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목 / 황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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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곳간/------- 소설굿

고사목 / 황인수

하늘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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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목

- 황 인 수



그는 돌아앉아 있었다. 시선은 창밖에 던져져 있었지만 동공은 휑하니 비어 있었다. 그래서 빽빽한 바깥 풍경이 그의 망막에 상으로 맺히지 않았다.

 

허진주가 증발해 버린 뒤부터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을 향해 앉아 하루를 보냈다. 그에게선 어떤 삶의 의욕도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3개월째 그는 묵언수행과 면벽좌선 하는 수도승처럼 살았다.

 

간혹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결제서류를 들고 들어온 한 대리가 그를 책상 쪽으로 돌려 앉혔지만 그의 시선엔 여전히 초점이 없었다. 한 대리가 들려주는 간략한 업무현황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직원들이 하나 둘 그만 두기 시작했다. 사장이 여자 때문에 실성했다고 수군거렸다. 직원들의 퇴사가 이어지면서 일감도 줄고 매출도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퇴사한 직원들이 앉았던 텅 빈 자리만한 구멍이 그의 가슴에 뻥뻥 뚫렸다.

 

그들이 나갈 때마다 그에게 내던진 수많은 말의 펀치들이 그를 휘청거리게 했다. 그들의 적대감과 조롱어린 눈빛들이 그를 무너뜨렸다. 12명의 직원이 3명으로 줄어 있었다. 그때서야 그의 가슴 속 한 구석에서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감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둘러보니 빈 들판 같은 사무실은 그의 마음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는 사무실 이전을 결심했다. 좀 아늑한 사무실로 옮겨 마음을 추스른 뒤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탑골공원 뒤쪽에 사무실을 얻었다. 좁은 골목으로 20여미터 들어가면 보이는 허름한 4층짜리 건물의 3층이었다. 그 골목길에는 수많은 음식점과 주점, 노래방들이 즐비해 있었다. 그로 하여금 굳이 이 좁고 후미진 골목에 위치한 사무실을 선택케 한 사람은 허진주였다. 허진주와 자주 갔던 카페가 이 근처에 있었고, 그녀와 처음 만났던 탑골 공원 후문이 이곳에서 보였다. 이곳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증발해 버린 허진주를 언젠간 꼭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버티칼 블라인드 왼쪽 벽에 걸려 있는 액자로 시선을 옮겼다. 그 액자 속에는 고사목 두 그루가 서 있었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 아래 뼈만 남은 몸통으로 팔 벌리고 서 있는 고사목은 지난 초겨울 허진주와 함께 갔던 지리산에서 찍은 것이었다. 허진주가 확대해 가져다 놓은 것을 책장 옆에 세워놨다가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 벽에 걸었다. 그는 허진주가 생각날 때마다 그것을 바라보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눈길은 더 자주 사진 속 고사목으로 향했다.

 

바니타스(vanitas). 고사목을 볼 때마다 그는 바니타스그림을 떠올렸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유행했던 정물화. ‘곧 사라질 허망한 것을 상징하는 소도구들을 화폭에 담아 인생무상을 말한 그림. 영원하지 않은 것들의 덧없음을 뜻하는 바니타스그림 속에 자주 등장했던 해골의 모습처럼 앙상하고 볼품없는 고사목.

 

드넓은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자라나던 푸른 나무가 無常의 진리를 깨닫고 지레 꿈을 접은 것일까?

 

그 사진 속에 나란히 서 있는 고사목 한 쌍이 마치 자신과 허진주의 모습처럼 외롭게 보였다. 그래서 그녀가 더욱 그리웠다.

 

실수였다. 허진주를 그렇게 보낸 것은 분명 실수였다. 그녀를 붙잡았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는 울대를 타고 치밀어 오르는 후회감을 억누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마누라는 그때 버렸어야 했다. 마누라를 버리고 허진주를 쫓아 나갔어야 했다. 그는 사진 속 고사목 한 쌍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살 한 점, 피 한 방울 느껴지지 않는 고사목이 이번엔 그 자신과 마누라의 사이처럼 앙상한 뼈만 드러낸 채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말라가고 있었다. 그 모습은 을씨년스럽고 공허해 보이다 못해 슬퍼 보이기까지 했다.

 

마누라는 강력한 무기를 숨기고 있었다. 결혼 후 6개월이 지나도록 그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었다. 야근을 하고 좀 늦게 퇴근하던 날이었다. 마누라가 대문 앞에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차를 끝내고 차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마누라가 조수석에 탔다.

 

잠깐 얘기 좀 해.”

 

마누라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나 당신 믿고 시집와서 6개월 살았어. 6개월 동안 당신은 허구한 날 야근에다 술 먹고 새벽 한 두시에 들어왔어. 당신 믿고 시집왔는데 집엔 당신이 없어. 당신도 없는 집에서 당신 엄마 아버지 시중들고 사는 거, 더 이상 못하겠어. 난 나하고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해 주려고 결혼한 거 아니야. 도대체 난 뭐야? 내가 청소부야? 파출부야?”

 

마누라는 그를 노려보며 한참을 쏘아붙이더니 마침표를 찍듯 한 마디 내뱉고는 차문을 박차고 나갔다.

 

나 지금 우리 집에 갈 거야. 애 지울 거니까 그렇게 알아.”

 

그날 밤에 그는 처음 알았다. 마누라에게 흉기가 있다는 것을. 이기심으로 벼려진 혓바닥이라는 것을.

