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국 고려의 수도는 어디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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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국 고려의 수도는 어디였을까?

소오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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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주(開州)를 동경(東京)으로 삼고,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으로 삼았다. 왕건은 검소하고 관대하였으므로 백성들이 편안하게 여겼다. 《자치통감》

 

 권지고려국사 왕건을 특진 간교태보 사지절 현도주도독 상주국(特進簡較太保使持節玄菟州都督上柱國)으로 임명하고 고려국왕에 봉하고, 대의군사(大義軍使)로 삼았다. 7월에 조서를 내려 고려국왕 왕건의 처 하동 유씨(河東柳氏)를 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으로 삼았다. 고려의 입조사(入朝使)인 대상(大相) 왕유(王儒)가 주청한 것이다. 《책부원귀》

 

남당서(南唐書)》에는, “오(吳) 천조(天祚) 2년(936)은 진(晉) 천복(天福) 원년에 해당하는데, 고려 왕 왕건이 신라와 백제를 격파하였다. 이에 왜(倭)ㆍ탐부(耽浮)환어라(驩於羅)철륵(鐵勒) 등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고려에 내부하였다. 승원(昇元) 2년(938)에 사신을 보내어 글을 올리면서 ‘전(牋)’이라 칭하여 격식을 표(表)와 같이 갖추면서, 신(臣)이라 칭하지 않았다.

 

 3년 태조 21년 8월에 청주(靑州)에서 왕건이 즉위하고는 글을 올려 고려국에서 볼모로 와 숙위(宿衞)하고 있던 왕인적(王仁翟)을 향리로 돌려보내 주기를 청하였는데, 허락하였다. 《책부원귀

 

 

진정 등이 사신으로 갈 때 동모(東牟)에서 출발하여 팔각해구(八角海口)로 나갔다. 그곳에서 고려 사신 백사유가 탄 배와 고려의 수공(水工)을 만나 그 배를 얻어 탔다. 곧 길을 떠나 지강도(芝岡島)로부터 순풍을 만나 바다에서 이틀 밤을 지내고 옹진(甕津) 어귀에 닿아 상륙한 뒤, 다시 육로로 1백 60리를 가서 고려의 경내인 해주(海州)에 닿고, 또 1백 리를 가서 염주(閻州)에 닿고, 또 40리를 가서 백주(白州)에 이르고, 또 40리를 가서 그 국도(國都)에 이르렀다.  송 순화 4년 성종 12년 《송사》

 

왕치가 사신으로 원증연(元證衍)을 파견하여 우리들을 호송하게 하였는데, 원증연이 안향포(安香浦)의 포구에 이르러서 바람을 만나 배가 부서지는 바람에 싸 가지고 온 물품이 모두 가라앉았다.’고 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등주(登州)에 조서를 내려 원증연에게 증명서를 발급해서 본국으로 돌려보내게 하고, 이어 왕치에게 옷감 2백 필, 은기 2백 벌, 양 50마리를 하사하였다. 《송사》

 

, 또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고죽국(孤竹國)과 이웃이 되어, 본래 청렴하고 겸양함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최치원(崔致遠)

 고죽국(孤竹國. 이첨(李詹)은 지금의 해주(海州)라 하고, 본래 《삼국유사(三國遺事)》

 

일통지(一統志)》에 ‘영평부(永平府)에 고죽국이 있고 거기에 3군(君)의 무덤이 있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동(河東)의 수양산에 또 이제묘(夷齊墓)가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반드시 하나는 진실이요 하나는 거짓일 것이다

 

 

꿈은 늘상 고죽국 땅 거기에 맴돌았네 / 夢長懸於孤竹
그런데 어찌하여 황해도의 한 산에다 / 胡爲乎西海之一山
또한 역시 수양이란 높은 이름 내걸었나 / 亦揭之以高名

 

내가 정축년(1577, 선조 10) 봄에 중국 조정에 사신으로 갈 때 고죽성(孤竹城)을 지나면서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사당을 알현하였다. 난하(灤河)의 강물에서 갓끈을 씻고, 채미정(採薇亭) 위에서 배회하였는데, 맑은 바람이 옛날처럼 불고 남은 자취가 완연하였다. 이에 백이 숙제의 음성과 얼굴을 직접 보고 듣는 것만 같아 백대(百代)나 멀리 시대가 떨어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제 서해의 해주(海州)에 도착해 보니, 진산(鎭山)을 수양산(首陽山)이라고 하는데, 두 봉우리가 대치하여 만 길 높이 우뚝 솟아 있어서 감히 범할 수 없는 늠름한 기운이 있었는바, 백이 숙제의 특립 독행(特立獨行)한 절개를 어렴풋하게 상상할 수가 있었다.
수양산부(首陽山賦) 학봉집(鶴峯集

 

