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김의 체험 나누기

유란시아서 - 시간과 영원 중에서 (펌글 - 장시영 선생)

작성일 작성자 Peterkim

시간과 영원

한국 유란시아 포럼

발표자 장시영

 http://cafe.daum.net/mahan000/Hp8w/2


요약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번쯤 가졌을 질문 중의 하나가, 이 세상 삶이 끝나면 영원한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것이다. 종교는 영원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느님과 신에 대한 진리를 전하고 있다. 종교를 가진 사람의 하나로서, 필자도 절대자 하나님과 우리의 실제 관계, 하늘나라와 한시적 삶의 의미, 유한존재의 근원과 운명에 대한 질문은, 늘 생각 깊숙한 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에서, 질문은 허용되지도 않고 헛된 일이며, 심오한 지혜의 가르침도 인간이 창안한 빈틈없는 논리만 발견될 뿐이다. 유한한 존재의 이유와 운명에 대한 필연성은 아무도 말해 줄 수 없다.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답답함과 의문은 영원한 세상에 대한 막연한 소망과 현세적 즐거움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을 익숙하게 만들었고, 아무 운명도 제시되지 않은 채, 그렇고 그런 평범한 삶을 즐기고 적당하게 섬기는 것이 시간의 기능처럼 되어왔다. 그런 20세기 말, 새 천년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유란시아 책이 출현했다.

 

유란시아 계시는 인류의 모든 근원적 질문에 대한 답이다. 필자의 심각한 질문은 한 두 마디 문장으로 해결될 정도로, 이 계시에 담긴 진리는 방대하다. 우리의 삶은 시간과 공간에서 이루어지지만, 그 운명은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는 곳으로 나아가도록 되어 있다. 필자가 찾았던 유한성에 대한 이유와 운명을 짧은 소견으로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우리의 한시적인 세속의 삶이 그것이 기원된 절대적 차원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우리가 맞이하는 시간에는 어떤 목적이 있으며, 그 운명의 끝에서 시간은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모든 것이 한시적인 우리가, 시간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찾아내어, 그 안에서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으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시간은 더 이상 한시적 의미에 머무르지는 않을 것이고, 그 결과는 우리를 새로운 진리의 세계로 안내할 것이다.

목차

1. 서론

2. 시간에 대한 이해

(1) 과학적 실체

(2) 철학적 의미와 가치

(3) 종교적 운명

(4) 유란시아의 영원

3. 시간의 본질

(1) 시간의 활용

(2) 시간의 속성과 기능

4. 시간의 의미와 가치

(1) 시간의 의미

(2) 과거-현재-미래의 의미

(3) 현재의 가치

5. 시간의 운명

(1) 진화의 필연성

(2) 불완전의 향연

(3) 개인의 생존

6. 결론

 

1. 서론

 

삶은 우주 안에서 이루어지며 우주의 바탕은 시간과 공간이다. 사물과 존재가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면, 만물은 물론이고 시간, 공간 자체도 기원과 운명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유래된 차원과 무관할 수 없다. 그 관련성과 함께 시간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유한자가 유한이 아닌 것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계시를 통하여 초-유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한시적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불멸의 세상에 대한 참된 소망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유한을 이야기할 때, 보통 공간개념에서 말하는데, 공간은 그 개념을 이해하는 데는 별 어려움은 없다. 사실 무한은 "마지막 숫자에, 언제나 하나를 다시 더할 수 있다." 양적 확장성이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개념 파악이 쉽다. 그러나 시간은 좀 다르다. 기능과 의미에서 다르며, 시간의 끝을 이해하는 것이 힘들고 그 전체를 개념화하여 생각해보는 것도 남성으로서는 상대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실체를 다루는 과학이나 실존을 다루는 철학이나 초월 세계를 다루는 종교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분리해서 다루는 경우가 많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각성과 깨달음이 계속 되어 왔겠지만, 어떤 기록도 시간과 공간의 본질을 대한 것은 없어 보인다. 그 시원을 아는 자가 아닌 한, 아마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불가능한 시간에 대한 본질을, 유란시아 책은 많은 다른 이야기와 함께 전해주고 있다. 시간-공간의 기능, 의미, 기원과 같은 이야기가 인류를 위해 밝혀져 있다. 이해력의 한계 때문에, 모르는 부분이 많긴 하지만, 부분적으로 이해된 내용들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하여, 많은 독자들이 책 스스로 5번째 계시라 말하는 이 책의 내용을 서슴없이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계시는 단순히 무언가를 새로 밝히는 것만이 아니라, 어둠과 혼란에 빠진 현재와 미래의 인류에게 빛을 비추어, 영원하고 무한한 하느님과 인간이 필연적인 관계가 있음을 밝혀주고, 한편으로는 "집대성된 현대적 개념에서 새롭고 정의로운 시각을 얻어, 영원자의 본질특성들을 사랑 안에서 받아들이고 통합하고, 그로써 영원한 운명을 선택하려고 깨어나는 이 시대의 종교적 도전에 나선, 진취적인-시각의 남녀 를 도우려는 신성한 목적이 있다.

