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자이 오사무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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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자이 오사무를 좋아한다.

mel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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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아들이 "다자이 오사무"에게 푹 빠져 있다.

나도 한때는 역시 그러 하였다. 그러던 중 아주 좋은 글을 발견 하였다.

 

아래의 글은 내가 가끔들러 견식을 넓히는 공간인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의

"바람구두"님글을 발쵀한 것 이다.   

 

http://windshoes.new21.org/index.htm

 

 

 

 

 

 

 

좋아하는 것과 존경하는 것의 차이

 

나는 다자이 오사무를 좋아한다.

 

우리는 간혹 어떤 피아니스트를 혹은 첼리스트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가령 내게 있어 파블로 카잘스는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마찬가지로 피아니스트 호로비츠를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한다.이들은 좋아한다고 말하기보다는 존경한다거나 경외의 대상이라 말하는 것이 옳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존경하거나 경외의 대상으로 삼는 것 역시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뜻이긴 하지만 그 말보다는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나 대상이 있다.

 

나에게 작가 중 그런 사람을 말하라고 하면 '다자이 오사무, 볼프강 보르헤르트 그리고 이동하'이다.이건 만만하게 보고 있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다만 이들의 삶과 작품이 그만큼 내 가슴 속 깊이 숨겨진 어떤 감정을, '아니마'라 해도 좋고 '아니무스'라고 해도 좋을 그런 부분들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간혹 '다자이 오사무'에게 쏟아지는 많은 비평들(개중엔 비난에 가까운 혹평들도 있지만)이 있지만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그의 작품들을 보고, 내 나름의 감상이나 비평을 하기에 앞서 그저 그의 소설을 읽는 즐거움에 젖어든다. 일종의 무장해제를 한 채 그저 그가 펼쳐 논 '요설이던, 엄살이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요람에 누운 아기의 그런 편안함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은 나에게 어떤 아픔에 대한 일깨움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암호 코드(code)가 맞는 작가인 셈이다. 나는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을 그렇게 읽는다.

 

 

순수와 환락 사이의 방황, 다자이 오사무의 문학을 이해하는 열쇠

 

다자이 오사무는 1909년 일본 아오모리현 쯔가루에서 출생했다.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본명은 츠시마 슈지(津島修治)로 츠시마 집안은 대대로 성을 갖지 못했던 일본의 농민 계급 출신이다.(일본의 피지배 계급에까지 우리 식의 성이란 것이 생긴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였다.)

 

메이지(明治) 첫해 호적 작성 무렵에, 츠시마 집안의 기본 재산을 축적한 증조부 소오스케(이 시기는 농민계급 중에서도 자본을 축적하여 나름의 세력을 키워 팽창하는 신흥 상인 지주 계급이 출현하고, 일본 전통 문화와 서구 문화가 혼합되어 정체성의 혼란이 빚어지기도 하는 시기이다. 나쓰메 소오세키는 이 시기에 일본 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이므로 일독을 권한다.)는 대금업과 소지주라는 조건을 교묘히 이용하여 토지를 담보로 잡고 높은 이자의 돈을 빌려주고 해마다 돈을 갚지 못한 영세농민의 토지를 흡수함으로써 더욱더 많은 부를 축적해간다.

 

이런 과정을 거쳐 대지주로 급성장한 츠시마 집안은 다자이 오사무의 아버지대인 츠시마 겐우에몬(津島源石衛門)에 이르면 다액 납세에 의한 귀족원 의원 자격자에 속하게 되고 중의원 의원, 더 나아가 귀족원 의원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고리대금업으로 성장한 가문을 보는 일본에서의 시선이 어떠했는지는 지금의 나로서는 잘 알 수 없으나 '고리대금업'에 대한 동서고금의 일반적인 인식으로 고려해보면 다자이 오사무가 자신의 집안 내력에 대해서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겼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실제로 이 시기 일본의 국내 상황은 그리 좋은 것이 못되어서 몰락하는 귀족 계급과 새롭게 일어나는 신흥 자본 계급, 쇠락해버린 농민 계급 등의 불만을 진정시키기 위해 일본은 '정한론'을 비롯하여 해외 진출을 모색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 가장 출세해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귀족원 의원이었다. 아버지는 우유로 세수를 했다."  <솔로몬왕과 천민>

