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 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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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물과 역사/우표로 본 오늘~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 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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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4/01     어업인의 날, 만우절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 

 

  

 

    

 

2010 - 미국의 PC 발명가, 기업가, 의사 에드 로버츠(Roberts, Ed) 사망  

로버츠 [Roberts, Henry Edward "Ed", 1941.9.13~2010.4.1]

빌 게이츠에게 영감을 준 PC발명가-에드 로버츠 타계

빌게이츠와 폴 앨런이 최초로 SW를 만들어 준 바로 그 PC를 발명한 에드 로버츠가 1일 세상을 떠났다고 뉴욕타임스,씨넷 등 주요 외신이 보도했다.  향년 68세.   

그는 다른 초기 컴퓨터 개척자에 비해 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가 발명한 ‘알테어8800’라는 PC를 현대 컴퓨터 역사에서 최초의 PC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에드 로버츠는 MITS(Micro Instrumentation and Telemetry Systems)라는 회사를 설립했고 1975년 알테어8800 PC를 소개한다. 

1975년 파퓰러일렉트로닉스가 알테어 소개 기사를 내보내자 이 기사는  MS공동창업자 폴 앨런의 눈길을 끌었고 그는 이를 빌게이츠에게 보여주었다.  

빌게이츠와 앨런은 재빨리 로버츠에게 가서 알테어의 SW를 만들어주겠다고 말했다. 미팅을 위해 두사람은 로버츠의 회사가 있는 뉴멕시코주의 앨버쿼키로 갔고 거기서 오늘 날의 세계SW산업계의 거인 마이크로소프트(MS)가 설립된다. 1975년 4월 4일이었다.  

비록 그의 산업에 대한 영향이 오래 가긴 했어도 로버츠는 70년대에 MITS를 팔고 컴퓨터 산업계를 떠나 의대로 진학했고 조지아에서 의사가 됐다.   

빌게이츠는 자신의 노츠 웹사이트에서 앨런과 공동으로 그에 대한 추모글을 썼다.    
빌 게이츠는 “에드는 진정한 PC혁명의 개척자였으며 그 스스로 그럴 만 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유머가 있는 열정가였으며 항상 우리를 포함해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을 돌보았다”고 썼다.  

앨런은 로버츠가 컴퓨팅부문에서만이 아니라 진정한 정신적 스승이었다고 말했다.   

앨런은 “에드는 빌과 내가 함께 시간을 보낸 최초의 기업가였고 우리는 그에게서 비즈니스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죠”라고 이메일에서 그에 대해 회고했다.

게이츠는 지난주 병을 앓고 있는 로버츠에게 조지아로 병문안을 다녀왔다.

"에드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려고 했어요.그리고 우리는 항상 그에게 고마워했지요.(이 두사람은 컴퓨터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훨씬 전부터 컴퓨터에 재미를 들여 왔었다.)“라고 게이츠와 앨런은 기억했다. 

이어 이들은 “우리가 처음으로 테스트 안된 SW를 그의 알테어컴퓨터에서 작동한 날은 많은 위대한 일들의 시작이었죠. 우리는 앨버쿼키 66번 도로바로 옆에 있는 MITS사무실에서 에드와 함께 한 많은 즐거운 일들을 기억할 겁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어떤 일도 그 때 거기서의 일들만큼 즐겁지는 못할 겁니다” 라고 적었다.

이재구 국제과학전문기자 jklee@zdnet.co.kr /[지디넷코리아] 2010.04.02 / PM 07:00

http://www.zdnet.co.kr/news/news_view.asp?artice_id=20100402181433

 

 

 

 

2008 - 추억의 흥행작만 상영하는 허리우드 극장

허리우드 극장이 오는 4월1일 <벤허>를 시작으로 ‘추억의 흥행작 전용극장’으로 바뀐다. 현재 재개발을 앞둔 드림시네마에서 <더티댄싱>을 상영하고 있는 즐거운시네마의 김은주 대표는 “30대부터 50대 관객을 겨냥한 추억의 영화를 상영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벤허> 이후 오는 4월24일에는 이승현 주연의 <고교얄개>를 재개봉할 예정. 베이징올림픽이 열리는 올 8월에는 한·중 합작영화로 국내에서 약 27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던 진추하 주연의 <사랑의 스잔나>를 개봉할 계획이다. 현재 즐거운시네마는 <영웅본색> <첩혈쌍웅> 등의 영화도 재상영을 위해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씨네21 취재팀 /씨네21 뉴스 2008.03.31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1001001&article_id=50685

 

 

 

 

2004 - 경부고속철도 1단계 개통 운행개시

지난 4월1일 고속철도 시대가 열린 이래 우리나라는 시간의 벽을 넘는 경험을 했다. KTX가 서울과 부산 사이를 2시간 40분 만에 주파해 단일 생활권의 개념을 중부 지역에서 남부지역까지 확대시켰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물류의 중심인 경부선을 이처럼 빠른 속도로 오갈 수 있게 된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혁명적 변화라 할 수 있다. 현재 대구 이남 지역에서는 2010년 경부고속철도 2단계 개통을 맞추기 위해 한국철도시설공단 영남지역본부와 시공사, 감리단이 혼연일체가 되어 불철주야 땀을 흘리고 있다. 지난 도롱뇽 소송의 고등법원 승소 이후 그동안 미뤄져 왔던 공사가 재개되면서, 먼지가 쌓여가던 공사 장비들이 쉼 없이 돌아가고 있다.

지난 1992년 공사가 시작된 경부고속철도는 올해 4월 1일 대구까지의 신선 건설을 마치고 1단계가 개통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 개통은 아니다. 아직 2단계 공사가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온전한 고속철도의 묘미를 맛보지 못한 것이다.
현재 공사가 진행 중인 2단계 구간은 대전·대구 도심구간 신선의 지상화 건설과 대구~경주~부산을 잇는 구간을 건설하는 것으로 2010년까지 완전 개통될 예정이다. 1단계 구간을 합쳐 전체 구간의 연장은 총 4백12km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중간 정차 하지 않고 내달릴 경우 1시간 56분이 걸린다. 어떤 악천후 속에서도 문제없이 달릴 수 있는 꿈의 교통수단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철도신문 2004-12-24  

http://railnews.korail.go.kr/20041205/01471.html

 

 

 

 

 

2003 - 홍콩 출신의 영화배우, 가수 장궈룽[] 자살

장궈룽 [장국영, , Leslie Cheung, 1956.9.12~2003.4.1] 

홍콩 영화배우 장국영 옥상에서 투신자살

홍콩의 대표적인 영화배우 겸 가수 장궈룽(장국영·레슬리 청)이 숨졌다고 홍콩 방송들이 1일 보도했다. 향년 47. 장궈룽은 이날 오후 홍콩의 원화둥팡호텔의 옥상에서 떨어져 숨진 채 발견됐다.

홍콩 언론들은 그가 “최근 정신적 문제로 시달렸다”는 메모를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며, 자살로 보인다고 전했다. 그러나 홍콩 경찰은 ‘청’이란 성을 가진 이가 죽었다는 사실 외에 자세한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1979년 데뷔한 장궈룽은 홍콩 누아르 <영웅본색>의 경찰역으로 깊은 인상을 심은 뒤, <패왕별희> <해피 투게더> 등의 대표작을 남겼다. 쉰이 가까운 나이에도 미소년의 미소를 지닌 그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알려진 중국권 배우 가운데 한명이었다.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 /한겨레 2003.04.01(화) 23:21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3/04/005000000200304012321674.html

 

 

 

- 남녀고용평등주간 기념 (2003.4.1. 발행)

 
2001 - 남녀고용평등주간 기념

남녀고용평등강조주간은 2001년부터 남녀고용평등법 시행일(1988년 4월1일)에 맞춰 해마다 4월 첫째 주를 기념한다. 
http://media.daum.net/society/nation/view.html?cateid=100003&newsid=20090331182744576&p=newsis 

 

‘남녀고용평등주간’은 성차별적 고용관행을 해소하고 고용평등의식을 확산시킴으로써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를 촉진하고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하여 노동부가 지난 2001년부터 남녀고용평등법 시행일을 기준으로 매년 4월1일부터 4월7일을 설정해 운영해오고 있다. /안동인터넷뉴스

http://www.adinews.co.kr/ArticleView.asp?intNum=8818&ASection=001001

 

 

 

 

2001 - 밀로셰비치 전 유고연방 대통령 체포

슬로보단 밀로셰비치(59) 전 유고 연방 대통령이 자택을 급습한 세르비아 특수경찰과 26시간 대치 끝에 2001년 4월 1일 새벽 경찰에 투항, 체포돼 교도소로 이송됐다. 유고연방 세르비아공화국의 두산 미하일로비치 내무장관은 이날 “밀로셰비치가 체포됐다”고 발표했다. 블라단 바티치 법무장관은 밀로셰비치가 일단 30일간 구금에 처해졌다고 밝히고, “권력남용 혐의 등이 입증되면 5~15년 징역형에 처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밀로셰비치는 이날 심문에서 권력남용과 공금횡령 등 자신의 혐의를 전면 부인하면서 결백을 주장했다고 그의 변호인인 토마 필라 변호사가 밝혔다.

