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주(開州)를 동경(東京)으로 삼고,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으로 삼았다. 왕건은 검소하고 관대하였으므로 백성들이 편안하게 여겼다. 《자치통감》

 

자치통감은 당나라때 쓴것인데 그렇다면 신라수도였던 경주가 당나라가 개주라고 부르는곳이다. 물론 고려가 개주라 부르는곳과 다른곳이다..

 

  경주(慶州)

《요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주(開州) 진국군(鎭國軍) 절도(節度)는 본디 예(濊), 맥(貊)의 지역으로, 고구려 때에는 경주였고, 발해 때에는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였는데, 통할하는 현은 하나이다. 개원현(開遠縣)은 본디 책성(柵城) 지역으로, 고구려 때에는 용원현(龍原縣)이었고, 발해 때에는 그대로 답습하였다

 

 일통지(一統志)》에는, 봉황성은 본래 예(濊)의 땅이었는데 발해(渤海) 때에 들어와서 동경(東京)의 용원부(龍原府)가 되었고, 요(遼)에서는 개주진국군(開州鎭國軍)이라고 하였고, 원(元)에서는 동녕로(東寧路)에 예속시켰다. 거리가 반듯하고 좌우의 물건 파는 가게들은 다 화려하고 집들은 거대한데, 각기 주로 파는 상품의 이름을 걸어 놓고 있다

 

 특이하게 신라수도 경주를 요사에서 개주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3년 태조 21년 8월에 청주(靑州)에서 왕건이 즉위하고는 글을 올려 고려국에서 볼모로 와 숙위(宿衞)하고 있던 왕인적(王仁翟)을 향리로 돌려보내 주기를 청하였는데, 허락하였다. 《책부원귀

 

청주는 한반도가 아니고 산둥성 청주를 말함이다. 왕건이 송나라에서 청주라고 부르는 산둥에서 왕위에 올랐음을 지들이 기록하고 있다.개경역식 청주근처임을 알수 있다.

 

진정 등이 사신으로 갈 때 동모(東牟)에서 출발하여 팔각해구(八角海口)로 나갔다. 그곳에서 고려 사신 백사유가 탄 배와 고려의 수공(水工)을 만나 그 배를 얻어 탔다. 곧 길을 떠나 지강도(芝岡島)로부터 순풍을 만나 바다에서 이틀 밤을 지내고 옹진(甕津) 어귀에 닿아 상륙한 뒤, 다시 육로로 1백 60리를 가서 고려의 경내인 해주(海州)에 닿고, 또 1백 리를 가서 염주(閻州)에 닿고, 또 40리를 가서 백주(白州)에 이르고, 또 40리를 가서 그 국도(國都)에 이르렀다.  송 순화 4년 성종 12년 《송사》

여기서 말한 국도는 서경즉 고구려의 평양성이며 왕검성인 대릉하의 조양시이다. 해주즉 고죽국이 바로 난하 서쪽이기 때문이다.

 

또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고죽국(孤竹國)과 이웃이 되어, 본래 청렴하고 겸양함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최치원(崔致遠)

 고죽국(孤竹國. 이첨(李詹)은 지금의 해주(海州)라 하고, 본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죽국이 난하하류이고 해주임을 알수있다.

 

  봄 3월에 후당에서 태복경(太僕卿) 왕경(王瓊)과 태부소경(太府少卿) 양소업(楊昭業)을 보내와서 왕을 책립하여 특진검교태보사 지절현도주도독 상주국충대의군사(特進檢校太保使持節玄菟州都督上柱國充大義軍使)로 삼고, 이어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봉하였으며 

고려사절요 태조 933년

 

송 함평(咸平) 6년에 목종 6년 왕송이 호부 낭중(戶部郞中) 이선고(李宣古)를 사신으로 보내어 조회하면서 사은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후진(後晉)에서 연(燕)과 계(薊) 지방을 거란에게 빼앗긴 탓에 드디어 현도(玄菟)와 통하는 길이 생겨 번번이 와서 공격하면서 요구하는 것이 끝이 없으니, 송나라 군사를 변경에 주둔시켜서 이를 견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조서를 내려 정중하게 답하였다. 《송사》

 

 

거짓말쟁이 국사학계 교수님들 허위주장이 모두 들통났다. 연과 계지방이란 베이징 서쪽을 말함이다.