 

결혼을 하면서부터 일거리가 부쩍 늘었다. 부양가족이 생겼으니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뛰어다닌 결과였다. 출판사 일은 늘 마감과 납기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마누라였다. 왜냐하면 같은 업종에 근무하다 만난 사이였으니까. 그는 마누라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었으면 힘들었다고, 무슨 방법이 없겠느냐고 상의를 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마누라 입에서 그런 얘기가 나오기 전에 미리 헤아리고 배려해 주지 못한 책임과 잘못이 그 자신에게 있음은 부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6개월 동안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있다가 아무런 준비도 없는 사람에게 자기의 할 말만 와락 쏟아내고 가버리는 저 사람이 자신의 아내였던가 라고 생각하니 은근히 부화가 치밀어 오르기까지 하였다. 아니, 그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아무런 거리낌과 죄의식도 없이 애를 지우겠다는 마누라의 마지막 한 마디가 그의 심장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겨우살이 덩굴처럼 복잡하게 얽히는 생각과 감정들을 정리하지 못한 채 그는 한참동안 차 안에 앉아있었고, 마누라는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며칠 후 그는 장인의 부름을 받았다.

 

김서방, 이 모든 게 딸을 잘못 가르친 내 탓이네. 용서하게.”

 

마누라는 퍼렇게 멍이 든 눈두덩을 계란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아이는 또 가지면 되지 않겠나? 이 못난 장인 얼굴 봐서라도 화 풀게. 그리고 내가 좀 보탤 테니까 전세방이라도 얻어서 분가하는 게 어떻겠나?”

 

장인에게 등 떠밀려 마누라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날 이후 그와 마누라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 마누라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공허했다. 마누라에게 다가가지 않았고, 필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차가운 마음 때문이었을까? 아이도 들어서지 않았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허구한 날 집구석에 혼자 내버려두지 않았으면 내가 못살겠다고 뛰쳐나가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애를 지우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마누라의 혓바닥은 늘 그를 탓하고 있었다.

 

당신 엄마 아버지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알아? 아침에 눈 떠서 밤에 눈 감을 때까지 손끝 하나 까닥하지 않고 나를 부렸어. 나도 우리 집에 가면 귀한 자식이야. 남의 귀한 딸 데려다가 왜 이렇게 고생시키는 거야? 주위를 둘러 봐. 나처럼 사는 년이 어디 있는지.”

 

마누라의 푸념과 성화는 쉼 없이 이어졌고, 짜증과 불평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갔다. 마누라의 혓바닥은 독침이 되어 그의 영혼을 찔렀다. 외로움이 혈관을 타고 온 몸으로 번져갔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살점을 도려냈다. 그 자리에 외로움의 새살이 돋기 시작했다. 마누라의 혓바닥은 언제나 그의 자존심을 후볐고, 자신의 불행에 대한 모든 책임을 그에게 전가시키고 있었다.

 

그는 시집살이가 지긋지긋하게 싫다는 마누라의 악다구니에 진절머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전세방을 얻기로 했다. 가급적이면 시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면 좋겠다는 마누라의 요청에 따라 멀리 설악산이 내다보이는 속초에 작고 싼 아파트 한 채를 샀다. 출퇴근이 불가능했으므로 그들은 주말부부로 살기로 했다. 다행히 사무실이 오피스텔이었기 때문에 그의 거처를 따로 마련해야 하는 부담은 덜었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그는 속초에 갔다. 마누라가 보고 싶어서 간 것도 아니고, 가고 싶어서 간 것도 아니었다. 그건 그저 습관적이고 의무적인 것이었다. 처가에 책잡히지 않고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자유를 얻은 마누라는 방종 그 자체였다. 집안은 늘 어지러웠다. 방안과 거실 여기저기에 벗어던져 놓은 옷가지들, 며칠째 설거지를 미루어 놓은 싱크대 주변, 굴러다니는 술병들과 비닐봉지…….

 

집안엔 그가 다리 뻗고 앉을 만한 자리가 없었다. 그는 청소를 시작했다. 설거지를 하고, 옷가지들을 거둬 세탁기에 넣었다. 술병과 쓰레기들을 치우고 욕실을 소독하고……. 토요일엔 청소를 했다.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청소라도 하지 않는다면 그 긴 시간은 결코 흘러가지 않을 것 같았다. 일요일 아침에 마누라는 교회에 갔다. 그는 자동차를 몰고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오후 늦게 서울로 돌아왔다. 집안은 늘 그가 토요일 하루 동안 청소할 만큼만 어질어져 있었다.

 

15년 동안 그는 나무처럼 살았다. 혼자 싹 틔우고, 혼자 꽃 피우고, 혼자 잎 떨구는 길가의 은행나무처럼 마누라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기만의 세계 속에서…….

 

그렇게 무감각하게 살아가면서도 그가 이혼을 거론하지 않은 까닭은 각자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다하겠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결혼을 실패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결코 한눈을 팔지는 않았다. 마누라를 두고 딴 여자를 기웃거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그는 접대 차 갔던 룸살롱에서조차 2차를 가지 않았다.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한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요즘 세상에 자신과 같이 융통성 없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스스로 조소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가고 있었다.

 

그의 15년간의 신념은 허진주를 만나면서 흔들렸다.

 

인사동에서 사보 제작과 관련하여 발주업체 홍보실 담당자와 점심식사를 끝내고 막 탑골공원 후문 앞을 지나려는 때였다. 대학생차림의 여자 하나가 그에게 다가왔다.

 

아저씨, 죄송하지만 저 좀 도와주세요.”

 

긴 퍼머 머리 여자의 눈빛이 너무 간절해서 지나칠 수가 없었다. 여자가 그에게 명함을 건넸다. 여성잡지사의 기자였고 이름은 허진주였다.

