에서는 부흥운동을 "레베위"(R veil)라고 한다. 나라와 언어를 초월하여 광범위한 연합의 감정이 형성되어 있다.
- 이 운동은 여러 가지 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몇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계몽주의의 이성적인 종교에 대한 강력한 반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에 대한 심각성, 이 죄로부터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로운 삶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 중생에 대한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체험; 개인의 중생은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정신으로부터 사회를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사회적이고 세상을 향한 활동과 이방인들에게 기독교의 신앙을 널리 퍼뜨려야 한다는 선교의 열정이 있다. 프랑스 혁명 정신에 대한 비판.
- 목회자뿐만 아니라 특히 평신도들이 성경을 새롭게 발견했으며 자유로운 협회와 단체의 형태로 공동 활동을 하였다. 경건이 이 협회에서 생동하게 되고 경험되었다.
  2) 부흥운동의 뿌리
- 개신교에서 초기의 경건주의는 부흥운동의 역사적인 뿌리이다. 무엇보다도 헤른후트의 형제교회의 디아스포라 설교자들로부터 결정적인 자극들이 부흥운동을 일으키게 했다.
- 부흥운동의 첫 번째 국면에서 "더 높은 차원의 헤른후트 사람"으로서의 슐라이에르마허 또한 중요하게 자극을 준 사람이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사람들로 예를 들면 키일의 감독교구장인 하름스(Claus Harms)와 베를린 대학교의 교회사가인 네안더(August Neander)가 있다. 물론 후에 슐라이에르마허에 대한 경계와 투쟁이 있었다. 이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는 다음과 같은 하름스의 언급이 있다: "나를 낳은 그(슐라이에르마허)는 나에게 전혀 빵을 주지 않았다."
- 부흥운동에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1780년 아욱스부르크 출신의 울스페르거(J.A. Urlsperger)에 의해 바젤에서 설립된 "독일 기독교 협회"(Deutsche Christentums- gesellschaft)이다. 이 협회의 회원: 융 슈틸링(H. Jung-Stilling, 1740-1817), 오벌린(J.F. Oberlin, 1740-1826), 라파터(J.C. Lavater, 1741-1801). 또한 계몽주의의 비판자인 헤르더(J.G. Herder)와 하만(J.G. Hamann)은 부흥운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계몽주의와 부흥운동은 상반적으로만 나타날 수 없었다. 계몽주의와 부흥운동에서 자연과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활동은 이미 이성으로 체험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체험은 기독교의 계시에서 비로소 완전해진다. 이 관점은 독일의 계몽주의를 부흥운동, 또한 단체의 신앙형태를 결합시켰다.
 3) 부흥운동의 역사적 발전
- 19세기 전반에 세 개의 국면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국면 (대략 1800-1815):
낭만주의, 이상주의 그리고 민족적인 성향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정신적인 넓은 영역 안에서 종파를 초월하는 체험적인 기독교가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둘째 국면 (대략 1815-1830):
부흥설교, 정기 간행물과 논문, 성서공회와 선교회를 통해 국민과 교회에서 더욱 광범위하게 퍼졌다. 교파들은 가톨릭 교회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경계 설정 그리고 독일의 이상주의의 철학과 슐라이에르마허에 대한 경계설정으로 다시 중요하게 되었다.
셋째 국면 (대략 1830-1848):
교파주의로의 발전. 제도로서의 교회와 교회의 신앙고백이 중심에 오게 되었다. 부흥운동의 넓은 영향의 감소, 합리주의와 교파주의 사이의 교회적인 당파 싸움.
 4) 부흥운동의 중심과 주대표자
- 초교파적으로 종교적인 출발은 알고이의 가톨릭 부흥에 있다. 이 부흥운동은 레겐스부르크의 감독인 자일러(J.M. Sailer)의 제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여기에서부터 다양한 영향들이 독일의 개신교에 미쳤다: 특히 프랑켄, 뷰르템베르크, 니더라인, 베스트팔렌의 일부분, 베를린, 함부르크, 브레멘, 하노버, 슐레지엔과 폼메른.
- 프랑켄의 부흥은 뉘른베르크와 에어랑엔 대학교에서 시작되었다. 개혁교회 신학교수인 크라프트(Christian Krafft, 1784-1845)와 교육학자인 칼 폰 라우머(Karl von Raumer, 1783-1865)가 중심적인 인물이다. 루터교의 한 지역에서 시작된 에어랑엔의 부흥은 계속 하나의 교파적인 루터교의 경향으로 발전하였다.
