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에서는 나폴레옹의 제2차 빈 점령과, 티롤 민중의 반-프랑스 봉기까지를 보셨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잠시 뭔가 빠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바로 나폴레옹과 함께 이번 제5차 대불동맹전쟁의 주연을 맡은 카알 대공이지요.  란츠후트 일대에서 나폴레옹이 보여준 눈부신 기동전 때문에 보헤미아로 쫓겨 달아난 이후, 카알 대공은 대체 뭘 하고 있었을까요 ?  그리고 왜 나폴레옹은 카알 대공의 뒤를 쫓지 않고 빈을 점령한 것일까요 ?


나폴레옹도 처음에 카알 대공의 뒤를 쫓을 것인가 빈을 점령할 것이가를 두고 잠깐 고심했습니다.  원래대로의 스타일로 나갔다면 나폴레옹은 카알 대공의 주력부대의 뒤를 쫓았을 것입니다.  그의 전략의 핵심은 적의 요충지 점령이 아닌, 적의 주력 부대를 격멸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나 4월 23일의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영어로는 라티스본 Ratisbon) 전투 이후 프랑스군의 탈진으로 인해, 즉각적인 추격을 포기한 이후에는 두가지 이유 때문에 결국 빈 점령 쪽을 택하게 됩니다.


첫째, 항상 그렇지만 보급이 문제였습니다.  현지 조달을 기본으로 하는 프랑스군의 특성상, 지속적인 작전 수행을 위해서는 적의 큼지막한 보급 창고 점령이 필수였는데 그 중 가장 큼직한 무기고와 식량 창고, 그리고 탐욕스러운 장교들과 병사들의 약탈 욕구를 채워줄 재물들이 간직된 곳이 바로 빈이었습니다.  요즘 기준으로 본다면 적에게 넘어갈 물자를 최소화하기 위해 합스부르크 왕가가 철수하기 전에 빈의 식량과 무기, 각종 재화를 모두 파괴하거나 반출시키는 것이 상식이겠지요.  그러나 합스부르크 왕가는 자국, 그것도 수도의 시민들 상당수를 아사시킬 수 있는 그런 조치를 취할 정도로 악랄한 정권은 아니었고, 또 기차도 없던 당시의 수송력으로는 주민들과 그들이 가진 식량을 소개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다만, 바로 다음 해인 1810년 영국군의 웰링턴 공작은 포르투갈 북부에서 마세나가 이끄는 프랑스군의 침공에 맞서 그런 초토화 작전을 실제로 수행했습니다.  이는 포르투갈이 영국 땅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전략으로 인해 포르투갈 민간인 5만명이 그 해 겨울 아사했는데, 이는 당시 포르투갈 인구의 2%에 해당하는 엄청난 희생이었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거주하는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를 한꺼번에 비우는 것은 기술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한가지 다행인 점은, 합스부르크 왕가는 빈에 돌아온 뒤에도 프랑스군 점령 하에서도 '난 나폴레옹이 싫어요'를 외치고 장렬히 죽지 않은 수많은 빈 시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처벌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왕가가 빈 시민을 버린 것이지, 빈 시민들이 왕가를 버린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둘째, 무엇보다 나폴레옹은 휴전과 화친을 원했습니다.  보헤미아의 깊은 숲 속으로 탈출한 카알 대공의 주력부대는 적어도 6만에 달하는 대군이었습니다.  이들에 덧붙여 각지에서 증원될 오스트리아군을 합하면 적어도 10만이 넘는 오스트리아 야전군과 대결해야 했는데, 그런 대전투는 승패를 떠나 무의미한 유혈 참극에 불과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심지어 그의 친우인 란조차도 '보나파르트의 야심 때문에 프랑스 젊은이들이 개죽음을 당한다'라고 비난했고 또 그것이 사실이긴 했습니다만, 나폴레옹도 피에 굶주린 미친 놈은 아니었습니다.  그도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보헤미아의 울창한 숲 속에서의 위험천만한 전투를 하기보다는, 적절한 선에서 오스트리아가 굴복하고 화평을 청하기를 원했습니다.  


단, 그 화평의 댓가는 반드시 두둑한 전쟁 배상금을 포함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아무리 프랑스가 풍요로운 대국이라고 하더라도, 국민들을 달래기 위해서는 세금을 과중히 걷을 수 없었고, 결국 그러자면 전쟁 비용은 반드시 적국이 치르도록 해야 했습니다.  특히 바로 직전까지 반쯤 치르다 돌아온 스페인 전쟁 때문에라도 더욱 그랬습니다.  생각해보시면 아시겠습니다만,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돌아올 때마다 항상 언제나 두둑한 전쟁 배상금을 챙겨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돌아올 때는 빈손이었습니다.  이 끈질긴 스페인 민중의 저항은 굴복이라는 것을 몰랐고, 굴복하지 않은 적에게서는 받아낼 배상금이 없었던 것이지요.  덕분에 나폴레옹은 1809년 당시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빈을 점령하면 오스트리아에게 좀더 강하게 협상을 압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780년 주조된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사 탈러 Thaler 은화입니다.  eBay의 사진인데... 약 23달러 밖에 안 하는 것이... 보존 상태에 비해 가격이 너무 싸네요.  아마 복제품일까요 ?

