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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그라나다 7] 그라나다 대성당 (Granada Cathedral of Incarnation)

작성일 작성자 Helen of Troy
 
 그라나다 대성당 중십부에 위치한 제대(Capila Mayor)..

 

우선 그라나다의 역사를 살펴보면, 1500-2000 BC년에 작은

이베리아 부족들의 마을로 시작해서

1000년 BC 경에는 페니카이인들이 이곳을 그들의  무역 활동을 위해서

식민지로 삼아정착해서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후로 북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인들이 이 지방을 점령하면서

페니키아인들을 몰아내고 550 BC 경부터 이지방이

상권을 거머쥐게 된다.

 

약 300년 후에는 로마제국이 전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하면서

Elybirge라고 불리우던 이 도시를  이베리스(Iberis)로 명명하게 되지만

로마제국 시대에는 별반 빛을 보지 못한데다가

5세기경에 쇠퇴하기 시작한 로마제국이

결국에는 비지고트(Visigoths)족들에게

밀려나서 그라나다도 비지고트족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다.

비지고트족들이 이 도시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인구수도 늘어가고,

크리스찬들의 숫자도 늘어가면서

중요한 군사적인 도시로 성장을 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유태인들도 이주하기 시작해서 무리를 지어서

살기 시작했는데이들은 이 도시를 가르나타 알-야후트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오늘날의 이도시의 이름의 유래라고 보고 있는 점이 재미나기도 하다.

 

오래된 그라나다 시내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는 대성당의 모습

높은 타워와 중간의 도움이 보인다.

 

711년에 무어족의 왕인 타리크(Tariq)가 이끄는 군대들이 이곳을 침공하기 시작한 후에 ,

713년에 이곳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약 200년간 그라나다를 지배하던 비지고트 시대의 막을 내리고,

이슬람 문화권으로 접어들게 된다.

아랍계 사람들인 무어족들은 그라나다를 일비라(Ilbira)라고 명명한 후에

300년간 지속적으로 확장과 발전을 했다.

1013년에는 지리스 왕조가 이곳을 통치하면 그동안 모로코의 지배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이 도시의 이름을 그르나타(Grnata)라고 정하고

높은 언덕에 위치해서 적군의 침략에서 보호하기 쉬운 

현재의 알바이신(Albaicin) 으로 옮긴 후 약 200년간 이 고장을 지배했다.

 

 

알론소 카노씨가 디자인한 성당 정문의 모습

 

 

1238년부터 나자리(Nazari) 왕조가 그라나다 지방뿐만 아니라

말라가, 알마리아, 코르도바, 세비야, 카디즈 지역을 포함한

현재의 안달루시아 지역의 새로운 권력자로 군림하게 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알함브라 궁전과 견고한 성벽과 헤네라리페 정원도

나자리 왕조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한시대를 풍미했던 찬란한 나자리 왕조의 전성시대의 유산으로서

여전히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13세기부터 스페인인들의 파워가 강해지면서

결국에 당시의 스페인의 왕인 페르난도 3세의 신하가 되겠다는 조약을 체결한 덕분에

스페인의 대부분이 스페인들의 통치하로 하나씩 넘어갔지만  

나자리 왕조는 한동안 그들의 권력을 지킬 수 있었지만

결굴 1492년 1월 2일에 페르난도와 이자벨 여왕에 무릎을 꿇으면서

스페인의 마지막 이슬랑 왕조인 나자리 왕국의 최후를 맞게 된다

 

성당 안으로 들어 가기 전 성당 주위를 한바퀴를 둘러보고,
 성당 옆에서...
 
 

크리스찬인 스페인인들이 그라나다를 재탈환한 후 몇년간은 당시 주민들이었던 많은 이슬람교도인 무어인들이 남아서

그들의 종교와 풍습대로 살 수 있도록 허락를 했지만

1499년에 부임한 사트네로스 주교가 모든 무어인들은

크리스찬으로 세례를 받도록 강요를 했고, 거부를 하면 많은 세금을 징수했고,

아랍인들의 복장과 그들의 언어도 금지하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1568년에 분개한 무어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스페인들에게 결국 패배를 당하고 그라나다에서 완전히 추방 당했다.

 

유서깊은 그라나다 대학도 이 즈음에 칼로스 5세 국왕이 통치 하던 1531년에 의해서 설립이 되어서

현재까지 그라나다가 교육의 중심도시로 자리 잡을 수 있는 토대를 만들기도 했다.

