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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심수봉씨, 일 아사히신문에 10·26 비화 공개

작성일 작성자 melon

아래 아사히기사 원문번역&스캔   melon (본명: 박상진) 

 

( 클릭하시면 커다란 화면의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第一話

 

 

 

대통령 암살 그 곁에 있었던 나

 

어째서 나의 이야기를?
취재 신청을 받아 몇개월이나 고민했습니다. 일본 메디아와 접한 적이 없고 나는 일본에서 별로 알려지지도 않았는데.
인터뷰를 아주 싫어합
니다. 매스콤은 나를 "그 사건의 여자"로서 제멋대로 쓰잖아요.
하고 싶은 이야기야 태산입니다. 가수이니까 음악이나 사랑 이야기를...그리고 일본 이야기도. 나는 한국인보다 일본인 쪽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서울 시내의 카페에 심수봉 씨(51)는 나타났다. 창가의 밝은 자리가 눈이 부시다고 조금 어두운 자리로 옮겼다. 사건이란 79년 10월 26일에 일어난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 그녀는 대통령 곁에 있었다.

 

그날 나는 기타를 가지고 대통령께서 보내주신 차를 탔습니다. 대통령 접대용으로 비밀리에 마련된 민가의 대기실에 들어가자 측근으로부터 여느 때처럼 "여기서 들은 이야기나 본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이라고 다짐을 받았습니다.

 

대통령을 뵙는 것은 3번째였습니다. 나는 안방에서 대통령의 왼쪽옆에 앉고 오른쪽옆에는 또 한명 그지리에 불리워진 여학생이...모두 6명이었습니다. 맞은쪽에 앉아 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표정은 왠지 로보트처럼 굳어져 있었습니다. 마침 저녁 7시로 함께 뉴스를 보았습니다. 대통령은 국회의원에서 제명된  김영삼 씨(후에 대통령)가 비치는 것을 보고 "정치가도 아닌 놈이"이라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리고 나의 노래인 "그 때 그 사람"을 부른 후의 일이었습니다.

 

김부장이 자신의 왼쪽에 앉아있던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과 대통령을 연달아 쏘았습니다. 차실장은 손에 구멍났는데 그는 그것을 막으며 밖으로 나갔습니다. 여학생이 대통령에게 "괜찮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대통령은 "괜찮다"고 대답한 후 내가 있는 쪽으로 쓰러지시듯 기대셨는데 목의 안쪽으로부터 "꼬록 꼬록"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어두운 방의 안쪽에 모자와 같은 덩어리가 보였습니다. 피의 덩어리였습니다.

김부장은 이번에는 대통령을 무릎 베개하고 있는 나에게 총구를 향했습니다. 아, 이것으로 죽는구나 생각했는데 "찰칵"하는 소리가 났을 뿐이였습니다.

 

대통령과 차실장은 사망하고 장기 독재 정권은 막을 내렸다. 심수봉 씨는 목격자로서 일주일동안 군으로부터 엄격한 상황조사를 받는다.

 

정보기관 건물의 지하실에 연행되어 조서를 몇번이나 다시 쎠야 했으므로 매우 지쳤습니다. 그 때의 수사본부장(국군 보안사령관)이 후의 대통령 전두환 씨였습니다. 마지막 조사 때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다. 남자들은 도망갔는데 용기를 내고 현장에 머물렀다."고  칭찬받고 [이것으로 영양제라도 사]라고 용돈까지 주었습니다.

 

잠 못드는 밤. 낮에는 멍하니 먼 산을 보면서 눕어서 보내는 날들이 계속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3년 정도, 정보 당국의 감시하에 놓여졌습니다.

 

데뷔해 1년의 절정기부터 굴러 떨어진 것은 27년전의 내일 24살의 만추였다.

