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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과 케사르의 차이점 - 진지 구축

작성일 작성자 nasica


저는 논산 훈련소로 입대를 했었습니다.  훈련소에서의 여러가지 훈련 중 어떤 것이 가장 힘들었는가라고 하면, 사람마다 취향은 약간씩 다르겠지만, 그 답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육군 출신들이 다 공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행군이지요.  저같은 경우는 (다른 많은 분들도 그랬을 것 같은데) 걸어서 힘든 것보다도, 행군 중에 꼭 생기는 물집 때문에 정말 괴로왔습니다.  우리나라 군대의 군화 품질이 떨어져서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카투사였던 저는 한미 양국군의 군화 품질에 대해 누구보다도 자신있게 증언할 수 있는데, 정말 최소한 1990년대 초반의 한국 육군 전투화 품질은 미군 것보다 훨씬 떨어졌습니다),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미군 중 자원자들만 뽑아서 레인저(Ranger) 훈련을 받는 과정을 미군 잡지 (미군은 별게 다 있습니다)에서 보았는데, 장거리 행군을 하고 난 뒤에 찍어서 올린 걔들 발바닥 사진을 보니 정말 끔찍하더군요. (발바닥의 1/2이 물집)




(미군과 한국군이 공통으로 겪는 고통 - 행군 뒤 물집, 하계 작전시의 더위, 동계 작전시 추위.  그 밖의 대부분은 미군의 풍부한 예산으로 해결 가능)



그 미군 레인저 프로그램 참가자는 과연 몇 km 행군하고 나서 그런 물집이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발바닥에 지름 3cm 정도의 물집이 생겼을 때, 저는 32km를 걷고 난 뒤였습니다.  1시간에 4km 씩, 8시간 야간 행군을 했었지요.  부끄럽지만 그때 배낭 속에는 깔깔이 상의하고 담요 정도만 들어있었고, 사실 무거운 건 안들어있었어요.


진짜 전쟁을 하는 진짜 군인들(이렇게 써놓고 보니 이상하네요... 저도 진짜 육군 병장 출신인데...)의 경우는 어땠을까요 ?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무엇보다도 그 행군 속도로 유명했습니다.  영국-오스트리아 등의 동맹군 병사들이 하루 16~20km 정도였던 것에 비해, 나폴레옹의 프랑스군 병사들은 기본적으로 24km를 넘었습니다.  이 속도는 사실 놀라운 속도는 아니었고, 고대 로마군단의 이동 속도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나폴레옹 때나 케사르 때나 1800년의 세월 차이가 있었을 뿐 이동은 사람의 다리로 하는 거였으니까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야, 이 책 재미있겠네요.  나중에 주문해서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그렇다면 영국군이나 오스트리아 군은 왜 그리 느렸을까요 ?  문제는 보급 마차였습니다.  19세기 초반의 열악한 진흙투성이의 유럽 도로망 때문에, 보급 마차가 하루 16~20km 밖에 이동을 못했던 것입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의 경우 심지어 기병대가 보병대보다 더 진격 속도가 느렸던 적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에 비해, 로마군은 그 유명한 로마군의 포장 도로를 따라 이동했으므로, 소달구지가 끄는 보급 마차도 병사들의 발걸음 속도에 맞출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보급을 과감히 생략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했지요. 




(로마군이 시간이 남아돌아서 그렇게 열심히 포장 도로를 닦았던 것이 아닙니다.  나폴레옹 시대 유럽 주요 도로는 저렇게 진흙구덩이인 경우가 많았지요.)



하지만, 로마 군단병이건 나폴레옹의 근위대이건, 하루 24km는 생각보다 다소 느리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  저같은 대한민국 육군 훈련병도 하루 32km를 걷는데 말이지요.  하지만 제가 논산 훈련소에서 하루 32km 걸었다고 나폴레옹 근위대보다도 우수한 병사라고 우쭐할 수는 없습니다.  하루 32km는 우습게 걸었던 사례가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도 많았습니다.




