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오강호

대륙 고려의 수도 개경을 찾았다. 아싸라비야 ㅋㅋㅋㅋㅋㅎㅎㅎ5일걸렸다.

작성일 작성자 만주몽골조선땅임

고려 태조(太祖)가 고구려의 땅에서 일어나 신라에게 항복을 받고 후백제를 멸망시켜 개경(開京)에 도읍하고 삼한(三韓)의 땅을 통일하게 되었다 

고려사지리지

 

 위의 고구려 백제 지도에서 고구려의 땅에 개성이자 송악이 있을 것이다. 

 

왕경 개성부

본래 고구려의 부소갑(扶蘇岬)으로 신라가 송악군(松嶽郡)으로 고쳤다.

태조(太祖) 2년에 도읍을 송악(松嶽)의 남쪽에 정하여 개주(開州)라 하고 궁궐을 지었다

또 서해도(西海道) 평주(平州) 임내(任內)의 우봉군(牛峯郡)을 분할하여 이에 예속시켰다.

개성(開城)․강음(江陰)․해풍(海豊)․덕수(德水)․우봉(牛峯)으로 우도(右道)로 삼았다

고려사지리지

 

 

 우리의 동족 청나라 여진족이 우리에게 아주 좋은 자료를 남겨주었다. 즉 고지명을 자신들의 대청광여도에 남겨주었는데 위의 지도의 텐진근처에 해풍이란 지명이 보인다. 고대에는 평주는 텐진의 북쪽이었다. 결국 개성은 해풍의 근처이자 평주의 남쪽근처이다.

 

양광도(楊廣道)의 한양(漢陽)․사천(沙川)․교하(交河)․고봉(高峯)․풍양(豊壤)․심악(深岳)․행주(幸州)․해주(海州)․견주(見州)․포주(抱州,인주(仁州))․남양(南陽)․수안(守安)과

서해도(西海道)의 연안(延安)․백주(白州)․평주(平州))․우봉(牛峰)․안주(安州)․봉주(鳳州) 등 주현(州縣)을 경기(京畿)에 소속시켰다.

왕도(王都)의 진산(鎭山)은 송악(松嶽)이며 【일명 송악(松岳)이라 하나니 산마루에 신사(神祠)가 있다.】 또 용수산(龍岫山)․진봉산(進奉山)․동강(東江)【정주(貞州)에 있음.】 서강(西江)【예성강(禮成江)】 벽란도(碧瀾渡)가 있다. 1군(郡)과 12현(縣)이 속해있다.

고려사지리지

 

서해라고 하니 당연히 바다서쪽이다. 또한 양광도에 포주가 있다. 포주는 보주라고도 하며 의주에 배속된다. 결국 조선의 의주에 소속되는 것이다. 조선의 의주는 압록강이 있는곳이다.

위의 명나라시대 지도 연산도를 보면 압록이 서요하이고 의주가 서요하에 있음을 알수있다. 게다가 삼국유사에 요수를 압록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의미를 알수있다. 즉 압록인 서요하가 요수인 난하와 연결되기 때문에 당시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아무튼 양광도가 한반도가 아니라 서요하의 서쪽임은 알수있을 것이다.

  

정주(貞州)

고구려의 정주(貞州)로 현종(顯宗) 9년에 개성현(開城縣)의 속현(屬縣)이 되었고  충선왕(忠宣王) 2년에 강등(降等)하여 해풍군(海豊郡)으로 삼았다. 백마산(白馬山) 장원정(長源亭)

도선(道詵)의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에 말하기를, 󰡒???서강(西江)가에 군자(君子)가 말[馬]을 세워두는 명당(明堂)의 땅이 있어  

문종(文宗)이 태사령(太史令) 김종윤(金宗允) 등에게 명(命)하여 땅을 살피게 하여 서강(西江) 병악(餠岳)의 남쪽에 궁궐을 지었다

하원도(河源渡)【주(州)의 남쪽에 있음

고려사지리지

 

  

