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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애국 보수 주인장의 죽음 - 티롤의 반란

작성일 작성자 nasica

여태까지는 1809년 오스트리아의 거창하지만 서투른 초반 공세를, 나폴레옹이 절대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요리하는지를 편안한 마음으로 구경하셨습니다.  오스트리아인들의 침공에 맞선 폴란드인들의 용감하고 통쾌한 반격은 덤이었지요.  이쯤에서 제5차 대불동맹전쟁의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던 티롤(Tyrol)의 반란은 어떻게 진행되었나를 보시는 것이 적절해 보입니다.  


기억하시겠습니다만, 티롤은 4년 전인 1805년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의 결과,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손에서 바이에른 왕국으로 양도되었습니다.  판세를 제대로 읽은 바이에른이 나폴레옹 편에 붙었던 것에 대한 상품이었지요.  프랑스 계몽주의와 대혁명의 영향을 받은 바이에른이 펼친 근대적, 세속적인 입헌 군주제 통치는 어떻게 보면 매우 합리적인 것이었으나, 몇 년 안 가 티롤 주민들 당사자들에게는 무척 밉살스러운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유는 세속화에 따른 카톨릭 관습 철폐에 대한 반발심이 컸으나, 가장 큰 이유는 결국 나폴레옹 자신이 제공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바이에른에게도 제국의 유지와 확장을 위한 병력과 군비를 요구했는데, 이로 인한 부담은 티롤에게도 그대로 전가되었습니다.  또한 나폴레옹이 유럽 대륙에 강요했던 대륙 봉쇄령은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전역에 교역과 산업 생산의 감소를 가져왔고, 결국 그로 인한 경기 침체는 티롤 주민들에게도 고스란히 닥쳐왔습니다.  이렇게 사나와진 분위기에 불꽃을 당긴 것은 오스트리아와의 임박한 전쟁이었습니다.  당장 티롤 지방에도 징집령이 떨어진 것입니다.  가증스러운 프랑스놈들을 위해, 옛 전우이자 수백년 간 충성을 바쳐온 합스부르크 왕가의 군대에게 총부리를 들이대야 한다는 압박감은 대대적인 징집 거부와 무장 봉기로 이어졌습니다.  








(아름다운 티롤의 아름다운 도시, 인스부르크 전경입니다.)




하지만 모든 봉기에는 지도자가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활발하게 나서는 지도자가 없다면 사람들은 아무리 불만이 많아도 그저 동네 술집에 모여 울분이나 삭이다 취해서 집에 돌아갈 뿐이겠지요.  산악 지방인 티롤 지방에도 인스부르크(Innsbruck)와 같은 대도시가 있고 또 귀족과 지식인들이 있었습니다.  티롤 봉기의 정신적, 이론적 지도자는 지난 편에도 소개드렸던 요제프 호마이어(Joseph Hormayr)였습니다.   이 양반은 인스부르크 출신의 귀족이자 오스트리아 외무부에서 근무한 관료이고, 티롤 사람들이 하늘처럼 생각하던 프란츠 황제의 친동생 요한 대공의 친구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판 플루타르크 영웅전(Österreichischer Plutarch)이라는 20권짜리 전기집을 쓴 지식인이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티롤의 반란 전에 티롤은 이 양반을 통해서 빈의 합스부르크 궁정과 줄을 대었고, 호마이어는 자신의 장기를 살려 온갖 반-나폴레옹 선동물을 비밀리에 유포시키며 티롤 주민들의 항쟁 의식을 고취시켰습니다.