 요 통화 11년 성종 12년 3월에 고려 왕 왕치가 박양유(朴良柔)를 보내어 표문을 받들고 죄를 청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여진(女眞)에게서 빼앗았던 압록강(鴨淥江) 동쪽 수백 리의 땅을 고려에 내주었다. 《요사》

 

14년 성종 15년 3월 임인에 고려 왕 왕치가 표문을 올려 혼인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하고 동경 유수(東京留守) 부마(駙馬) 소항덕(蕭恒德)의 딸을 시집보내었다. 경술에 고려에서 다시 동자 10명을 보내어 요나라 말을 배우게 하였다. ○ 6월 기축에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으며, 뒤에는 수시로 사신이 왔다. 《요사》

 

이런 일이 왜 국사학계는 고려 성종이 소손녕의 사위가 되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지 않았는가 고려와 거란이 평화적으로 공존했다는 것을 왜 알려주지 않았는가


 송 함평(咸平) 6년에 목종 6년 왕송이 호부 낭중(戶部郞中) 이선고(李宣古)를 사신으로 보내어 조회하면서 사은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후진(後晉)에서 연(燕)과 계(薊) 지방을 거란에게 빼앗긴 탓에 드디어 현도(玄菟)와 통하는 길이 생겨 번번이 와서 공격하면서 요구하는 것이 끝이 없으니, 송나라 군사를 변경에 주둔시켜서 이를 견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조서를 내려 정중하게 답하였다. 《송사》

 

 

거짓말쟁이 국사학계 교수님들 허위주장이 모두 들통났다. 연과 계지방이란 베이징 서쪽을 말함이다.

지도상의 연운16주를 말함이다. 연과 계지방이 거란에게 빼앗긴뒤에  현도와 통하는 길이 생겼다고 하니 현도는 연과 계지방과 가깝다.  

 

 

 

 송나라 군사가 변경(개봉)에 주둔하면 거란군이 하북과 산둥일대로 진격하는 것이 제한을 받는다 왜냐면 개봉에서 송나라군이 북진하면 거란군은  배후를 기습받을 수있기 때문이다. 즉  송나라때 현도의 위치는 하동즉 하북 산둥일대를 말함이다. 그렇다면 고려의 국도 개경은 변경의 동쪽에 있다.

 

11월 을유에 대군이 압록강(鴨淥江)을 건너 강조(康肇)가 막아 싸우는 것을 패퇴시키니, 강조가 동주(銅州)로 물러나 있었다.
○ 야율분노(耶律盆奴)가 선봉장이 되어 동주(銅州)에 이르자, 강조가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요나라 군사에 항거하였다. 한 군대는 동주의 서쪽 삼수(三水)가 만나는 지점을 차지해 주둔하여, 강조가 그 가운데에 있었고, 한 군대는 동주에서 가까운 산에 주둔하였으며, 다른 한 군대는 성에 붙어서 주둔해 있었다.  (요사)

 

 

 왕조가 아뢰기를,

“그 큰 것을 돌아보아야만 합니다. 거란은 현재 우리와 동맹을 굳게 맺고 있고, 고려는 조공을 여러 해 동안 바치지 않고 있습니다

(송사) 

 

 

 10월 병인에 상온(詳穩) 장마류(張馬留)가 고려에 대해 잘 아는 여진 사람을 바쳤다. 황제가 고려에 대해 물으니, 답하기를,

“신이 3년 전에 고려에 포로로 잡혀 낭관(郞官)으로 있으므로 잘 알고 있습니다. 개경에서 동쪽으로 말을 타고 7일을 가면 넓기가 개경만 한 큰 성채가 있는데, 주위의 여러 주에서 보내오는 진귀한 물품이 모두 이곳에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승라주(勝羅州) 등의 살펴보건대, (승라주가 《송사》에는 승라주(昇羅州)로 되어 있다.) 남쪽에도 두 개의 큰 성채가 있는데, 마찬가지로 물품이 쌓여 있습니다. 만약 대군이 전로(前路)를 따라가서 갈소관여진(曷蘇館女眞)의 북쪽 길을 취하여 곧장 압록강과 대하(大河)를 건넌 다음 올라가면 곽주(郭州)에 이르러서 큰길과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할 경우 고려를 취하여서 차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 말을 받아들였다   (요사)

 

서경이 개경의 동쪽에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개경에서 동쪽으로 말을 타고 7일 가면 서경이 있다. 이거 보고도 서경이 개경의 서쪽에 있다고 주장하면 바보이다.(국사학계는 바보가 많다) 남쪽의  두개의 큰성채는 남경을 말하는 것이다.