한편 미국을 비롯한 나토 회원국들은 지난 1999년 국제전범재판소에 `코소보 거주 알바니아계 주민들 학살 및 강제추방` 혐의로 기소돼 있는 밀로셰비치의 신병 인도를 촉구했다. /조선

 

 

 

 

1995 - 영국의 도예가 리(Rie, Lucie) 사망

리 [Rie, Lucie, 1902.3.16~1995.4.1]

결혼 전 성(姓)은 Gomperz.

그녀의 독특하고 복합적인 이장(泥漿)의 표면 처리와 독창적인 소성기법은 영국의 모든 젊은 세대 도예가에게 영향을 미쳤다. 리는 필누스 학교와 공예미술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녀의 초기작품은 후기 신고전주의, 유겐트슈틸(1910), 현대주의, 일본양식을 통합한 것이었다. 1938년 제2차 세계대전중 영국에 정착한 그녀는 세련된 도자기 단추를 만들어 팔아 생활했으며, 1947년 독일 태생의 한스 코퍼와 함께 작업하기 시작했다.

1949년 도예가로서는 처음 개인전을 가졌고 1967년 문화원 회고전, 1967년 로테르담과 1972년의 함부르크에서의 한스 코퍼와 2인전, 1978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주요 전시회 등을 열었다. 그리고 1981∼82년 런던 세인스베리 전시장과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1991년 여왕으로부터 대영제국 3등훈장을 수여받았다. /브리태니커

 





1991 - 미국의 무용가 마사 그레이엄(Graham, Martha) 사망  

그레이엄 [Graham, Martha, 1894.5.11~1991.4.1]

미국의 무용가.

1894년에 태어나 펜실베니아 주 피츠버그 부근의 소도시인 앨러게이니 마을에서 14세가 될때까지 살았다. 그녀의 아버지의 조상은 아일랜드 이주민이었다. 정신과 의사였던 아버지 조지는 맏딸 마사에게 자애로운 아버지였으며 어머니 제인 비어즈는 청교도 개척자의 후손으로 엄격하면서 깊은 신앙심을 갖도록 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마사가 천식을 앓게 되자 마사의 가족은 1908년 펜실베니아를 떠나 캘리포니아 산타 바바라로 이주하였다. 마사는 1911년 로스 세인트 데니스의 무용 공연을 관람한 후 무용가가 되기로 결심하였으나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쳐 컴노크(Commock)학교에 진학하여 교양 교육과 더불어 무용 공부를 병행하게 되었다. 
1916년 세인트 데니스와 무용가이자 사업가인 T.숀의 데니숀 무용학교에 들어가 1920∼1923년 데니숀무용단에서 활약하였으며, 1926년 뉴욕에서 처음 발표회를 열었다. 그 후의 작품은 독무와 군무를 합하여 140개가 넘으며, 많은 준재()도 길렀다. 모던댄스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20세기 최대의 독창적인 무용가 중 한 사람이다. 그녀가 출연한 무용영화로 《어느 무용가의 세계》(1957)가 있고, 제자들에 의해 발표된 명작에 《애팔래치아의 봄》(1944) 《밤의 여로()》(1960) 등이 있다. /네이버

 

 

 

- 올림픽복권, 제1회                                    (추첨일 : 1983년 4월 10일)

 

1983 - 1억원 올림픽복권 발행

올림픽복권 [The Olympic Lottery] 

서울 올림픽 대회 조직위원회가 1988년 서울에서 개최되는 제24회 올림픽 대회 기금 및 국민주택기금의 마련을 위해 발행한 복권.

1983년 4월 10일부터 1988년까지 매주 일요일마다 추첨을 실시해 왔다. 이 복권은 100,000번부터 599,999번까지 50만 매를 1개조로 하여 1조부터 5조까지 5개 조 250만 매를 매각한 후 공개추첨에 의해 당첨번호를 결정하고 공고를 거쳐 복금()을 지급하였다. 복권 1매의 판매가격이 500원이므로 매진되는 경우 수입액은 12억 5000만 원이고, 복금의 총액이 지급되는 경우 지출액은 6억 400만 원으로 매주 6억 4600만 원의 수익을 얻게 된다. 한편 당첨자(100만 원 이상)는 15 %의 소득세를 공제한 잔액을 복금으로 수령하였는데, 이 업무는 과거 주택복권 발행처이던 한국주택은행에서 대행하였다. (발췌) /네이버 

 

 

 

   

  

1979 - 이란 회교공화국 선포 

이란에서는 1979년 회교혁명으로 팔레비왕조가 붕괴되고 이란이슬람공화국이 수립되었다. 3월 30일 국민투표에 이어, 4월 1일 이란이슬람공화국(Jomhuri-ye Eslami-ye Iran) 수립이 선포되고 최고지도자에 A.호메이니(Khomeini, Ayatollah, 1900~1989)가 추대되었다.
그 해 12월 2일 국민투표로 채택된 신헌법에 따라 국가의 최고지도권은 종교법학자인 최고지도자에게 부여되며, 모든 자유는 이슬람의 원칙에 반하지 않는 한에서만 인정된다. 이슬람법에 위배되는 법률은 제정할 수 없으며 이를 감시하기 위해 성직자 및 법조계 대표 12인으로 헌법수호평의회를 구성한다. (발췌) /naver

 

 

 

 

 

 

1976 - ‘애플’ 창립

[어제의 오늘]1976년 ‘애플’ 창립

ㆍ잡스, 컴퓨터·모바일 혁명 이끌어

한 입 베어문 모양의 무지개색 사과. ‘애플’이라고 하면 빨간색 과일보다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생산하는 미국의 기업이 먼저 떠오를지도 모른다.
1976년 4월1일, 전기기계에 심취해 있던 고교 동창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이 ‘애플 컴퓨터’를 창립했다. 틈틈이 컴퓨터를 설계했던 워즈니악이 1976년 애플 I이 되는 컴퓨터를 디자인했고 잡스가 워즈니악을 설득해 애플을 설립했다. 애플 I은 홈브루라는 이름의 클럽에서 세상에 공개됐고 애플은 77년 1월 주식시장에 상장됐다.
특유의 사과 로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컴퓨터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이 독이 든 사과를 한 입 베어물고 죽었다는 점에 착안했다는 주장이 가장 유력하다.
애플 I은 모니터도 없고 디자인도 투박했으나 의외로 큰 반응을 보이며 판매에 성공했고 애플 II는 개인용 컴퓨터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 IBM과 마이크로소프트 연합으로 인해 애플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IBM이 다른 협력사들에 개방적인 하드웨어를 선보인 반면, 애플사는 폐쇄적인 하드웨어로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애플은 84년 최초로 매킨토시를 내놨다.
잡스는 애플의 ‘탄생과 부활’을 책임졌다. 실적 부진과 내분으로 85년 애플을 떠났던 잡스는 97년 최고경영자로 복귀했다. 이듬해 애플은 본체와 모니터를 일체화한 아이맥을 선보였고 이는 애플 부활의 신호탄이 됐다. 아이맥은 발매 다섯 달 만에 거의 80만대가 팔렸고 애플은 93년 이래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하게 된다.
잡스가 돌아온 애플은 컴퓨터 회사에서 한 단계 나아가 모바일 혁명을 주도했다. 2001년에는 아이팟을 출시하고 온라인 음악 판매 서비스인 아이튠즈 뮤직 스토어를 열어 한 곡당 99센트에 판매했다. 2007년에는 터치스크린 기반의 아이팟, 휴대전화, 모바일 인터넷이라는 세 가지 기능을 가진 아이폰을 세상에 소개하며 스마트폰 시장을 선도했다. 그리고 지난해 태블릿 PC인 아이패드까지 휴대용 전자기기 시장의 선두주자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검은색 터틀넥 스웨터에 청바지, 운동화를 고수하는 잡스의 패션에서부터 2004년 췌장암 수술 이후 또다시 불거진 건강문제까지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세상의 관심이다. 지난 3월 병가를 내고 6주 시한부설까지 돌았으나 아이패드 2 프레젠테이션에 모습을 드러내 주변의 우려를 잠재웠다.
이윤주 기자 runyj@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1-03-31 21:23:0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3312123065&code=100100

 

 

 


- 'Bird Monument'                                 - 'Apres Nous La Maternite'

 


- 'Where Cardinals are born'                          - 'Everyday Homelife'

 

 

 

1976 - 독일의 화가, 조각가 에른스트(Ernst, Max) 사망  

에른스트 [Ernst, Max, 1891.4.2~1976.4.1]

독일의 화가·조각가.

