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에세이: 앤디 베켓-가속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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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에세이: 앤디 베켓-가속주의

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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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속주의: 비주류 철학은 우리가 사는 미래를 어떻게 예측했는가

Accelerationism: how a fringe philosophy predicted the future we live in


―― 앤디 베켓(Andy Beckett)


반 세기 전 위대한 히피의 해인 1967년에 호평을 받은 젊은 아메리카 과학소설 작가 로저 젤라즈니(Roger Zalazny)는 세 번째 소설을 출판했다. 많은 면에서 <<신들의 사회(Lord of Light)>>는 그 시대에 관한 것인데, 수입된 힌두 신화와 우주적 대화가 무성했다. 그런데 미래를 내다보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기미도 있었다. 한 줄거리는 기술에 대한 태도를 갑자기 변환함으로써 자신들의 사회를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를 바라는 일단의 혁명가들에 관한 것이었다. 젤라즈니는 그들을 가속주의자라고 불렀다.


현재 젤라즈니와 그 소설은 대체로 잊혀진 상태이다. 그러나 1971년에 더 오래 기억되는 과학소설 작가 JG 밸러드(Ballard)가 말했듯이, "오늘 현대 과학소설의 작가들이 발명하는 것을 내일 여러분과 나는 행할 것이다." 지난 오십 년 동안, 그리고 특히 지난 몇 년 동안, 세계의 대부분은 더 빨라졌다. 작업 패턴, 정치적 순환 주기, 일상 기술, 소통 습관과 기기, 도시의 발전, 소유물의 취득과 처분, 지금까지 이 모든 것이 가속되었다. 한편으로, 동일한 반 세기 동안 가속주의는 매체나 주류 강단에 의해 거의 전적으로 간과당한 채 허구적 장치에서 실제적인 지적 운동―현대 세계와 그것의 잠재력에 관해 사유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서서히 굳어졌다.


가속주의자는 기술, 특히 컴퓨터 기술과 자본주의, 특히 가장 공격적이고 전지구적인 변양태의 자본주의가 대규모로 가속되고 심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인류를 위해 나아가는 최선의 방식이거나, 아니면 대안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가속주의자는 자동화를 선호한다. 그들은 디지털적인 것과 인간의 진전된 융합을 선호한다. 흔히 그들은 기업의 탈규제와 과감하게 축소된 정부를 선호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경제적 진보와 기술적 진보가 통제될 수 있다는 망상을 품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다. 흔히 그들은 사회적 격변과 정치적 격변이 자체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가속주의자는 보수주의, 전통적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환경주의, 보호주의, 포퓰리즘, 민족주의, 지역주의 그리고 현대 세계에서 이미 나타난 엄청나게 파괴적인, 명백히 폭주하는 변화의 단계를 완화하거나 반전시키고자 한 여타의 이데올로기들에 대항한다. "가속주의는 정치적 이단이다"라고 로빈 맥케이(Robin Mackay)와 아르멘 에버네시안(Armen Avanessian)이 <<#가속하라: 가속주의자 독본(#Accelerate: The Accelerationist Reader)>>의 서론에서 적고 있는데, 이 책은 여전히 가속주의 운동에 대한 유일한 적절한 지침서로서 2014년에 출판되었으며 때로는 당황케 하고 때로는 신나게 하는 책이다.


다른 이단들과 마찬가지로 가속주의는 공표되었거나 그렇지 않은 여러 세대의 옹호자들이 있었는데, 그것의 관념들을 서로에게 전달했고, 몇몇 관념들은 다듬었고 몇몇 관념들은 포기했으며, 사적 언어로 서로 소통했고, 지배적인 인물들 주위에 뭉쳤고, 그 신념의 다음 돌파구를 만들기 위해 경쟁했고, 분파들로 분리되었으며, 소진되었다. 합중국, 캐나다, 영국,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프랑스 출신의 가속주의자들이 있거나 지금까지 있었다. 가속주의 운동은 서적, 에세이, 저널, 선언문, 블로그, 사회적 매체 전투―그리고 디스토피아적 소설을 현기증이 날 정도로 광범위한 정치 이론, 문화 이론 그리고 경제 이론과 결합시키는 거의 분류할 수 없는 불가해한 코뮤니케를 산출했다.


때때로 가속주의자들은 대학에서 교직을 보유했다. 그들은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논쟁하며 가속주의자로 전향시키기 위해 간헐적인 공개 모임을 개최했다. 이것들에 관한 몇 가지 기록된 단편들이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흔히 전자 음악과 추상적인 영상이 배경에서 펼쳐지며 어두컴컴한 강의실에서 때때로 당황하는 청중에게 미래에 관해 매혹적으로 이야기하는 열렬한 청년들의 희미한 장면이 나타난다.


지금까지 어느 시점에서도 세계에서는 겨우 수십 명의 가속주의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 명칭은 가속주의 운동에 대한 강한 비판가인 벤자민 노이스(Benjamin Noys)가 젤라즈니의 소설에서 차용한 2010년 이후에야 규칙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수십 년 동안 가속주의자들은 더 정통적인 현대 사상가들보다 더 오래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의 많은 중요한 문제에 집중했다. 중국의 발흥, 인공 지능의 발흥,  침투적인 중독성 전자 기기들의 시대에 인간적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 전지구적 시장의 명백히 통제 불가능한 흐름, 욕망의 연결망으로서의 자본주의의 힘, 상상적인 것과 사실적인 것 사이의 점점 흐릿해지는 경계, 항상 더 빨라지는 음악과 영화에 의해 우리 마음과 몸의 재구성, 그리고 현대 생활의 속도에 관해 매우 많은 사람이 느끼는 연루 감각, 반감 및 흥분.


