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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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물과 역사/우표로 본 오늘~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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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3/19  

 

 

"우표에서 배운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

 

 


 

2010 - 에티오피아 난민 사상 첫 한국 국적 취득 

법무부 오늘 귀화증서 수여…난민협약 가입후 첫 사례

법무부는 19일 오후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에서 에티오피아 출신 난민 A(38)씨에게 난민 인정자 중에서는 처음으로 귀화증서를 수여한다고 밝혔다.

난민이 우리나라 국적을 취득한 것은 1992년 난민협약에 가입한 이후 처음이다.

법무부는 지난해 3월 귀화를 신청한 A씨에 대해 적격심사를 벌여 그가 사회통합프로그램을 우수한 성적으로 이수하고 본인 명의의 주택을 소유하는 등 기본 소양과 생계유지 능력을 갖춘 것으로 판단해 귀화 허가 결정을 내렸다.

일반 귀화 절차는 보통 1년 6개월이 소요되지만 난민협약에 따라 A씨의 귀화 절차는 이보다 6개월 빠른 1년으로 단축됐다고 법무부는 설명했다.

그동안 귀화 허가를 신청한 난민 인정자는 A씨를 포함해 모두 6명이며, 1명은 필기시험에서 불합격했고, 나머지 4명은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국립대학에 재학하면서 민주당원으로 활동하던 A씨는 2001년 8월 한국에 들어와 이듬해 9월 `정치적 박해'의 사유로 난민 인정을 신청해 2005년 9월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법무부는 당시 A씨의 진술에 진정성이 있고, 에티오피아 정부가 야당과 학생들의 반정부 활동을 탄압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난민 지위를 부여했다.

A씨는 국내 대학에서 신학 학사 학위를 취득한 뒤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중소업체에서 근무하고 있다.

강건택 기자 firstcircle@yna.co.kr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10-03-19 오후 01:41:44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11114.html

 

 

 

 

2008 - 영국의 과학소설(SF) 작가 아서 클라크(Clarke, Arthur) 사망  

클라크 [Clarke, Arthur Charles, 1917.12.16~2008.3.19]

영국이 낳은 가장 뛰어난 과학소설(SF) 작가.

서머싯주 마인헤드 출생. H.G.웰스 이후 영국이 낳은 가장 뛰어난 과학소설(SF) 작가로 평가되며, 그의 활동범위도 우주 ·해양 ·전자공학 관계의 전문연구서, 텔레비전의 과학 프로그램, SF 영화의 제작 등 다방면에 이르고 있다. 그의 작품은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21세기 전후를 무대로 한 리얼리스틱한 작품, 즉 《우주의 섬들》 《화성의 모래》 《지광()》(1955) 《해저목장()》 등과, 먼 미래와 무한의 공간을 무대로 인류와 문명의 운명을 사색하는 작품, 즉 《유년기의 마지막》 《도시와 별》 《우주의 오디세이아》(1968)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작품의 공통점은 인류가 지닌 지성의 진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다. /네이버 

 

 

 

 

2007 - 과기부 19일 ‘생물의 해’ 선포식

과학기술부는 건강한 삶과 환경을 위한 생물학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2007년을 ‘생물의 해’로 정하고 19일 오전 11시 서울 강남구 역삼동 한국과학기술회관 국제회의장에서 선포식을 개최한다.
이날 오후 국내 산학연 주요 인사 200여 명이 참석해 생명공학의 비전과 발전 전략, 성공 방안 등을 논의하는 ‘바이오-비전 2016 심포지엄’이 한국과학기술회관 대회의장에서 열린다.
한국생물과학협회와 한국생화학분자생물학회, 한국분자·세포생물학회는 ‘생물의 해’를 맞아 다양한 행사를 개최할 계획이다.
임소형 동아사이언스 기자 sohyung@donga.com /동아닷컴 2007-03-16 03:01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03160066

 

 

 

 

2007 - 세계최대 항공기 대서양 횡단 처녀비행

승객 550명을 태울 수 있는 세계 최대 규모 항공기인 에어버스 A380 여객기가 프랑스 툴루즈를 출발, 1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LA) 국제공항에 도착하며 대서양 횡단 처녀비행에 성공했다.
같은 날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출발한 A380 여객기도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안착했다.
LA(미국)AP연합뉴스 /한국경제 2007-03-20 17:38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7032020281&sid=0104&nid=&page=

 

 

 

 

2007 - 청소부가 된 나오미 캠벨

가정부 폭행으로 뉴욕 쓰레기장에서 사회봉사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패션 모델 나오미 캠벨(36)이 19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에서 청소부로 일했다고 <에이피>(AP) 통신이 보도했다. 캠벨은 지난해 3월 가정부 뒤통수에 휴대전화를 던져 다치게 한 죄로 지난 1월 법원으로부터 5일간의 사회봉사와 분노 조절과정 2개월 수강, 치료비 지불 등을 명령 받았다.

캠벨은 이날 검은색 코트를 입고 검은색 모자, 선글라스를 쓴 채 사회봉사 장소인 맨해튼 3구역 쓰레기 저장소에 도착했다고 통신은 전했다. 그는 앞으로 닷새간 오전 8시~오후 4시까지 저장소 내에서 청소 업무를 맡을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에서 유명인이 법원의 판결에 따라 사회봉사 활동에 나선 것은 유명 가수인 보이 조지에 이어 캠벨이 두 번째다. 조지는 마약소지와 허위자료 제출죄로 지난해 8월 뉴욕 길거리를 5일 동안 청소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캠벨은 조지와 달리 길거리에서 청소를 하지 않는다. 그의 변호사 데이비드 브레이트바트는 “캠벨이 스토킹을 당하거나 위협을 받은 전력이 있다”며 “그의 안전을 위해 좀더 사적인 공간에서 봉사를 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고 설명했다.

지난 2000년에도 가정부를 폭행한 혐의로 체포되는 등 분노를 자제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캠벨은 최근 요가를 통해 정신을 가다듬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한겨레 2007-03-20 오후 06:21:09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197615.html

 

 

 

 

1997 - 네덜란드 태생의 미국 화가 빌렘 데 쿠닝(de Kooning, Willem) 사망  

데 쿠닝 [de Kooning, Willem, 1904.4.24~1997.3.19]

네덜란드 태생의 미국 화가 데 쿠닝 사망

당대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추상표현주의 운동의 개척자인 데 쿠닝이 1997년 3월 19일 사망했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1926년 미국에 밀입국했다. 주택에 페인트 칠을 하는 것으로 생계를 꾸리며 그림을 그리던 중, 화가 아실 고르키와 알게 되어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1930, 1940년대에는 구상화와 추상화를 동시에 그렸지만 1940년대 후반부터는 거친 터치로 이미지가 거의 용해된 독자적인 작풍을 개척했다. 1950년대에는 여자의 모습을 주로 그렸고, 그 형태는 더욱 평면적이며 일그러진 경향을 띠게 되었다. 두껍게 물감을 짓이겨 채색하는 기법이 액션 페인팅에 다시 사용되고, 분홍, 노랑에 가까운 황토색, 파랑색 등 데 쿠닝 특유의 색감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특히 연작 `여인 Ⅰ~Ⅵ`(1952-53)은 그 격렬한 이미지와 충동적이고 정력적인 기법으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조선

 

 

  

 

1995 - 미국 우주왕복선 엔데버호가 16일 15시간의 최장 체류 기록 세우고 귀환

1992년 4월 챌린저호의 문제점을 보완, 개선하여 발사한 엔데버호는 우주정거장 프리덤의 건설용 기자재 및 건설 요원을 수송하고 와서 궤도를 일탈한 인공위성을 상층궤도로 재진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1992년 5월 2일 엔데버호가 첫 비행에 나서 궤도를 이탈한 통신위성 인텔샛VI(Intelsat VI)를 수리하는 첫 미션을 무사히 마치고 귀환했고, 1993년 12월 2일 허블 우주망원경의 첫 궤도상(on-orbit) 수리를 위해 발사됐으며, 이후 국제우주정거장 조립 등을 위해 비행을 했다.
한편 엔데버호는 막대한 유지비용과 안전 등의 문제로 2011년까지 애틀랜티스호, 디스커버리호와 함께 남아 있던 우주왕복선 모두를 퇴역시킨다는 NASA의 계획에 따라 2011년 마지막 비행을 마쳤다. 2011년 6월 1일 마지막 비행을 마치고 귀환한 엔데버호는 2012년 9월 19일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과학박물관으로 옮겨져 10월 30일부터 상설 전시되고 있다. 그리고 2011년 3월 9일 마지막 임무를 마치고 귀환한 디스커비리호는 2012년 4월 17일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국립항공우주박물관으로 옮겨졌고, 2011년 7월 21일 지구로 귀한해 마지막 임무를 마친 애틀랜티스호는 플로리다 케네디 우주센터로 옮겨질 예정이다. /시사상식사전

 

 

  


