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망국’강대국간의 거래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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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망국’강대국간의 거래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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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망국’강대국간의 거래현장


<태프트 기념관 공식 팸플릿>

조선의 망국은 어떻게 결정됐나-강대국간 거래의 현장을 찾아서
포츠머스 조약,태프트-가쓰라 밀약은 그 추적 대상이다.

 **우선 다음의 퀴즈를 맞추고 시작하자.

1905년은 한국의 역사는 절망쪽으로 질주한다. 그해의 두 사건 포츠머스 조약(러시아와 일본 종전협상)과 태프트-가쓰라 밀약이 있다.을사보호조약은 포츠머스 조약을 실천에 옮긴 것뿐이다. 포츠머스는 조선 망국으로 가는 결정적인 전환점이다.우리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조약의 하나다.

문제 (1)포츠머스 러일강화조약이 맺어진 포츠머스는 어디에 있나?

?a)영국 b)러시아 c)오스트리아d)미국 뉴햄프셔주

 (답=포츠머스 지명은 여러곳에 있다.조약이 맺어진 곳은 d)

2)미·일간 거래인 태프트-가쓰라 밀약의 주인공 태프트의 경력중 아닌 것은?

a)대통령 b)상원의원 c)연방대법원장 d)예일대 교수

(답은 b)

이제 여러분을 역사의 현장으로 안내하겠다.
**다음은 필자의 저서 ‘살아숨쉬는 미국역사’(랜덤하우스중앙·2005년3월발간)의 일부분이다.‘조선의 망국은 여기서 정해졌다.(233-261쪽·한국 언론인 최초 포츠머스 조약현장에 가다),태프트-가쓰라 밀약을 찾아서 (278-288쪽)중 밀약부분을 요약한 내용이다. 필자의 저서

**100년전인 1905년.동북아 판도가 일본의 우세로 짜여진 역사의 전환 시점이다.그 해 대한제국을 노리던 4강의 긴박한 각축은 마무리 된다.일본은 러시아·중국(청)·미국을 제친다. 약육강식의 그 시대에 한반도 무대의 최후 승자가 되는 것이다.11월 을사보호조약으로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는다. 한반도 강탈의 본격출발이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무력과 외교라는 두개의 수단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다.10년 단위로 두개의 전쟁(1894년 청일전쟁,1904년 러일전쟁)승리가 그 하나였다.다른 하나는 영일동맹,그리고 미일간 태프트-가쓰라 밀약이라는 짜임새있는 대외정책이다.
1905년 5월말 대한해협 해전에서 러시아 발틱함대가 일본 연합함대에 치명적 패배를 당한다.양국은 종전 협상에 들어갔다.중재자는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종전 협상 장소는 미국의  동북부 해안도시인 포츠머스(뉴 햄프셔주 해군기지)다.포츠머스조약(1905년9월)으로 일본은 조선을 차지한다.그 직전 일본은 미국과의 태프트-가쓰라 밀약(1905년7월말)→2차영일동맹(8월12일)으로 조선병합의 기반를 다진다.

 ** ‘태프트는 예일대 출신 첫 미국 대통령이다.오하이오주 신시내티의 태프트 기념관 전시실에 밀약부분은 간략하게 적혀있다.한국인에겐 분노의 밀약이나 태프트 기념관은 무덤덤했다.'**

1924년 워싱턴 DC.미국 연방 의사당 뒤편에 있는 의회 도서관.한 역사학자가 비밀이 해제된 문서철을 뒤지고 있었다.그는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TR)의 외교정책을 연구하고 있었다. TR의 외교문서를 집중 추적중이었다. 그 중 편지 묶음을 들췄다.한 문서에서 그는 전율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 학자는 존스 홉킨스 대학의 타일러 데넷(Tyler Dennett,1883-1949)교수.


문서는 시어도어 루스벨트대통령 시절 육군장관(Secretary of War)인 윌리엄 태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 따로(桂太郞ㆍ계태랑)사이의 대화록이다.러ㆍ일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05년 7월 하순 태프트가 일본 도쿄(東京ㆍ동경)방문중에 벌어진 일이다.