"우리 모두는 전쟁, 자본주의 그리고 신흥 인공 지능이라는 가속되고 있는 삼각 체제에 의해 설정된 운영 체제 속에서 살아간다"고 스티브 굿맨(Steve Goodman)이 말했는데, 그는 하이퍼덥(Hyperdub)이라는 호평을 받은 레코드 레이블을 통해 자의식적으로 극적인 가속주의 관념들을 댄스 뮤직 속에 살짝 삽입한 영국의 가속주의자이다. 2015년에 출판된 <<속도 제한 없음(No Speed Limit)>>이라는 가속주의 운동에 관한 책에서 아메리카의 가속주의 관찰자인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는 이렇게 주장한다. "좋든 싫든 간에 이제 우리는 모두 가속주의자이다."


속도와 기술을 찬양하는 것은 나름의 위험이 있다. 일 세기 전에 이탈리아 미래주의 운동의 작가와 예술가 들은 산업 시대의 기계들 및 사회를 활성화할 수 있는 그것들의 명백한 능력과 사랑에 빠졌다. 많은 미래주의자가 이런 매혹을 따라 주전론과 파시즘에 이끌렸다. 몇몇 미래주의 작품은 여전히 찬양받지만, 그 운동의 명성은 결코 회복된 적이 없다.


가속주의의 중요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은 영국인 철학자 닉 랜드(Nick Land)인데, 그는 1990년대에 워릭(Warwick)대학교에서 가르친 다음에 갑자기 강단을 떠났다. 1992년에 랜드는 "철학자는 생체 해부자이다"라고 적었다. "철학자는 생명체로 실험하는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정밀한 파충류의 뇌를 갖고 있다." 랜드의 학생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Iain Hamilton Grant)는 이렇게 기억한다. "우리 모두는 자유주의자를 괴롭히는 경향이 언제나 있었으며, 그 점에 있어서 닉이 최고였다."


워릭 이래로 랜드는 이른바 서구 민주주의의 노후화에 관한 글을 인터넷에 왕성하게 적었는데, 항상 본명으로 발표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그는 "인간의 생물 다양성"과 "자본주의적 인간 분류"―현대 세계에서 상이한 인종은 "자연적으로" 상이하게 살아가게 된다는 현재 극우파에서 인기 있는 사이비 과학적 관념에 관해 수긍하는 글과 인공 지능이 충분히 개선될 때 불가피한 일로 여겨지는 "인간 종의 해체"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현재 다른 가속주의자들은 스스로를 랜드로부터 거리를 둔다. 영국의 웨스트잉글랜드 대학(University of the West of England)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그랜트는 랜드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의 글을 읽지 않으려고 한다. [가속주의 운동의] 사람들은 당혹스럽다. 그들은 그가 악당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속주의자이고 성찰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생각한다. '얼마나 멀리 나아가는 것이 너무나 멀리 나아가는 것인가?' 그러나 또 다시, 그런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가속주의에 대립하는 것이다." 가속주의는 제약에 관련된 것이 아니다.


가속주의 비판가 벤자민 노이스도 그 운동이 매력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가속하라라는 낱말은 매력적인 낱말이다"라고 그는 말하는데, 이것은 철학에서 흔한 일이 아니다. 결연히 통념을 거스르는 예술가 제이크(Jake)와 디노스 채프먼(Dinos Chapman)은 가속주의 운동의 동료이자 랜드의 오랜 공동작업자이다. 그들의 광적인 그로테스크한 회화들 가운데 하나가 2011년에 출판된 <<독니가 있는 본체(Fanged Noumena)>>라는 랜드의 글 모음집의 표지로 사용되는데, 이 책에는 가속주의의 가장 어둡게 매혹적인 몇몇 구절이 실려 있다. 현재 재판되고 있는 페이퍼백의 중고본이 2017년 초에 아마존에서 180파운드의 가격으로 판매되었다.


정치적으로 열병에 걸린 우리 시대에는 이전과는 달리 가속주의의 성급하고 과격하며 아마도 혁명적인 관념들이 적실한 듯 느껴지거나, 아니면 최소한 매력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노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가속주의자는 언제난 해결책을 갖고 있는 듯 보인다. 자본주의가 빨리 진행되고 있다면, 그것은 더 빨리 진행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자본주의가 도로의 장애물에 부딪쳐서 감속된다면"―2008년 금융 위기 이래로 그랬듯이―"그것은 촉진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파괴적인 합중국 선거 운동과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의 병적인 대통령직 수행, 그리고 그의 초자본주의적인 반정부적 정책들은 점점 그 수가 늘어나는 관찰자들―몇몇은 두려워하고, 몇몇은 기뻐한다―에 의해 가속주의적 정치에 관한 최초의 주류적 표현으로 간주되었다. 최근에 노이스는 가속주의적 관념들이 영국 좌파의 친기술 진영에서 아메리카의 부유한 자유방임주의 극우파 진영에 이르기까지 도처에서 "공명"하고 "유포"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랜드는 특히 대안 우파 블로그에서 소환되는 인물이 되었다. 논평가들은 랜드의 몇몇 관념들과 자유방임주의적인 실리콘 밸리 억만장자 피터 틸(Peter Thiel) 및 트럼프의 성상파괴적인 전략가 스티브 배넌(Steve Bannon)의 생각 사이의 연계점을 신명나게 지적했다.


아메리카 디지털 산업에 관한 선도적인 역사가인 프레드 터너(Fred Turner)는 이렇게 말한다. "실리콘 밸리에서 가속주의는, 기술을 올바르게 이해하기만 한다면 [통상적인] 정치가 더 이상 필요 없으며 '좌'와 '우'를 제거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운동 전체의 일부이다. 또한 가속주의는 전자 기기들이 시판되는 방식―그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물질적 세계, 모든 지저분한 물리적인 것들을 훌쩍 떠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약속에 안성맞춤이다."