 

 

 여진은 대개 옛 숙신씨(肅愼氏)로 대대로 혼동강(混同江)의 동쪽 장백산(長白山)의 압록강 발원지 부근에 살아왔는데, 남쪽으로는 고려와 인접하였고, 북쪽으로는 실위(室韋)와 접하였고, 서쪽으로는 발해(渤海)ㆍ철전(鐵甸)과 경계를 나누었고, 동쪽으로는 바닷가에 닿았다. 여진의 추장은 본디 신라 사람으로 완안씨(完顔氏)라고 하는데, 이는 중국 말의 왕(王)과 같은 말이다. 여진 사람들이 그가 일을 잘 처리하는 데 감복해서 수령으로 추대한 것이다. 순화(淳化) 2년(991)에 발해가 조공을 바치지 않자 여진에 조서를 내려서 발해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발해 사람 수급 하나에 비단 5필씩으로 쳐주었다. 그 뒤에 드디어 고려로 귀화하여 복속되었다 이때에 이르러서 고려의 사신과 함께 오자, 숙소와 음식 및 잔치를 베풀어 주는 예를 고려의 사신에게 해 주는 것과 똑같이 하였다. 8년에 다시 사신을 보내왔는데, 고려의 사신을 따라 함께 왔다

 《문헌통고》

 

여진은 북한 백두산의 북쪽에서 흑룡강까지 살던 부족을 말한다. 서쪽은 송화강일대 동쪽은 동해이다. 이들의 왕은 신라사람이며 고려에 속해있다. 그럼 바보가 아니면 그땅이 고려땅인 것을 알것이다.(국사학계는 바보가 매우 많다. 고려가 압록강 근처도 못갔다고 주장하니 어찌 바보가 아닌가) 

 

 고려의 예빈성(禮賓省)에서 복건전운사(福建轉運使) 나증(羅拯)에게 이첩하기를,

“본조의 상인 황진(黃眞)ㆍ홍만(洪萬)이 와서 말하기를, ‘복건전운사가 황제의 밀지(密旨)를 받았는데, 고려와 접촉하여 통호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송사)

 

복건성에서 고려와 접촉하라는데!!! 이걸보고도 복건근처에 고려땅이 없엇다고 주장하면 눈이 없는 것이다.

(국사학계는 눈이 먼사람이 매우 많은 것같다)

 

 

 이에 앞서 고려에서 공물을 바칠 때마다 문득 유사에게 내려 그 값을 헤아린 다음 1만 겸(縑)을 대가로 주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값을 헤아리지 말고 1만 겸을 정수로 삼도록 하였다   (송사)

 

고려가 준 공물은 조금이요 대신 송에서 준 돈은 많으니 송이 고려의 군사력보다 약하다는 반증이다. 명과 청이 교역을 할적에 명이 막대한 보물을 바치면 청은 고작 모피 몇장이었다. 한족들이 동이족이 조공한다고 표현했지만 실상은 지들이 우리한테 막대한 보물을 갖다 바친것이다. 

 

 

 철종(哲宗) 원우(元祐) 4년 선종 6년 11월에 항주(杭州)를 맡고 있는 소식(蘇軾)이 상주(上奏)하기를,

“고려의 승통(僧統) 의천(義天)의 수하인 승(僧) 수개(壽介) 등 5인이 고려 예빈성(禮賓省)의 공문을 가지고 왔는데, 거기에 말하기를, ‘국왕의 명을 받들어 수개 등으로 하여금 의천이 지은 제문(祭文)을 싸 가지고 항주로 가서 승 원사리(源闍梨)를 제사 지내게 한다.’고 하고  《동파집》

 

절강성 항주근처에 고려땅이 없으면 의천은 무슨수로 한반도에서 요나라땅을 거쳐 항주까지 오겠는가 의천에게 날개가 있는모양이다.  삼국사기에 신라사람이 굶주려 절동(절강의동쪽)에 가서 먹을 것을 구했는데 역시 신라사람은 날개가 있었던 모양이다.국사학계는 어서빨리 날개달린 사람들을 찾아서 증명해라.  (우리민족은 천사의 후손인 모양이다.옛부터 날개가 있었으니 말이다 아하 고구려가 우리 민족은 천손의 후예이다라고 했으니 그말이 맞는 갑다 역시 우리는 대단한 민족임에 틀임없다. 고려때까지는 날개가 있는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다^^)

 

 5년에 선종 7년 다시 고려와 사신을 통하여 은기(銀器) 5천 벌을 하사하였다. 《송사》

 

송나라가 미친것이 아닌가 은제품을 5천 벌이나 주다니 송나라가 굉장히 급했던 모양이다. 고려에게 막대한 금은보화를 주고 무엇인가 얻으려는 것이 있엇던 듯하다.

