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디카산책 - 서울 방학동 연산군묘 (사적 제362호)

작성일 작성자 가족대표





      ◆ 디카산책 - 서울 방학동 연산군묘 (사적 제362호)
      
      
      촬영일시 : 19 년 11 월 09 일
      
      서울시 기념물 33호 '방학동 은행나무'를 촬영한 후 600 여년의 세월을 인근에서 이웃으로 함께 해온
      바로 앞의 '연산군묘역'을 찾았다. 연산군은 성종과 폐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성종의 첫째 아들이다.
      서울 방학동 연산군묘(사적 제362호)는 조선 10대 왕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역으로
      지금은 도심이 되었지만 경내가 매우 아름답게 조성 관리되고 있다고 해서 사진으로 담아보기로 한것이다. 
      연산군은 성종 10년에 생모인 윤씨가 폐위되자 계모인 정현왕후 윤씨의 손에서 자랐고 생모로 알고 자랐다.
      성종 14년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494년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이후 성종의 능지문(성종의 업적을 기록한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폐비 윤씨의 이들임을 알게된다.
      
      즉위 초에는 성종 말기에 나타난 사치 풍조를 잠재우기 위하여 구체적인 금지조항을 만들어 강력히 
      시행하고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상평창등을 확대 설치 물가를 안정시켰으며 또한 비융사를 설치하여 
      철갑옷과 무기를 만들어 왜인과 여진인을 격퇴하거나 회유하는등 국방정책에도 힘을 쏟는등 선정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재위 4년(1498)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김종직의 '조의제문(세조의 왕위 찬탈을 간접적으로 비난 한 글)
      이 사초에 실린 것이 문제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처형하였고 이후 재위 10년(1504) 생모 윤씨의 폐위 문제로
      다시 훈구대신과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갑자사화).
      사화 이후 국정에 관심을 두지 않기 시작하여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파탄이 났고 성균관과 원각사를 
      기생 집합소와 유흥장으로 만들었으며 잔혹한 형벌을 시행하는등 실정을 거듭하였다.
      결국 1506년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폐위되어 강화 교동에 유배된 후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
      처음 묘소는 유배지인 교동에 조성되었으나 중종 7년 부인 신씨가 중종에게 묘소 이장을 요청하여 현재의 
      자리에 묘를 이장 하였다고 한다.
      
      거창군부인 신씨는 거창부원군 신승선의 딸로 성종 19년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군부인으로 강등되었다.
      중종 32년에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다.
      
      연산군묘를 찾던 날 묘역에서는 시제를 준비 중에 있었는데 연산군의 사위였던 구문경 부부가 이 묘역에 함께
      묻혀 있어 능성 구씨 문중에서 지내는 시제였으며 이 구씨 문중은 현 LG 구룹의 문중과 직결되는 가문이라는 말을 
      현장에서 들을 수 있었다. 보기 쉽지 않은 반가의 시제 모습까지 담아보려 했지만 다음 일정 관계로 실제로 시제를 
      모시는 장면 촬영은 포기를 하고 자리를 떴다.(글 일부 자료 : 묘역 안내서에서 인용)
▼ 시제 모시기 전에 산신제를 먼저 지내고 있는 모습 ▼
▼ 묘역 관리소 ▼
글과촬영 : 가족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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