위의 대청광여도에 뜻밖의 지명이 보인다. 바로 주마즉 말을 댄다는 뜻이다. 게다가 고대 황하는 텐진방향즉 주마의 남쪽으로 흘렀다고 써있다.또한 하원도가 있다고 했으니 남쪽에 섬이 있고 하(河)즉 황하가 있다는 뜻이다. 당시에는 하는 무조건 황하이다. 하수라고 기록하면 황하라는 것은 고대인들도 지금 현대인들도 모두 알고 있다. 남쪽에 해풍도 있다. 결국 저일대가 바로 고려의 정주라는 것이다.지금까지 모두 이해할줄 믿는다. (매국노 역사학계는 이해안해도 된다)

 

양주(楊州)와 광주(廣州) 등 주현(州縣)으로 관내도(關內道)에 소속시키고 충주(忠州)와 청주(淸州) 등의 현(縣)으로 충원도(忠原道)를 삼고 공주(公州)와 운주(運州) 등의 주현(州縣)으로 하남도(河南道)를 삼았다가 예종(睿宗) 원년(元年)에 합하여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로 삼았고 명종 원년(元年)에 나누어 2도(道)로 삼았다가 충숙왕 원년(元年)에 정하여 양광도(楊廣道)로 삼고

양광도(楊廣道)

 

그렇다면 양광도는 개성위에 있고 하남도에 속하는 공주와 운주는 지도상의 고대 황하 남쪽임을 알것이다.

 

이날 신시 정각에 배가 자연도에 머무르니, 이곳은 곧 광주(廣州)이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39권

 

고려도경에는 서긍이 자연도 분수령을 지나 황도인 개경에 닿았다. 즉 그는 고려의 수도로 들어오는 바다입구에 섬이 있고 안으로 강이 있고 강을 따라 올라가서 황도인 개경에 닿았다.

 

인주(仁州)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현(買召忽縣)【미추홀(彌忽)이라고도 함】 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소성(邵城)이라 고쳐 율진군(栗津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현종(顯宗) 9년에 수주(樹州) 임내(任內)에 소속하였다가 숙종(肅宗) 때에 이르러 황비(皇) 인예 태후(仁睿太后) 이씨(李氏)의 내향(內鄕)이므로 올려 경원군(慶源郡)으로 삼았고 

자연도(紫燕島)

고려사지리지

 

미추홀은 난푸이다.http://blog.daum.net/manjumongol/90 미추홀의 위치

 

 

선주(宣州). 본래 안화군(安化郡)으로 고려(高麗) 초에 고쳐 통주(通州)로 삼았고 현종(顯宗) 21년에 선주 방어사(宣州防禦使)를 칭하였으며 고종(高宗) 18년에 몽고병(蒙古兵)을 피하여 자연도(紫燕島)에 들어갔다가 원종(元宗) 2년에 출륙(出陸)하였다

고려사지리지

 

 

 거란지리도와 당토주군 명승도회라는 두 지도에서 선주와 통주의 위치를 알수있다. 물론 고려의 선주이자 통주와 그 위치가 약간 다를 가능성은 충분하다. 통주라는 말은 말그대로 수도로 통하는 길목이다. 그러나 선주는 지명이 드물다. 둘다 베이징동남쪽이며 몽골군이 침공하면 자연도즉 난푸근처의 섬으로 주민이 이동할수있는 위치이다.

자 그럼 황도개경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광주가 난푸일대라는 것에 이의가 없을 것이다.