 

 고려에서 들어와 조공을 바치는 것은 조금도 이익이 없는 반면에 다섯 가지의 손해되는 일이 있습니다. 지금 고려에서 사 가기를 청하는 여러 서책과 금박(金箔)을 수매(收買)하는 것은 모두 허락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하니, 조칙을 내려 금박을 사는 것만 허락하였다. 그러나 마침내는 《책부원귀(册府元龜)》를 사 가지고 돌아갔다

(송사)

 

내말이 맞다는 것이 위에 있다. 고려는 이득만 본다

 

 금 태조 수국(收國) 원년 예종 10년 9월에 태조가 이미 황룡부(黃龍府)를 함락시키고 가고살갈(加古撒喝)에게 명하여 보주(保州)를 공격하게 하였다. 보주는 고려와 가까운 곳에 있는바, 요나라가 고려를 침입해서 보주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네가 적은 군사를 거느리고 여러 차례 많은 적을 격파하여 포로로 잡은 자들이 많았었다. 또 들으니, 오랑캐 땅의 사막에서 여러 차례 싸워 공을 세웠다고 하는바, 짐이 몹시 가상하게 여긴다. 만약 보주가 함락되지 않거든 변방만을 굳게 지키라

(금사)

 

 황룡부는 요하상류에 있다 그곳에서 군대를 나누어 가고살갈에게 병력을 주고 요하하류로 내려가라고 한것이다. 문맥을 보면 바보도 이해할수 있다.고려와 거란과 금이 대립했던 보주는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에 귀순한다. 보주의 위치는 거란지리도상에는 대릉하와 요하사이인데 멍청한 국사학계가 자꾸 압록강이라 주장한다. 그럼 위의 글을 보라 북한 압록강에 언제부터 사막이 있었느냐 대답좀 해보쇼 국사학계 양반님들!!!!(대답할리가 없지 지가 아는 지식만 진실이라고 생각하니)

 

 

 요 천경(天慶) 10년에 예종 15년 고려에서 군대를 파견하도록 요청하여 금나라를 막고자 하였는데, 금나라에서 힐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요나라가 망하였다. ○ 고려는 요나라와 더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관계를 맺은 것이 2백여 년이었다. 《이상 모두 요사》

 

 

 왕우가 왕위에 있을 적에 중국 조정에 의원(醫員)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였는데, 조서를 내려서 2명의 의원이 가도록 하였다이 의원들이 2년을 머무른 뒤 돌아왔는데, 왕해가 의원들에게 말하기를,

“조정에서 장차 군사를 일으켜 요나라를 정벌할 것이라고 하는데, 요나라는 형제(兄弟)의 나라로서 그들을 그대로 두면 변경의 방패가 되기에 충분하다. 여진(女眞)은 호랑이와 같으니, 그들과 사귀어서는 안 된다. 이미 사태가 그러하니 두 의원은 돌아가서 천자께 보고하여 일찌감치 방비하기 바란다.”

하였다. 두 의원이 귀국하여서 이를 아뢰었으나, 이미 소용이 없었다. 《송사》

 

 

고려황제가 요나라를 형제의 나라로 생각했다니 의외이다. 서희가 소손녕과 협상할때 서로가 고구려의 후예임을 내세웠는데 이때부터 서로 형제국가임을 인지 한듯하다. 게다가 서로 혼인까지 했으니 말이다. 우리는 금나라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불렀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요와 고려가 형제국가임은 잘몰랐다. 요,금의 역사를 우리 민족의 역사로 넣어야 하는 이유이다.

 

 12월에 고수(高隋)와 사야(斜野)가 고려에 사신으로 나갔는데, 국경에 도착하였을 때 고려에서 접대하는 예가 불손하였다. 이에 고수 등이 감히 고려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태종이 이르기를,

“고려는 대대로 요나라에 대해 신하로서 섬기고 있었으니, 요나라를 섬기던 예로 우리나라를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현재 국상(國喪)이 났고 요나라 황제를 잡지 못하였으니,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지는 말라.”

하고는, 고수 등에게 되돌아오라고 명하였다. 《금사》

 

  2년 인종 2년 5월 을사에 갈라로 군수(曷懶路軍帥) 완안홀랄고(完顔忽剌古) 등이 아뢰기를,

“지난날에는 고려의 경내에서 해마다 물개[海狗], 송골매[海東靑], 난추니[鴉鶻] 등을 잡았습니다. 이에 배 2척을 들여보내 잡게 하였는데, 고려에서 전함 14척을 끌고와 우리 배를 요격해서 두 배에 탔던 사람을 모두 죽이고 무기를 빼앗아 갔습니다.”

하니, 황제가 이르기를,

“작은 일로 해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니다. 이후로는 명령을 받지 않았으면 함부로 고려의 경내로 들어가지 말라.”

  《금사》

 

 고려에 통문(通問)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일반적인 규례를 어기지 말라. 혹시라도 고려에서 침략해 오면 너의 군사를 정돈해서 대항하라. 감히 먼저 고려로 쳐들어갈 경우에는 비록 승리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내릴 것이다

 《금사》

 

금나라가 고려에 대해 깍듯이 대했다는 것을 위에서 보면 알수 있다. 고려의 경계를 넘지말며 넘었다가는 큰벌을 줄것이다라고 금나라황제가 말했다.  