 

 

여러 계시 내용 중에서, 시간과 공간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글은 118 편이다. 신성한 우주, 창조주의 뜻, 그리고 이제 새롭게 펼쳐야 할 진리의 모든 것을 설명한 다른 글들과 함께 인간과 우주적 존재들과의 밀접한 관계를 밝혀주는 글이다. 특히 시간은, 우리가 아는 한, 모든 것이 변화되어 사라지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시간 속에서 영원의 관계와 의미를 이 책의 계시에서 찾아낼 수 없다면, 우리에게 불멸의 시간은 이름으로만 존재하거나, 스스로를 위한 막연한 꿈으로 끝날 것이다.

 

아직 정확하게 이해 못하는 부분이 많지만, 시간과 영원과의 관계에 대한 1장의 글을 중심으로, 유한한 시간과 불멸의 시간, 그리고 영원에 대한 책의 가르침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은 우리가 시간에 대해 가지는 의식이, 영원으로 향하는 실존을 가늠한다는 아래의 글에서 생각이 시작되고 있다.

 

어떤 주어진 지능체의 시간 의식의 단위와 성숙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시간 단위는 하루나 일 년 또는 더 긴 기간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반드시 그것으로 의식적 자아가 삶의 상황들을 평가하는 것에 따르고, 그리고 착상하는 지능체가 현세적 실존의 사실들을 가늠하고 평가하는 것에 따르는, 기준이다

 

이 문단은 일시적 시간과 불멸의 시간의 관계, 곧 부활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2. 시간에 대한 이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한시적이다, 물질계의 만물에는 끝과 소멸이 있다. 계시자들은 한시적 세계의 우리 인간을 필사자라 부르는데, 이는 우리가 현세와 내세, 일시와 불멸이라는 서로 다른 시간 차원을,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연결하는, 특별한 혜택을 받은 지적 생명체이기에 그렇게 호칭하는 것 같다.

 

유한한 세계에서 시간은 변화와 소멸이라는 현상을 일으키지만, 그렇다고해서 시간이 멈춘다고 영원해지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는 시간의 근원을 모르고 있으니, 그 결과인 변화와 움직임으로, 시간을 이해하고 정의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 시각에서 본다면, "시간은 동작으로 인하여 발생되며 마음은 순차성을 선천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실천적인 관점에서 움직임은 시간에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유란시아 계시처럼, 만물에는 근원이 있다는 본질적인 관점에서는움직임에 기초를 둔 우주 시간 단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 안에서 시간을 이해해야만 한다.

 

시간에 대한 일반적 시각과 근원적인 해석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자.

 

(1) 과학적 실체

 

과학에서의 시간은 물리적 실체가 대상이다. 실체의 근원과 현상을 사실로 다루기 때문에, 대개 공간적 의미로 함께 존재하는 것으로만 이해한다. 3개의 알파벳으로 문명을 바꾼 위인으로 뉴턴과 아인슈타인을 회자하는데, F=Ma,를 발견한 뉴턴은 수학적이며 진리적인 절대시간은 외부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서 일정하게 흐른다.”고 이해했고, E=mC2 를 발견한 아인슈타인은, 시간을 독립된 개념으로 설명했다. 절대성으로 여기던 개념을, 시간 팽창이나 길이 수축처럼, 상대적 개념으로 확장시켰고, 통합체인 공간의 장안에서의, 변화 관계를 탐구했다.

 

우주 근원을 연구하는 분야에서도 공간적으로 우주 신비를 탐구하고 있고, 시간의 의미는 상대적으로 소홀한 편이다. 실체의 근원을 탐구하는 양자물리학에서는 움직임 이전의 실존적 근원을 연구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시간을 중요한 요소로 다루어야 하는데, 실존 이후의 양상에서 실존 이전의 근원을 추적할 아무 단서가 없다보니, 오히려 시간 요소를 배제하려고 하고 있다. 시간의 정확한 기능을 파악할 수 없어서인지, 최근 들어 소립자 물리학에서는, 공간에 지속하는 확률 값으로 시간의 기능을 파악하고 있다. 결국 우주나 물질을 다루는 과학에서는, 시간은 해결되지 않은 채, 장애물로 남아있다.