1993 - 비전향장기수 이인모 북한으로 송환

[어제의 오늘]1993년 비전향장기수 리인모 북송

ㆍ민족의 비극
1993년 3월19일 비전향 장기수 리인모(이인모)씨가 북으로 송환됐다. 그의 일생에는 한민족 비극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1917년 10월 함경남도 풍산군에서 태어난 리씨는 해방 후 노동당에 입당하면서 공산주의자가 됐다. 그는 한국전쟁 와중인 52년 빨치산 토벌대에 검거돼 7년간 복역 뒤 출소했으나 61년 부산에서 좌익 지하활동을 하다 다시 체포됐다. 리씨는 두 차례에 걸쳐 총 34년간 옥살이를 한 뒤 88년 석방됐다.
89년 리씨가 월간 ‘말’지에 북에 있는 가족을 그리는 수기를 연재하면서 ‘송환’ 이슈가 제기됐다. 91년 고위급회담 때 서울에 온 북측 기자가 리씨 부인의 답장을 남측에 전달하면서 가족의 생사가 확인됐다. 민주화실천운동가족협의회(민가협) 등은 국내에 연고가 없는 리씨를 북으로 보내주자는 운동을 벌였고, 북측도 대남방송 등을 통해 송환을 요구했다. 93년 출범한 문민정부는 ‘인도적 차원’에서 리씨를 북으로 보냈다. 99년 말 김대중 정부가 ‘최후의 비전향 장기수’로 불리던 신광수·손성모씨를 석방하자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비전향 장기수 송환추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이 같은 운동에 힘입어 이북에 가족을 둔 장기수들이 추가로 북송됐다.
북한 당국은 리씨가 평양으로 송환되자 ‘영웅’으로 부각시키면서 체제 선전의 도구로 활용했다. 고(故) 김일성 주석은 리씨를 직접 병문안했으며, 리씨를 소재로 삼은 엽서와 우표가 발행됐다. 리씨에게는 김일성 훈장과 영웅 칭호가 내려졌다. 그를 다룬 영화와 찬가까지 만들어졌다. 모교인 파발인민학교는 ‘리인모인민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는 평양에서 부인과 함께 살다가 2007년 6월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주관 아래 ‘인민장’으로 치러졌다. 지난해 7월에는 평양시내에 리씨의 동상이 건립됐다.
송환에서 사망까지 그를 둘러싼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국군포로와의 교환 없이 북으로 보내줘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북송 뒤에는 “예상대로 대남 선전수단으로만 이용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반면 지난해 한 탈북자는 “리씨도 북한 인권실태에 크게 충격을 받았다”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평양으로 간 리씨가 남북한을 어떤 눈으로 바라봤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고 확인할 길도 없다. 하지만 16년 전 ‘인도적 송환’이 이뤄졌던 때보다도 더 후퇴한 듯한 현재의 남북관계를 보았더라면 크게 실망했을 것이 틀림없다.

구정은기자 ttalgi21@kyunghyang.com /경향닷컴 2009-03-18-18:04:46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

200903181804465&code=100100

 

 

 

 

 

 

1987 - 프랑스의 이론물리학자 루이 드 브로이(de Broglie, Louis) 사망  

드 브로이 [de Broglie, Louis Victor Pierre Raymond, 1892.8.15~1987.3.19]

프랑스의 이론물리학자.

디에프 출생. 명문 귀족 브로이가() 출신으로, 1877년 쿠데타에 의해 수상이 된 정치가 J.V.A.드브로이의 손자이다. 처음에는 문학·역사에 흥미가 있었으나, 후에 물리학에 관심을 가져 1913년 소르본대학에서 이학사 학위를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육군의 무선부에 들어가 에펠탑에서 근무하며 물리학의 기술적 문제를 연구하였다. 대전 후에 실험물리학자인 형 모리스의 연구에 자극을 받아 양자()에 관한 이론적 연구를 시작하여 1924년 〈양자론의 연구〉라는 논문에 물질파(:드브로이파라고도 불린다)에 관한 견해를 제시하였다.

이것은 모리스가 품고 있던 ‘X선이 파동()과 입자()의 복합체가 아닐까’라는 견해를 다시 전개하여 물질입자라고 보는 전자()도 파동으로서의 성질을 가진다고 주장한 설이다. 전자와 이에 따르는 파동과의 관계(드브로이의 관계)는 A.아인슈타인 등의 지지를 받았다.

전자파()의 실재에 대해서는 1927년 C.J.데이비슨과 L.H.저머가 니켈의 결정을 사용해 전자파의 회절()을 실증함으로써, 물리학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아 파동역학()의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 후 소르본대학 강사, 푸앵카레연구소 교수, 1932년 파리대학 교수가 되어, 파동역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P.디랙의 전자론, 빛의 이론, 스핀을 가진 입자의 일반론, 핵물리의 응용 등을 논하였고, 양자론에서 인과율()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여 주목을 끌었다. 1929년 파동역학 연구의 업적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으며, 프랑스 최고의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상했다. /네이버

 

 


 

1971 - 고리원자력발전소 기공

국내 최초의 원자력발전소 고리원전(原電) 1호기가 1971년 3월19일 경남 동래군 장안면(당시 주소) 고리현장에서 기공됐다. 공사 7년 만인 1978년 4월29일 처음 상업운전을 시작해 7월20일부터 설비용량 58만7000kw로 본격 가동을 시작했다. 1호기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21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 인도 파키스탄에 이어 4번째로 ‘제3의 불’을 점화한 나라로 기록됐다.

1호기에 이어 2호기(1983.7.25) 3호기(1985.9.30) 4호기(1986.4.29) 등 고리에서만 4기가 준공돼 현재 가동중이고, 전국적으로는 전남 영광에 6기, 경북 울진에 4기, 경북 월성에 4기 등 모두 18기의 원전이 가동중이다. 울진에서는 2004년과 2005년 준공을 목표로 2기가 건설중이다. 인류가 원자력을 이용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된 것은 1942년 12월2일 페르미가 미국 시카고대에서 핵분열 연쇄반응실험에 성공하면서였다. /조선

 

 

   


1970 - 동ㆍ서독 첫 정상회담 개최

제2차대전 후 미ㆍ소 양국에 분할점령되면서 적대시해 온 동서독이 1970년 3월 19일 동독의 에르푸르트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1949년 동서독 국가탄생 이래 첫 정상회담으로 서독의 빌리 브란트(Brandt, Willy, 1913~1992) 총리가 동독을 방문했다. 이번 방문은 1966년 빌리 브란트가 대연립 부수상 겸 외상이 된 이래 전개해 온 동유럽 제국과의 관계개선을 목적으로한 ‘동방정책’의 일환이었다.
브란트 총리는 취임연설에서 “독일에 2개의국가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서로 외국이 아니다. 두 국가는 단지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며 소위 ‘2국가론’을 제기했다. 브란트 총리는 동서독 정상회담, 소련과 무력행사 포기 협정 체결,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을 대 동독 정책의 주요 목표로 설정하고 조약으로 규율되는 협력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정부차원의 협상을 동독에 제의했다. 이어 브란트 총리는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에게 분단으로 인한 주민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회담을 제의했고, 동독은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날 오전 9시30분 특별열차로 도착한 서독 총리 브란트는 기차역으로 환영나온 동독 총리 슈토프(Stoph, Willi, 1914~ )와 굳은 악수를 교환했다. 브란트는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회담은 부드러운 분위기속에서 약 6시간에 걸쳐 진행됐으나 양측의 견해차이는 좁힐 수 없었다. 결국 구체적인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한 채 다음 회담을 5월 21일 서독에서 갖는 것으로 결론짓고 회담을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이날 정상회담은 독일 통일의 초석을 다진 역사적 사건으로 회담 이후 20년 만에 통일을 이루었다. /조선

 

 

  

 

1965 - 미국 흑인 민권 시위
역사속 오늘[1965년 3월 19일] 미국 흑인 민권 시위

1965년 오늘, 미국의 앨러배마주 곳곳에서 흑인들이 시위를 벌였다.
훗날 유엔 주재 미국대사가 된 앤드류 영의 연설과 함께 행진이 시작됐다.
시위 참가자들은 흑인 차별을 철폐하라고 요구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행진을 이끌었다.
시위대에 비장함과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 달 전 흑인운동 지도자 맬컴 엑스가 암살된 데 이어 곧바로 인권운동가 리브 목사가 피살되자 흑인들의 분노가 더해졌다.
존슨 대통령이 특별 경호지시를 내려 주방위군에 비상이 걸린 가운데 열린 시위는 큰 불상사 없이 마무리됐다. 

/YTN 2011-03-19 토
http://www.ytn.co.kr/article/article_view.php?key=201103190053239084&s_mcd=0422&s_hcd=

 

 


   

