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진촌시(朱陳村詩)

                             백낙천(白樂天)

 

고을이 멀어 관官의 일이 적고

사는 곳이 깊숙해 풍속이 순후하네

재물이 있어도 장사를 하지 않고

장정이 있어도 군대에 가지 않네

집집마다 농사일을 하면서

머리가 희도록 밖으로 나가지 않네

살아서는 주진촌 사람이요

죽어서도 주진촌 흙이 되네

밭 가운데 있는 노인과 어린이들

서로 쳐다보며 어찌 그리 즐거운가

한 마을에 오직 두 성씨가 살아

대대로 서로 혼안을 한다네

친척은 서로서로 모여서 살고

노인과 젊은이가 함게 노닌다네

황계와 백주白週로

열흘이 멀다 하고 모여 즐기네

살아서는 멀리 이별하는 일 없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도 이웃에서 고르네

죽어서도 먼 곳에 장사하지 않아

옹기종기 무덤들이 마을을 둘렀네

이미 삶과 죽음이 편안하고

몸도 마음도 괴롭히지 않네

이런 까닭에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

때로는 현손을 보는 사람도 있다네

 

 

 

 

▶ 사돈을 부르는 말
 
우리 가정언어 말의 예절에서 사돈 이라는 말의 뜻을 살펴보면, 걸림에서는 한자(漢字)의 자해(字解)를 해보면 [査:사실할사, 캐물을사, 땟목사], [頓:조아릴돈, 묵을돈]등 아무 뜻도 찾아볼 수 없다.
 
여기에는 두 가지 사돈에 대한 고사(故事)가 전해진다.
 
첫째는 중국고사를 살펴보면 당나라 중원 땅에 주(朱)씨 성을 가진 사람들과 진(陳)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한마을에 수백호가 함께 살고 있었는데 공동묘지도 함께 사용하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해도 서로 다툼 없이 살아가는 우애(友愛)가 대단한 군자(君子)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을 일컬어 주진촌(朱陳村)이라 하였다. 이들 중 주씨성을 가진 아들과 진씨성을 가진 딸이 한마을에서 혼인(婚姻)을 하게 되었는데 주씨 성을 가진 아들의 이름이 사(査)이고, 진씨 성을 가진 딸의 이름이 돈(頓)이였다. 그래서 사돈(査頓)이란 말이 생겨났다고 하는 고사이다. 
 
당나라 천재시인 백거이(호 낙천) 선생이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듣고 주진촌을 방문하여 보니 과연 현인군자(賢人君子)들이 사는 곳이라 감탄하여 장문(長文)의 5언 고시형 시(詩) 주진촌시를 지어 오늘까지 전하여지고 있다.
 
둘째이야기는 우리나라 고사이다.
 
고려 예종(16代)때의 인물 윤관은 북쪽의 여진을 정벌하고 9성(城)의 역(役)을 이룬 명장이요, 진중에서도 경서(經書)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호현낙선(好賢樂善)의 학자이다. 9성의 역은 1107년 도원수 윤관과 부원수 오연총이 함께 여진을 정벌 후 경략(經略)의 거점인 9개의 요지에 성을 쌓고 고려족을 옮겨와 살게 함으로써 여진의 난동을 잠잠하게 한 일이다.
 
그 일을 마치고 개경에 개선하고 난 후에도 윤관과 오연총은 계속 우의를 나누었다. 둘은 서로의 자녀를 혼인시키고 작은 냇물을 사이에 두고 살면서 종종 만나서 술을 마시며 지난날의 회포를 풀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그날도 다른 때처럼 술을 들고 집을 나섰다. 그러나 마침 내린 소나기로 냇물이 불어 도저히 건널 수가 없었다. 멀리서 손짓만 하다가 결국 두 사람은 냇가 이편저편의 나무등걸(査)에 앉았다.
 
그리고는 이쪽에서 술잔을 들고 “한잔 드시오.”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이면(頓首) 냇가 저편에서 “한잔 드시오.”하고 머리를 숙여 답례하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럭저럭 가져간 술이 다 비워졌다. 그새 밤도 깊어졌고 서로의 정도 더욱 깊어졌다.
 