 

 

신이 3년 전에 고려에 포로로 잡혀 낭관(郞官)으로 있으므로 잘 알고 있습니다. 개경에서 동쪽으로 말을 타고 7일을 가면 넓기가 개경만 한 큰 성채가 있는데, 주위의 여러 주에서 보내오는 진귀한 물품이 모두 이곳에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승라주(勝羅州) 등의 살펴보건대, 승라주가 《송사》에는 승라주(昇羅州)로 되어 있다. 남쪽에도 두 개의 큰 성채가 있는데, 마찬가지로 물품이 쌓여 있습니다. 만약 대군이 전로(前路)를 따라가서 갈소관여진(曷蘇館女眞)의 북쪽 길을 취하여 곧장 압록강과 대하(大河)를 건넌 다음 올라가면 곽주(郭州)에 이르러서 큰길과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할 경우 고려를 취하여서 차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하였는데, 상이 이 말을 받아들였다

요사

 

 

거란이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서 도성으로 쳐들어가 궁실을 불사르고 주민들을 약탈하니, 왕순은 승라주(昇羅州)로 옮겨 피난하였다

송사

 

癸丑,詔大名、洺滋、彰德、衛輝、懷孟、河南、真定、邢州、順天、河間、平灤諸路皆籍兵守城。宋兵攻滕州

원사 

沛縣。太宗七年,移滕州治此。憲宗二年,州廢,復為縣。至元二年,省入豐縣。三年復置。八年,隸濟寧府。十三年來屬

滕州,下。

唐為滕縣,屬徐州。宋仍舊。金改為滕州,屬兗州。元隸益都路。領二縣

원사

 

중략해서 핵심만 뽑자.. 송나라군대가 승주를 공격했다. 승주는 제녕부에 미친다. 승주는 당나라때 승현으로 했고 서주에 속한다. 송나라도 그대로 따랐다. 금때는 승주로 고치고 연주에 속한다

원래 백제땅인데 당이 차지했다가 이정기가 차지한후 이정기가문이 망하고 신라와 당이 나눠가진후 다시 후백제와 고려가 싸워 고려가 차지한 듯하다. 즉 고려황제가 남쪽으로 도망한 곳을 송나라와 요나라는 제녕이대의 승주로 본것이다. 고려황제는 더 도망가서 나주(강소성)로 갔다.요나라황제가 고려포로를 잡고 고려황제가 도망간곳이 개경에서 어느정도 거리냐고 묻자 수천리가 넘어서 잘모르겠다고 했다. 그러자 요나라군대가 추격을 포기했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있다. 이는 연번로속집에 고려의 나주는  절강의 맞은편에 있고 고려의 남으로 5천리에 있다는 기록을 보면 깨달을 수있다.

 

자그럼 고려의 수도 개경은 승주의 북쪽이다.

 

진훤이 군사를 청주(靑州)에 )내어 고려 임금 건(建)을 엄습하니, 고려 장군 유검필이 공격하여 패배시켰다

보무자년 왕 김부(金傅) 2년 진훤 37년 고려 태조 11년(후당 명종 천성 3, 거란 태종 천현 3, 928

 

훤이 일길찬(一吉飡) 상귀(相貴)를 보내어 주사(舟師)로 예성강(禮成江)송경(松京) 서쪽 30리에 있다 에 들어가 염주(鹽州)ㆍ백주(白州)ㆍ정주(貞州)의 세 고을의 배 1백 척을 불사르고, 저산도(猪山島)의 목마 3백 필을 취하여 돌아갔다. 또 해군 장군 상애(尙哀) 등을 보내어 대우도(大牛島)를 공격하여 노략질하니, 고려왕이 대광(大匡) 만세(萬歲) 등에게 명하여 이를 구원하였다.

임진년 왕 김부 6년 진훤 41년 고려 태조 15년(후당 명종 장흥 3, 거란 태종 천현 7, 932

 

3년 태조 21년 8월에 청주(靑州)에서 왕건이 즉위하고는 글을 올려 고려국에서 볼모로 와 숙위(宿衞)하고 있던 왕인적(王仁翟)을 향리로 돌려보내 주기를 청하였는데, 허락하였다. 《책부원귀》

 

青州節度使王建立加侍中

청주절도사 왕건에게 시중을 더했다.

구오대사

 

青州王建立奏,高麗國宿衛質子王仁翟乞放歸鄉里。從之

청주에서 왕건이 나라를 세우고 고려국에서 온 왕인적을 돌려보내달라고 하자 그의 원대로 해주었다.