 

(2) 철학적 의미와 가치

 

철학에서의 시간은 의미와 가치로 이해된다. 시간 자체를 탐구된 적은 거의 없다. 시간을 내면세계에서 인식하는 형태라고 정의한 철학자도 있었지만, 움직임을 바탕으로 하는 결과적 현상이었다.

 

유한한 존재의 의미를 시간 속에서 구명하려 했던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존재가 되는 마음 씀을 구성하는 구조적 특성"이라고 시간을 설명하지만, 그 또한 시간 자체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배제했을 때의, 시간의 기능적 속성을 탐구한 것으로 보인다. 궁극적으로는 시간의 기능적 가치성에 결론을 두고 있지만 본질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유란시아 책의 독자들은 하느님의 뜻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책을 좀 읽은 사람은 "하느님의 뜻이 이러하고 하느님은 사랑이니,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방향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그러한 삶에 의지를 바치려고 결심도 한다. 지속 시간이 너무 짧아서 실천이 제대로 안되기 때문에, 늘 스스로 실망하고 결심만 되풀이하고는 있지만, 그 결심이 반복되고 의지도 자주 변하는 이유가, 바로 시간이 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간 속에서 우리가 계속 변화에 직면하는 현상이, 철학이나 심리학에서의 접근이다. 어떤 시간도 어떤 상황도 정지될 수 없다. 시간 속에서 만물이 변화하기 때문에,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도 없다. 변화의 근원이자 본질은 말씀(로고스)”이라 이해했던 현자도 있고 이런 변화의 진리를 거부하며 "날아가는 화살은 날아가지 않으며, 아킬레우스는 앞서있는 거북이를 추월할 수 없다"고 역설한 연자도 있다. 철학에서도 시간이 흐르는 이유를 탐구해본 사람은 없었다.

 

예술에서 시간은 중요한 모티브이다. 기쁨과 슬픔, 행복과 고통을 표현하면서, 영원에 대한 염원을 품고, 시간은 결코 넘을 수 없는 인간의 한계로 여기면서 시간 속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고 기억과 사실과 환상을 연결하는 기능적 실체로서 시간을 실감 있게 다루기도 한다.

 

 

(3) 종교적 운명

 

종교에서의 시간은 영원불멸의 바탕이 된다. 종교에서는 영원을 실체로서 정의하면서, 시간은 일시적인 것으로 정의한다.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에서, 시간을 초월하고 초월시키는 절대자, 하느님 또는 신의 신성과 손길에 관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 고대 후기의 플로티누스와 어거스틴은 시간을 성장과 변화와 같은 움직임의 차원이 아니라, 의미적 관점에서 영원과 관계가 있다고 이해했다. 생명 존재의 근원적 현상으로 시간과 영원을 생각하면서, “영원이란 만물이 동시에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며 한 분에게서 존재하고 있다고 정의했다.

 

어떤 종교는 시간을 하느님이 준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으로, 다른 종교는 실체가 아닌 한낱 짧은 순간의 헛된 꿈이자 가설이라 여긴다. 기독교, 유대교, 회교 기타 여러 서구의 종교는 공간보다는 시간 초월이 핵심이고, 반면에 불교는 절대 공간인 공의 개념을 근간으로 시간의 변화를 성주괴겁으로 해석하고 시간은 실체가 아니라고 해석하고 있다.

 

유란시아 책에서의 시간과 영원에 대한 설명들은, 과학과 철학에서의 이해를 포옹하고, 특히 이들 원시적이고 투박한 종교적 이해와 정의에 근거를 두면서, 시간의 이야기를 계시한다. 지금까지 인류가 깨달았던 모든 깨달음의 정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새로운 계시이지만, 인류가 이룩한 깨달음의 바탕위에서 이해하고 확장되도록 배려하고 있다.

(4) 유란시아의 영원

 

유란시아 계시에서 시간의 정의는 한마디로 매우 다르다. 근원과 연관하여 영원을 소개한다. 영원을시간이 없음으로 정의하고, 한편 시간의 절대가 영원이라고 표현하면서, 하느님이 본질적으로 영원하지만, 영원 안에서 체험으로 시간에 관계된다.”는 설명으로, 시간 속에 손을 뻗고 계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음을 밝혀주고 있다.

 

유란시아 물리적 행성에 시간의 절대가 존재할 수는 없지만, 하느님이 겪으시는 체험은 우리의 시간 속에서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며, 그 체험에 의해 우리들 개인의 세계는, 영원과 관계되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시간 안에서, 개인의 체험이 신성과 만나고 신성이 개인의 정체성을 만나고, 이때의 개인성이 생각조절자의 체험으로 이어진다면, 개인의 시간은 직접적으로 영원과 관계를 맺게 되는 구조를 계시하고 있다.