(호마이어도 애국자임은 분명했습니다.  티롤 봉기가 실패로 끝나자, 합스부르크 왕가에서는 뻔뻔스럽게도 호마이어에게도 그 책임이 있다고 보고 그를 냉대했습니다.  호마이어도 그런 냉대에 발끈하여, 결국 말년은 자신이 일으킨 무장 봉기의 적국이었던 바이에른 왕국에서 보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손에 낡은 사냥총이나 쇠스랑을 들고 프랑스군, 좀더 정확하게는 프랑스의 앞잡이인 바이에른군과 싸우는 것은 라틴어를 술술 할 줄 아는 고상한 귀족 지식인들이 아니라 목동들과 농부들, 사냥꾼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호마이어가 서재에 앉아 온갖 유식한 어휘를 써가며 고상하게 써내려간 반-나폴레옹 팜플렛을 스스로 읽을 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습니다.  이들은 정말 동네 술집에 모여 앉아 맥주를 마시며 어려워진 살림살이와 바이에른군에 끌려가 총알받이가 될 남동생 혹은 아들 이야기를 하며 울분을 토하다가,  자신들이 믿고 따를 만한 사람으로부터 '우리 이럴게 아니라 정말 들고 일어나자'라는 권유를 받고 봉기하게 되었습니다.  그 믿고 따를 만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 동네 술집 주인, 즉 호퍼(Andreas Hofer)라는 사람이었습니다. 






(호퍼의 초상입니다.  물론 사후에 그려진 상상화에 불과합니다.  여관 주인에게는 이런 초상화를 그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안드레아스 호퍼는 정확하게 말하면 술집 주인이 아니라 여관 주인이었습니다.  상크트 레온하트 인 파사이어(St. Leonhard in Passeier)라는 지역의 산트호프(Sandhof)라는 동네에서 대대로 여관업을 하던 이 사람은 나폴레옹보다 2살이 많은 전형적인 티롤 시골 마을 사람이었습니다.  티롤 지방의 여관 주인은 직업 특성상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사이를 오가는 상인들과 여행객들을 자주 접할 수 있었으므로, 그런 산골 동네에서는 세상 물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장 잘 알 수 있었습니다.  특히 호퍼는 여관업과 함께 포도주와 말 장수 노릇도 했으므로 더욱 외부 사정에 밝았고, 이탈리아 사람들과 거래를 하다보니 이탈리아어도 제법 할 줄 알았습니다.  또 숙박계나 거래 장부를 써야 했으므로 최소한 문맹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 배경에다 마을 사람들의 신뢰를 받는 성품이었는지, 1791년 티롤 지방 의회(landtag)에 평민 대표 중 하나로 선출되기도 했고, 또 1805년 제3차 대불동맹전쟁 때는 티롤 민병대의 대위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뷔르트(Wirt, 여관주인)라는 친근한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호퍼가 태어나고 자라고 운영했던 산트호프의 여관 건물이라고 합니다.  솔직히... 정말 그때 그 건물인지는 의심스럽습니다.)



그는 배운 것이 많지 않지만 무척 경건하고 질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계몽주의가 뭔지, 헌법이나 인권 선언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그가 어릴 때부터 받은 가정 교육의 결과, 그는 그저 '주님과 황제 폐하와 조국을 위해' 라는 단순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믿는 바를 실천으로 옮기는 행동력과, 그를 위해 희생도 불사한다는 숭고한 마음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는 1809년 1월 빈을 방문한 티롤 비밀 사절단의 일원이기도 했고, 그 방문 이후 더욱 열정에 불타 올라 생업을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하고 곳곳의 산골 마을을 찾아다니며 반-프랑스 봉기의 불씨를 지폈습니다.  


티롤의 반란이 터져 나온 것은 호퍼를 포함한 티롤 대표단이 빈을 방문한 뒤 3개월 정도 지난 4월 9일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주력 야전군이 인(Inn) 강을 건너 바이에른을 침공하기 하루 전의 일이었지요.  전날밤 인 강에 톱밥을 잔뜩 풀어 하류의 티롤 주민들에게 미리 신호를 한 뒤, 법으로 금지되었던 교회의 타종을 시작으로 티롤 주민들은 손에 사냥총과 도끼, 쇠스랑 등을 들고 티롤 내 바이에른 수비대를 급습했습니다.  방심하고 있던 바이에른 수비대는 곳곳에 작은 규모로 분산되어 있었고, 이들은 그 상태 그대로 각지에서 포로로 잡히거나 학살되었습니다.  






(산골짜기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반란군을 모집하는 호퍼의 모습입니다.)