구오대사

 

青州節度使、東平王王建立來朝

청주절도사 동평왕 왕건이 조공했다.

舊五代史卷七十九 (구오대사)

 

 

以青州節度使王建立為昭義軍節度使,進封韓王,仍割遼、沁二州為昭義屬郡,以建立本遼州人

청주절도사 왕건을 의군절도사로 봉했고 한왕으로 봉했고 중략 왕건은 원래 요주(고구려 요동성이 요주로 됨)인이다.

구오대사

 

청주는 산둥성 청주로 보았는데 그럼 당시의 청주치소는 제남이니 고려수도가 제남인가 ? 결론은 아니다. 다음글을 보라

 

김수제(金守磾)와 별장 우탄(于綻)이 함께 머리를 깎고 야속달이 주둔한 곳에 있었는데 참소하기를, “고려가 급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제주로 옮길 것이다. 지금 다시 옛 서울에 도읍한다고 말하는 것은 참이 아니다." 하니, 야속달이 그 말을 믿었다. 태자가 동쪽으로 돌아올 때에 야속달이 주둔한 곳에 이르니, 야속달이 수제로 하여금 태자와 대질시키려 하였다
경신 원년(1260), 송 경정(景定) 원년ㆍ몽고 세조 중통(中統) 원년 고려사절요
 

改濟州漕運司為都漕運司,並領濟之南北漕,京畿都漕運司惟治京畿

제주조운사를 도제운사로 바꾸고 제의 남북조운을 다스린다. 경기도 조운사는 경기를 다스린다.

원사
 
우리 태조ㆍ양백연ㆍ변안열 등 10명을 부(副)로 삼아, 경기도통사(京畿都統使) 이인임의 통제를 받게 하였다.
정사신우 3년(1377), 대명 홍무 10년고려사절요
 

원나라에서 제주라 부르는 곳은 산둥성 북쪽이다. 이곳이 고려의 강화도이다. 개경의 남쪽에 강화도가 있으니 제남이 개경이 되면 이상하지 않은가 게다가 경기도는 수도의 사방5백리이내를 말한다. 그런데 제주가 있는 산둥성북쪽은 원나라수도에서 5백리 훨씬 밖이다. 저곳은 고려의 경기도이다.

 

河間,汴梁二路屬縣及開城

하간과 변량의 두로에 속현에는 개성이 있다.

원사

하간(河間:지금의 하북성 하간현,하간현(河間縣) 서북 12리쯤에는 ‘고려성(高麗城)’이 있음

 

원나라에서 친절히 고려 개성이 하간과 개봉로에 있다고 했다.

 

뻔질나게 동남쪽으로 나돌아 다니면서 / 慣作東南行
이리 구불 저리 구불 청주(淸州)를 거쳐 / 逶迤過上黨
천리 길 한산(韓山) 땅에 이르곤 하였는데 / 千里到韓城
기행(紀行) 시 한 수를 지어 청주 참군(淸州參軍)에게 주다
가정집
 
 
천력(天曆) 기사년(1329, 충숙왕16) 유월에 예성강(禮成江)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남쪽으로 한산(韓山)에 가려다가 강어귀에서 바람에 막히다
가정집
 
원나라때 쓰여진 시에는 개경을 나와 청주를 거쳐 남으로 천리에 한산이 있다.
 

끝내는 봉래에 이르고 말 텐데 뭘 / 終欲到蓬萊
황하가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우공의 생각河海東流想禹功

군산이 출몰하는 와중에 群山出沒有無中

천력(天曆) 기사년(1329)에 예성강(禮成江)에서 배를 띄웠다가 강어귀에서 바람에 막히다

가정집

 

고려도경에서 개경으로 가는 과정은 황수양(황하의 입구즉 산둥의 북쪽일대)지나서 흑수양(현 발해만일대)를 지나간다 그중에 군산도가 나온다. 게다가 시인은 개경의 예성강에서 배를 띄우면서 지나가는 황하를 보며 가고 있다. 그는 가만있으면 봉래즉 산둥성반도에 도착한다고 하고 있다. 그가 배를 띄운곳은 한반도가 아니다 의심되면 똇목을 만들어서 한반도개성에서 출발해보라 아마 해류를 따라 계속 북상하여 평안도로 갈것이다. 우리의 해류는 황해를 건너지 않는다.