- 폼메른 지역의 부흥의 중심은 코트비츠(Hans Ernst Kottwitz) 남작이다. 헤른후트 형제교회 출신으로 프로이센의 귀족과의 관계, 사회적인 활동, 베를린에 각성한 모임의 주역이었다. 에어랑엔의 부흥과 마찬가지로 프로이센의 부흥도 루터교적인 교파주의로 나아갔다. 부흥운동의 주요 기관지는 헹스텐베르크(E.W. Hengstenberg, 1802-1869)에 의해 창간된 "복음 교회 신문"(Evangelische Kirchenzeitung, 1827)이었다. 이 신문에는 부흥운동과 합리주의의 치열한 공방이 수록되어 있다.
- 뷰르템베르크에서 부흥운동은 경건주의, 그 중에서도 벵엘(Johann Albert Bengel, 1687-1752)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었다. 벵엘은 1000년 왕국이 1836년에 시작된다고 확신하였다. 종말론적이고 묵시론적 정서는 그 시대의 정치적인 불안정과 연관을 맺었다. 또한 한(J.M. Hahn, 1758-1819)으로부터 기인한 한파 공동체들도 천년왕국설의 영향을 받았다. 불름하르트(J.Chr. Blumhardt, 1805-1880)에 의해 바트 볼(Bad Ball)은 1852년부터 슈바벤 지방 부흥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뷰르템베르크의 탁월한 부흥설교가는 호프아커(L. Hofacker, 1798-1828)이었다.
- 니더라인의 부흥운동은 이 지역의 개혁교회 경건주의와 연관을 맺고있다. 지거란트(Siegerland)의 초기 부흥운동에서 융 슈틸링(H. Jung-Stilling, 1740-1817)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후에 부페탈에서 부흥설교가들이 활동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콜브뤼게(H. F. Kohlbr gge, 1802-1875)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니더라인에서는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산업과 밀접히 관련되었다. 심각한 사회적인 곤경과 은둔적인 종교적 경건 사이의 갈등이 여기에서는 특별히 많았다.
- 브레멘에서는 멘케(Gottfried Menke, 1768-1831)가 경건한 설교들로 영향을 미쳤다. 이 설교들에서 그는 세속의 정치사와 구속사를 직접 비교하였다. 그는 1789년을 악마의 권세들로부터 승리하는 해로 여겼다.
- 니더작센 지역의 부흥운동에서 중요한 인물들은 페트리(L.A. Petri, 1803-1873) 그리고 '시와 하프'(Psalter und Harfe, 1833)라는 찬송시집을 낸 찬송가 작사자인 슈피타(C.J.Ph. Spitta, 1801-1859)가 있다. 함부르크에서는 함스(L.Harms, 1808-1865)가 활동하였다.
- 헤센에서는 특별히 엄격한 루터파인 필마르(A.F.Chr. Vilmar, 1800-1868)가 있다. 그는 부흥운동의 개인주의를 멀리하였다.
- 부흥운동으로부터 성서공회와 선교회가 나타났다.
뷰르템베르크 성서공회, 1804;
프로이센 대 성서공회, 1814;
바젤 선교회, 1815;
베를린 선교회, 1824;
라인 선교회, 1828;
북독일 선교회와 라이프치히 선교회, 1836;
헤르만부르크 선교회, 1849;
노이엔데텔스아우 선교회, 1853.
7. 유럽과 북미의 부흥운동
 1) 영국
 
- 독일보다 약 100년 전 영국과 북미에서 부흥운동의 수많은 물결이 일어났다. 영국의 계몽주의가 교회와 국민 사이에 야기 시켰던 위기는 영국에서 처음 종교적인 각성을 일으키게 되었다. 영국의 이신론은 단지 보편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만을 지켰고, 바로 이것은 종교적인 공백과 무관심을 가져왔다. 성경에 기초한 개인의 삶의 모습은 심하게 동요되었다.
- 국가 교회 안에 경건의 실천을 요청하는 종교적인 모임들("religious societies")이 형성되었다. 개인의 신앙은 칼빈주의적이고 청교도적인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입증되어야만 했다.