 

 대성당의 여러개 대문 중 하나...Puerta del Perdon

 

그후 300년간은 그라나다는 신대륙에서 들여 오는 황금 산업으로 점차로 인구도 증가하고,

도시의 크기도 서서히 이슬람 무어인들의 스타일에서 스페인 고유의 풍으로 변모하면서 확장되어 갔다.

18세기 후반부터는 프랑스와 영국의 건축과 디자인의 영향을 받아서 새로운 도시계획도 생겨나기도 했다.

 

 성당 건물 자체가 크기에 한바퀴를 돌면서..
 

20세기에 들어서서도 그나나다를 포함한 대부분의 스페인은 경제적인 위기가 지속되었지만,

1920년대에는 그라나다는 그라나다가 낳은 대표적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ia Lorca)와

유명한 작곡가인 마뉴엘 데 파야 (Manuel de Falla) 씨를 포함한 새로운 예술적인 운동의 중심지로 부상을 하기도 한다.

1930년대에는 스페인 전역은 정지척인 불안정이 고조되면서, 1936-1939년에는 스페인 내란으로 번지게 되었다.

이 내란으로 독재자 프랑코 총통이 1975년 그가 죽기까지 거의 40년간을 스페인을 완정 장악했다.

 

 

19세기에 들어 오면서 커다란 변화를 겪지않았던 그라나다도

1810년에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점령하면서, 그라나다도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그라나다에 나폴레옹의 점령기간은 불과 2년간이었지만 정치적인 혼란을 가져다 주었고,

그 여파로 스페인 왕국에 대항하는 제1차 혁명의 중심지로 부상해서 이 도시에서

급기야는 혁명가의 주동자의 한사람인 마리아나 페네다(Mariana Pineda)가 처형당하기도 했다.

19세기 후반부도 스페인의 왕조에 항거하는 스페인공화국 옹호세력의 중심지로 인식이 되면서

경제적으로도 큰 타격이 많았는데

엎친데 덮친격으로 1884년에는 대지진, 그리고 1885년에는 콜레라의 극성으로 위기가 가중되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독재자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그라나다는 대학열풍이 찾아온다.

그때까지 대학은 사회의 지도층과 상류층들만의 대학에서 그라나다의 일반시민들에게도 대학의 문을 열게 되면서

대학의 르네상스를 불러 왔다.

21세기의 그라나다는 알함브라 궁전과 오랜 전통 덕분에 유명한 관광지로 인지도도 높아지고,

국제적인 음악과 댄스 페스티발을 비롯해서 중요한 국제적인 예술행사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고 있기도 하다.

 

 

 

 

그라나다 대성당

 

그라나다 대성당은 캐톨릭 스페인들이 모슬렘교도들인 무어족의 세력들을 물리치고
그라나다를 재탈환한 직후에  이사벨라 여왕의 어명으로 지어진 대성당이다.
이 대성당은 스페인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대성당 공사는 1523년에  원래 무어인들의 이슬람 회당 자리에 첫 주춧돌을 깔면서 시작되었고,

당시 잘 알려진 고딕양식의 대 건축가인 엔리케 에가스(Enrique Egas)씨가 디자인과 설계를 맡아서

고딕식 교회의 기초공사만 5년이 걸렸다.

 

기초공사가 마무리 될 즈음인 1528년에 에가스에 이어서 이탈리에서 건축가로 활약하던

디에고 데 실로에(Diego Siloe)씨로 교체되면서

원래 계획된 고딕식 교회건축 양식에서 그가 원하던 르네상스 양식으로 변경해서 짓기로

국왕에게 허락을 받은 후에 공사가 계속 진행을 해서

1563년 그가 타계할 때까지 이 공사에 임했다.

 

그라나다 대성당은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르네상스 스타일로 지어진 교회이며,

115미터 길이에 67 미터의 넓이로 엄청나게 큰 규모를 자랑한다.

아울러 대성당과 함께 계획된 두개의 타워의 높이 역시 57미터에 달하는데

두개 중 첫번째 타워는 완공을 보았지만,

두번째 타워는 원래 계획대로 지어진 고딕식 기초공사가

타워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서

오랫동안 완공을 보지 못하다가,

첫 주춧돌을 놓은지 181년이 지난 1704년에 드디어 완공이 되었다.