 

아직은 수습기잡니다. 경험이 부족하다보니 좀 겁이 나서 그러는데 저기 골목입구에 보이는 저 카페에 저와 함께 가주시면 안 될까요? 잠깐이면 됩니다. 부탁드립니다.”

 

그는 허진주의 명함을 들여다보며 방금 전 사보 제작 대행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던 일을 생각했다. 다음 달부터 사보를 제작해서 납품하려면 원고를 청탁하고 취재할 기자 한 두 사람이 더 필요하던 참이었는데, 허진주를 알아 두어서 손해 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는 탑골 공원으로 들어가 벤치에 허진주를 앉혔다. 그리고 그녀가 무엇을 취재하려고 하는 지, 자신이 무엇을 도와야 하는지 물었다.

 

허진주는 여성지 5월호 역발상 마케팅이라는 컬럼에 실릴 게이카페 창업 노하우를 취재하고 있는데, 게이카페에 들어가려니 겁이 나서 망설여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몇 시간 동안 길 건너 카페의 문 앞까지 갔다가 다시 이편으로 돌아오곤 했던 것이다.

 

그는 게이카페에는 가본 적이 있었다. 그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곳이 게이카페인 줄 모르고 갔었고, 그 후에도 죽 그런 곳 인 줄 몰랐다가 최근에 알게 되었다. 게이카페라고 해서 여느 카페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허진주와 함께 그 카페 브라이트 Bright’로 들어갔다. 목소리 예쁜 여자가 외모까지 아름다운 경우가 드물듯이 카페 역시 그랬다. 이름처럼 밝지 않았다. 차를 주문하고 그 카페의 사장을 허진주와 대면시켰다. 거기까지가 허진주가 그에게 요청한 그의 역할이었다.

 

허진주는 카페 사장에게 전세계 유행의 흐름이 게이에서 일반 여성, 대중의 순으로 전파된다는 것은 마케팅 업계에서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임을 설명하고, 그에게 창업 동기와 자금, 운영 노하우 등을 차근차근 묻기 시작했다. 사장은 진지하게 인터뷰에 응해 주었다.

 

사장은 자신이 동성애자가 아님을 밝히고, 자신이 게이 카페를 창업한 까닭이 처음엔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지만 자신의 카페가 소통의 장이 되고 의식 전환의 계기를 마련하여 균형적으로 열린사회가 되는데 공헌할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다고 마무리하였다.

 

허진주는 무사히 취재를 마쳤고, 5월호 잡지가 나오면 보내주겠다며 그의 명함을 받아갔다.

 

그가 허진주를 두 번째로 만난 것은 4월 말경이었다. 그녀는 카페 Bright로 그를 불러냈고, 그녀의 손엔 따끈따끈한 5월호가 들려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Bright는 두 사람의 아지트가 되었다.

 

그는 3 개월 후 파격적인 조건으로 허진주를 스카웃 했고, 그녀와 Bright에서 썩 Bright하지 못한 사랑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조심했건만 그는 두 번이나 허진주와의 밀회를 들켜 버렸다. 을지로 3가엔 직원들과 거래처 사람들의 눈이 많았다. 하지만 탑골 공원 뒤편에 있는 Bright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일 뿐만 아니라 게이 카페라서 그들의 만남이 오랫동안 발각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것이 계산착오였다. 편집 디자이너 미스 서, 서은아가 이 근처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했다. 허진주의 허리를 감고 낙원모텔로 들어가는 그의 모습이 벌써 두 번째 서은아의 시야에 포착되었다는 사실을 그는 몰랐다. 그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그는 자신과 허진주와의 사랑이 안전한 것으로 믿었다.

 

어느 날 밤, 허진주의 손을 잡고 Bright에서 나오다가 그는 서은아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당하고 보니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들은 석고상처럼 하얗게 질린 채 서 있었고 그들의 앞을 서은아가 고개를 휙 틀며 지나갔다.

 

그날 이후 사무실 분위기가 수상쩍었다. 직원들의 곁눈질과 수근거림이 느껴졌다. 그는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죄인처럼 늘 고개를 숙이고 다니는 허진주를 볼 때마다 가슴 한 쪽이 아려왔다. 그 모든 잘못과 책임은 그에게 있는데 비난의 화살은 허진주에게로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그럴수록 그는 허진주가 소중하게 느껴졌다. 직원들의 따가운 시선을 꿋꿋하게 견디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그로 하여금 보호본능을 발현케 하였다. 고통이 클수록 사랑은 강해지는 법. 허진주를 향한 그의 마음은 더욱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일단 불붙은 마음은 시간과 장소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켰다. 주변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도 잊게 하였다.

 

안개가 자욱한 새벽이었을 것이다. 그날 그는 너무 서둘렀다. 그래서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문을 잠그고 보조 장치를 내려야 밖에서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직원들이 철야 작업을 한다고 하기에 근처 찜질방에서 자고 새벽에 사무실에 들어오니 모두 퇴근하고 허진주 혼자 남아 있었다. 때꾼한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그는 너무 반가웠고, 그녀를 갖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솟아올랐다.

 

그는 앞뒤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허진주를 소파로 안고 갔다. 그리고 그녀의 육체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알몸이 된 두 사람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열렸다. 그는 정면으로 서은아와 눈길이 마주쳤다. 그의 몸이 급격히 경직되자 허진주가 문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 역시 그런 자세로 서은아를 바라보며 굳어 버렸다. 세 사람은 한 동안 동영상 속의 일시정지 화면으로 멈춰져 있었다. 상황 파악이 끝난 서은아가 얼굴을 붉히며 문밖으로 나가면서 화면은 다시 play되기 시작했다. 굳은 표정으로 옷을 챙겨 입던 허진주가 눈물을 떨구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 죽고 싶어요.”