나폴레옹이 뜯어간 전쟁 배상금은 두고두고 독일, 특히 프로이센에게 깊은 원한으로 남아 있었나 봅니다.  1871년 보불 전쟁에서 완패한 프랑스에게, 프로이센은 무려 50억 프랑의 전쟁 배상금을 부과했습니다.  이 금액은 1807년 프로이센에게 나폴레옹이 부과한 전쟁 배상금을 당시 인구와 비례하여 책정되었다고 하는데, 프랑스는 절치부심하여 이 막대한 금액을 2년만에 갚아버려 독일을 경악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빈을 점령하고나서도 합스부르크 왕가에서는 아무런 화평 사절이 오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이 이에 대해서 크게 당황했는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1805년에 빈을 점령했을 때도, 오스트리아는 굴복하지 않고 기어이 아우스테를리츠에서 혼구멍이 난 뒤에야 화평을 청한 바 있었으니까요.  다만 그때 오스트리아는 러시아군을 믿고 그렇게 버텼는데, 이번에는 의지할 대상도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에게 필요한 것은 두번째의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였고, 러시아군도 없는 전장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멸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런 상황에 있는 동안, 카알 대공은 대체 뭘 하고 있었을까요 ?  4월 23일 도나우강 북안으로 도강한 이후, 카알 대공 및 그의 주력 부대는 도나우 강 좌안, 즉 북쪽에서 사실상 뚜렷한 목표도 없이 어슬렁거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폴레옹이 자신들의 뒤를 쫓지 않고, 도나우강 우안에 아직 남아 있는 힐러(Hiller) 장군의 부대를 추격하며 빈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카알 대공은 그 추격을 방해하거나 요격할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카알 대공은 원래부터 이번 전쟁에 그렇게 적극적인 편은 아니었습니다.  영국 외에는 동맹국도 없는 상황에서 나폴레옹을 이길 승산이 그다지 많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고, 실제로도 많지 않았습니다.  다만 애써 편성한 9개의 정규 군단과 2개의 예비 군단을 재정난 때문에 해산할 지경에 이르렀고, 또 스페인 전쟁과 티롤에서의 반란 움직임 등으로 인해, 놓지기 너무 아까운 기회가 되자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전쟁에 찬성한 것이었지요.  이렇게 혹시나 하고 시작한 전쟁이 4월 19일~23일의 란츠후트 기동전에 의해 초전박살이 나자, 유리 멘탈로 악명 높은 그는 대단히 큰 실망과 체념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바랬던 것은 '어차피 이제 이길 가능성도 거의 없는데 이쯤에서 적당한 조건으로 화평을 청하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4년전에 했던 것처럼 구차하게 바리바리 피난짐을 꾸려 머리에 이고 피난길에 나선 합스부르크 왕가는 의외로 결연한 항전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카알 대공 휘하에 야전군이 남아 있는 한, 나폴레옹에게 굴복하는 일은 없다며 수백년간 중부 유럽의 패자 노릇을 한 관록의 기개를 보여주었지요.


합스부르크 왕가의 이런 의지를 접하게 된 카알 대공은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그가 보여준 전략은 나름 괜찮았습니다.  위위구조(圍魏救趙)라고, 중국 전국시대 손빈이 위나라의 공격을 당하는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조나라가 아닌 위나라에 쳐들어간 것과 유사한 전략이었습니다.  즉, 빈의 탈환을 위해 빈을 공격하는 것은 하책이었고,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빈에서 스스로 물러나올 수 밖에 없도록 그의 약점을 건드리자는 것이었지요.  카알 대공은 그 약점으로 도나우 강변의 주요 도시인 린츠(Linz)를 선택했습니다.





(린츠는 도나우 강 남단의 도시인데, 나폴레옹 당시에도 이미 북안까지 확장된 상태였습니다.  북안 지역은 우르파 Urfahr 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현대 오스트리아 지도입니다.  도나우 강변의 린츠와 빈의 위치를 보십시요.)



프랑스군은 저 머나먼 라인강변의 스트라스부르(Strasbourg)까지는 아니더라도, 동맹국인 바이에른 접경에서부터도 꽤 깊숙히 진격해온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현지 조달을 기본으로 하는 프랑스군이라도 보급 및 연락선이 길게 늘어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지도를 보면 쉽게 보이듯이, 린츠는 빈과 바이에른 중간 지점에 위한 교통의 요지로서, 이 곳의 교두보를 오스트리아군이 장악한다면 빈의 나폴레옹은 후방을 끊기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도 그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린츠에 방담(Vandamme) 장군의 제8 군단을 보내 점령해 놓고 있었습니다.  단, 제8 군단은 뷔르템베르크(Wurttemberg) 군으로 이루어진 비교적 작은 규모인 1만명을 좀 넘는 정도로서, 군단이라기보다는 사실 1개 보병 사단에 기병 사단 1개를 붙여놓은 2진급 군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작은 군단으로도 5월 4일, 이곳을 지키던 오스트리아 리히터(Joseph von Richter) 장군의 지역방위군(Landwehr)을 격파하고 린츠의 도나우 강 남북 양안을 확보하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습니다.






