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리본과 노란손수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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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존재

노란리본과 노란손수건

mel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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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SNS에는 노란 리본 캠페인이 확산되고 있다.

노란리본 캠페인은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이라는 문구와 노란리본이 새겨진 이미지를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 등 SNS의 프로필 사진으로 바꾸는 캠페인이다. 실제로 그러자는 권유도 받았다. 그러나 나는 거절했다.

 

이런거 달면 죽은 아이들이 살아 돌아올 확률이 만에 하나라도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당사자로 내 아이를 잃었다면... 이런걸로 슬픔에 위안을 받을 거 같은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는다. . 이런 장난같은 카톡 프로필이나 바꾸는 걸로 그 어떤 큰 기적을 기대 한다는 말인가. 

 

우린 그저, 우리의 불편한 마음을 뭔가 동참했다는 기분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은 것이 아닌가?   그냥 순수하게 슬퍼하고 마음이 불편하면 불편한걸 감수 하는게 우리의 도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자식을, 형제를,  친구를, 연인을, 부모를, 스승을, 제자를, 선배를, 후배를, 손자를 잃은 그들의 고통은 일생을 따라 다닐것이고, 제3자인 다른이들, 즉 우리들은 머잖아 자신의 삶에 바빠 그것을 잊어버릴 것 이다.

 

노란 리본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이는 세월호 실종자들이 부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있다는 거야 알고 있지만..... 행방불명자가 살아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족들에게 계속 심어주는건 너무 잔혹하고 그리고 아니면 말고 하는식의 그저 무책임한 감정 플레이는 아닌지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노란리본의 유래에 대해서도 혹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서 전쟁터에 가 있는 병사와 인질, 포로로 잡혀간 사람의 조속한 무사 귀환을 바라는 뜻이었으며, 노란 리본을 나무에 묶어 놓고 기다린 데서 유래됐다고 전하고, 혹자는 베트남전, 혹자는 걸프전이라고 하며, 일설에 의하면 미국의 저널리스트 작가 Pete Hamill가 뉴욕포스트에 실었던 컬럼 "Giong Home" 가 기원이라고도 한다.

 

한국에서는 전국 교도소,구치소 수용자 가족모임의 명칭이 "노란리본" 이다.


 

여튼 노란 리본의 유래는 내가 알기로는 이렇다.

아주 오래전 내가 고등학교 1학년때, 성당에서 알게된 남친 요왕이 생일에 준책이 빨간 표지의 O.헨리의 단편집으로 책 제목이 "노란 손수건" 이었다. 난 이소설을 읽고 내 흰 가제 수건을 노랗게 염색을 해서 그에게 되돌려 주기도 했다. 청춘의 한페이지를 장식한 노란 손수건의 내용은 이렇다.

Tony Orlando & Dawn의 Tie a yellow ribon around the old oak tree란 노래가 아마 이 소설을 모티브로 해서 나온거란걸 난 바로 알았다.

O.헨리의 작품은 우리나라에서는 "마지막잎새"나 "크리스마스선물"등 몇가지 외엔 별로 알려지지 않은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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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손수건 - O.헨리


남쪽으로 가는 그 버스 정류소는 언제나 사람들로 붐볐다. 생기발랄한 모습의 남녀 세쌍이 까불거리며 샌드위치와 소도주를 넣은 주머니를 들고 버스에 올랐다. 플로리다주(미국 동남부에 위치)에서도 유명한 포트 라우더데일이라는 해변으로 가는 버스였다.

승객이 모두 오르자 버스는 황금빛 모래밭과 잘게 부서져 오는 하얀파도를 향하여 출발했다. 차창밖으로 추위에 움츠러든 회색의 뉴욕 시가지가 뒤로뒤로 미끄러져 흘러갔다.
세 쌍의 남녀들은 알지 못할 곳으로의 여행이 주는 흥분 때문에 계속 웃고 떠들어 댔다. 그러나 그들도 뉴저지주를 지나갈 무렵쯤 되어서는 조금씩 조용해져 가고 있었다. 그들의 바로 앞자리에는 몸에 잘 맞지 않는 허술한 옷차림의 한사내가 돌부처처럼 묵묵히 앞쪽만 응시하고 앉아 있었다. 먼지로 더러워진 얼굴과 옷차림만으로는 나이가 어느정도인 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 사내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뒤에서 조잘거리는 그 젊은 남녀들 이 무안해질 만큼한사코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웬종일 달린버스는 밤이 깊어서 버스는 워싱턴 교외의 작은 음식점 앞에 멈추었다. 승객들은 다투어 버스에서 내려 허기진 배를 채웠으나, 그 돌부터 같은 사내는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젊은 남녀들은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그의 행동에 점차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음대로 그의 정체에 대하여 상상하기 시작했다.

