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리산고등학교에서의 근무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지리산 고등학교의 홈페이지를 방문하고 한동안 멍했습니다. 동영상과 아이들의 꾸밈없는 웃음이 가득한 사진들을 보며, 이 어려운 길을 준비하고, 이끌어 가시는 분들에 대해 경외심(敬畏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직의 길에 들어서고, 또 여러 나라를 다녀보며 느끼고 관심을 가져온, 교육이란 화두(話頭)의 ‘아름다운 현장’을 보았습니다.

제 인생의 열정을 ‘지리산고등학교’에서 태우고 싶다는 강한 설렘을 느낍니다. 혹 제 성의 부족 탓에 이번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전 아마도 다음을 또 기약하고 기다릴 것 같습니다.

갈리아를 원정한 시이저는 로마의 원로원에 보낸 서한에서 자신이 본 갈리아에 대해 원로원의원들에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현실만을 보게 된다.’는 권고를 보냅니다. 지리산고등학교 청소년들에게 제 경험과 보고 느낀 많은 ‘현실’들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세상은 ‘보고 싶은 현실만이 아니라, 보고 싶지 않은 현실도 보아야한다’는 것을 깨우쳐, 그들이 성취하고자 하는 ‘미래의 현실’에 작은 보탬이 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 바위, 바람 그리고 바다처럼......

‘제 삶의 가치관은 학생들과 함께 하면서 영글었습니다’

바위처럼 굳게,’
‘바람처럼 맑게,’
‘바다처럼 깊고 넓게’

1982년. 대학을 졸업하고 교직에 든 첫 해, 안양여자상업고등학교 1학년 야간반을 맡았을 때, 아이들에게 준 ‘급훈’입니다. 가난하지만 배움의 열정에 차 있던 그 시절 여상 야간반 아이들을 돌이켜보면, 그들의 삶이야말로 제 자신을 일으켜 세운 스승이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들을 가르쳤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통해 삶과 진지하게 맞서는 법을 배웠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급훈은 아이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제 삶 전체에서 스스로에게 주는 엄한 가치였습니다. 이 초심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저는 주어진 일 마디마디 마다 숙고(熟考)해 왔습니다. 긴 외국생활에서도 이 초발심(初發心)은 언제나 저를 흔들어 깨우는 좌우명(座右銘)이 되었습니다.

‘타인이나 세상에 대해 경솔함은 없는가?’라는 자문을 늘 잊지 않고 있습니다. 바다처럼 깊고 넓게 사유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나무꾼의 구슬땀을 어루만져 주는 맑은 바람처럼, 함께 하는 동료들과 마음 푸는 여유로 다가갈 수 있도록 생각을 다스리고 살아가려 애 씁니다. 바위처럼 굳세게 살고 싶습니다. 이 모든 것은 현재도 진행형이며, 어느 자리에 있거나 어떤 역할을 할 때도 스스로 던지는 질문입니다. 아이들을 대하는 것에도 이런 자세가 되도록 노력해 왔습니다.

‘학생들은 교사의 열정으로 성장한다고 믿습니다’

안양여자상업고등학교 야간반 담임을 맡았던 그 때, 언제나 담임 반 수업은 밤늦은 마지막 교시입니다. 학생들은 낮 시간에는 공장이나 직장을 다닙니다. 그들의 향학열이 비록 뜨겁다 해도 피곤에 지친 청소년들입니다. 오후 9시 40분에 끝나는 마지막 수업까지, 그들이  초롱초롱하게 견디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바램입니다. 그런 아이들을 위해 저는 적막에 쌓인 복도를 쿵쿵거리며 뛰어들 듯 교실로 내 달렸습니다. 교사의 활기찬 걸음, 명랑하게 쩌렁쩌렁 울리는 음성, 유쾌한 유머는 졸음에 겨운 학생들에게 청량제만큼이나 상큼한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지난 2002년, 어엿한 학부모가 된 그들과 동창회를 가졌습니다. 옛 담임이 호주에서 왔다는 소식에 많은 제자들이 모였더군요. 저는 그들에게 ‘급훈을 기억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가 어찌 그 아름다운 급훈을 잊겠느냐’며 합창해 낼 때, 제자들도 저도 가슴 벅찬 울림에 젖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동안 간직해 왔던, 그들만의 20년 전 학급일기도 꺼내 놓았습니다. 자신들의 학창시절 푸념과 짜증, 기쁨이 고스란히 밴 학급일기를 받아들고 울먹이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그 시절의 교직 경험은 제 삶을 지탱해준 ‘명예로운 메달’ 니다.