(엘바섬을 탈출하여 프랑스에 상륙한 나폴레옹. "나의 사랑하는 병사들이여, 이제 니들 발바닥엔 물집 잘날 없으리라")



엘바 섬에서 탈출한 나폴레옹이 프랑스 남해안의 구프-주앙(Golfe-Juan)에 상륙한 것이 1815년 3월 1일이었습니다. 이 첫날, 나폴레옹이 데리고 온 600명의 근위대 병사들은 무려 80km를 행군합니다.  (아마도 나폴레옹은 말에 탔겠지요.)  그리고 그레노블(Grenoble)시까지의 험준한 산길이 포함된 320km를 6일만에 주파합니다.  하루 50km가 넘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이 파리에 입성했던 것은 3월 19일이었는데, 이 기간 동안 그의 병사들은 하루 평균 48km를 행군했습니다. 


프랑스 근위대만 남자고 영국군에는 남자가 없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영국 남자도 한 행군 한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있습니다.  1809년 웰링턴 공작이 탈라베라 전투에서 악전고투할 때, 그를 돕기 위해 영국군 크로포드 장군이 3,000 명의 라이플 소총병을 이끌고 100km에 이르는 거리를 26시간 만에 주파한 사례가 있습니다.


이렇게 잘 걷는 병사들을 데리고, 왜 하루 24km 밖에 못 걸었을까요 ?  그 이유가 나폴레옹 전쟁 당시 한 영국군 장교의 모험담을 그린 소설의 한 장면에 설명됩니다.





Sharpe's Honour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13년 스페인) ---------------


"텐트라고 !" 샤프가 뱉어내듯 말했다.  "염병 지랄맞은 텐트라니 !"


"숙영을 위한 것입니다, 대위님."  패트릭 하퍼 중사는 표정없는 엄숙한 얼굴로 대꾸했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우쓰 에섹스 연대 병사들은 씨익 웃었다.


"빌어먹을 텐트 같으니라구."


"깨끗한 텐트입니다, 대위님.  질도 좋고 하얀 색입니다.  병사들이 향수병에 걸릴 때에 대비해서 텐트 주변에 꽃밭을 가꿀 수도 있습니다."


샤프는 캔버스 천으로 된 텐트 뭉치 하나를 발로 걷어찼다.  "누가 염병할 텐트 필요하댔어 ?"


"병사들이요, 대위님.  밤에 춥거나 젖으면 안되쟎습니까"  하퍼 중사의 거친 아일랜드 억양 속에는 고소해 죽겠다는 기분이 가득차 있었다.  "다음 번에는 침대가 지급될 것 같습니다, 대위님.  깨끗한 이불보와 우리를 재워줄 귀여운 여자애들까지 딸려서요.  아, 그리고 요강도요.  가장자리에 '신이시여 국왕을 보호하소서'를 새긴 것으로 말입니다."


샤프는 텐트 뭉치를 다시 한번 걷어찼다.  "이거 보급관에게 말해서 태워버릴거야."


"못 태울 겁니다, 대위님."


"왜 못태워 ?"


"서명하고 지급받은 것이거든요, 대위님.  분실 또는 파손되면 급여에서 공제됩니다, 대위님."

샤프는 천박해보이는 커다란 텐트 뭉치 옆에서 으르렁거렸다.  세상의 온갖 웃기고 쓸데없고 멍청한 보급품 중에서, 기마 근위대(Horse Guards, 병종이라기보다는 사령부에 가까운 부대입니다)가 텐트를 보내온 것이다 !  병사들은 언제나 텐트없이 노숙을 해왔다 !  샤프는 그의 머리카락이 땅에 얼어붙어 달라붙은 채로 아침에 일어났고, 옷은 흠뻑 젖은 상태로 깨어났지만, 한번도 텐트가 있었으면 했던 적은 없었다.  그는 보병이었다.  보병은 행군을, 그것도 빠른 행군을 해야 했는데, 텐트는 행군 속도를 떨어뜨릴 뿐이었다.  "저 빌어먹을 것들을 어떻게 옮기지 ?"