지도상의 연운16주를 말함이다. 연과 계지방이 거란에게 빼앗긴뒤에  현도와 통하는 길이 생겼다고 하니 현도는 연과 계지방과 가깝다.

 

 송나라 군사가 변경(개봉)에 주둔하면 거란군이 하북과 산둥일대로 진격하는 것이 제한을 받는다 왜냐면 개봉에서 송나라군이 북진하면 거란군은  배후를 기습받을 수있기 때문이다. 즉  송나라때 현도의 위치는 하동즉 하북 산둥일대를 말함이다. 그렇다면 고려의 국도 개경은 변경의 동쪽에 있다.

 

10월 병인에 상온(詳穩) 장마류(張馬留)가 고려에 대해 잘 아는 여진 사람을 바쳤다. 황제가 고려에 대해 물으니, 답하기를,

“신이 3년 전에 고려에 포로로 잡혀 낭관(郞官)으로 있으므로 잘 알고 있습니다. 개경에서 동쪽으로 말을 타고 7일을 가면 넓기가 개경만 한 큰 성채가 있는데, 주위의 여러 주에서 보내오는 진귀한 물품이 모두 이곳에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승라주(勝羅州) 등의 살펴보건대, (승라주가 《송사》에는 승라주(昇羅州)로 되어 있다.) 남쪽에도 두 개의 큰 성채가 있는데, 마찬가지로 물품이 쌓여 있습니다. 만약 대군이 전로(前路)를 따라가서 갈소관여진(曷蘇館女眞)의 북쪽 길을 취하여 곧장 압록강과 대하(大河)를 건넌 다음 올라가면 곽주(郭州)에 이르러서 큰길과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할 경우 고려를 취하여서 차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 말을 받아들였다   (요사)

 

서경이 개경의 동쪽에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개경에서 동쪽으로 말을 타고 7일 가면 서경이 있다. 이거 보고도 서경이 개경의 서쪽에 있다고 주장하면 바보이다.(국사학계는 바보가 많다) 남쪽의  두개의 큰성채는 남경을 말하는 것이다

 

 송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왕은 개주(開州) 촉막군(蜀莫郡)에서 사는데, 이곳을 개성부(開城府)라고 한다. 신라 지역을 동주(東州) 낙랑부(樂浪府)로 삼아 동경(東京), 백제 지역을 금주(金州) 금마군(金馬郡)으로 삼아 남경(南京), 평양(平壤)을 진주(鎭州)로 삼아 서경(西京)이라고 부르는데, 서경이 가장 번성하다

 

위의 대청광여도에서 개주의 위치가 송나라가 청주라 부르는곳근처에 위치한다. 이곳이 개경일 가능성이 제일높다.

 

 

왕우가 왕위에 있을 적에 중국 조정에 의원(醫員)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였는데, 조서를 내려서 2명의 의원이 가도록 하였다이 의원들이 2년을 머무른 뒤 돌아왔는데, 왕해가 의원들에게 말하기를,

“조정에서 장차 군사를 일으켜 요나라를 정벌할 것이라고 하는데, 요나라는 형제(兄弟)의 나라로서 그들을 그대로 두면 변경의 방패가 되기에 충분하다. 여진(女眞)은 호랑이와 같으니, 그들과 사귀어서는 안 된다. 이미 사태가 그러하니 두 의원은 돌아가서 천자께 보고하여 일찌감치 방비하기 바란다.”

하였다. 두 의원이 귀국하여서 이를 아뢰었으나, 이미 소용이 없었다. 《송사》

 

송 선화(宣和) 7년에 인종 3년 흠종(欽宗)이 즉위하니 하례(賀禮)하는 사신이 명주(明州)에 이르렀다. 어사(御史) 호순척(胡舜陟)이 말하기를,

“고려가 국가를 피폐하게 한 지가 50년이 되었습니다. 정화(政和) 이래로 사신이 해마다 와서 회수(淮水)와 절강(浙江) 지방에서는 이를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저들이 옛날에 거란을 섬겼으니, 지금은 반드시 금나라를 섬길 것으로, 우리의 허실(虛實)을 엿보아서 금나라에 보고하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들을 오지 말도록 해야 합니다《송사》