 

 

  송 선화(宣和) 7년에 인종 3년 흠종(欽宗)이 즉위하니 하례(賀禮)하는 사신이 명주(明州)에 이르렀다. 어사(御史) 호순척(胡舜陟)이 말하기를,

“고려가 국가를 피폐하게 한 지가 50년이 되었습니다. 정화(政和) 이래로 사신이 해마다 와서 회수(淮水)와 절강(浙江) 지방에서는 이를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저들이 옛날에 거란을 섬겼으니, 지금은 반드시 금나라를 섬길 것으로, 우리의 허실(虛實)을 엿보아서 금나라에 보고하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들을 오지 말도록 해야 합니다《송사》

 

고려사신이 회수와 절강으로 통해서 온다고 한다. 왜그럴까 회수이북이 고려땅이어서 그런것이 아닌가 이를 통해 당시의 국경을 예측할수 있다. 요가 고려와 송사이에 끼어있다. 요는 송의 수도 변경근처까지 내려온 것이고 고려는 변경즉 개봉의 동쪽에 있고 고려가 개봉으로 가려면 요의 정탐을 받을수 있으니 회수로 내려가서 절강을 통해 위로 올라온 것이다. 

 

 

 2년에 인종 6년 황제가 조서를 내려 멀리 떨어져 있는 외국에 사신으로 갈 사람을 모집하니, 절동로 부총관(浙東路副摠管) 양응침(楊應忱)이 살펴보건대,  조서에 응하여 가기를 청하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아버지가 변방의 관리에 임명될 때 그곳에 따라갔었기 때문에 오랑캐의 실정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고려와 여진과는 길이 매우 가깝습니다. 신이 삼한(三韓)에 사신으로 가서 계림(鷄林 고려를 가리킴)과 결탁한 다음 연운(燕雲) 지방으로 가겠습니다.”

하였다. 《송사》

 

 

위의글 읽어보고도 고려가 어딨는지 모르겠으면 지도를 자세히 보라  고려와 결탁하여 연운즉 연주와 운주 황하북쪽으로 가겠다고 한다. 절동이라함은 절강의 동쪽이니 거기서 고려땅이 바로 위이다. 게다가 계림즉 신라땅이 회수이북에 있었음을 알수있다. 즉 삼한의 위치도 알려주었다. 송은 정안국을 마한의 옛땅이라 했는데 마한이 사실상 변한과 진한의 주인이므로 마한이란 말이 삼한과 거의 일치한다고 보면 된다. 즉 삼한은 회수의 북쪽에서  황하북쪽 대릉하일대와 북한 압록강과 만주 남부 한반도를 모두포함하는 땅이었다. 

 

 양응침은 황제를 속이고서 스스로 자신을 위한 계책만 세웠을 뿐입니다. 만약 고려에서 ‘대국에서 길을 빌어 연운 지방에 이르게 됨에, 금나라 사람들이 혹 길을 물어 오월(吳越 송나라를 가리킴) 지방을 엿보려 할 경우 장차 무슨 말로 대답하겠는가.’라고 하면서 거절하게 되면 반드시 황제의 명을 욕되게 하고 먼 오랑캐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니, 보내지 마시기 바랍니다.”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송사)

 

 금나라 사람들이 현재 배를 만들면서 절동(浙東)과 절서(浙西) 지방으로 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 만약 사신을 인도하여 금나라로 갔다가는 뒷날에 금나라에서 우리 고려에 길을 빌어 절강(浙江)으로 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무슨 말로 대답하겠습니까

 《송사)

 

금나라와 송사이에 고려가 있음을 인제 삼척동자 도 알수있다. 그런데 국사학계는 모르니 앞으로 어린이들앞에서 어른인척하지마라 댁들 생각수준이 삼척동자보다 못하니 어찌 어른인척한단 말인가  

 

 고려인이 사신으로 들어올 때마다 명주(明州)ㆍ월주(越州) 두 군(郡)에서는 그들을 지공하는 데 곤욕을 치르는 탓에 시끄러워 편안치가 못하였다. 궁궐에 도착하고 나서는 관소에서의 접대와 향연의 비용 및 하사해 주는 물품의 비용이 수만금을 헤아렸는데, 고려의 임금에게 주는 것은 제외하고도 그만큼이나 들었다《문헌통고》

 


 고려를 의지하여 화친을 구하려고 하였다면, 저들이 어찌 송나라 사람의 싸움을 중지시키는 맹약(盟約)을 주장하여 하겠으며, 고려를 의지하여 국난(國難)을 구원하려고 하였다면, 저들이 어찌 진백(秦伯)의 무의(無衣)의 시(詩)를 본받겠는가. 또 당시에 공손한 말로 구청(求請)하는 사신으로 보낸 부우(傅雩)ㆍ왕륜(王倫)과 같은 무리들도 일찍이 금나라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문헌통고》

송나라가 고려에 빌붙어 금나라의 침공을 막아보려 했는데 당대에 고려에서 병력을 파견한 기록이 전주이씨 족보에 있다. 