 대화내용은 일본이 미국령 필리핀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대신,미국은 일본의 한국 종주권(宗主權)을 승인해주는 비밀 거래 문서였다. 이른바 태프트-가쓰라 각서(Memorandum of Taft and katsra)가 햇볕을 보는 순간이다.철저히 비밀에 부쳐진지 거의 20년만이다.

밀약은 그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데넷 교수는 미국 국무부의 역사담당 보좌관을 지냈다.그는 존 헤이(John Hay)국무장관의 외교정책에 대한 논문으로 1934년 퓰리처 상을 받았다.


 태프트-가쓰라 밀약-.한 세기전 약소국 조선의 비애가 처절하게 담겨있는 비밀 약속이다.미국과 일본이 자기들만의 거래로 제 3자인 조선을 일방적으로 뭉개버린 사건.그 음침한 비밀엔 약육강식이란 정글의 법칙이 넘쳐난다.그것은 우리 사회 반미 정서의 뿌리이기도 하다 .

 

 2004년 1월 나는 태프트를 찾아 나섰다.(당시 필자는 워싱턴 DC의  조지타운대 객원교수로 미국 체류중이었다.)태프트는 시어도어 루즈벨트 다음 대통령(27대)이다.그리고 대통령 퇴임후 29대 워렌 하딩 대통령 정부때 대법원장(10대)을 지냈다.대통령과 대법원장을 지낸 그의 경력은 미국에서 유일하다.

 그는 동부 명문 예일대 출신이다.예일대 출신의 첫번때 대통령이다.예일대 출신은 태프트 이후 제럴드 포드(38대)대통령에 이어 80년대 들어 조지 부시ㆍ빌 클린턴(로 스쿨)ㆍ조지 W 부시등 5명을 배출했다.


 나의 목표는 먼저 태프트의 고향이었다.고향은 오하이오주 신시내티(Cincinnati,Ohio).태프트가 살던 집을 개조한 기념관이 그곳에 있다.

 나는 수도 워싱턴을 출발해 버지니아,웨스트 버지니아주를 거쳐 9시간 동안 차를 몰아 오하이오주로 들어갔다.주 경계선 가까이에 신시내티가 있다.오하이오는 인디언 말로 ‘크고 멋진 강’이라는 뜻이다.오하이오 강을 따라 관광명소들이 널려있다.


 태프트-카쓰라 밀약이 아니더라도 오하이오주는 나의 관심 대상이었다.오하이오가 무려 7명의 대통령을 배출했기 때문이다.미국 50개주중 대통령(전체42명)을 가장 많이 배출한 주는 버지니아로 8명이다.버지니아주는 워싱턴·제퍼슨등 건국의 아버지들이 출생할 곳이어서 초기에 많은 대통령을 배출했다.그 다음이 오하이오주다.

 특히 오하이오주는 60년간 집중적으로 대통령을 양산했다.율리시스 그란트(18대)→러드퍼드 헤이스(19대)→제임스 가필드(20대)→벤자민 해리슨(23대)→윌리엄 매킨리(25대)→윌리엄 태프트(27대)→워렌 하딩(29대)이다.

그리고 19세기 후반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북군의 대표적인 장군 셔먼과 세리던이 오하이오 출신이다.오하이오 사람들은 그런 점에 자부심을 느낀다.미국 사람들 조차 오하이오에서 대통령이 7명이나 배출된 사실을 잘 모른다.한국의 미국전문가들도 오하이오의 그런 역사에 낯설다.

신시내티는 1876년 메이저 리그의 첫 야구팀 신시내티 레즈(Reds)를 창단한다.신시내티 레즈에서 봉중근 선수가 뛴 적이 있다.신시내티는 인구 38만명으로 규모는 작지만 중서부의 대표적 도시다.

 오하이오주에서 71번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윌리엄 태프트 길’이라고 써있는 출구로 빠져나갔다.신시내티 중심가에서 10분 가량 떨어진 곳이다.잠시후 태프트 국립사적지라고 간판이 보인다.10여대가 주차할수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안내센터에 갔다.아침 8시 개장시간에 맞춰 도착했더니 안내원이 “오늘 첫 관람객”이라며 반갑게 맞아줬다.잠시후에 40대 중반의 부부로 보이는 관람객들이 왔다.안내원은 나를 포함해 3명의 관람객들 데리고 사적지 건물로 들어갔다.