바위처럼 굳게......
1983년, 주간부 1학년 담임을 맡고 전 고민에 잠겼습니다. 책 한권 제대로 읽을 시간을 갖지 못한 채, 학생들은 제가 아주 오랜 옛날 겪어야 했던 주산 부기의 급수와 씨름하느라,  학교생활에 허덕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58명의 학생들에게 책 한 권씩을 선정해 준비토록 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마다 번호에 따라 돌려가며 읽고, 각자 독후감 일기를 쓰도록 했습니다.

처음 한동안 아이들은 잘 따라 왔지만, 4월 5월이 지나며, 아이들은 지쳐 갔습니다. 담임의 집요한 채근에 아이들은 이미 읽은 친구들의 독후감을 적당히 버무려 검사 시간에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도 저는 꾸짖기 보다는 재치 있는 감상평으로 슬쩍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막막한 제안에 아이들은 지쳐가는 것 같았습니다.

바람처럼 맑게......
마침 중앙일보에서 공고가 나왔습니다. ‘전국 초중고 독서 감상문 대회’의 안내였습니다. 10월 말경에 시상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교실 뒤 게시판에 그 포스터를 붙여 놓고, 저는 아이들에게 주문했습니다. ‘목표를 가지고, 우리 한 번 전국을 깜짝 놀라게 하자’고. 그리고 방학 동안에 ‘미진한 책을 보충해 읽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한 권에 대해 독후감을 집중적으로 써 보자’고. ‘모든 첨삭지도는 이 담임이 성실하게 노력하겠다.’고 격려 했습니다.

9월 경. 마감 시한까지 우리 반 학생들은 그들 각자의 독후감을 일곱 차례나 제출해야 했습니다. 반 아이 모두를 대상으로 한 일이었기에, 학생들의 독후감을 집으로 가지고 가 새벽녘까지 살펴보고 첨삭했습니다. 마감에 즈음해 학생들은 많이도 투덜거렸고, 저도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58부의 독후감을 포장해 중앙일보사로 보내고, 사실상 저도 학생들도 잊고 지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기대를 한다는 것이 두려웠겠지요.

10월 말의 어느 날. ‘중앙일보에서 전화가 왔다. 우리 아이들이 독후감을 보낸 적이 있냐.’고 교장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바다처럼 깊고 넓게......
자초지종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 독서 감상문 대회에서 우리 반 아이들의 작품은 대상을 비롯해 무려 26명이 모두 입상작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저도 지도교사상을 받았습니다.(1983년 중앙일보, 전국 독서 감상문대회 결과) 걱정이 되었습니다. 입선되지 못한 아이들을 어떻게 달랠까 고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 반 아이들은 모두들 뛸 듯이 기뻐하고, 환호했습니다.

당시 신설학교였던 안양여자상업고등학교로서도 그 결과는 대단한 반향을 불러 왔습니다. 시상식이 있은 후, 우리 반은 전교생과 학부모들을 모시고, ‘독후감일기 전시회’를 꾸몄습니다. 아이들이 8 개월가량을 작성한 그 독후감 속에는 빨간 글씨로 격려와 칭찬을 곁들인 저의 흔적도 고스란히 배여 있었습니다. 그 시절, 아이들과 함께 노력했던 그 시간과 공간은 제 인생에 늘 함께 한 ‘소중한 훈장’입니다. 

같은 학교 교사와 결혼한 후, 인문계 고등학교인 안양 양명고로 옮기게 됩니다. 0교시 수업, 저녁까지 계속되는 보충수업, 일주일에 두 번은 치러야 하는 도서관 집단 수용(?)의 자율학습 감독. 대학입시만을 지상의 목표로 이루어지는 인문계 학교의 현실에 부대꼈습니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고,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싶은 갈증은 줄기차게 현실에 대한 의욕상실로 몰았습니다. 일본에 간 것은 ‘다른 세상보기’였습니다. 일본 생활을 하면서 당시에 일본 청년들에게 불어 닥친 호주유학 열풍은 다시 저를 자극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아내와 함께 호주 유학을 결심하게 됩니다.