 

 

격동하는 한국에 격랑속 휘말리면서도  노래하기를 포기하지 않은 한국인 가수 심수봉 씨. 그 반생의 비화를 10시간에 걸쳐서 들었다. (市川速水)

 

 

 

 

第二話

 

 

 

히바리의 노래 칭찬 받아서

 

어째서 박정희 대통령께 불려가서 노래를 하게 되었느냐고요? 인연을 된것은 신기하게 일본의 노래였답니다.

 

79년의 대통령 사살사건을 목격했다는 이유로 심수봉 씨는 정보기관의 감시하에 놓여져 5년 동안이나 가수 활동이 금지되었다.

 

박대통령을 처음으로 뵙게 된 것은 아직 기수로 데뷰도 하지 않은 75년이었습니다. 美空ひばり(미소라 히바리)의 悲しい酒(카나시이 사케 = 슬픈 술)를 불렀습니다. 히바리씨는 내가 중학생때 가정교사 선생님한테서 받은 레코드를 통해서 알았습니다. 그는 나의 첫사랑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은 요염한 목소리구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깊은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가사도 열심히 외우고, 그러다버니 자연히 일본어 공부도 되었습니다.

 

심수봉씨의 부친은 민예인 판소리의 소리꾼(歌い手)으로, 어머니는 북한쪽의 일본인이 많이 살던 동네에서 자랐다. 한국 중부 충청남도 출신인 심수봉 씨도 노래와 피아노에 친숙한 환경에서 자랐다.

 

여고를 졸업하고 레스트랑에서 피아노 연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19살 때였습니다. 클라리넷을 하던 동료가 "오늘은 특별한 파티가 있는데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이 필요하다"하며 권유 받았습니다. 거기는 비밀의 요정 같은 장소이며 손님은 한국과 일본의 연세가 있으신 분들만 계셨습니다.

거기서 젊은 한국여성이 일본 노래 "長崎は今日も雨だった(나가사키는 오늘도 비였다)" 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어 가사도 템포도 멜로디도 엉터리. 나는어쩐지 화가 나 " 제가 한 곡 불어도 될까요?"라고 하고 히바리 씨의 "娘先頭さん(처녀 뱃사공)"을 불렀습니다.

갈채를 받아 최고의 기분이었습니다. 연회의 주최자인 남성에게 "잘 불렀다"고 칭찬을 받고 20만원짜리 수표를 받았습니다. 그 당시 아르바이트의 대가가 한 달에 5만원이었는데. 그 사람은 실은 박 대통령의 측근 중의 측근이라고 하던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이었습니다. "꼬마"라고 귀여워 해 주시며 몇 번인가 불러 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르바이트 가게 주인이 "일본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를 찾고 있는 것 같다. 여늬 분은 아니지만......" 이라며 저를 차에 태웠습니다. 
도착한 곳에서 말해 주었습니다. "지금부터 각하를 만난다".  어머나, 각하라니, 설마. 많이 떨렸습니다. 대통령은 생각보다 나이드신 인상이였습니다.  한국 일본 어느쪽 노래를 부를까 하고 망설이다가  한국노래인 "눈물 젖은 두만강"과 "황성 옛터"를 불렀더니 대통령은 눈물을 글썽거리셨습니다. 그 다음에 부른 것이 "悲しい酒(카나시이 사케=슬픈 술)이였습니다. 대통령은 몹시 놀라 "그래, 누가 일본 놈을 데리고 왔나? 너는 일본사람이냐?"라고 유쾌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부터 나는 프로 가수가 되어야 겠다고 목표를 정했습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레코드에 남기고 싶다고 말입니다. 78년, MBC TV의 대학가요제에 출장한 것도 우승하면 레코드가 나온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자작곡의 "그 때 그 사람"을 불렀지만 우승은 하지 못했습니다. "학생인데 너무 프로 같다"라는 것이 이유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가요제를 계기로 노래와 이름이 알려지게 돼 데뷰의 꿈이 실현된 것입니다.

