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사라져야할 5가지 꼴통

[스크랩] 헤프닝으로 끝나는 백두산 위치조작설과 3일천하로 끝난 대륙조선설

작성일 작성자 꽃파는총각

요즘 언론들의 스트레스가 심할 것입니다.
예전에는 대충 써도 넘어갔겠지만 요즘은 끝까지 추적하는 네티즌들과 언론 피해자들때문에 왜곡된 사실이 밝혀져 망신을 당하게 되니까요.
며칠전만해도 조선일보에서 큰 사고 두개를 쳤지요.
하나는 전 청와대 행정관 딸의 체고 편입학 기사였죠. 조선일보가 부정한 방법으로 체고 입학했을 것이라고 기사를 작성했지만 기사 작성 이전에 이미 전국대회에서 여고부 신기록으로 우승했었고, 기사나온후 며칠뒤에도 전국대회에서 최고실력으로 우승하며 사격연맹에서 북경올림픽 메달을 기대하고 있다네요.
또하나 기사는 노란점퍼 사건입니다. 여당에서 노란점퍼 1만5천장을 주문해놓고 1년반동안 안찾아가서 회사가 망하고 봉사활동도 할 수 없다는 기사였습니다. 결국 사실무근임이 밝혀졌고 조선일보에서는 사과기사까지 작성할 수 밖에 없었지요.

백두산 위치조작이라는 기사가 며칠전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상한 기사여서 웹 검색을 하다보니 역시 멍청한 누군가의 실수와 또다른 누군가의 왜곡으로 만들어진 헤프닝임이 밝혀졌네요.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 대한지적공사의 공식 보고서가 아니다.
   - 김정호선생의 "대동여지도 서문"이라고 말한 것은 무지한 것이다.
   - 김정호선생의 대동여지도는 대륙조선설을 부정한다.
   - 이 논문의 가장 중요한 논거인 "대동여지전도(제작년대와 제작자가 미상)"에서도 대륙조선설을 부정한다.
   - 이 논문에서 제시한 백두산의 지형수치는 왜곡되어있고, 실제 자료에 의하면 핑딩산보다는 백두산이 대동여지전도의 문장에서 말하는 백두산에 가깝다.
   -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의하면 지금의 백두산이 조선시대 백두산 맞다.


 

 헤프닝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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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는 현재의 백두산은 평안도 묘향산으로 추정되며 실제 백두산은 중국 하얼빈 동북쪽 만주평야에 있는 핑딩산 일대라고 주장했다. 이 근거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서문과 만주원류고 지리지, 성종실록 등의 백두산 관련 기록을 들었다. 대동여지도 서문에서 백두산은 ‘큰 거친들 가운데 산이 있고 정상에 위치한 큰 못의 둘레가 80리, 높이는 200리, 가로길이가 1000리로 앞쪽이 무너졌다’고 기록돼 있다. 또 청나라 한림원에서 발간한 만주원류고 지리지 장백산편에는 ‘거친 들판 가운데 있는 산’이라는 설명이 있고 성종실록에는 ‘우리나라는 요수의 동쪽 장백산의 남쪽에 있어서…지역의 넒이가 만리나 된다’고 서술됐다.

 

 1. 대한지적공사 홈페이지 

처음에는 대한지적공사의 공식 보고서로 알려졌습니다만 아니랍니다.

아직 공론화가 안된 논문이랍니다. 이 논문의 검증은 지금부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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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대동여지도 서문 아닙니다.

저도 <대동여지도>와 <대동여지전도>를 구분못했습니다. 대부분 일반인들은 두 지도의 차이를 잘 모릅니다. 하지만 이 지도의 서문을 연구한다는 분이라면 달라야겠죠. 1분만 인터넷 검색해도 나옵니다.

알려진바와같이 대동여지도는 김정호선생님이 1861년에 제작한 대단히 정밀한 지도책입니다. 22개의 지도를 이으면 거대한 지도가 됩니다.