* 호주 생활

87년 9월 시작된 호주생활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들뜬 나날이었습니다.
어학연수가 끝나고, 현지에 있는 호주동아일보에 기자직으로 근무합니다.

‘준비 없는 기회는 없다고 믿습니다.’

호주동아에 입사해 교민사회의 기자로 뛰던 시절, 1991년 해빙무드와 함께 진행된 세계적 냉전체제의 와해는 교민사회에까지 불길이 번졌습니다. 당시 데스크는 북한 취재를 기획했습니다. 선배기자가 제출한 북한 취재 기획은 확정되었고, 모두들 부러워했습니다. 선배기자는 호주 시민권자임으로, 북한의 비자를 받는 것도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북한은 비자를 거부했고, 급해진 데스크는 대안을 고민했습니다. 저는 베트남을 제안했습니다. 당시 호주 교민사회의 초기 이민자들은 베트남 전쟁의 막바지에 호주로 건너 온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전쟁 당시, 베트남에서 한국군대와  파견기업체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탓에 베트남에 대한 향수(?)가 강했습니다.

저는 그런 점을 들어 데스크에 ‘앞으로 베트남이 개방되면 호주 교민들의 진출도 늘어 날 것이고, 한국과 외교관계가 없는 지금이 베트남에 대해 취재할 절호의 기회’라고 강변했습니다. 한국의 언론들도 이 취재에 대해 관심이 높을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제 의견은 받아 들여졌고, 91년 3월, 20일간의 여정으로 베트남 취재에 들었습니다.

얼음 같은 냉정함, 불꽃 같은 열정으로......'

호치민시(옛 사이공) 외곽의 탄손누트 공항에서부터 시작된 긴장은 취재기간 내내 지속되었습니다. 숱한 견제 속에서 수백 장의 사진을 찍고, 8편의 르포기사를 송고하며, 베트남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호주 교민사회에 알렸습니다. 그 취재는 베트남에 ‘버려진 라이따이한’이라 불린 한국인 2세에 대해 교민사회와 한국사회의 관심을 촉발시킨 계기가 되었습니다.
(기사 첨부; “아버지를 증오해요.”) 

5년을 기자로 근무(KOREAN TIMES 포함)하면서도, 제 인생에 무엇인가 빠진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 때, 마침 시드니에 세워진 '린필드 한국학교'(한국정부와 호주정부 지원)는 저를 설레게 했습니다.

린필드 한국학교는 매주 토요일마다 현지 교민자녀와 시드니총영사관, 기업 주재원 자녀들을 위해 한국어, 한국역사, 수학, 한국문화 등을 가르치는 주말 학교입니다. 25명 남짓의 교사와 250여명의 학생(초등학교~고등학교)으로 구성된 학교입니다.

주임교사로 근무하며, 호주정부에서 보내오는 공문과 호주시드니총영사관, 재호주 한국교육원에서 보내오는 한국 내 교과과정에 대한 자료와 공문 등을 취급했으며, 교과서 수령, 학생들의 학습활동과 교사들의 근태 등을 정리하는 교무직도 수행했습니다.

고등학교 과정의 학생들에게 한국의 교과 과정에 따른 국어와 논술, 문학, 한자 등을 가르쳐 왔습니다. 학생들은 부모의 임기가 끝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한국의 학교 현실에 적응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게 됩니다. 따라서 한국의 교과 과정에 쉬이 적응할 수 있도록 한국의 교과과정을 쫓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시급했습니다.

‘학생들의 동기 유발을 고민하는 교사이고 싶습니다.’