 

고려사신이 회수와 절강으로 통해서 온다고 한다. 왜그럴까 회수이북이 고려땅이어서 그런것이 아닌가 이를 통해 당시의 국경을 예측할수 있다. 요가 고려와 송사이에 끼어있다. 요는 송의 수도 변경근처까지 내려온 것이고 고려는 변경즉 개봉의 동쪽에 있고 고려가 개봉으로 가려면 요의 정탐을 받을수 있으니 회수로 내려가서 절강을 통해 위로 올라온 것이다

 

2년에 인종 6년 황제가 조서를 내려 멀리 떨어져 있는 외국에 사신으로 갈 사람을 모집하니, 절동로 부총관(浙東路副摠管) 양응침(楊應忱)이 살펴보건대,  조서에 응하여 가기를 청하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아버지가 변방의 관리에 임명될 때 그곳에 따라갔었기 때문에 오랑캐의 실정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고려와 여진과는 길이 매우 가깝습니다. 신이 삼한(三韓)에 사신으로 가서 계림(鷄林 고려를 가리킴)과 결탁한 다음 연운(燕雲) 지방으로 가겠습니다.”

하였다. 《송사》

 

 

위의글 읽어보고도 고려가 어딨는지 모르겠으면 지도를 자세히 보라  고려와 결탁하여 연운즉 연주와 운주 황하북쪽으로 가겠다고 한다. 절동이라함은 절강의 동쪽이니 거기서 고려땅이 바로 위이다. 게다가 계림즉 신라땅이 회수이북에 있었음을 알수있다. 즉 삼한의 위치도 알려주었다. 송은 정안국을 마한의 옛땅이라 했는데 마한이 사실상 변한과 진한의 주인이므로 마한이란 말이 삼한과 거의 일치한다고 보면 된다. 즉 삼한은 회수의 북쪽에서  황하북쪽 대릉하일대와 북한 압록강과 만주 남부 한반도를 모두포함하는 땅이었다

 

 

조위총이 서경(西京)을 근거지로 하여 왕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다음 서언평(徐彦平) 등 96명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아뢰기를,

“전왕이 사실은 왕위를 피하여 양위한 것이 아니라, 대장군 정충부(鄭沖夫), 살펴보건대, 《고려사》에는 정중부(鄭仲夫)로 되어 있다. 낭장 이의방(李義方)에게 시해당하였습니다. 신 조위총은 자비령(慈悲嶺) 서쪽에서 압록강 동쪽까지의 사이에 있는 40여 성을 바치고 내속(內屬)하겠으니, 군사를 보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금사)

 

금나라당시에 고려의 서경은 압수(요하)동쪽에 있었다. 그렇다면 초기 서경은 대릉하의 조양시인데 요나라가 망한뒤 서경을 압수동쪽의 발해의 옛서경인 심양근처로 옮긴후 원나라때까지 서경을 심양근처로 했다는 말이다. 이후 원나라가 고려땅북쪽을 뺏어가자 서경을 다시 조양시로 이전하고 조선이 이를 평양부로 이름붙였다는 것이된다

 

 

2 년 경술에 고종 17년 정행만호(征行萬戶) 매노(買奴)가 고려를 정벌하기 위해 화량성(花凉城)을 공격하였는데, 감군(監軍) 장익(張翼)ㆍ유패(劉覇)가 모두 고려 군사에게 죽었다. 이에 매노가 노하여 말하기를,

“두 장수가 적에게 죽었으니, 의리상 혼자서만 살아 돌아갈 수가 없다.”

하면서 곧바로 나가 싸워 적을 격파하여 우두머리 장수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위무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진군하여 개주(開州)를 공격해 개주의 장수 김사밀(金沙密)을 포로로 잡았다. 성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동남동녀 및 금옥으로 만든 기물을 바쳤는데, 모두 받지 못하도록 명을 내렸다. 드디어 용주(龍州)ㆍ선주(宣州)ㆍ운주(雲州)ㆍ태주(泰州) 등 14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원사)

 

해동역사주석에는 개주를 봉황성즉 요동반도남단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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