이 운치 있는 일이 소문이 나자 이것을 당시 풍류객들의 좋은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이 일에 빗대어 서로의 자녀를 혼인시키는 것을 “우리서로 사(査)돈(頓)해 봅시다.”라고 하였다 한다. 곧 이것이 전해 내려와 사돈이라 하였다 한다.
 
위와 같이 사돈이란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의 본생 아버지끼리 아내끼리 사돈이라 부른다. 

 

  고대 중국의 교차사촌혼과 매개호칭.

 

 

 

  고대 중국에 누이교환을 수반하는 양측교차사촌혼 체계(un système matrimonial de cousin-croisé bilatéral)가 존재했음을 시사하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 이러한 증거들을 간단하게 열거해 보자.

 

  첫째『爾雅』에 나타나는 친족용어들과 이 용어들이 보여주는 친족체계 그리고 혈족과 인척들을 4개의 계열로 만드는 것 등이다.

  둘째 고대 중국의 농민 생활에 관련된 여러 가지 사실들이다. 이 사실들은 마르셀 그라네가『고대 중국의 축제와 노래』(Fêtes et chansons anciennes de la Chine)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고대 중국에서 축제의 본질적 특성은 혼인이라는 교환을 가능케하는 성적 향연에 있다......혼인결연은 연합 관계에 있는 집단들간에 상호보장 체계의 기반을 형성한다."(Les fêtes anciennes ont pour principal caractère de consister en une orgie sexuelle, qui rend possibles les échanges matrimoniaux......Les alliances matrimoniales forment l'assise du système de garanties entre groupes fédérés.) (Granet 1919: 239)

 

  래드클리프-브라운이 山西省과 河南省에서 그 잔존을 볼 수 있다고 한 친족체계가 바로 이러한 유형의 친족체계이다. 이 체계는 또한 첸과 스리옥이 입증한 체계이기도 하다. 첸과 스리옥은 고대 중국의 교차사촌혼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면서 江蘇省의 한 마을을 노래한 白居易(서기 772년-846년)의 시를 인용하고 있다. 이 마을은 마을 이름이 혼인으로 맺어진 두 씨족의 명칭 朱와 陳으로 되어 있다.

 

                「徐州古豊縣

                   有村曰朱陳

                   村有兩姓

                   世世爲婚姻」        朱陳村詩-白居易.

  

            서주의 고풍현에 주진이라는 마을이 있네.

            이 마을에는 두 성밖에 없고, 그들은 대대로 서로 혼인했네.

           (Chen et Shryock 1932: 629) (Granet 1939: 179)

 

  白居易의 이 시는 양측교차사촌혼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라네, 첸과 스리옥, 그리고 펭한이와 뜻을 같이 한다. 특히 편년은 펭한이를 따랐다. 그러나 슈랑광은 주저하고 있다. 우리들이 함께 동의하는 것은 고대 중국에서 (혹은 중국의 어떤 지역에서) 양측교차사촌혼이 보편적인 관습으로 행해졌고, 또한 적어도 기원전 1천년에 이르기까지 행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드러난 형태이든 암묵적인 형태이든 각 공동체가 2개의 외혼적 집단으로 나누어졌음을 의미하거나 또는 지역공동체들이 혼인을 목적으로 둘씩 짝지워졌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라네가 가정했던 4부류체계와는 다른 것이다. 그라네가 가정했던 4부류체계는 몇몇 사실들 (경우에 따라서 있을 수 있는 이중혈통, 그리고 昭穆배열의 몇몇 특징들) 로서 막연하게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더구나 그 가설은 논리적 필연에 의해서도, 불가피한 역사적 단계에 의해서도, 그리고 지리적 영역의 일반적 특질에 의해서도 절실히 요구되는 가설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 뿐만 아니라 이전에 살펴 본 사항들과 잘 맞아들어가지 않는 또 다른 사실들이 있다. 그라네가 경사(obliquité) 현상이라는 용어로서 일괄한 문제이다. 즉 중국의 제후들의 계층에서 두 세대의 여자들을 한꺼번에 배우자로 맞아들이는 혼인 관습과 연속하는 두 세대의 혈족이나 인척을 하나로 동일시하는 친족용어들의 등가성을 말한다. 특히 인척들을 婚과 姻으로 구분하는 것과 몇몇 직접호칭들이 남자들 사이에서만 혹은 여자들 사이에서만 사용된다는 특수성의 문제가 그러하다. 직접호칭의 특수성의 문제는 집단이 비대칭적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馮漢驥는 중국 친족용어들의 경사적 특징과 비대칭적 특징에 대해 특별히 주목하면서 이 친족용어들을 분석하고 있다. (Feng 1936)