1962 - 한국원자력 연구소 `제3의 불` 점화 성공

[어제의 오늘]1962년 국내 원자로에 ‘제3의 불’ 첫 점화

ㆍ이제 ‘발등의 불’이 된 원전 안전

연쇄적 핵분열은 보통의 화학반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에너지를 방출한다. 이러한 연쇄 핵분열의 반응 속도를 줄이지 않고 일시에 열을 방출하면 원자폭탄이 되고, 반응 속도를 줄여 지속적으로 방출시킨 열로 터빈을 돌리면 전기를 생산하는 원자력발전소(원전)가 된다. 원자력 기술의 핵심은 바로 ‘불 조절’이다.
1962년 3월19일 오전 10시55분, 국내 첫 연쇄 핵분열 실험이 시작됐다. 경기 양주군 원자력연구소(지금의 한국원자력연구원)에 설치된 연구용 원자로 속 핵연료봉 56개에 순차적으로 점화가 이뤄지고 6시간이 흐른 오후 4시45분 원자로 내부의 핵분열 반응은 임계치에 도달했다. 우리나라가 ‘제3의 불’로 일컬어지는 원자력을 조절할 수 있게 된 역사적인 순간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1959년 3월 원자력연구소를 세운 지 3년 만이다. 이날의 성공을 위해 윌리엄 휘트모어 박사 등 미국 연구진과 국내 원자력계 기술자들이 총동원되었고 차관 38만2000달러와 한화 2억8000만원이 투입됐다. 당시 경향신문은 “앞으로 이 원자로에서 생산될 방사성 동위원소는 국내 농학·의학·보건·물리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할 것”이라고 국내 원자력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그리고 만 9년 뒤인 1971년 3월19일에는 경남 고리에 첫 원전이 착공됐고 1977년부터 원자력을 이용해 전력을 생산하면서 한국은 세계 20번째 핵발전국이 됐다. 현재 우리나라엔 21개의 원전이 가동 중이며 국내 사용전력의 25%를 공급하고 있다.
1954년 구 소련에서 세계 첫 원전이 가동된 이후 원전은 문명의 일부가 됐다.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 등 끊임없는 안전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원자력 발전은 매장량이 제한된 화석연료(석탄·석유)의 대안으로 반세기 넘게 각광을 받아 왔다. 그 어떤 나라도 원자력이 지닌 싼값에 친환경적으로 전기를 얻을 수 있다는 매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이번 일본 대지진·쓰나미에 의해 부서진 후쿠시마 원전처럼 원자력에 대한 신뢰도 함께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됐을 때만 해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은 불가능해 보였다. 당시 원자력은 에너지가 아닌 대량살상무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원자력의 위험성은 원전이 또 다른 ‘원자폭탄’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인류에게 희망이었던 ‘제3의 불’이 이제는 ‘발등의 불’이 됐다.

정진호 기자 hotmail@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1-03-18 21:39:3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3182139395&code=100100

 

    

 

 

1957 - 필리핀 가르시아 부통령, 대통령직 계승

가르시아 [Carlos Polestico Garcia, 1896.11.4~1971.6.14 ]

필리핀의 제4대 대통령.

1923년 시리만법과대학을 졸업한 뒤 교직에 있다가 하원의원, 보볼 주 주지사, 상원의원(1941~53)을 지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53년 국민당의 추천으로 부통령에 선임되었고 외무장관을 겸했다. 1957년 3월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이 죽자 직책을 승계하고 같은 해 임기 4년의 정식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미국과의 전통적 유대관계를 지속하는 한편, 아시아 비공산권 국가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61년 11월 선거에서 부통령이던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에게 패배했다. /브리태니커

 

 

  

  

- 한국청년회의소 창립50주년기념 (2002.3.19. 발행)

 

1952 - 한국청년회의소 창립

"1972년 3월 19일은 한국청년회의소가 창립된지 20주년이 되는 날이다.
1915년에 미국의 헨리 기젠비어씨에 의해 탄생된 청년회의소는 만20세부터 40세까지 양식있는 젊은이들의 모임으로 현재 90여개국 9천여 지역사회에 약 50만의 회원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국적, 인종, 종교의 차별없이 각 개인의 능력을 개발하고 지도역량을 배양하여 젊은이들의 용지(勇智)와 정열로써 보다 나은 복지사회를 이룩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국제청년회의소 본부는 미국 플로리다주 코랄케이블즈에 있다.
한국청년회의소는 1952년 3월 19일 국제청년회의소에 정회원국으로 가입 인준되었으며 6.25동란으로 황폐된 조국을 청년회의소 운동으로 재건하려는 애국적 의욕으로 평택에서 몇몇 젊은이들에 의해 시작된 것이 처음이며 현재는 전국 121개 지방에 1만여에 달하는 회원을 가지고 있다.
체신부에서는 한국청년회의소가 지난 20년동안, 이룩한 업적을 높이 찬양하고 앞으로도 더욱 젊음과 정열을 쏟아 지역사회 개발과 조국 근대화 작업의 촉진을 위한 국민의 정신개혁 운동에 선도적 역할을 하고, 나아가서는 세계평화에 이바지하기를 바라며 이를 온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자 기념우표를 발행한다."

(우표발행안내) /kstamp

http://www.kstamp.go.kr/sp/sg/spsg0102.jsp?tbsmh15seqnum=865&tbsmh01seqnum=409   

 

 

 

 

1950 - 원폭을 반대하는 `스톡홀름 호소문`에 전세계 5억명 서명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열린 세계평화옹호대회 상임위 최종일인 1950년 3월 19일, 전 세계를 향해 `핵무기사용 절대금지`에 서명할 것을 호소하는 `스톡홀름 호소문`이 발표됐다. 호소문은 핵무기에 대해 `무조건 금지` `국제관리기관 설치`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호소문은 냉전상태로 인해 발발할 지도 모르는 제3차 세계대전을 우려하는 전 세계인의 공감을 불러일으켜 미국, 소련, 중국, 동독, 서독,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일본 등 세계각국으로부터 총5억여명이 서명했다. /조선

 

 

 

 

1950 - 영국의 화학자 노먼 호어스(Haworth, Norman) 사망

호어스 [Haworth, (Walter) Norman, 1883.3.19~1950.3.19]

영국의 화학자.

탄수화물과 비타민 C의 화학구조를 결정한 공로로 스위스의 화학자 파울 카러와 함께 1937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그는 1912년에 세인트앤드루스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파이프에 있는 동안 그는 영국의 화학자 제임스 어빈, 토마스 퍼디와 함께 당류·녹말·셀룰로오스 등의 탄수화물에 관한 연구를 했다. 그들은 당류가 직선형이기보다는 고리형 탄소 배열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 당 분자들의 고리형 표시는 호어스 투영식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25년에는 버밍엄대학교 화학과 학과장이 되었는데, 거기에서 그는 단당류와 구조적으로 비슷한 비타민 C에 관한 연구로 연구방향을 돌렸다. 1934년에 영국의 화학자 에드먼드 허스트와 함께 비타민을 합성하는 데 성공했는데, 이것은 인공으로 만든 최초의 비타민이었다. 이 성공은 유기화학 지식에 귀중한 보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의료용으로 사용하는 비타민 C를 값싸게 생산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1947년 기사작위를 받았다. /브리태니커 

 

 

 

 

1950 - 미국의 소설가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Burroughs, Edgar Rice) 사망

버로스 [Burroughs, Edgar Rice, 1875.9.1~1950.3.19]

미국의 소설가.

타잔 이야기로 전세계에 알려진 아프리카 밀림의 영웅을 만들어냈다.

수많은 직업을 전전하며 실패를 거듭한 뒤, 화성과 밀림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1912년 타잔 이야기를 처음 발표했으며, 뒤이어 1914년에는 〈원숭이 나라의 타잔 Tarzan of the Apes〉을 출판했다. 이것은 갓난아기 때 밀림에 버려져 원숭이들 손에서 자란 영국 귀족의 아들 이야기를 다룬 25권의 소설 가운데 첫 권이다.

버로스는 타잔을 통해, 화성을 무대로 한 많은 이야기에서처럼 대중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사로잡는 인물을 창조해냈다. 타잔 이야기는 56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만화,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라디오 드라마로도 인기를 누렸다. 캘리포니아와 텍사스에는 타잔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마을이 있다. 1941년 진주만 공격을 목격한 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Los Angeles Times〉지 특파원이 되었는데, 당시 66세였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남태평양을 취재한 최고령 특파원이었다. /브리태니커 

 

 

 

  

 

1945 - 일본 가미카제, 미국 항공모함 공격
1945년 3월19일 일본의 가미카제[神風] 특공대가 미국 항공모함 프랭클린호를 공격해 800여 명이 사망했다. '신의 바람'을 뜻하는 가미카제는 원래 1281년 몽골의 일본 침략을 막아낸 태풍을 일컫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1944년 10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제1항공함대 사령관 오오니시[大西] 중장이 전투기 26대로 이른바 가미카제 특공대라는 자살부대를 편성했다. 가미카제가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오키나와[沖繩]에서였는데, 미국 해군은 단 1번의 전투에서 거의 5,000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냈다. 이후 일본은 인간어뢰 가이텡[回天], 자폭용 고속정 신요[震洋], 인간 로켓 사쿠라바나[櫻花] 등의 특공부대를 계속 전쟁에 투입했다. /브리태니커

 

 

 

 

 

   

 

1932 - 호주 시드니의 하버브리지 개통

시드니 하버 브리지(Sydney Harbour Bridge)는 오스트레일리아를 대표하는 상징물 중 하나로 시드니 도심에 위치하고 있는 세계에서 4번째로 긴 아치(arch)교 이다.

역사

1923년 7월 28일 착공을 시작하여 8년이 넘는 공사 기간 끝에 1930년 10월에 아치모양의 건설이 완공되었으며 1932년 3월 19일 최종 완공, 개통되었다. £10,057,170.7s.9d에 달하는 건축 비용은 초기에는 영국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와 건설을 시작하였고 개통 후에는 통행료를 징수하여 건축에 사용했던 빚을 갚는 데 사용하였다. 1988년 건설에 투입된 모든 빚을 청산하였지만 다리의 유지 보수와 교통을 분산하기 위해 만든 해저 터널(하버 터널 - 1992년 완공)의 공사, 유지 비용 충당을 위해 여전히 통행료를 징수하고 있다. 8년이 넘는 건설 기간 동안 해마다 1,500명 이상의 고용이 이루어졌으며 근로자 열여섯 명이 건설 도중 목숨을 잃었지만 노동자 계층을 대공황으로부터 구제한 역할을 했다는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건설에 사용한 철강의 79%는 잉글랜드로부터 수입되었으며 나머지는 국내에서 충당했다. /위키백과

 

 

 

 

1921 - 서양화가 나혜석 첫 개인전

[책갈피 속의 오늘]1921년 첫 여성서양화가 나혜석 데뷔展

한국의 첫 여성 서양화가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의 첫 개인전이 1921년 3월 19, 20일 경성일보사에서 열렸다. 관람객 5000여 명이 찾았고 그림 20여 점이 팔렸다.