연구자가 주시한 <대동여지전도>는 제작시기와 제작자가 밝혀지지 않은 지도입니다. 일부에서는 대동여지도와 제목이 비슷하고 대략적 지도 모양이 유사하여 김정호선생님이 1860년대 초에 만들었다고 주장하나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오히려 일부에서는 지도 제작방법이 다르며 특히 대마도부분을 주목하여  김정호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한 지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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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쪽이 <대동여지전도> 이며 아랫쪽이 김정호선생님의 <대동여지도> 입니다.

<대동여지전도>는 대마도가 포함되어 있으며 한장짜리 목판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대동여지도>는 22권의 책자를 펼쳐서 이어붙이면 폭 3미터 길이 7미터의 거대한 지도가 됩니다.

두 지도의 공통점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한반도전도와 거의 동일한 형태이며

우리가 알고있는 위치에 백두산을 분명하게 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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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대동여지도 서문은 대륙조선설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대동여지도>의 서문격인 지도유설입니다. 마지막 부분을 유심히 보십시오. 이 부분은 대동여지전도의 서문에서도 비슷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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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입니다.>               대동여지도 지도유설(大東輿地圖 地圖類說)  <원본위치>
                                           황의열(黃義洌 : 성균관대학교·강사) 옮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風后(풍후)㉠가 地圖(지도)를 받아서 九州(구주)㉡를 비로소 布陳(포진)하였으니 이것이 地圖의 始初(시초)요, 山(산)과 바다에 대한 책이 있어 13篇(편)이 되니㉢ 이것이 地理書(지리서)의 始初이다. 周禮(주례)㉣에 大司徒(대사도)㉤이하 職方(직방)㉥과 司書(사서)㉦와 司險(사험)㉧의 관리들이 모두 地圖를 가지고 險하고 막힌 것을 두루 알고 각 地方(지방)의 이름난 물건들을 分辨(분변)하여 바로 한다고 하였으며, 전국시대의 蘇秦(소진)㉨·甘茂(감무)㉩의 무리들은 모두 지도에 依據(의거)하여서 天下(천하)의 험하고 평탄한 것을 말하였다.

簫何(소하)㉪가 關門(관문)㉫에 들어가서 먼저 地圖와 書籍(서적)을 거두었으며, 鄧禹(등우)㉬와 馬援(마원)㉭은 또한 이로써 光武帝(광무제)㉮를 섬기고 功名(공명)을 이루었다. 儒學者(유학자)로는 鄭玄(정현)㉯·孔安國(공안국)㉰에서부터 그 아래로 모두 지도와 서적을 얻어 보아서 周나라와 漢(한)나라의 山川을 징험하였으니, 대개 지도로써 그 形象(형상)을 살피고 지리서로써 그 數(수)를 밝히었으며, 왼편에 지도를 두고 오른편에 서적을 두었으니 참다운 학자의 일이다."고 하였다.

晉(진)나라 裵秀(배수)㉱의 지도 만드는 理論(이론)《制地圖論(제지도론)》을 간추리면 대략 이러하다. "圖書를 만드는 것은 그 由來(유래)가 오래 되었다. 옛날에 하늘이 形象을 드러내고 制度(제도)를 세운 때부터 그 活用(활용)을 힘입었고 三代(삼대)㉲에는 그 官職(관직)을 두어 史(사)㉳가 그 직책을 관장하였다." 또 "지도를 만드는 바탕이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分率(분율)이니 그것으로 廣輪(광륜)(原注(원주) ; 周禮에 이르기를 東西(동서)를 廣이라 하고 南北(남북)을 輪이라 한다)의 척도를 밝히는 것이다. 둘째는 準望(준망)이니 그것으로 여기와 저기의 體制(체제)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셋째는 道里(도리)이니 그것으로 다니는 곳의 里數(이수)를 定(정)하는 것이다. 넷째는 高下(고하)이고 다섯째는 方邪(방사)요 여섯째는 迂直(우직)이다. 이 여섯 가지로 각각 地形(지형)을 因(인)하여 形態(형태)를 만드는 것은 그것으로 평탄함과 험저함을 헤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도 모양만 있고 分率이 없으면 멀고 가까운 차이를 살필 도리가 없고, 分率은 있으되 準望이 없으면 한 모퉁이에서는 잘 되더라도 다른 곳에서는 반드시 실패하게 된다.