- 감리교 운동에서 영국에서의 부흥운동은 최고점에 도달했다. 감리교 운동은 교회사에서 최종적인 위대한 교회 형성(E. Beyreuther)으로 불러지게 되었다. 감리교의 창시자는 성공회의 신부인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이다. 그 외에 중요한 인물로는 화이트필드(G. Whitefield, 1714-1770)와 존 웨슬리의 동생인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이다.
- 웨슬리 형제는 1729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학생 클럽을 조직하였다. 엄격한 규칙을 지키는 거룩한 생활로 "규칙쟁이"(Methodisten)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 헤른후트 형제교회의 말씀 선포에 대한 터득과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통한 감명 아래 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 저녁 8시 45분에 회심하였다. 이 회심은 그로 하여금 그의 동생과 화이트필드와 함께 전 영국,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를 순회하게 한 그의 독창적인 부흥 설교들의 발단이 되었다. 그는 노천에서 수 천명에게 설교하였다. 원시 기독교적인 순회 사도직의 갱신.
- 감리교적인 말씀 선포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을 촉구했으며 회개의 투쟁과 은혜 체험 아래 회심을 목적으로 삼아 확고한 공동체 형식을 이끌어 냈다.
- 감리교 운동의 특징은 웨슬리에 의해 만들어진 평신도 설교자직에 있다. 이것으로부터 자극은 19세기에 노동조합운동과 노동당에 원동력을 주었다. 그리하여 영국에서는 유럽 대륙 보다는 더 활발한 기독교적인 경향을 지닌 사회정책이 있게 되었다.
- 웨슬리가 죽은 다음 1795년 감리교는 영국 성공회로부터 분리하였다. 물론 이것은 엄격한 교파구별의 필요를 느끼지 않은 에큐메니칼 정신을 지녔다.
- 19세기 초반에 영국 성공회는 새로운 부흥운동인 "저 교회 운동"(Low-Church- Bewegung)을 경험하였다. 노예제도 폐지에 대한 자극은 이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일어났다. 고 교회적인 성공회주의는 비국교 교회를 간섭하였다. 1804년 비국교도들과 영국성공회 교도들에 의해 "영국과 해외 성서공회"가 설립되었다.
- 대륙의 교파주의와 병행하여 옥스퍼드 운동이 일어났다. 주요인물: 뉴만(J.H. Newman, 1801-1890). 예배의식과 성례전, 제도와 교회의 직무에 대한 강조. 성직 계승권의 갱신. 이 고 교회적인 경향은 오늘까지 영국 성공회의 신학과 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 북 아메리카
- 영국의 부흥운동과 거의 동시대에 북미의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중심인물: 에드워즈(J. Edwards, 1703-1758). 칼빈주의적이고 청교도적인 기초에 근거하여 그는 복음 전도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설교의 주제: 개인의 회심에 대한 요청. 특징: 종말론적 정서를 강하게 띤 선교에 대한 열정. 미국에서 복음 전도에 대한 요청과 전 세계를 향한 이방인 선교.
-  에드워즈의 제자는 홉킨스(S. Hopkins, 1721-1803)이다. 선교 활동에 열성적인 그는 노예해방을 위해 정열적으로 투쟁하였다.
- 급속하게 퍼진 감리교회는 동부 해안으로부터 서부로 이어지는 주민들의 대 이동을 말을 탄 순회 설교자들의 도움을 받아 인도하였고 수많은 이주민들에게 성경에 확고히 선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했다.
- 19세기 초반에 소위 말하는 천막집회들이라고 불리는 부흥운동의 다양한 조류가 있었다. 동부 해안에 있는 대학들에서 시작하여 부흥은 계속 퍼져 나갔다. 부흥운동은 미국의 개신교를 자유교회들로 오늘날까지 지탱하게 했다: 자각적인 선교열,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협력과 종교와 사회의 다양한 접촉은 오늘날까지 특징을 이루고 있다.
 3) 스코틀랜드
- 스코틀랜드의 부흥운동은 촬머스(Chalmers, 1780-1847)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의 부흥설교는 1845년 에딘버러에서 사회적인 빈곤에 대한 책임있는 구제를 호소했다. 그는 고대교회의 집사직을 갱신했다.
- 1843년 스코트랜드에서 국가교회와의 분열이 있었으며 "스코틀랜드 자유교회"가 설립되었다.
 4) 서부유럽의 프로테스탄티즘에 있어서 부흥운동
- 스위스에서 제네바의 부흥운동은 국가와 교회에 있는 이성주의와 투쟁했던 젊은 신학도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독일, 영국 그리고 스코틀랜드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본래의 칼빈주의로 되돌아가기를 원했다. 1831년부터 제네바 교회와 프랑스에서 복음 전도 활동이 있었다.