 

그는 말없이 허진주를 감싸 안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허진주를 지켜줘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이 밀려왔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허진주를 버리지 않겠다는 굳은 마음으로 그는 힘주어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는 이혼도 불사할 생각이었다. 그는 자신의 결혼생활을 실패로 규정했다. 마누라에게 애정이 사라진 것은 이미 오래 전이다. 애정의 회복을 위해 노력해 본 적도 없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허진주를 만나기 전까지, 솟구쳐 오르는 생리적 욕구를 감당하기 어려울 때 가뭄에 콩 나듯이 동침했을 뿐이었다.

 

무엇이든 처음 한 번이 어렵다. 서은아에게 애정의 현장을 들킨 후에 그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후련했다. 허진주와의 밀회도, 밀애도, 밀행도 직원들에게 더 이상 숨겨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허진주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직원들 앞에서 더 스스럼없이 드러냈다. 직원들은 그런 그를 보고 뻔뻔하다고 수근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신경을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허진주와의 사랑이 깊어갈수록 그가 속초로 향하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속초로 가는 대신 그는 허진주와 여행을 갔다. 등산을 가기도 하고, 바닷가에 가기도 했다. 허진주가 산을 좋아해서 주로 산행을 가는 경우가 많았다. 북한산, 관악산, 수락산 등 주로 서울 주변의 산들을 당일치기로 다니던 그들의 산행은 언제부턴가 12일 코스로 바뀌었다. 그에 따라 두 사람이 오르는 산의 높이도 높아졌다. 덕유산, 지리산, 설악산 …….

 

언젠가 설악산에 갔을 때 그는 콘도에 허진주를 두고 혼자 속초 집에 가서 마누라를 만나고 온 적도 있었다. 꽤 여러 주 동안 집에 가지 않았고, 그래서 혹여 마누라가 눈치 챌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다. 아니, 죄책감 때문이었으리라.

 

인사동 한정식 집에서 자유기고가 한 사람과 점심 약속이 있던 날이었다. 그는 그곳에 허진주를 데리고 갔다. 그날은 원고청탁과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에 함께 갈 수 밖에 없었지만, 언제부턴가 그는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허진주를 동반했다. 그녀가 그 자리에 있음으로 해서 분위기가 좋아지고, 화제가 풍부해졌다. 그는 알 것 같았다. 예전에 K출판사의 박사장과 D기획의 조사장이 식사약속이 있을 때마다 왜 여직원과 함께 왔었는지를.

 

허진주가 늘 자신의 곁에 있다는 사실에 그는 행복해 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Bright에 마주앉았다. 카페 안은 좀 어두웠지만 평화롭고 조용했다. 게이카페라고 해서 남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열 사람 중 두 세 명은 여자 손님이었다. 그녀들은 게이의 동성친구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차와 함께 나온 비스킷 하나를 집어 허진주의 입 속으로 넣으려는데 그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액정화면 위로 김지연이라는 이름이 솟아올랐다. 그는 잠시 머춤했다. 마누라의 이름이었다. 그가 긴장한 눈빛으로 허진주를 바라보았다. 허진주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가 자신과 함께 있을 때 마누라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을 때마다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폴더를 열고 휴대폰을 받았다.

 

웬일이야? 무슨 일 있어?”

 

, 나 지금 서울에 와 있어.”

 

서울엔 왜? 어딘데?”

 

당신 가까이에 있어.”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누라의 목소리가 섬뜩하리만치 선명했고, 차가웠다. 그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 두리번거리며 카페 안을 살폈다. 마누라가 이곳을 알지 못하겠지만 왠지 불길한 예감이 그를 휘감았다. 그가 막 앉으려는데 서너 테이블 안쪽 칸막이 위로 마누라의 얼굴이 올라왔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허진주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을 쳐다보았다. 허진주의 얼굴이 하얘졌다. 그녀가 가방을 챙겨들고 출입문을 향해 몇 발자국을 옮기려는데 뒤쪽에서 마누라가 쫒아왔다.

 

어디를 가?”

 

마누라가 허진주를 잡으려고 달리려 하자 그가 마누라를 가로막았다.

 

당신 비켜, 좋은 말로 할 때.”

 

하지만 그는 비키지 않았다. 다급한 마누라가 칸막이 안쪽에 놓여있던 작은 화병 하나를 들어 출입문을 막 밀고 나가는 허진주를 향해 던졌다. 그 화병이 허진주의 머리에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허진주가 잠시 비틀거리더니 문을 밀고 나갔다. 마누라가 허진주를 잡겠다고 버둥거리며 그의 포위망을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허진주의 머리끄덩이를 잡아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마누라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카페 손님들의 모든 시선이 자신과 마누라에게 쏠렸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챈 그가 얼른 마누라를 안아 의자에 앉히고 자신도 마누라 옆에 앉았다.

 

그는 한 손으로 마누라의 입을 막았다. 마누라가 대성통곡을 하거나 욕설을 퍼부을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마누라는 기고만장해 있었다.

 

지난 15년간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았고,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참아왔다고 했다. 그것은 신혼 초에 그와 상의 한 마디 하지 않고 중절 수술을 했던 것과, 다시는 살지 않을 것처럼 집을 뛰쳐나갔던 죄에 대한 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당시에 그가 이혼을 요구했다면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마누라는 솔직히 얘기했다. 장인이 그에게 사과하지 않았거나, 그를 회유하지 않았다면 그와 마누라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을 인연이었다.