(방담 장군은 프랑스 혁명 전쟁 초기때부터 민간인을 약탈하는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군인으로 악명 높았습니다.  그러나 악명과 실력은 또다른 문제라서, 아우스테를리츠에서 그가 보여준 프라첸 고지 점령전은 확실히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는 워털루 전투에서도, 엉뚱한 곳으로 향하던 그루시 장군에게 '빨리 나폴레옹과 합류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루시가 방담의 말을 들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까요?)



5월 7일, 카알 대공은 끝까지 항전한다는 마음을 굳히고 보헤미아의 부드바이스(Budweis, 체코어로는 České Budějovice 체스케 부데요비처)를 떠나 나폴레옹의 위협에 직면한 빈으로 향하면서, 보헤미아를 지키고 있던 콜로브라트(Kollowrat) 장군의 제3 군단에게 린츠를 점령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원래 콜로브라트의 제3 군단의 임무는 카알 대공이 아끼는 보헤미아를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의 침공 위협으로부터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도 사실 프랑스군이 아니라 작센(Saxon)군으로 이루어진 2진급 부대였습니다.  이들도 프랑스-오스트리아 두 강대국의 싸움판에 본의 아니게 끼어들어 고생이 많은 사람들이었지요.  규모도 크지 않았던 작센군은 이때 사실상 전 병력을 탈탈 털어 베르나도트의 제9 군단을 만들어 보내느라 정작 본국을 지킬 최소한의 병력조차 남지 않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텅빈 작센 본국은 또 엉뚱하게 제롬 보나파르트의 신생국 베스트팔렌 왕국군이 동원되어 작센의 수도 드레스덴을 지키는 소동을 겪어야 했습니다.  다 약소국들의 설움이었지요.






(부드바이스 Budweis의 모습입니다.  아마 이 이름을 듣고 버드와이저 Budweiser 맥주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으실텐데, 맞습니다.  그 맥주 상표명은 이 도시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1870년대에 독일에서 아돌푸스 부쉬(Adolphus Busch)라는 사람이 보헤미안 스타일의 라거 맥주를 유행시키면서 이 이름을 썼다고 합니다.)




콜로브라트의 제3 군단 약 2만은 나름 자신만만하게 린츠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너무 느렸고, 또 어이없이 분산되었습니다.  부드바이스에서 린츠까지는 약 95km, 당시 오스트리아군의 평균 행군 속도인 하루 20km로 약 5일이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들이 린츠를 면한 도나우강 북안에 나타난 것은 5월 17일, 무려 10일이 지난 뒤였습니다.  그나마 이들은 분산하여 진격한 뒤, 목적지에 동시 도착하여 집중 공격을 퍼붓는다는 콜로브라트의 그럴싸한 계획에 따라 3개 그룹으로 나뉘어 진격했습니다.  콜로브라트의 계획은 그럴싸 했으나, 이들은 베테랑 프랑스군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각각 따로 도착하여 따로 공격을 시작했고, 1만도 안되는 방담의 병력에게 차례차례 각개격파를 당했습니다.  그나마 제일 나중에 도착한 3번째 부대는 이미 상황이 엉망이 된 것을 보고 전투에 참여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헷갈릴 정도의 엉망인 작전이었습니다.  특히 이 전투가 일방적인 프랑스군의 승리로 끝난 것은 나폴레옹의 치밀한 포진 계획도 한 몫을 했습니다.  그는 베르나도트에게 작센군으로 구성된 제9 군단을 린츠의 도나우 강 바로 상류에 위치한 파사우(Passau)에 주둔하여 유사시 린츠를 지원하도록 했는데, 덕분에 콜로브라트는 방담 뿐만 아니라 베르나도트의 병력까지 상대해야 했던 것입니다.  





(지도 왼쪽 상단의 부드바이스에서 왼쪽 하단의 린츠까지의 거리와, 린츠에서 비엔나까지의 거리를 보십시요.  분명히 부드바이스-린츠 사이의 거리가 훨씬 짧은데, 콜로브라트가 아무 전투 없이 그 거리를 행군하는데 10일이 걸린 반면, 프랑스군은 린츠에서 빈까지 힐러 장군과 전투를 벌이면서도 7일 밖에 안 걸렸습니다.)



카알 대공이 손빈 흉내를 냈던 이 린츠 전투가 오스트리아군의 일방적인 패배로 끝난 것은 콜로브라트의 무능함도 원인 중 하나였지만, 크게 보면 결국 카알 대공이 나폴레옹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나폴레옹은 전장의 신이었고, 그를 야전에서 꺾는다는 것은 불가능해보였습니다.  그러나 불굴의 카알 대공은 그것을 해냅니다.  그 이야기를 이어가지 전에, 다음 편은 프랑스군 최고의 사나이, 장 란(Jean Lannes) 특집을 짧게 꾸며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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