- 바트란드(Waadtland)에서 비네(Alexandre Vinet, 1797-1847)는 중심적인 신학자이다. 그는 국가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교회를 그의 양심과 복음과 일치시켰다.
- 바젤에서 독일 기독교연합에 의해 중요한 자극들이 남부 독일로 전해졌다. 1815년 바젤 선교회가 창립되었다.
-프랑스 부흥운동에서 모노드(Adolphe Monod, 1802-1856)는 중요한 설교자였다. 홀랜드에서 빌더다이크(Bilderdijk, 1759-1831)는 넓게 교육을 받은 부흥운동의 지도자이다.
- 또한 루터교적인 스칸디나비아에는 다양한 부흥운동이 있었다. 덴마크 교회에는 특히 그룬트비히(N.F.S. Grundtvig, 1783-1872)가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의 목적은 사도신경에 기초한 순수한 국민교회였다. 덴마크 시민대학의 창설자. 노르웨이에서는 하우게(Hans Nielsen Hauge, 1771-1824)가 중요한 부흥설교가 이었다.  노르웨이에서 부흥운동은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교회를 중심으로 경건한 사람들의 결합이다.
스웨덴에서 부흥운동은 헤른후트와 스코틀랜드의 영향을 받았다. 경건문학의 광범위한 유포:  성화의 강력한 강조에 비해 루터의 칭의론이 두드러졌다. 1815년 스웨덴 성서공회, 1835년 선교회가 창설되었다.
8. 제1차 대전 이후의 신학사
 1) 개신교 신학의 새로운 모색
- 리츨의 신학, 특히 그의 제자 빌헬름 헤르만(Wilhelm Herrmann)의 신학은 공유의 기초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과 이후에  리츨의 신학으로부터 개신교 신학의 모든 조류들이 함께 할 수 있었다. 이 신학의 중심 개념은 "윤리"와 "문화"였다. 기독교 신앙은  자유로운 문화개신교주의(Kulturprotestantismus)의 세계에서 아주 분명하게 공동체 생활에서처럼 개인 생활에서 윤리의 요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힘이었다.
- 1917년 처음으로 오토(Rudolf Otto, 1869-1937)의 작품인 '거룩한 것(Das Heilige)'이 나왔다. 1930년까지 이 책은 22판이 나왔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하나님 이해에 대한 서곡이다. 이미 이것으로부터 인간이 "놀람과 떨림의 신비"(myterium tremendum et fascinosum) 안에서 만나는 "절대 타자(ganz Andere)"로서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성적이고, 윤리적 종교적인 기독교 이해에 대한 신학의 시대정신과의 거리가 완전히 확실하게 되었다.
- 1917년 베를린대학교의 교회사 교수인 홀(Karl Holl, 1866-1926)은 루터의 95개 논제 400주년을 기념하는 '루터는 종교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는가?(Was verstand Luther unter Religion?)' 라는 유명한 강연을 했다. 여기에서 이 새로운 루터상이 확실하게 제시되었다. 이것은 꼼꼼한 역사적인 작업과 체계적인 연구로부터 특히 초기 루터의 신학, 그의 십자가 신학과 칭의신학을 명쾌하게 제시하였다. 홀은 영웅과 민족 해방투사의 진보적인 루터 모습을 뒤에 남겨 두었다. 그의 연구와 더불어 소위 말하는 루터 르네상스 시대가 시작되었다. 루터 르네상스는 다가오는 시대의 변증법적 신학에 또한 큰 의미를 가졌다. 루터의 신앙의 중심은 "양심의 종교"이며 이것은 당위의 인식을 근거한다는 홀의 논제는 전체 종교개혁적인 신학의 이해에 있어서 의미 심장한 새로운 시작에 확실히 시대 정신의 영향을 나타내고 있다.
-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변증법적 신학은 성과 있는 신학적인 새로운 의식을 이끌었다. 이 신학은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발전 과정과 활동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바르트가 1911년 아르가우(Aargau)州에 있는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교회에서 목회자로 일했을 때 먼저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시대의 新改新敎-자유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사회적인 문제와의 대치, 종교사회학으로의 방향전환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그의 신학선생의 전쟁 이데올로기에 대한 거부와 종교사회주의의 거부를 통하여 바르트를 흔들리게 했다.  친구인 투르나이젠(E. Thurneysen, 1888-1974)과 함께 바르트는 자유신학을 버리고 오직 성서에서 자신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았다. 자신의 설교 사명을 위한 심도있는 성서연구를 통해 1919년 로마서 주석이 나왔다(1919년 제1판). 