각지에서 소동이 벌어져 이제 기습 효과가 없어진 뒤에도, 바이에른 정규군은 티롤 무장 반란군에게 맥을 추지 못했습니다.  바이에른군은 정규군답게 대오를 갖춘 일제 사격과 절도 있는 집단 총검 돌격 전법을 쓰려고 했으나, 티롤 반란군은 그런 싸움에는 전혀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높은 산 바위턱에 숨어 있다 조준 사격을 한 뒤 도망치거나, 좁은 산길을 지나가는 바이에른군 머리 위에 인공 눈사태를 일으키는 등 지형지물을 100% 살리는 전법을 사용하여 바이에른군을 괴롭혔습니다.  이런 벌떼 같은 공격에 조금씩 녹아내린 바이에른군은 티롤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인스부르크에서도 궁지에 몰렸습니다.  시내의 주민들도 모두 반란군 편인 것이 명백한데다, 도시 주변을 수천의 반란군이 완전히 봉쇄하고 끊임없는 도발로 48시간 동안 괴롭힘을 당하자, 바이에른군 지휘관인 킨켈(Kinkel) 장군은 결국 4월 13일 3천이 넘는 수비군과 함께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가운데 선 인물이 물론 호퍼입니다.  저 둥근 모자와 수염은 티롤 산악민의 상징이지요.)



하늘이 돕는지 뜻 밖의 전과를 올리는 행운도 있었습니다.  인스부르크가 함락된 것을 모르고 무방비 상태로 인스부르크로 접근하던 프랑스군 약 2천이 있었는데, 이들은 실은 제대로 된 프랑스군이라기보다는 모두 최근에 이탈리아에서 징집되어 티롤로 이동하던 2진급 부대였고, 그 지휘관도 주정뱅이에 대식가로 소문난 비송(Baptiste Pierre Bisson) 장군이었습니다.  비송 장군은 점심 식사 때 8병의 와인을 마시고도 전혀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인물이었다고 하는데, 이때 당시에는 취해 있었는지 어땠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아무튼 이들이 이탈리아에서 인스부르크로 향하는 브레너 고갯길(Brennerpass)을 넘는 중에, 사방에 갑자기 티롤 반란군 수천 명이 나타나 포위하자 이들은 허둥지둥 거리다 결국 맥없이 항복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일설에는 이 부대는 탄약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이때 티롤 반란군은 나폴레옹이 하사한 제3 보병 연대의 독수리 군기까지 손에 넣어 나폴레옹의 체면을 구겨 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때 프랑스군이 소지하고 있던 2천 정의 머스켓 소총과 5문의 대포, 2문의 박격포까지 노획하여 제대로 된 무기가 부족했던 반란군에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브레너 고갯길 Brennerpass의 현재 모습입니다.  브레너패스는 무척 긴 루트라서, 1809년 전투 현장이 꼭 여기는 아닐 겁니다.)



이렇게 초반의 티롤 무장 봉기는 대단히 성공적이었습니다.  티롤 주민들의 저항 의지가 확고하여 반란 동참자가 많았고, 무엇보다 사전에 프랑스나 바이에른 측에게 밀고한 배신자가 없었던 것이 큰 성공 요인이었습니다.  이들을 지원하던 오스트리아도 입만 터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약 1만에 가까운 병력을 샤스틀레(Johann Gabriel Chasteler de Courcelles) 장군의 지휘 하에 티롤로 파견해주었습니다.  샤스틀레 장군은 4월 16일 인스부르크에 진주하여 전부터 오스트리아와 협력하던 호마이어를 수장으로 하는 티롤 임시 정부를 세웠습니다.  호퍼는 이때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위임받은 티롤 현지 사령관' 직을 맡았고, 그대로 남부로 이동하여 보전(Bozen)과 트렌트(Trent) 등 이탈리아로 통하는 주요 도시들을 장악했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왔고, 이제 티롤은 프랑스와 바이에른의 무신론자들 손아귀에서 벗어나 평화를 찾은 듯 했습니다.






