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때 광녕에 있었다는 기자묘는 지금 산서성 로성시에 있으며 따라서 조선영토는 그 북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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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영토

명나라때 광녕에 있었다는 기자묘는 지금 산서성 로성시에 있으며 따라서 조선영토는 그 북쪽이다.

소오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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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광녕현(廣寧縣)에는 전에 기자묘(箕子墓)가 있어서 우관(冔冠 은(殷)의 갓 이름)을 쓴 소상(塑像)을 앉혔더니, 명(明)의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때 병화(兵火)에 불탔다 하며, 광녕현을 어떤 이들은 ‘평양’이라 부르며, 《금사(金史)》《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광녕ㆍ함평(咸平)은 모두 기자의 봉지(封地)이다.

열하일기(熱河日記) > 도강록(渡江錄) > 도강록(渡江錄

 

 

 

潞城市微子镇子北村中,有一个巨大的土堆,高两三丈,占地面积二亩有余,镇人自古至今称之为“箕子墓”。

http://blog.sina.com.cn/s/blog_4fdcd35a0102e4s7.html

로성시 미자진 북쪽촌중에 거대한 흙으로 된 무덤이 있는데 높이가 9m내외 바닥면적은 1200제곱미터(아마 가로 30m 세로40m?)

사람들이 기자묘라고 한다

 

 로성시 미자진에는 미자와 기자 비간에 관한 전설이 많고 특히 기자와 비간의 무덤이 있고 3명의 성인에 대한 사당이 존재한다.현지 네티즌이 올린 글이나 지리지를 보면 이곳은 미자의 봉지즉 영지인데 맞은편에 기자의 영지가 있었으며 근처 산서성 릉천현에는 기자산과 기자동이 있는데 모두 기자가 숨어살았던 곳이며 주나라 무왕이 찾아와 정치에 대해 물어보고 자신에게 복종할것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전설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런데 미자의 무덤은 거대한 크기로 산동성 웨이산호의 섬에 남아있다. 물론 그곳도 거기가 미자의 영지라고 현지지리지에 되어있다.

로성시 미자진의 기자묘라고 사진을 검색해보니 위의 사진이 나왔는데 이것이 기자무덤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크기로 봐서는 맞는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명나라때 기자묘와 기자사당이 있던 곳이 산서성 로성시 미자진임은 확실한 것이다. 현재에도 기자무덤과 기자사당이 존재하니 말이다.

 

맑았음. 능하역 성 동쪽에 소릉하(小凌河)가 있었습니다. 소릉하를 건너 형산포(荊山鋪)를 지나서 좌둔위(左屯衛)의 중좌천호성(中左千戶城)에 이르고, 해령문을 거쳐 들어갔다가 임하문(臨河門)으로 해서 나왔습니다. 성 서쪽에는 자형산(紫荊山)이 있고, 북쪽에는 소요사(逍遙寺)가 있었습니다. 성 동쪽 7, 8리 밖에 또 대릉하(大凌河)가 있었는데, 두 하수(소릉하와 대릉하)는 거리가 40여 리였습니다. 그리고 흥안포(興安鋪)와 동악묘(東岳廟)는 대릉하 동쪽 언덕에 다다라 있었습니다. 대릉하 동북쪽 6, 7리 사이에 백사장(白沙場)ㆍ사와포(沙窩鋪)가 그 복판에 있었으므로 흰 모래가 바람에 날려서 포성(鋪城)을 꽉 메워, 성이 모래에 파묻히지 않은 것은 겨우 1, 2척 정도였습니다.
십삼산역(十三山驛)에 이르니, 성 동쪽에 십삼산(十三山)이 있었습니다. 13봉(峯)이 있어서 ‘십삼산’이라 명칭했고, 십삼산역도 이로 인해 명칭을 얻게 된 것입니다. 북쪽에는 소곤륜산(小昆侖山)과 웅권산(熊拳山) 등 여러 산이 있었습니다

표해록 제3권 > 무신년(1488, 성종 19) 5월 >14일

광녕좌둔위서쪽에는 자형산이 있어야 한다.  

 

 

 

흐리고 큰바람이 일었음.
찰원(察院)ㆍ보자사(普慈寺)를 지나 성 동문으로 나오니 곧 태안문(泰安門)이었습니다. 또 종수교(鍾秀橋)ㆍ천수(泉水)ㆍ평전(平甸)ㆍ조구(潮溝) 등 포(鋪)를 지나서 반산역(盤山驛)에 이르니, 지휘(指揮) 양준(楊俊)이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차를 대접했습니다. 역성(驛城) 북쪽에서 바라보니, 흑산(黑山)ㆍ기산(岐山)ㆍ사산(蛇山)이 있는데, 그 산들은 모두 의무려(醫巫閭)의 동쪽 지맥(支脈)이었습니다.