외국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학생들에게 막연하게 한국의 국어교과서를 소개하고, 그 실라버스에 의해 가르치는 것은 학습의 흥미를 떨어뜨리는 일이었습니다. 논술에 대한 준비, 토론 수업 진행, 한자 학습 등으로 다양하게 전개시켜야하는 국어 학습의 특성상, 외국 실정에 맞지 않는 교과서에만 의존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학생들이 관심을 가지는 분야에 대한 신문기사와 칼럼, 사설 등을 인터넷에서 컴퓨터에 옮겨온 후, 동일한 문제에 대해 다른 관점에서 문제 제기한 기사나 칼럼은 없는지를 파악합니다. 그 상반되는 시각의 두 가지 기사나 칼럼에 대해 한자 변환이 가능한 단어는 한자 변환을 시키고, 동일한 기사를 각각 한자를 포함한 기사와 한글만으로 된 글로 나누어 학생들에게 복사물로 나누어 줍니다.

우선 한자가 포함된 글을 함께 읽으며 설명하고, 문단에 대한 상관관계를 이해시킵니다. 그런 후, 숙제로- 한자로 된 자료만 읽게 하기, 이 기사와 관련해 자신의 주장을 글로 써오기. 그리고 상반되는 시각에 따라 다음 시간에 토론을 진행시킵니다. 여기에 소요되는 시간은 일주일에 3시간이 국어로 배정된 경우, 한 시간 분에 해당합니다.

학생들은 한자를 읽기 위해 굳이 부모님께 묻거나 사전을 찾을 필요가 없으니, 개인학습 시간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들이 관심을 보이는 분야에 대한 공부임으로 흥미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또 다음 주 수업에서 스스로의 발표를 통해, 다른 학생과의 관점 차이를 경청하며 깨닫게 되면서, 수업 태도도 진지해집니다.

한자가 포함된 글을 통해 자연스레 한자에 대한 거부감을 줄임으로써 얻게 된 또 다른 의외의 소득도 있었습니다. 2001년 ‘한글과 한자문화’라는 잡지에서 전국 초중고 대학생 등을 대상으로 하는 한자교육 진흥을 위한 글 현상공모가 있었습니다. 전국 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의 이름으로 추진된 이 현상공모는 국무총리상, 교육인적자원부장관상 등이 학생들에게 수여되는 상당히 큰 규모의 대회였습니다. 저는 학교에 제안해- 비록 해외에 있지만 학생들의 글 솜씨와 한자에 대한 이해를- 한국 내 학생들과 비교 평가해 보자고 의견을 내었고, 교장선생님과 선생님들이 찬성해 전교 차원에서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담당한 고등학생들은 짓궂었습니다. 교사인 제가 함께 응모하지 않으면 자신들도 하지 않겠다고 엄살을 부렸습니다. 저도 그 대회에 응모하게 됩니다.

결과에 저희 스스로도 놀랐습니다. 총 4,000여명이 응모했다는 그 대회에서 린필드한국학교는 중고등부 금상(교육인적자원부장관상) 2명을 비롯해, 총 11명이 수상하였습니다. 저도 일반부 동상을 수상했습니다.(참고 자료 뒷부분에 첨부, 금상 수상작과 함께)

이런 행사를 통해 학생들이 자신감을 얻게 된 것은 당연했습니다. 호주 내 한국인 청소년 웅변대회에서 대상을 차지, 호주 대표로 한국 내 전국 웅변대회에 출전해 국회의장상을 타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상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비교 대상이 부족한 학생들에게 자신감을 불러 주기 위한 적절한 동기부여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호주에서 길러낸 제자들이 100여명 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자신들의 삶을 개척해가며 국가동량(國家棟梁)으로 커가는 그들을 만나면 그리 흐뭇할 수가 없습니다.

2,000년에 들어 린필드 학교의 고등학교 과정 학생 수는 급격히 줄었습니다. IMF 사태의 후유증과 한국 경제의 어려움 탓인지, 많은 기업들은 시드니에서 철수했고 규모를 줄였습니다. 그 줄어듦은 학교에도 영향을 미쳤고, 제가 할 수 있는 역할도 크게 줄어든 것입니다. 저는 주임교사직을 다른 분에게 넘기고(주말 수업은 계속), 2002년 초 부터는 한국의 유학생들을 호주의 현지 학교에 소개하고 관리하는 유학업무를 하게 됩니다.