 

 

舅(chiu)

 

 

姨(yi)

 

 

伯(po)

 

 

叔(shu)

 

 

姑(ku)  

 

외숙,

처남.

 

처제·처형.

이모,

 

백부,

시숙.

 

숙부,

시동생.

 

고모,

시누이.

 

  이 친족용어들의 의미는 원래는 이중적이 아니라 독자적이었고, 위와 같이 동화 현상을 가지게 된 연대는 대략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舅의 의미가 처남으로 확대된 것은 서기 10세기 경이다. 그리고 현대에는 여기에 한정사가 덧붙여져서 외숙과 처남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구별된다. 즉 외숙은 舅父이고, 처남은 舅兄 혹은 舅弟이다. 말하자면 아버지 세대의 舅와 형제 세대의 舅를 구별하는 것이다. (Feng, H.Y. "Teknonymy as a Formative Factor in the Chinese Kinship System." American Anthropologist, vol.XXXVIII, 1936, p.61)

 

  舅가 외숙과 처남이라는 이중성을 띠는 동화 현상은 만약 필요하다면 처남의 딸과의 혼인의 결과로서 해석될 수 있다. 앞 장에서 본 것처럼 친족용어 舅는 외숙 · 장인을 동일시한다. 여기에 외숙과 처남이라는 동화 현상이 부가되는 것은 처남 · 장인이라는 동일시가 부가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외숙과 처남과 장인은 여자를 주는 자들이므로 같은 친족용어로 지칭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도표로는 아래와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처남과 장인의 동일시. 처남의 딸과의 혼인.

 

   그러나 馮漢驥는 친족용어 舅가 처남에 적용되기 적어도 1천년 전에 舅는 "장인"이라는 의미를 상실한다고 한다. 馮漢驥는 이 점을 단호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馮漢驥는 伯과 叔의 의미가 시숙과 시동생으로 확대되는 것은 지금껏 알려진 모든 관행에 비추어 보아도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에서는 馮漢驥에 동의할 수 없다. 외숙의 딸과의 혼인을 수반하는 모계체계는 아버지의 형제들과 남편들의 형제들로 이루어지는 친족집단을 형성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숙부들과 시숙·시동생들은 나의 종족(lignée)에서 여성을 받는 남자들이다. 姑는 보통 伯과 叔의 누이들을 가리키고, 의미가 확대되어 시누이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상대방 종족의 여성들이다.

 

姑와 伯과 叔은 우리에게서 여자를 받는 집단이다.

 

   費孝通(Fei Hsiao-Tung)은 바로 이 체계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를 보여주고 있다. 費孝通은 吳江縣의 체계에 대해서 훌륭한 연구를 보여주고 있는데, 費孝通 자신이 바로 吳江縣 출신이다. 吳江縣(Wukiang)에서는 우리 씨족의 여자들과 혼인한 외부 집단의 남자들을 가리키는 친족용어가 극히 빈약하다. 이런 남자들을 지칭하려면 서술적 친족용어(des termes descriptifs)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費孝通은 이 현상을 고대에 양분조직(organisation dualiste)이 존재했던 증거라고 해석한다. (Fei, H.T. The Problem of the Chinese Relationship System. Monumenta Serica. vol.Ⅱ. p.33)

 