 

(市川速水)                                                                                           

 

 

第三話

 

 

 

지는 꽃의 가사 방송 금지로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의 목격자라는 이유에 인하여 가수 활동이 중단되었습니다. 매스컴은 호기심만으로 저를 늘 따라 다녔으므로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가 없었던 때, 도사와 알게 되어, 심령학에 심취했습니다. 지방의 작은 무대에서 노래하며 근근이 살았습니다. 세상에서는 "서울의 봄"이라고 해서 3인 김씨가 정계에서 떠들썩하게 활동을 시작했습니다만, 나의 인생의 봄은 그렇게 허물어져버렸습니다.

 

유신 체제라고 말해진 박독재 정권이 79년 10월에 끝나고, 시민은 68년의 [프라하의 봄]을 모방해 민주화의 물결이 왔다고 굳게 믿었다.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의3김 시대가 막을 연다. 그러나 79년 12월에 쿠데타로 실권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는 다음 80년 5월 17일, 정치 활동이나 집회를 금지하고 봄은 끝났다.

 

81년에는 많은 연예인이 방송 금지 리스트에 올랐으며 나의 이름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소문에 들은 이야기로는, 전대통령이 내가 나온 텔레비전을 보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런 가수가 언제까지나 나오면 국민은 박정희를 떠올리고 만다. 어떻게든 해라"라고. 권력이란게 참 대단 하지요. 나에게 있어서는 사형 선고였습니다.
이대로 제 일생 노래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과 언젠가 시대가 바뀔 때까지 기다리자 라고 하는 희미한 기대가 반반이었습니다.

 

하지만 심수봉 씨가 TV로부터 사라져도 "그 때 그 사람"은 조용하게 계속 불려졌다. 트롯과 같은, 재즈와 같은 음조, 조금 허스키한 소리를 사람들은 잊지 않았다.

 

84년, 특별한 어떤 통지도 없이 활동 금지 처분이 풀렸습니다. 그 때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곧 레코드를 연속해 발표했습니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가 대히트 해 인세만으로도 월 7000만원을 넘었습니다. 또 다음 해 "무궁화"를 냈습니다.

 

하지만 "무궁화"는 방송 금지가 되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하늘에 산화한 저 넋이여 님은 비록 묻혔으나 나랄 위해 눈을 못감고..." 라는 가사가 문제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레코드가 나온지 얼마 안되었을 무렵, 텔레비전 방송의 가요 프로그램의 피날레로 이 곡을 노래 했는데, 신곡이다보니 가사가 자막으로 나갔습니다. 다음 날 방송국 사람이 와서, 큰 일이 났다고 말했습니다. 역시 전두환 대통령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기 기분을 상하여, 대통령 주변이 방송국 간부에게 방송 금지를 지시한 것 같았습니다. 이 가사의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백 번 넘게 되풀이 읽어도 제겐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말해서 내가 만든 노래 중에서 단 하나 정치적이라고 말할 수 없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전두환정권에 저항한 것이 아닙니다.

활동 금지중, 마음도 편치않고 하여 박대통령의 묘소에 성묘를 했습니다. 그 당시 첫 아이를  낳았는데, 아들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이 아이는 과연 행복해질까?

밖에서는 끊임 없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데모가 일어나고 있었지요. 피기 전에 지는 꽃이 있습니다. 사회에는 희망과 절망이 교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때, 한국의 국화, 무궁화가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피고는 지고 그리고 또 몇번이나 피는 꽃을.

 

 (市川速水)


 

 

第四話

 

 

 

민주화의 물결 말할 때가 왔다

 

 

방송 금지가 된 "무궁화"를 그나마 TV로 노래할 수 있게 된 것은 3년 후의 88연말이었습니다. 무어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눈물이 넘쳐 흘렀습니다. 10년 가깝게, 숨은 듯 살라왔어야 했던 일. 활동 금지중에 파국을 맞이한 결혼 생활. 그 사이에, 다른 인기 가수들은, 드라이아이스의 무대 효과 속에서, 휘황찬란하게 열창하고 있었구나, 라고.