 

 3년, 황제가 광록경 유식(劉式)과 비서소감 진정(陳靖)을 보내어 치에게 책봉을 더하였으며, 인해서 조칙(詔勅)을 내려 군리(軍吏)와 기로(耆老)를 위문하였다. 정 등이 동모(東牟)로부터 해구(海口)에 나아가서 고려의 사공을 얻어 배를 타고 지강도(芝岡島)에서 옹진구(甕津口)까지 해로로 도착하였으며 육지에 올라 해주(海州)까지 1백 6십 리, 거기서 염주(鹽州 황해도 연안)까지 1백 리, 거기서 백주(白州 황함도 백천)까지 40리였는데 거기서 40리를 더 가서 수도에 도착하였더니, 치가 성밖까지 나와 환영하고

송사전 고려열전

 

그럼 대충의 개경윤곽이 정해진다. 텐진에서 서쪽일대이다. 그럼 위의 글을 보라 송나라 사신은 산둥을 따라 북상하여 옹진에 상륙 해주까지 160리 거기서 180리를 가서 개경에 도착했다(고려사를 확인하니 당시에 황제는 개경에 있었다) 그럼 바다에서 340리에 개경이 있다.

 

고죽국은 이첨(李詹)은 지금의 해주(海州)라 하고, 본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나왔다

 

신의 본국은 비록 울루(鬱壘)의 반도(蟠桃)와 접경이오나 위력(威力)으로 대하는 것을 숭상하지 아니하고, 또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고죽국(孤竹國)과 이웃이 되어, 본래 청렴하고 겸양함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한결같이 직에 이바지하여 만리의 변방을 편안히 하였사오며, 우신(愚臣)이 계승하여 직을 지킴에 미쳐서는 모든 환란이 한꺼번에 밀어 닥치어, 처음에는 흑수(黑水)가 경계를 침범하여 독액(毒液)을 내뿜었사옵고백골(白骨)은 숲처럼 쌓이고, 창해(滄海)의 횡류(橫流)는 날로 심하고

양위표(讓位表) 최치원

 

신라국의 영토에 대해 최치원이 설명하길 고죽국과 이웃하고 변방은 만리이며 흑수즉 발해가 침공한적이 있고 창해즉 발해만을 소유하고 있다.  여기서 해주의 위치를 찾으면 개경이 바로 나온다. 해주는 고죽국이 있다.

 

 

復改軍名。統縣一:同昌縣。興中府。本霸州彰武軍,節度。古孤竹國。漢柳城縣地。慕容邈以柳城之北

중략 한나라시대 유성현에 옛날 고죽국이 있다.

景州,清安軍,下,刺史。本薊州遵化縣,重熙中置。戶三千。遵化縣,本唐平川買馬監,為縣來屬。平川,遼興軍,上,節度。商為孤竹國,春秋山戎國。秦為遼西、有北平二郡地

중략 경주에는 상나라시대 고죽국,춘추시대 산융국,진나라때 요서군이 있다.

요사

 

 

 

  베이징의 동남쪽이 경주이다.

 

 

 

 거란지리도와 대청광여도를 보건데 고려의 해주이자 고죽국은 원래 텐진의 서쪽일대였다. 그런데 조선후기 지명이동으로 고죽국이 현재의 노룡이자 난하서쪽으로 이동한것이다. 아래 글을 보라

是月,改平州為南京

평주를 남경으로 삼았다.

自南京入燕山

 남경에 연산이 들어간다.