쾰른 근처의 브륄 출생. 본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1922∼1941년 파리에 거주하면서 최초의 콜라주전()을 열고(1920), 1924년 이후로는 초현실주의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프로이트적인 잠재의식을 화면에 정착시키는 오토마티슴을 원용하였지만, 결국 1925년에 프로타주(Frottage)를 고안하여 새로운 환상회화의 영역을 개척하였다. 주제는 주로 황폐한 도시 혹은 산호초() 같은 이상한 풍경 등이었으며, 내용과 표현력의 일치가 뛰어나 17세기 네덜란드의 이색 화가 H.P.제헤르스나 마니에리스트의 기법을 훌륭하게 자기의 것으로 소화하였다.

1941년 미국으로 건너가 한때 원시미술에 공명하기도 하고 미국 체재 중 현대미술 수집가인 페기 구겐하임과 결혼하였으며 1951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받아 대가로 인정받았으나, 이 수상으로 상업주의에 굴복하였다는 이유로 정통파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제명당하였다. 작품으로 《새》 《신부의 의상》 《조가비의 꽃》 등이 있다. /네이버

 

 

 

   

1970 - 포항종합제철 공장 착공 

철강공업종합육성계획

(발췌) 정부는 종합제철소 건설의 강력한 추진을 위하여 사업주체로 국영기업체 형태인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POSCO)를 설립하였고, 한일국교 정상화에 따른 청구권자금 73.7백만 불과 경제협력자금으로 수출입은행에서 50.0백만 불 공여의 차관협정이 체결되고, 일본의 야와타제철, 후지제철, 니혼강관 등 3사로부터 기술은 제공받음으로써 종합제철소 건설이 시작될 수 있었다. 
1970년 4월 1일 조강 연산 103만 톤 규모의 종합제철공장 건설에 착공하여 1973년 7월 3일 포항제철소 1기 설비가 준공되고, 1985년 12월 5일 광양제출소 건설에 착공하여 1987년 5월 7일 광양제철소 1기 설비가 준공되었으며 1992년 10월 2일 포항제철소 및 광양제출소 조강 연산 2,080만 톤 규모의 종합 준공으로 대역사가 마무리됨에 따라 철강산업이 우리나라의 기반산업으로 본격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국가기록포털 국가기록원

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1648 

 


 

 

1968 - 향토예비군 창설

우리나라 국방 사상 민방위의 새기틀을 마련하는 향토방위군 창설식이 1968년 4월 1일 오후2시 대전 공설운동장 메인스타디움에서 박대통령을 비롯한 시민 약 15만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됐다.
같은 해 1월 21일 청와대에 무장공비가 급습하고 이어 23일 미국 정보수집 보조함 푸에블로호가 북한군에게 나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정부는 국민의 안보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예비역 장병들을 조직, 평시에는 사회생활을 하고 유사시에는 향토방위를 전담할 비 정규군 조직 예비군인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기에 이른다.
향토예비군의 건군정신은 우리의 생명ㆍ우리의 단란한 가정 그리고 내 고장ㆍ내 직장을 ‘내 힘’으로 지킨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바로 이것이 진정한 향토애이며 조국애의 구현인 동시에 우리의 국방철학이었다.
향토예비군의 임무는 ‘첫째, 국가비상사태하에서 현역군부대의 역할을 대신하다. 둘째, 무장공비 침투지역에서의 무장공비를 소멸한다. 셋째, 경찰력만으로 진압할 수 없는 무장소요를 진압한다.’ 등이었다. 거주지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예비군이나 직장예비군으로 편성하며 향토예비군에 관한 사항은 국방부장관이 관장하도록 했다. /조선

 

[향토예비군 연혁]

1961.12.27 - 향토예비군설치법 제정 공포(총 6개 조항)

1968.02.07 - 박대통령, 경전선 개통식에서 250만 향군무장 천명

1968.02.20 - 각의에서 향토예비군설치법 시행령 의결

1968.03.31 - 예비군편성 및 조직완료

1968.04.01 - 대전공설운동장에서 박대통령 임석하에 (향토예비군) 창설식

1968.04.05 - 전국지역 및 직장예비군에게 무기지급

1968.05.29 - 향토예비군설치법 개정 공포(전면기정:총 6개 조항16개 조항)

1968.06.24 - 공비 소탕작전에 최초로 참가(강원도 고성군 현내작전)

1968.07.24 - 국방부 인력차관보 산하에 예비군국 창설(예비군계획과, 동원관리과)

1968.11.02 - 울진, 삼척지역 공비소탕작전 참가
1968.12,28 - 예비군편성 및 조직완료
1969.03.01~03.31 - 전시동원체제와 향토예비군체제에 부함된 갑호부대(현 동원예비군)와 일반예비군 부대(현 향방예비군)로 구분 편성

1970.08.30 - 향토예비군설치법 개정

1975.09.01 - 전투 및 전력화 예비군 편성
(향토예비군-연혁)

http://www.yebigun1.mil.kr/homepage/ext/html/knowledge_01.htm 

 

 

 

 

 

1968 - 포항제철 설립

[창간특집][책갈피 속의 4월 1일] 1968년 포항제철 설립
황무지서 철강도시로… ‘포철 신화’ 시작되다
“오늘을 있게 한 피와 땀, 눈물이 느껴집니다.”(기업인)
“어떤 책보다 감동적인 역사책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대학생)
“포스코 같은 곳을 100개 더 만들어 우리나라를 많이 잘살게 했으면 좋겠어요.”(초등학생)
경북 포항시 남구 괴동동 포스코 본사 옆에 2003년 개관한 ‘포스코 역사관’.
2003년 문을 연 뒤 이 역사관을 방문한 사람은 51만여 명에 이른다. 포항제철소에서 시작해 오늘의
글로볼 기업으로 성장한 발자취를 둘러보고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2년째 방문객을 안내하는 최국향 해설사원(42·여)은 26일 “역사관을 둘러본 뒤 눈시울을 붉히는 분도 꽤 많다”며 “포스코가 더욱 발전해 한국경제를 이끌어야 한다는 당부를 할 때면 저도 가슴이 뭉클해지곤 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포항의 명소나 다름없는 포항제철소를 찾은 사람은 1700만 명에 달한다. 890만 m² 크기의 포항제철소를 견학하는 데는 2시간 정도 걸린다.
지난달 23일 중소기업진흥공단 초청으로 포항제철소를 견학한 과테말라 우간다 캄보디아 코스타리카 등 12개 개발도상국 연수단은 제철소를 둘러보고 부러움과 함께 “우리나라도 이런 기업을 꼭 만들고 싶다”는 의지를 다지기도 했다.
종합제철소는 1958년부터 1967년까지 5차례에 걸쳐 시도됐으나 자본과 기술, 정보, 의지 등 모든 요소가 부족해 번번이 무산됐다.
하지만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에 맞춰 종합제철소를 향한 꿈은 다시 꿈틀거렸다. 박태준 현 포스코 명예회장을 비롯한 창립 멤버 34명은 “제철로 나라를 살려보자”는 뚝심 하나로 1968년 4월 1일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를 공식 설립했다.
종합제철소를 적극 지원하며 공사 현장을 13차례나 찾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바닷모래가 날려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상황에서 옆에 있던 박태준 사장에게 “남의 집 다 부숴놓고 제철소가 되긴 되는건가”라고 걱정했다. 박 명예회장은 훗날 “이 말씀은 공장을 준공하지 못하면 죽는 게 좋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고 회고했다.
당시 정부는 기업의 안전성을 위해 공사()를 권유했으나 창립 멤버들은 “기존의 세계적인 철강기업들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 책임 경영을 하고 조직의 기동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주식회사로 출발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러나 출발점에 선 포항종합제철 앞에는 절벽 같은 현실이 버티고 있었다. 세계은행(IBRD)은 “한국의 종합제철 사업은 시기상조”라며 찬물을 끼얹었다. 국내 언론은 “외자 부담이 커 머지않아 거대한 부실기업이 될 것”이라며 반대했고, 국회의원들도 이 같은 논리를 거들었다.
숱한 난관을 이겨내고 1973년 6월 9일 첫 용광로에서 쇳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포스코의 용광로는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5억5000만 t의 쇳물을 쏟아내 조선소와 전자업체, 자동차 공장으로 보내졌다. 창립 당시 16억 원이던 자산은 현재 37조300억 원으로 2만 배가량 증가했으며, 417억 원이던 연간 매출은 30조6000억 원으로 730배가량 늘었다.

1986년에는 이공계 고급인력 양성을 위한 포스텍(포항공대)이 개교했다. 이듬해 전남 광양제철소가 가동된 것도 포항종합제철소의 ‘쇳물’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2007년에는 세계 최초로 기존의 용광로를 대체할 수 있는 친환경 철강제조공법인 ‘파이넥스’를 성공시켜 글로벌 스탠더드로 끌어올렸다.
포스코는 세계 철강기업 평가에서 수익성과 재무구조, 기술개발, 기업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1, 2위 자리를 굳힌 한편 미국 뉴욕, 영국 런던, 일본 도쿄 등 세계 3대 증시에 국내 기업으로는 유일하게 상장해 명실상부한 세계적 철강기업으로 성장했다.
제철소 건설 당시 바닷바람에 날리는 모래를 맞으며 “제철소 건설에 실패하면 오른쪽에 있는 영일만에 모두 빠져 죽자”는 ‘우향우 정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포스코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포항=이권효기자 boriam@donga.com /동아닷컴 2009-04-01 02:58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904010027

 

 

 

  

1967 - 구로공단 준공

[책갈피 속의 오늘]1967년 구로공단 준공

“바로 이곳에서 ‘난쏘공’(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약칭)이 시작되었다.”

