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오강호

열수의 위치로본 위만조선과 고려의 강화도

작성일 작성자 만주몽골조선땅임

본래 고구려 잉벌노현(仍伐奴縣)인데, 경덕왕이 곡양(穀壤)으로 고쳐서, 율진군(栗津郡)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에 금주(衿州) -금(衿)을 금(黔)이라 한 곳도 있다.- 라고 고쳤고, 성종(成宗)이 단련사(團練使)를 설치하였는데, 목종(穆宗)이 혁파하였다. 현종 9년에 수주(樹州)에 예속시켰고, 명종이 비로소 감무를 설치하였다. 본조 태종 14년에 과천과 병합하여 금과현(衿果縣)을 만들었다가 두어 달만에 혁파하고, 또 양천과 병합하여 금양현(衿陽縣)으로 만들었는데, 한 해만에 혁파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0권경기 금천현

 

12월에 중추사 윤징고(尹徵古)가 졸하였다. 징고는 수주(樹州) 수안현(守安縣) 사람이다. 성품이 침착하고 진득하며, 엄하고, 굳세며, 풍채가 아름답고 해서(楷書)를 잘 썼다.

신유 12년(1021), 송 천희 5년ㆍ거란 태평(太平) 원년고려사절요

 

고려사를 편집한 김종서는 수주에 대해 일관되게 한양의 서쪽이라 했다.

 

차라대ㆍ영녕공ㆍ홍복원 등이 갑곶강 밖에 이르러 크게 기치를 늘어세우고, 밭에서 말을 먹이며 통진산(通津山)에 올라 강도(江都)를 바라보고 물러가 수안현(守安縣 경기 김포(金浦))에 주둔하였다

병진 43년(1256), 송 보우 4년ㆍ몽고 헌종 6년고려사절요

 

통진의 산 아래에 문성이 한데 모이니 / 通津山下聚文星
빈주가 고담 나누느라 만사가 그만일세 / 賓主高談萬事輕
시인이 안목 갖춘 걸 어찌 헤아렸으랴 / 豈料時人能具眼
강도의 지세가 이미 동으로 기울었구려 / 已將地勢指東傾

 목은시고(牧隱詩藁) 제5권

 

그런데 고려말 목은 이색은  통진산에서 고려의 강도(江都)를 바라보며 동쪽으로 산의 지세가 기울어져 있다고 했다. 그럼 이색은 강도의 서쪽에서 강도를 바라본것이다. 역시 고려시대 최자의 시에 강도의 동쪽에 큰바다가 있다고 한것과 일치한다. 결국 고려의 강화도는 바다가 동쪽에 있고 조선의 강화도는 바다가 서쪽에 있다.

 

그런데 조선후기의 학자들은 강화도가 혈구라는 삼국사기 지리지의 말을 인용하여 혈구가 그 이름이 비슷한 열구라고 주장하며 역시 한강일대라고 주장했다. 아래의 글을 살펴보자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낙랑군 탄열현(呑列縣)에 분려산(分黎山)이 있고 거기에서 열수(列水)가 나와 서쪽으로 점제(黏蟬)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가는데, 수로의 길이가 8백 40리라 한다

 

낙랑군은 만리장성이 시작하는 곳에 있다. 낙랑군 수성현이 갈석산이 있고 진장성이 시작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한나라때 기록으로 원래 진장성은 산서성북부에서 끝나지만 한나라때는 장성이 텐진의 서북에 이르렀으므로 그곳이 바로 낙랑군수성현이다.

 

한나라때 낙랑군은 위의 지도의 텐진에서 서남쪽으로 지나 둔류대방이라 쓰인 곳까지 였을 것이다. 현도군은 지도에 청장하요수라고 쓰인곳이며 한나라때 공손가문이 들어온 요동은 바로 지금의 산서성이자 위의 지도에 청장하 서쪽일대이다.

 

우적도에 나타난 습수의 위치

 

《사기》에,

“한 무제가 조선을 칠 때 양복(楊僕)이 제병(齊兵) 7천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성(王儉城)에 이르렀다. 우거(右渠)는 성을 지키고 있다가 양복의 군사가 적음을 알고 곧 나가서 치니 양복의 군사는 패주(敗走)하여 산속으로 도망하였다. 조선을 평정한 뒤에 한 무제는, 양복이 열구(列口)에 이르러서 마땅히 순 체(荀彘)를 기다려야 하였을 것인데, 저 혼자 지레 군사를 풀어 치다가 망실(亡失)한 것이 많았다는 이유를 들어 서인(庶人)을 삼았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에는 습수(濕水), 열수(洌水), 산수(汕水) 세 강이 합해져 열수(列水)가 된다. 아마도 낙랑이니 조선이니 하는 것은 여기에서 이름을 취한 듯하다 

 

결국 열구가 있는 열수는 상간수즉 영정하가 된다. 조선의 왕검성은 텐진근처인데 문맥상 그근처에서 대기해야 하는 양복이 기습당했다고 하니 전부 들어맞는다.

 

산해경(山海經)》에,

“조선은 열양(列陽)에 있다.”

하였는데, 그 주에,

“(열양은) 열수의 이름이다.”

하였고, 양웅(揚雄)의 《방언(方言)》에는,

“조선과 열수의 사이이다

 

위만조선이 원래 하북성에서 산서성에 걸친 제국이었음을 알수있다.  