터너에게 가속주의의 호소력은 현대적인 것만큼이나 고대적인 것이다. "그들은 천년왕국적인 어휘로 말하고 있"는데, 모호한 보편적인 변화가 곧 나타날 것이라고 약속한다. 노이스는 가속주의자들이 "미래를 단언하"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몇 가지 점에서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최초의 가속주의자였다. 1848년에 출판된 <<공산당 선>>에서 그는 "생산의 끊임없는 변혁"과 "모든 사회적 상황의 부단한 동요"를 겪는 자본주의에 경악하는 만큼이나 외경심을 나타내었다. 마르크스는 항상 더 미쳐 날뛰는 자본주의를 보통 시민이 "자신의 생활의 지위[를] ... 냉철하게 응시해야 하"고 혁명을 시작해야 하는 순간의 필수적인 전조로 간주했다.


그런데 가속주의적 관념들이 최초로 지속적인 방식으로 전개된 것은 1960대 말의 프랑스에서였다. 1968년의 좌익 반란의 실패와 서양에서 명백히 계속되는 전후 경제적 호황에 동요한 일부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대응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1972년에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정신분석가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는 <<안티 오이디푸스>>를 출판했다. 그것은, 좌파는 단순히 자본주의에 대립하기보다는 인민을 억압할 뿐 아니라 해방시킬 수 있는 그것의 능력을 인정해야 하며, 그리고 이런 무정부적인 경향을 강화하고, "시장의 운동 속에서 ... 더욱더 멀리 가며 ... '과정을 가속'"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제안한 불안한, 얼기설기 뻗어나가는, 매력적으로 모호한 책이었다.


이 년 후에 또 하나의 환멸을 느낀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인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cois Lyotard)는 그 주장을 훨씬 더 도발적으로 확장했다. 1974년에 출판된 <<리비도 경제>>에서 리오타르는, 자본주의의 억압적인 양상조차도 그 체계가 재조정하고 가속하는 생을 사는 사람들에 의해 "향유"된다고 선언했다. 게다가 대안은 없다. "요컨대 자본의 체계는 자연적인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두 책이 모두 물의를 일으켰다. 리오타르는 결국 <<리비도 경제>>를 "사악한 책"으로 선언하고 자기 저작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다른 주제들로 옮겨갔다. 1980년―비교적 온건한 전후 자본주의가 더 거칠고 더 가혹한 판본의 대처-레이건 시대로 교체된 시기에 출판된 <<천 개의 고원>>이라는 그 다음의 책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너무나 과한 자본주의적 가속이 사회를 파시즘과 허무주의의 "블랙 홀"로 빨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안티 오이디푸스>>와 <<리비도 경제>>가 상이한 지위를 얻었다. 대다수의 전후 프랑스 철학과 마찬가지로 수십 년 동안 그 책들은 강단의 주류에 의해 무시당했고, 그래서 각각 1983년과 1993년이 되어서야 영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소수의 영국 철학자들에게 그 두 권의 책은 하나의 계시였다. 먼저 1990년대 초에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가 워릭의 석사과정 학생으로서 <<리비도 경제>>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저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본주의를 의미하면서 '이것에서 벗어날 길은 없'으며, 그리고 우리는 모두 거대한 체계에 끼워 넣어지는, 제조된 욕망의 매우 작은 조각이라고 말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저술한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한, 그 책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랜트는 "매료되었다."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대신에 그랜트는 최초의 영어 번역본을 산출하느라고 강박적인 여섯 달을 보냈다.


영국의 다른 대학들과 다르게도 워릭에서는 그런 탐험적인 철학 기획들이 허용되었다. 워릭은 현대 세계에 관여하여 실험을 행할 대학으로서 1960년대에 건립되었다. 1990년대에는 경량 콘크리트 건물과 지구라트 들로 이루어진 약간 격리된 교외 캠퍼스가 미래주의적이라기보다는 낡은 듯 보였지만, 그것의 원래 기풍은 전위적인 프랑스 작가들을 연구하는 것이 표준이었던 철학과와 같은 몇몇 학과에서 살아 있었다. 이런 활동의 중심에 철학과의 새로운 젊은 강사였던 닉 랜드가 있었다.


랜드는 강한 시선, 부드럽지만 호소력이 있는 목소리 그리고 놀라운 지적인 확신의 분위기를 갖추고 있는 호리호리하고 허약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랜트는 말한다. "많은 사람이 영리하지만, 어떤 테제를 그토록 체계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목격한 적이 없습니다." 역시 랜드의 학생들에 속하게 되었던 로빈 맥케이는 이렇게 기억한다. "닉은 언제나 말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번거롭게 그것을 읽지 마라.' 그런데 그는 그것을 이미 읽었습니다!"


1990년대 초에 랜드는 들뢰즈와 가타리 그리고 리오타르를 포함한 자신의 독서를 최소한 그의 학생들에게는 예언적이고 오싹하게도 위험한 일단의 관념들과 하나의 문체로 증류시켰다. 1992년에 랜드는, 지금까지 자본주의는 제대로 해방된 적이 결코 없었던 대신에 언제나 정치, "인류의 마지막 위대한 감상적인 탐닉"에 의해 구속을 당했다고 적었다. 그는 유럽을 경화증에 걸린, 점점 더 주변화되는 지역, "아시아의 인종적 쓰레기통"으로 일축했다. 그리고 랜드는 도처에서 문명이 파국을 향해 가속되고 있다고 간주했다. "틀림없이 무질서가 증가한다... 어떤 [인간] 조직도 가차없는 죽음 흐름에서 ... 단지 ... 일탈일 뿐이다."