2. 변증법적 신학의 신학적 출발
- 변증법적 신학의 출발은 특히 바르트의 강연에서 확실하게 나타나 있다: 1919년 9월 25일탐바흐(Tambach)에서 행한 강연 "사회 안에 있는 기독교인 (Der Christ in der Gesellschaft)". 여기에서 중요한 방향전환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이다." 이것은 기독교인과 기독교적인 문화재들로부터의 전향과 그리스도로의 방향전환, 인간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나타나셨던 하나님께로 전향을 의미했으며 이로써 소위 말하는 기독교적인 세계에 대해 극단적이고 생소하게 대립하였다. 소위 말하는 모든 기독교적인 운동들을 통과해 "위에서부터 수직적인" 운동이 지나가며, "이 운동의 힘과 의미는 죽은 사람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드러나게 된다.
- 이 운동은 모든 현존하는 것에 대한 전면적 부정, 소위 말하는 기독교-사회적인, 기독교-민족적인, 기독교-윤리적인 것과 같은 "이음표 기독교"(Bindestrich-Christentum)에 대한 종말을 뜻했다. 인간의 죄는 인간이 종교의 방식들, 예를 들면 기독교적인 윤리의 종교와 같은 것으로 "위에서부터 수직적인" 운동에 저항하는데 있다.
- 하나님의 부정은 그러나 동시에 긍정이다. 초기의 루터와 비슷하게 바르트는 하나님이 파괴하시면서 재건하시고, 확신을 박탈하시면서 새로운 확신을 선물로 주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 변증법적 사고구조는 변증법적 신학에 이름을 붙였다: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하나님을 의미하는 부정은 긍정적이다. 한편 하나님 위에 세워지지 않은 모든 긍정들은 부정적이다." 기독교적인 문화 작업에 협력하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부정에 대해 기독교적인 책임에 대한 긍정이 대립하였다. 바르트는 그리하여 사회민주주의와의 협력을 요청할 수 있었다.
- 그러나 이성과 계시, 문화와 기독교 사이의 전통적인 조화가 이처럼 근원적으로 깨뜨려진다면 어떻게 하나님에 관한 이러한 언급이 전적으로 가능하겠는가? 바르트는 이 문제에 대하여 1920년 4월 17일 아라우(Aarau)에서 행한 강연에서 해답을 주었다: "성서적인 질문, 이해 그리고 전망". 바르트는 성서에서 "놀랄 만한 것"을 발견했다: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들어보지 못한 감동에 대한 증언. 계몽주의이래 시작된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으로서의 성서와 역사적 문서 사이의 갈등을 바르트는 성서의 증인들의 감동으로 답하였다. 이와 함께 성서는 역사적 비평에 열려 있었다. 물론 이 비평은 감동의 기초에 도달할 수 있을 수 없었다. 바르트는 성서를 근원적으로 종교의 세계와 대치 시킨다; 무신론의 세계가 아닌 종교적인 세계가 먼저 성서에 의해 도전되었다.
- 1922년 완전히 개정된 로마서 주석 제2판이 나왔다. 그는 이제까지의 새로운 출발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 주석서로부터 20년대이래 놀라운 반응이 나왔다. 특히 키엘케가르드(S. Kierkegaard, 1813-1855)의 사상, 니체(F. Nietsches)의 친구인 오버벡(F. Overbeck)에 의한 시민적인 기독교에 대한 비판 그리고 러시아의 작가인 도스토옙스키(Dostojewskij)는 이 신학적인 새로운 출발에 함께 관여하게 되었다.
- 바르트와 투르나이젠 외에 변증법적 신학의 그룹에 속한 신학자들: 루터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로 유사한 이해에 도달한 고가르텐(F. Gogarten, 1887-1969); 슐라이에르마허에게 신학의 불행에 책임이 있다고 했던 브루너(E. Brunner, 1889-1966): 불트만(R. Bultmann, 1884-1976)은 1924년 '신화와 말씀'이라는 저서를 냈다. 그는 신약성서에 대한 역사적 연구로부터 그리고 종교개혁적인 신학, 특히 루터 신학의 재발견을 통하여 변증법적 신학을 발견했다.