 

그런데 이제 마누라는 그렇게 저자세로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의 치명적인 약점을 잡았기 때문이리라. 마누라는 집을 정리해서 서울로 올라오겠다고 그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마누라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결정을 내리든 그는 상관없었다. 그에게 마누라는 먼 사람이었다. 카페 사건 이후 더 먼 사람이 되었다.

 

허진주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녀가 연락도 없이 나흘째 결근하던 날이었다. 당황하고 놀랐을 그녀가 걱정되었지만 마음이 안정되면 출근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는 일부러 전화를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자꾸만 궁금해졌다. 허진주의 전화를 기다리며 그는 컴퓨터를 뒤져 그녀와 함께 찍었던 사진들을 불러왔다.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은 거의 없었다. 카메라 하나로 서로를 찍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서로 뺨을 맞대고 셀카를 찍을 수도 있었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가 찍은 그녀의 사진은 상반신을 클로즈 업(close-up)한 것이 많았다. 사진 속엔 그녀의 해맑은 미소가 한 가득 담겨 있었다. 반면, 그녀는 얼굴보다는 분위기에 초점을 맞춰 풍경 속 한 곳에 그를 배치하여 찍었다. 그녀가 찍은 사진에는 고사목이 자주 등장했다. 언제 찍혔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그가 가끔 고사목과 함께 서 있는 사진도 있었다.

 

설악산 어느 절벽 끝을 줌 업(zoom-up)해 찍은 사진 속에 서 있는 고사목은 마치 다이빙대 끝에 엄지발가락으로 서서 막 입수하려고 팔 벌린 다이빙선수처럼 아슬아슬했다. 이미 45도 가까이 몸을 굽힌 그 고사목을 바위가 잡고 있었는데, 그는 한 동안 그 위태로움에서 눈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를 서서히 휘감아 왔다.

 

이상하게 초조해 졌다. 고사목을 바라볼수록 그 아뜩한 위태로움에 눈앞이 까마득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아찔한 현기증 뒤에 찾아온 미묘한 설렘이 그의 혼을 흔들었다. 고사목이 그 아슬아슬한 추락 직전의 두려움을 오히려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바위가 고사목을 놓아버리든, 고사목이 바위를 박차든 한 순간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의 돌이킬 수 없는 번지 점프,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간혹 녹음 속에 혼자만 벌거벗고 서 있는 고사목도 있었지만, 사진 속의 고사목들은 대부분 추위 속에서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다.

 

지난 겨울 지리산 노고단 근처에서 찍은 고사목은 칼바람에 풍화되어 눈조차 내려앉을 수 없는 성기고 가는 가지들을 머리카락으로 휘날리며 서 있었고, 몸통과 가지 두 개만 남아 있는 덕유산 고사목은 마치 고개를 틀고 플루트를 부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 고사목이 부는 플루트 소리가 바람을 일으켜 계곡 아래로 눈보라를 몰고 가는 듯 했다.

 

관악산, 운악산, 태백산……. 언제 그렇게 많은 산들을 허진주와 다녔는지 잘 생각나지 않았지만 그는 그 산에서 찍은 고사목들을 폴더 하나에 따로 모았다. 그리고 그것을 저장하려고 공CD를 찾다가 그는 낯선 봉투 하나를 집어들었다. 청첩장이었다. 허진주가 결혼한다는……. 그 청첩장 속의 신부 이름이 허진주임을 그는 몇 번이나 확인했다.

 

믿어지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는 청첩장에 적혀있는 예식장으로 전화를 걸어서 예식의 예약 여부를 확인했다. 분명 3일 후 오후 2시에 결혼식이 예약되어 있었다. 허진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원이 꺼져 있었다.

 

허진주가 결혼을 하다니…….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허진주는 그동안 거의 매일 그와 지냈다. 따로 누군가를 만나거나 통화를 하는 일도 없었다. 그리고 결혼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었다.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했었다. 떳떳하지 못한 사랑이었지만 서로의 마음은 통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입사서류를 뒤져 허진주의 집주소를 찾았다. 서류에 적힌 그녀의 집전화 번호는 결번이었고, 그가 찾아간 그녀의 남가좌동 집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는 오로지 3일후에 예식장으로 가는 길밖에는 없었다.

 

3일후 그 시간, 예식장에서는 결혼식이 열리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녀는 더 깊이 숨기 위해 시간을 벌어야만 했을까? 그렇다면 그녀의 실종은 철저히 계획되어진 일이란 말인가? 그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한순간에 완벽하게 사라진 허진주. 마누라의 침입은 분명히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그 갑작스러운 출현을 이용해 자취를 감춘 허진주의 대응은 너무나 신속했다. 마누라가 예고도 없이 나타날 거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고, 그에 대비해 수없이 예행연습이라도 한 사람처럼 그녀는 순간 이동해 버렸다. 그래서 그는 혹시 허진주가 마누라와 공모한 것은 아닐까? 모든 사실을 알고 있던 마누라가 허진주를 협박한 것은 아닐까? 하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마누라는 어떻게 그와 허진주와의 관계를 알았던 것일까?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서은아가 마누라에게 제보한 것은 아닐까?

 

이제 더 이상 허진주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는 세상의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세상에는 한 여자만을 사랑하다가 죽는 남자가 있고, 한 여자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죽는 남자가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이 후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느껴졌다. 지켜주지 못할 사랑이라면 사랑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녀를 찾아내야 한다. 그녀를 찾아내지 못하면 그녀를 사랑했다고 말하지 않으리라.