 

 조위총이 서경(西京)을 근거지로 하여 왕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다음 서언평(徐彦平) 등 96명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아뢰기를,

“전왕이 사실은 왕위를 피하여 양위한 것이 아니라, 대장군 정충부(鄭沖夫), 살펴보건대, 《고려사》에는 정중부(鄭仲夫)로 되어 있다. 낭장 이의방(李義方)에게 시해당하였습니다. 신 조위총은 자비령(慈悲嶺) 서쪽에서 압록강 동쪽까지의 사이에 있는 40여 성을 바치고 내속(內屬)하겠으니, 군사를 보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금사)

 

금나라당시에 고려의 서경은 압수(요하)동쪽에 있었다. 그렇다면 초기 서경은 대릉하의 조양시인데 요나라가 망한뒤 서경을 압수동쪽의 발해의 옛서경인 심양근처로 옮긴후 원나라때까지 서경을 심양근처로 했다는 말이다. 이후 원나라가 고려땅북쪽을 뺏어가자 서경을 다시 조양시로 이전하고 조선이 이를 평양부로 이름붙였다는 것이된다.

 

 

  23년 명종 13년 12월에 왕호의 어머니 임씨(任氏)가 훙하였다. 왕호가 생일사 및 하례사(賀禮使), 회사사(回謝使) 등의 파견을 중지시켜 달라고 청하니, 조서를 내려서 따라 주었다. 《금사)

 

고려사에는 요와 금에서 고려황제 생신에 사절을 보내 축하했다고 하는데 금사에는 고려에서 생일축하를 해줬다고 하니 서로 동맹관계요 동등관계임을 알수있다. 고려는 요와 형제국으로 금과도 형제국으로 지냈으며 서로황제의 생일을 축하하였다는 것이 가장 논리적이다. 

 

2 년 경술에 고종 17년 정행만호(征行萬戶) 매노(買奴)가 고려를 정벌하기 위해 화량성(花凉城)을 공격하였는데, 감군(監軍) 장익(張翼)ㆍ유패(劉覇)가 모두 고려 군사에게 죽었다. 이에 매노가 노하여 말하기를,

“두 장수가 적에게 죽었으니, 의리상 혼자서만 살아 돌아갈 수가 없다.”

하면서 곧바로 나가 싸워 적을 격파하여 우두머리 장수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위무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진군하여 개주(開州)를 공격해 개주의 장수 김사밀(金沙密)을 포로로 잡았다. 성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동남동녀 및 금옥으로 만든 기물을 바쳤는데, 모두 받지 못하도록 명을 내렸다. 드디어 용주(龍州)ㆍ선주(宣州)ㆍ운주(雲州)ㆍ태주(泰州) 등 14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원사)

 

해동역사주석에는 개주를 봉황성즉 요동반도남단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는 조선후기의 해석일뿐 개주는 개모성을 개칭한 것으로 알려져있으니 아마도 요하근처일것이다.  선주가 요하서쪽에 있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송도는 백성들의 호구 수가 10만이 넘고 기와집이 줄지어 늘어섰는데, 이를 모두 버리고 간 것이다. 《명산장왕향기(名山藏王享記

 

 

 10월에 왕철이 다시 군사를 파견해서 이미 원나라에 귀부한 서경(西京) 등처의 항복한 백성들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홍복원의 집을 빼앗았다. (원사)

 

송나라나 금나라도 원나라에 빼앗긴 땅을 무력으로 다시 찾지는 못했다. 그런데 고려는 무력으로 회복했다. 대단한 나라이다.

 

 《원사》 야율유가열전(耶律留哥列傳)에는, “야율유가는 설도유가(薛闍留哥)의 아들이다. 태종 경인년에 광녕로도원수(廣寧路都元帥)가 되어 경인년부터 정유년까지 잇달아서 고려 및 동하(東夏)를 정벌하여 6천여 호(戶)를 회복하였다.”

 

광녕은 요하와 대릉하사이에 의주바로 북쪽이다. 광녕로도원수가 요하 서쪽의 동하즉 동진을 정벌하고 요하 하류지방의 고려까지 공격했으니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생각이 있으면 광녕에 주둔한 원나라군이 압록강이남까지 밀고 내려온다는게 말이 되는가 차라리 북한 압록강이북에 별도로 부대를 마련하지 왜 광녕주둔군대를 보내나!!!