   양분조직에서 우리 집단의 여자들과 혼인한 외부 집단의 남자들은 (모계 집단일 경우) 아버지 세대에서 , 부, 백부, 숙부 등이고, 나의 세대에서 외사촌 혹은 고종사촌 등이고, 아들 세대에서 아들 등이다. 그러므로 우리 집단의 여자들과 혼인한 다른 집단의 남자들을 가리키는데 부, 외사촌, 아들 등의 혈족을 가리키는 친족용어를 사용하므로 이모부, 처남 등과 같은 인척만을 가리키는 친족용어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우리 씨족의 여자들과 혼인한 외부 집단의 남자들을 가리키는 친족용어가 극히 빈약하다는 사실은 과거 양분조직의 흔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吳江縣의 경우는 고대 중국의 종족체계(un ancien système de lignée)를 생각게 한다. 이와 같은 경우가 上海의 친족체계인데, 이 체계 역시 費孝通이 연구한 것이다. 上海의 친족체계는 혈족과 인척을 구별한다. 나의 씨족(clan)의 남자와 여자들, 나의 씨족으로 시집온 여자들, 나의 씨족의 여자들과 혼인한 남자들, 나의 어머니의 씨족, 나의 아내의 씨족(이 성원들을 가리키는데 독자적인 친족용어는 없고, 아내가 사용하는 용어를 남편도 같이 사용한다), 나의 남편의 씨족(같은 상황으로 독자적인 친족용어는 없고, 남편이 사용하는 용어를 아내도 같이 사용한다)을 구별하는 것이다. 이 경우 씨족들(clans)이 종족들(lignées)의 역할을 하고 있다. 費孝通이 기술하고 있는 체계의 주목할 만한 특징은 자기보다 세대가 아래인 성원들을 가리키는 친족용어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세대가 아래인 성원들을 지칭하는 데에는 개인의 이름만 사용된다. (Fei, H.T. The Problem of the Chinese Relationship System. Monumenta Serica. vol.Ⅱ. pp.125-148)

 

   伯 · 叔과 姑에 대한 해석과 동일한 해석을 舅, 甥, 姨에도 적용할 수 있다. 다만 내(ego)가 남성이고, 나(ego)를 모계적 관점에 놓을 때에만 이 해석이 가능하다. 이 점이 바로 어려움을 야기한다.

 

   伯의 의미가 시숙으로 확대되는 것은 서기 10세기이다. 그러므로 이 관행은 이러한 혼인 형태들과 연관지울 수 없다. 그러나 雲南省의 경우에는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점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지적하고 있지 않다. 姑의 의미가 시누이에 확대 적용되는 것은 대략 서기 4세기 이후이다.

 

   姨의 경우 이 친족용어는『爾雅』에서 처형·처제의 의미로 쓰이고 있고, 이모로 확대 적용되는 것은 기원전 550년 이후이다. 姨의 의미가 처형·처제에서 이모로 확대 적용되는 것은 亡父의 未亡人과 혼인하는 관습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馮漢驥는 이것은 중국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Feng 1936: 64)

 

   10세기나 6세기 등의 이러한 연대들은 어느 정도의 융통성을 가지고 참조해야 함은 물론이다. 왜냐하면 어떤 관행이 문헌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 관행이 이미 오래 전부터 행해져 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행을 가졌던 족속들의 식민이나 정복전쟁 등으로 인해서 이러한 관행들이 다른 새로운 지역으로 전파되어 나갔을 수도 있고, 또 그 지역의 일반적인 습속에 동화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舅(외숙→처남), 姨(처제·처형→이모), 伯(백부→시숙), 叔(숙부→시동생), 姑(고모→시누이)의 확대적용을 단 하나의 혼인 형태 또는 어떠한 명확한 친족체계로 환원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첸과 스리옥과 마찬가지로 費孝通도 이 친족용어들의 확대적용을 매개호칭(teknonymie)으로 해석할 것을 제안했다. 처남을 舅로, 시숙을 伯으로, 시동생을 叔으로 부르는 것은 그들의 자녀들이 사용하는 친족호칭을 적용함으로서 높임말로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18세기의 중국의 어떤 학자가 제안한 해석이다.