-  "시간들의 사이에서"(Zwischen den Zeiten)라는 제목을 단 고가르텐의 논문이 '기독교 세계'(Christliche Welt)에 실렸다. 새로운 신학에 대한 이 비평적인 위치의 결정은 1923년부터 1933년까지 널리 영향을 끼치며 유포된 학술지의 이름이 되었다. 이 학술지의 편집자: 메르츠(Georg Merz, 1892-1959).
- 변증법적 신학자들의 그룹은 1933년 이미 오랫동안 감지할 수 있었던 차이점들로 분열되었다: 독일 기독교에 대한 고가르텐의 애착 때문에 바르트와 거리가 멀어졌다. 1934년 바르트와 브루너 사이에 신학에 있어서 인간론적인 "접촉점"에 대한 논쟁으로 결별하였다. 바르트와 불트만 사이에 "비신화화"(Entmythologisierung)에 대한 프로그램 때문에 문제가 되었고 불트만의 하이덱거(M. Heidegger) 철학의 개념적인 차용으로 20세기의 두 거장 신학자의 의견 충돌이 있었다.
3. 바이마르 공화국의 교회들
- 왕정의 종말과 공화정이 선언된 1918년 11월 9일은 또한 교회들에 있어서 심오한 역사적 분기점을 뜻했다. 교회들은 이제 막대한 정치적, 정신적 그리고 법적-조직적인 도전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와는 달리 독일의 개신교회는 1918년 11월 9일로 수 백년간의 법 구조인, 통치자의 교회지배를 떨쳐버렸다.
- 루터교회들에 대한 중요한 문제는 다음과 같다: 국가 교회적인 구조가 사라지고 난 다음 어떻게 독자적인 교회지배를 만들어야 하는가? 새로운 시작은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개신교와 가톨릭 국민들의 국가와 황제에 충성적인 성향;
VII. 에큐메니칼 운동
1. 19세기 에큐메니칼 선교대회
   인도, 중국, 일본 그리고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들은 선교협력을 요구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것은 정보와 의견의 공유이다. 이러한 필요 아래 선교대회들이 네 가지 분야에서 개최되었다. 첫째, 지역적인 선교대회이다. 선교사들이 사역하고 있는 지역들에서 선교사들에 의해 선교대회들이 개최되었는데 여기에서 선교협력의 이론과 실제 그리고 조직의 문제들이 직접 탐구되었다. 이 대회는 1900년 개최된 마드라스 대회가 경계표가 되었다. 둘째, 복음주의 연맹의 대회들이다. 이것은 1854년 뉴욕에서 시작된 미국대회 그리고 1900년 뉴욕에서의 미국 대회 절정, 1910년 에딘버러 대회를 촉구할 수 있었던 일련의 사례들을 내포하고 있다. 셋째는 대륙선교대회에 의하여 설립되었으며 1866년 이래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계기독학생연맹의 형성이라 할 수 있다. 학생운동은 1910년 에딘버러 대회에서 시작되었으며 이것은 실제적으로 학생을 대표하는 회의이다. 이것에 의하여 국제선교협의회(I.M.C.)와 에큐메니칼 운동의 진로가 설정되었다.
  이러한 네 가지 선교대회의 절정은 1910년 6월 14일에서 23일까지 영국 에딘버러에서 열렸던 세계선교대회(W.M.C.)이다. 이 대회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세계적이고 국가적인 기구들이 조직되었다. 이 대회의 목표는 비기독교 세계를 연구하는데 있었으며 효과적인 복음화를 이루기 위한 상호협력적인 전략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에 나타난 에딘버러의 독특성은
1) 아시아인들과 아시아 세계로부터 온 100여명의 특파원이 참가하였다. 이들이 가지고 온 자료들은 토의를 위한 자료로 제공되어졌고 상호협력을 고무하고 보편적인 전략 개발에 공헌하게 되었다.
2) 각국의 선교부들과 협의회에서 파송한 1200여명의 공식 대표들이 모였으며 재정적인 부담금은 참가자들이 맡았다.
3) 비기독교세계에 대한 이해의 범위를 제한하였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부를 배제시켰다.
4) 자체에 부여된 신학적인 제한성들을 신앙의 확신 안에서 설정하였다.