(샤스틀레는 합스부르크령 벨기에에서 태어난,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쓰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잠깐이나마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강해서가 아니라, 상대가 자신들을 무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전쟁 발발 직후 바이에른 현장에 도착하고도 티롤의 반란은 철저히 무시했습니다.  그는 바이에른군으로 구성된 제7 군단을 맡고 있던 단치히 공작 르페브르 원수로부터 티롤의 반란 소식을 들었으나, 그저 이렇게 답할 뿐이었습니다.


"티롤에 대해서는 오스트리아 애들이 하고 싶은 대로 그냥 내버려 두게.  난 어떤 경우에든 산악전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네."


바이에른을 침공하면서도 바르샤바와 티롤, 이탈리아로 병력을 나눠 보내던 오스트리아 카알 대공과는 달리, 나폴레옹은 선택과 집중을 할 줄 아는 남자였습니다.  그는 오로지 카알 대공의 주력 부대만 잡으면 나머지 문제는 다 저절로 해결된 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4월 18일부터 23일 사이에 벌어진 5일 간의 '란츠후트 기동전'을 통해 카알 대공의 주력군을 두동강 내고 5월 13일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점령했습니다.  


그러고나자 정말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비로소 티롤에 대해서도 눈을 돌렸습니다.  그는 5월 초 르페브르의 제7 군단을 티롤로 파견하여 티롤 지역을 평정하도록 했습니다.  나폴레옹으로서도 티롤을 언제까지나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 티롤은 그의 의붓아들 외젠 보아르네가 지키고 있던 이탈리아 왕국과의 교통로 역할을 하는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이에른군으로 구성된 제7 군단은 5월 13일 인스부르크 북동쪽의 뵈글(Wörgl)에서 길을 막아선 샤스틀레 장군의 오스트리아 정규군 5천과 맞붙었습니다.  산악에서 벌어지는 게릴라전이 아닌, 제대로 된 라인 배틀에서 오스트리아군은 르페브르의 지휘를 받는 제7 군단 약 1만명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절반이 넘는 약 3천의 사상자와 포로를 내고 사실상 궤멸되어 버렸습니다.  이 전투 이후 샤스틀레는 다른 곳에 주둔해 있던 오스트리아군까지 모두 긁어 모아 5천의 병력을 모은 뒤 계속 티롤 반란군을 지원하다, 요한 대공의 명에 따라 6월 초 티롤에서 철수해버렸습니다.  


이미 전세가 프랑스 측으로 확 기울어 버린 상황에서 제7 군단은, 알고 보면 오합지졸에 불과한 티롤 반란군들을 쫓아내고 5월 20일 인스부르크를 간단히 점령했습니다.  호마이어를 비롯한 인스부르크의 티롤 임시 정부 요인들은 무의미한 저항을 포기하고 물러났습니다.  어디까지나 티롤은 강대국들이 충돌하는 대규모 전쟁판에서 그야말로 거스름돈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거스름돈에게도 기회는 오는 법입니다.  얄궂게도 인스부르크가 함락된 바로 다음날인 5월 21일~22일 양일간 숙명의 아스페른-에슬링(Aspern-Essling) 전투에서 놀랍게도 카알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이 나폴레옹을 격파한 것입니다 !  이로 인해 르페브르는 인스부르크에서 물러나 북쪽의 잘츠부르크(Salzburg)로 이동할 계획을 세웠고, 이 소식은 각지에 귀가 있던 티롤 반란군에게도 즉각 들어갔습니다.  나폴레옹이 패배하고 바이에른군이 꽁무니를 빼려한다는 소식은 티롤 반란군의 기세를 확 살려주었습니다.  약 1만3천명 이상으로 늘어난 반란군은 호퍼의 지휘 하에 5월 29일, 인스부르크 남쪽 요충지인 베르기젤(Bergisel, 이젤 산이라는 뜻)에서 약 5천의 바이에른군을 공격했습니다.  바이에른군은 잘 싸웠으나 어차피 궁국적인 목표는 북쪽으로의 후퇴였고, 또 탄약도 거의 다 떨어진 마당인지라, 미련을 가지지 않고 후퇴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양측의 사상자는 각각 200여명 정도로서, 확실히 정규군끼리의 전투에 비하면 양측 모두 사상자가 많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베르기젤 인근 스테르칭 Sterzing에서 벌어진 전투 모습입니다.  물론 당하는 쪽이 바이에른군입니다.)