 

   "아버지의 처남은 아들의 舅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사용하는 호칭을 그대로 사용한다. 그래서 아버지도 그의 처남을 舅라고 부른다." (Feng 1936: 62)

 

   그러나 姨(처제·처형→이모)는 어떠할까? 姨의 경우는  아래 세대에서 위 세대로 확대적용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역매개호칭"(teknonymie à l'inverse)이다. 馮漢驥에 의하면 姨의 경우는 아들이 아버지의 호칭을 따라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한다. (Feng 1936: 65)

 

    馮漢驥는 1936년의 논문에서 舅, 姨, 伯, 叔, 姑의 확대적용을 논했고, 1937년의 논문에서 3가지의 사례를 더 첨가하고 있다.

 

 

숙모 심(女審)(shen)

 

 

公(kung)

 

 

婆(p'o)

 

숙모

동서(시동생의 아내)

 

할아버지

시아버지

 

할머니

시어머니

 

   심(女審)은 馮漢驥가 호격(vocatif)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숙모와 동서(시동생의 아내)를 가리킨다. 숙모를 가리키는 이 용어가 숙모보다 세대가 아래인 동서(시동생의 아내)도 가리키게 된 것은 宋代에 이르러서였다. 그리고 祖父를 가리키는 公은 확대적용되어 시아버지도 가리키고, 祖母를 가리키는 婆는 확대적용되어 시어머니도 가리킨다.

 

   馮漢驥는 심(女審)과 公과 婆의 확대적용을 매개호칭(teknonymie)으로 설명한다. 馮漢驥는 매개호칭(teknonymie)이 중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고, 또 아주 옛날(기원전 489년)부터 사용되어 왔으며, 따라서 위의 호격들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馮漢驥의 주장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馮漢驥는 매개호칭(teknonymie)의 개념을 지나치게 확대하고 있으며,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지적되어야 한다. 왜 매개호칭(teknonymie)을 사용하게 되었는지, 어떤 경우에 매개호칭(teknonymie)이 개입하는지, 그 자체가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자. 매개호칭(teknonymie)은 타일러(Tylor)에 의해 제안된 개념이다. 매개호칭(teknonymie)은 어떤 사람을 부를 때 그 사람의 이름 대신에 그 사람의 자손을 매개로 해서 "누구의 아버지", "누구의 어머니", "누구의 할아버지", "누구의 할머니", 등으로 부르는 관습을 말한다.

 

   로위(Lowie)는 매개호칭을 친족용어가 부족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해석한다. 즉 어떤 민족의 언어가 특정의 친척을 가리킴에 있어서 적당한 친족용어가 없을 때 매개호칭이 나타나고, 또는 일시적이든 그렇지 않든  예절 상의 이유로 그 친족용어를 사용할 수 없을 때 매개호칭이 나타난다.

 

   馮漢驥는 매개호칭(teknonymie)의 개념을 확대해서 사용한 최초의 인류학자도 아니고, 매개호칭을 확대해서 사용한다고 해서 큰 장애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매개호칭에는 분명한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예컨대 어떤 여성을 "영희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과 "엄마!"라고 부르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달리 말해서 그 여자의 아이의 이름을 매개로 그 여자를 부르는 것(de l'appeler par le nom de son enfant)과 그 여자의 아이가 그 여자를 부르는 것(de l'appeler par le nom que lui donne son enfant)은 분명히 다르다. 매개호칭(teknonymie)의 이 두 가지 형식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馮漢驥의 논문들은 두 번째 형식(그 여자의 아이가 그 여자를 부르는 것)만 다루고 있다. 그런데 馮漢驥가 중국에서 매개호칭(teknonymie)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은 첫 번째 형식(그 여자의 아이의 이름을 매개로 그 여자를 부르는 것)이다. 馮漢驥의 논문에서 그 예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陳乞은 그의 아내를 '常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Feng 1937: 202)

 