'배를 타던 선장일까? 아니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군인일까? 어쩌면 아내와 싸우고 집을 나 온 사람일지도 몰라...'

식사를 마친 승객들을 태운 버스가 워싱턴을 떠났을때 젊은 남녀중의 명랑한 한 아가씨가 그 사내의 옆자리에 앉아 말을 걸었다.
"우리는 플로리다로 가는 길인데 처음 가는 길이거든요. 듣자니까 경치가 그렇게도 멋지다 면서요? " 그 아가씨는 웃으면서 물었다.
"그렇지요" 한참만에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 야릇한 우수의 그림자 같은 것이 어렸다. 잃어버렸던 옛 추억이라도 떠오른 듯한 얼굴이였다.
"포도주 좀 드시겠어요?" 아가씨는 용기를 내 다시 그에게 물었다.
"고맙소" 그는 엷은 미소를 지어보이고 아가씨가 컵에 따라주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다시 무거운 침묵 속으로 잠기는 것이었다.
아가씨는 부끄러워져 자기 친구들이 있는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그 침묵의 사나이는 잠을 청하려는 듯 등을 뒤로 기대며 눈을 감았다.


아침이 되었다. 심야를 달린 버스는 다시 음식점 앞에 섰고 이번에는 그 사내도 승객들을 따라 식사를 하기 위해 내려왔다. 어젯밤 말을 붙였던 그 명랑한 아가씨가 그에게 자기들과 같이 식사를 하자고 제의했다.
그는 몹시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그는 마음이 초조한 사람처럼 연신 밤배를 피워물곤 하였다. 젊은 남녀들은 즐거움에 들꺼 해변 모래 사장에서의 멋진 야영에 대한 이야기들을 재잘거렸다.
식사를 끝내고 모두들 다시 버스에 오르자 그 명랑한 아가씨는 또 그 사내의 옆자리에 가 앉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 사내는 아가씨의 호기심 많은 질문에 두 손 들었다는 듯 괴로운 표정으로 천천히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 사내의 이름은 빙고였고 지난 4년 동안 뉴욕의 형무소에서 보내다가 이제 석방되어 집 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결혼은 하셨나요? " 아가씨는 그 사내가 안됐다는 듯이 물었다.
"잘 모르겠소" 사내는 덤덤하게 말했다.
"잘모르다니요?" 아가씨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형무소에 있는 동안 나는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었소." 그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말했다.

"내가 오랫동안 집을 비워야 하는 형편인 만큼 만일 그렇게 오래도록 나를 기다릴수 없다고 생각되든지, 아이들이 자꾸 아버지를 찾고 혼자 사는 것이 괴롭고 고생이 된다 생각 되면 나를 잊어달라고 했소. 재혼을 한다고 해도 나는 충분히 이해 할수 있다고 말이오. 나를 그냥 잊어 달라고 썼소, 그 뒤로 아내는 편지를 하지 않았소.
3년 반동안이나...........................그러나 그 여자는 훌륭한 여인이오."  그는 쓸쓸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지금 집으로 돌아가시는 길이란 말이죠? 어떻게 될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면서........."
"그렇소."  그는 조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사실은 지난 주일 가석방 결정이 확실해지자 나는 다시 아내에게 편지를 썼소, 우리는 그때 부른스위크라는 곳에 살았는데, 그 마을 어귀에 커다란 참나무가 한 그루 있소. 만일 나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일 생각이라면 그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붙들어 매어두라고 편지에 썼소. 노란 손수건이 참나무에 매어져 있으면 내가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갈 것이고, 만일 재혼을 했거나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면 나도 모든 것을 잊어버릴 것이라고 썼소. 손수건이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그냥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버릴 거요."