작가 조세희는 2004년 11월 서울 구로구 구로동에서 노동문학 강연을 마친 뒤 이렇게 말했다. 정작 그 스테디셀러에서 공간적 배경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경제성장의 그늘, 부자와 빈자의 극명한 대비가 존재했던 1970년대의 상징이 구로공단임은 누구나 눈치 챌 수 있었다.

구로공단은 1967년 4월 1일 준공됐다. 정식 명칭은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 제1단지. 60만 평 땅에 수출 입국의 사명을 띠고 조성된 한국 최초의 공단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허허벌판을 불도저로 밀어붙인다고 수출 공장이 되겠냐며 의심한 사람도 많았지만 우리는 결국 해냈다”며 뿌듯해 했다.

구로공단의 주력 산업은 섬유와 봉제 가발 등 경공업이었다. 근로자의 절반 이상은 여성이었다. 남동생 학비를 벌기 위해 상경한 10대 후반의 ‘누이들’이 ‘한강의 기적’을 일군 일등공신인 셈이다.

이들은 2.5평짜리 판잣집이 빼곡한 이른바 ‘벌집’에 기거하며 오전 7시 반부터 오후 10시까지 일했다. ‘공순이’라는 비웃음을 감내하며 고향 집에 월급을 부쳤고, 배움에 대한 목마름으로 야학을 찾아 졸린 눈을 치켜떴다. 설과 추석 때면 가리봉 오거리에 줄줄이 늘어섰던 ‘귀향 버스’, 소녀의 감수성을 수줍게 분출했던 ‘음악다방’. 이들이 창출한 문화들은 1970년대의 아이콘이 됐다.

구로공단은 대학생들의 의식화 현장이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 운동권 학생들은 위장 취업을 통해 스스로 ‘시다’가 되고 기계공이 되어 노동운동의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한국의 대표적 여성 노동운동가인 심상정(민주노동당) 의원도 그들 중 한 명. 이문열은 소설 ‘구로 아리랑’에서 대학생과 여공의 교감과, 이를 대하는 공권력의 냉혹함을 담담하게 그렸다.

구로공단은 2000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이름이 바뀌면서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굴뚝산업은 중국 등지로 떠나고 정보통신 벤처기업들이 들어섰다. 음울한 이미지를 벗으려 했음인지 지하철역 이름에서도 ‘공단’은 지워졌다. 도시의 변신이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우리의 억척스러운 누이들을 기리는 무엇인가도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쉽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tout554&log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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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 베트남전 반대 시위
역사속 오늘[1966년 4월 1일] 베트남전 반대 시위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한지 1년이 넘은 1966년 오늘!
미국 각지에서 반전시위가 벌어진다.
예비역 군인들은 징집영장을 불태우며 미국의 베트남 참전을 중지하라고 외친다.
이후에도 미국의 병력 파견이 가속화되고 베트남전쟁이 격렬해짐에 따라 반전시위의 불길은 더 거세진다.

/YTN 2011-04-01 금

http://www.ytn.co.kr/article/article_view.php?key=

201104010708293090&s_mcd=0422&s_hcd=

 

 

  

 

1963 - 한국-페루, 국교수립

한국과 페루 양국은 1963년 4월 1일 공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1964년 3월 1일 대사급 외교관계로 승격하였으며, 1971년 8월 1일 주()페루 대한민국대사관을 개설하였다. 1993년 6월 대통령 알베르토 후지모리(Alberto Fujimori)의 방한과 1996년 9월 대통령 김영삼의 페루 방문으로 양국 관계가 여러 분야에서 긴밀해졌다.

페루는 한반도 문제에 대해 원칙적으로 중립·불간섭 태도를 유지하고, 남북한 당사자간의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알란 가르시아(Alan Garcia) 정권시 북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한국의 경제발전 경험을 중시하여 상호 보완적 경제·기술 협력관계 구축에 노력한다. /naver 

 

 

 

  
1962 - 아시아-대양주 우편연합[The Asian and Oceanic Postal Union, AOPU] 발족 

"아시아-대양주 우편연합(AOPU) 창설 제1주년을 기념하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4월 1일에 아시아, 대양주의 지도 및 AOPU를 표시한 봉투를 도안으로 하여 4원권 우표를 발행한다.
AOPU는 아시아, 대양주의 여러나라 간에 단일 우편지역을 형성하여 협약 체결국가 간의 우편관계를 확장, 촉진하고 개선하여 우편업무의 분야에서 협조를 증진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기구는 우리나라와 필리핀이 창설을 제안하고, 필리핀 정부가 18개국을 초청한 바 한국, 중화민국, 일본, 말라야 타일란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이 동 초청을 수락하여 8개국이 1961. 1. 10일부터 23일까지 마닐라에서 11차에 걸쳐 AOPU 협약에 대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를 마닐라 우편회의라 하며 동회의에서 AOPU가 탄생되었고 비준된 전문 24조의 협약은 1962. 4. 1 부터 효력을 발생하게 되었다.
현재 정회원국은 한국, 중화민국, 필리핀, 타일란드, 일본, 라오스, 인도네시아, 호주 등이다."

(우표발행안내) /k-stamp 

 

 

 

  

1960 - 기상위성 ‘티로스-1’ 발사

[책갈피 속의 오늘]1960년 기상위성 ‘티로스-1’ 발사

4월이다. 독일인은 연인의 마음처럼 변화무쌍해 종잡을 수 없는 일을 ‘4월의 날씨(April wetter)’라고 표현한다.

연인의 마음을 자기 뜻대로 좌우할 수 있을까. 다만 예측하고 변화에 대비하는 것이 최선이다. 날씨도 마찬가지. 사람의 의지로 좌우할 수 없으니 예측하고 대비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예측이란 게 만만하지 않다. 20세기 중반까지는 세계 곳곳의 관측소에서 보내 온 기온, 구름의 양, 풍속, 기압 등 자료를 종합해 일기예보를 했다. 그러나 날씨란 변수가 너무나 많고 생물의 몸처럼 유기적이어서 여러 관측소에서 받은 자료만으로는 불충분했다. 적대적인 나라끼리는 자료를 공유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이제 시대는 변했다. 기상청 홈페이지(www.kma.go.kr)에 접속하면 누구나 광범위한 지역의 구름 사진을 볼 수 있다. 구름 사진 동영상을 보면 초등학생도 몇 시간 후에 한반도가 구름에 뒤덮이게 되는지 알 수 있다. 대기권 밖의 높은 하늘에서 지구를 내려다볼 수 있게 되면서 기상 예측은 획기적인 진전을 이루게 됐다.

46년 전인 1960년 4월 1일, 기상위성 ‘티로스-1’이 미국 케이프커내버럴에서 발사됐다. 이에 앞서 14개월 전 기상위성 밴가드 2호가 발사됐지만 고장이 나 제구실을 하지 못했으므로 첫 기상위성의 타이틀은 티로스-1이 차지하게 됐다.

2대의 TV 카메라와 테이프 리코더, 송신기를 장착한 이 위성의 무게는 120kg으로 작다. 하지만 방대한 정보가 담긴 구름 사진과 대기 상태 정보를 속속 보내 왔다. 임무 수행은 78일에 지나지 않았지만 성과는 놀랄 만했다.

이후 소련 중국 등 각국이 기상위성을 잇달아 발사했다. 현재 미국의 고스 위성 시리즈, 유럽의 메테오샛 시리즈, 중국의 펑윈(風雲) 위성 등이 지상 3만5880km의 정지궤도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며 수십억 인류가 농사 등을 준비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날씨나 연인의 마음만큼 변화무쌍한 것이 또 있다. 바로 민심이다. 민심의 동향을 알려 주는 것이 신문 등 언론매체가 아닌가 싶다. 언론매체가 알려 주는 민심의 풍향은 누가 갑자기 바꾸려 한다고 바꿔지는 것이 아니다. 설령 누군가가 기상정보를 조작해도 어차피 내릴 비는 내리고 불 바람은 부는 것처럼.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동아닷컴 2006-04-01 03:00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60401/8291059/1

 

 

 

  

1955 - 김일성, 조선로동당 중앙위 전원회의서 4월 테제 발표 

<4월 테제> '모든 힘을 조국의 통일독립과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하여' 라는 제목의 4월 테제에서 김일성은 남북이 통일되어 전국적으로 반제반봉건민주주의 혁명이 완수될 때까지 북한에서 사회주의 기초건설과업을 철저히 수행하는 것이 남한 민중의 투쟁을 추동하는 힘이 되며, 조국통일을 쟁취하는데 결정적인 역량이 된다고 주장. 이 테제는 
1) 조선혁명의 기본임무로서 미제 침략세력과 그 동맹자인 남한의 지주, 예속자본가, 친일친미파 타도를 통한 조국의 민주주의적 통일과 완전한 민족독립 달성, 

2) 인민경제의 모든 분야에서 사회주의 경제형태의 확대, 강화를 제시.
[4월 1일 오늘의 역사] /리장이상훈

http://blog.daum.net/leejing/17206694 

 

 

 

 

1955 - 독일 국적 항공사인 루프트한자가 최초로 운항 개시 

루프트한자항공 (Deutsche Lufthansa A.G.)