 

토지를 수탈당한 농민의 원한이 깊어갈수록 쌓여가는 집안의 부를 바라보면서 다자이 오사무는 이것을 자신의 치부로 여기기 시작했고, 그의 여러 습작들에서 이런 자신의 부친을 모델로 대지주를 고발한 자서전적 작품들이 쓰여지게 되었다. 서구의 부르주아 형성기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오랫동안 문화와 예술은 기득권층이었던 귀족계급의 전유물이었고, 창작자들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패트런)들도 역시 그들이었다. 그러던 것이 귀족계급의 몰락 혹은 신흥 부르주아들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창작자들은 새로운 소비계층인 부르주아들의 천박한(?) 취향에 맞추기 위해 고생하게 되는데, 이를테면 우리 속담에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는 말이 있듯이 오랫동안 문화를 향유해 온 귀족 계층에 비해 신흥 부르주아들의 취향은 속물(댄디)적인 것으로 취급당하기 쉬웠다.

 

우리가 흔히 시쳇말로 부자는 3대가 가야 그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고 하는데, 창업자는 자수성가이기 때문에 문화나 예술을 알기 어렵고, 2대는 창업자의 생활을 어려서부터 지켜보았기 때문에 수성과 함께 더 키우려 하는데 비해서 손자뻘인 3대에 이르러서는 태어나면서 부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만큼 집안에 젖어든 부르주아의 풍토가 몸에 배게 된다는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세계 곳곳에서 묻어나는 이런 댄디즘('댄디즘'이란, 19세기 초 영국의 상류계급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사조를 말하는데 복장, 장식뿐만 아니라 , 행동거지에 이르기까지 특정양식을 고수했다. 현재는 보기 싫을 정도의 멋부림을 일컫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니힐리즘적 경향은 그런 풍토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순수를 동경했다.  무보수의 행위. 전혀 이기심 없는 생활.(중략) 내가 가장 증오한 것은 위선이었다." <고뇌의 연감> 

 

다자이 오사무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데에는 물론 그의 순수한 마음도 녹아든 것이었겠지만 어려서부터 보아온 아버지 세대에 대한 경멸감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으며 동시에 그 자신이 생활이라고 말할 수 없는('노동'이 빠진) 청소년기를 보낸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그러나 위의 말은 듣기에 따라 얼마나 달콤한가?) 다자이 오사무의 가장 큰 매력은(이 부분은 사실상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자신의 출신 성분을 혐오하고, 순수를 동경한 나머지, 억압받는 민중을 위해 살고 싶었던(?), 그러나 그것을 이겨내기에는 너무 약해빠지고 몸은 환락에 찌들어 있는 한 인간이 겪는 심적 고통의 지도를 해석해 가는데 있다.

 

이런 해석을 좀더 명확하게 해주는 것은 다자이 오사무 자신이 스스로를 '오즈카스'라고 불렀다는 데에도 있다. 다자이의 형제는 모두 열한 명으로 그중에서 다자이는 육남(실제로는 큰형과 둘째형이 요절했으므로 사남)이었다. '오즈카스'란 말은 이런 삼남이나 사남을 업신여기는 쯔가루 지방어로 생활의 근거를 갖지 못한 유한 계급의 자식들을 일컫는 말이다. 대지주의 자식이지만 가업을 물려받거나 할 입장이 아니었던(스스로 물려받을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던) 다자이로서는 일부러 생활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지위에 놓여 있었다.