 

또한 사물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를 겪고, 시간에 따라 실체의 조건이 갖추어지지만, 사물과 연관되는 진리에는 시간이 없다. 너희가 진리를 많이 알면 알수록, 너희가 더욱 더 진리일수록, 너희가 과거에 대한 것을 더욱 많이 납득 할수록, 미래에 대해 더욱 많이 이해하게 되어 시간의 단위는 새롭게 확정되어 갈 것이다. 이것이 유란시아에서 영원이라는 개념과 연관되어 이해되는 시간이다.

3. 시간의 본질

 

진리와 관련하여 과학, 철학, 예술, 종교에서 추구해 온 시간의 의미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기원과 의미에 아무 단서도 남기질 않았다.

 

유란시아 계시에 따르면,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카르타고에서 페르시아인 미트라교의 사제에게 시간과 영원에 관해, “시간이란 창조체가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이해할 수 있고,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 그러한 기능을 나타내는 하나의 이름이며, 사람이 성숙해짐에 따라서 사건이나 움직임을 이해하는 깊이가 깊어지고, 그 시야의 폭이 넓어질 수 있는 그러한 실체라고 정의하신 적이 있었지만, 이 가르침은 미트라 사제를 통하여 후대의 철학이나 기타 신학에 온전하게 전해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우주에 펼쳐진 시간은 필사자의 눈에는 사건들의 연속으로 인식되지만, 의식이 깨어날수록 전체성을 가지는 참된 실체의 하나의 현상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이것이 시간의 한계를 부분적으로 초월할 수 있는 마음의 원리임을 밝히셨다.” 또한 완전한 실체에 대한 의식이 싹트고 성장하면서 필사자는 일곱-차원의 우주에서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성취하게 된다.”는 사실도 알려 주었다.

 

(1) 시간의 활용

 

4번째 계시였던 예수님이 시간의 본질에 관한 진리를 계시하셨다면, 5번째 계시인 유란시아에서는 예수님이 남기신 시간에 대한 일곱 개의 위상을 자세하게 밝혀주면서 그 활용에 대한 진리를 계시하고 있다.

 

시간 단위에 대한 설명을 보면 파라다이스에는 시간이 없으며, 중앙우주인 파라다이스-하보나에서의 1일은 유란시아 시간으로 1,000년보다 7 3 1/8초 짧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초우주, 지역우주, 별자리, 그리고 사타니아 체계의 독자적인 시간 단위를 자세하게 소개한다.

 

유란시아를 일단 벗어나면, 첫 번째 하늘 세계인 체계부터는 불멸의 세상이다, 따라서 하루가 우리의 3일에서 1시간, 4 15초 짧다는 사타니아의 하루가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들 우주 차원간의 시간 단위들이 단순한 숫자로만 이해될 뿐, 실감은 물론, 그 특별한 의미도 알 수 없다. 우리는 확정된 표준 시간 안에서 살아가고 있어서 시간 단위가 다르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어떤 각별한 의미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필멸 차원에서의 시간과 불멸 차원의 시간 단위는 무언가 다를 것이 확실하다. “시간을 의식하는 길이가 길어질수록 직접적으로 영적 성숙을 나타낸다. 한 시간이나 하루나 일 년이나 어떤 시간이든지 의식적으로 삶의 상황들을 평가해보는 시간의 단위가 길어지거나, 현실에서 마주하는 실체와 사실을 가늠해보고 판단하는 시간적 의미가 길어질수록 실제로 살아가는 시간의 기준이 달라진다.”

 

이처럼 깨달음이나 영적 성숙에 따라서 각자 의식 안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 단위가 변한다면, 우리가 아는 시간의 의미로 불멸의 시간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문제는 다음 장인 시간의 의미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내 자신의 영적 확장을 위해 쓸 수도 있고, 참다운 삶을 실천하기 위해 활용할 수도 있다. 그리고 시대적 계시가 없어도 도덕군자로서의 완벽한 삶을 이룰 수 있다, 그 어떤 삶도 참된 삶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적으로 참될 뿐이다. 시간의 의미가 짧은 순간으로 평가되고 정의되면, 그 참됨은 한시적 세계의 일시적인 참된 삶으로 끝난다. 우주에는 완전과 불완전에 관한 실존적 모습이 일곱 위상으로 있으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 어떤 한 위상에서 더 높은 위상으로 연결될 상대적인 완전함이 없다면, 우주의 상승은 불가능하다. 일시적 참된 삶도, 불멸의 위상과 연결되는 의미와 가치가 없다면, 불멸의 시간 단위에서는 무의미 할 수 있다.