그 이후, 매년 여름과 겨울, 유학생들의 안내를 위해 한국을 드나들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묘하게도 내 조국과 내 땅에 대한 반가움과 사랑은 커져 갔습니다. 탯줄이 묻힌 산하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었습니다.

* 조국과 지리산고등학교에 임하는 자세

어머니 품이 그리운 것을 어찌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내 나라 내 고향이 그리운 것을, 타국에서 20년 오랜 삶을 살아보지 않은 이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드넓은 대륙이 주는 숨 몰아쉴 망망함 보다, 올망졸망 주름진 조국의 산하가 눈에 시리고, 향긋한 크림스프보다 구수한 된장찌개의 맛이 혀끝에 감도는 것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런 그리움으로 답답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살기 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진정 행복한 삶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하고 싶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던 끝에, ‘안양의 야간반 아이들을 가르치던 때가 가장 순수하고 행복한 시절이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결국 제 발길은 고국을 향했고, 여기 <지리산고등학교>로 이어졌습니다.


2005년 10월 중순에 한국에 돌아 왔습니다. 섬진강과 지리산, 강진의 다산초당, 영랑생가, 월출산, 그리고 정동진, 한계령, 평창, 효석의 메밀꽃 산하, 정선의 아우라지까지 11월, 12월 두 달간 돌아본 한국은, 오랜 외국생활에서 돌아온 저를 외면하지 않고 편하게 반겨주는 듯합니다.

제가 가진 조그만 달란트로 조국의 청소년들과 함께하며, 이제부터의 삶을 우리 땅에 뿌리내리고 싶습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꼭 ‘미래를 준비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여깁니다. 자연과 함께 어울리는 삶, 관용을 베풀 줄 아는 넉넉함, 주어진 역할에 겸손하게 최선을 다하는 자세야말로 서로가 배우고 가르쳐야 할 덕목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지리산고등학교의 설립목적과 뜻이 또한 여기에 있다고 믿습니다.

미국의 교육철학자 ‘레오 버스카글리아’는 그의 저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에서 우화(寓話) 한 토막을 전해 줍니다. <산 속 동물나라에 사회성을 갖추지 못한 채 살아가는 숱한 동물자녀들을 위해 다양한 동물의 원로들이 모여 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합니다. 달리기에 능한 말(馬)선생님도 뽑고, 나무타기에 능한 원숭이 선생님도 모시고, 다이빙에 능한 개구리 선생님, 수영에 능한 물고기 선생님, 슬금슬금 잘 기어가는 뱀도 선생님으로 모셨습니다. 몇 년 후, 그 학교의 졸업식엔 적당히 대충 조금 씩 할 줄 아는 뱀장어가 가장 우수한 학생으로 뽑혔답니다.>

현실속의 많은 제도권 학교들은 버스카글리아의 우려처럼, 편협하고 길들여진 우중(愚衆)들을 양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고의 말로 새겨듣습니다. 그런 점에서도 지리산고등학교의 소중함은 더욱 빛이 납니다.

한국의 텔레비전 광고를 보다가 얻은 글귀입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라 불러 달라.’ 삶은 ‘조화(harmony)’라고 믿습니다. 경험과 열정을 가지고,  ‘지리산고등학교가 추구하는 교육의 장’에 조화롭게 동참하고 싶습니다.

고등학교 교사 경력, 다양한 외국 체험, 호주에서의 기자 생활과 해외 취재 경험, 호주의 문화와 자연, 교육현장에 대한 이해, 유학생과 교민 자녀들의 갈등 등을 보고 겪은 저의 삶은, 지리산고등학교의 청소년들이 열어갈 ‘다채로운 미래’에 길라잡이가 될 것입니다.

‘함께 하고 싶습니다.

젊은 시절의 마음 밭으로 돌아가 아이들과 함께 하며, 선생님들과 어울리는 사람으로 지리산고등학교에 보탬이 되고자 합니다. 그리고 소박하게 조국의 자연과 삶의 자리를 사랑하겠습니다.

“사람은 아는 만큼 느끼고, 느낀 만큼 보인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우리 문화유산을 사랑하는 유 홍준 문화재청장의 글로 제 소개를 마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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