 

 

 《원사》 왕순열전(王珣列傳)에는, “왕영조(王榮祖)가 제왕(諸王) 야홀(也忽)을 따라 삼한(三韓) 지역을 정벌하여 천룡(天龍) 등 여러 진보(鎭堡)를 함락하였는데, 군사들에게 난폭하게 약탈하는 것을 금지시키니 백성들이 모두들 기뻐하여 복종하였다. 이에 황제가 그 공을 가상하게 여기어 금폐(金幣)를 하사하였다. 진을 고려의 평양(平壤)으로 옮기자, 왕영조가 백성들을 모집하여 주둔해 지키면서 땅을 1천여 리나 개척하였다

 

고려땅이 넓기는 넓은가 보다 평양주변 1천리나 뺏겼다.

 

 

  이제 장차 송나라를 치려고 하는데, 보내줄 사졸과 전함(戰艦)의 숫자는 얼마나 되고, 수송할 군량은 제대로 비축하였는가? 그리고 관장을 두고 호적을 작성하는 등의 일에 대해 왕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에 묻는 바이다

 이번에는 남송을 정벌하거나 혹 일본을 정벌할 것이다. 그러니 너희 임금은 마땅히 배 1천 척을 만들되, 4천 석 정도를 싣고 큰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배를 만들어야 한다

황제가 이르기를

“너희 나라에서 온 사람이 바다의 일에 대해서 말하기를, 송나라는 순풍이 불 경우 3일 만에 도달할 수가 있고 일본에는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에 도달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 배에다 쌀을 싣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먹으면서 가면 어찌 가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7월에 고려가 신하 최동수(崔東秀)를 파견하여 와서 군사 1만 명과 배 1천 척을 만들었다고 말하였다

(원사)

 

송나라정벌에 고려의 군대와 전함이 많이 파견되었다는 증거이다. 거대한 몽골이 무엇때문에 고려의 전함을 불렀겠는가 송나라 바로위가 고려이니 부른것이지 금나라가 바로위라면 금나라전함을 동원할게 아닌가 !!!!!  한반도에서 송나라의 절강까지 3일만에 배를 타고 도착하면 기적이다. 차라리 날개달린 배라고 국사학계가 주장하는게 더 낫겠다!!!   5월에 배만들라고 시켜서 7월에 1천척이나 만들었으니 고려의 국력이 아직 대단함을 알수있다.  일본이 신라침공을 준비할 당시 3년에 5백척을 만들었다. 일본보다 고려가 국력이 10배는 됨을 알수있다.

 

 

 

 4월에 동경의 행상서성(行尙書省) 군대를 서경에 가까이 가서 주둔하게 하고, 철철도(徹徹都) 등을 파견하여 왕식의 신하 정자여(鄭子璵) 등과 함께 행서성의 차자(箚子)를 가지고 고려국의 영공(令公) 임연(林衍)을 소환하게 하였는데, (원사)

 

 4월에 동경의 행상서성(行尙書省) 군대를 서경에 가까이 가서 주둔하게 하고 (원사)

 . 11월에 중서성의 신하가 고려에 둔전경략사(屯田經略司)를 설치하자고 말하였다. 이에 흔도(忻都)ㆍ사추(史樞)를 봉주등처경략사(鳳州等處經略使)로 삼은 다음 호부(虎符)를 차게 하고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서 금주(金州)에서 둔전하게 하였다 (원사)

 

 

 . 그러고는 이어 홀림적(忽林赤)ㆍ왕국창(王國昌)ㆍ홍다구(洪茶邱)에게 군사를 거느리고서 조양필을 바닷가까지 호송하여 가게 하고, 국신사가 귀국할 때까지 우선은 금주(金州) 등처에 주둔해 있게 하였다. 그러니 그들이 필요로 하는 군량은, 경이 전임관을 금주로 파견하여 공급하게 하고, 아울러 금주 근방에 있는 선척을 모두 한곳으로 모아 금주에서 쓸 수 있도록 대비하게 하되, 시일을 지체하여 모자라는 일이 없도록 하라.”(원사)

 

원나라 군대가 고려땅에 둔전을 설치한다고 하고 그장소는 금주이다. 즉 요동반도 서남쪽 해안이 당시의 금주이다. 이땅이 고려땅이니 원나라 황제가 금주에 있는 선박을 모아서 쓸수있도록 대비하라고 지시했다. 이거보고도 금주가 고려땅이 아니라고 하면 시력검사를 받아야 한다. 국사학계는 김해라고 생각하는데 원나라황제가 한반도에 대해 자세히도 알구나 후당은 고려황후를 하동군부인으로 책봉했는데 역시 후당이 한반도에 대해 잘알구나  당시에 하동은 황하동쪽을 말하는 것이지 한반도 하동은 중원사람은 듣도보도 못한 곳이다. 세계를 정복한 원나라 황제가 얼마나 지리에 대해 잘알기에 한반도 김해를 알겠느냐  으이구 !!!!! 하긴 북제왕이 백제황제에게 동청주자사라는 작위를 올린것을 두고 한반도 청주라고 주장할 사람도 있으니  난 아직도 상해가 어디붙어있는지 정확히 모르는데 중원사람들은 한반도에 관심이 많은것 같다.