화가로서,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그의 삶은 찼다 기울고 다시 차오르는 달처럼 도약과 위축을 반복했다.

1896년 수원에서 재력가의 딸로 태어난 그는 진명여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첫사랑 최승구(崔承九)를 만났다. 이 무렵 정월은 ‘무한한 고통과 싸우며 예술에 매진하겠다’는 글을 남겼다. 예술에 대한 이런 태도는 최승구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첫사랑은 최승구가 병사하면서 끝났다.

귀국 후 그는 법조인 김우영(金雨英)과 결혼했다. 남편은 미술 활동을 적극 후원했지만 정월의 ‘감성’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정월은 1922년 만주로 발령받은 남편을 따라 만주로 갔다. 그해부터 매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 입선했지만 갈수록 한계를 느꼈다. 그는 “기교만 조금씩 진보할 뿐 정신적 진보가 없어 나 자신을 미워할 만큼 괴롭다”고 말했다.

‘정신적 진보’를 위한 기회가 찾아왔다. 남편이 일본 외무성이 변방에서 일한 관리에게 주는 해외 위로여행 대상자가 된 것. 남편은 독일 베를린에서 법률을, 정월은 프랑스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야수파와 인상파의 영향으로 그림에 감성이 표출됐다. 최린(崔麟)과 사랑에 빠지면서 감성이 폭발했다. 사랑과 함께 정월의 예술도 보름달처럼 차올랐다.

남편은 귀국 후 변호사 개업을 했지만 경제사정이 어려웠다. 정월이 최린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청하는 편지가 공개돼 파문이 일었다. 남편은 이혼을 요구했고, 최린은 정월을 외면했다.

이제 세간의 관심은 정월의 예술이 아니라 ‘불륜’에 모아졌다. 1932년 한 미술전에서 정월의 그림은 “쇠락을 고했다”는 혹평을 받았다. 그는 떠돌이 생활을 하다 1948년 겨울 객사했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사회에서 매장된 뒤 쓸쓸히 숨졌지만 그의 삶이 불행했던 것만은 아닌 듯하다. 정월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예술과 자아, 감성이 하나가 되는 ‘삶의 본질’을 누렸으니까.

김승진 기자 sarafina@donga.com /동아닷컴 2005-03-18 18:28:00

http://news.donga.com/3//20050318/8170701/1

 

 

 

- 제네바의 국제연맹 본부

 

1920 - 미국 국제연맹 가입안 부결

[책갈피 속의 오늘]1920년 美국제연맹 가입안 부결

찬성 49, 반대 35. 1920년 3월 19일 밤, 표결 결과를 확인한 미국 상원의원들은 하나같이 왠지 모를 찜찜함 속에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 표결에 부쳐진 안건은 제1차 세계대전을 종결하는 베르사유평화조약 비준동의 수정안. 상원을 통과하기 위해 필요한 3분의 2 찬성에는 7표가 모자랐다. 이로써 토머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그토록 원했던 미국의 국제연맹 가입은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수정안 대표발의자인 공화당의 헨리 캐벗 로지 상원의원은 “(구두쇠 스크루지의 죽은 동업자) 말리의 유령처럼 분명히 죽었다”고 국제연맹에 대해 사망선고를 내렸다. 민주당의 제임스 리드 상원의원도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처럼 죽은 게 확실하다”고 단언했다.
수정안은 군사적 개입이 요구되는 위기 상황을 의회가 평가할 권한이 보장되면 국제연맹 가입을 승인하겠다는 유보 조항을 넣은 것. 세계 어디든 침략행위가 일어날 때마다 미국이 무턱대고 침략자를 응징하러 전쟁에 나설 수는 없다는 공화당 ‘강경 유보파’의 대안이었다.
그러나 윌슨은 이 수정안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파리평화협상에서 만들어낸 원안이 이미 4개월 전 의회 표결에서 부결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 있게 국제연맹에 가입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품위 있게 퇴장해야 한다”며 한 글자도 건드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반대표 중 23표는 윌슨의 지시에 따른 민주당 표였다. 세 차례나 발작을 일으켜 몸 왼쪽이 마비된 윌슨은 정신건강, 즉 판단력에도 문제가 생겼다. 그는 병상에서 심하게 떨려 거의 알아볼 수 없는 글씨로 민주당 의원들에게 반대표를 던지라고 간청했다.
이 수정안에 따라 미국이 국제연맹에 가입했다면 패전국 독일은 이후 국제법 절차에 따라 불만을 해소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독일은 허울만 남은 국제연맹을 무시하며 무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했고 결국 유럽에선 또 한 차례의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수정안의 부결은 국내적으로도 윌슨과 민주당의 자멸로 이어졌다. 한때 윌슨의 국제연맹 구상에 호의를 보이던 공화당 의원들도 등을 돌렸다. 그해 말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완패는 곧 윌슨의 대외정책에 대한 완전한 반대를 의미했다.
당시 사회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했던 유진 데브스는 이렇게 평가했다. “미국 역사에서 공인 가운데 우드로 윌슨만큼 철저히 신뢰를 잃고, 호되게 비난받고, 압도적인 거부와 반대에 부닥친 채 은퇴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폴 존슨의 ‘모던 타임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동아닷컴 2009-03-19 02:53:00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90319/8709302/1

 

 

 

- 3.1운동과 독립선언

 

1919 - 기생조합만세운동 발발
1919년 3월 19일 진주시 기생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촉석루를 향해 시위행진을 벌이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경찰은 6명의 기생을 구금했지만 김향화를 비롯한 수원시 기생조합 기생들이 또다시 독립시위를 벌였다. 4월에는 해주시 기생들이 피로 그린 태극기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군중 3,000여 명이 시위투쟁을 전개했다. 기생조합장 문월선 등 많은 기생들이 구속되었으나 통영시에서 예기조합기생 33명이 금비녀·금팔찌를 팔아 소복을 마련해 입고 만세시위운동을 계속했다. /브리태니커

 

 

 

    

 

1916 - 美최초 항공기 실전 투입

[책갈피 속의 오늘]1916년 美최초 항공기 실전 투입

지난해 11월 미국 중간선거에선 부재자 투표 봉투에 20만 달러짜리 희귀 우표가 붙어 있는 것이 발견돼 화제가 됐다. 누군가 우리 돈으로 2억 원에 가까운 값비싼 투표를 한 셈이다.
그 희귀 우표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명성을 떨친 복엽(겹날개) 비행기 ‘커티스 제니’가 거꾸로 인쇄된 우표. 1918년 발행된 ‘뒤집힌 제니(Inverted Jenny)’는 우정당국의 폐기 조치에도 불구하고 일부가 흘러 나와 수집가들에게서 최고의 희귀 우표로 각광을 받아 왔다.
커티스 제니는 윌버와 오빌 라이트 형제와 비행기 특허 분쟁을 벌였던 미국 최초의 비행사 면허증 취득자 글렌 커티스 씨가 만든 훈련기 시리즈. 그는 J형과 N형 비행기를 만든 뒤 각각의 장점을 결합해 ‘커티스 JN’을 만들었는데 제니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제니는 1915년 미군 최초의 항공부대인 육군 제1항공대(오늘날 공군의 제1정찰대)에 공급됐다. JN2와 JN3 8대로 시작한 제1항공대는 멕시코 혁명으로 어수선한 남쪽 국경지역인 텍사스 주에 배치돼 비행 훈련을 실시했다.
제니가 실전에 처음 투입된 것은 1916년 3월 19일. 멕시코 혁명가 판초 비야의 반군이 미국 뉴멕시코 주 콜럼버스를 공격하자 미국이 멕시코 국경을 넘어가 전개한 ‘판초 비야 토벌작전’에 투입된 것이다.
미군 역사상 최초로 항공전투 임무에 나선 것이었지만 제니의 활약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3000m가 넘는 고산을 넘어갈 수 없었고 고갯길의 강풍에도 버티지 못했다. 먼지폭풍에 주저앉고 목재 프로펠러는 갈라지기 일쑤였다. 불과 1개월 만에 고작 2대만 운항이 가능했다. 나머지는 추락 고장으로 운항이 불가능했다.
신형 JN6가 투입됐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제1항공대는 토벌대 사령관인 존 퍼싱 장군이 전진부대에 보내는 명령문을 전달하는 연락기 역할에 그쳤다.
비야 토벌작전도 성과는 없었다. 미군은 10여 개월이나 추격전을 계속했지만 비야를 잡기는커녕 멕시코 정부와의 영토 침범을 둘러싼 외교적 분쟁만 낳은 채 다음 해 1월 말 철수해야 했다.
비록 결과는 초라했지만 경험은 소중했다. 1917년 미국의 대독일 선전포고와 함께 유럽전선에 투입된 제1항공대는 비야 토벌작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찰과 감시는 물론 13차례나 공중전에서 승리하는 전과를 올려 1차대전 승리에 기여했다.
이철희 동아일보 기자 /동아사이언스 2007년 03월 19일

http://news.dongascience.com/HTML/News/2007/03/19/20070319200000000010

/200703192000000000100109000000.html

 

 

 

- 'Self-portrait', 1913 

 

- 'The Boyar Morozov Going into Exile'

 

- 'Capture of a Town in Winter'

 

 

 

1916 - 러시아의 화가 바실리 수리코프(Surikov, Vasily) 사망   

수리코프 [Surikov, Vasily Ivanovich, 1848.1.24~1916.3.19]
19세기 러시아의 화가.