또 비록 準望이 있어도 道里가 없으면 산과 바다로 끊어지고 막힌 지역에 있어서는 능히 서로 통할 수가 없고, 道里가 있으나 高下·方邪·迂直과 대조함이 없으면 길의 里數가 반드시 遠近(원근)의 실제와 서로 어긋나게 되고, 準望의 바른 것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 여섯 가지를 참작하여 考察(고찰)한 연후에 원근의 실제가 分率에 의해 정해지고 彼此(피차)의 실제가 道里에 의해서 정해지고 度數(도수)의 실제가 高下·方邪·迂直의 計算(계산)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아무리 높은 산과 큰 바다로 막혀 있고, 단절된 지역이나 다른 지방이 멀리 있으며 오르고 내리고 어긋나고 굽은 것이 제각기 생겼다 하더라도 모두 가히 들어서 바로 할 수 있는 것은 準望의 法(법)이 이미 정해져 있고 曲直·遠近과 더불어 그 형태를 숨긴 것이 없기 때문이다."

宋(송)나라 呂祖謙(여조겸)㉵이 쓴 〈漢輿地圖(한여지도)〉의 序文(서문)에 이르기를 "輿地의 地圖가 있은 것은 옛날부터이다. 成周(성주) 때부터 大司徒가 天下 土地의 지도를 관장하여 그로써 廣輪의 數를 두루 알았고, 職方氏의 지도는 후에 더욱 상세하여졌다. 漢나라가 秦나라를 멸망시키기에 이르러서 簫何가 먼저 그 圖書를 거두어서 비로소 天下의 험하고 막힌 것과 戶口(호구)의 많고 적음의 차이를 모두 알았으니 그런즉 오래된 것이다."고 하였다.

《方輿紀要(방여기요)》㉶에 이르기를 "方位(방위)를 바로 하고 里道(이도)를 밝히는 것의 두 가지는 方輿의 要體(요체)인데 더러는 그것을 소홀히 한다. 일찍이 이르되 '東쪽'이라고 하면 東南쪽이나 東北쪽이나 모두 東쪽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자세하게 구한다면 方位는 똑같으나 里道가 들쑥날쑥한 것이고 里數가 같아도 山川이 구불구불할 것이다. 그러면 지도에 그려놓은 것이 의지할 만한 것이지만 꼭 의지할 수 없고, 적어놓은 것이 믿을만한 것이지만 꼭 믿을 수가 없다. 오직 그 지형을 환히 아는 사람만이 비로소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方位와 里道를 모두 버린다면 담벼락에 얼굴을 대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 하였다.

이름난 산과 갈려 나온 산은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나란히 솟은 것도 있고 연이어 솟아 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와 갈려 나온 흐름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方輿紀要》에 이르기를 " 孫子(손자)㉷가 이렇게 말했다. "산고 숲의 험하고 막힌 것과 늪과 못의 형세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行軍(행군)을 할 수가 없으며, 鄕導(향도)㉸를 쓰지 아니하는 사람은 地勢(지세)의 이로움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내 글을 얻지 못하면 또한 가히 향도를 쓸 수가 없으니 향도를 가히 믿을 수 있겠는가. 어째서인가, 향도는 임시로 쓰는 것이고 地勢의 이로움은 평소에 알아두는 것이다. 평소에 일찍이 九州의 形勢와 사방의 험하고 평탄한 것에 대해서 하나하나 그 큰 벼리를 판별하고 그 곁가지를 알아두지 아니하고서 임시의 향도에게서 믿음을 취하고자 하면 어떻게 적이 어리석게 여기는 바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要塞(요새)가 되는 곳을 分辨하고, 느리고 급한 기미를 살피면, 기습공격하는 것과 정면 공격하는 것이 가슴 속에서 결정되고, 죽고 사는 것이 손바닥 위에서 변하게 되니, 地勢의 이로움이 있는 곳을 因하여 臨機應變(임기응변)하는 것이다. 또한 行軍의 一端(일단)만이 아니라 天子(천자)가 안으로 萬國(만국)을 慰撫(위무)하고 밖으로 사방의 오랑캐에 臨하는 데 있어서 가지와 줄기, 강한 것과 약한 것의 구분과, 가장자리와 중심자리, 중요한 것과 가벼운 것의 형세를 몰라서는 아니 된다.