   매개호칭(teknonymie)의 두 번째 형식은 잠시 그대로 두고, 첫 번째 형식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왜냐하면 두 번째 형식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중국의 관습들을 설명하는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매개호칭의 첫 번째 형식은 우리 사회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 그리고 고모로 구성되어 있는 하나의 가구를 가정해 보자. 어머니는 고모를 부를 때 아이들이 부르는 호칭을 따라서 "고모"라고 부른다. 즉 올케는 시누이를 아이들이 부르는 호칭을 따라서 "고모"라고 부르게 된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세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 만약 그 집단이 아이들에게 높은 위세를 부여하는 집단이라면 어머니는 아이들이 사용하는 호칭을 따라함으로서 아이들에게 높은 위세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둘째, 첫 번째 해석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어머니가 아이들의 호칭을 따라함으로서 고모와 어머니 세대의 위세를 손상시키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어머니를 지칭할 때 "너희들의 어머니"라고 하거나 "너희 엄마"라고 하게 된다. 아이들이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아이들 앞에서 "너희 엄마"라고 지칭함으로서 어머니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아버지와 어머니가 고모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각 다른 용어체계에 준거하게 된다. 왜냐하면 고모는 아버지에게는 누이동생이지만 어머니에게는 시누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고모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아버지의 용어체계인 "누이동생"를 사용하거나 아니면 어머니의 용어체계인 "시누이"를 사용해야 하는데, 어느 체계를 사용해도 불편하고 어색하다. 그런데 아이들의 용어체계인 "고모"를 사용하면 불편함과 어색함을 피할 수 있다. 요컨대 "고모"라는 호칭은 그렇게 불리는 여성에게 있어서는 개인의 이름과 같은 역할을 하고, 그 호칭을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고모라는 특정의 친족관계를 함축하고 있지 않은 호칭인 것이다.

 

   결국 매개호칭(teknonymie)은 두 가지의 설명 원리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설명으로 위세, 곧 정서적 요인에 관계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세 번째의 설명으로 이것은 논리 상의 이유에 관계되는 것인데 모든 용어체계에 공통되는 호칭을 발견해야 할 필요성의 문제이다.

 

   매개호칭의 문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경우마다 적용되는 원리가 다르며, 같은 원리라도 그 원리가 의존하고 있는 양식이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매개호칭은 적용되는 원리와 양식이 고려되어야 한다.

 

   費考通(Fei Hsiao-Tung)에 의하면 江蘇省의 여성은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부를 때 남편이 사용하는 호칭을 사용한다. 그러다가 아이를 낳으면 아이가 사용하는 호칭을 사용한다. (compte rendu de Feng, The Chinese Kinship System. Man, vol.38, no.153)

 

   중국에서 호칭의 문제는 매개호칭(teknonymie)이 일반적으로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그리고 馮漢驥(Feng Han-Yi)가 사용하는 넓은 의미의 매개호칭(teknonymie)보다도 더 복잡하다. 이 점은 슈랑광(Francis Hsu)도 지적하고 있다. 말로 표현되는 친족용어는 글로 표현되는 친족용어와 늘 다르며, 말로 표현되는 친족용어는 무엇보다도 주어지는 구체적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외사촌에게 말을 걸 때는 "형"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외사촌을 지칭할 때는 친형과 구별되는 다른 용어를 사용한다." (F.L.K. Hsu, The Differential Function of Relationship Terms. American Anthropologist, vol.44, 1942, p.250)

 

   그러므로 주어지는 상황들에 각각 상응하는 여러 개의 용어 범주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Hsu 1942: 256.)