랜드는 기묘한 연극처럼 강의를 진행했는데, 말을 하면서 의자를 기어오르거나 등을 구부리고 앉아서 앞뒤로 흔들거렸다. 또한 그는 자신의 발언에 블랙 유머을 섞었다. 랜드는 수강생들에게 말하곤 했다. "나는 서양 문명의 붕괴 연구라는 분야에서 작업한다." 이전에 워릭대학교 철학과 학생이었던 사람들은 25년 후에도 여전히 경외심을 품고서 그에 관해 이야기한다. 로빈 맥케이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그가 지난 50년 동안 가장 중요한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칭 미래의 안내자로서 랜드는 몇 가지 점에서 꽤 구식이었다. 1990년대 말까지 그는 오래된 녹색 화면의 암스트라드(Amstrad) 컴퓨터를 사용했으며, 그가 워릭에서 저술한 최초의 글은 현대 사상가들이나 문화보다 18세기 및 19세기 철학자들을 훨씬 더 많이 거론했다. 가속주의의 워릭 판본은 1990년대 중반에 다른 급진주의자들이 철학과에 합류하고나서야 완전히 결정화되었다.


사디 플랜트(Sadie Plant)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버밍엄대학교 문화학―현대 대중 문화에 관한 연구 전직 강사였다. 이전에 버밍엄대학교 학생이었던 마크 피셔가 다른 한 유입자였다. 피셔는 안절부절하고 격정적이었던 반면에 플랜트는 온화하고 친해지기 쉬웠다. 1990년대 초에 일시적으로 플랜트와 랜드는 파트너였다.


랜드와 마찬가지로 플랜트와 피셔도 프랑스 가속주의자들을 읽었으며, 그들이 느끼기에 전통적인 좌파 및 자유주의적 관념들이 영국의 인문학과들과 그 너머 세계을 장악한 지배력에 점점 더 적대적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랜드와 달리 플랜트와 피셔는 기술애호자였는데, 플랜트는 초기 애플 컴퓨터가 있었고 피셔는 초기 이동전화 사용자였다. 1997년에 출판된 <<영과 일(Zeros and ones)>>이라는 계산의 발달에 관한 카페인이 들어간 책에서 플랜트는 이렇게 적는다. "컴퓨터는 ... 가속화, 지수함수적 경로, 증식화, 소형화, 연계화를 추구한다." 또한 플랜트와 피셔는 1990년대의 점점 더 역동적인 댄스 뮤직과 액션 영화의 헌신적인 팬이었는데, 그것들을 새로운 디지털 시대의 가능한 것들을 구체화하는 대중적인 예술 형식으로 간주했다.


인터넷이 최초로 일상 생활의 일부가 되고, 1989년 공산주의의 붕괴 후에 자본주의가 명백히 승리한 듯 보임에 따라 미래는 컴퓨터와 세계화에 의해 거의 전적으로 형성될 것이라는 믿음이 1990년대 동안 영국과 미국의 강단과 정치에 걸쳐 퍼지게 되었다. 워릭의 가속주의자들이 선봉에 있었다.


그런데 미래에 대한 두 가지 상이한 판본이 있었다. 합중국에서는 <와이어드(Wired)> 같은 무지개 색깔의 대담한 잡지들이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로 알려지게 되는 것―디지털 기술에 의해 도처에서 인간의 잠재력이 해방될 것이라는 낙관주의적인 주장―을 진흥했다. 영국에서는 이런 낙관주의가 신노동당에 영향을 미쳤다. 그렇지만 워릭에서는 더 어두운 예언들이 제시되었다. 플랜트는 "우리의 동기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대체로 매우 보수적인 듯 보이는 1990년대의 유쾌한 유토피아주의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고 말하는데, 플랜트의 견해에 따르면, 그것은 기기를 통한 구원을 바라는 구식의 남성적인 욕망이다. "우리는 반짝이는 새로운 질서가 아니라 더 개방된 복잡다단한 세계를 원했다."


워릭의 가속주의자들도 환경의 영향을 받았다. "1990년대의 영국은 갑갑하고 음울하며 황폐한 것처럼 느껴졌다"고 맥케이는 말한다. "우리는 자본주의와 기술을 노쇠한 육체를 지배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격렬한 힘으로 간주했다." 그 과정을 관찰하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재촉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1995년에 플랜트, 피셔, 랜드, 맥케이 그리고 스무여 명의 다른 워릭 학생과 학자 들이 급진적인 새로운 기관, 즉 CCRU(Cybernetic Culture Research Unit)를 창설했다. 그것은 최근 영국의 지성사에서 가장 신화화된 집단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었다.


CCRU는 5년이 안 되는 시기 동안 완전한 기능적 존재자로서 현존했다. 그 시기의 얼마 동안 CCRU는 워릭 철학과의 비좁은 회랑에 위치한 단독 사무실에 본부를 두었는데, 그것은 철학과의 비공식적인 부분이었다. 나중에 CCRU의 본부는 근처 레밍턴 스파라는 조지 왕조풍 도심의 임대 사무실이었는데, 바디샵의 지점 위에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정치적 및 문화적 웹사이트들, 음악 및 예술 잡지들 그리고 스타일 출판의 더 지적인 부분들에서 CCRU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언급이 분분했다. "우리의 행위를 재발제하는 20대 학생 집단들이 있다"고 로빈 맥케이는 말한다. 2007년 이래로 맥케이는 <어버노믹(Urbanomic)>이라는 평판이 좋은 철학 출판사를 운영했는데, 그것의 출판물 가운데 과거 CCRU 출판물의 한정판들과 새로운 CCRU 글 모음집들이 유명하다.


CCRU는 처음부터 이미지를 의식했다. 그것의 이름은 군사적인 것이나 로봇적인 것을 암시하는 의도적으로 최첨단적인 것이었는데, 특히 그것의 구성원들이 정관사 없이 "Ccru"로 쓰면서 그들 스스로를 집단적으로 가리키기 시작했을 때 그랬다. 1999년에 그것은 자체 역사를 트레이드 마크였던 간결한 탈육화된 문체로 호의적인 음악 기자 사이먼 레이놀즈(Simon Reynolds)에게 이렇게 요약했다. "Ccru는 ... 사디 플랜트를 스크린으로 그리고 워릭대학교를 일시적인 거주지로 사용하는 1995년 10월에 개시됩니다 ... Ccru는 대학원생들 + 오작동하는 학자(닉 랜드) + 독립 연구자들을 먹고 삽니다 ..."