改南京路平州軍帥司為東南路都統司之時,嘗治於此,以鎮高麗

 남경로 평주군사사를 동남로 도통사로 바꾸고 고려로부터 지키도록 한다.(누르게 한다로도 해석가능하다)

大興府,上。晉幽州,遼會同元年升為南京,府曰幽都,仍號盧龍軍

대흥부는 진나라유주인데  남경으로 삼았고 유주의 도읍으로 노룡군이라 한다.

금사

 

 

진유주이자  노룡군이 원래 어디였는지 자세히 보라 요수즉 난하에서 엄청나게 멀다. 게다가 탁군보다 더멀다. 명나라시기 대대적인 지명조작과정에서 노룡과 고죽국이 합쳐진 것이다. 고죽국은 두개인데 산서성남부에 있는것과 위에 나온 요나라때 경주에 있는것 두가지이다. 신라는 둘중 어느 고죽국과 접경하고 있었고 고려는 요나라 경주의 일부를 먹고 있었다. 그곳이 해주이다. 거기서 180리 서쪽에 개경이 있다. 아래에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壬子,高麗國王遣使來貢。庚申,詔以權靜海軍留後黎桓為本軍節度

己丑,加高麗國王治、靜海軍節度使黎桓並檢校太尉。

乙丑,加高麗國王王治檢校太師,靜海軍節度使黎桓封交□止郡王

송사

 중략 고려국왕에게 정해군 절도사 검교태위 ???군왕으로 봉했다.

 

鎮州。大觀元年,置鎮州於黎母山心,倚郭縣以鎮寧為名,升鎮州為都督府,賜靜海軍額。政和元年,廢鎮州,以靜海軍額為瓊州

 

真定府,次府,常山郡,唐成德軍節度。本鎮州,漢以趙州之元氏

 

河北轉運使耿望開鎮州常山鎮南河水入洨河至趙州

 

易州靜砦兵先屯鎮州

송사

중략 정해군은 진주에 속하고 진주는 하북성 상산군을 포함한다.

 

高麗國參知政事王同顯靜海軍節度使

요사

 고려국왕은참지정사 정해군절도사를 겸한다.

 

廣陵縣。本漢延陵縣。隨唐為鎮州

요사

광릉현은 본래 한나라 연릉현인데 수당때는 진주이다.

 

 

위의 고지도에서 상산이 나온다. 현재도 하북성에 있다. 이곳일부는 요와 송땅일때도 있겠지만 일부는 고려땅이니 정해군절도사라는 직책을 준것이다. 송은 고려에 현도주 도독과 정해군절도사라는 직책을 주었다. 이는 개경의 위치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고려땅에 갈석산이 있음은 아래에서 증명하겠다.

 

《통감지리통석(通鑑地理通釋)》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우공편(禹貢篇)에 나오는 우갈석(右碣石)은 바로 황하(黃河)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 평주(平州)에서 남쪽으로 20여 리 되는 곳에 있으며,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시작되는 갈석은 지금 고려의 경계 안에 있는바, 이곳에서 말한 갈석과는 다르다. 고려 안에 있는 것이 좌갈석(左碣石)이 되는바, 《통전》에서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고 한 것은 맞는 말이다

 통감지리통석(通鑑地理通釋) : 송나라 왕응린(王應麟)이 찬한 것으로, 14권이다. 역대(歷代)의 주역(州域)과 도읍(都邑) 등에 관해 적었다.

 

 김길보(金吉甫)는 고려에 있는 것을 좌갈석이라 하고, 사문도(沙門島)와 마주하고 있으면서 발해(渤海)의 입구에 해당되는 철산(鐵山)을 우공편(禹貢篇)에 나오는 우갈석이라고 하였다.[주D-006]김길보(金吉甫) : 길보는 송나라 김이상(金履祥)의 자이다. 김이상은 《통감전편(通鑑前編)》을 지었다.