 

그의 마음 한쪽 끝에서 가시 줄기가 올라왔다. 그 가시 줄기는 덩굴이 되어 그의 몸을 휘감으며 그를 옭죄어왔다. 그는 가시덤불에 에워싸여 살기 시작했다. 그 덤불은 고독과 고통으로, 단절과 절망의 뾰족한 바늘로 그를 찔러댔다.

 

그는 사일러스 마아너처럼 살기 시작했다. 애인과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낯선 고장에 가서 고독 속에 살아가며 수전노로 변하는 마아너처럼 그는 오로지 허진주와의 옛 기억에 집착하며 살아가기 시작했다. 허진주를 알기 전보다 더 큰 외로움이 그를 붙잡고 있었다. 아니 그가 외로움을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위태로워 보였다.

 

도대체 허진주는 어디로 간 걸까? 브라이트의 문을 밀었을 때 눈부시게 쏟아지던 햇살 속으로 빨려 들듯 사라진 그녀. 밝음 속에서 활활 타던 그녀의 검은 실루엣은 점차 작아지다가 빛으로 승화해 버렸다. 어두운 이승의 문을 밀고 찬란한 천국의 빛 속으로 승천하는 모습 같기도 했다.

 

그는 미친 듯이 허진주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허사였다. 그는 허진주를 찾느라 회사 일을 전폐했다. 식음도 마다했다. 그의 머릿속엔 브라이트의 문을 밀고 나가던 허진주의 검은 실루엣만이 어른거렸다. 그녀의 머리를 찢으며 퍼석-하고 떨어지던 화병 깨지던 소리만이 들렸다. 그 단단한 화병이 깨질 정도라면 그녀의 머리가 성할 리 없었으리라. 그녀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그녀에게 나쁜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수만 가지 생각들로 그의 머리는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를 뒤따라 나가서 병원으로 옮겼어야 했는데…….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밀려올 때마다 그의 가슴은 무너져 내렸다. 마누라가 쫒아나가 몹쓸 짓을 할까봐 그녀에게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려고 마누라를 붙잡고 있었지만, 그것보단 허진주를 데리고 도망쳤어야 했다고 그는 수없이 후회하며 가슴을 쳤다.

 

창가를 서성이는 버릇이 생겼다. 처음엔 책상에서 돌아앉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곤 했었다. 하늘이 푸른지 노을이 지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앉아있었다. 버티컬 커튼이 풍경을 차단해도 그는 창가를 향해 앉아있었다. 어둠이 내려도 그 어둠 속에 앉아있었다.

 

그렇게 넋을 놓고 있다가 어느 한 순간 허진주를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이 밀려오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창가를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그때의 상황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허진주의 손을 이끌고 도망치리라. 도망치리라…….

 

그의 시선이 창가에 걸려있는 고사목 사진에 머물렀다. 갈갈이 찢겨져 나가는 육신의 고통을 견디고 서서 바위보다 단단한 뼈 하나로 버티고 있는 고사목의 처연한 모습.

 

후회와 그리움으로 온몸이 녹아내린 그 나무와 자신의 모습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몸속으로 찌릿한 전류같은 것이 흘렀다. 고사목은 이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창가를 서성이면서 그는 고사목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고사목을 바라볼 때마다 그는 자신의 몸속으로 고통의 파장 같은 것이 전해져 옴을 느꼈다.

 

살아있기 때문에 생생하게 느껴지는 아픔, 그것은 강인한 생명력 같은 것이었다. 죽은 나무를 보며 생명을 느낀다는 것은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하지만 그에게 고사목은 죽은 나무가 아니었다. 거칠고 단단한 껍질 속에 무한한 생명력을 충전하고 있는 생명체였다. 바람과 추위에게 살과 근육과 피를 모두 내어주고 깡으로, 악으로, 독으로 버티고 서 있는 고사목의 모습이 시나브로 그의 심장으로 옮아오고 있었다.

 

한 대리가 노크도 없이 불쑥 들어왔다.

 

사장님, 보셨어요?”

 

어느 새 한 대리는 그의 책상 앞으로 다가왔고, 컴퓨터 마우스를 잡고 있었다. 한 대리가 검색창에 낙원동 김노인 살인사건이라고 입력하고 엔터를 쳤다. 검색어 관련 뉴스가 주르르 떠올랐다. 그 중에서 동영상 하나를 클릭하자 마이크를 든 리포터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리포터는 낙원세탁소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그 세탁소 앞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보도하고 있었다. 잠시 후 화면에 좁은 골목길이 비춰졌다. 카메라가 이동함에 따라 골목 이곳저곳의 모습이 드러났다. 모니터를 주시하던 한 대리가 갑자기 동영상의 일시정지 버튼을 클릭하고 화면을 확대하였다.

 

찾았어요. 여기 보세요.”

 

한 대리가 가리키고 있는 커서의 끝에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 쓰레기봉투를 들고 대문 앞에 서 있는 여자……. 해상도가 좋지는 않았지만 그 여자가 허진주임을 그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의 눈이 반짝 빛났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허진주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니……. 그는 믿어지지 않았다. 낙원세탁소는 그가 있는 사무실 바로 앞 블록에서 골목 안쪽으로 100여미터만 가면 있다.

 

한 대리, 저 여자는 허진주가 아니야. 많이 닮긴 했군.”

 

그는 자기의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허진주가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한 대리에게 무관심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한 대리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나가고 난 뒤 그는 그 동영상 뉴스를 세 번이나 되풀이해서 보았다. 허진주가 분명했다. 골목 중간쯤에 있는 허름한 초록색 쪽문 앞에 쓰레기봉투를 내놓고 들어가는 허진주. 그녀가 골목에 등장한 시간은 채 10초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정지상태의 화면에서 그녀는 오랫동안 그의 눈앞에 머물러 있었다.

