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belstern1967

>>>제 2 차 세계대전 - 아우슈비츠의 일곱 난쟁이

작성일 작성자 nebelstern1915





디즈니 만화영화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속편이 아닙니다.

여러면에서 이 이야기는 동화보다 더 눈부시며,  악명높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무시무시한

고난을 견뎌낸,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악랄한 나치 의사로부터 유전 실험을 위한 구원(?)을

받으면서 살아남은 한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









오비츠 가족(Ovitz family)은 제 2 차 세계대전기간 중 수감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계 루마니아인 음악가 가족입니다.


루마니아 중부지방 트란실바니아의 로자블레아(Rozavlea) 마을 출신인 오비츠 가족은

지금까지 기록된 가장 작은 난쟁이 가족이었고,  18개월된 가장 어린 아기에서부터 58세

여성에 이르기까지 총 12명의 가족 구성원 중 비장애인을 제외한 7명이 아우슈비츠에 들어가

모두 살아남았습니다.



그들의 아버지 아이직 오비츠(Eizik Ovitz, 1868-1923)는 유대인 결혼식에서 손님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코미디언이었는데,  그 자신이 난쟁이였습니다. 


그는 두 번의 결혼으로 총 10명의 아이들 아버지가 되었으며,  그 중 7명은 연골 발육부전 형성이상,  즉 왜소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역사를 통틀어 난쟁이들은 서커스 쇼와 노래.춤.촌극으로 구성된 공연의 연예인이었습니다.

때문에 1930년대와 1940년대 초까지 오비츠 가족은 합주단을 설립해 루마니아와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을 여행하면서 15년 동안 노래를 부르고 연주를 하며 경력을 쌓았습니다.


키가 큰 친척의 도움을 받으면서 이루어진 오비츠 가족의 2시간짜리 쇼는 장난감처럼 보이는

바이올린과 기타,  첼로,  드럼,  아코디언으로 그날의 인기 히트곡과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오비츠 가족은 마을의 한 큰 집에서 공동생활을 했습니다.

그들 중 누구라도 결혼하면 배우자는 반드시 오비츠 가족 합주단에 합류해야 했습니다.


키가 큰 평범한 배우자들은 주로 무대 뒤에서 오비츠 합주단의 옷장과 악기를 관리하는 일을

했으며,  오비츠 합주단은 엔터테인먼트 역사에서 자신만의 쇼를 가진 유일한 난쟁이 앙상블

이었습니다.






*  나치의 우생학 포스터.




1940년 9월 나치 독일군이 트란실바니아를 점령했을 때,  오비츠 가족은 두 가지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나치 독일의 안락사 프로그램 악찌온 T4(Aktion T4)에 따라 육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같이 즉시 "살균 대상"이 되거나,  아니면 과학실험을 위한

호기심을 만족시켜줄  "실험 대상"이 되는 것뿐이었습니다.


1944년 5월에 12명의 오비츠 가족 모두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추방되었습니다.





*  1944년 4월,  아우슈비츠 죽음의 수용소로 떠날 준비를 하는 오비츠 가족.




1944년 5월 19일,  오비츠 가족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아우슈비츠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장애 (나머지 비장애인 형제와 자식은 수용소에서 죽거나

도망가다 체포되어 처형당했다)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살아남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수용소로 들어오는 열차를 바라보던 아우슈비츠 교도관이 죄수들 사이에서 기이한 모습을 한

오비츠 가족을 발견했을 때,  그는 즉시 잠자고 있던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깨웠습

니다.






*    "죽음의 천사" 라고 부르는 요제프 멩겔레.




요제프 멩겔레는 나치 수용소에서 인간 유전학을 탐구하고 있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머문 몇 명의 의사들과 함께 수용소 수감자를 대상으로 잔혹한 생체실험

추진하고 있었는데,  요제프 멩겔레는 절대적으로 최악이었으며,  인간에 대한 그의 실험은

제 2 차 세계대전의 연대기에서 가장 악몽같은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요제프 멩겔레는 독일인이 유전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길 원했습니다.

그의 광적인 호기심은 유대인과 집시,  또는 다른 종족에서 퇴행성 DNA와 그후의 생리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끊임없이 수집하는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왜소증을 이러한 지표적 특성 중 하나라고 생각했지만 쌍둥이들과 달리 난쟁이 집단은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연히 죽음의 기차 안에서 발견한 오비츠 가족은

요제프 멩겔레에겐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   1944년 4월,  루마니아에 위치한 유대인 게토지역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기 위해

    자신의 짐꾸러미를 옮기는 오비츠 가족과 독일군 병사.




유대인 난쟁이 오비츠 가족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장 유명한 애완동물(?)이 되었습니다.

요제프 멩겔레는 오비츠 가족을 위해 좋은 음식과 침구,  또 위생적인 생활조건을 마련해

주었지만,  다른 많은 수용소 수감자들과 마찬가지로 일련의 끔찍하고 굴욕적인 실험을

견뎌야 했습니다.


오비츠 가족은 요제프 멩겔레가 유전병의 징후를 발견하기 위해 거의 매일 혈액 검사, 

골수 채취,  눈을 멀게 하는 생화학 검사,  치아와 머리카락 뽑기,  귓속에 물붓기,  그리고

유리 진열장 안에서 발가벗은 채 연구원들의 강의 및 분석을 위한 모델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오비츠 가족과 그 친척 중 결혼한 여성의 자녀들에겐 상황이 악화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산부인과 의사로부터 부가적인 발달 재고조사를 받았는데,  키가 큰 부모 사이에서

조산아로 태어난 18개월 아기가 최악의 시련을 맞았습니다.


요제프 멩겔레는 18개월 아기의 귀 뒤 정맥과 손가락에서 피를 모두 뽑은 뒤 살해된 다른

두 명의 오비츠 자녀의 뼈와 함께 삶아 박물관에 전시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멩겔레가 이를

모두 촬영했지만 전쟁 후 이 필름을 찿지 못했으며,  아마도 요제프 멩겔레가 남미로 도주했을

때 가져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비츠 난쟁이 가족은 요제프 맹겔레가 실험을 마친 후에 살해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194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소련의 붉은군대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살아남았습니다.

붉은군대는 그들을 석방할 때까지 얼마동안 소련에 위치한 난민촌에서 살게했습니다.


결국 살아남은 7명의 오비츠 가족은 7개월 동안 걸어서 고향으로 갔지만 공동생활을 했던

그들의 집은 이미 약탈당해 거주지를 벨기에로 옮겼습니다.



1949년 5월 이스라엘로 이민간 오비츠 가족은 항구도시 하이파(Haifa)에 정착한 다음 다시

성공적인 해외 연주여행을 시작했으며,  대형 콘서트 홀의 인기 연예인이 되었습니다.

1955년에 은퇴한 오비츠 가족은 구입한 영화관을 운영하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가족의 마지막 생존자 펄라 오비츠(Perla Ovitz)는 200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펄라 오비츠는 가족의 이야기를 말하면서 자신이 겪었던,  세상에 설명할 수 없는 경험의

     모든 무력감과 고통스런 부조리를 한 문장으로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  나는 악마의 은혜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 "





2013년 3월,  영국의 왜소증 영화배우 워윅 데이비스(Warwick Davis)가 TV 시리즈

"아우슈비츠의 일곱 난쟁이" 에피소드를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1999년에 인터뷰한

펄라 오비츠를 포함하여 오비츠 가문의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 2016.  6.  17.  02:00 >

12월 2주 이 블로그 인기글



맨위로
통합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