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전남 화순 만연사를 찾았습니다.

80년 5월, 캠퍼스내 고시원은 계엄군의 진주로 들어갈 수도 없었고

귀가를 하지 않고 토요일 밤에도 고시원에 있었더라면

주말에도 법전에 파묻혀 있었던 다른 친구들처럼 끌려가 주리를 당했을 것입니다.

오월의 상처가 어느 정도 덮어질 무렵

총성과 군용트럭 소리, 고함과 비명소리의 트라우마에 한 장도 넘기지 못했던 수험서를 들고

어디로 가나 고민하던 끝에 찾았던 곳이 화순 만연사였습니다.

당시의 절방은 하수상한 세월을 피해 온 고시생들로 가득해서 방이 부족했지요.

할 수 없이 절 아래의 돈사를 개조한 고시원에서 몇달을 지냈었던 기억.

눈 앞에 아른거리는 주검과 핏물 속에서 눈으로 법조문을 가려내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도 몇 달도 더 지난 후였습니다.

가슴 아픈 기억과 비겁함에 대한 갈등으로 힘들었던 그 시절.

결국 고시를 포기하고 회사에 취업을 선택하기까지

내내 따라다녔던 죄책감으로

새벽이면 만연사 뒤 계곡의 얼음장을 깨고 차거운 몸을 담그기도 했었지요.

39년만에 비겁했던 내 상처를 다시 드려다 보는 것은

시간의 흐름을 잃어버린 어머님을 병원에 모셔 두고 돌아서는 것만큼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 사이 화려하게 중창된 만연사에서 옛모습을 찾는 것이

환갑이 넘어서도 금강산 상팔담을 거뜬히 오르셨던 어머님을 떠올리려는 것만큼

무의미했나 봅니다.

<나한산 만연사 일주문>

만연사(萬淵寺)는 전남 화순군 화순읍 동구리 만연산 자락에 있는

오래된 사찰입니다.

편액에 쓰여 있는 것처럼 만연산을 나한산으로 부르기도 하나 봅니다.

조계종 송광사의 말사로 1208년 고려 희종4년에 만연선사가 창건했답니다.

창건 후 여러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쳐

17세기에는 두 개의 암자까지 거느린 대 사찰로 자리잡게 되었고

병자호란 때는 만연사의 승려들이 관군에게 종이와 주.부식을 조달해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할 정도로 사세(寺勢)가 컷었나 봅니다.

구한말까지도 만연사의 규모가 대단해서

남도의 국창(國唱)으로 불리던 이동백, 이날치 선생이 만연사에서 소리공부를 했고

임방울 명창은 이 곳에서 창악을 가르치기도 했답니다.

사찰 아래 동네 이름이 동구리인데

억불정책을 폈던 조선시대에는

사찰에서 나오는 음식으로 사는 마을을 동구리,

천민인 승려보다 더 하층민으로 분류했던 사람들을 동구밖 사람들로

치부하기도 했었지요.

그러나 이 땅의 대부분의 문화재 소실이 그랬듯

6.25동란 때 모든 불당들이 불타 없어져버렸던 것을

1978년부터 4년동안 주지 철안(澈眼)스님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답니다.

제가 자주 찾았던 80년 겨울에는

대웅전과 요사채 등 몇 건물만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당시의 기억을 전혀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법당들이 들어섰습니다.

몇년 전부터 붉은 종이 연등과 배롱나무 꽃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대웅전 사진을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어서

옛날 생각에 언젠가 한번쯤 다시 가보리라 했는데

배롱나무 꽃을 볼 수 없는 계절이라 조금은 아쉬웠습니다.

39년전 한겨울에 얼음장을 깨고 몸을 담궜던 계곡은

대웅전 좌측 산길을 따라 올랐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길의 흔적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단청으로 인해 장중하고 무거운 느낌을 주는 법당들과 달리

단청이 없이 목재의 재질이 그대로 드러나는 신축 건물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보이는 것이 산사입니다.

하다못해 요사채 앞마당을 쓸다 기둥에 기대어 세워놓은 싸리빗자루와

댓돌 위에 가지런히 벗어 놓은 신발에도 자연스러움을 느끼는 것은

고즈넉한 산사가 주는 신통력인가 봅니다.

맛배지붕과 팔작지붕의 나란한 배치도

오히려 성냥갑처럼 똑 같은 모양으로 찍어내듯 지은 도심 속 아파트에 질린 시선을

해탈시켜주는 경관입니다.

정갈하게 정돈된 사찰의 장독대는

일종의 도량의 상징 같은 모습이지요.

먹고 사는데 필요한 장독마저 도를 닦고 있는듯 엄숙합니다.

수행 중인 스님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표시된

계단 중간에 놓인 출입금지의 작은 팻말.

높은 솟대는 없지만 소도구역처럼 성스럽게 보입니다,

만연사는 사찰 경내가 그렇게 넓은 것은 아닙니다.

공간개념으로 보면 계단식 형태에

사찰 구성에 필요한 목적의 법당들이 다 들어 앉아 있어서

한 눈에 다 드러나 보입니다.

이 배롱나무가 사진가들에게 인기있는 피사체이지요.

다만 꽃이 없는 시기에는 그들이 찾지 않으니

사찰과 배롱나무 그 자체로 보는 사람에게나 관심가는 풍경입니다.

매끄러운 줄기 표면을 긁으면 흔들거린다고 어린 시절 간지름나무라 불렀던 배롱나무는

귀신을 쫓는 나무여서 사찰과 무덤가에나 심는 줄 알았었지요.

요즈음 남도에서는 도로변에서도 가로수로 흔히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도권에서도 정원수로 심기도 합니다.

대웅전 내부를 조용히 담았습니다.

보통은 법고와 함께 있는 목어가 특이하게 대웅전 천장에 매달려 있네요.

대웅전에서 내려다본 범종각과 앞마당입니다.

대웅전 정면에는 일주문과 사이에

화우천(華雨天)이라 편액이 걸린 2층 설루(說樓)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명부전(冥府殿) 뒤에 자라잡은 작은 산신각(山神閣)

우리나라 사찰은 토착신인 산신과 부처를 함께 모십니다.

대웅전에 오르는 섬돌에 서면 대웅천 처마 끝에

만연산 정상이 걸쳐 보입니다.

만연산이 사찰을 포근히 끌어 안은 형세네요.

대웅전을 내려서서

서로 다른 각도에서 경내를 둘러 봅니다.

다시 돌아 나오는 길 일주문 우측에

일낙장송처럼 우뚝 서있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

둘레가 3m나 되는 770년 된 전나무랍니다.

만연사 창건을 기념하여 고려 진각국사(眞覺國師)가 심었다네요.

언제가 끝일지 모르지만

당분간은 화순에 가야 할 일이 계속될 것이어도

몇번은 더 찾겠지만 39년전의 추억은 되살릴 수 없겠지요

그래도 언젠가는

면연사의 배롱나무 꽃도 담을 수 있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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