"노새요, 대위님.  텐트 노새가 있습니다.  2개 중대 당 1마리 씩입니다.  내일 지급받습니다, 대위님. 서명하고서요."

"예수님이 통곡하실 노릇이구만 !" (Jesus wept !  이렇게 직역하면 우스운 느낌이지만, 실제로는 이거 쌍욕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텐트가 없으셔서 우셨나보지요, 대위님."


샤프는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웠다. 하지만 이 뜻하지 않게 사령부에서 도착한 텐트는 쓸데없는 문제거리를 만들어냈다.  대대 전체의 텐트를 움직이려면 노새가 5마리 필요했다.  노새 한마리는 200 파운드의 짐을 싣고, 거기에 추가로 자기가 먹을 6일치 사료 30 파운드를 더 실을 수 있었다.  작년 여름 작전처럼 행군을 한다면 사료가 부족해지니까 추가 사료를 싣기 위해 추가의 노새가 필요했는데, 그 추가된 노새도 먹어야 하니까 그 추가된 노새가 먹을 사료를 실어나를 노새가 또 필요했다.  샤프가 6주간의 행군을 한다면 900 파운드의 추가 사료가 필요했는데, 이 사료를 실은 노새만도 4~5 마리가 필요했고, 이 노새들이 6주간 먹을 사료만도 700 파운드가 필요했으므로 추가로 4마리의 노새가 필요했다.  이 추가된 4마리 노새도 또 사료를 먹어야 했으므로, 이 웃기지만 정확한 계산을 끝마치고나니 5마리의 텐트 수송용 노새를 6주간 먹여살리기 위해 추가로 14마리의 노새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  그는 또 텐트를 걷어찼다.  "젠장, 패트릭 !  이거 완전히 웃기는 노릇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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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  논산 훈련소에서 저야 행군을 마치고 나면 막사(비록 거지같기는 했지만)로 들어가서 씻고 자면 되었지만, 로마군이나 나폴레옹군은 진지를 구축하고 텐트를 치고 밥도 짓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루종일 정말 지쳐 나가 떨어질 때까지 행군을 해서는 안되었고, 최소한 진지를 구축할 시간과 힘은 아껴둔 상태에서 행군을 마쳐야 했습니다.  게다가 위 소설 속에서 친절하게 계산해준 것처럼, 텐트를 치고 진지를 구축할 장비들을 실어나르려면 역시 노새나 말 같은 수송용 가축이 필요하고, 이들은 식량 수송마차처럼 행군 속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자, 여러분이 등산을 하거나 하이킹을 하다가 이제 야영을 준비한다고 생각해보십시요.  뭐 폴을 박고 텐트를 치고 근처에서 물을 길어오고 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여러분 2~3명이서 할 때의 이야기이고, 수천명, 수만명의 병사들이 한꺼번에, 그것도 2~3시간 안에 그렇게 하는 것은 전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물은 어디서 떠오고, 땔나무는 어디서 구하고, 혹시 밤에 자는 도중에 적군이 쳐들어올 경우 어떻게 방어하는지 등등을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어떤 장소에 진지를 구축할 것이지부터 생각을 해야 하는데, 이건 까딱 잘못하면 작게는 수천명의 병사들을 고생시키는 일이 될 것이고, 크게는 전군의 몰살로 이어질 수 있는 중대한 결정입니다.




(이건 1803~1805년 사이 나폴레옹이 영국 침공을 위해 프랑스 불로뉴 지방에 대군단의 대형 캠프를 설치하고 병력을 집결시키던 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입니다.  머스켓 볼이나 동전, 가방 버클이나 군복 단추 뿐만 아니라 캠프 구조물에 사용된 못도 발견됩니다.)