CCRU의 이전 구성원들은 여전히 그것의 언어를 사용하며, 그것이 일종의 집단 정신이 되었다는 관념에 강력한 애착을 느낀다. 랜드는 이메일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Ccru는 하나의 존재자였습니다 ... 그것을 구성하는 하위 행위자들의 의제 또는 전기들로 환원 불가능한 존재자였습니다 ... 그 존재자에의 전적인 굴복이 핵심이었습니다 ..."


오늘날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는 윗주머니에 펜이 꽃힌 양복 조끼를 입는 상냥한 중년의 교수이다. 그런데 내가 그에게 CCRU를 서술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랜트는 갑자기 강력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화살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부조화는 거의 없었습니다. 여가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무도 감히 노력을 헛되게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에 뒤처지지 않고 있을 때 증가되는 집단적 요소는 속도입니다."


CCRU 패거리는 독서 집단들을 구성했고 학술회의와 저널 들을 마련했다. 그들은 철학과의 좁은 CCRU 사무실에 밀고 들어가서 서로에게 즉흥적인 세미나를 실행했다. 맥케이는, 군사 기술과 그것이 시민 생활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에 대해서 특별한 흥미를 가진 CCRU 구성원이었던 스티브 굿맨(Steve Goodman)을 기억한다. "칠판에 음과 양을 그린 다음에 헬리콥터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학점 취득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학점 취득이 CCRU 이전에 우리가 진심으로 염증이 났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대신에 그것은 공동의 준거를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랜트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 집단 속으로 무언가가 유입되곤 했습니다. <<뉴로맨서(Neuromancer)>>[인터넷과 인공 지능에 관한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의 1984년 소설]가 철학과에 유입되었으며, 그것은 바이러스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공동 사무실 전체에 걸쳐 낡은 페이퍼백 책들이 발견되었을 것입니다."


철학과의 랜드와 사드의 사물실도 CCRU 허브가 되었다. 그랜트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시간과 관련하여 관대했습니다. 그리고 랜드는 좋은 마약―스컹크[대마초]―이 있었습니다. 그곳의 사정이 형편없게 될 수 있더라도 한때 그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팟 누들의 탑이 쌓여 있고 방열기 위에서는 그가 교수 화장실에서 세탁했었던 속옷이 널려 있곤 했습니다."


워릭 캠퍼스는 늦게까지 개방되었다. 밤이 되어 철학과가 폐쇄되면 CCRU는 길 맞은 편의 학생자치회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랜드가 모든 술값을 치르곤 했다. 그 다음에는 서로의 집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집단 정신이 노동을 계속하곤 했다. 그랜트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앤디 워홀의 공장과 비슷했습니다. 언제나 작업과 생산."


1996년에 CCRU는 그것의 관심사를 "영화, 복잡성, 화폐, 댄스 뮤직, 전자 화폐, 암호화, 페미니즘, 소설, 영상, 무기적 생명, 정글, 시장, 매트릭스, 미생물학, 멀티미디어, 연결망, 숫자, 지각, 복제, 성, 시뮬레이션, 소리, 전자통신, 섬유, 텍스트, 무역, 비디오, 가상성, 전쟁"으로 나열한다. 오늘날 이것들 가운데 많은 것이 주류 매체 및 정치적 고착물이다. 그랜트는 이렇게 말한다. 이십 년 전에 "우리는 지구에서 우리가 이런 모든 문제를 진지하게 여기고 있는 유일한 사람들인 것처럼 느꼈습니다." CCRU의 목표는 그들이 심취하고 있는 것들을 현재와 미래 둘 다를 어쨌든 요약할 무한히 유연한 획기적인 지적 합금―애호하는 준거점으로서 1991년에 개봉된 <<터미네이터2>>라는 영화에 나오는 모양을 바꾸는 사이보그 같은―으로 혼합하는 것이었다.


CCRU의 광적인 난잡한 연구의 주요한 결과는 고안된 술어들로 가득찬, 때때로 허구가 될 정도로 사변적인, 불가해한 논문들의 컨베이어 벨트였다. "군집기계(Swarmachines)"라는 1996년에 작성된 전형적인 한 논문은 정글(Jungle)에 관한 한 절을 다룬 다음에 가장 격렬한 계보의 전자 댄스 뮤직을 다루었다. "정글은 입자 가속기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육체에 담겨 있는 세포적 드론을 제작하는 격심한 저음 진동수는 ... 통상적인 시간을 빠른 실리콘 순간들로 되감고 재장전한다 ... 그것은 그냥 음악이 아니다. 정글은 행성적 비인간되기의 추상적 도표이다."


워릭 가속주의자들은 스스로를 강단의 전통적인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로 간주했다. 그들은 정글 레코드를 구매했고, 클럽으로 가서 DJ들을 조직하여 절충주의적인 공개 학술회의에서 틀게 했는데, 그것들은 가속주의적 관념들을 대중화하고 유사한 정신의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 대학에서 개최되었다. 그랜트는 1994년, 1995년 그리고 1996년에 가상 미래들(Virtual Futures)이라는 이름 아래 개최된 이런 회합들을 기억하는데, 그것들은 "태양 아래 모든 종류의 괴짜, 과학소설 애호가, 자연과학자, 정치학자, 다른 대학의 철학자 들"뿐 아니라 문화적인 유행 평론가들도 끌어들였다. "[패션 잡지] <페이스(Face)>의 누군가가 최초의 회합에 참가했다."


CCRU 산문과 마찬가지로 비입문자들에게 그 학술회의들은 힘든 것일 수 있었다. 가상 미래들 96은 "반(反)분과학문적 행사"와 "탈인문학의 학술회의"로 광고했다. 한 세션에서는 맥케이가 배경에서 정글 레코드를 트는 한편으로 "바닥에 누워서 마이크에 대고 쉰 목소리로말하는" 닉 랜드가 있었다고 로빈 맥케이는 회상한다.. "몇 사람은 그 상황에 정말로 질렸습니다. 그들은 통상적인 강연을 원했습니다.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이 일어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가운데 일부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입니다.' 그리고 걸어 나갔습니다."


