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 마루턱을
넘어오던 그날 밤이 그리웁구나.

맨드래미 피고지고 몇 해이던가
물방앗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아.
어이해서 못 잊느냐 망향초 신세
비나리는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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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 장사익 

서울 신사동 카센터에서 주차관리하던 장사익은
딱 3년만 노래에 인생을 바치기로 작정하고
집을 나섰다. 마흔 다섯,
무엇인가 새로 시작하기에는 두렵고 난감한 나이였다.

그러나 3년만이라도 평생 그리워 해온 일을 하고 싶었다.
1993년 공주농악에서 새납(태평소)으로 장원한 사람,
사물 놀이패를 따라다니며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새납 불던 사람,
무대 한쪽에 서 있다가 수줍게 웃던 사람,
주연들의 공연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한 곡 구슬프게 불던 사람,
그가 소리꾼 장사익이다.

◇ "내게 노래는 팔자고 운명이다"

지나온 세월은 고단하고 못마땅했다. 노래 없이 살 수 없었고
노래만으로 살 수도 없었다.
뿌리내릴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발길이 닿으면 가슴이 떠날 것을 재촉했고,

가슴이 닿는다 싶으면 회사가 문을 닫았다.
무역회사, 보험회사, 제지회사, 가구회사, 카센터….
30년 사회생활 동안 열 대여섯 곳을 떠돌았다.
노래말고는 재주도 기술도 없었다. 그는 어디서든 몸으로 때우는 일을 했다.
요령 없이 장롱을 나르다가 허리를 다쳐 고생도 했다.
3년 동안 카센터에서 그가 했던 일은 주차관리와 배터리 교환이었다.
노래…. 노래는 세상에 날 때부터 하고 싶었다. 충남 홍성군 광천의 농악대에서
장구 잘 치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중학교 시절 5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뒷산에 올라가 고함을 질렀고
노을지는 강둑에 서서 태평소도 불었다.
당시 농악대에서 태평소 불던 김관섭 아저씨가 평생 마음의 우상이었다.
마음에는 언제나 노래가 있었고, 방 한구석에는 늘 기타가 있었다.
고교 졸업 후 직장생활 3년 동안 저녁마다 음악학원엘 다녔다.
군대시절엔 광주 문선대에서 싱어도 했다. 좋은 시절이었다.
기타 치며 노래하던 좋은 세월은 짧았다.
세상사에 민첩하지 못한 농부의 아들이었고, 음악은 밥벌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이상을 위해 처자의 호구를 외면할 위인은 못됐다.

노래와 생활 사이에서 장사익은 고통스러웠다.
생활인으로 그는 노래할 수 없었고, 노래할 수 없는 소리꾼으로 그는 슬펐다.
가슴에서는 언제나 어린 귀로 들었던 김관섭의 태평소 소리가 울렸다.
본격적으로 노래를 시작하기 전에 찍은 사진은
대부분 찡그리고 풀죽은 얼굴이다.
노래를 시작한 후 찍은 사진 속 얼굴은 언제나 웃고 있다.
장사익, 그도 몰랐던 표정의 변화였다.
"내게 노래는 엄마의 탯줄 같아요. 노래 없이 살 수 없었어요.
그렇다고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못했어요. 먹고살아야 했으니까."

◇ 공연 끝에 유행가를 부르는 이유

장사익의 공연을 본 사람들은 묻는다.
어째서 공연의 마지막은 늘 유행가냐고.
소리꾼 장사익은 이벤트 회사가 키운 '기획 스타'가 아니다.
공연의 조역으로, 공짜 혹은 매우 싼값에 불러 다녔다.
그저 따라 다닐 뿐 무대에 서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그가 주인공인 무대는 언제나 뒤풀이 장이었다.
유명인들의 공연이 끝난 후,
출연진들의 노고를 격려하는 뒤풀이 자리가 장사익의 무대였다.
자기노래가 없었고, 유행가를 장사익 식으로 불렀다.
요즘도 공연마다 유행가를 부르는 것은 그랬던 시절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이유는 또 있다.
"내 노래의 가사는 모두 시에서 나왔어요. 내가 쓰지 않았을 뿐 인생철학이고
내밀한 일기인 셈이죠. 그래서 주관적입니다.
게다가 낯선 가사, 낯선 음, 낯선 방식이에요.
주관적으로 쓴 일기는 진지하고 어렵기까지 해요.
노래는 관객과 나 사이의 소통채널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진진한 대화는 어렵고 지루하기 십상입니다.
대화에는 유머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유행가는 관객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유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노랫말을 찾기 위해 시집을 읽는다고 했다.
서점에서 시집을 읽거나 신문과 잡지에 나온 시도 찾아서 읽는다.
내 마음과 통하는 시를 만나면 노래로 바꾼다.
누군가 좋다고 추천한 시라고 노래로 만들지 않는다.
자기 마음과 통하지 않는 시는 노래로 만들지 않는다.
장사익의 노래는 독백이자 내면의 일기이기 때문이다.