서양 애들과는 달리, 동양, 적어도 한중일 동북아 3국의 남자들은 어려서부터 삼국지를 읽으며 자랐기 때문에 이런 진지 구축의 중요성에 대해 아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가령 삼국지에서 제갈공명이 처음으로 출사표를 내고 북벌에 나섰을 때, 결국 패배했던 원인이 바로 제갈공명의 수제자 마속의 적절치 못한 진지 구축 때문이었습니다.  제갈공명이 그토록 신신당부했건만, 마속은 단기적 전술 상의 잇점만 생각하고 고지 위에 진지를 구축하는 바람에 병사들이 식수 부족으로 위나라 군대에게 패배를 당하게 되지요.  그 외에도, 춘추전국 시대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적군이 머물렀던 진지의 흔적을 보고 적세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든지, 적장이 얼마나 우수한 능력을 갖추었는지 판단한다는지 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지요.  손자병법에서도 진지 구축시 위치 선정의 중요성에 대해 배산임수 등의 용어로서 누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 캠핑장 위치 잘못 잡았다고 목을 쳐 ?  읍참마속의 비극)



서양 것들이라고 손자병법의 오묘한 원리에 대해 모르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 방면에서 선두주자가 바로 (또 다시!) 로마군이었습니다.  서양에서는 이런 진지 구축법을 castrametation이라고 부르는데, castra라는 라틴어 단어가 바로 로마군의 캠프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원래 로마군 규정에, 병사들은 하루의 행군을 마치고 나면 반드시 제대로 구축된 임시 요새로 퇴거해야 했습니다.  아, 로마 군단이 행군할 때는 그 앞에 항상 공병대가 먼저 가서 진지를 구축해놓느냐고요 ?  물론 아니지요.  갑옷과 방패, 온갖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 하루의 고된 행군을 마치고나면 그때부터 곡괭이와 망태기를 들고 그날 밤에 잘 진지 구축에 나서야 했습니다.


로마군은 철두철미하게도, 단 하루를 묵을 진지조차도 철저하게 규정에 따라 지었습니다.  사실 진지를 구축할 때 고려해야 할 점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일단 1개 로마군단(약 1만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만한 넓은 평지가 있어야 했고, 또 근처에 물살이 빠른 하천이 있어야 했습니다. 땅은 습기찬 곳이어서는 안되었고, 또 비가 오더라도 물이 고이지 않도록 적절히 높은 곳이어야 했으며, 진지를 만들 목재를 베어낼 숲이 근처에 있어야 하되, 적병이 매복 공격을 할 수 없도록 숲이 너무 진지 가까이 붙어 있어도 안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적의 습격에 대해 손쉽게 방어할 수 있는 곳이어야 했습니다.


이런 곳이 가는 동네마다 24km 간격으로 다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습니다.  로마군은 열사의 페르시아 사막부터 진눈깨비 날리는 스코틀랜드 언덕들까지 다양한 환경에서 작전을 펼쳤으니까요.  그래도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그런 장소를 구했는데, 보통은 호민관(tribune)이 본대보다 먼저 출발하여, 적절한 숙영지를 찾아내어 깃발로 표시를 해두었습니다.  또, 애초에 행군을 할 때 그런 적절한 숙영지가 있는 곳을 골라서 행군 루트를 짜는 경우도 있었고요. 




(그림 좋군요. 어차피 제 블로그 그림은 다 훔쳐오는 것이긴 하지만 정말 좋은 그림의 출처는 안 밝힐 수가 없네요. 출처는 http://legioneromana.altervista.org/eng/legione.html 입니다.)



기본적으로 진지의 구조는 로마군이 전투에 임할 때의 그 진열 그대로를 반영했습니다.  그 면적도 실제로 전투에서 1개 군단이 차지하는 면적보다 크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진지의 모양이 직사각형 모양이 되었습니다.  그 앞쪽에는 경장보병들(auxilaries, 로마군단병이 아닌 주로 외국 용병들로 구성된 궁수, 투석수, 기병 등등)이 진을 치고, 그 뒤인 진지 정중앙에는 사령관의 천막이 자리잡고, 그 뒤로 약 800여개에 이르는 군단병(legionaries)들의 텐트가 위치했습니다.  이는 혹시 야간에 공격을 받더라도, 병사들이 당황하지 않고 곧장 전투 태세를 갖출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천막 배열조차도 매우 질서정연해서, 로마군들은 칠흙같이 어두운 밤중에 불을 밝히지 않아도 자기가 속한 분대(contubernium)의 천막으로 찾아들어갈 수 있다고 자랑할 정도였습니다.  만약에 텐트를 칠 곳이 평평하지 않으면, 먼저 지반 공사를 해서 평평하게 만들어놓고 텐트를 쳤습니다.  대단한 정성이지요 ? 