관용적인 워릭 철학과의 내부에서도 표준적인 학술적 행위에 대한 CCRU의 훨씬 더 노골적인 경멸이 쟁점이 되었다. 레이 브래시어(Ray Brassier)는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현재 베이루트 소재 아메리칸 대학교의 국제적으로 알려진 철학자인 브래시어는 1995년과 2001년 사이에 워릭의 입학 연령을 넘긴 시간제 학생이었다.


"저는 CCRU에 관심이 있었지만 회의적이었습니다." 브래시어는 말한다. "저는 그들 대부분보다 나이가 약간 더 많았습니다. CCRU는 자신들이 강단보다 더 큰 무언가에 빠져들고 있다고 느꼈고, 그래서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던 많은 일에 관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작업은 좌절감도 느끼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연구의 경박성을 즐겁게 인정하곤 했습니다. '그것은 지식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유가 사물들을 연결하는 것에 불과하더라도, 물론 그것은 암파테민을 복용하는 것처럼 흥분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사유는 사물들을 단절시키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브래시어는 CCRU가 철학과에서 '매우 분열적'인 존재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철학과의 대부분이 닉을 정말로 증오하고 경멸했으며, 그리고 그런 증오는 닉의 학생들에게 확대되었습니다." CCRU의 연구와 그것이 조금이라도 외부적으로 규제되고 평가되어야 하는 방식에 대한 관료주의적 논쟁이 점점 더 노골화되었다. 1997년에 플랜트는 그 대학에서 퇴직했다. "격론을 불러 일으킨 CCRU의 개인적, 정치적 그리고 철학적 동역학은 많은 사람에게 저항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저는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을 가졌고 빠져나와야 했습니다." 플랜트는 말했다. 플랜트는 전업 작가가 되었으며, 몇 년 동안 영국 매체가 선호하는 디지털 학자, 1997년 10월에 <인디펜던트>가 숨을 헐떡이며 광고했듯이, "21세기의 IT 걸"이었다.


1998년에 랜드도 워릭에서 퇴직했다. 그와 여섯 명의 CCRU 구성원은 레밍턴 스파 보디 숍 위의 사무실로 물러섰다. 그곳에서 그들은 가속주의로부터 더 구식의 비의적 관념들의 소용돌이로 이동했는데, 그것들은 비술, 수비학, 아메리카의 호러 작가 HP 러브크래프트(Lovecraft)의 가늠할 수 없는 소설들 그리고 레밍턴에서, 여러 명의 CCRU 구성원들이 이사한 동굴 같은 테라스가 딸린 집에서, 태어났던 영국의 신비주의작 알레이스터 크로울리(Aleister Crowley)에서 비롯되었다.


맥케이는 말한다. "CCRU는 유사컬트적인 것, 유사종교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순전한 광기로 전락하기 전에 떠났습니다." 그 단위의 핵심적인 텍스트들 가운데 두 가지는 언제나 <<어둠의 핵심(Heart of Darkness)>>이라는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의 소설과 그것의 영화 각본인<<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였었는데, 추종자들을 모으는 것과 세계 및 통상적인 온전한 정신에서 물러서는 것을 치명적으로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들의 꼭대기 방에서 랜드와 그의 학생들은 벽 위에 비술 도표들을 그렸다. 그랜트는 너무나 많은 생각과 음주의 "기진맥진하게 하는 체제"가 여러 구성원을 정신적 및 육체적 위기로 몰아갔다고 말한다. 랜드 자신은 그가 "신성한 물질 암페타민"의 "아마도 광적인 남용의 한 해"와 "무익한 '글쓰기' 행위에 바친 ... 지속적인 인공적 불면"의 한 해로 서술한 그 해 이후 2000년대 초에 신경 쇠약을 겪었으며,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브래시어는 말한다. "CCRU는 그냥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포함되지 않은 많은 사람이 '속이 시원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육 년 후에 캐나다 웨스턴온타리오대학교(University of Western ontario)의 온순한 정치학 석사과정 학생이었던 닉 스르니체크(Nick Srnicek)는 <k-펑크(k-punk)>라고 불린 팝 문화와 정치에 관한 영국의 블로그를 읽기 시작했다. <k-펑크>는 2003년 이래로 운영되었고, 레코드와 TV 쇼에서 영국의 최근 역사와 프랑스 철학에 이르기까지의 무의식적인 방랑 때문에 학자와 음악 비평가 들 사이에서 추종 집단이 형성되었다. <k-펑크>는 이전에 CCRU의 구성원이었던 마크 피셔에 의해 운영되었다. 그 블로그는 들뢰즈와 가타리를 경건하게 인용하기 같은 몇 가지 워릭 특질을 유지했지만, CCRU의 공격적인 수사와 친자본주의적 정치학을 점진적으로 탈피하여 근대성에 대한 더 관용적인, 더 좌경화된 어조를 띠게 되었다. 피셔는, 조심스러운 경직된 기업들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생산품의 끝없는 순환을 갖는 자본주의가 가속주의자들에게 실망의 원인이라는 것을 점점 더 느꼈다. 그런데 그는 좌파에 대해서도 짜증을 내었는데, 좌파는 새로운 기술을 활용했어야 할 때 그것을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스르니체크는 동의했다. 그와 피셔는 친구가 되었다.