이렇게 제7 군단이 물러나자, 호퍼와 그의 반란군은 5월 30일 인스부르크에 다시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인스부르크는 승리와 자유를 축하하는 축제 분위기로 달아올랐고, 반란군의 지휘자 호퍼는 민족적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이런 열기가 채 식지 않은 상태이던 6월 9일, 개선 장군 호퍼는 갑작스레 고향인 산트호프의 여관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호퍼는 그냥 정의, 아니 정의라고 믿었던 카톨릭 교회와 합스부르크 왕가를 위해 들고 일어난 일개 촌사람에 불과했으니, 이제 정의가 회복된 시점에서는 다시 촌사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순리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니고 프랑스-바이에른군이 완전히 물러간 것도 아닌 시점에 호퍼가 귀향을 택한 것에는 찜찜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티롤 반란의 기획자이자 정신적 지주라고 자처하던 임시 정부의 수장 호마이어가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호퍼의 인기를 질투하고 견제했던 것입니다.  호마이어로서는 배운 것도 없고 매너도 상스러운 시골 여관 주인장인 호퍼가 귀족이자 엘리트 지식인인 자신을 밀어내고 티롤의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르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시골뜨기 호퍼로서는 귀하신 나으리인 호마이어의 견제가 몹시 당혹스럽고 또 불편했습니다.  게다가 오스트리아에서 재빠르게 파견나온 관리는 역시 가재는 게 편이라고 호마이어를 중심으로 임시 정부를 조직했습니다.  그들이 만들어 나가는 조직에는 호퍼를 위한 자리는 없었습니다.  호퍼는 대단한 야심가는 아니었고, 그저 정의감에 뛰쳐 나온 촌뜨기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아직 인스부르크를 점령하기 직전이던 5월 29일,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가 '어떤 경우에라도 티롤을 프랑스-바이에른 측에 넘겨주는 조약에는 서명하지 않겠다'라고 약속하는 편지를 보내온 바도 있었으므로, 조국 티롤의 안전은 그가 없어도 보장되는 듯 했습니다.  그는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호퍼의 고향 생활은 한달 정도 밖에 지속되지 못 했습니다.  절치부심한 나폴레옹이 병력을 끌어모아 7월 6일 바그람(Wagram)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박살을 낸 것입니다.  티롤에 대한 프란츠 1세의 약속은 정말 가벼운 것이었는지, 이어서 7월 11일에 양측간에 맺어진 츠나임(Znaim) 휴전 협정에서, 티롤은 다시 바이에른의 영토가 되어 버렸습니다.  7월 21일에는 티롤의 임시 정부도 빈으로부터 '이리 되었으니 그리 알라'는 무척이나 무책임한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무려 3만의 병력을 티롤로 파견하여, 반란군의 잔당을 소탕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2만의 바이에른-작센 병력이 다시 르페브르의 지휘 하에 북쪽에서 내려왔고, 남쪽에서는 외젠이 파견한 이탈리아 왕국군 1만이 밀고 올라왔습니다.  르페브르에게 주어진 나폴레옹의 지시는 간단했습니다.  


"인스부르크 점령은 8월 1일 이전에 마치도록 하라.  주민들의 항의를 용납하지 말라.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  티롤 전체를 무장 해제시켜라.  많은 수의 인질을 확보하라.  그리고 본보기를 보여줘라." 