독일의 항공회사. 1953년에 설립된 루프타크(Luftag)항공이 1954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 회사의 전신은 1926년 독일 주요항공회사와의 합병으로 이루어진 독일루프트한자항공(Deutsche Lufthansa)이다. 제2차세계대전 뒤인 1955년에 신규로 시작된 국내·국제선의 영업과 컨베이어(CV-340)도입으로 짧은 기간에 대표적인 국제항공회사가 되었다. 1970년에 유럽 최초로 보잉 747을 도입하여 대량수송 시대의 선두를 달렸다. /야후 백과

 

Deutsche Lufthansa-History

Lufthansa was recreated on January 6, 1953 as Aktiengesellschaft für Luftverkehrsbedarf (Luftag) and was renamed Deutsche Lufthansa Aktiengesellschaft on August 6, 1954. The "new" Lufthansa of 1953 is not the legal successor of the Lufthansa founded in 1926 and which existed during and before World War II. on April 1, 1955 Lufthansa resumed scheduled service within Germany. International operations started on May 15, 1955, with flights to points in Europe, followed by service to New York on June 8 using Lockheed Super Constellations. South Atlantic routes were resumed in August 1956.

http://en.wikipedia.org/wiki/Lufthansa

 

 

 

 

1952 - 헝가리의 극작가, 소설가 몰나르 페렌치(Molnár Ferenc) 사망  

몰나르 [Molnár Ferenc, 1878.1.12~1952.4.1]

헝가리의 극작가이자 소설가.

부다페스트 출생. 부유한 유대계 의사의 아들로 청년시절에는 제네바에 유학하여 법률을 공부하였으나 귀국 후에는 신문기자로 활약하였다. 도시적인 세련된 기지와 해학이 넘치는 콩트와 단편소설을 많이 발표하여 인정을 받았고 희곡에도 손을 대어 경묘한 풍자, 뛰어난 줄거리의 구성, 감상적인 인간애 등이 관객에게 영합되어 세계적 명성을 떨쳤다. 대표적인 희곡으로 《릴리옴 Liliom》(1909) 《근위병 Testör》(1910) 《이리 Farkas》(1912) 《흰구름 Fehér félhö》(1916) 《성() 안의 유희 Játék a kastélyban》(1926) 등이 있고, 아동문학의 걸작으로 꼽히는 소년소설 《팔가()의 소년들 A Pál utcai fíuk》(1907), 제1차 세계대전 때의 일기 《종군기자의 일기 Haditudósító》(1916) 등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 파시즘 정권하의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서 1940년부터 뉴욕에 정주하였다. /네이버 

 

 

 

  

1947 - 그리스의 왕 게오르기오스 2세(Georgios II) 사망  

게오르기오스 2세 [Georgios II, 1890.7.20~1947.4.1]

게오르기오스 1세의 손자로, 1917년 테살로니키 정부(1916년 수립)와 영국 ·프랑스 ·러시아 3국이 최후통첩으로 압박하여 둘째아들 알렉산드로스(재위 1917∼1920)에게 양위한 부왕 콘스탄티노스(재위 1913∼1917, 1920~1922)와 함께 그리스를 떠난 뒤, 1922년 부왕이 퇴위하자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이듬해 왕위에서 물러났으며, 1924년 그리스에 공화제()가 선포되었다. 그 뒤 왕정이 복고()되어 복위하였으나, 1941년 J.메탁사스의 압력을 받아 영국에 망명한 뒤, 1946년 국민투표에 따라 귀국하였다. 그가 죽은 뒤 왕위는 동생 파울로스 1세(재위 1947∼1964)에게 계승되었다. /naver

 

 

 

  

1942 - 중앙선(청량리-경주) 개통

중앙선(中央線)은 서울(청량리역)∼경주시 경주역을 잇는 철도선으로, 길이 연장 382.7 km. 1939년 4월 청량리()∼양평() 구간이 개통되고 1940년에는 양평∼원주() 구간이, 1942년 4월 1일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양평·원주·제천()·영주()·안동()을 지나 영천()에서 대구선()과 접속하며 경주까지 이르는 간선철도이다. 경부선()에 이은 한국 제2의 종관철도로, 연선(沿) 일대의 광산 ·농산 및 임산 개발을 목적으로 부설되었으며, 영서(西) 내륙지방의 개발에 크게 이바지했다.

더욱이 충북선()과 태백선()이 제천에서 교차하고, 경북선()과 영동선()이 영주에서 교차하여 경부선과도 직접 연결되고, 차령산맥()을 넘기 위한 치악산()의 금대()터널과 소백산맥()을 넘기 위한 죽령()터널 등의 루프식 터널(Loop Tunnel)이 있다. /naver

 

 

 

출처 - 다음 카페 philthema (cantona)

 

1941 - 독일 롬멜군 북아프리카 사막전

역사속 오늘[1941년 4월 1일] 독일 롬멜군 북아프리카 사막전

독일이 낳은 비운의 명장 롬멜!
1941년 오늘, 북아프리카의 사막 전차전에서 천재적인 용병술로 영국군을 교란시킨다.
두 달 전 롬멜은 리비아에서 패배 일보 직전에 처한 무능한 이탈리아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게 됐다.
그는 독일 제7기갑사단을 이끌고 북아프리카에서 대담무쌍한 기습공격을 감행해 큰 전과를 올린다.
롬멜은 명성이 높아지면서 '사막의 여우'로 불리게 됐고 그의 전차부대도 '유령 사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궁지에 몰린 영국이 이듬해 몽고메리 장군을 북아프리카 전선에 투입하면서 두 명장은 숙명의 대결을 펼친다.
영국과 독일은 2년 동안 일진일퇴의 접전을 벌이지만 결국 승리의 여신은 영국 편에 선다.
롬멜 사단은 1942년 10월말 패해 튀니스의 독일군 교두보로 퇴각하고 1943년 3월 히틀러는 그를 본국으로 송환했다.
몽고메리와 롬멜은 승패를 떠나 전설적인 명장으로 역사에 남았다.

/YTN 2011-04-01 금

http://www.ytn.co.kr/article/article_view.php?key=

201104010702152326&s_mcd=0422&s_hcd=

 

 

 

 

1940 - 케냐의 환경 운동가, 정치가 왕가리 마타이(Maathai, Wangari) 출생

마타이 [Maathai, Wangari Muta, 1940.4.1~2011.9.25]

케냐의 정치가·환경운동가.

2004년 아프리카 흑인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마타이는 마운트세인트스콜라스티카대학(지금의 베네딕타인대학)에서 1964년 석사학위를 받았고, 피츠버그대학교에서 1966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1년 나이로비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이 대학에서 수의과 해부학을 가르쳤다.

마타이는 케냐여성협의회에서 활동하면서 농촌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나무를 심어 산림 황폐화와 사막화를 늦추고 연료도 확보하면 자연환경 개선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고 생각했다. 그녀가 1977년에 창립한 '그린벨트 운동'는 2000년대 초까지 나무 3,000만 그루를 심음으로써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의 민중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마타이는 2002년에 98%라는 높은 지지율로 케냐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고, 2003년에는 환경·자연자원·산불부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노벨상 위원회는 그녀의 '민주주의, 인권, 특히 여성의 권리를 모두 끌어안으면서 지속가능한 개발을 지향하는 통합적 전략'을 높이 칭송했다. 마타이는 〈그린벨트 운동 : 전략과 경험 나누기 The Green Belt Movement : Sharing the Approach and the Experience〉(1988)의 저자이기도 하다.