(유대 전쟁 당시 유대인들의 전원 자살로 비극적 결말이 난 이스라엘 마사다 요새 근처의 고대 로마군의 진지터입니다.)



이렇게 잠잘 곳 뿐만 아니라, 진지 주변을 방어하기 위한 참호와 바리케이드(abatis라고 하지요) 등을 구축했습니다.  아무래도 단순한 야영이 아니라 전쟁을 하러 나온 것이니, 언제 어디서 습격을 받을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요.  참호를 파고 거기서 파낸 흙으로는 방벽을 만들고, 주변 숲에서 베어낸 나무가지를 이용해 바리케이드 비슷한 목책을 만들었습니다.  이 목책은 굵은 통나무보다는 잔가지가 그대로 붙어있는 작은 나무가지를 이용해서, 잔가지들끼리 서로 얽히도록 구성했습니다.  그리스군이 만든 굵은 통나무로 된 목책은 전투시 적병들에 의해 쉽게 뽑히거나, 쉽게 그 사이로 적병들이 비집고 들어왔던 것에 비해, 로마군이 만든 잔가지 목책은 서로 얽혀있는 구조 때문에 쉽게 뽑히지도 않고 목책 사이로 적병들이 들어오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공용 화장실도 만들었습니다.  이 공용 화장실이 또 예술인데, 사실 아무리 1~3일 정도 쓸 진지라고 해도, 1만여명의 응가를 받아낼 화장실이라면, 정말 대단한 프로젝트가 되기 때문입니다.  로마군은 (물론 항상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기본적으로 근처 강에서 끌어들인 물을 이용한 수세식 화장실을 썼습니다.  사실 그래서 진지 근처에 '유속이 빠른 시냇물'이 있기를 원했던 것인데, 강으로부터 도랑을 파서 진지 내부로 물을 끌어들이고, 그 물이 처음에는 식수를 받는 곳, 그 다음으로 목욕장, 기타 작업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장실을 거쳐 진지 밖으로 나가도록 인공 수로를 만들었습니다.  대개의 시냇물은 수돗물처럼 유속이 빠르지 않았기 때문에, 물이 제대로 흐르려면 공용 화장실이 있는 곳은 다소 지대가 낮은 곳에 있어야 했습니다.  특히, 로마인들은 물의 오염이 전염병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식수로 쓰이는 물과 분뇨장에서 쓰이는 물이 철저히 분리되도록 신경을 썼습니다.   강이 없는 곳에서는 우물을 팠는데, 이 경우에도 화장실과 식수를 퍼올리는 우물과의 거리에 신경을 썼습니다.




(Potasissa라는 곳에서 발견된 로마군 야영지의 화장실입니다.  저렇게 돌로 수로를 포장까지 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하루짜리 캠프는 아니었던 모양이네요.)