 태프트의 고향집은 2층 건물이었다.빅토리아 양식으로 다듬은 처마가 특징이라고 안내원이 설명한다.나는 미국 사적지 건물에 가면 서울의 경교장(京橋莊)과 비교하는 습관이 있다.경교장은 해방직후 김구 선생이 지낸 곳이다.지금 강북 삼성 병원 본관이고 서울의 몇 곳 안되는 고풍의 유럽식 건물이다.

 경교장에 비해 그 건물은 작았지만 짜임새 있었다.1층은 8개의 방이 있었다.방마다 태프트 가문에 관한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응접실에는 태프트 부모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샹들리에는 간결하지만 우아함을 풍겼다.그 가구와 초상화들은 귀족 집안이라는 느낌을 주었다.집안 도서실은 법률가 집안의 그것처럼 엄숙한 맛을 풍긴다.책상위에 붉은 색 융단으로 덮혀있고 고색 창연한 책들이 꽂혀있었다.1969년에 연방정부가 사적지로 지정했다는설명이 있다.태프트가 시어도어 루즈벨트와 함께 찍은 젊은시절의 사진은 둘의 우정을 보여준다

 태프트 가문은 명문이었다.아버지 알폰소 태프트도 예일대학 법학부를 나왔으며 오스트리아 대사,변호사를 지냈다.아버지는 아들에게 평범함을 거부하라면서 엘리트로서의 야심을 키웠다.


태프트는 예일대학시절 엘리트 학생들로 구성된 파이 베타 카파(Phi Beta Kappa)클럽에 가입했다.그는 법률가의 길을 걸었다.지방 법무관ㆍ연방 법무국장·연방 순회 항소법원판사로 경력을 쌓았다.그리고 워싱턴 중앙정부로 진출했다.


 2층은 태프트 박물관이었다.공직자 태프트의 면모가 담긴 곳이다.그는 필리핀 총독(매킨리 대통령 정부),육군장관(Secretary of Warㆍ시어도어 루즈벨트 정부)을 지냈다.그리고 27대 대통령을 지냈고 그후 대법원장에 임명됐다.공직별,연대순으로 자료와 유품들이 진열돼 있었다.

 필리핀 총독때 그는 군정체제를 민정체제로 바꿨다.필리핀의 개혁과 근대화에 주력했다.필리핀에서의 그의 움직임을 담은 기록을 읽어내려갔다.

 다음은 육군장관 시절의 태프트에 대한 기록이다.나는 긴장했다.내가 추적하고 있는 그 기록이 어떤 모습으로 전시돼있을까.2층 한군석에 ‘육군장관 시절의 태프트’라는 제목으로 여러개의 사진과 함께 설명문이 적혀있었다.

 “1905년 태프트는 의회사절단을 이끌고 필리핀을 갔다.그 사절단의 스타는 대통령의 딸 앨리스였다.”그리고 “일본에서 태프트는 가쓰라 수상을 만났다.태프트-가쓰라 각서에서 미국은 일본의 조선 통제를 인정했고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공격 계획을 부인했다.”

“In Japan,Taft met with Prime Minister Katsura.In the Taft-Katsura Memorandum,The United States  recognized Japanese control over Korea and Japan disavowed aggressive design on the Philippine"

 일본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宗主權ㆍsuzerainty)확보조항은 그렇게 간략하게 기록돼 있었다.그것의 의미나 파장에 대한 설명도 없었다.그 아래 태프트가 이끈 사절단이 일본에서 찍은 사진만이 크게 전시돼있다. 

 나는 착잡했다.“밀약이 한국인에게 망국의 뼈아픈 고통을 주었는데 특별한 설명이 없다니··비밀 대담이어서 관련 유물이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일본의 조선강점에 관한 자료나 사진을 전시해야 하는 것 아닌가.”무언가 무성의하다는 느낌이었다.

 자리를 뜰수 없었다.역사에 대한 만감이 교차해왔다.안내원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한국의 운명은 열강이 각축하던 시절의 비극이다.기념관에는 그와 관련한 특별한 기록물은 없다.”