1848년 러시아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태어났다. 시베리아 카자크 가계 태생인 그는 1869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1875년까지 그곳의 미술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1875년 졸업작품 과제 《사도 바울이 아그리파 황제와 그의 여동생 베르니케, 페스트 총독 앞에서 믿음을 설파하다》로 일급 공식화가 자격을 얻었다. 이듬해 모스크바로 가서 1878년까지 모스크바의 구세주 그리스도 사원 벽화 채색작업에 참여했다.  
바실리 수리코프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모스크바에서 자신의 예술이 나아갈 길을 찾았다. 그것은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들을 주제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우선 붉은 광장에서 일어난 역사의 한 장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표트르 대제의 군 개혁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폭동에 대해 황제의 단호한 대처를 다룬 《수비대 처형 날 아침》이 바로 그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수리코프는 과거의 인물을 통해 당대의 민중이 느끼고 있는 문제의식을 간접적으로 표현했으며, 이 작품은 1881년 이동파 전시회에 출품되었다. 
수리코프는 러시아 민중 예술을 부활시키려고 했던 아브람체보 그룹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1881년부터 1907년까지 이동파의 회원으로, 1908년부터는 러시아예술가연합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러시아의 과거를 완벽하게 재현한 그의 작품은 많은 후배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사후 모스크바는 가장 중요한 미술학교를 수리코프에게 헌사했다. 모스크바의 수리코프 미술대학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레핀 미술대학과 더불어 가장 유능한 미술 인재들을 배출하고 있다.  
주요 작품에는 《수비대 처형 날 아침 Morning of Streltzi's execution》(1881), 《베료조프의 멘시코프 Menshikov in Berezov》(1883), 《대 귀족부인 모로조바 Boyarynya Morozova》(1887), 《예르마크의 시베리아 정복 Conquest of Siberia by Yermak》(1895),《스테판 라진 Stepan Razin》(1906) 등이 있다. /네이버


 


 

1912 - 독일의 전투기 조종사 아돌프 갈란트(Galland, Adolf) 출생

갈란트 [Galland, Adolf "Dolfo" Joseph Ferdinand, 1912.3.19~1996.2.9]

제2차 세계대전중에 루프트바페(독일 공군) 전투기부대를 지휘했다.

프랑스계 장원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난 갈란트는 20세가 되기 전에 능숙한 글라이더 조종사가 되었으며, 1932년 민간 항공사인 루프트한자에 입사했다. 1937∼38년에 벌어진 스페인 내란에 독일의 콘도르 군단 소속으로 참전해 수백 회의 비행임무를 수행했다. 갈란트는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때 참모직에 있었지만, 1940년의 프랑스 원정중에는 전투기부대에서 복무했으며, 영국 본토 공습전에서는 전투기 대대를 지휘해 이 전투가 끝날 때까지 약 100대의 적기를 파괴했다. 1941년 11월 루프트바페의 전투기 부대 사령관으로 발탁되었고, 1년 후에는 소장으로 승진하여 독일군 전체에서 가장 연소한 장군(30세)이 되었다.

1943∼44년에 갈란트는 독일의 전투기부대들을 지휘해 영국과 미국의 공습에 대항했지만, 그것은 아무런 소득도 없는 방어전이었다. 유능하고 기략이 풍부한 지도력을 발휘했음에도 불구하고 1944년 독일 공군이 점차 붕괴되는 데 대해 아돌프 히틀러와 헤르만 괴링으로부터 책임추궁을 당하고 1945년 1월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 갈란트는 메서슈미트 ME-262로 불리는 제트 추진전투기의 개발을 지지했으며, 히틀러로부터 이 제트 전투기들로 구성된 정예 비행대의 사령관으로 현역에 복귀할 것을 허락받았다. 1945년 5월 조종중이던 전투기가 격추, 생포되어 영국으로 압송당했다. 전후에 아르헨티나 공군의 기술고문으로 6년을 보낸 후 서독으로 돌아와 뒤셀도르프에서 산업체의 고문으로 일했다. /브리태니커

 

 

 

 

1906 - 독일의 나치스 친위대 장교, 홀로코스트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Eichmann, Adolf) 출생 

아이히만 [Eichmann, (Karl) Adolf, 1906.3.19~1962.5.31]

아돌프 오토 아이히만(Adolf Otto Eichmann, 1906년 3월 19일 ~ 1962년 5월 31일)은 제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전범으로 독일의 SS중령(최종계급)으로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 즉 유대인 박해의 실무 책임자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국제 전범으로 수배 중에 아르헨티나로 도피하여 이름을 바꾸고 15년 동안 살았다. 1960년 이스라엘 정보 기관 모사드에 체포돼 이스라엘에서 공개 재판 후에 1962년 5월 31일에 처형되었다. 재판 당시 그는 자신이 유대인을 박해한 것은 상부에서 지시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후에 사회학자 한나 아렌트는 실험을 통해 부당한 명령이라고 해도 한 번 받아들이면 무비판적으로 그 부당한 명령을 수행하게 된다는 연구 결과를 얻었다. 즉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성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인간의 가치와 권리를 억압하는 사회, 정치적 구조악에 대한 저항이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실험으로 밝혀낸 것이다.

당시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 문제로 이스라엘과 심각한 외교적 갈등을 빚었다. 엄연히, 모사드의 아이히만 납치는 국제법과 관례에 어긋나 아르헨티나 정부의 주권을 침해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위키백과

 

 

 

 

1902 - 우리 나라 처음으로 서울-인천 전화 개통  

[오늘의 역사]최초로 서울~인천간 전화 개통

1902년 오늘 우리 나라 처음으로 서울∼인천간 전화가 개통됐으며 같은 해 6월에는 시내교환전화가 가설되기도 했다.

1903년 부산에도 전화가 가설됐다. 당시의 전화기는 에릭슨사(社)에서 제작한 자석식 단식교환기와 벽괘형(壁掛型) 전화기였다. 일본인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인천에서의 시내 교환업무가 시작되었으며, 개성∼평양 간, 서울∼수원 간의 전화개설을 비롯하여 전화사업은 확대되었다. 하지만 1905년 한국 통신권이 일본에 강탈됨에 따라 한국의 전화사업도 일본의 손에 넘어갔으며 광복 때까지 40년간 일본인에 의하여 운영되었다.

/충청투데이 2008.03.18 19:00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6304 

 

 

  


1901 - 한국 최초의 민간인 비행사 안창남(安昌男) 출생

안창남 [安昌男, 1901.3.19~1930.4.2]
안창남(1901년 3월 19일 ~ 1930년 4월 2일)은 한국 최초의 민간인 비행기 조종사이다.

한국 최초의 비행사로도 널리 알려졌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가 노백린이 미국에서 길러낸 한국인 비행사들이 안창남보다 1년 가량 먼저 비행사가 되었기 때문에 한국인 최초는 아니라고 밝혀졌다.

서울 출신으로, 일본 오오사카에서 자동차 운전을 배운 뒤 비행기 제조법에 이어 조종술을 공부해 비행기 조종사가 되었다.

1921년 일시 귀국하여 금강호(金剛號)를 타고 모국방문 비행을 하면서, 자전거의 엄복동과 묶어 "떳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니 엄복동의 자전거" 라는 가사의 노래나 "날개로는 안창남, 수레로는 엄복동, 다리로는 현금녀" 등 다양한 유행어가 생길 만큼 유명해졌다.

간토 대지진 이후 귀국하였으며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군 소속으로 근무한 바 있고, 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하여 독립 운동에 뛰어들었다. 여운형의 주선으로 산시 성으로 옮겨가 비행학교 교장으로 비행사를 양성했다. 이무렵 대한독립공명단이라는 비밀 항일조직을 결성했고, 이 단체는 항일 비행학교 건설을 위한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0년 비행중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중국에서 독립 운동에 참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받았다. /위키백과

 

 

 

 

1900 - 기원전 16세기 그리스 크노소스 궁전 발굴

크노소스궁전 [Palace at Knossos]

지중해 크레타섬의 크노소스에 있던 고대 왕국의 궁전으로, 4방 약 17m 부지를 차지하며, 60m×29m 정도의 직사각형의 중앙광장을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왕과 그 가족을 위한 거주구 ·공방(工房), 서쪽으로 제례와 정치를 위한 공실(公室) ·창고 등 수백의 소실(小室)이 배치되어 있는데, 1900년 영국의 고고학자 A.에번스에 의해 발견되었다.