 

성당 내부는 흰색상의 대리석, 사암, 그리고 화강암이 이용되었고,

화려한 황금빛이 가미되었고,

충분한 자연빛으로 성당 내부가 환한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성당은 5개의 메인 중앙복도(naves)로 이루어졌고,

맨 중앙nave 양편에는 거대하고 화려한 바로크 오르간이 설치되었다.

 

대성당은 멋지고 웅장한 교회 입구와 정면을 자랑하고,

성당내부는 르네상스 스타일 교회답게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주고,

181년간 오랜 시간에 걸쳐서 만들어졌기에 다양한 스타일로 지어진 소성당(chapel)들이 들어 서 있다.

그중에서도 Nuestra Senora de la Antigua (안티구아의 성모님 차펠)이 유명하다.

아울러 성당과 별도의 입구를 통해서 있는로얄 차펠내에는

이자벨라 여왕과 페르디난도 국왕을 비롯해서

그들의 딸인 후아나와 사위 필립(Philip the Handsome)이 묻혀있다.

 

 

 


 

1. Catedral
2. Capilla Real
3. Iglesia Parroquial del Sagrario
4. Sacristía

 

 

성당 안에 발을 옮기자 이렇게 숨막히게 아름다운 제대와

커다란 두개의바로크 오르간부터 눈에 들어 왔다.

천장 높이가 67미터의 위용이 엿보인다.


 흰색 대리석과 사암, 그리고 화강암을 소재로 해서
성당 안이 무척 환하고 정결한 느낌을 준다.


많은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햇빛이 있어서 인위적인 도움없이 성당 내부가 무척 밝아서

성스럽기도 하지만 무겁지는 않다.



 

눈에 익은 옷과 가방을 매고 있는 남편도 넋을 잃고 찬찬히 성당 구석구석을 구경하고...

 메인 도움의 크기는 45 미터 높이에 22미터의 직경에 달한다.


 

 

sacristy(감실)도 보이고..



 

성당의 중심부인 제대 오른편에 독서자들이 독서를 읽은 곳이 가운데에...



 
제대 위의 둥근 도움 천정과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
대성당의 중심부이자 제단이 들어선 메인 차펠(capila mayor)에 제일 윗부분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건축가인 디에고 데 실로에가 직접 디자인을 했고
얀 캠픈(Jan Campen)씨가 제작과 그림을 그렸다.

그 아래 부분의 14개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1550년에 지금의 네덜란드 지방인 플란다스(Flanders) 지방에서

Flamish 스타일로 데오도르 데 올란다(Theodor de Holanda)씨가 제작한 작품들이다.



 
 화려하기도 하지만 절로 기도가 입에서 흘러 나오게 하는 제대 주위에서 나도 한동안 조용히 묵상도 하고 기도를 올렸다.
14개의 스테인드 글라스 아래에는 알로소 카노(Alonso Cano)가
성모마리아의 삶을 그린 작품들이 걸려 있다.
이 대성당 안에는 카노씨 외에도
호세 리수에뇨(Jose Risueño), 페드로 아타나시오(Pedro Atanasio)
후안 데 세비야(Juan de Sevilla)의 작품들도 소장되어 있다.


기교적이고 화려한 르네상스 풍이 물씬 풍긴다.



 

커라단 창문에서 흘러 들어 오는 환한 빛이 마치 천상의 희망과 기쁨을 상징하는 듯 하다.

 



Gothic Entrance to Royal Chapel (capilla real portal)
로얄 차펠로 통하는 대문
로얄 차플이 완공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 왕들을 가까운 알함브라의 성 프란치스코 수녀원에 모셔두었다가
칼로스 5세 왕이 새로 막 완공된 이 차플에 그의 조부모인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도왕을
이곳에 옮겨와서 정식으로 묻었다.
칼로스 5세는 그 외에도 사위 필립, 딸 후아나,
자신의 아내 엘리사베스와 자녀들과
포르투칼의 필립 왕자에게 시집간 딸 마리아 공주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왕족을 이곳에 묻혔다.


 
 




 
 
 
성당 양족 벽에는 십여개의 차플(소성당)들이 들어 서 있는데
각 채플마다 다른 성인을 기리는 여러 유물과 조각품들로 꾸며져 있다.



 


 
 


 



 






 
 


 


 

 



 

대성당 남쪽에 위치한 이 소성당은 산티아고의 동상이 있다.