 

 

"가정의 행복은 모든 악의 근본이다."*

 

위의 말은 다자이 오사무가 그의 소설 「가정의 행복」(1948)에서 말한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자신의 가족들을 사랑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 소설의 내용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한 관료들을 비아냥거리는 내용이지만 그 비아냥거림 안에는 자신의 가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순수를 동경한 그로서는 이렇게 돼지같이 탐욕스러운 사람들을 저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다자이 자신에게 있어 가족(가정)의 행복이라고 할만한 기억들이 별로 없었던 개인적 체험도 작용하고 있다.

 

그는 「나의 유년 시절」에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 "집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래서 아버지 앞에서는 늘 예의바르게 행동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다자이 오사무는 어머니가 병약했던 탓에 태어나자마자 숙모 키에와 보모 타케의 손에 성장하게 되었는데, 숙모와 타케의 존재는 다자이에게 있어 모성애 결핍의 보상을 갈구하는 대상이기도 했다.

 

 "숙모는 자주 여름밤 모기장 안에서 나를 옆에 눕히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나는 얌전하게 숙모의 나오지 않는 젖꼭지를 문 채 듣고 있었다." <나의 유년시절"나는 향락을 위해서 매춘부를 산 적이 하룻밤도 없다. 어머니를 찾으러 간 것이다. 젖가슴을 찾으러 간 것이다."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의 다양한 여성 편력의 원천이자 그의 작품 세계에서 드러나는 모성 희구의 여성관은 그의 어린 시절에 결여되었던 이런 어머니의 부재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으며 아버지에 대한 공포는 그에게 외부 세계에 대한 증오와 공포의 근원이 되어 그와 세계와의 화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의 이런 경험들은 그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다자이 오사무는 자기 고백적인 내용과 문체를 잘 구사하고(이런 문체와 내용을 잘 구사한다는 것은 그것이 손쉽게 삼류로 빠질 수 있는 어려움을 잘 피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며 동시에 다자이 비판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국내에서도 작품의 질과 상관없이 이처럼 끊임없는 '자기갱신'의 과정을 통해 작품을 쓰고 있는 작가가 있는데, 바로 '신경숙'의 경우가 그렇다고 생각한다)있다.곤충과 달리 인간이란 짐승은 허물을 벗는 탈피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일정한 나이를 먹으면 그 자체로 어른이라고 인정받는다. 다자이 오사무의 이런 자기갱신 혹은 자기 고백투의 문체는 어른의 몸뚱이를 가진 어린이의 투정어린 '탈피과정' 그것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자기고백적인(오쿠노 다케오같은 평론가는 이것을 '잠재적 2인칭 문체'라고 한다) 문체는 발화자인 주체 자신을 피동적인 대상으로 전락·소외시키는 효과를 갖는데,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들에서 곧잘 느껴지는 이런 자기 소외 의식의 일단은 작품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문체로 인해 더욱 강화된다.

 

"넙치는 제가 자살할 가능성이 있다고, 즉 여자의 뒤를 따라 또다시 바다에 뛰어들 위험이 있다고 판단한 듯, 저의 외출을 엄중하게 단속하였습니다. 하지만 술도 마시지 못하고 담배도 피우지 못하고, 다만 아침부터 밤까지 2층 방의 고타쓰(역자주: 이불 속에 넣는 화로)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낡은 잡지나 읽으며 멍청하게 지내는 저에게는 자살할 기력도 없었습니다."

 

 

" 다자이 오사무, 한 못난 사내의 최후"

 

자이 오사무는 1929년 히로사키 고교 시절부터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출신 계급에 대한 혐오를 더해간다.

 

그가 최초로 자살을 시도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30년 동경제국대학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한 그는 이부세 마스지(1898 - 1993, 보통 사람들이 지닌 약점을 날카롭지만 따뜻하며 간결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는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을 품고 있었으나 풍자적인 날카로운 안목과 미묘한 유머감각을 통해 감상적으로 흐를 수 있는 작품의 정조를 통제하는 데 능했다.)를 만나 이후로 평생 동안 사제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유머감각과 풍자적인 어조를 다듬어 나가게 된다. 이 해에 그는 긴자 카페의 호스티스인 다나베 아츠미와 투신자살을 기도하여 여자만 죽고 자신만 살아 남게 된다. 이 사건은 후일 반제국주의 학생 동맹에 가담하여 비합법 운동에 투신하나 자수한 일과 함께 그에게 커다란 상처로 남게 된다.