宰相(재상)이 天子를 도와서 나라를 다스리는데 무릇 변방 요새의 유리하고 불리한 곳과, 전쟁에 대한 마땅함들을 모두 몰라서는 안되는 것이다. 모든 官員(관원)과 여러 府署(부서)에서 天子를 위하여 백성과 사물을 모두어 다스리는데 있어서는 財物(재물)과 稅金(세금)이 나오는 곳과 전쟁과 나랏일의 바탕을 모두 알아야 한다. 監司(감사)와 守令(수령)들은 天子가 백성과 社稷(사직)을 맡긴 것을 받았으면 그 지역에 뒤섞여 있는 것과 산과 못의 우거지고 숨겨진 것, 그리고 농사짓고 누에치고, 샘물을 쓰는데 유리한 것과 백성들의 實情(실정), 風俗(풍속)이 다스려지는 것을 모두 알아야 한다.

四民(사민)㉹이 여행하고 왕래하는데 무릇 水路(수로)나 陸路(육로)의 險하고 평탄하고에 따라 나아가고 피하는 내용들을 모두 몰라서는 아니 된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이를 말미암아서 쳐들어오는 적을 막는 일을 돕고 强暴(강폭)한 무리들을 제거하며, 시절이 평화로우면 이로써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다스리니 모두 내 글을 따라서 취하는 것이 있을 따름이다." 고 하였다.