나는 상념에 젖었다.밀약의 짧은 설명문을 여러차례 읽으면서 한반도의 국제 정치적 운명과 팔자를 따져보았다.
한세기전과 비슷하게 짜여지는 한반도 주변질서-.북한 핵문제가 장기화하면서 21세기 한반도 주변정세는 20세기초의 틀과 비슷해져 간다.
지난 50년간 중심축인 한미동맹은 헝클어졌다.그 틈새를 타고 일본은 군사대국으로 재등장하고 있다.미국은 한미동맹의 공백을 대일동맹으로 채우려 한다.미일동맹은 2차대전이후 최고의 밀월기를 맞고 있다.
독도 영유권을 놓고 한일간 군사대치상황이 올때 미국은 어느편을 들것인가.일본의 이지스함이 독도주변에서 무력시위를 할때 미국은 어떤 입장에 설것인가. 의문이다.해군력에서 한국은 일본에 크게 떨어진다.
 한국은 6자회담 성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중국당국자들에게 북한을 적극 설득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국제사회엔 공짜가 없다.그 바람에 중국은 1백10년전 청일전쟁으로 잃은 한반도 전체의 영향력을 회복하고 있다.한국에게 가장 좋은 대외전략은 무엇인가.노무현정권이 강조하는 자주와 동맹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자주와 동맹은 반대말이 아니다.대칭 구조가 아니다.20세기초 영국은 세계최강의 자존을 위해 동북아에서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일본은 동맹을 통해 강대국 대열에 들어갔다.
 우리는 한국 근대사를 얼마나 알고있나.

독도문제를 놓고 한국인은 피가 끓는다.100년전 망국의 역사를 놓고 개탄한다.목소리는 크다.그러나 그 역사의 진실에는 약하다.그 실감나는 사례가 있다.'불멸의 이순신'은 조선조 후기 한국인에게 잊혀진 인물이었다.20세기 초 이순신을 세계에 알린 것은 일본인이다.유감스럽지만 사실이다. 일본을 압도하기 위해선 실력을 키워야 한다.역사 추적은 실력갖추기의 주요한 요소다.


(필자 주:또다른 秘史가 있다.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인 앨리스(Alice)는 태프트 일행과 떨어져 조선을 방문한다.고종은 ‘미국의 공주’라며 엄청난 환대를 했다.고종은 앨리스를 위해 여러차례 연회를 베푼다.조정 대신들에게 사모관대 대신 양복을 입도록 지시할 정도였다.고종의 앨리스 환대는 미국에 대한 짝사랑이었다. )


이제 태프트-가쓰라 밀약의 역사를 좀더 추적해야 한다.1904년2월 러일전쟁이 터지자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을 외교적으로 밀어주었다.일본을 앞세워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는 생각이었다.그는 친일ㆍ반러주의자 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일본에 일방적으로 밀리자 시어도어는 동북아에서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이 무너질 것을 염려했다.무엇보다 러시아 발틱함대를 궤멸(1905년5월)시킨 일본 연합 함대의 전술과 위력에 긴장했다.시어도어는 해군력이 국력에 결정적인 비중을 차지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당장 미국의 보호령인 필리핀이나 하와이가 걱정이었다.일본 해군이 필리핀 공략에 나서면 미국이 억제할 힘이 없다는 점이 걱정이었다.


미국 태평양함대의 실력으로는 일본 연합함대를 막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TR은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 중단을 위한 중재에 나선다.포츠머스 회담을 열도록 했다.다른 한편으로 육군장관 태프트를 일본에 보냈다.필리핀의 안전을 위한 일본정부의 의사를 타진하도록 지시했다.


 1905년7월29일 태프트는 가쓰라 총리와 대좌한다.두 사람은 3개항에 합의한다.그 내용은 이렇게 3개항 요약된다.①일본은 필리핀에 대하여 침략적 의도를 품지 않으며,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확인한다.②극동의 평화를 위해 미ㆍ일ㆍ영 세나라는 실질적 동맹 관계를 확보한다.③러일 전쟁의 원인이 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월적인 지배권을 인정한다.
가쓰라 총리

 루스벨트는 가쓰라와의 대담내용을 비밀 전문으로 받았다.그리고 태프트에게 "그대가 한 모든 말을 나는 인정한다"고 말했다.