 

 1935년 「역행」으로 제1회 아쿠다가와상 차석으로 문단에 데뷔하게 된다. 1939년엔 이시하라 미치코와 결혼하였고, 1947년 12월엔 『사양(斜陽)』을 발표하며 전후 일본 작가 중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되지만 1948년 3월에서 5월 사이에 『인간실격(人間失格)』을 집필하고 그해 6월 13일(혹은 14일 새벽) 야마자키 도미에와 다마강 수원지에 투신 자살함(애인과의 이루지 못할 사랑을 죽음으로 끝맺는 것을 일본에서는 신쥬(心中)라고 한다)으로써 생을 마감한다.몇 차례의 약물 중독과 네 차례의 자살 미수만에 성공한 죽음이었다.

 

이 시기 그는 폐의 질환이 악화되어 각혈은 물론, 계단도 제대로 오르지 못할 지경이었는데 동거 중이었던 도미에와 함께 투신 자살한 지 닷새 후인 19일 아침 짓무른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 날은 그의 서른 아홉 번째 생일이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을 읽는 사람은 누구라도 금방 그를 '친밀한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마치 읽는 자신이 그의 비밀을 고백받고 있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다자이의 문학에 빠져들게 되면 단지 공감대를 느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이 유일하고 진정한 다자이 오사무의 이해자라는 동지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다자이 오사무만큼 사후의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경우도 드문 편인데 그를 '정신적으로 나약한 허무주의자' 일뿐이고 그의 문학도 같은 시기의 다른 문학들과 비교하기에는 곤란하다고 혹평하는 연구가들(같은 작가이자 극우주의의 화신이었던 '미시마 유키오'는 다자이 오사무를 병적으로 혐오했다고 한다.)이 있는가하면 현재까지 그의 무덤가에 꽃다발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젊은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기도 하다.

 

 

가즈코의 첫번째 편지

 

6년 전 어느 날 저의 가슴에 어렴풋한 무지개가 걸렸는데, 그때 그것은 그리움도 사랑도 아니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 무지개는 선명한 색채로 짙어져 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한시도 저에게서 떠나가지 않는 것으로 되었습니다. 소나기가 개인 하늘에 걸린 무지개는 결국 허무하게 꺼져서 사라지지만, 사람 가슴속에 걸린 무지개는 결코 꺼지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꼭 좀 그 분에게 알아 봐 주세요. 그 분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가를... 그야말로 소나기 끝에 하늘에 걸린 무지개처럼 생각하고 계셨던 것인가를 그리고 이미 옛날에 꺼져버린 무지개였던가를? 그렇다면 저도 가슴속의 무지개를 꺼버리지 않으면 안되겠지만 저의 생명을 먼저 꺼버리지 않고서는 저의 가슴속에 무지개는 꺼질 것 같지 않습니다. 답장을 바랍니다.   <사양(斜陽)>

 

 

"다자이 오사무, 일본의 위선을 증오한 독백"

 

미시마 유키오의 디자이 오사무 비판은 날카롭다.

 

미시마는 문학이건 실생활이건 강한 것이 훨씬 아름답다고 주장하면서, 다자이는 세속적 덕목에 곧바로 수난자의 표정을 꾸며 보이는 교활한 작가라고 비난했다. 다자이의 불구자 같은 연약함을 조롱했다. 수긍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자이 오사무에게 자의식 과잉인 면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고통에 지나치게 민감하고 예민하게 반응했다고 볼 수도 있다. 자신의 고통을 뛰어넘지 못하고 그 고통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일생을 마감한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도 있다. 철부지처럼 평생 방황하다 가 버린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다자이 오사무를 그렇게만 생각해 버리는 것이 옳을까?