 

   馮漢驥가 한 것처럼 매개호칭(teknonymie)의 두 가지 형태를 동시에 도입하면 어려움은 더욱 심해진다. 예컨대 나는 처남을 舅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내가 나의 아들의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나는 이모를 姨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내가 나의 아버지의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서로 상반되는 이 두 가지 언어 행위가 공존 가능하려면 어떤 조건이어야 할까? 그리고 이 두 형태의 매개호칭은 성립 연대도 상당한 거리를 보이고 있다. 舅(외숙→처남)의 확대적용은 서기 10세기 경이고, 姨(처제·처형→이모)의 확대적용은 기원전 6세기 경이다. 약 1500년의 격차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매개호칭의 이러한 변화와 병행해서 중국의 가족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알아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매개호칭(teknonymie)에 의존해 보아도 중국의 친족용어들이 확대적용된 현상들을 설명해 낼 수 없다. 매개호칭과 매개호칭의 서로 다른 각 형태들은 각각의 경우에 따라서 나름대로의 성립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무원칙하게 매개호칭에 의존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姨(처제·처형→이모)의 경우 대부분의 학자들은 馮漢驥의 견해에 반대한다. 앞서 본 바와 같이 姨라는 호칭이 이모에까지 확대적용된 시기는 상당히 오래 전으로 대략 기원전 6세기 경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姨를 다른 경우들과 떼어내어 고찰해야 할 충분한 근거가 된다. 이미 보았듯이 馮漢驥는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역매개호칭'의 가설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마르셀 그라네(Marcel Granet)는 姨(처제·처형→이모)의 확대적용 현상을 亡父의 未亡人과의 혼인(le mariage avec la veuve du père)으로 설명한다. 馮漢驥는 亡父의 未亡人과의 혼인에 대한 고대 문헌의 사례들을 언급하고 있고, 그라네는 이 사례들을 인용하면서 고대 중국의 역사편찬자들이 亡父의 未亡人과의 혼인이라는 현상을 비난하기 위해 사례로 들고 있다고 강조한다. (Granet 1929: 402, 1939: 65-66)

 

   그러한 현상들이 비난 받아야 했다면 그러한 현상들이 실제로 행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亡父의 未亡人과의 혼인은 실제로 적어도 일부 지역에서 행해졌다. 중국의 고대 역사가들은 북방 초원의 유목민인 匈奴族이 亡父의 未亡人과 혼인하는 것을 비난하고 있고, 馮漢驥와 그라네는 이 기록도 인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체계에서는 계모와의 혼인(le mariage avec la marâtre)도 가능하고, 亡子의 未亡人이나 婚約女와의 혼인도 가능하다. (Granet 1939: 66-73)

 

   그리고 亡子의 未亡人과의 혼인은 처남의 딸과의 선호혼과도 상관관계에 있다.

 

계모와의 혼인. 처남의 딸과의 혼인.

 

   그러므로 이 체계에는 하나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일련의 혼인 형태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바로 모측교차사촌혼 체계(un système matrimonial de cousin-croisé matrilatéral)이다. 마르셀 그라네는 매개호칭(teknonymie)에 의한 설명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러한 결론을 종합적으로 내릴 수 있었다.  

 

   위의 도표를 설명해 보자. 위의 도표는 모계집단들로 이루어지는 모측교차사촌혼 체계이다. 고대 중국에서 婚은 우리에게 여자를 주는 인척들이고(houen désigne ceux chez qui l'on a pris femme), 姻은 우리에게서 여자를 받는 인척들이다 (yin ceux que l'on a pourvus d'épouses). 위의 도표에서 우리의 부계적 世系(아버지-나-아들)에 대해서 婚은 오른쪽에 위치하고(舅-舅-舅), 姻은 왼쪽에 위치한다(甥-甥-甥). 그러므로 고대 중국에서 婚姻은 두 개의 서로 다른 世系(dynasties), 즉 여자를 주는 자(les donneurs des femmes)와 여자를 받는 자(les preneurs des femmes)를 말한다.