이 동상은 조각가인 말론소 데 메나(Alonso de Mena)가

산티아고가 백마를 타고 무어족을 물리치는 모습을 그린 조각품이다.



 
Nuestra Señora de la Antigua (Chapel of the Virgin of the Antigua)
대성당내에서 제일 잘 알려진 안티구아의 성모님 채플 모습...


15세기에 전체를 금으로 도금을 한 50 cm 높이의 성모님상은 캐톨릭 국왕들이 이리로 모셔왔으며

La Inmaculada(원죄없는 잉태의 성모님) 은 조각가 알론소 카노의 작품이기도 하다.



 

 


 

 





 




 
가운데의 채플이, 오르편에는 파이프 오르갠 사이에
소박하고 간소한 벤치가 놓여져 있다.
이곳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 중에 생각보다 교인들이 많았는데
많은 방문객에 비해서 아주 조용하고 경건한 분위기속에서
자유롭게 구경도 하고,
조용히 앉아서 묵상도 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기도를 하는 모습이 보기가 좋았다.


성당 양쪽 넓은 복도에 화려한 채플 사이에는

이렇게하나 하나 독특한 고백소가 눈에 띈다.


 
 안에 신부님이 계신다면 들어가서 내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어진다.
과거 500년동안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저 곳을 지나쳤을까...


 
 
 
 
아름다운 기둥들이 거대한 성당의 무게를 지탱해 준다.

 
 








 

바르셀로나에서 본 가우디가 디자인하고
현재가지 공사가 계속 중인 성가족 성당의 기둥을 연상시키는 높은 기둥들과
자연적이 빛이 그득한 성당내부...

 
 
 
 


 

르네상스 대성당에 빠질수 없는 화려하고 거대한 파이프 오르갠의 위용...



두개의 파이프 오르간 중에 조금 작은 오르갠이다.


 
 위의 오르간 반대편에 있는 좀 더 크고 화려한 파이프 오르갠
 


성당 중간 복도 양쪽에 이렇게 바로크 스타일의 파이프 오르갠이 자리잡고 있다.



 




문득 이 많은 파이프가 자아내는 천가지의 소리가 듣고 싶어진다.
 


 오르갠 소리에 맞추어서 성가대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이 아름다운 성당에서 울린다면 천상의 노래가 따로 없을 것 같다.
 

 
 이곳에 묻힌 이들의 이름이 이렇게도 보이고..


 
 
 450년 전에 돌아가신 이분처럼 성당 복도 바닥에 국왕을 비롯해서 대주교와 추기경들의
무덤이 있어서 되도록이면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 무덤 위를 피해서 다녔다.


 

 

 

 

 

르네상스 시대에 사용되는 음악 음표 표기방법들이

희귀하고 귀중한 황금으로 gild처리가 된 music manuscripts가 성당 내에 소자되어 있다.


 

 

 

이 악보에 의해서 어떤 노래소리가 흘러 나올까??

 

 

 

 

성당 오른편 통로를 통해서 발을 옮기면...

스페인이의 유명한 화가들이 그린 성화들과

국왕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방이 나온다.



 

특이하게 커다란 거울도 여러개 걸려 있다.


 

이 절호를 찬스를 잡아서 유명한 초상화들 사이에 즉석으로 내 초상화를 잠시 걸어 보았다.



 

 


 

거의 세시간을 이곳에서 머물다가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이 대성당으로 한번 더 눈도장을 찍고

성당을 나왔다.


 

 

 600년 전부터  지어졌지만 참 보관이 잘 된 성당의 외벽..

여전히 시내 한복판에 다른 건물들과 좋은 조화를 이루면서 버티고 있는 것도 참 부럽다.



 

성당 밖의 기온은 39도..

성당 옆에 있는 그늘 진 벤치 위에서 엽서를 쓰고 있는 한 관광객을 따라서

나도 성당 기념품 가게에서 산 엽서를 두장을 쓰기도...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십자가의 모습이 오래 뇌리에 남는다.

알론소 카노씨가 디자인한 대성당의 앞부분(파사드 facade)은 1667년에 지어졌으며

크리스찬 스페인이 이슬람의 무어족을 물리친 사건을 승리의 아치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성당 앞에서 인증 샷으로 찰칵~



 

정문 옆에서 타워가 보인다.



 

 

 

 


 

music: Laudate Domim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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