마타이는 자서전 〈Unbowed〉(2007, 한국에서는 〈위대한 희망〉이라는 제목으로 2011년 김영사에서 출간)를 출간했다. 또다른 저서 〈아프리카의 도전 The Challenge for Africa〉(2009)에서는 아프리카 지도자들의 무능함을 비판하고, 서방의 도움 없이 아프리카의 문제는 스스로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타이는 〈로스앤젤레스타임스 Los Angeles Times〉, 〈가디언 Guardian〉 등 국제적인 출간지에 자주 기고하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 Philip Roth, Milan Kundera

 

1929 - 체코의 시인, 소설가 밀란 쿤데라(Kundera, Milan) 출생

쿤데라 [Kundera, Milan, 1929.4.1~ ]

소설가 밀란 쿤데라 출생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유명한 밀란 쿤데라가 1929년 4월 1일 체코 모라비아 지방의 지방도시 브륀에서 태어났다. 체코에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나던 1947년, 그는 18세의 나이에 공산당에 가입해 인간과 세계에 대한 낭만적 동경을 품은 시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56년 후르시초프의 등장으로 해빙기를 맞자 그는 평론집 `소설의 기법`에 이어 1963년에 소설을 쓰기 시작, 첫 장편 `농담`을 내놓았다. `농담` 은 그의 이름을 전유럽에 알리게 했지만, 후에 큰 재앙을 불러왔다. 한마디의 사소한 농담 때문에 강제노동소로 끌려간 지식인의 인생유전을 그린 이 소설은 당시 공산주의를 옹호하던 서방의 진보적 지식인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1975년 프랑스 렌대학의 초청으로 체코를 떠나 비교문학교수로 생활했다.

1978년에는 소설 `이별의 왈츠`로 이탈리아의 최우수 외국소설상인 몬테로상을 받는 등 유럽의 일급 작가로서 자리를 굳혔다. 모국어 외에 영어 불어 독일어등에 능통한 그는 파리시민권을 취득하면서 정식으로 망명작가가 됐다. 1984년에 발표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은 전세계에서 밀리언셀러를 기록했고, 1990년에는 유한한 인간의 정신 속에 숨어있는 불멸의 욕망을 그린 소설 `불멸` 을 펴냈다. /조선

 

 

  

- 동아일보 창간 70주년 기념 (1990.3.31 발행)


1920 - 동아일보(東亞日報) 창간
일제는 1919년 3·1독립운동에 큰 충격을 받고 ‘문화정치’를 표방해 이듬해 1월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사신문 등 3개지를 허가했다. 당시 사이토 조선총독은 이에 대해 일본인들이 항의하자 “동아일보는 조선 민족의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가스를 배출시키는 굴뚝이야. 가스를 배출시키지 않으면 쌓이고 쌓여 끝내는 폭발하게 되거든...”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인촌 김성수 선생 등 창간 주도 인사들은 당초 3·1운동 1주년인 1920년 3월 1일자로 창간하려 했으나 자금부족으로 한달 후인 4월 1일 타블로이드판 석간 4면 체제로 창간했다. 당시 발행부수는 1만 부 정도, 구독료는 한 부에 3전(지금의 약 900원)이었다.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를 사시(社是)로 내걸었다. 이 창간정신은 지금도 본보 1면 좌측 상단에 동아일보 로고와 함께 고정 배치되고 있다.

http://www.donga.com/docs/ilbo/html/01_company/company_0601.htm

 

 

 

  

1919 - 유관순,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투옥됨

가족을 따라 지령리교회를 다니던 유관순(柳寬順, 1904~1920)이 13세 때 서울 이화학당의 보통과 2학년에 편입한 것은 여성 선교사인 샤프 앨리스(한국명 사애리시·史愛理施)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충청도 지역에서 선교와 교육 사업에 열성을 바치던 사애리시 부인은 총명했던 유관순과 사촌언니 유예도를 이화학당에 보냈다. 3년 만에 보통과를 졸업한 유관순은 1918년 4월 고등과에 진학하였고, 학교 옆 정동제일교회를 다니면서 민족의식을 키워갔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당의 선배들은 1학년생을 배제했지만 유관순은 담장을 넘어서 시위 대열에 참여했다. 유관순은 친구들에게 “공부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고향에 내려가 독립운동을 벌이자”고 제안했고, 헤어지면서 “독립된 뒤에 만나자”고 다짐했다. ‘칙칙폭폭’하는 기차소리도 ‘대한독립’으로 들린다고 말할 정도로 독립 열망을 품었던 유관순은 고향에 돌아와 천안 일대의 만세 시위 준비에 연락 임무를 맡았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의 만세 시위 때 유관순은 일본군의 무차별 발포로 부모님을 현장에서 잃고 본인과 오빠, 작은 아버지가 투옥되었다. 이듬해 3·1운동 1주년 기념 옥중 시위까지 주도했던 그였지만, 3년 형을 견디지 못하고 1920년 9월 28일 고문 후유증으로 방광이 파열되고 이를 일제가 방치하는 바람에 세상을 떠났다. /조선

 




1917 - 미국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스콧 조플린(Joplin, Scott) 사망

조플린 [Joplin, Scott, 1868.11.24~1917.4.1]

스콧 조플린(Scott Joplin, 1868년 11월24일- 1917년 4월 1일)은 미국랙타임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다.

생애

1867년에서 1868년 사이 텍사스 주린든 근교에서 흑인 노동자 부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출생 시기와 장소는 아직 불분명하다. 1871년에 가족이 모두 텍사카나로 이주했고, 어머니가 백인 소유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면서 그 집들에 비치된 피아노를 접하기 시작했다. 이후 조플린의 부모는 아들에게 저축한 돈으로 피아노를 사주었고, 독일 출신의 음악 교사였던 줄리어스 와이스가 조플린에게 바로크에서 초기 낭만 시기까지의 중요한 피아노 레퍼토리들을 가르쳤다. 동시에 조플린은 흑인 사회에서 유행하던 보드빌이나 랙타임, 케이크워크 등의 여흥 음악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다.

10대 후반부터는 동부 텍사스의 술집이나 클럽 등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초기에는 유럽 정통식의 왈츠폴카, 쇼티시, 마주르카 등의 춤곡과 행진곡을 주로 연주했다. 그러나 1880년대 후반에 가족으로부터 독립해 정식 음악인의 길을 택한 뒤로는 각지의 밴드를 비롯한 음악 그룹들에 고용되어 코넷과 피아노 등을 연주했고, 흑인 전문 교육 기관이었던 조지 R. 스미스 대학에 입학해 정규 음악 이론과 화성학, 작곡법을 배우기도 했다.

1894년에는 미주리 주세덜리아로 이주했고, 1899년 초반에는 최초의 본격적인 랙타임 곡인 '오리지널 랙스(Original Rags)' 를 비롯한 피아노 독주용 소품들을 출판했다. 이어 같은 해 8월에 세덜리아의 음악 출판업자인 존 스타크와 계약하고 '단풍잎 랙(Maple Leaf Rag)' 을 비롯한 랙타임과 여타 장르의 피아노 소품, 가요들을 계속 작곡하고 출판하면서 차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907년에는 뉴욕으로 옮겨가면서 점차 진지한 음악으로 작풍을 바꾸기 시작했고, 스타크는 조플린의 음악이 점점 상업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판단에서 계약을 끊게 되었다. 그러나 조플린은 이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사를 만들었고, 동시에 랙타임 양식을 도입한 두 편의 본격 오페라인 '주빈(A Guest of Honor)' 과 '트리모니샤(Treemonisha)' 를 작곡했다. 그러나 '주빈' 은 악보가 분실 혹은 파기되었으며, '트리모니샤' 는 1915년에 뉴욕의 링컨 극장에서 가까스로 초연 기회를 얻었으나 무대 장치의 미비와 조플린 자신의 피아노 연주만으로 진행된 빈약한 반주, 흑인 청중들의 비난과 냉대 등으로 대실패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계속 작곡을 하고 1916년에는 자신의 랙타임 곡들로 피아노 롤을 만드는 등의 활동을 했으나, 지병이었던 매독으로 인한 정신적 합병증이 악화되기 시작하면서 창작력이 극도로 위축되었다. 1917년 1월에는 맨해튼 주립 병원에 입원했고, 그 해 4월에 타계했다.

사후의 재평가

/위키백과 (2016.11.21) 

 



  

1913 - 컨베이어 시스템 도입한 포드 '모델 T' 생산

1913년 4월1일, 미국 미시간주 하일랜드 파크의 포드자동차 공장에서 컨베이어 시스템을 이용한 자동차가 처음 생산됨으로써 세계 자동차사가 새로 씌어지게 됐다. 자동차 이름은 ‘모델 T’. 1908년에 첫 선을 보여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자동차다. 견고하고 조작이 간단했으며 무엇보다 가격이 저렴했다. 다른 자동차 값이 2100달러였을 때 825달러짜리 ‘모델 T’의 등장은 포드자동차의 신화를 알리는 예고편이었다.

‘모델 T’로 자신감을 얻은 포드는 당시 재봉틀과 콜트권총 생산에서 이미 채택하고 있는 컨베이어 시스템을 참고로 단일모델ㆍ대량생산 방식을 도입한다. ‘1초이상 걷지 않는다’ ‘결코 몸을 구부리지 않는다’ 포드가 구상한 2대 원칙을 충족시킨 컨베이어의 등장은 대당 생산시간을 630분에서 93분으로 단축시켜 연간 7∼8만대에 불과하던 생산량을 이듬해부터 비약적으로 증대시켰다.