텐트는 요즘 것보다 더 고급이어서, 천으로 된 것이 아닌, 가죽으로 된 텐트와 나무로 된 폴대를 썼습니다.  이 텐트에는 보통 8명의 병사들이 함께 잤는데, 이들의 단위가 바로 contubernium입니다.  이 contubernium이라는 단어는 요즘 영어에는 없는 라틴어지요.  굳이 해석하면 분대 정도입니다.  이 contubernium이 10개 모이면 바로 centuria(백인대)가 됩니다.  그 지휘관이 바로 centurion(백인대장)입니다.  바로 성경에도 나오는 '백부장'이지요.  그러니까 백인대장 밑에 있는 병사들의 수는 사실 100명이 아니라 80여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텐트류는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 나를 수 없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다른 짐들과 함께 우마차로 날랐습니다.  그래서 로마군에게 군용 도로가 특히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런 대규모 공사를 매일 저녁마다 진행한다고 생각해보십시요.  그것도 무거운 갑옷과 무기를 어깨에 짊어지고 하루 종일 고된 행군을 마친 뒤에 말이지요.  무척 비효율적일 것 같지요 ?  하지만 로마 군단의 힘은 바로 이 진지 구축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들은 행군 중에 매일 이런 작업을 해서 매우 익숙해졌으므로, 의외로 공사가 빨리 진행되어 2~3시간이면 완성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어떤 경우에라도, 전투에서 패배할 경우 이렇게 견고하게 만들어진 진지 안에 들어가서 며칠이고 버틸 수 있었으므로, 무척 안정적인 작전을 운용할 수 있었습니다.  한번의 작은 패배가 대참사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케사르의 갈리아 전기를 읽어보면, 로마군은 창이나 방패 못지 않게, 곡괭이와 망태기를 정말 많이 썼다는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알고보면 우리나라 육군의 '사격보다는 삽질' 전통도 고대 로마때부터 이어진 것입니다(?).




(갈리아 전기 최대 공방전인 알레시아 포위전의 구조도.  로마군단병의 눈물의 삽질이 눈에 선합니다.)



마케도니아 왕가의 친척 뻘인 일리리아의 왕 피루스가 이탈리아 원정을 왔다가 로마군을 보고, '저 야만인들도 진영만큼은 야만스럽지가 않구나'하고 감탄했다는데, 유럽인들은 그 로마군의 진지 구축법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사실 벗어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진지 구축법은 로마 제국이 무너진 이후에, 일단 그 맥이 끊겼지만 옛 로마 기록을 공부한 학자들에 의해 끊기지 않고 계속 전해졌습니다. 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진지 구축법(castrametation)'이란 단어 자체가 로마 군단에서 나온 용어일 정도니까요.  나폴레옹 시대에도, 제가 위에서 기술한 로마군의 진지 구축법과 거의 유사한 진지 구축법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약간 모순점이 생깁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식량 수송차량을 과감히 포기한 덕분에 행군 속도가 남달랐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나폴레옹군은 천막 수송용 차량은 어떻게 했다는 것일까요 ?  저 위 소설 속에 언급한대로 대대마다 천막 수송용 노새만 19마리를 끌고 다녔던 것일까요 ?  그럴리가 없지요.  나폴레옹처럼 기동력을 중시하는 장군에게 그런 노새가 있다면 탄약이나 식량을 싣고 다녔을 것입니다.


바로 거기서 나폴레옹과 케사르의 차이점이 드러나게 됩니다. 


나폴레옹은 텐트에 대해서 별로 좋지 않게 보았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병사들에게 텐트를 허용하지 않았고, 노숙을 하도록 했습니다.  노숙을 영어로는 bivouac (비부액이라고 읽습니다)이라고 합니다만, 사실 이 단어는 스위스 및 알자스 지방에서 생긴 독일어 계통의 단어로서,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에서 영국 쪽으로 전해진 단어입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산 타시는 분 있다면 이런 말씀 하실 수 있겠습니다.  "어, 저거 혹시 비박이란 말 아니야 ?"  맞습니다.  산악인들 사이에서 비박, 비박하실 때의 그 비박이 바로 이 bivouac입니다.  나폴레옹은 텐트는 거추장스럽기만 할 뿐, 병사들에게는 '비박'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보통 비박을 하게 되면 근처 농가에서 구한 짚단이나 나무 판자 등으로 임시 바람막이를 하고 모닥불을 피우게 되는데, 그것이 더 포근하다는 것이 나폴레옹의 주장이었습니다.  발을 모닥불 쪽으로 향한 채 누우면 더 따뜻하고, 모닥불로 인해서 습한 땅도 빨리 마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나폴레옹은 오직 읽고 쓰고 지도를 봐야 하는 고위 장교들만 텐트를 칠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나폴레옹의 bivouac 사랑은 끝이 없어서, 텐트의 온갖 단점을 욕하기에 이르기까지 했습니다.  나무 그늘이 텐트보다도 햇빛을 가리기에 더 좋고, 아무리 보잘 것 없는 판자때기라도 비를 피하는데 텐트보다는 낫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아마 나폴레옹 자신은 그렇게 노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효용성은 고사하고, 야전에 나가면 그렇게 많은 병사들에게 일일이 돌아갈 나무 그늘이나 판자때기가 충분치 않다는 생각은 안 들었나 봅니다.) 