《文獻備考(문헌비고)》에 이렇게 일러 있다. " 세 바다의 沿邊(연변)과 두 江(강)의 沿邊이 모두 10,930里이다. 세 바다의 연변이 무릇 128邑(읍)에 총 8,043里이다. 두 강의 연변이 총 2,887리이다. (原注 : 변방의 고을 사이의 거리로 계산한 것이다)
동북쪽으로는 慶興(
경흥-지금의 나진,선봉,은덕지역을 말함, 예전에 여진말로 불붙는 돌을 뜻하는 아오지라고도 불렀슴)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機張(기장-부산시 동북쪽)에 이르기까지 3,615里이다.
동쪽으로는 機張에서부터 서쪽으로 海南(해남)에 이르기까지 1,080里이다. (原注 : 巨濟(거제)와 南海는 넣지 아니한 것이다)
남쪽으로는 海南에서부터 북쪽으로 通津(통진-
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월곶)에 이르기까지 1,660里이다. (原注 : 濟州(제주), 珍島(진도), 江華(강화)는 넣지 아니한 것이다)
서북쪽으로는 義州(의주)에서부터 남쪽으로 通津에 이르기까지 1,686里이다. (原注 : 喬桐(교동-
강화도)은 넣지 아니한 것이다)
鴨綠江(압록강) 연변은 2,034里이다.
豆滿江(두만강) 연변은 844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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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 黃帝(황제) 때의 宰相(재상). 《漢書(한서)》藝文志(예문지)에 《風后》十三篇이 있다고 전한다.
㉡ 夏(하)나라 때 禹(우)임금이 全國(전국)을 아홉 개의 州(주)로 나누었다는 행정 구획. 轉(전)하여 中國全土(중국전토)를 이르기도 함.
㉢ 본시 《山海經(산해경)》이라는 책은 禹임금, 또는 伯益(백익)이 지었다고 하는 18篇의 地理書로서 이것이 지리서의 시초인데 여기서는 13篇이라 하였으니 착오인 듯 하다.
㉣ 周나라 대 周公(주공)이 지었다고 하는 官制(관제)에 관한 책.
㉤ 官名(관명). 周나라 때 교육을 담당하는 직책으로 三公의 하나.
㉥ 官名. 天下九州의 地圖를 관장하고 四方의 貢物(공물)을 관리하는 직책.
㉦ 官名. 會計(회계)의 장부를 관장하는 직책.
㉧ 官名. 나라의 險要(험요)를 지키는 일을 관장하는 직책.
㉨ 戰國時代(전국시대)의 정치가. 洛陽(낙양)사람. 六國을 돌아다니며 合從策(합종책)을 主唱(주창)하고 六國의 大臣(대신)을 겸하였다.
㉩ 전국시대 秦(진)나라 下蔡(하채)의 사람. 武王(무왕)을 섬겨서 左相(좌상)을 지냈다.
㉪ 漢나라 沛(패)의 사람. 高祖(고조)의 功臣(공신). 高祖를 도와서 천하를 통일하였다.
㉫ 여기서는 涵谷關(함곡관)을 말함.
㉬ 後漢(후한) 新野(신야)의 사람. 光武帝(광무제)와 親交(친교)가 있었으며 天下를 평정한 공이 컸다.
㉭ 後漢 茂陵(무릉)의 사람.
㉮ 後漢의 제 1代王 劉秀(유수).
㉯ 後漢 高密(고밀)의 사람. 馬融(마융)에게 師事(사사)하였으며 백 여만 言(언)의 저술을 남긴 經學家(경학가).
㉰ 後漢 山東(산동) 사람. 孔子의 11代 後孫(후손). 經學家.
㉱ 晉나라 사람. 《禹貢地域圖(우공지역도)》 18篇을 지음.
㉲ 夏(하), 殷(은), 周(주)의 시대.
㉳ 官名. 記錄(기록)을 담당함.
㉴ (홈지기 덧붙임 : 아래 나오는 지도 제작의 여섯 가지 원칙을 쉽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분율(分率) - 지도의 축척(縮尺)
     2. 준망(準望) - 가로, 세로의 눈금. 이를 방격(方格), 방안(方眼) 혹은 획정(劃井)이라고도 한다.
     3. 도리(道里) - 거리 측정. 걸어서 갈 수 없는 산간, 호수, 바다와 같은 지역은 삼각형의 제 3변의 길이를 정하는 방법으로 계산
     4. 고하(高下) - 땅의 고저 측정
     5. 방사(方邪) - 직각과 예각 측정
     6. 우직(迂直) - 곡선과 직선 측정
㉵ 宋나라 사람. 《東萊左氏博議(동래좌씨박의)》등을 쓴 文章家(문장가).
㉶ 書名(서명). 《讀史方輿紀要(독사방여기요)》의 略稱(약칭). 淸(청) 顧祖禹(고조우)가 지은 지리서로 130卷(권)에 달한다.
㉷ 春秋時代(춘추시대) 齊(제)나라 사람. 이름은 武(무). 《兵法(병법)》 13篇을 지었다.
㉸ 鄕導 길을 안내하는 사람.
㉹ 士(사), 農(농), 工(공), 商(상) 네 가지 부류의 백성

 

 4. 대동여지전도의 서문도 대륙조선설을 부정하고있습니다.

다음은 제작시대와 제작자를 알수 없는 대동여지전도의 서문입니다. 문제가 된 논문의 가장 중요한 근거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몇몇분의 해석본을 제 나름대로 수정해봤습니다. 대동여지전도의 서문을 봐도 대륙조선설은 부정됩니다.


동사(동사보감東史寶鑑)에 말하기를, “조선(朝鮮)'은 조선(嘲仙)이라 읽는다. 물이 좋아(仙水)서 이름 지은 것이라고도 하고 밝다,선명하다는 뜻이라고도 한다. 땅이 동쪽 끝에 있어 해가 먼저 밝기 때문에 조선이라고 했다”.

