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구아재 사랑방

전북 고창. 전봉준 장군 생가터

작성일 작성자 봉구아재

 

전봉준 장군 생가터 전경.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되어있다.

 

 

전북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59 (당촌길 41-8)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전봉준 장군 생가터 안내판.

 

 

- 전봉준(全琫準): 1855(철종 6)∼1895(고종 32). 조선 말기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 전봉준 장군의 초명은 명숙(明淑), 호는 해몽(海夢)이다. 몸이 왜소하였기 때문에 흔히 녹두(綠豆)라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이란 별명이 생겼다.

 

- 아버지 전창혁은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죽음을 당하였다. 뒷날 그가 사회개혁의 큰 뜻을 품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 전봉준 장군은 반외세를 외치며 거병(擧兵)했으나 밀고를 당해 1895년 4월 41세에 서울에서 교수형에 처해졌으나 끝내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

 

 

1890년(고종 27)경인 35세 전후에 동학에 입교, 그 뒤 얼마 안 되어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接主)로 임명되었다.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스스로가 말하고 있듯이, 동학은 경천수심(敬天守心)의 도(道)로, 충효를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보국안민(輔國安民)하기 위하여서였다고 한다. 동학을 사회 개혁의 지도 원리로 인식하고 농민의 입장에서 동학교도와 농민을 결합시킴으로써 농민운동을 지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탐관오리에게 잃고, 농민군을 이끌고 고부 관아를 습격, 민란이 손화중·김개남 등 동학 접주들과 손을 잡고 동학농민운동으로 확대, 집강소 설치하고 폐정개혁 시행, 반외세를 외치며 거병했으나 밀고 당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 웹사이트 -

 

 

 

복원된 생가 안채.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에는 전봉준 장군의 고택지(사적 제293호)가 있으며 고택지에서 500m 떨어진 창동리에는 유해가 없는 가묘를 조성하여 참배하고 있으며, 전봉준 장군 시비도 세워져 있다.

 

 

생가 안채.

 

 

새야 새야 파랑새야 詩碑.

 

 

생가 바로 옆에 자리한 '새야 새야 파랑새야' 시비는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가 썼다고 한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는 동학농민운동(1894년)을 할 때 민간에 퍼진 노래이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파랑새는 일본군이 푸른색 군복을 입어 일본군을 의미하고)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밭은 농민군으로 농민군을 공격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녹두꽃은 전봉준을 의미하고 전봉준이 죽으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청포장수는 백성을 상징하고 백성들이 통곡한다)는
의미로 불려진 민간 전래 민요이다.

 

 

안채.

 

 

사랑채 헛간.

 

 

 

2019.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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