해동역사

 

 

기록을 토대로 보면 고려땅에 갈석산이 있고 황하가 바다로 나오는 곳에 갈석이 또있는데 황하의 갈석은 산둥성의 사문도와 마주본다.고려땅의 갈석산은 진나라장성이 끝나는 부위이다. 이는 거란지리도에 표기된 갈석산이다. 즉 텐진일대가 고려땅임이 증명된다. 여기가 바로 옹진으로 송나라사신이 도착한 육지이며 여기서 조금가면 해주즉 고죽국이 나온다. 여기까지 이해안될 사람 없으리라 본다.

 

요성(遼城)에서 달을 바라보다 [당 태종(唐太宗)]
현도 땅에 두둥실 달 떠오르자 / 玄菟月初明
맑은 달빛 요동과 갈석 비추네 / 澄輝照遼碣

주필한 채 환도 땅을 굽어보면서 / 駐蹕俯丸都

《전당시(全唐詩)》
 
이세민이 우리에게 송나라가 현도주 도독과 정해군절도사를 고려황제에게 올린 까닭을 가르쳐 준다. 현도군에서 갈석산이 멀지 않음을 그의 시에서 알수있다.
 

 

현도군과 갈석산사이 정해군이 있으며 정해군라는 지명과 청주라는 지명은 바로 하간의 동쪽에서 발견된다. 즉 우리의 동족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대청광여도라는 지도를 통해 고려의 수도 개경을 가르쳐 주고 있는것이다.  하간의 서쪽에는 고려성이 지금도 남아있다. 아마도 황도를 지키는 기지였을 것이다.

고려도경에 압록에서 동남으로 천리에 고려개경이 있다고 했는데 당시 압록은 지금의 난하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난하혹은 서요하북쪽에서 동남으로 천리정도에 지도상의 개경이 있으며 원나라때 쓰여진 시에 개경은 원나라수도에서 겨우 4천리거리밖에 안된다고 했다.  이는 나중에 조작된 것이며 실제 위의 지도의 개경은 자금성에서 4백리 남쪽에 있다.즉 4백리를 4천리로 고쳤으며 겨우라는 표현은 미처 고치지 못한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고려수도와 원나라수도가 그리 멀지 않았음을 깨달을수 있다.

 

저위치는 개경에서 말을 타고 서쪽으로 7일을 가면 서경즉 조양과 북진사이의 고구려 옛평양성이 나오고 남쪽으로 가면 승라주즉 제녕이 나온다. 청주라는 표현도 맞으며 정해군도 있으며 근처에 염주도 있고 말을 댄다는 주마도 있으며 하수(황하)도 근처에 있다. 하간로에 속하며 모든 조건이 만족한다. 고려는 황도를 임진과 예성강 두개의 강이 보호한다고 했는데 마침 두개의 강이 개경을 보호하는 지명이며 고려도경에 개경의 시냇물은 동남으로 흐른다고 했는데 역시 부합된다.

 

고려말기록에도 남으로 강소에서 해적이 올라온다고 써있고 북으로 가면 원나라황제가 계신곳이라는 기록이 있다. 역시 모두 개경이 북경의 남쪽에 있음을 가르쳐준다.

 

고려말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하자 공민황제는 안동즉 한반도로 천도하고 새로 황도를 북한 개성시에 쌓았다. 지금 개성에서 북한은 고려황궁을 발견했는데 그 크기는 경복궁보다 작지만 7개의 문으로 되어있어 천자국의 위상을 세우려고 한것을 알수있다.(황제국은 문이 7개 왕국은 문이 5개이다. 조선은 처음에 7개의 문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임진왜란때 불타버려 확인할수없다)조선보다 인구가 배나 많은 고려이기에 단기간에 황궁을 지은것이며 급하게 짓다보니 따라서 크기는 그렇게 크게 짓지는 못한 것이다.조선은 임진왜란때 불타버린 궁궐을 짓는데 대원군때 겨우 완공했다.  

 

 

 1900년대 초반에 그려진 동아대륙도를 보니 역시 하간의 동쪽에 청주와 정해군이있었다. 현재지도도 마찬가지이다. 청주와 정해군사이가 바로 황도개경이 위치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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