 

당장 달려 나가 허진주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냉정해야 한다고 최면을 걸었다. 그녀가 왜 거기에 있는가? 그녀는 정말 결혼을 했는가? 그녀는 왜 한 마디 말도 없이 비밀 결혼을 했는가? 저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살기 위해 비밀결혼을 한 것인가? 그 자신을 사랑하긴 했었던 것인가? 그녀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그녀가 모르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어떻게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듯 그렇게 떠나야만 했었는가? 마치 그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을 제치고 수많은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중 나왔다. 하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그녀를 만나야 한다는 것. 그 모든 의혹의 열쇠는 허진주가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밤늦도록 창가를 서성거렸다. 의문이 머물렀던 자리에 두려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화면 속의 여자가 허진주가 아니면 어떡할까? 허진주가 혹시 자신을 모른 체 하지는 않을까? 갑자기 찾아온 자신을 피해 더 깊이 숨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는 허진주의 상황을 좀 더 파악해 본 후에 그녀를 만나리라 다짐하며 사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뉴스 화면에 비춰졌던 낙원 세탁소 골목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허진주가 밀고 나왔던 초라한 쪽문 앞에서 한참 동안 주변을 기웃거리던 그는 골목길 이곳저곳을 배회하다가 새벽녘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하루에 네 번 세탁소 골목에 갔다. 그 골목을 거쳐 출근하고, 점심 먹고 산책 삼아 그 골목을 걷고, 저녁에도 그 골목을 한 바퀴 돌아 들어왔으며, 늦은 밤 야근 후에도 그 골목길을 걸어 퇴근했다. 그러나 허진주의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었다. 골목 모퉁이에 서서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가 나왔던 쪽문을 아무리 지켜보아도 그녀는 다시 그 문을 밀고 나오지 않았다. 닷새째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던 저녁 무렵, 그는 허진주의 초록색 쪽문이 다급히 열리는 순간을 목격하게 되었다.

 

건장한 남자 하나가 여자를 안고 쪽문을 밀고 나와서 그가 서 있던 세탁소의 반대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의식을 잃은 듯 축 늘어져 있었다. 왠지 불길한 느낌에 휩싸인 그는 그 남자를 쫓기 시작했다. 그 남자가 안고 있는 여자가 허진주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허진주가 아프기라도 한 것일까? 남자는 여자를 안고 골목을 벗어나더니 길가에 세워져 있던 차의 뒷문을 열고 여자를 앉혔다. 그리고 급하게 시동을 걸었다. 그는 승객을 태우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택시를 잡아타고 앞차를 뒤쫓기 시작했다. 여자를 태운 차는 동대문 옆에 있는 대학병원 응급실 앞에서 멈췄다.

 

남자는 택시에서 내려 여자를 안고 응급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도 따라 들어갔다. 응급실 안은 환자와 보호자들이 얽혀 번잡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남자가 한 간호사에게 뭐라고 말하자 간호사가 침대를 가리켰다. 남자는 여자를 침대에 뉘었다. 그는 응급실 입구 안내 데스크에 기대서서 침대에 누워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허진주가 확실했다. 남자는 누굴까? 허진주의 남편일까? 그는 허진주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상황을 좀 더 지켜보기로 하였다.

 

잠시 후 남자가 안내 데스크로 다가왔다. 험상궂은 인상과는 달리 목소리는 부드러운 편이었다. 남자의 목소리는 약간 흥분해 있었다.

 

“5번 침대에 방금 눕힌 저 여자요. , 전 종로 경찰서 김형삽니다. 탐문수사를 하고 있었는데, 저 여자가 진술 도중에 갑자기 쓰러졌어요.”

 

컴퓨터 화면에 시선을 꽂고 있던 간호사가 김형사에게 물었다.

 

우선, 환자분의 성함과 주민 번호를 불러주세요.”

 

이름 밖에 몰라요, 허진주라고…….”

 

간호사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린 후, 화면을 훑어보며 김형사에게 말했다.

 

여기 진료기록이 있어요. 기면병을 앓고 있네요.”

 

…….”

 

기면병……. 과다수면, 탈력발작, 수면마비, 환각 증세를 동반하는 수면장애.

 

그녀에게 갑상선 이상과 같은 몸에 특정한 병이 있었던가?

 

충격에 의한 뇌손상……. 마누라가 던진 화병에 머리를 맞고 기면병을 얻었을까?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현실도피 심리……. 그녀는 무엇이 두려워서 잠 속으로 몸을 숨긴 것일까? 얼마나 힘들었으면 눈을 감고 싶었을까?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을 만큼 괴로웠던 일이 무엇이었을까?

 

사랑이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주변의 이목이 두려웠던 것일까? 수용하고 싶지 않은 사랑 때문에 괴로웠던 것일까? 돌이켜 보면 허진주는 그와의 사랑에 있어서 늘 수동적이었었다. 사랑은 늘 그에게서 그녀에게로 한 방향으로 갔었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언반구도 없이 자신을 떠난 것일 수도 있다는 데까지 그의 생각이 미쳤다. 그러자 갑자기 그의 가슴 한쪽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아픔이 밀려왔다.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에게 사랑을 강요한 건 아니었을까? 하는 자괴감이 그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그녀는 왜 자신을 거부하지 않았을까? 그는 그것이 궁금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했건 하지 않았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그녀를 사랑했다는 사실이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한 여자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죽는 남자는 되고 싶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느꼈을 고통과 아픔을 헤아리지 못했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는 낙원세탁소 골목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숨어 지켜보면서 느끼는 외로움. 슬픔이나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든 외로움. 절대고독. 허진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에 대한 자괴감과 뒤늦은 후회.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는 자신을 괴롭혔다.