그는 단호하게 이야기 했다.
아가씨는 그 말을 듣고 깝짝 놀랐다. 옆에서 이야기를 들은 아가씨의 친구들도 빙고가 보여주는 아내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이제 잠시 후에 벌어질 광경을 상상하며 초조해 하였다. 구겨지고 낡아빠진 사진 속에는 부인과 세 자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부인은 그저 평범한 얼굴이였지만 그 표정 속에는 착한 마음씨와 얌전한 태도가 잘 나타나 있었다. 어린애들은 어리고 무척 귀엽게 생겼다.
버스는 계속 달렸다.


마침내 이정표는 부른스위크가 20여 마일밖에 남지 않았음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자 젊은 남녀들은 모두 오른쪽 창문 옆으로 다가가 빙고가 말한 그 커다란 참나무가 나타나기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부른스위크가 가까워 질수록 뒤숭숭한 설레임과 이상스런 고요함이 버스안에 가득했다. 어두커컴한 침묵의 구름에 휩싸인 듯한 버스 안의 분위기는 마치 빙고라는 사나이가 잃어버린 그 세월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빙고는 그대로 앉아있었다.
흥분된 표정을 보이거나 얼굴을 돌려 창 밖을 내다보거나 하지도 낳았다. 그러나 굳어진 그 얼굴에서 어느 누구라도 초조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마치 이제 곧 눈 앞에 나타날 그 실망의 순간을 대비하는듯 마음 속으로 각오를 단단 히 하고 있는것같기도 보였다.
마을과의 거리는 20마일에서 15마일로, 다시 10마일로 점점 가까워졌다.
물을 끼얹은 듯한 버스 안의 정적은 계속 되었다. 버스의 엔진 소리만이 꿈결에서 처럼 아 스라하게 일정한 리듬으로 고막을 울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별안간 젊은이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젊은이들은 모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춤을 추듯 뛰었다. 그때까지도 아무 말 없이 고요히 앉아 있는 사람은 오로지 빙고 한 사람 뿐이였다. 그는 멍하니 넋나간 사람처럼 차창 밖 멀리 보이는 참나무에 시선을 고정 시키고 있었다.

그 참나무에는 온통 노란 손수건의 물결로 뒤덮여 있었다. 20개,30개, 아니 수백 개가 바람 속에 깃발처럼 물결치고 있었다.

젊은이들이 박수를 치며 소리치고 있는동안, 그 허름한 사내 빙고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 며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 앞문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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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O.헨리에 관한 정보


본명이 윌리엄 시드니 포터인 o.헨리는 미국 문학사에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단편 작가이다. 일생 동안 단편 소설만을 써서
약 280편 정도의 작품을 남겼다. 그의 단편은 남부 뉴 올리언스와 서부 텍사스 그리고 중미등을 무대로 한 작품도 꽤 있지만, 주로 뉴욕을 배경으로 서민들의 생활을 그린 작품들이 많다. 그것은 당시 근대 자본주의의 초기에 있었던 미국, 특히 '샐러리맨'이라고 부르는 소시민의 생활이 점차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곳이 뉴욕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는 뉴욕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맨해튼 섬의 개관 신문 작가'로 일컬어지기까지 했다. O.헨리 작품의 특징은 유머와 위트 그리고 독특한 기교 등이다. 또 작품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휴머니즘과 미국 특유의 낙천주의는 밝은 웃음과 함께 진한 감동을 선사한다.

또 세계 문학사에서 거의 유례가 없을 정도로 풍성한 만담과 교묘한 화술로 독자를 박진감 있게 끌고 가다가 마지막에 완전히 역전시키는 솜씨는 특이하면서도 매우 기발하다. 또 이러한 기발함은 전혀 어색하지 않아서 독자로 하여금 잔잔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이것이 그의 작품의 매력인 것 같다.

O.헨리는 1862년 노스캐롤라이나 주 그린즈버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시드니 알자논 포터는 그린즈버러에서 의사로 작은 병원을 개업하고 있었다. 그는 사교성이 있고, 환자에게도 매우 친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계 발명하는 일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마침내 미치광이 소리를 듣기까지 했다 한다.