에게 문명 전기의 지배자 미노스의 거성()이다. 섬의 북안(), 현재의 이라클리온시() 남쪽 약 6km 지점 구릉 위에 있다. 1900년 영국의 고고학자 A.에번스가 발견하였으며, 그 후 발굴이 계속되었다. 주요한 유구()는 BC 1600년경에 건설되어 BC 1500년경 지진으로 붕괴된 제1궁전의 남은 부분과, 그 직후에 재건되어 BC 1400년경 아카이아인()의 침입으로 파괴된 제2궁전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건물은 4방 약 17m 부지를 차지하며, 60m×29m 정도의 직사각형중앙광장을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왕과 그 가족을 위한 거주구 ·공방(), 서쪽으로 제례와 정치를 위한 공실() ·창고 등 수백의 소실()이 배치되어 있다. 그 밖에 야외극장 ·선착장() ·소이궁() 등이 있다. 건축재료는 나무와 돌이며, 목각재()의 대들보나 도리, 위가 굵고 아래가 좁은 이른바 크레타식() 기둥 등의 사용이 특히 주목된다. 심한 붕괴로 상부구조는 분명치 않으나 2층 또는 3층 부분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며, 대소()의 계단, 회랑()과 통로가 복잡하고, 또 곳곳에 채광을 위한 공간과 천창(), 몸을 정하게 하기 위한 연못 등도 있다. 일종의 수세식 변소, 도관()을 이용한 하수도 등도 발굴되었다. 내부의 벽이나 천장의 대부분은 궁정풍속 ·동식물 ·새 ·물고기 등을 그린 회화로 장식되어 있다.

고대의 왕궁건축 중 가장 규모가 큰것 중의 하나이며, 또한 그 복잡한 설계로 옛날부터 ‘라비린토스()’로서 유명하였다. 그리스의 영웅 테세우스가 이 미궁() 깊숙이 살고 있는 괴우()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하고, 왕녀 아리아드네와 함께 섬을 탈출하는 이야기는 잘 알려졌다. 견고한 성문이나 성벽이 없으며, 또 큰 방(홀) 등 지배자의 권위를 과시하는 시설을 갖추지 않은 점도 이 종류의 건축으로는 이례적인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유적은 에번스에 의하여 어느 정도 복원되었으며, 또 많은 출토품은 이라클리온 미술관에 수장 ·전시되어 있다. /네이버

 

 

 

  

 

 

1900 - 프랑스의 핵물리학자 프레데리크 졸리오 퀴리(Joliot-Curie, Frédéric) 출생

졸리오 퀴리 [Joliot-Curie, (Jean) Frédéric, 1900.3.19~1958.8.14]

프랑스의 핵물리학자.

파리 출생. 옛 성()은 졸리오. 방사능의 연구, 특히 원자의 인공전환으로 아내 I.졸리오퀴리(Joliot-Curie, Irène)와 함께 노벨화학상을 받았다(1935). 고등공업물리화학학교에서 P.랑주뱅의 지도를 받고, 1925년 라듐연구소에 들어가, M.퀴리(Curie, Marie, 1867~1934)의 조수가 되어 방사능 연구를 했다. 이듬해 I.퀴리와 결혼, 성을 졸리오 퀴리로 바꾸고, 아내와 협력하여 연구를 계속했다. 1932년 ‘보테 베커의 방사선’의 성질에 관한 연구로 중성자 발견, 이어서 γ선에 의한 음양 전자쌍생성을 보고하고, 1934년 인공방사능을 발견했으며, 그 밖의 많은 새로운 원소 창출의 가능성을 예견하였다. 1935년 연쇄 핵반응의 가능성을 밝혔다. 그 사이 소르본의 조교수에서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어, 핵화학연구소를 창설하고 사이클로트론을 건설했다. 우라늄 핵분열의 가능성이 발견되자, 핵분열 때 중성자 방출이 따른다는 사실을 보고하고(1939), 연쇄반응 조건을 연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군이 침입하자 국내에 남아 국민전선을 지도했다. 대전 후 국립중앙과학연구소 장관에 취임, 창설된 원자력청 장관 외의 여러 요직을 역임하며 과학 연구조직이나 과학 행정면에 진력하였다. 1950년 정치적 이유로 원자력청 장관에서 해임된 후, 사크레의 대원자핵연구소에서 지도에 전념하는 한편, 세계평화옹호회의 의장으로서 평화운동에 공헌하였다. 부인 사후에는 소르본대학의 교수와 라듐연구소장을 겸임, 오르세 핵물리학연구소 건설을 지도하였다. 프랑스의 제1호 원자로 ‘조에’(1948)와 오르세의 싱크로사이클로트론의 실현에도 공헌하였다. 과학아카데미 회원을 지냈고, 프랑스공산당에 입당(1943), 중앙위원이 되어 원폭 반대 스톡홀름 호소문을 기초하였다. 1951년 스탈린상 수상, 레지옹 도뇌르 훈장 등 많은 상과 명예학위를 받았다. /네이버

 

 

 

 

1899 - 한국의 동양화가 변관식() 출생

변관식 [, 1899.3.19~1976.2.17]

한국의 동양화가.

1899년 3월 19일 황해도 옹진()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소정()이다. 관립 조선총독부 공업전습소 도기과()에서 도화()수업을 받은 후 외조부인 소림 조석진()이 관여하던 서화미술원에서 이당() 김은호()·심산() 노수현()·청전() 이상범() 등과 함께 공부하고, 1925년 일본에 가서 동경미술학교(청강생)를 수료하였다. 8·15광복 후 초기 국전에 참여하였으나 심사부조리를 개탄, 국전을 포기 외면하고 이후 작품제작에만 몰두했다.

화법의 특징은 첫째, 화면상의 시점이 부감시( )에 따른 일종의 심원()의 형식이면서 다각적인 방향에서의 시점을 구사하여 박진감과 입체파풍의 구조적 해석을 보였다. 둘째, 청전()과 달리 적묵법()에 의해 변화를 주었으며 관념적인 산수가 아니라 엄격한 사경()을 바탕으로 한 한국적 풍치가 배어났다. 그리고 그러한 산세에 접경되는 인물들은 비탈진 산길을 뒤뚱거리며 올라가는 흰 두루마기의 촌로들이 보여주는 해학적인 풍정에서 진정한 한국적인 야취()를 맛볼 수 있다. 작품으로는 일련의 금강산 시리즈인 《외금강 삼선암()》 《내금강 진주담()》 《옥류청풍()》 등과 《이어()》 등의 어해도()가 있다. /네이버

 

 

 

 

1895 - 뤼미에르 형제, 시네마토그래프로 최초 촬영

뤼미에르 형제는 프랑스브장송에서 태어났다. 1870년에 리옹으로 이사해서 형제는 리옹에서 가장 큰 기술 학교인 라 마르티니에르(La Martiniere)에 다녔다. 아버지 샤를 앙투안 뤼미에르(1840-1911)는 사진 회사를 운영해서 두 형제도 각각 루이는 기술자로, 오귀스트는 경영자로 일했다. 루이는 고정 사진 인화에 몇 가지 발명을 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건판 기법(dry-plate process)으로 이것은 움직이는 이미지를 나타내는 데 큰 발전이었다.

형제가 활동 사진을 만든것은 아버지가 은퇴한 1892년의 일이었다. 그들은 필름 카메라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기법들로 특허를 많이 얻었다. 특히 필름 퍼포레이션(perforation, 원래 에밀 레이노가 고안한 것으로 필름 양 가장자리 또는 한쪽에 뚫어진 연속된 작은 구멍을 일컫는다.)은 필름을 카메라와 프로젝터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1895년 2월 13일 시네마토그래프에 특허를 받았으며, 이를 이용해서 처음으로 찍은 것은 그해 3월 19일로 기록되어 있다. 첫 영화는 노동자들이 뤼미에르 공장에서 나오는 모습을 찍은 것이다. /위키백과

 

The cinématographe itself was patented on 13 February 1895 and the first footage ever to be recorded using it was recorded on 19 March 1895. This first film shows workers leaving the Lumière factory.

http://en.wikipedia.org/wiki/Auguste_and_Louis_Lumi%C3%A8re

 



 

1891 - 미국의 연방대법원장 얼 워런(Warren, Earl) 출생 

워런 [Warren, Earl, 1891.3.19~1974.7.9]

로스앤젤레스 출생. 캘리포니아주()의 검사장 ·지사를 역임하였고,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의해서 대법원 판사로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공 ·사립학교에서 흑백아동을 차별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려서 인종문제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 후에 공립학교에서의 기도()를 위헌이라고 판결하였으므로, 보수파로부터 “흑인을 학교로 끌어들이고 신을 내쫓았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원의 선거구획 재편성에 관한 소송과 범죄혐의자의 인권사건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다가 1969년 노령으로 사임하였다. 1948년 공화당의 지명을 받고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패하였다./네이버

 

 

 

- 'Homage to the Square'     - 'Homage to the Square'

  

- 'Sanctuary, Zinc Lithograph, 1942'

 

1888 - 미국의 화가 조셉 앨버스(Albers, Josef) 출생

앨버스 [Albers, Josef, 1888.3.19∼1976.3.25]

미국의 화가. 독일 보트로프 출생. 베를린·에센의 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 바우하우스를 졸업한 뒤 교사가 되었다. 입체주의·구성주의, 또 그룹 <다리>의 영향도 받았다. 1933년 미국으로 가서 블랙마운틴대학·예일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즉흥적 또는 계획적인 방법에 의한 실험을 하였는데, 시각의 상대성이라는 생각에 입각하여 기본적인 형체의 조합을 통한 색채표현을 탐구하였다. 대표작으로 《정사각형 예찬》 연작이 있다. 회화 이외에도 그래픽아트·유리·브론즈 등을 사용한 작품을 제작하였다. /야후 백과

 

 

 

 

 

1884 - 핀란드의 민속학자, 문헌학자 엘리아스 뢴로트(Lönnrot, Elias) 사망  

뢴로트 [Lönnrot, Elias, 1802.4.9~1884.3.19]

핀란드의 민속학자, 문헌학자.