 

우리가 시간을 초월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실체들은 대부분 불변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영원한사랑’, 변치 않는우정’, 굳은충성’, 불굴의용기’, 불후의 업적’, 이러한 실체들은 개인마다 다양하겠지만 시간을 초월하는 의미와 가치에서는 같다. 다만 중심핵이 물질인지 아닌지에 따라 상대적 완전성은 다를 것이고, 한시적 초월인지 불멸과 이어지는 초월인지 가늠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랑이나 아름다움이, 한 때의 사건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안에 시간 속에서 성장할 수 있는 살아있는 에너지가 들어있다면, 그것은 그 사건이 사라져도, 생생하게 살아있을 것이다. 현재의 사건이나 의미에 그처럼 살아있는 에너지를 담을 수 있다면, 그 사건이 비록 물질차원의 초라한 모습이라 해도, "영원한 말씀"에서 비롯되어 시간 속에서 태어난 참된 것이다. 사실 계시는 그러한 참된 것, 진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알려주기 위해 내려진 것이다.

 

시간의 절대가 영원이다. 그리고 영원이란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다. 다시 말해, 영원 자체가 시간을 공간에 풀어내는 원천이나 근원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시간은 영원의 절대성 때문에, 공간 속에 투영된 그 그림자이다. 시간은 공간을 통하여 영원의 절대성을 생생한 실체로서 입증하는 현시이다.

 

우리의 임무이자 특권은, 우주 안에 투영된 시간을 활용하여 영원한 말씀이 절대적으로 사실임을 체험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2) 시간의 속성과 기능

 

시간과 연관되는 영원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 영원이란 말은영원한 아들에게 처음 사용된다. "영원의 과거에 우주 아버지의 첫 번째 생각이 있었고, 그 절대 생각, 곧 뜻은 즉시 절대 개념 곧 말씀이 있게 하였고 절대 말씀은 우주 아버지와 관계를 가지는 절대 개인성이 되었다. 그래서 절대 말씀은 절대 개인성이다."

 

영원한 아들이 말씀이라면, “영원은 아들, 곧 말씀을 상징하는 절대 개념이자 대표하는 본성이다. 그리고 개념에는 실체가 전제되어야 하므로, 영원은 파라다이스의 절대 실체와 나란히 존재하는 개념이다. 결론적으로, 영원은말씀이자 개념이고, 시간 또한 그렇게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영원이 시간의 절대가 되어 있다면, 그 그림자로 투영된 시간은 어떤 실체와 나란히 실존하는 말씀”, 곧 공간 안에서 투영될 수 있는 개념의 근원이 된다. 영 가치와 영 에너지의 실체를 영 중력으로 장악하는 영원한 아들이, “시간-공간 안에서는 잠재적 체험으로부터 창발 하는 영 실체의 가치와 에너지의 절대자로 실존하고 있다는 문장이 한편으로는 시간의 근원적 의미를 잘 말해준다.

 

영 가치이자 영 에너지가, 시간에 투영되어 우주 안에서 체험으로 창발하고 있다면, 시간의 흐름이 있는 우주를 통과하는 모든 실체들은, 절대 뜻과 개념으로 설명되는, 위대하고도 영광스러운 목적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무한한 생각과 영원한 목적은 시간을 관통하는 가장 높은 영적 이상이며 , 우리가 파악하지는 못하지만, 시간이 그 안에 담고 있는 가장 위대한 가치가 될 것이다.

 

공간을 통과하는 우주들의 행진 속에는 위대하고도 영광스러운 목적이 있다. 너희 필사자들의 모든 투쟁은 헛된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광대한 계획, 거대한 활동사업의 일부분이며, 어떤 한 시점에서 그리고 어느 한 삶의 기간에서 그것을 충분히 똑바로 알기가 불가능한 것은 떠맡고 있는 그 일의 광대함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들이 지휘감독하고 능히 다스리는 영원한 구체적 투사의 한 부분이다. 경이롭고도 우주적인 전체 기능구조는 위대한 첫째근원이며 중심의 무한생각과 영원목적의 박자로 이루어진 음악에 맞추어 공간에 두루 장엄하게 움직이고 있다

 

시간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에는 영원 안에 계신 절대적 말씀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게 된다. 지역 우주 시간 안에서 절대적 말씀을 대표하는 창조자 하느님 아들의 영, 곧 진리의 영이, 우리에게 부어져 있는 것은 시간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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