르페브르는 아무 저항을 받지 않고 8월 1일 이전에 인스부르크를 포함한 티롤의 북부 도시들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호마이어와 그의 임시 정부는 또다시 저항을 포기하고 도주했거든요.  르페브르는 반란군의 지도자들을 색출과 무기의 자진 반납을 요구하며 남쪽으로 점령 작전을 계속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인스부르크 남쪽의 요충지 베르기젤에서 르페브르는 티롤 반란군의 저항에 부딪히게 됩니다.  티롤의 위기를 접한 호퍼가 다시 한번 저항의 깃발을 올렸고, 그에 호응하여 1만이 넘는 반란군이 모여든 것입니다.   먼저, 프랑스 루에(Rouyer) 장군의 지휘 하에 남쪽으로 내려가던 바이에른-작센군 약 3600명이 베르기젤 인근에서 반란군의 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특히 그 중 작센군은 1천의 희생자를 내며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냈습니다.  이 지역은 지금도 작센클레머(Sachsenklemme, 작센 죔쇠)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1천명에 가까운 작센인들이 희생된 프란첸스페스터 Franzensfeste에 있는 작센클레머 Sachsenklemme 입니다. 영어로는 Saxon Trap 즉 '작센 함정'으로 번역되는 이름인데, 독일어 사전을 보니 Klemme는 죔쇠, 바이스, 집게 등의 뜻이더군요.)



그 소식을 듣고 증원군을 데리고 달려온 르페브르도 산악 지대에서 게릴라 전술을 벌이는 티롤 반란군에 대해서는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8월 13일~14일 벌어진 제3차 베르기젤 전투에서, 르페브르의 본대 7천도 긴 시간 동안 산골짜기에서 티롤 반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녹아내리다 결국 후퇴를 해야 했습니다.  인스부르크로 돌아오는 길 내내 그 뒤를 집요하게 추격하는 티롤 저격병들에게 많은 병력이 사살되어, 급기야 르페브르 본인도 화려한 장군복을 벗어던지고 평범한 용기병의 제복으로 갈아입는 굴욕을 겪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이제는 2만에 가까운 병력으로 불어난 티롤 반란군에게 혼쭐이 난 르페브르는 인스부르크도 포기하고 8월 18일 티롤에서 완전히 철수해야 했습니다.  


그 뒤를 따라 인스부르크를 점령한 호퍼는 전과는 달리, 8월 15일 자기 자신이 오스트리아 황제 대신 티롤을 통치하는 섭정(regent)임을 선언했습니다.  아마도 지난 번처럼 귀족 및 지식인 나부랭이들에게 나라를 맡겨 놓으면 또 다 말아 먹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야심차게 티롤 통치를 시작하여 새로운 법령과 세제도 발표하고 새로운 화폐까지도 주조했습니다.  게다가 2명의 사절을 영국으로 파견하여 반-프랑스 투쟁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나름대로 굉장히 야심찬 계획이었고, 이 모든 것은 휘하에 그를 따르는 지식인 동료들의 도움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인스부르크의 호프부르크 Hofburg 궁전에서 섭정 업무를 보고 있는 호퍼의 모습입니다.  여관집 주인치고는 엄청난 출세이지요.)



그러나 이런 통치는 불과 2달을 지탱하지 못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인스부르크 등 도시의 기존 관료들이 호퍼의 통치에 순순히 협조하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호퍼는 그저 총 잘 쏘고 산 잘 타는 난세의 촌뜨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아마 실제로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촌뜨기에게 '섭정 각하'라는 존칭을 쓰며 굽신거릴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호퍼가 처음 섭정 노릇을 직접 하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는 그런 지식인 계층 관료들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통치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프랑스-바이에른으로부터 나라를 지키자면 당장 병력을 유지해야 했는데, 이들도 땅을 파먹고 살 수는 없으므로 무기와 탄약, 그리고 급여를 지급해야 했습니다.  그러자면 돈이 필요했는데, 세금을 걷으려면 그런 관료들과 부자들의 도움이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순식간에 재무부 금고는 텅 비어버렸고, 사회 통치 기반이 흔들리니 불안한 정세와 맞물려 상거래도 실종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따라 모였던 반란군 병력들도 차츰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당장 급여도 보급도 못 받으니 버티고 싶어도 버틸 방법이 없었고, 또 당장 가족이 굶지 않으려면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고 양을 쳐야 했던 것입니다.  척박한 산골 마을에서 양떼들이 죽어버리거나 곡물 농사를 망쳐버리면 참혹한 기근이 찾아 들었으므로, 어떻게 보면 그런 생업이 전쟁보다 더 긴급한 문제였습니다.






(인스부르크에 있는 호프부르크 Hofburg 궁전입니다.)