 정묘에 고려국 압록강 서쪽에 있는 19개의 역(驛)이 내안(乃顔)의 반란을 겪는 동안에 마축(馬畜)을 모두 약탈당하였으므로, 소 각 40마리씩을 지급해 주었다 《원사》

 

압록강서쪽에도 고려땅이 있다고 위에 써있다. 

 

 순제(順帝) 원통(元統) 원년 충숙왕 후 2년 고려국의 사신이 경사에 조회하러 가면서 요양(遼陽)을 지나게 되었다. 요양성의 관원을 알현하면서 포목 4필과 서신 1통을 올렸는데, 거기에 정동성(征東省)의 도장을 찍어 봉하였다. 《원사》

 

고려국사신이 경사로 가는길에 요양을 지났으니 요양의 동쪽에서 고려국사신이 간것이다. 아마도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을 것이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는 진후(晉侯)가 나라를 세운 때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8백여 년이 되었는데, 비로소 삼성(三姓)을 바꾸었다. 당나라 이전에는 소위 고려(高麗 고구려를 가리킴)라고 하는 나라는 삼국 가운데 한나라에 지나지 않았으며, 오대(五代) 이후에는 삼한과 백제를 병합하여 하나로 통일하였으나, 승국(勝國 원나라를 가리킴) 때에는 오히려 탐라(耽羅)가 독립된 나라로 있었다. 지금은 탐라 역시 차지하여서 국토의 넓이가 수나라나 당나라가 정벌하러 갔을 때 비해 이미 몇 배는 된다. 그러나 그 나라는 자못 예의를 숭상하고 분수를 잘 지킨다. 이에 명나라에 들어와서부터는 중국 조정을 공손하게 섬겨, 철마다 조공을 바치면서 신하로서의 예절을 폐하지 않고 있다.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

 

명나라때 지어진 책 대학연의보에는 고려가 고구려보다 몇배나 넓다고 한다.조선이 고구려보다 넓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수나라때 고구려가 동서6천리 남북4천리인데 조선은 동서7천리이상 남북 7천리이상으로 더크다.

 

 

 5년 공민왕 21년 왕전이 예부 상서 오계남(吳季南), 민부상서 장자온(張子溫)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치고 표문을 올려서 말하기를,
“탐라국이 험하고 거리가 먼 것을 믿고는 조공을 바치지 않고 있으니, 탐라에 남아 살고 있는 몽고 사람들을 모두 옮겨야만 합니다. 그리고 난수산(蘭秀山)에는 도망친 자들이 모두 모여 있는데, 이들이 노략질할까 걱정되니, 군사를 동원해 토벌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새서를 내려 이르기를,

“탐라는 너희 나라에 속하였으며, 몽고 사람들도 역시 사람의 무리다. 난수산에 모여 있는 도적들은 짐의 조서를 내보이기만 하면 곧바로 나오게 할 수 있으니, 군사를 쓰지 않는 것이 편하다.”

하였다. 《오학편(吾學編)》

 탐라는 대만이다.  난수산은 절강에 있는 산으로 고려가 절강의북쪽에 영토가 있으니 주원장에게 난수산의 해적들을 토벌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지금 고려는 중국에서의 거리가 조금 가까우며, 사람들이 경사(經史)와 문물(文物)을 알고 있다. 그러니 3년마다 한 차례씩 조빙(朝聘)하는 예를 행하게 하거나 혹 1년마다 공물을 바치게 하되, 단지 그 나라에서 산출되는 포(布)로 바치며, 포의 숫자는 10필을 바치게 하라. 이러한 짐의 뜻을 그들에게 고해 주라.”하였다. 《명산장왕향기》

고려가 중국에 가깝단다. 절강북쪽에 있으니 당연히 명나라수도 남경과 가까운게 아닌가 국사학계 거짓말장이들은 한반도랑 남경이랑 가깝다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그들은  방향감각과 거리개념이 없는 사람들이다. 

 

 

  명나라에서 요왕(遼王) 식(植)을 위하여 성곽을 쌓고 궁실을 지었다. 그때 마침 고려에서 국중(國中)부터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모두 양곡을 저장하니, 황제가 고려에서 음모를 꾸밀까 염려하여 공사를 중지하도록 명하였다. 《이상 모두 명사》

 

고려의 실권자 최영이 거지출신 주원장이 황제를 칭하자 토벌하기 위해 대군을 준비중이었다. 이를 눈치챈 명나라가 깜짝놀라 대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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