그 결과는 자동차 가격을 290달러까지 떨어뜨리는 효과를 보아 세계 자동차 생산대수의 50%로까지 확대시켰고, 1927년 단종될 때까지 모두 1500만대를 보급하는 신기록을 수립했다. 1970년대에 독일의 국민차 폴크스바겐의 ‘비틀’이 이 기록을 깨기까지 단일 모델로선 세계최대 생산기록이었다. /조선 

 

 

 

 

 

1906 - 소련의 항공기 설계자 야코블레프(Yakovlev, Aleksandr) 출생

야코블레프 [Yakovlev, Aleksandr Sergeyevich, 1906.4.1~1989.8.22]

소련의 항공기 설계자.

그의 이름을 딴 일련의 야크(Yak) 전투기 가운데 대부분이 제2차 세계대전중에 소련 전투기로 가장 널리 사용되어 유명해졌다. 1931년 공군 공병학교를 졸업한 직후 피스톤 엔진 항공기와 제트 엔진 항공기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야크-1 전투기를 완성했다. 그의 최초의 제트 전투기인 야크-15는 1945년에 설계되었으며, 야크-17과 야크-23이 뒤이어 나왔다. '비행 마차'라는 별칭이 붙은 그의 성공적인 쌍발 헬리콥터(야크-24)는 여러 개의 세계기록을 수립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미그기(機)의 인기가 높아지자, 민항기의 설계를 시작했고 특히 스포츠용 비행기에 주력했다. 1938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후 1940~56년에 항공산업 부장관(副長官)을 역임하고 그후 설계실장을 지냈다. 그는 스탈린상을 7번, 레닌 훈장을 8번 수상하고, 1976년 소련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브리태니커




  

1883 - 미국의 영화배우 론 체이니(Chaney, Lon) 출생  

체이니(체니) [Chaney, Lon, 1883.4.1~1930.8.26]

본명은 Alonso Chaney.

미국의 영화배우.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라 불렸으며 무성영화시대 소름 끼치는 성격묘사의 1인자였다. 귀머거리에 벙어리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체이니는 어렸을 때 무언극을 배웠다. 그는 형이 이끄는 순회 쇼에서 소품·운송·제작을 맡고 배우로 출연했다. 엑스트라와 단역배우로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해 〈악마 모건의 여자 Hell Morgan's Girl〉(1917)에서 비중있는 조연을 맡았다. 2년 후 그는 〈기적의 사나이 The Miracle Man〉(1919)에 출연하여 스타가 되었다. 그후 10년간 영화계의 가장 훌륭한 성격배우로서 명성을 얻었다. 토드 브라우닝이 감독한 작품에 자주 출연했으며, 〈형벌 The Penalty〉(1920)에서는 다리가 없는 암흑가의 두목 역, 〈노트르담의 꼽추 The Hunchback of Nortre Dame〉(1923)에서는 꼽추 콰지모도 역, 〈오페라의 유령 The Phantom of the Opera〉(1925)에서는 파리 오페라단의 비밀통로를 자주 출입하는 얼굴에 무서운 흉터를 가진 음악가 역, 〈심야의 런던 London After Midnight〉(1927)에서는 경위와 흡혈귀의 이중역 등을 맡았다. 또한 〈그 말을 누가 믿나 Tell It to the Marines〉(1927)·〈도시가 잠잘 때 While the City Sleeps〉(1928)·〈천둥 Thunder〉(1929)에서도 빼어난 연기를 보여 찬사를 받았다. 그의 아들 론 체이니 2세(1907~73, 본명은 크레이턴 체이니)도 여러 편의 공포영화에 출현했다. /브리태니커

 

 

  

 

  1873 - 러시아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라흐마니노프(Rachmaninoff, Sergey) 출생

라흐마니노프 [Rachmaninoff, Sergey Vasilyevich, 1873.4.1~1943.3.28]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 낭만주의 전통의 마지막 대작곡가로 불리는 음악가이며 대표적인 피아니스트이다. 러시아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다. 모스크바 음악원 학생 시절이던 1891년에 첫번째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다. 1897년 첫 교향곡을 작곡했으나 실패로 돌아가는 바람에 2년 이상 작곡활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심리학자 니콜라이 달 박사의 도움으로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1901년에 그의 명성을 확고하게 만든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완성했고, 이 곡을 달 박사에게 바쳤다. 이때부터 그는 1917년 파리로 망명하기까지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다. 그는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다시 망명했다. 널리 알려진〈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Rhapsody on a Theme of Paganini>(1934)은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만년에 들어 스탈린이 그를 1급 예술가로 대우하는 조건으로 귀국을 권유했으나 돌아가지 않고 결국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음악은 19세기 러시아 음악의 서구적인 모스크바 악파의 정통을 이어받아 풍부한 선율과 애수를 띤 서정성을 지니고 있다. /브리태니커

 

"나는 내 진정한 직업을 무엇으로 삼을지 결코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작곡가인지, 피아니스트인지, 지휘자인지. (중략)

나는 너무나 많은 영역에 뛰어들었고, 그 때문에 항상 힘들었다.

나는 내 삶을 최대한 이용하는 데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1866 - 이탈리아 출생의 독일 피아니스트, 작곡가 부조니(Busoni, Ferruccio) 출생

부조니 [Busoni, Ferruccio Benvenuto, 1866.4.1~1924.7.27]

이탈리아 엠폴리에서 클라리넷 연주자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음악을 배웠다. 8세 때 최초의 연주회를 개최하였으며, 12세 때는 자신이 작곡한 《스타바트 마테르 Stabat Mater》를 직접 지휘하였다.
그후 빈과 라이프치히에서 공부한 후 헬싱키·모스크바·보스턴 등 세계 각지에서 피아니스트 겸 교수로서 정열적으로 활약하다가 1894년 베를린에 정착하여 작곡활동에 중점을 두었다. 여기에서 바흐(Johann S. Bach)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의 작품을 개작·편곡하여 명성을 얻었고, 피아니스트로서도 유명해졌다.
드뷔시(Achille C. Debussy)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Pré lude l'aprè s-midi d'un faume》의 독일 초연을 비롯하여 리스트의 주요 작품을 모두 연주하는 등 당대 작곡가들의 작품 연주회도 여러 차례 열었다.
작품에 많은 피아노소품과 피아노협주곡 및 《선택된 신부 Die Brautwahl》(1911) 《아를레키노 Arlecchino》(1916) 《투란도트 Turandot》(1917) 《파우스트박사 Doktor Faust》(1925) 등 4편의 오페라를 남겼다. 이 가운데 《파우스트박사》는 제자인 필립 야르나흐(Pilipp Jarnach)에 의해 완성되어 작곡가가 죽은 다음해인 1925년 드레스덴에서 초연되었다. 저서에 《신음악미학 시론 Entwurf einerneuen Ä sthetik der Tonkunst》(1907)이 있다. /naver

 

 

 

 
1865 - 오스트리아 출신의 독일 화학자 지그몬디(Zsigmondy, Richard) 출생

지그몬디 [Zsigmondy, Richard, 1865.4.1~1929.9.23]

빈 출생. 빈·뮌헨·베를린에서 배웠으며 1890년에 유기화학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라츠공업대학 강사와 예나의 쇼트 운트 게노센 유리회사 연구원을 거쳐, 1907∼1929년 괴팅겐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콜로이드화학의 선구자이며, 특히 1903년에 한외현미경()을 제작하여 처음으로 금·은 등의 콜로이드용액에 대하여 미립자의 직접 관측에 성공하였다.
이 밖에도 분산도가 매우 높은 금 콜로이드의 생성법 확립 등 콜로이드화학의 기초적 연구 업적으로 1925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주요저서로 《Zur Kenntnisse der Kolloide》(1905), 《Lehrbuch der Kolloidchemie》(1920) 등이 있다. /naver

 

 

  

- 'Galahad's Departure'


1852 - 미국의 화가, 삽화가 에드윈 오스틴 애비(Abbey, Edwin Austin) 출생

애비 [Abbey, Edwin Austin, 1852.4.1~1911.8.1]

미국의 화가.