2008년 금융 위기와 그것에 대한 좌파의 비효과적인, 꽤 구식의 대응―점령하라 운동의 단기적인 거리 시위 같은―때문에 스르니체크는 갱신된 급진적 정치학이 필요하다고 더욱더 확신하게 되었다. 2013년에 스르니체크와 알렉스 윌리엄스(Alex Williams)라는 영국의 젊은 정치 이론가는 <<가속주의적 정치를 위한 선언(Manifesto for an Accelerationist Politics)>>를 공동으로 작성했다. "자본주의는 기술의 생산력을 제약하기 시작했다"고 그들은 적었다. "[우리 판본의] 가속주의는 이런 능력들이 ... 대안적인 근대성을 향해 ... 공동의 목적을 행해 용도가 변경된 채로 ... 해방될 수 있고 해방되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믿음이다."


그런 "대안적인 근대성"이 어떠할지는 노동 시간의 단축, 사회적 갈등을 악화시키기보다는 완화시키는 데 사용되는 기술, 그리고 "지구와 우리 자신의 직접적인 육체 형태의 한계"를 넘어서는 인류를 지나가듯이 언급함으로써 간신히, 그러나 매혹적으로 묘사하였다. 영국에서 합중국과 이탈리아에 이르기까지 정치학과 철학 블로그들에서는 스르니체크와 윌리엄스가 새로운 정치 철학, 즉 "좌파 가속주의"를 정초했다는 관념이 널리 퍼졌다.


이 년 후 2015년에 그들은 그 선언을 <<미래를 발명하기(Inventing the Future)>>라는 약간 더 구체적인 책으로 확장했다. 그것은 자동화에 최대한 의거하는 경제를 옹호하는 주장을 펼치는데, 축소되는 일자리, 노동 시간 그리고 임금이 보편적 기본 소득으로 대체된다. 그 책은 수 년 동안 사변적인 좌익 작업이 했던 것보다 더 많은 주목을 끌었는데, 영국 노동당 하원의원 존 크루다스(Jon Cruddas) 및 저자 폴 메이슨(Paul Mason)과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 같은 지적으로 호기심이 많은 좌파 인사들로부터 관심과 찬양을 받았다.


그런데 그 책에는 가속주의라는 실제 낱말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그 술어를 포기했습니다"고 스르니체크는 내게 말했다. "그것은 너무나 대중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어쨌든 우리는 모든 것이 더 빨리 진행되기를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노동 시간 단축을 옹호하는 주장을 펼치는 것은 사람들의 삶이 느려지는 것을 옹호하는 것입니다."


2013년 선언은 랜드의 초기 판본의 가속주의를 지나는 길에 언급했었는데, 그것을 "예리하"고 "매혹적"인 것이지만 또한 "근시안적"이고 "어수선한" 것으로 서술했다. 스르니체크와 내가 만났을 때―적절하게도 그는 미래주의적인 공적 공간(테이트 모던 미술관의 모난 증축 건물에 있는 카페)을 선택했다―나는 그가 현재 랜드와 CCRU의 작업을 어떻게 간주하는지 물었다. "랜드의 작업은 들뢰즈와 가타리에 대한 유효한 독법이었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비인간주의입니다 ... 그리고 저는 CCRU의 텍스트로 돌아가는 것이 그렇게 흥미로운 것인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모두 언어 유희입니다 ... '사이버'라는 낱말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90년대적인 듯 보입니다."


나는 랜드에게 좌파 가속주의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는 말했다. "자기추동적 기술이 자본주의와 분리될 수 있다는 관념은 심대한 이론적 오류입니다."


신경쇠약을 겪은 후에 랜드는 영국을 떠났다. 그는 "새천년 초에" 타이완으로 이주한 다음에 "몇 년 후에" 상하이로 이주했다고 내게 말했다. 현재 그는 그곳에서 여전히 살고 있다. "이방인으로서의 삶은 하나의 위안이었습니다." 또한 중국은 자극적이었다. 2004년에 영자 신문<상하이 스타(Shanghai Star)>에 실린 한 기고문에서 랜드는 현대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의 융합을 "지금까지 세계에 알려진 사회적 및 경제적 발전에 대한 최대의 정치적 엔진"으로 서술했다. 워릭에서 흔히 그와 CCRU는 그들이 "네오차이나"라고 부른 것에 관해 격정적으로 글을 적었었지만, 실제 내용은 거의 없었다. 랜드는, 일단 그곳에서 살면서 중국이 "대단한 정도로" 이미 가속주의적 사회―미래에 의해 고정되고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내게 말했다. 중국 국가의 포괄적인 기획들을 보고 나서 그는 정부 역량에 대한 이전의 경멸을 떨쳐버렸다.


덜 혁명적인 영국으로 돌아오면, 랜드의 중국 저널리즘, 친정부 선전, 홍보의 과장적 표현 그리고 거친 CCRU 상상의 기묘한 혼합물은 2000년대와 2010년대 초 동안 인식되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무시당했다. 그 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던 가속주의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랜드가 철학을 부적절한 방향으로 끌고 갔었다는 느낌이 있었다.


워릭 디아스포라의 다른 구성원들은 현대 세계와 논란의 여지가 덜한 타협을 이루었다. 이전에 CCRU의 구성원이었던 수잔 리빙스턴(Suzanne Livingston)은 울프 올린스(Wolff Olins)라는 국제 브랜드 컨설팅 회사에 합류하였으며, 박사과정 시기에 워릭에서 수행했었던 로봇공학과 인공 지능에 관한 연구를 사용하여 소니와 에릭슨 같은 기술 기업들에 도움을 주었다. 2004년에 스티브 굿맨(Steve Goodman)은 하이퍼덥(Hyperdub)이라는 전자 음악 레이블을 설립하여 무엇보다도 런던 남부의 찬양받는 예술가 베리얼(Burial)의 불온한 덥스텝 레코드들을 발매했는데, 때때로 가속주의적 메시지가 내부에 깊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말한다. "그것은 양파와 같습니다. 우리 청중은 원하는 만큼 많은 층을 자유롭게 벗겨내는데, 몇몇 사람은 눈물을 흘릴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억지로 먹이지 않습니다."