 

1909년 출생한 이래 그가 성장한 당시의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급격한 서구화를 이루고, 서구의 제국주의를 받아들여 급격한 우경화의 길을 걷게 된다. 수많은 영세농민을 자살로 몰아넣은 고리대금업자 출신 대지주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의 출신 계급을 원망하여 좌익운동에 몸담았으나 결국 좌익 운동도 포기하면서 유서의 의도를 지닌 작품들을 써내려가기 시작하는 다자이 오사무라는 이 못난 사내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난다.

 

순수를 동경한 나머지, 억압받는 민중을 위해 살고 싶었으나 그것을 이뤄내기에는 너무 약해빠지고 몸은 환락에 찌들어 있는 인간. 다자이 오사무 그가 남긴 작품들은 군국주의 일본의 청년이 남긴 자기 혐오의 고백일지도 모른다. 다자이는 패전 후에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이기주의, 악습, 위선, 권력 등에 절망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자기갱신의 과정을 통해 나비가 되지 못하는 일본이란 사회가 만들어 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의 상처받은 내면을 충실히 성찰한 첫번째 작가가 아닐까?

 

 

Bar Lepain에서의 다자이 오사무.

그가 남긴 작품들은 군국주의 일본의 청년이 남긴 자기 혐오의 고백일지도 모른다.

 

 

 

 

소화 3년경 하숙집에서 다자이 오사무

 

 

 

이부세 마스지의 <검은비> / 한림신서 (소화출판사)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 다자이 오사무는 그와 평생 사제 관계를 맺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무덤엔 꽃이 끊이질 않는다.

 

 

 

 

 

 

1909년 6월 9일 아오모리현 키타쯔가루군 출생. 11남매 중 10번째.

          본명은 츠시마 슈지. 아버지는 아오모리현의 명사이며 대지주
1923년 아버지가 귀족원 의원 재임 중 도쿄에서 별세
1925년 작가를 지망하기 시작함. 급우들과 동인 잡지 등에 소설, 희곡, 수필 등을 발표
1927년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자살에 충격을 받음. 게이샤 출신의 오야마 하쓰요를 알 게 됨
1929년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아 <지주일대>를 집필.

          같은 해 12월 자신의 출신계급에 절망하여 수면제 자살 기도
1930년 동경제국대학 불문학과 입학.

          이부세 마스지를 만나 평생 동안 사제관계를 맺음. 비합법운동에 관계,

          같은 해 11월 긴자 카페의 호스테스인 다나베 아츠미와 투신자살 기도.

          여자만 사망하고 본인은 살아나 자살방조죄 혐의를 받았으나 기소 유예
1931년 2월 오야마 하츠요와 동거. 반제국주의학생동맹에 가담하여 비합법운동에 본격 투신
1932년 7월 비합법운동을 포기하고 아오모리 경찰서에 자수, 1개월간 유치장생활을 함
1933년 2월 다자이 오사무라는 필명 사용
1935년 제1회 아쿠다가와상 후보로 올랐으나 차석. 복막염 진통제 파비날 중독
1936년 약물 중독 치료
1937년 오야마 하쓰요와 온천에서 음독자살 기도, 하쓰요와 헤어짐
1939년 이치하라 미치코와 결혼.
1940년 단편집 <추억> 등 잇따라 발표
1942년 <불꿏>을 문예지에 실었으나 시국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문삭제 지시.

          이해 12월, 어머니 별세
1945년 공습을 피해 피신
1946년 11월 피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감
1947년 단편집 비용의 처사양등 발표
1948년 인간실격집필. 피로와 불면증이 심해지고 각혈을 함.

          6월 13일 야마자키 도미에와 타마강 수원지에 투신 자살. 19일 사체 발견.

          7월 인간실격 발표. 향년 3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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