호퍼의 통치가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와중에, 호퍼가 하늘처럼 떠받드는 빈에서는 두가지 소식이 연달아 내려왔습니다.  먼저 9월 29일, 호퍼에 대한 훈장과 함께 날아온 프란츠 1세의 격려사는 '절대로 티롤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미 전에 한 같은 내용의 약속을 츠나임 휴전 협정에서 아무 미련없이 저버린 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해명이 없었습니다.  이어서 날아온 소식은 - 아직 호퍼의 귀에까지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만 - 10월 14일의 쇤브룬(Schönbrunn) 조약이었습니다.  제5차 대불동맹전쟁을 끝내는 이 조약에서, 황제는 불과 2주전에 했던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티롤을 다시 바이에른에게 넘겨주었습니다.  프란츠 1세로서는 전쟁 배상금 8천5백만 프랑과 함께 카린티아(Carinthia)와 크로아티아(Croatia), 그리고 옛 폴란드 땅인 갈리시아(Galicia)까지 뜯기게 된 마당에, 산골 구석 동네인 티롤 따위의 처지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이후의 배상금이 4천만 프랑이었던 점과 비교하면 그때보다 훨씬 더 가혹한 조건이었던 셈이이지요.





(데를롱 백작 드루에 장군입니다.  르페브르가 교체된 이유에는 그 전의 패전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도 있습니다만, 르페브르와 바이에른 사람들 사이가 너무 안 좋았던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고 합니다.  그에 비해 드루에는 공정한 일처리로 바이에른 사람들에게 무척 좋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이어서 나폴레옹은 치욕스러운 패배의 책임을 뒤집어 쓴 르페브르 대신 드루에(Jean-Baptiste Drouet, Comte d'Erlon) 장군을 보내 티롤을 평정하도록 했습니다.  10월 21일부터 바이에른 및 이탈리아군이 남북에서 쏟아져 들어오자, 이제 병력이 흩어진 호퍼도 딱히 방법이 없었습니다.  인스부르크에서 물러나 다시 산으로 들어간 호퍼와 반란군 잔당을 기다리는 것은 다가오는 겨울의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인한 굶주림이었습니다.  1776년 미국 독립 전쟁 당시 토마스 페인(Thomas Paine)이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자면서 행한 연설 중 "The summer soldier and the sunshine patriot"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최근 개봉했던 캡틴 아메리카 2편 "Winter Soldier"의 제목도 이 연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데, 아무튼 이 '여름날의 병사와 햇빛 속의 애국자'라는 표현은 상대적으로 날씨도 좋고 먹을 것도 풍부한 계절에는 애국도 쉽지만, 추운데다 먹을 것도 부족한 겨울철에는 애국자 노릇도 어렵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호퍼를 따르던 반란군의 처지가 딱 이랬습니다.  그들의 뒤를 쫓는 바이에른군의 추격보다도, 이들에게는 산 속에서의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두고 온 가족들의 생계가 더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라는 제목과 연관된 직접적인 사건은 베트남 전쟁에서 벌어진 미군의 많은 전쟁 범죄에 대해 고발하는 내용의 국회 청문회였습니다.  이때 미군의 치부라고 할 수 있는 베트남에서의 전쟁 범죄에 대해 용기있게 증언하며 '서머 솔져 뿐만 아니라, 열악한 음지의 윈터 솔져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어서는 안된다' 라고 말한 사람이 사진 속의 미해군 중위였습니다.  보시다시피 현역 시절 훈장을 받을 정도로 용감한 장교였던 그의 이름은 존 케리이고, 미국 제68대 현직 국무부 장관입니다.  미국이 위대한 이유는 자신의 범죄에 대해서도 입다물지 않는 용기 때문입니다.  우리 옆의 섬나라와는 크게 비교되는 부분입니다.  우리나라는 그런 섬나라를 닮아서는 안될텐데요.)