2002년과 2014년 사이에 굿맨은 런던 남부의 골드스미스 칼리지와 더불어 이전의 CCRU 구성원들을 자주 고용한 이스트런던대학교(University of East London, UEL)에서 음악 문화에 관한 강의를 했다. "워릭 무리는 여전히 서로에게 헌신하고 충성하는 친구들의 집단입니다"라고 굿맨의 이전 UEL 동료는 말한다. "그것은 좋은 서술 방식입니다. 나머지 다른 한 방식은 CCRU 컬트가 결코 중단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가속주의가 컬트이든 아니든 간에 로빈 맥케이가 그것의 중심에 있다. 어버노믹 출판사를 통해서 핵심적인 텍스트들을 출판하는 것 외에 멕케이는 25년 동안 알고 지냈으며 흔히 옹호한 그의 이전 워릭 동무들 대부분과, 심지어 랜드와도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맥케이는 덜 불안정한 인물이다. 현재 43세인 그는 내륙 지방 콘웰의 한 평범한 마을에서 산지 10년이 되었다. 멕케이와 나는 가장 가까운 역에서 만났는데, 그는 수수한 검정 셔츠를 입었고 카 스테레오로 복잡한 테크노 음악을 틀었으며 뒷좌석에 그의 아이들 가운데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멋진 여름날에 맞서 차양이 내려진, 절반이 개조된 그의 오두막의 거실에서 맥케이는 여러 시간 동안 가속주의와 그것의 구불구불한 역사에 관해 말했는데, 줄곧 담배를 피면서―오랜 CCRU 습관―긴 문장들 사이에 느리게 눈을 깜박였고, 그래서 찬찬히 그리고 규칙적으로 그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끝날 무렵에 그는 말했다. "가속주의는 비관주의에 맞서기 위한 기계입니다. 아직 손대지 않은 가능한 것들에서 당신은 현재에 대해 덜 우울한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맥케이는 우울증 시기들을 겪었다고 말했다. 역시 우울증을 앓았었던, 그의 친한 친구 마크 피셔는 2017년 1월에 자살했다.


말년에 피셔는 영국이 어떤 거대한 도약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체 상태에 있다는 생각에 점점 더 사로잡히게 되었다. 현대 생활의 모든 광기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점에서 대부분의 선진 국가들은 가속되는 시대의 정반대 편에서 여전히 살아가는데, 동일한 정당들이 명백하게도 영속적으로 집권하고, 동일한 침체된 자본주의는 금융 위기가 일어난지 1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추진력을 얻기 위해 애쓰고 있으며, 브렉시트에 찬성한 노인 투표자들과 향수를 느끼는 좌파 인사들에 의해 공히 표현되는 좋았던 옛 시절에 대한 동일한 갈망이 존재한다.


이제 55세인 원가속주의자 닉 랜드의 생각도 감속되고 있을 것이다. 2013년 이래로 랜드는 합중국 중심의 극우 운동인 신반동주의, 즉 흔히 불리는 대로 NRx의 지도자가 되었다. 신반동주의자들은 근대 국민국가, 민주주의 그리고 정부 관료지배체제가 권위주의적 도시 국가로 대체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데, 신반동주의 블로그들에서 그런 도시 국가는 싱가포르 같은 대의 고립된 지역과 거의 마찬가지로 이상화된 중세 왕국처럼 들린다.


2013년에 랜드는 "암흑 계몽주의(The Dark Enlightenment)"라는 전형적으로 극적인 제목으로 신반동주의 운동에 관한 장문의 온라인 에세이를 작성했는데, 그것은 신반동주의를 정초하는 문서들 가운데 하나로 널리 간주되게 되었다. 이제 랜드는, 트럼프와 브렉시트 같은 신반동주의적 현상은 현 상황의 종식을 재촉하기 위해 가속주의자들이 지지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속주의 분석가 레이 브래시어는 납득하지 못한다. "닉 랜드는, 20년 전에 '정치는 죽었다'고 주장했던 것으로부터 완전히 구식의 표준적인 반동적 처신으로 가버렸습니다." 신반동주의는 기술에 대한 신앙을 품고 있고 실리콘 밸리에 추종 집단이 있지만, 다른 면에서 그것은 가속주의자들이 동맹을 맺기에는 퇴영적인 대의인 듯 보인다.


1970년대 초에 들뢰즈와 가타리가 그랬듯이, 그리고 1990년대에 워릭 철학자들이 그랬듯이, 먹여 살릴 역동적인 자본주의가 없다면, 가속주의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될 뿐일 것이다. 2014년에 출판된 <<유해한 속도(Malign Velocities)>>라는 가속주의 운동에 관한 책에서 벤자민 노이스(Benjamin Noys)는 가속주의가 현재의 기술적 및 경제적 진퇴양난에 대한 "그릇된" 해결책을 제시한다고 비난한다. 가속주의와 더불어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돌파구가 "항상 약속되어 있고 항상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을 뿐"이라고 그는 적는다.


1970년대에 가속주의의 더 명랑한 지성적 사촌인 미래학의 옹호자인 아메리카 작가 앨빈 토플러(Alvain Toffler)는 새로운 기술의 가능성과 위험을 다룬 <<미래의 충격(Future Shock)>>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토플러는 인공 지능, 냉동 보존술, 복제 및 탑승 수속 데스크 뒤에서 작업하는 로봇의 임박한 도래를 예측했다. "변화 속도는 가속됩니다"라고 그 책의 다큐멘터리 판본은 오슨 웰스(Orson Welles)의 약간 서투른 내레이터 목소리로 결론지었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들 가운데 하나, 즉 새로운 문명의 탄생을 겪으며 살고 있습니다."


얼마가 지난 후 1973년에 석유 위기가 발생했다. 세계 자본주의는 거의 10년 동안 또 다시 가속하지 못했다. 토플러가 기대한 "새로운 문명"의 대부분 동안 우리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까지 <<미래의 충격>>은 수백 만 부가 팔렸다. 언젠가는 가속주의자의 책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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