구비전승된 것을 수집한 짧은 담시(譚詩)들과 서정시들로부터 핀란드의 민족 서사시 〈 칼레발라 Kaleval‍!!a〉(1835)를 창조했다. 또 〈칸텔레타르 Kanteletar〉(1840~41)와 속담·수수께끼·주문(呪文) 모음집도 출판했다.

헬싱키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여 학위를 받았으며(1832), 1833년 러시아령 카렐리아 근교, 동부 핀란드 외곽지대인 카자니에서 그 지역의 보건소 의사가 되었다. 20년간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라플란드인, 에스토니아인, 러시아 북서부의 핀란드 부족들 사이를 여행하며 민요뿐 아니라 핀우고르어족에 속하는 발트 제어(諸語)의 상관관계에 관한 증거자료를 수집했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짧은 시들이 전문(全文)이 남아 있지 않은 연속된 서사시의 부분들이라고 생각하여, 이미 가지고 있던 자료들에다 이 시들을 연결시켜 하나의 통일된 줄거리로 만들었다. 많은 학자들이 이 방법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칼레발라〉가 핀란드의 민족의식·예술·문화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뢴로트는 1853~62년에 헬싱키대학교의 핀란드어 및 문학 교수로 재직했다. 또한 민족부흥운동의 지도자로서 스웨덴어가 우세하게 쓰이고 있는 상황에서 핀란드어를 국어로 격상시켰으며, 현대 핀란드 문학 탄생을 위한 길을 닦았다. /브리태니커

 

 

 

 

1883 - 미국의 육군장교, 장군 조지프 스틸웰(Stilwell, Joseph) 출생

스틸웰 [Stilwell, Joseph Warren, 1883.3.19~1946.10.12]

플로리다 출생. 1904년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1차 세계대전 때는 프랑스에 근무하였다(1917∼1918). 그 후 주중대사관(使)의 무관 등 단속적()으로 중국에서 근무한 것이 인연이 되어,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중국 정부의 요청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육군 중장으로서 인도 ·미얀마 ·중국 전역()의 미국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미국 ·영국 ·중국 ·네덜란드의 연합군 합동참모본부의 참모총장으로서 중국군을 도왔다. 1943년에는 인도에서 중국군에 대한 미국식 장비를 갖춘 훈련을 대규모로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공산당문제로 인한 장제스[]와의 불화 때문에 이듬해 장제스의 요청으로 웨더마이어 장군과 교체되었다. /네이버

 

 

 

 

1883 - 영국의 화학자 노먼 호어스(Haworth, Norman) 출생

호어스 [Haworth, (Walter) Norman, 1883.3.19~1950.3.19]

영국의 화학자.

탄수화물과 비타민 C의 화학구조를 결정한 공로로 스위스의 화학자 파울 카러와 함께 1937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그는 1912년에 세인트앤드루스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파이프에 있는 동안 그는 영국의 화학자 제임스 어빈, 토마스 퍼디와 함께 당류·녹말·셀룰로오스 등의 탄수화물에 관한 연구를 했다. 그들은 당류가 직선형이기보다는 고리형 탄소 배열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 당 분자들의 고리형 표시는 호어스 투영식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25년에는 버밍엄대학교 화학과 학과장이 되었는데, 거기에서 그는 단당류와 구조적으로 비슷한 비타민 C에 관한 연구로 연구방향을 돌렸다. 1934년에 영국의 화학자 에드먼드 허스트와 함께 비타민을 합성하는 데 성공했는데, 이것은 인공으로 만든 최초의 비타민이었다. 이 성공은 유기화학 지식에 귀중한 보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의료용으로 사용하는 비타민 C를 값싸게 생산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1947년 기사작위를 받았다. /브리태니커 

 

 

  

 

1873 - 독일의 작곡가 막스 레거(Reger, Max) 출생

레거 [Reger, Max, 1873.3.19~1916.5.11]

독일의 작곡가.

바이에른주() 브란트 출생. 아버지에게 오르간 ·바이올린 ·첼로를,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다시 H.리만에게 작곡을 배웠다. 1890∼1896년 프로이덴베르크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이론을 가르치고 1905년에는 뮌헨 왕립아카데미에서 작곡과 오르간 교수, 1911년에는 작센의 마이닝겐공()의 궁정악장 등을 역임하고, 이 사이 예나대학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레거는 전통적인 수법에 근거한 형식감()이 뚜렷한 의고전주의적()인 음악을 장기로 삼아 변주곡 ·푸가 ·실내악 ·가곡 등을 다수 작곡하였다. 복잡한 선적() ·화성적 발전을 수반하는 그의 음악은 흔히 난삽()하다는 평판이 있으며, 오페라나 표제음악은 한 곡도 쓰지 않았다. 대표작으로 《힐러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1907) 《모차르트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1914) 등이 있으며, 오르간곡 ·가곡 ·피아노곡 ·합창곡 ·실내악곡은 독일에서 높이 평가된다. /네이버

 

 


 

1860 - 미국의 정치가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Bryan, William Jennings) 출생

브라이언 [Bryan, William Jennings, 1860.3.19~1925.7.26]

일리노이주() 출생. 네브래스카주에서 변호사로 활약하다가 1890년과 1892년에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896년에는 민주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어 은화()의 자유 주조()를 주장하는 등 서부 농민의 입장을 대표하여 선거운동을 벌였으나 낙선하고 1900년과 1908년에도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역시 공화당 후보에게 패하고 말았다.

1912년 민주당의 대통령후보 T.W.윌슨의 당선을 위하여 힘썼고, 1913년 국무장관이 되어 중립외교를 추진하던 중 루시타니아호() 사건을 계기로 제1차세계대전에 대처하는 방책을 둘러싸고 윌슨 대통령과 의견 차이로 1915년 국무장관직을 사임하였다. 안으로는 금권정치를, 밖으로는 제국주의를 반대하여, 평화유지에 힘쓴 진보파 정치가로 알려져 있다. /네이버

 

 


 

1848 - 미국의 전설적인 서부 개척자 와이어트 어프(Earp, Wyatt) 출생

어프(업) [Earp, Wyatt Berry Stapp, 1848.3.19~1929.1.13]

술집주인·도박사·보안관·총잡이·사기꾼으로 전전했다. 스튜어트 N. 레이크가 업의 도움을 받으며 쓴 〈와이엇 업, 변경의 보안관 Wyatt Earp, Frontier Marshal〉(1931)이 그에 대한 첫 주요전기로, 이 전기를 통해 용감무쌍한 보안관으로서의 그의 이미지가 형성되었는데, 이 이미지는 다소 각색된 것이었다.

와이엇은 C.제임스(1841~1926), W.버질(1843~1906), 모건(1851~82), B.워런(1855~1900) 등 4형제와 함께 어린시절을 일리노이와 아이오와에서 보냈으나 남북전쟁이 끝날 무렵(1864) 부모를 따라 캘리포니아의 샌버나디노로 이주했다. 1868년 이들 가족은 다시 일리노이로 돌아왔으나 와이엇과 버질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 유니언퍼시픽사의 철도 승무원으로 잠시 일했다. 가족들이 미주리 주 라마르로 이사한 뒤 1870년 와이엇은 결혼했고 지역 경관으로 선출되었다. 아내가 장티푸스로 죽자 경관을 그만두고 인디언 특별보호구와 캔자스의 여러 소도시들을 떠돌아다녔다. 그뒤로도 경관으로서 위치토(1876~77)·도지시티(1877~78)에서 근무했고 블랙힐스의 금광을 찾아 떠나기도 했다(1877~78). 도지시티로 돌아와 부보안관(1878~79)으로 일하면서 동시에 도박사로도 이름을 날렸고 독 홀리데이와 뱃 매스터슨 같은 총잡이와 사귀었다. 2번째 아내와 함께 도지시티를 떠난 그는 뉴멕시코를 거쳐 캘리포니아로 갔으며 잠시 웰스파고사 경비원으로 일하다가 1878년 애리조나 주 톰스턴의 와일드웨스트라는 소도시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그의 식구는 거의 다 모여 살면서 땅을 사들이고 사업을 했으며 그는 오리엔탈 살롱의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도박에도 열중했다. 둘째 형 버질은 이 도시의 보안관이 되었다. 1881년 아이크 클랜턴이 이끄는 폭력단과 그의 식구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고 마침내 그 유명한 O.K. 목장의 결투가 벌어졌다(1881. 10. 26). 클랜턴의 일당과 이에 맞선 업가의 3형제(버질·와이엇·모건) 및 독 홀리데이의 결투였다. 클랜턴 일당 중 3명이 죽었고 클랜턴과 다른 1명은 도망쳤다. 와일드웨스트 주민들은 버질이 범죄자들과 싸운 것이 아니라 살인을 저질렀다고 보고 그를 보안관 자리에서 쫓아냈다. 1882년 3월 모건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암살자들의 손에 죽었고 뒤이어 와이엇과 동생 워런, 그리고 친구 몇 명이 적어도 2명의 용의자를 죽였다. 와이엇은 살인혐의를 받고 처음에는 콜로라도로, 그다음에는 서부의 신흥도시로 옮겨다니다 캘리포니아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치안업무·도박·광업·부동산업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삶을 꾸렸다. /브리태니커

 

 


 

1844 - 핀란드의 소설가, 극작가 민나 칸트(Canth, Minna) 출생

칸트 [Canth, Minna, 1844.3.19~1897.5.12]

정식 이름은 Ulrika Vilhelmina Canth. 결혼 전 성은 Johnsson. 젊어서 남편을 잃고 일곱이나 되는 아이들을 양육, 40세를 지나서 문필생활을 시작했다. 입센류(流)의 사회극 《노동자의 아내 Tymiehen Vaimo》(1885)로 인정을 받았다. 이에 이어진 《불운의 아이들》(1888)도 같은 경향이나, 만년의 《목사의 가정 Papin perhe》(1891) 이후는 톨스토이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이 밖에 《슐비 Sylvi》(1893) 《안나 리사 Anna Liisa》(1895) 등의 희곡이 있다. 핀란드의 사실주의 극문학의 선구자이다. /네이버

 

 


 

1821 - 영국의 탐험가, 외교관, 동양학자 리처드 버턴(Burton, Richard) 출생

버턴 [Burton, Richard (Francis), 1821.3.19~1890.10.20]

[역사속의 인물] 리차드 버턴 경

이만큼 多才多能(다재다능)할 수는 없다.