 

시대는 또 변화 했다. 노태우대통령이 민주화를 약속하고, 북한과의 적대 자세 전환을 선언. 서울 올림픽의 열기. 그리고 첫 문민 정권 김영삼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의 93년 4월, 그녀는 14연간의 침묵을 깨어 박정희대통령 암살사건의 목격담을 말했다.

 

SBS TV의 토크 프로였습니다. 나는 단지, 밝은 빛 아래에 나가고 싶었습니다. 세상은 아직도 사건에 대한 소문이 꼬리를 물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기관총으로 총격당했다든가, 내가 병풍의 뒤에 숨어 있었다든가. 이젠 폐인과 다름이 없다던가,  파렴치한 여자라던가.
가수이기 전에, 사건의 여자라고 말해지는게 싫었지요.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습니다.민주화의 덕 인가요. 고백 끝마치고, 얼마나 속이시원 하던지.

 

그러나 정치 이야기나 박대통령의 평가는 피했다.

 

나는 박대통령에게 불려 갔을 뿐인데,  어느 사람은 대통령과 친했으니까 구수파다,  친일파라고 하고, 다른 사람은 "무궁화"가 학생 운동으로 불려졌기 때문에 진보적,  민족파라고 하지요. 나는 어느 쪽도 아닙니다. 왜 노래를 노래로서 볼 수 없는 것이지. 너래는 이념을 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닐런지요.

 

나는 분명히 일본의 노래, 특히 엔카를 좋아합니다만, 일본에 조금만 가까운듯 하면 친일파라는 렛텔을 붙이는 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느낍니다. 식민지 시대는 비참했습니다. 약한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을 위해서 타협하는 일도 많았겠지요. 친구가 죽고, 가족이 죽는 것을 보면, 누구라도 이상해집니다. 한국 전쟁을 그린 영화 "태극기를 휘날리며]" 보았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살해당했습니다.

 

이제, 박전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의 마음도 이해합니다. 국민을 활고에서 구한 공적은 있지만, 정신을 말살했다고 하는 것이겠지요. 지금에 이시대에는 이념이 제일이고 생활은 두번째 라고 가치관이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05년 11월의 콘서트에 두명의 거물이 모습을 보였다. 한 명은 박태준 전수상(제철회사 포스코 전회장)으로 암살 당한 박 전대통령의 전적인 신뢰를 받았으며 포스코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길렀다. 또 한 명은 정동영 전 여당 우리당 의장. 내년의 대선의 후보자 레이스의 와중에 있다.

 

박회장님은 박대통령 사건 후, 생활이 어려웠던 나에게 쌀을 보내 주거나 모임에서 노래를 부르게 해주거나 했습니다. 정선생님도 개인적으로 아는 분, 후원회에 들어 계십니다. 이렇게는 말하긴 해도 나는 여당이나 야당도 지지하지 않고, 정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한번도 했던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의 인터뷰 전에 말했다.

 

선거 투표때문에 늦어서 미안합니다. 투표에는 무슨일이 있더라도 참가하기로 정해 놓고 있어서요.

 

 (市川速水)

 

 

 

 

第5話

 

 

 

 

역사를 뛰어넘는 노래 믿는다

 

 

금년 5월 18일, 광주시는 학생이나 시민을 군이 무력 진압한 사건으로부터 26주년을 맞이했다. 심수봉 씨는 처음으로 이 날, 민주화의 성지에서 "무궁화"를 노래했다.

 

93년에 라디오의 담당 프로듀서와 재혼했습니다. 남편도 민주화 데모로 감옥에 들어갔었습니다. 결혼전, 그가 내게 말했습니다. 박정희대통령 암살의 [10. 26]이 없으면 [5. 18]도 없었다. 당신은 역사의 희생자라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생각을 했고 그리고 그에게 마음이 끌렸습니다.

