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서경이 개봉시근처가 맞고 조선과 명의 경계 서주(조양)은 신향현북쪽으로 옮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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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영토

고려서경이 개봉시근처가 맞고 조선과 명의 경계 서주(조양)은 신향현북쪽으로 옮겨진다.

소오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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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西京) 군사가 거란과 조양(朝陽)의 풍단역(豐端驛)에서 싸워 머리 1백 60여 급을 베고, 강물에 빠져 죽은 자 또한 많았다. 삼군(三軍)이 또 귀주(龜州)의 삼기역(三岐驛)에서 싸워 2일 동안에 머리 2백 10여 급을 베고, 39명을 사로잡았다

고려사절요 제14권 > 고종 안효대왕 1(高宗安孝大王一) >

 

조선왕조실록에는 고려때 서북면 방어군이 13만이 넘는데 조선은 7-8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인구가 조선보다 많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청나라기록에 보면 길림에서 조선군 평양순무가 이끄는 대군과 전투를 벌여 지휘관을 참수하고 대승을 거두었다고 적고 있다. 길림성에 평양이 있었던가? 이를 어찌 설명할 것인가? 당시지리를 분석해보니 조선평양은 요녕성 북진시혹은 산해관안쪽의 영평부일대였다. 그럼 청나라군이 길림으로 진격하려면 조선군 평양수비대와 격돌할수밖에 없었음이 이해가 될것이다.

 

현재 조양시는 서주라고 불렸다.

 

이세적(李世勣)의 군사는 유성(柳城 조양(朝陽))을 떠나 형세를 크게 떨치며 회원진(懷遠鎭)으로 나가는 것처럼 하면서, 군사를 몰래 북쪽으로 용도(甬道 샛길)로 하여 고구려가 뜻하지 않은 데로 나가게 하였다. 하4월 초하루 무술에 이세적이 통정진(通定鎭)으로부터 요수(遼水)를 건너 현도(玄菟)에 이르니, 고구려는 크게 놀라서 성읍(城邑)은 다 성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을사년 신라 선덕여주 14년, 고구려 왕장 4년, 백제 왕 의자 5년(당 태종 정관 19, 645)동사강목 제3하 >

 

조양은 곧 유성이다.

 

 

临济县,东北一百二十里,旧二乡,今二乡 。本汉营县地,属济南郡。按《晋太康地志》云:“管叔后又封于此城,齐灭管,故其子孙仕齐。”唐武德元年,于此立邹州,后废州为临济县。

朝阳城,汉县名也。应劭云:“在朝水之阳,今县东四十里。”故乐安城,在县东北八十里。《汉书?地理志》注云:“更千乘郡为乐安国,即此是也

태평환우기(송때지리지)

임제현은 제주 제남군의 동북120리에 있다.  본래 한나라 영현이다.  조양성이 있는데 한나라 현이름이다. 조수의 북쪽에 있다 지금 현에서 동쪽으로 40리에 있다. 옛 낙안성은 현동북80리에 있다.

 

 

□**[一0]**济阳**[一一]**平丘**有临济亭,田儋死此。有匡。[一二]有黄池亭。
本文来源:中国读史网,原文地址:http://www.cndsw.cn/a/zaixiandushi/houhanshu/2012/0123/4177.html

제양 평구는 임제정 있고 전담이 죽은 곳이다. 황지정도 있다

 

 

황지와 임제는 거의 같은 곳으로 옛 위나라와 제나라의 경계이다. 황지의 위치는 청나라고지도에 있다.

  

임제의 위치가 바로 조양근처인데 개봉시동쪽이다.

http://cafe.daum.net/manjumongolcorea/TwTv/83 당나라 창려현은 개봉시 서쪽

창려의 동쪽이 조양(유성,서주)이니 개봉시 동쪽이 역시 조양이 됨이 맞다.

고려 송 요나라시기의 조양성은 지금 개봉시 동쪽에 있었다.

 

 

게다가 현지에 어니하즉 패수를 어니하라 하는데  그 강이 남아 있다. 물론 고구려때의 어니하가 아니라 고려때의 어니하이다.

패수는 바로 평양성근처에 있는 강이다.

즉 개봉시에서 란고현일대가 바로 고려의 서경관할이었고 그러니 조양에서 거란군을 물리친 기록이 존재하는 것이다.

 

http://cafe.daum.net/manjumongolcorea/TwTt/78고려 전기의 서경은 송나라에서 진주라고 불렀던 청주로 원래 백제땅이며 개봉시서쪽의 랑성일대이다.

 

 

결국 고려가 개봉시일대를 차지한 것이 증명이 되고 고려 서경이 초기에 개봉시근처임도 증명이 된다

사실 고려의 서경은 고구려 평양성이 아니다. 고구려의 남평양이 개봉시 서쪽 정주시였는데 고구려가 망한후 신라가 백제 수도 한성일대에 서원경즉 서경을 설치했고 이를 고려가 계승한 것이다 .아마도 고려시대에는 개봉시일대를 남평양이라 부르고 석가좡시(고구려2번째 환도성)일대를 평양이라 부른 것 같다.

 

전둔위성(前屯衛城)은 곧 옛날 대령로(大寧路) 서주(瑞州)의 땅으로 큰 산이 서쪽으로 산해관을 연해 나와서 전둔위의 동북을 진압하고 있었으니, 곧 삼산(三山)으로서 시속에서 ‘삼산정(三山頂)’이라 이르고 있습니다. 또 동악묘를 지나서 사하역성(沙河驛城)의 서쪽에 이르렀는데, 지나온 작은 강은 곧 사하(沙河)였습니다.
> 표해록 제3권 > 무신년(1488, 성종 19) 5월 >

명나라 서주는 원래 전성기때 산서성서북부 호화호특시주변에 설치되었고 그곳부터 조선과경계였다. 그러나 명나라는 천리를 후퇴하고 지명을 전부 남쪽으로 옮겼다.

 http://cafe.daum.net/manjumongolcorea/TwTx/273조선초기 의주는 호화호특시남부 당시 조선은 호화호특시를 백암성으로 알고 있었다

명나라가 철군한 이후 조선의 백암성은 요나라 암주 흥성현일대로 명나라가 생각했던 아래 지도의 산해관근처로 옮겨진다. 산해관을 나서면 바로 조선땅이었다.

원이 고려땅에 14개주를 설치하고 땅을 빼앗았는데  그때 사람이 많이 사는 중원근처의 땅을 모조리 뺏겼다. 고려말에는 서주즉 조양일대가 장성북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신향시에는 아직도 유림이라는 지명과 맹강녀에 관한 전설이 남아있다. 모두 산해관과 함께 등장하는 지명이다. 지금도 물론 산해관진황도에 맹강녀와 유림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정주시와 개봉시사이의 장성이 바로 고려가 요나라를 막기 위해 쌓았던 장성의 일부분이 아닐까 한다.

혹은 중원왕조가 백제군의 공격을 막으려고 장성을 쌓은 것을 고려가 이용했을 지도 모른다.  송나라때 고려의 동서를 2300리 남북 3천리라고 했는데(원나라기록에는 고려가 6천리) 명나라기록에는 조선의 동서가 2천리 남북4천리라고 썻다. 아마도 개봉시일대의 300리를 잃었던 것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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