리처드 버튼(Sir Richard Francis Burton)경만큼 모험심과 학구열을 겸비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19세기의 '인디애나 존스'였다. 이슬람 성지 메카와 나일강, 아프리카 서부해안 등을 탐험했고 수많은 책을 썼다. 무엇보다 語學(어학)의 천재였다. 유럽은 물론 아시아·아프리카의 29개 언어를 자유자재로 썼고 그 방언까지 줄줄 읊었다.

1821년 오늘 영국 토르키에서 육군 대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언어 습득에 탁월했고 연구실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익혔다. 로마 여행 중 집시 여자와 잠깐 사귈 때도 집시 말을 배웠을 정도였다. 21세 때 옥스퍼드대에서 학칙 위반으로 퇴학당한 뒤 인도에서 육군에 입대했다.

젊을 때는 군인, 외교관으로서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고 40대 이후에는 1890년 죽을 때까지 저술활동에 주력했다. 性(성)에 대한 취미도 독특했다. '야한' 내용으로 가득한 '아라비안 나이트'(千日夜話), '카마 수트라'(인도 바라몬교의 성애 교전)를 맨 처음 완역한 것도 바로 그다.

박병선 사회1부장 lala@msnet.co.kr /매일신문 2009년 03월 19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2376&yy=2009

 

 


 

 

  

- Scotland, 10 Pounds (Banknote)

 

1813 - 영국의 선교사, 남아프리카 탐험가 리빙스턴(Livingstone, David) 출생

리빙스턴 [Livingstone, David, 1813.3.19~1873.5.1]

스코틀랜드의 블랜타이어 출생. 가난하여 글래스고 인근의 방적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하면서 고학으로 글래스고대학에서 그리스어(語) ·신학 ·의학을 배웠다. 1840년 런던 전도협회의 의료선교사로서 남아프리카에 파견되어, 1841년부터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오지에까지 들어가 전도사업에 진력하였는데, 뒤에는 교역 루트 탐색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1852∼1856년에는 케이프타운을 출발하여 육로로 서안(西岸)의 루안다를 거쳐 대륙을 횡단하여 동안(東岸)의 켈리마네까지 이르러 아프리카 횡단여행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때 빅토리아폭포와 잠베지강(江)을 발견하였다.

1856년 귀국하여 《남아프리카 전도여행기:Missionary Travels and Researches in South Africa》(2권, 1857)를 출간하고, 1858년 켈리마네 주재 영국 영사로 부임하여 니아사호(湖:말라위) 등을 탐험, 인근의 ‘노예사냥’ 실태를 폭로함으로써, 노예무역 금지에 이바지하였다. 1864년 다시 귀국하여 《잠베지강과 그 지류:Zambesi and its Tributaries》(2권, 1865)를 발간하고, 1866년에 다시 아프리카로 건너가 나일강의 수원조사에 착수하였다.

1871년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콩고강 지류에 이르렀으나 열병에 걸려 사경에 빠졌는데, 탕가니카 호반의 우지지에서 H.스탠리의 수색탐험대를 만나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그 후 스탠리 일행과 함께 조사를 계속하다가, 1873년 방궤울루호 부근 마을에서 이질(痢疾)로 사망하였다. 이때의 탐험기록은 《중앙아프리카에서의 리빙스턴의 최후 일지:The Last Journals of David Livingstone in Central Africa》(2권, 1874)에 있다. /네이버

 

 

 

- Bosio and Louis XIV              - Bosio

 

- 'Nymph Salmacis'                                   - 'Hercules' 

 

1769 - 프랑스의 조각가 프랑수아 조제프 보시오(Bosio, Francois Josef) 출생

보시오 [Bosio, Francois Josef, 1769.3.19~1845.7.29]

François Joseph Bosio

Baron François Joseph Bosio (19 March 1769 – 29 July 1845) was a French sculptor who achieved distinction in the first quarter of the nineteenth century with his work for Napoleon and for the restored French monarchy.

Biography

https://en.wikipedia.org/wiki/Fran%C3%A7ois_Joseph_Bosio

 

Francois-Joseph Bosio Biography

(b monaco, 19 march 1768; d paris, 29 july 1845). french sculptor of monegasque birth. he trained in paris in the studio of augustin pajou in the period 1785–8. he was an officer in the french army in italy during the revolutionary wars, but by 1802 he had resigned his commission. he stayed in italy, presumably studying and practising as a sculptor until his return to paris in 1807. thanks to lorenzo bartolini he was employed to work on some of the stone bas-reliefs (1807–10; in situ) for the colonne de la grande armée in the place vendôme, paris. his first exhibit at the salon was cupid shooting his arrows (plaster; untraced) in 1808. a marble version (st petersburg, hermitage) was ordered by empress josephine. reminiscent of giambologna’s mercury , this neo-classical work was completed in 1812.

http://www.artfact.com/artist/bosio-francois-joseph-q0kiynjoz6

 

 


- St. Agnes'                                - 'St. John'


- 'Jesus and Angel'                    - 'Cano, by Velazquez' 

  

- 'Virgin'                                - 'The Scourging at the Pillar' 

 

  

1601 - 스페인의 화가, 조각가, 건축가 알론소 카노(Cano, Alonso) 출생

카노 [Cano, Alonso(Alonzo), 1601.3.19~1667.9.3]

다재다능해 스페인의 미켈란젤로라고 불렸으며 개인적으로는 험난한 생애를 보냈지만 작품은 우아하고 이해하기 쉬운 종교적 내용을 담고 있다. 1614년 세비야로 이주한 뒤 후안 마르티네스 몬타녜스 밑에서 조각을, 프란시스코 파체코 밑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화가 야노 이 발데스와의 다툼으로 1637년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는 마드리드로 가서 궁정의 총애를 얻었다. 1644년 자기 아내를 살해한 혐의를 받게 되자 발렌시아로 달아나야만 했고 그로 인해 궁정화가로서의 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후 펠리페 4세에게 간청하여 1652년 그라나다 대성당의 참사회원 직위에 오르게 되었지만 1656년 부정을 저질러 쫓겨나고 말았다. 그는 마드리드로 돌아가 성직자가 되었으며 그라나다 대성당의 수석 건축가로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직위를 유지했다. /브리태니커

 


 

- 'The Newborn'                                                             - 'Saint Thomas' 


- 'Saint Joseph Charpentier'                          - 'Adoration of the Shepherds'
 

 

1593 - 프랑스의 화가 조르주 드 라 투르(La Tour, Georges de) 출생

라 투르 [La Tour, Georges de, 1593.3.19~1652.1.30]

주로 촛불 비치는 장면을 그린 프랑스의 화가. 로렌 출생. 빵집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로렌공()의 회계사의 딸과 혼인, 부호가 되어 종교전쟁, 30년전쟁 등 동란시대에 광대한 영지를 소유하는 행운을 안았다. 그러나 민중을 돌보지 않고 농민에게 린치를 가하는 등 반민중적인 행위를 일삼은 탓으로 1652년 1월 일가족이 학살당하였다. 생존시의 그의 행적과는 달리 그 작품에는 종교의 경지로까지 고양된 깊은 인간성에의 통찰이 있으며, 명쾌하고 청아한 분위기와 더불어 명암의 대비, 인물의 기하학적 대치, 세련된 단채화법() 등은 현대미술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 종교적 주제를 다룬 작품이 많으며 그 중에서도 《성탄도》《성()세바스티아누스의 죽음을 슬퍼하는 성()이레누》 등이 유명하다. /네이버

 

 


  

 

1534 -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사, 작가 호세 데 안시에타(Anchieta, Jose de) 출생

안시에타 [Anchieta, José de, 1534.3.19~1597.6.9]

포르투갈 예수회는 그를 브라질 국민문학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겼으며, 100만 명 이상의 원주민을 개종시킨 존경할 만한 시인·극작가·학자로서 높이 평가했다. 포르투갈의 이름있는 집안 출신으로 예수회 교단의 창설자 성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와 친척관계에 있는 것으로도 생각되었다. 포르투갈에서 교육을 받았고, 1551년에는 예수회 학회에 들어갔다. 1553년 7월 13일 처음으로 브라질에 도착했는데 지금의 바이아 지방이었다. 1554년에는 내륙에 있는 예수회의 새로운 정착지 상파울루에 가서 원주민들을 개종시키는 예수회 활동을 도우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원주민을 개종시키고 그들을 도왔는데, 특히 포르투갈 식민지 시대 플랜테이션 경제 속에서 발달한 노예제도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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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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