 

광주의 "한"은 역시 깊은 것 같았습니다. 언제까지나 비참한 추억을 되돌아 보는 분위기가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대로 좋은 것인지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잊어서는 안되지만,  그것을 넘지 않으면 미래는 없는 것이 아닐까요.

 

사건이나 정치로부터 멀어지고 싶어도 떨어질 수 없다. 2000년의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총서기는 한국 대표단에 조용필 등과 함께 심수봉 씨의 이름을 들어 "이런 가수들이 북쪽으로 와 주면 교류에 도움이 되는데"라고 말했다. 작년에 처음으로 박대통령 사건을 다룬 영화 "그 때 그 사람"이 상영되고 일본의 노래를 부르는 심수봉 씨의 역도 등장했다.

 

내가 전혀 다른 인간에 그려져 있는게 아니던가. 본인이 여기에 살아 있는데 사전에 전혀 타진도 없었다.정말로 싫다는 생각을 했으며  취재진에게 "사실과 전혀 다르다"라고 코멘트해 버렸습니다.

 

박정권 시대가 지금도 얼굴을 내비치는 배경은, 진보적인 현정권에의 반발이나 옛날에의 향수가 있다고 말해지고 있다.

 

오랫만에 속이 상했던 일은 금년5월의 사건입니다. 박대통령의 딸, 박근혜 씨가 유세중, 폭한에게 얼굴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나는 대통령 부인, 육영수 씨가 74년에 총격을 당해 죽은 일을 가두에서 TV로 보고 몹시 놀랐서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그리고 박대통령 사건. 마침내 따님까지. 근혜 씨에게 마음 속에서 외쳤습니다. "이제 정치같은 것 그만 두세요.제발 그만"  대통령이 되면 큰 일을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어쩐지 걱정입니다.

 

작년은 데뷔 25주년이라고 이름을 붙인 콘서트가 열리고 베스트 앨범 발매가 화제가 되었다.그러나, 레코드 데뷔는 79년.숫자가 맞지 않는다.

 

이상하겠지요. 실은 가수 활동을 할 수 없는 시기가 너무 길고, 정식으로 회사에 소속한 것이 작년입니다. 겨우 기념 콘서트의 기획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도 자꾸 지연되어서요. 뭐, 알기쉽게 25주년으로 하려고요. 하하하...

 

되돌아 보면,  나에게 노래의 훌륭함을 가르쳐 준 일본에서 노래할 수 없었던 것이 유감입니다. 사건으로 출국 금지가 된 동안에 후배 가수가 차차로 일본에서 성공했습니다. 89년, 미소라 히바리 씨의 무대를 보려고 동경에 갔습니다만, 머물던 그 호텔에서, 그녀의 사망 뉴스를 보았습니다. 나의 마음 속에서, 무엇인가가 끝났다고 느꼈습니다.

 

사람의 역사도, 나라의 역사도 아무리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가다듬었다고 해도, 전혀 상상도 하지못한 방향으로 흐르곤 합니다. 그러나, 노래는 역사를 뛰어넘어,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남는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끝)

 

 (市川速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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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 심수봉



이 몸이 죽어 한 줌 흙이 되어도
하늘이여 보살펴 주소서
내 아이를 지켜 주소서
세월은 흐르고 아이가 자라서
조국을 물어오거든
강인한 꽃 밝고 맑은 무궁화를 보여주렴
무궁화꽃이 피는 건
이 말을 전하려 핀단다
참으면 이긴다 목숨을 버리면 얻는다
내일은 등불이 된다 무궁화가 핀단다

날지도 못하는 새야 무엇을 보았니
인간의 영화가 덧없다
머물지 말고 날라라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하늘에 산화한 저 넋이여
몸은 비록 묻혔으나 나랄 위해 눈을 못 감고
무궁화 꽃으로 피었네
이 말을 전하려 피었네
포기하면 안 된다 눈물없인 피지 않는다
의지다 하면 된다 나의 뒤를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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