 

   舅는『爾雅』에서 "외숙·장인"이라는 이중적 의미로 나타난다. 그리고 舅는 11세기의『新唐書』에서 "처남"이라는 의미로 확대적용되고 있다.『爾雅』에서 "외숙·장인"의 동일시는 양측교차사촌혼 체계를 의미하고,『新唐書』에서 "외숙·처남"의 동일시는 모측교차사촌혼 체계를 의미한다. "외숙·처남"의 동일시는 "처남·장인"의 동일시로서 "처남의 딸과의 혼인"의 결과로 해석된다. 이 관행은 고대 중국의 귀족층에서 확인할 수 있고, 논리적으로도 적절하다. 처남의 딸은 우리에게 여자를 주는 婚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처남의 딸이 세대가 같은 사람과 혼인할 경우 처남의 딸의 배우자는 나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亡子의 未亡人이나 亡子의 婚約女와의 혼인이 가능하고, 고대 중국에서 (귀족층에서) 이러한 관행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즉 亡子의 未亡人과의 혼인은 처남의 딸과의 선호혼과 상관관계에 있다. 따라서 고대 중국에서 양측교차사촌혼에서 모측교차사촌혼으로 변화가 있었다는 가설은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외숙의 딸과 혼인하는 모측교차사촌혼은 현재에도 雲南省에서 행해지고 있다.

 

   甥은『爾雅』에서 사위, 생질, 매부라는 3중의 의미로 나타난다. 그리고 馮漢驥에 의하면 甥은『爾雅』의 시대에 이 3중의 의미 뿐만 아니라 처남, 고모의 아들, 외숙의 아들이라는 의미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양측교차사촌혼의 잔존이다. 양측교차사촌혼 체계에서 舅와 甥은 인척의 두 세대를 가르킨다. 그런데 모측교차사촌혼 체계가 되고, 혼인결연이 한 방향으로만 이어지면 舅와 甥은 인척의 두 종류, 婚姻를 가리키게 된다.

 

   姨의 경우『爾雅』에서 "처형·처제"의 의미로 나타나고, "이모"로 확대 적용되는 것은 기원전 6세기 경이다. 姨의 의미가 "처형·처제"에서 "이모"로 확대 적용되는 것은 (중국의 고대 귀족층에서) "亡父의 未亡人"과 혼인하는 관습과 "계모"와의 혼인의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아버지의 첩"이나 "계모"는 어머니와 동등한 범주로 인식되어 우리에게 여자를 주는 婚에 속하기 때문이다. 馮漢驥의 글투는 이러한 관습을 애써 부인하려는 듯이 보인다. 아마도 윤리적인 측면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관습은 윤리 상의 문제가 아니라 친족구조 상의 문제이다.

 

   舅, 甥, 姨에 대한 해석과 동일한 해석을 伯·叔과 姑에도 적용할 수 있다. 叔은『爾雅』에서 "숙부와 시동생"이라는 이중적 의미로 나타난다. 叔의 이중적 의미는 모계혈통과 양측교차사촌혼을 뜻한다.

 

   伯은『爾雅』에서 "백부"의 의미로 나타나고, 伯의 의미가 "시숙"으로 확대적용되는 것은 서기 10세기 경이다. 외사촌누이와의 혼인을 수반하는 모계체계는 아버지의 형제들(백부와 숙부)과 남편들의 형제들(시숙과  시동생)로 이루어지는 친족집단을 형성하게 한다.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의 형제들(백부와 숙부)과 남편들의 형제들(시숙과  시동생)은 우리에게서 여성을 받는 남자들이다.

 

   姑는『爾雅』에서 "伯과 叔의 누이들"을 가리키고 있고, 姑의 의미가 "시누이들"로 확대적용되는 것은 서기 4세기 경이다. "아버지의 누이들(伯과 叔의 누이들)과 "남편의 누이들"(시누이들)은 우리에게서 여성을 받는 집단의 여성들이다. 

 

    그라네는 이러한 결론을 8부류 체계라는 복잡한 가설로서 주장하였고, 고대 중국의 4부류 체계와 현대 중국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체계 사이에 끼워 넣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비판했다. 그러나 그라네의 주장을 단순화시켜 보면, 고대 중국에서 고모의 딸과의 혼인은 배제되고, 외숙의 딸과 혼인하는 관행, 즉 모측교차사촌혼이 어떤 시기 혹은 어떤 지역에서 행해졌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 사실은 비록 그라네가 제안한 이유와 정확히 같은 이유는 아니지만 우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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