◇ "직접 작곡, 그러나 악보는 안 써"

그는 마음에 닿은 시를 찾으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흥얼거린다.
호흡에 따라, 또 불현듯 왔다가 사라지는 감정에 충실하며,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달이 뜨고 별이 질 때까지 읊조린다.
그 속에서 음은 자연스럽게 자라난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무정형이다.
국악, 재즈, 가요풍, 재즈풍이 구별 없이 섞여 든다.
그래서 처음 들으면 황당하다.
그러나 곧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의 노래, '섬' '국밥집에서' '허허바다'
'파도' '기침' 등을 들으면 확연해진다.
"시를 찾는 일이 노래 만드는 작업의 90%에요. 마음 통하는 시를 찾아
자꾸 읊조리는 동안 저절로 음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장사익을 두고 '노래를 작곡하는 사람이 아니라
빚는 사람'이라고 혹자는 말한다.
음이 만들어지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읊조린다.
누군가는 악보로 만들고, 또 누군가는 끼여들고 물러선다.
다양한 악기와 화음이 장사익의 노래 속으로 들어왔다가 나가기를 거듭한다.
그리고 비로소 노래가 탄생한다.
장사익의 노래에는 음 없이 '아니리'처럼 혹은 '
대사'처럼 읊조리는 부분이 종종 등장한다.

"내 노래는 흥얼거리는 동안 저절로 자라난 것입니다.
노래는 박자가 아니라 호흡이지요.
자연스럽게 자라나지 않는 부분에 억지로 음을 달지는 않습니다."
그는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게 아니라,
봄비 내리고 꽃이 피니 봄이라고 했다.
가을이 와서 낙엽 지고 서리 내리는 게 아니라,
낙엽 지고 서리 내리니 가을이라고 했다.

계절도 노래도 자연스러운 호흡이라고 했다.
장사익은 거의 두 시간에 이르는 공연 동안 잠시도 쉬지 않는다.
저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솟아날까 싶을 만큼 쏟아낸다.
무대 위에서 그는 혼신을 쏟고, 공연히 끝나면 무너진다.
"기진맥진할 정도로 쏟아내야 개운해요. 있는 대로 다 쏟아내는 거지요."
그는 공연이 끝나면 며칠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쉰다고 했다.

◇ 초로의 나이에 소리꾼 데뷔

장사익은 올해 쉰 여덟이다.
서른만 넘어도 '늙은이' 취급받는 한국 연예계에
그는 마흔 여섯, 수염 희끗희끗한 얼굴로 데뷔했다.
이미 30년 가까운 세월 직장생활을 한 후였다.
장사익은 지금이 가장 노래하기 좋은 나이라고 했다.
40대에는 사십 먹은 남자의 노래를 했고,
50대에는 오십 먹은 남자의 노래를 했다.
60, 70이 넘으면 지팡이 짚고 그 노인의 노래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배우기를 멈추지 않는다.
요즘은 혼자 붓글씨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너무 늦은 나이는 없으며 언제든 출발선에 설 수 있다고 했다.
출발선에 선 자는 행복하다고 했다.
무대 위에서 장사익은 전부를 건다. 모두를 걸고,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다. 관객이 한 명이든 1천 명이든 마찬가지이다.



"많을 때는 3천800명의 관객과 마주 서서 노래한 적이 있었어요.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관객은 나와 소통하지 않아요.
한 사람이 듣고 만족하지 않으면 백 사람이 들어도 만족할 수 없어요."
그는 무대에서 최선을 다 하지 않거나, 진정성을 잃은 적은 한번도 없다고 했다.
무대뿐만 아니라 생활에서도 그런 듯 했다.

집안 청소를 하고, 손님을 맞고, 차상과 다과상을 내오고, 치우기까지 했다.
인터뷰 중 택배 배달원의 전화를 받자 맨발에 고무신 꿰차고 제비처럼 달려나갔다.
손에는 어느새 주스 한 병까지 챙겨 들었다.
"내가 재발라요. 일 빨리 해야 마누라한테 욕 안 먹어유."
그는 시종일관 끝이 모호한 충청도 사투리로 이야기했고,

걸려온 전화를 큰 목소리로 받았다.
"그래, 그리혀어, 알았어어, 전화 줘."

내놓은 다과를 남기지 말고 먹으라고 했다.
함께 점심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숟가락을 놓고 기다리는 동안 그는 남은 음식을 꾸역꾸역 먹었다.
'아까운 음식을….' 인터뷰를 마치고 자신의 집 근처 서울 평창동 골목골목을
자동차로 돌며 전시관`문학관`박물관을 구경시켜주었다.
헤어질 때는 택시보다 버스가 재미있고 값도 싸다며
굳이 버스 정류장 근처에 내려주었다.
버스 편을 챙겨주고 친정 온 딸 배웅하듯 '어여 가라'고 여러 번 손을 흔들었다.

△장사익=1949년 충청남도 홍성군 출생. 1996년 KBS 국악대상,
음반으로 1집 '하늘가는 길', 2집 '기침', 3집 '허허바다',
4집 '꿈꾸는 세상'을 냈다.
5집을 준비 중이다.
악보도 없이 흥얼거리던 그의 노래 대부분은 나중에 발굴돼 세상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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