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구아재 사랑방

전남 해남. 지강 양한묵 생가 & 기념관

작성일 작성자 봉구아재

 

지강 양한묵 선생 생가 이정표.

 

영신리 마을에서 약 150미터 떨어진 곳에 최근에 건립되었다.

 

 

다녀온 날: 2019년 6월 30일.

 

 

전남 해남군 옥천면 영신길 4-25 (영신리 447-3)

 

 

전남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에 지강 양한묵 선생 생가와 기념관을 2019년 6월 12일 준공을 마치고 개장을 했다.

 

지강 양한묵 선생(1862~1919)은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으로 옥천면 영신마을에서 태어나 19세에 외가가 있는 화순 능주로 이사가기 전까지 해남에 거주했다.

 

또 기미년 3·1운동 당시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서 개최된 독립선언식에 참석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으로 천도교계를 대표해 서명하고 붙잡혀 56세의 나이에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옥중에서 숨진 유일한 민족대표로서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조선인의 의무" 라고 뜻을 굽히지 않았고 가혹한 고문으로 지난 1919년 5월 26일 순국했다.

 

 

지강 양한묵 선생 생가 전경.

 

 

 

■ 지강 양한묵 선생(1862.4.29-1919.5.26) 약력.

 

○ 선생은 1862년 4월 29일(음)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에서 제주양씨 양상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화순으로 이사가기 전까지 18년 동안 이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서당, 소심재, 덕촌사 등에서 한문학을 수학하였다.

 

○ 1894년에 탁지부 주사가 되어 1897년까지 재직하다가 뜻을 구국에 두고자 관직을 그만두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1902년 일본에서 동학에 입교, 구국민족운동을 지도하였다.
 
○ 1904년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반대하여 송수만, 심상진 등과 보안회를 설립하고 그 서기로 활동하였다. 이어서 이용구 등의 일진회를 타도할 목적으로 공진회에 참여하였다.

 

○ 1905년 이용구 등이 친일파로 변절하자 이준 등과 헌정연구회를 조직하였고 특히 선생은 '헌정요의(憲政要義)'를 저술하여 1905년 7월 15일부터 8월 3일까지  <황성신문 皇城新聞>에 연재하였다.

 

○ 1906년에 천도교의 법도사와 직무도사로 1909년부터 1911년까지 천도교 포교와 교리연구로 활동하였다.

 

○  1909년 이재명이 이완용을 습격 저격하려던 사건에 연루되어 4개월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 네이버지식 -

 

 

복원된 양한묵 생가 본채.

 

 

안방.

 

 

부엌.

 

 

별채.

 

 

디딜방아.

 

 

헛간.

 

 

장독대.

 

 

지강 양한묵 선생 순국비.

 

 

지강 선생 기.

 

 

국가보훈처지정 현충시설 표석비.

관리번호 50-1-18.

 

 

해남 옥천 무궁화 동산.

 

지강 양한묵 생가와 기념관사이에 조성되어 있다.

 

 

지강 양한묵 기념관 전경.

 

81㎡ 면적의 기념관은 서대문 형무소의 이미지를 가져와 지은 건물로 양한묵 흉상, 독립선언서 사본, 영상화면 등이 전시돼 있다.

 

 

기념관 벽 옆에 세워진 생가와 기념관 안내판.

 

 

지강 양한묵 선생 영정.

 

 

지강 양한묵 선생 흉상.

 

 

민족대표 33인의 모습.

 

 

민족대표 33인 사진.

 

 

독립 선언서.

 

 

지강 양한묵 선생 약력.

 

 

지강 양한묵이 걸어온 길.

 

 

 

2019.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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