어머니인 메어리 제인 포터는 프랑스어와 그림을 공부했었는데, 문장이나 그림에 능했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어머니는 O.헨리가 세 살 때 폐병으로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O.헨리는 열일곱 살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 아버지가 가정을 돌보지 않아 형편이 나빠졌기 때문이다.그 후 숙부가 경영하는 약국에서 일하면서 그 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통해 바깥 세상을 알게 되었다.
카우보이를 동경했던 O.헨리는 18세 때 아는 사람을 따라 텍사스 주로 가 그 곳 목장에서 일 하게 된다. 그 곳에서 무법자라든가 경배대, 카우보이 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간접 경험을 쌓게 되었다. 그 후 삼 년 뒤 텍사스 주의 수도인 오스턴 시로 가 어느 토지 회사의 사무원으로 일했다.

1887년 에이솔 에스테스와 결혼했다. 이 때 O.헨리는 24세. 에이솔은 17세였다. 에이솔은 <크리스마스 선물>에 나오는 델러가 연상될 만큼 몸집이 작고 가련한 소녀였다고 한다. O.헨리는 아내 에이솔을 깊이 사랑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는 글을 써서 신문사와 잡지사로 투고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디트로이트의 <프리 프레스>지로부터 원고 의뢰를 받게 되었다.

그 해 토지 관리국의 제도계에 취직, 1889년에는 딸 마가렛이 태어났다. 1891년 토지 관리국 을 그만두고 '퍼스트 내셔널'은행 출납계에 취직했는데, 여가를 이용해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O.헨리가 발행한 신문 <롤링 스톤>은 계속 적자를 낼 뿐 빚만 지게 되었다.

O.헨리는 은행을 그만두면서까지 신문 발행에 전념했지만, 결국 1895년 신문 폐간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때의 경험이 그 후 그의 소설에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기사를 쓰기 위해 돌아다는 것이세상을 두루 관찰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퍼스트 내셔널' 은행에서 그를 공금 횡령죄로 고소를 했다. 4702달러를 은행에서 횡령하여착복했다는 내용이었다.
정말 O.헨리가 공금을 횡령했는지의 여부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어쨌든 재판소로부터 출두 명령을 받아, o.헨리는 그 곳으로 갈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어쩐 일인지 뉴 올리언스의 온두라스로 도망하고 말았다. o.헨리는 온두라스에서 살면서 친구를 통해 몰래 아내에게 편지를 써 보내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아내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귀국했다. 그러나 아내는 그가 돌아온지 얼마 안 되어 스물아홉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O.헨리는 곧 재판을 받았다. 그 결과 유죄 판결이 내려져 5년형의 선고를 받았다. O.헨리는 교도소 내에서의 생활을, "인간의 생명이 여기에서처럼 값싸게 여겨질 줄이야 상상도 못 해 본 일이다." 라고 쓰고 있다.

이 체험은 작가 O.헨리에게 있어서 결코 무의미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체험을 바탕으로 그는 인간생명의 고귀함을 새삼 깨달았고, 인간에 대한 사색을 넓고 깊게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행이 약국에서 근무한 경험이 도움이 되어, 교도 내 다소 자유로운 약제계로 보내져 밤 늦게까지 단편 창작에 몰두 할 수 있었다.

1901년 7월, O.헨리는 모범수로 석방되었다. 3년 간의 감옥 생활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출옥 후 1년 남짓 딸 마가렛과 함께 피츠버그에서 살면서 글쓰기에만 전념했다. 이듬해 그의 재능을 인정한 <에인즈리>지 편집자의 권유를 받아 뉴욕으로 나왔다.

이어서 <월드>지의 봅 데이비스의 인정을 받아 한 편에 100달러씩을 받게 되어 제법 넉넉한 살림을 꾸릴 수 있었다.
1905년부터 1906년은 일 년 동안 무려 115편이나 발표하는 등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 시기였다. 이 때부터 O.헨리는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907년 소년 시절의 첫사랑 샐리 린제이 콜만과 재혼을 했다. 그러나 재혼 후, O.헨리는 글이 좀처럼 쓰이지 않게 되어, 계속 술만 마시고 아내 샐리와 곧 잘 싸우는 등 생활이 행복하지 못했던 것 같다.

결국 O.헨리는 건강이 극도로 나빠져 1910년 6월 세상을 떠났다. 병명은 간경화증이었다. O.헨리가 소설가로 활약한 것은 겨우 십 년밖에 안 된다. 하지만 그 동안 280편이나 발표하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였다. o.헨리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전세게에서 읽혀지는 작가로 앞으로도 계속 사랑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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