표해록 제3권 > 무신년(1488, 성종 19) 5월 > 20일

광녕역근처에는 흑산이 있어야 한다.

 

지금 지명을 확인한 결과 표해록의 저자 최부는 지금도 맹강전설이 남아있는 당시의 산해관인 신향현을 나와서 자형산이 서쪽에 있는 광녕좌둔위를 지나 흑산이 있는 광녕역(지금 허비시)을 지나 당시의 요양현일대인 안양시일대를 지나서 조선땅에 오게 된다.

 

 

:“高丽之地,本孤竹国也。周代以之封于箕子,汉世分为三郡

수나라 대신 배구

고려땅은 본래 고죽국이다. 주나라가 기자를 봉했고 한나라는 3군으로 나누었다.

 

 

평안 감사 윤헌주(尹憲柱)에게 내린 교서에,

“왕은 이르노라. 압록강 동쪽부터 대동강 서쪽까지는 심하게 황폐해져 관찰사와 순찰사의 임무를 맡기기가 참으로 어렵다. 이제 누구에게 맡겨야 하겠는가. 경에게 중임을 맡기노라. 나라의 관문인 평안도를 바라보니 우리나라의 가장 중요한 번(藩)이로다. 국경은 노룡현(盧龍縣)의 옛터와 접하고 한 줄기 긴 강을 한계로 삼는다. 이 땅은 기자(箕子)의 옛 나라로 그분이 남기신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징험할 수 있다. 담비와 인삼, 금과 비단을 구름처럼 실어 나르니 백성이 많고 물산이 풍부한 도회라 이를 만하다. 진(鎭), 보(堡), 성(城), 지(池)가 별처럼 빼곡히 펼쳐져 있으니, 이는 진실로 국가를 지키는 중요한 요새로다.

  국역승정원일기 > 영조 1년 을사(1725, 옹정3) > 6월 25일(신묘) >

 

고죽국은 곧 기자의 나라이며 고구려땅이며 고려땅이며 조선땅이다. 이 개념은 조선후기 영조때에도 지속되었는데 그래서 조선국왕 영조역시 우리땅의서쪽경계는 노룡이다라고 했고 평안도가 바로 기자옛나라즉 기자묘가 있는 곳이며 고구려의 옜 수도가 있는 곳이다. 즉 명나라의 광녕이었던 로성시에서 신향시북쪽까지는 조선국경과 거의 가까운 곳으로 현재의 지리개념상 산해관일대가 노룡이고 명나라 산해관이 신향시일대이니 조선땅이 로성과 신향근처에도 경계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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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의 요양을 주변으로 연산과 파절이란 곳이 있는데 그곳을 기준으로 조선과 명이 국경을 정했다.

 http://blog.daum.net/sabul358/13645892 동국여지지도 향고도님 제공

조선 숙종때 제작된 지도라고 한다

 

 

개주위(開州衛) 설치의 정지를 청하게 하소서. 우리 고황제(高皇帝)는 만리(萬里)를 밝게 보시어 요동의 동쪽 1백 80리의 연산 파절(連山把截)로 경계를 삼으셨으니, 동팔참(東八站)의 땅이 넓고 비옥하여 목축과 수렵에 편리함을 어찌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수백리의 땅을 공지(空地)인 채로 버려둔 것은 두 나라의 영토가 서로 혼동(混同)될 수 없다는 것인데, 만일 간사한 무리들이 흔단(釁端)을 일으켜 달자(達子)왜인(倭人)을 가장하여 도적질한다면 실로 예측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성종 134권, 12년(1481 신축 / 명 성화(成化) 17년) 10월 17일(무오) 1번째기사
남원군 양성지가 중국이 개주에 위를 설치한다는 것에 대해 상언하다

명나라의 요양현인 현재 안양시를 기준으로  180리 지점에 연산과 파절이 있었고 그곳이 바로 양국의 경계였다.

압록강이 국경이 아니었던 것이다.

 

북악환산인 현재의 중조산, 력산과 조선경계사이의 수백리땅은 당시 올량합과 건주등여진 몽골계통의 토목보등 여러부족이 살았다. 이중 몽골계통의 부족은 조선의 통제를 받지 않았지만 나머지 부족은 명나라기록에도 조선에 붙었다라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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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manjumongol/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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