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산군(鐵山郡)

지군사(知郡事) 1인. 의주도 중익 병마(義州道中翼兵馬)를 겸한다.

본래 고려장녕현(長寧縣) 인데, 현종(顯宗) 무오년5191) 철주 방어사(鐵州防禦使) 로 고쳤고, 본조(本朝) 태조(太祖) 원년 임시에 지주사(知州事)로써 영삭 만호(寧朔萬戶) 를 겸하게 하였다가, 태종(太宗) 계사년에 예(例)에 따라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15년 을미에 만호(萬戶) 를 혁파하고 영삭(寧朔) 을 군 직촌(郡直村)으로 삼았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선천(宣川) 에 이르기 14리, 서·남쪽으로 바다에 이르는데, 남쪽이 30리, 서쪽이 7리이며, 북쪽으로 용천(龍川) 에 이르기 50리이다.

 

실록의 철산기록과도 일치한다 서남에 바다가있다고 하지 않는가

 

인조 6권, 2년(1624 갑자 / 명 천계(天啓) 4년) 6월 8일(경인) 1번째기사
모문룡의 군사들이 북도에서 양식과 소와 말을 약탈하다

모문룡(毛文龍) 의 차관(差官) 시가달(時可達) · 왕보(王輔)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도(北道)에서 도로 철산(鐵山) 으로 향하였다. 이때 왕보 등이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북도에서 영흥(永興) 으로 돌아왔는데, 일행의 부마(夫馬)가 무려 5백여 필이나 되었다. 그들은 또 양식이 모자란다고 핑계하여 고을에서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으며, 정평(定平) 이남에서는 군사를 풀어 놓아 횡포를 부리면서 소와 말을 약탈하고 집에 감춘 것까지 찾아 내어 가져갔으므로, 연로(沿路)가 모두 텅 비어 백성이 다 울부짖었다.

 

영흥은 실록에 비류수즉 혼하가 있다고 했다. 즉 요양의 남쪽이 영흥이다. 모문룡이가 조선땅에 들어와 철산으로 가면서 영흥남쪽에서 노략질을한것이다. 인조가 모문룡을 죽이고 후금과 화친했어야 했다. 왜 같은 민족인 여진족과 화해하지 않고 한족의 명나라와 힘을합쳐 여진족을 배척하였는가 지도자가 앞뒤생각없이 명분에만 집착하니 같은 민족에게 침략을 당한 것이다.

 

향고도선생의 뛰어남에 경의를 표한다. 필자가 철산의 위치에 대해 참으로 궁금했는데 이걸 간단하게 해결해버렸다.국사학계에서 고구려의 비사성이라고 주장하는 곳이 바로 철산즉 조선의 땅인데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청나라의 배후를 치기위해 조선에서 땅을 빌려 주둔했던 곳이다. 후에 명나라 산해관 방어사령관인 원숭환이 기습공격하여 모문룡을 죽이고 재물을 노획했다. 이때문에 원숭환도 명나라황제 숭정의 의심을 받아 나중에 죽게된다. 인조당시에도 조선이 요동반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근거이다. 후금은 원래 난하동쪽에서 일어나 몽골을 병합하고 요양과 심양을 함락하고 조선의 요동반도서부를 차지한후 국력을 신장시켜 명나라에 입성하였다. 그런데 국사학계지도자들은 후금의 기원을 처음부터 북한 압록강이북으로 규정하는데 대명여지도의 건주위치나 보고 주장하는것이 옳을 듯하다. 대명여지도에는 건주가 난하동쪽에 있지 요동반도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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