이렇게 어려운 처지의 호퍼 일당에게 결정타로 들이 닥친 것은 10월 28일 경에야 뒤늦게 날아든 쇤브룬 조약의 소식이었습니다.  하늘처럼 받들던 프란츠 1세가, 그것도 불과 2주전에 '절대 티롤을 버리지 않겠다'라고 두 번이나 약속했던 황제가, 편지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티롤을 또다시 저버렸다는 소식은 호퍼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는 단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아는 것은 오직 '주님과 황제 폐하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낭만적인 신념 뿐이었는데, 대체 무엇을 위해 이 고생을 하며 동료들의 피를 흘려야 했던 것인가 라는 회의감이 몰아 닥쳤습니다.  그리고 그 회의감은 호퍼를 술에 의지하는, 진짜 볼품 없는 촌뜨기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호퍼가 이 모양이었으니, 남은 반란군 잔당도 봄철의 시커면 눈덩어리들이 녹아 없어지듯 사라져 버렸습니다.  호퍼도 반란자들에 대해 사면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미련을 버리고 11월 8일 무기를 내려 놓고 고향의 여관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쌓인 울화가 남아 있었나 봅니다.  귀가한 지 불과 며칠 뒤인 11월 12일, 다시 오스트리아가 들고 일어나 프랑스군을 무찔렀다는 헛소문을 접한 호퍼는 다시 반란군을 소집하며 반란의 기치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호소에 응하는 티롤 주민들이 별로 없었고, 그는 다시 쫓기는 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도망자가 된 그는 어느 마을의 헛간에 숨어 있다 그의 목에 걸린 1500 길더(guilder)의 상금을 탐낸 주민에 의해 밀고되었습니다.   결국 다음해인 1810년 1월 28일 이탈리아군에 의해 체포된 그는 쇠사슬에 묶인 채 이탈리아의 만토바(Mantua)로 압송되었습니다.






(만토바에서 총살 당하는 호퍼입니다.)



이탈리아의 재판관들은 이 산골 사람에게 어떤 처벌을 내려야 할지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이때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 아니 하다 못해 메테르니히(Metternich)라도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그의 충정을 기억하여 '그 호퍼라는 촌뜨기에게 자비를 베푸시지요'라고 나폴레옹에게 한마디 했다면, 어쩌면 호퍼는 목숨을 건졌을 수도 있습니다.  나폴레옹도 티롤 산골짜기의 여관 주인에게는 큰 관심이 없었거든요.  그러나 그 충직하고 단순한 여관 주인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은 프란츠 1세도 메테르니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폴레옹이나 프란츠 1세나, 1809년 말에 벌어진 나폴레옹과 조세핀 황후의 이혼,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프랑스 제국의 황후가 될 오스트리아 왕녀 마리아-루이즈와의 결혼 준비에 정신이 팔려 있었거든요. 제국과 왕가의 중대사를 앞두고 아무도 그런 처지 곤란한 인물을 위해 입을 열어 분위기를 망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돌싱 나폴레옹은 능력남이라 오스트리아 왕가의 처녀 공주님과 금방 재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그에 대한 보고를 받은 나폴레옹이 그냥 사무적으로 '즉심에 넘긴 뒤 총살해버리게' 라는 짧은 명령을 내린 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지었습니다.  그는 짧막한 재판을 거친 뒤 2월 20일 습기차고 추운 만토바에서 총살되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고 여겼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여전히 마리-루이즈와 나폴레옹의 결혼 준비에 바빴고, 아무도 그의 죽음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8일 뒤, 티롤은 남북으로 쪼개져 북부는 바이에른 땅으로 통합되었고, 남부는 오스트리아에게 빼앗은 크로아티아 영토에 새로 만들어진 프랑스의 위성국가 일리리아 자치국(Provinces Illyriennes)에 편입되었습니다.  또한 프랑스의 징집령이 티롤에도 적용되어, 1812년 러시아 원정길에는 티롤에서 차출된 병사들도 동행해야 했습니다.





(당시 주요 전장이었던 베르기젤에 세워진 호퍼의 동상입니다.  그는 본받아야 할 열혈 애국자였을까요 ?  아니면 지배계급의 주입식 교육에 의해 세뇌되어 실컷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 불쌍한 희생자였을까요 ?  판단은 여러분이 각자가 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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