  

《전국책(戰國策)》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소진(蘇秦)이 연(燕)나라 문후(文侯)에게 유세하기를, “연나라 동쪽에 조선과 요동(遼東)이 있습니다.” 하였다

 

역시 같은 내용이다. 

 

《산해경(山海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해(東海)의 안쪽 북해(北海)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이름을 조선(朝鮮)이라고 한다. ○ 조선은 열양(列陽)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이다. 열양은 연(燕)에 속한다. ○ 주(注)에 이르기를, “조선은 지금의 낙랑현(樂浪縣)으로, 기자(箕子)가 봉해진 곳이다. 열(列)은 역시 수명(水名)으로, 지금의 대방(帶方)에 있으며, 대방에는 열구현(列口縣)이 있다.” 하였다.

 

연나라는 당시에 태원인근에 있었다. 그러니 연의 동쪽은 하동즉 황하동쪽을 말한다. 그곳에 조선이 있었다. 

 

곽박(郭璞)의 주(注)에, “《산해경》에 열(列)은 수명(水名)이라 하였는데, 열수(列水)는 요동에 있다.” 하였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고구려의 혈구현(穴口縣)은 지금의 강화(江華)이다.”

  

열구(列口) 《자치통감》의 주에는 ‘열수(列水)의 어구에 있으므로 열구라고 이름했다.’ 하였다

 

두가지를 추측할수 있는데 송나라때 만들어진 우적도를 참고하면 열수는 상건수이며 열구는 지금의 텐진근처이다. 그러나 만일 지명이 2천년전과 비교해 송나라때 이동되었다면 아마도 열수는 호타하일 가능성도 높다. 왜냐하면 대방의 위치가 텐진부근으로 보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대방은 낙랑군의 남쪽으로 호타하의 동남쪽을 대방으로 보는것이 제일 근거가 있다.그런데 상건하가 열수이면 졸지에 대방이 텐진남쪽지방이 되어 약간 무리가 있다. 넓게 하자면 대방은 텐진서남쪽에서 호타하 동남쪽이다. 만일 김부식이 혈구가 열구와 같은 말이라고 생각했다면 고려의 강화도는 지금의 산둥근처가 될수도 있고 텐진의 동남쪽일대가 될수도 있다.다른기록을 참고하면 고려의 강화도는 산둥근처이다. 산둥의 제주와 가까워야 하기 때문이다. 고려사절요에 원나라에서 제주라 부르는 곳에 강화도가 있다고 했다. 당시에 제주는 산둥성북쪽이다.  

 

본래 고구려 혈구군(穴口郡)인데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해구(海口)라 고치고, 원성왕(元聖王)이 혈구진(穴口鎭)을 설치하였다.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현(縣)으로 만들었다. 현종 9년(1018)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고종이 몽고병을 피해 들어가 도읍하고 군(郡)으로 승격시키고 이름을 강도(江都)라 했다. 원종(元宗) 원년(1259)에 다시 송도(松都)로 돌아왔다. 충렬왕(忠烈王) 때에 인주(仁州)에 합병하였다가 곧 복구시켰다. 신우(辛禑) 3년(1377)에 부(府)로 승격시켰다가 본조 태종 13년(1413)에 도호부로 고쳤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화도호부

 

결론은 혈구와 열구는 다른 지명으로 보인다. 다만 멀지 않은 위치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봄 정월에 흥왕사(興王寺)가 낙성되니, 2천 8백 칸이며 12년 만에 준공하였다. 왕이 재(齋)를 베풀어서 낙성하려 하니, 각처에서 중들이 모여 들었다. 명하여 계행(戒行)이 있는 자 1천 명을 택하여 법회에 참여하게 하고 이어 늘 머물러 있도록 하였으며, 특히 5일 동안 밤낮으로 연등대회를 개설하였다. 칙령으로 중앙의 모든 관청 및 안서도호부ㆍ개성부(開城府)와 광주(廣州)ㆍ수주(水州 경기 수원(水原))ㆍ양주(楊州)ㆍ동주(東州)ㆍ수주(樹州 경기 평부(平富)) 다섯 고을, 강화(江華)ㆍ장단(長湍) 두 현에게 뜰에서 절 문까지 채붕(綵棚)을 꾸민 것이 즐비하게 서로 뻗쳤으며, 왕의 연(輦)이 지나가는 길 좌우에는 또 등산(燈山)과 화수(火樹)를 만들어 대낮같이 환하게 하였다.

정미 21년(1067), 송 치평 4년ㆍ요 함옹 3년문종 인효대왕 2(文宗仁孝大王二)고려사절요 제5권

 

팔관회를 베풀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그때 병란으로 인하여 여러 도에서 표문을 올린 것이 남경(南京 現 서울)ㆍ광주(廣州)ㆍ수주(樹州 경기 인천(仁川))뿐이었다

계축 40년(1253), 송 보우(寶祐) 원년ㆍ몽고 헌종 3년고려사절요

 

 

 

몽골의 난리에 멀쩡한 곳은 한반도에 흔치 않다. 특히 인천이 멀쩡했다는것은 거짓이다. 산둥이남지방이 멀쩡했을 것이다. 결국 수주는 원래 산둥이남지방에 있었다.



맨위로
통합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