5) 신앙과 질서운동에 알 맞는 신학적인 논쟁을 배제하였다.
6) 앵글로-카톨릭 선교부, 퀘이커 교도들, 스칸디나비아와 독일의 루터란 선교부들, 중국의 내륙 선교부가 참가한 총괄적인 대회였다.
7) 17개 나라의 아시아 제국을 제외한 선교 기관들의 대표자들은 서구인들이었다. 의장인 Mott는 아시아, 태평양 연안, 아프리카에서 온 대표들이 한정적인 사실에 대하여 분명히 언잖은 태도를 취하였다.
8) 서구에서 모였던 대회였다.
9) 비상한 힘을 생성하였다. 영적으로 그것은 기도의 힘에 뿌리를 가지는 것이었다. 기도는 대회전과 기간 중에 전 대륙에서 행해졌다. 대회 기간 중 매일 아침마다 기도로 시작하였고 정오에는 30분 동안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회를 가졌다.
   에딘버러 대회의 성과로는 선교부에 관심을 갱신하는 것이었으며 교회의 독특한 비젼을 얻게 되었고 세계 선교의 실재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속위원회를 창안하였다.
   1)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필리핀의 선교사 주교인 브렌트(Charles H. Brent)의 신앙과 직제 운동은 1910년 에딘버러에 기인한 것이다. 브랜트는 신앙과 직제의 문제들이 교회일치를 위한 프로그램에서 배제될 수 없는 중요한 사항들임을 직시하였다. 에딘버러 대회가 끝나기 전 브랜트는 그의 뜻을 친구들에게 전했는데, 신앙과 직제의 문제를 다루는 세계대회를 준비하자는 것이었다. 그러한 모임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까지 가질 수 없었으며 1927년에야 로잔에서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이 모임은 에딘버러에서 제기된 신앙과 직제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두 번째 세계대회였다. 이 운동은 일치의식의 증가를 겨냥하였으며 대표자들은 성공회, 개신교, 로마 카톨릭, 희랍 정교회가 함께 그들의 공통적인 기독교 일치를 주장할 것을 이구동성으로 희망하였다. 희랍정교회는 1919년에, 로마 카톨릭은 1965년 바티칸 II 대회의 마지막에 일치를 위한 모임에 가담할 것을 다루었다. 1948년 암스텔담 대회에서 W.C.C.가 형성되었을 때, 에딘버러에서 구성된 상임위원회는 W.C.C.의 신앙과 직제를 위한 위원회가 되었다. 이 위원회는 비회원 교회들에 소속되어 있는 신학자들과 유대관계를 갖는 특수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여기에는 9명의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이 위원으로 소속되어 있다. 이들은 1968년 W.C.C. 웁살라 대회에서 위원들로 지명되었다.
     2) 생활과 사업(life and work)
   신앙과 직제와 더불어 생활과 사업은 에큐메니칼 조직의 영향력을 대변해주고 있는데 이것은 단지 실제적인 행동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생활과 사업의 저명한 지도자인 스웨덴의 죄더블롬 주교(Archbishop Nathan S derblom)는 신앙 안에서 일치를 위한 길은 교회들의 연합적인 활동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생활과 사업을 위한 중요한 국제대회는 1925년에 열린 스톡홀름 대회, 1937년 옥스포드 대회이다.
   생활과 사업 운동은 신앙과 직제는 세계대회에서 각기 다른 시대에 출항하였다. 신앙과 직제는 국제선교대회(I.M.C.)와 생활과 사업이 시작하고 난 후 13년 뒤에 시작되었다.
2. 1948년 이후의 에큐메니칼 운동
   1937년 옥스포드에서 제2차 생활과 사업 대회와 에딘버러에서 제2차 신앙과 직제 대회가 열렸다. 여기에서 이 두 개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협력과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창설이 결정되었다. 1948년 암스텔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가 설립되었다. 이 대회주제: "세상의 혼란과 하나님의 구원계획". 두 개의 에큐메니칼 운동들이 이제 통합되었다. 1961년 뉴델리에서 열린 제3차 세계대회에 정교회들이 세계교회협의회에 가입하였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20세기에 수많은 대회와 더불어 교파들의 접근에 근본적인 자극들을 가져다주었다. 20세기의 교회사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그 이전의 세기들과 비교해볼 때 교파들 간에 근본적으로 변화된 분위기를 만들었다


출처 : coram Deo | 글쓴이 : Coram Deo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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