(병사들을 텐트도 없이 노숙시키고 지는 텐트치고 모닥불 피우고 온갖 X폼을 잡아 ?)



게다가 정보전 측면에서도 텐트는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적의 정찰병이 프랑스군 진지 근처에 와서 텐트 수를 세어감으로써 이쪽의 병력 수를 염탐한다는 것이었지요.  사실 개미처럼 꼬물거리며 돌아다니는 병사들의 수를 원거리에서 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에 비해서 텐트없이 bivouac을 하면, 적 정찰병이 세어갈 것은 모닥불 뿐인데, 그것으로는 대체 모닥불 하나를 몇 명의 병사가 공유하는지 알기도 쉽지 않고, 또 깜빡거리는 모닥불 숫자를 세는 것이 쉽지도 않을 뿐더러, 아침 저녁 때 모닥불에서 올라가는 연기는 안개와 구별하기가 어려워 적의 염탐을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꽤 맞는 말 같습니다.  가령 프랑스군이 하루 묵었다가 지나간 진지를 보면, 텐트를 몇개 쳤었는지 그 자국을 세어 봄으로써 병력의 숫자를 짐작하는 것이 쉽지만, 별로 질서 정연하지 않은 모닥불 흔적을 보고 적병의 숫자를 세는 것은 꽤 어려울 것 같거든요.

이렇게 온갖 이유를 들어가며 텐트를 포기한 덕분에, 나폴레옹군은 뛰어난 기동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군에게 텐트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장기간 숙영을 하는 경우에는 나폴레옹군도 텐트를 쳤습니다.  아무래도 (나폴레옹의 주장과는 달리) 노숙을 하는 것은 병사들의 건강과 컨디션 조절에 좋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bivouac를 하자면 꼭 짚단이나 나무 판자 등이 필요했는데, 병사들은 그런 것을 주변 농가나 마을에서 그야말로 약탈을 해서 구했습니다.  멀쩡한 집의 지붕이나 문짝을 뜯어가는 것이 예사였지요. 이렇게 1회용 잠자리를 만들기 위해 희생되는 주변 마을의 피해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경제적인 이유에서라도 장기 숙영 때는 텐트 생활을 했습니다.  특히, 겨울 숙영지에서는 텐트가 필수였지요.




(이 목가적인 노숙 장면 뒤에는 저 바람막이 판자를 위해 집을 뜯긴 근처 주민의 눈물이 숨어있습니다.)



저 위 소설 속에 나오는 샤프 대위는 텐트 속에서 잔 적이 없다고 주장을 하지요 ?  실제로 다른 유럽 국가들도 프랑스군의 노숙하는 모습을 보고 텐트를 포기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 소설의 배경인 1813년 정도되면, 프랑스군이 누렸던 거의 모든 전술 상의 잇점은 다른 유럽 국가들도 이미 다 보고 배운 뒤였거든요.  고대 스파르타의 경우에도, 신탁으로 전쟁을 즐겨하지 말라고 했었지요.  알고보면 그 이유가, 전쟁을 자주 하면 주변 국가들에게 훈련 경험을 쌓아주게 되어, 결국 스파르타의 군사적 우위가 깎인다는 것이었지요.  실제로 스파르타의 군사적 헤게모니도 그렇게 사라져갔고, 그건 나폴레옹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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