 미국은 다른 어떤 열강에 앞서 일본의 한국 보호권을 인정해준 것이다.그후 일본은 2차 영일동맹(제3조)을 통해 영국으로 부터 그리고 포츠머스 회담(러일 강화조약 제2조)으로 러시아로 부터 조선 지배를 인정받는다.


 가쓰라는 일본 군국주의 침략정책의 원흉 중 한 사람이다.청일전쟁 때 일본군 제3사단장이었다.타이완 총독을 거쳐 세 차례나 일본총리를 지냈다.영ㆍ일 동맹과 러ㆍ일 전쟁,그리고 조선과 맺은 을사늑약은 모두 그가 총리일 때의 작품이다.

  
 나는 '육군장관 시절의 태프트'코너쪽을 향해 계속 사진을 찍었다. 같이 관람하던 50대 부부가 말을 걸어왔다.그는 밀약 부분의 설명문을 읽더니 내게 일본인 또는 한국인이냐고 물었다.한국인이라고 하자 그는 태프트는 일본과 관련이 깊다고 했다.그는 워싱턴 DC의 명물 벚꽃놀이를 그 사례로 들었다.

 워싱턴으로 돌아온 나는 태프트와 벚꽃의 인연을 추적했다.태프트의 유적은 워싱턴의 봄에 만개한다.제퍼슨 기념관 주변의 인공호수인 타이들 베이슨(Tidal Basinㆍ수반ㆍ水盤)둘레에 3700그루의 벚나무가 심어져있다.매년 3월말이면 벚꽃축제가  화려하게 펼쳐진다.

 그 벚꽃은 태프트의 대통령 재임시절에 일본에서 옮겨다 심어졌다.태프트의 부인 헬렌 태프트가 앞장섰다.헬렌은 1907년 남편과 함께 일본을 방문했을때 벚꽃의 화려함에 매료됐다.헬렌은 1912년 도쿄시민들이 보내준 벚꽃을  직접 워싱턴의 포토맥 강변에 심었다.일본은 그 무렵 3000그루를 보내왔다.

 2차대전때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라는 역사의 우여곡절이 있지만 워싱턴 벚꽃축제 때만은 양국의 장래와 우호만을 얘기한다.


 태프는 '실패한 대통령'이었다.대통령 시절 태프트는 육중한 몸집탓에 여러가지 웃음거리를 남겼다.150kg의 거구인 그는 백악관 목욕탕에서 욕조에 끼어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는 소문도 있었다.그는 골프광이었다.몸무게 탓에 허리 굽히기가 힘들어 페어웨이에서도 공을 티에 올려놓고 쳤다고 한다.

 태프트의 대통령 평점은 바닥권이다.그는 전임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혁신주의 정책을 계승하지 않았다.자연보호정책도 후퇴했다.때문에 그를 대통령으로 밀어주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태프트가 나의 정책을 뒤집었다”고 비난하면서 1912년 대통령 선거에 새롭게 도전한다.두 사람의 갈등으로 공화당 지지자들의 표가 갈렸다.민주당의 우드로 윌슨(28대 대통령)이 어부지리로 당선됐다.
 <봉사의 삶이란 태프트의 공적 인생기록,그는 대통령과 연방 대법원장을 지낸 유일한 인물이다>

태프트에 대한 학계의 대체적인 평은 ‘시대에 맞지 않는 대통령’이라는 것이다.혁신주의 시대를 되돌리려는 구태,현안에 대한 우유부단함,리더십과 비전이 부족한 대통령이라는 지적을 받았다.퇴임후 그는 예일대 (법대교수)교단에 섰다.1921년 그는 대법원장이 되었다.대법원장은 그의 젊은 시절 꿈이었다.대통령으로선 시원치 않았지만 대법원장 태프트는 열정적이었고 역량을 보였다.

 그의 묘소는 워싱턴 인근 알링턴 국립묘지에 있다.그는 알링턴에 묻힌 최초의 대통령이다.알링턴에는 존 F.케네디 대통령(35대)의 묘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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