 

그는 자신을 더욱 외롭게 만들고, 가능한 한 자신의 몸을 고통스럽게 자극함으로써 허진주가 겪었을 아픔을 대신하고, 자신의 뼈아픈 실수에 대한 벌을 받고자 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면서 묘한 쾌감을 동시에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러닝머신 위를 달렸다. 10단계의 가장 빠른 속도로 달렸다. 30분쯤 달리면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 온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온몸에서 땀이 물 흐르듯이 흘러내렸다. 다리와 팔의 근육이 뻣뻣해지고 마비가 될 것처럼 아파왔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고 달렸다. 그러다보면 이내 그는 고통의 정점에 이르렀다. 온몸이 폭발해 버릴 것 같은 극한의 고통을 느끼는 순간 그의 눈앞으로 지리산이 보인다. 눈보라를 맞으며 팔을 벌리고 산기슭에 서 있는 고사목이 선명히 떠오른다.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아내는 찬바람에 맞서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는 그 고사목이 그에게 말을 건넨다.

 

그 어떤 고통도 나를 쓰러뜨리지는 못해. 팔이 부러져도, 갈비뼈가 날아가도 난 결코 꺾이지 않아. 그럴수록 나는 더 깊이 뿌리를 내릴 거야. 고독의 삭풍이 내 뿌리를 키우고, 고통의 눈보라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지. 삶은 견디는 거야. 고독과 고통을 즐기는 거야. 뿌리와 몸통만 있으면 돼.”

 

고사목은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바람을 향해 검게 그을린 몸통과 팔을 벌렸다. 그 순간 그는 전신을 타고 흐르는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그 전율이 지나가고 나면 더 이상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통의 임계점을 넘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더 이상 그는 숨이 차지 않았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지도 않았다. 다리도 팔도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그는 마치 로봇처럼 달리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 후에 그는 러닝머신에서 내려와 매트에 벌렁 눕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지켜 주리라. 허진주에게 들키지 않고 언제까지나 뒤에서만 바라보리라…….’

 

이상했다. 극한의 끝에 더 큰 외로움이 찾아왔다.

 

새로운 괴로움과 통증으로 몸을 자극하면 그것에 적응하는 몇 주 동안은 그의 마음속은 알 수 없는 흥분과 설렘으로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 때 뿐이었다. 그의 육체가 적응한 고통은 더 이상 익스트림도 아니고, 쾌락도 주지 않았다. 그것들은 그냥 그가 힘들이지 않고 거뜬히 해 낼 수 있는 쉬운 일에 불과했다. 그러면 또 다시 외로움이 찾아왔다. 전보다 더 견디기 힘든 외로움. 그 외로움은 마치 그가 먹은 음식이 복잡한 화학작용을 거쳐 분해되어 온몸에 영양소로 공급되듯이 그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외로움이 그의 뼈를 만들고, 그의 근육을 생성시키고 그의 생각을 키웠다. 외로움은 그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길러내고, 하루만 방심해도 무성한 수염으로 자라났다. 사흘에 한 번씩 손톱을 깎아도 외로움은 자라났고, 아무리 땀으로 쏟아내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또 다른 가학의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외로움은 극복되는 게 아니라 잠시 잊히는 것임을 그는 모르는 걸까?

 

그는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처음엔 해안도로를 따라 한없이 페달을 밟았다. 거센 바람이 그의 얼굴과 온몸을 쥐어뜯고, 허벅지 근육과 핏줄이 폭발 직전의 풍선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오를 때 그는 외로움의 극한을 체험했다. 죽어도 좋을 만큼 외롭다고 느끼는 순간 온 몸으로 전율과 쾌락이 찾아왔다. 하지만 해안도로 달리기도 이내 시들해졌다. 그는 미시령을 오르기 시작했다. 꼬불꼬불 끝없이 이어진 미시령 정상까지 오르는 일은 만만치가 않았다. 한나절 동안 쉬지 않고 페달을 밟으면 온몸은 불덩이가 되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오듯 땀이 쏟아져도 그는 닦지 않았다. 땀줄기가 눈과 입으로 흘러들어가도 개의치 않았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자신이 정해놓은 시간 안에 미시령 정상에 오르는 것이고 그 시간 내에 자신의 몸을 가능한 한 고통스럽게 혹사시키면 되는 것이었다. 그는 한동안 미시령 오르기에 전념했다. 처음에 고개 중턱에서 느끼던 고통의 극한을 정상부근에서 느끼기까지 꽤 여러 달이 걸렸다. 그는 미시령의 매력에 흠뻑 빠져 지냈다.

 

미시령에 올랐다가 내려가는 길에서도 그는 고통의 극한을,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공포의 극한을 느꼈다. 브레이크를 잡지 않고 가속도의 공포를 느끼며 고개를 내려오는 일은 목숨을 걸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으므로 그 어떤 익스트림보다 자극적이고 짜릿했다. 미시령에는 고사목도 있었다. 푸른 나무들 속에 서 있어 더 고독해 보이는 고사목. 하지만 그 고사목은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자신만의 굳은 신념을 간직하고 더 큰 고통을 향해 팔 벌리고 선 모습은 오히려 의연해 보였다.

 

그는 핸들을 놓고 고사목처럼 두 팔을 벌리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가속도가 붙으면서 그의 몸은 자전거로부터 분리되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날아오르는 새처럼 두 팔로 힘차게 날갯짓을 하였다. 허공 높이 솟아오르다가 날개를 접고 다음엔 번지점프로 뛰어내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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