"산경(산해경山海經)"에서 말하기를, 곤륜산(昆崙山)의 한 가지가 큰 사막(大漠)의 남동쪽을 지나면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되는데, 여기서 크게 끓어져 요동의 벌판이 되었고, 벌판을 지나 솟아 오른 것이 백두산인데, 조선 산줄기의 으뜸산이 된다.

이 산은 세 층이 있고, 높이가 200리이고 너비가 1000리나 된다.
산 꼭대기에 호수가 있는데 이름이 달문(達門)이라고 하며, 둘레가 80리나 된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물이흘러 압록강이 되고, 동쪽으로 나뉘어진 것이 두만강(頭滿山)이다.
분수령으로부터 남북으로 뻗은 것이 연지봉燕脂峰과 소백산小白山, 눈내리고 추운 고개(雪寒等嶺) 철령(鐵嶺)의 한 줄기가 동남쪽으로 뻗어 솟아난 것이 도봉산道峰山과 삼각산三角山인데 일명 화산이고 한강이 그 중심을 통과하고 있다.

대체로 우리나라 땅은 삼면이 모두 바다에 접해있고, 한 모퉁이만 육지에 연결되어 있는데, 그 주위가 10,920리이다.
삼면의 해안선은 128고을이 있는데, 모두 8,043리가 된다.
두 강의 총 길이는 2,887리인데, 압록강은 2,043리이며, 두만강은 844리이다.
길이와 폭이 북으로는 경흥慶興에서 남으로는 기장機張까지가 3615리이고, 동으로는 機張에서 서쪽으로 해남海南까지가 1080리이고, 남으로 해남海南에서부터 북으로 통진通津에 이르기까지 1662리이다.
서북의 의주義州에서 남쪽으로 통진通津에 이르기까지는 1천686리 이다 (*)

서울漢陽은 그 중심에 위치하여 모여드는 산과 강의 얽히고 설킴이 별자리의 기미와 석목(동북방향의 별자리)에 비유되는 곳이다.
북쪽을 띠고 있는 것이 화산華山이요, 남쪽을 두르고 있는 것이 한강이요, 왼쪽을 당기고 있는 것은 관령關嶺이고, 오른편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발해이다.

백성은 태평스럽고 어질며 그 습속은 기자와 단군의 가르침이 담겨있다. 뿐만아니라 사방에서 왕래하는 길이 있어, 좌향을 남쪽 방향에 맞추니 실로 주나라의 낙양洛陽과 같다.
서관西關과 동관東關의 두 수도(다른 판본에서는 3수도)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서울은 하늘이 내려준 간고한 도성으로 억만세토록 끝없이 아름다운 곳이다.
오! 위대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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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한반도 지형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5. 큰 못의 둘레가 80리, 높이는 200리, 가로길이가 1000리

다음은 기사에 포함된 자료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위쪽은 언론에 보도된 도표 

아래쪽은 제가 자료를 찾아서 비교한 도표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최근 남북한의 과학기술자들이 함께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백두산 천지의 둘레는 14.4Km라고 합니다. 약 36리입니다. 대동여지전도의 80리에는 절반도 안되지만 20리보다는 훨씬 큽니다. 대한지적공사에 다니시는 분들이 이런 기초적인 자료도 연구를 안하고 그러십니까?

그리고 구글어스에서 핑딩산의 못을 찾아봤습니다. 동서 너비가 약 15Km나 됩니다. 둘레는 대충만 봐도 40Km이상은 되어보입니다. 100리가 넘는다는 이야기지요.

가로길이는 백두산이 500리입니다. 핑딩산도 백두산 나비를 측정한 것처럼 나비를 측정하면 1000리가 안됩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항공사진이나 위성사진으로 둘레를 구하는 것도 아니라면 사람이 걸어서 측정하는 둘레의 길이는 지도상의 측정치보다 훨씬 커질 수 밖에 없습니다. 지도를 가지고 등산을 해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지도상에서 얼마 안되는 거리지만 실제 걸을때의 체감 거리는 두배는 됩니다.