당대의 가장 뛰어난 삽화가 중 한 사람이다. 뉴욕 시의 하퍼앤드브라더스출판사의 삽화가로 일할 때 로버트 헤릭의 시집에 넣을 삽화자료 수집차 영국에 파견되었다. 그후 올리버 골드스미스와 셰익스피어 작품의 삽화를 그렸다. 전성기에는 대체로 영국에서 활동했으며, 그곳에서 왕립수채화가협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1883). 1902년에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그의 후기 작품으로는 펜실베이니아 주 해리스버그에 있는 주의회의사당을 비롯하여 여러 공공건물에 그린 장식화와 영국왕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을 그린 공식적인 회화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1837 - 콜롬비아의 시인, 소설가 이사아크스(Isaacs, Jorge) 출생

이사아크스 [Isaacs, Jorge, 1837.4.1~1895.4.17]

대표작 〈마리아Maria〉(1867)는 19세기의 가장 유명한 라틴아메리카 소설 가운데 하나이다. 부유한 영국계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나 매우 우수한 교육을 받았으나 카우카 전쟁(1860~63) 때 대농장이 파괴되어 재산을 잃게 되었다. 1864년 보고타에 정착해 〈시집 Poesías〉이라는 얇은 책을 출간했는데, 이 작품은 적지 않은 주목을 받았다. 1867년에 연애소설 〈마리아〉가 발표되자마자 문단의 인정을 받았으며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작가의 고향 카우카 계곡의 생활을 목가적으로 생생히 묘사한 〈마리아〉는 자전적 성격이 짙은 작품으로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 작품이 발표된 이래로 그는 문필생활과 공직생활을 병행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 작품활동을 했지만, 후기 작품들은 그의 첫 두 작품이 세인에게 안겨준 기대를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 브리태니커

 

 

  

     

  

1815 - 독일의 정치가 비스마르크(Bismarck, Otto von) 출생

비스마르크 [Bismarck, Otto (Eduard Leopold) von, 1815.4.1~1898.7.30]

[역사속의 인물] 독일제국 건설 비스마르크

‘식욕이 왕성한, 사랑을 위해 개종한 철혈재상’

1815년 오늘 태어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860년대 중반까지 40여개의 크고 작은 국가들로 나눠졌던 독일을 통일, 1871년 독일 역사상 최초의 민족국가인 독일제국을 건설했다. 47세 때 프로이센 총리로 취임하면서 “현재의 큰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과 피’에 의해 결정된다”고 했다.

프로이센 융커(지주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왕성한 식욕, 섬세하고 날카로운 감성과 지성을 가졌다. 아헨시 사법관이던 25세 때 연애사건으로 사직했다. 그리스도교에 무관심한 이신론자(理神論者)였지만 경건파(루터파 교회의 한 종파) 신도인 요하나 폰 푸트카머와 결혼하기 위해 개종했다.

프로이센의 보수적 정치가에서 출발해 러시아주재 대사, 프랑스주재 대사를 거치며 외교력을 발휘했다. 1864년,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승리해 북독일 연방을 결성했다. 1870~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해 독일 통일을 이뤘다. 통일을 위해 엄청난 피를 뿌렸지만, 통일 후 주변국과 협상, 동맹을 체결하며 평화 애호가로 변신했다. 1888년 즉위한 빌헬름 2세와 충돌하다 2년 뒤 사직했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매일신문 2009년 04월 01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4504&yy=2009 

 

 

  

- William Mulready                                          - 'The Sonnet'

1786 - 영국의 화가 윌리엄 멀레디(Mulready, William) 출생

멀레디 [Mulready, William, 1786.4.1~1863.7.7]

영국의 풍속화가.

전원 생활을 묘사한 그림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한 영국 오두막의 실내 Interior of an English Cottage〉(1828)이다.

멀레디는 1800년에 런던에 있는 왕립 아카데미 부설학교에 들어갔다. 1804년에 그는 첫번째 개인전을 시작으로 연달아 성공적인 개인전을 열었다. 1816년에 그는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한편 1805년에 발표된 데이비드 윌키의 작품들을 시작으로, 자연주의적이고 감상적인 문학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들이 차츰 유행하게 되었다. 네덜란드 거장들의 그림을 좋아하는 영국 황태자의 취향이 뒷받침해준 이 유행은 조슈아 레이놀즈 경이 가르친 엄격한 전통주의에 대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멀레디는 재빨리 이러한 경향에 편승했다. 처음에는 그가 본보기로 삼은 네덜란드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황토색을 이용해 불투명한 그림을 그렸지만 후에, 특히 1830년 이후에는 화려하게 반짝이는 효과에 치중했다. 멀레디는 이론 연구와 동화집의 삽화, 그리고, 최초의 1페니짜리 우편봉투를 도안한(1840) 것으로도 유명하다. /브리태니커

 




1776 - 프랑스의 수학자 소피 제르맹(Germain, Sophie) 출생

제르맹 [Germain, Marie-Sophie, 1776.4.1~1831.6.27]

소피 제르맹

마리소피 제르맹(프랑스어: Marie-Sophie Germain, 1776년 4월 1일 ~ 1831년 6월 27일)은 프랑스수학자이자, 물리학자, 철학자이다.

제르맹은 부모의 반대와 성차별의 어려움 속에서도 아버지 서가에 있던 책들을 보며 공부하였고, 조제프루이 라그랑주, 아드리앵마리 르장드르,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와 같은 유명한 수학자들과 서신을 교환하며 지식을 습득하였다. 제르맹은 파리 과학 아카데미가 개최한 탄성의 수학적 모형을 구하는 콘테스트에 논문을 제출하여 수상자가 되었다. 제르맹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의 증명에 기여하였고, 이후 1백 년 이상 후대 수학자들은 제르맹의 작업을 기초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고자 하였다. 제르맹은 당대의 여성에 대한 편견 때문에 다른 분야에서 경력을 쌓을 수 없었지만 평생 동안 독자적인 학문 활동을 하였다.

초기 생애

/위키백과 (2016.11.20)


 

  


- Napoléon I, Jean Portalis and Palace of Justice, Paris 

1746 - 프랑스의 법학자, 정치가 포르탈리스(Portalis, Jean-Étienne-Marie) 출생

포르탈리스 [Portalis, Jean-Étienne-Marie, 1746.4.1~1807.8.25]

프랑스 민법전(典, 나폴레옹법전)의 기초자()의 한 사람으로서 유명하다. 남()프랑스의 보세에서 출생하여 엑스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변호사가 되었다. 행정관과 정치가로서도 활약하여 프랑스 혁명 후 한때 반혁명파()의 지도자 J.시메옹과의 인척관계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어 1796년 총재정부()에서 입법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1797년 정치적 음모 혐의를 받아 스위스로 망명하였는데, 1800년 나폴레옹이 집정하면서 그의 신임을 받고 파리로 돌아가 프랑스 민법전의 편찬위원()으로 임명되어, 민법전의 기초를 시작하였다. 그 초안은 마침내 1804년 ‘프랑스 민법전’으로 공포되었는데, 그가 쓴 《민법전 서론 Discours préliminaire》은 민법전의 연구를 위한 귀중한 문헌이 되어 있다. 이 민법전 편찬에 있어서 그의 풍부한 학식과 경험이 지배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혼인법()과 상속법()은 전적으로 그의 손에 의해서 직접 이루어진 것이다. 1806년 아카데미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naver

 

 

 

 
1730 - 스위스의 작가, 번역가, 화가 게스너(Gessner, Salomon) 출생

게스너 [Gessner, Salomon, 1730.4.1~1788.3.2]

목가적인 주제와 로코코 문체를 구사한 문학작품들로 유럽 전역에 알려져 있다.

게스너는 시의회 의원이자 산림감독원이었다. 또 대규모 출판사를 경영하며 손수 제작한 뛰어난 에칭 삽화들이 든 자신의 책들을 펴냈다. 목가적 산문 〈이딜렌 Idyllen〉(1756~72)과 서사시 〈아벨의 죽음 Der Tod Abels〉(1758)이 가장 유명하며, 이 작품들을 통해 그는 로코코 문학사조의 가장 탁월하고 대표적인 작가로 부각되었다. 목가시들은 웨일스어·라틴어·히브리어 등 20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특히 영역본은 판을 거듭하였고, 윌터 스콧 경, 바이런 경, 워즈워스 등 낭만주의 작가들의 격찬을 받았다. 게스너는 영국 시인 알렉산더 포프의 목가시 일부와 프랑스 작가 드니 디드로의 이야기 두 편을 번역했다. 마지막 작품집은 1841년 취리히에서 출판되었다. /브리태니커

 

 

 

  

 

    

 
1578 - 영국의 의학자, 생리학자 하비(Harvey, William) 출생

하비 [Harvey, William, 1578.4.1~1657.6.3]

영국의 의학자ㆍ생리학자.

켄트주 포크스턴 출생. 1597년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한 후, 이탈리아 파도바대학에 유학하여 의학을 공부하였다. 1602년 졸업 후 귀국, 1609년 런던 세인트바솔로뮤 병원에 근무, 1623년 제임스 1세, 1627년 찰스 1세의 시의()가 되었다. 인체의 구조 ·기능, 특히 심장 ·혈관의 생리에 대해 연구하였으며, 1615년 내과의사로서 해부학과 외과학 강의를 하였다.

1628년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 Exercitatio Anatomica de Motu Cordis et Sanguinis in Animalibus》를 출판하였다. 이 책은 실험에 입각하여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한 생리학설을 밝혀 갈레노스 학설을 부정하였다. 심장의 박동을 원동력으로 하여 혈액이 순환된다고 하는 그의 새 학설에는 당시 반론이 많았으나, 그 후 일반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또 동물의 발생에 관해서도 실험 연구를 하고, 1651년 《동물발생론 Exercitationes de Generatione Animalium》을 저술하여, ‘모든 생물은 알에서 생겨난다’고 주장, 중세 이래의 고전의학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루었다.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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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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