대마도까지 포함시킨 지도에 천지의 크기를 일부러 축소시켜서 적어두었을까요?

 

 6.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신시본기의 기록

'태백일사'를 편집한 이는 이맥李陌(1455~1528)입니다.

 

<<삼한비기>>에서 말한다.(*1)
'대저 백두의 큰 산은 대황의 가운데 자리잡았으니 세로는 1,000리에 걸치고 높이 200리를 넘는다.(*1)
웅장하고 험준하니 울퉁불퉁 거창하여 배달천국의 진산이라 한다. 신인이 오르내림은 실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어찌 구구하게 묘향산이 다만 낭림의 서쪽을 달리는 산맥을 잇는 것으로써(*2) 능히 그와같은 성스러운 일에 관계된다고 할 수 있으리요.

세상의 속담에는 이미 묘향산을 가지고 태백산이라고들 한다.(*3) 즉 이를 보니 동쪼에 치우쳐 압록강 이남의 한 구석을 차지한 땅일 뿐이라.

산의 조종을 곤륜산이라 떠들어 대며 기분 좋아하며, 소중화를 가지고 스스로 달래며 만족한다. 조공 올리는 사신이 북쪽을 들락거린 역사가 백년이다. 이를 치욕으로 알지 못하다니 이야말로 글을 폐하고 장탄식하는 이유어늘. 그런데 동방의 뭇산을 태백의 이름으로써 불리는 바가 사뭇 많다. 세속에는 영변에 있는 묘향산으로 그것을 가리킨다 하니 이것은 일연의 <<삼국유사>>의 설에 비롯하였음이라(*3) 이를 것이다. 그렇다면 저들의 눈구멍은 콩알이라 할 것이요, 큰 콩알과 같다 할지언저. 이제 백두산 꼭대기에는 큰 연못이 있거늘 둘레가 80리이며 압록 송화 두만의 물줄기는 모두 여기에서 근원이 시작된다.(*4)

가로대 천지란 한웅씨가 구름타고 하늘로부터 내리신 곳이니 묘향산은 일찌기 한웅큼의 물구덩이조차 없었던즉(*5) 한웅천왕이 내려오신 땅을 태백산이 아니라고 함은 논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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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제작자와 제작년대를 알 수 없는 <대동여지전도>서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2006년 초부터 주장되기 시작한 백두산 조작설의 중요한 소재도 바로 이 태백일사 신시본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2) 백두대간에서 중요한 산 하나가 낭림산(2,186m)입니다. 한반도를 남북으로 길게 바로세워주는 백두대간의 낭림산에서 청북정맥과 청남정맥이 시작됩니다. 낭림산의 서쪽으로 내려와서 있는 산이 묘향산(1,909m)입니다. 예전에는 묘향산맥이라 불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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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삼국유사에 주석으로 태백산이 지금의 묘향산이라는 주석이 달려있습니다.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今妙香山.]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환웅은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곧 태백산은 지금의 묘향산]에 있는 신단수 밑에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라 하고, 이 분을 환웅천왕이라고 이른다."

 

*4 ) 송화강, 압록강, 두만강의 물주기가 모두 백두산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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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구글어스에서 찾은 묘향산은 정말로 물구덩이 하나 구경할 수 없었습니다. 아래 위성사진에서 1cM가 대략 1Km쯤으로 보시면 될 것입니다. 확대해서 봤는데도 못은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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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봤을때 옛 기록에 나오는 백두산은 지금의 백두산이 맞습니다. 여러가지 증거로 봤을때 백두산을 묘향산으로 볼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일부에서 오해한 것은 한때 삼국유사에 의해 태백산으로 불려졌던 지금의 묘향산에 대한 것입니다.

출처 : 송하비결 | 글쓴이 : 꽃파는총각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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