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 캣’(copycat)은 모방범죄, 혹은 그 범죄자를 말한다. 옛 영국에서는 경멸스러운 인물을 흔히 고양이(cat)에 빗대 놀렸던 모양이다. 나중에 거기 복사(copy)란 단어가 붙어 ‘경멸해 마땅한 모방범죄나 그 범죄자’를 지칭하는 말이 됐다고 한다. 저보다 앞선 범죄꾼 행위에 심정적으로 동조해, 수법을 고스란히 베껴 범행하는 경우가 바로 카피 캣이다. 자살수법을 똑같이 따라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요즘엔 제품을 본뜨는 것도 카피 캣이라고 한다.

1965년, 한국에서 첫 토막살인 발생

해방 후 처음…춘천호 여인 토막 살해 사건
1965. 5. 24 [경향신문] 7면


수사 경찰이 아주 싫어하는 것 또한 이 카피 캣이다. 대개 연쇄살인범의 카피 캣이 많은데 그들의 범죄패턴과 심리를 찾기가 쉽지 않고 증거도 교묘히 인멸해 수사진을 골탕 먹이기 때문이다. 강력사건, 그중에서도 잔인하고 엽기적인 사건이 나면 경찰은 숨기기에만 급급한데 본능적으로 카피 캣을 두려워하는 것이란 얘기도 있다. 맺히고 쌓인 원한을 못 이겨 저지르거나 증거를 없애려고 잔인하게 시체를 훼손하는 ‘토막살인’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한국에서 맨 처음 토막 살인이 일어난 것은 1965년이다. 그전에도 있었을지 모르나 적어도 신문에서 ‘토막살인’ 용어를 처음으로 써 사람들이 공포에 떨고 수사진행에 따라 사회가 온통 들썩인 건 그때가 시초였다. 사건은 춘천호반에서 일어났다. 목이 잘려 숨진 피해자는 미모의 30대 여인. 발목에 돌이 매달린 채 호수 속에서 발견됐다. 당시 신문이 “해방 후 최고의 흉악범죄”로 꼽은 이 사건 명칭은 ‘춘천호반 여인 토막살해 사건’이었다.

엽기적인 범행에 전국이 들썩

강원도 춘성군 사북면 춘천댐 2km 상류 쪽은 듬성듬성 화전(火田)만 있는 첩첩산골이었다. 65년 5월 16일 오후 4시 반 무렵. 춘천호에서 보트를 타고 화전 사이를 옮겨 다니며 나물을 캐던 처녀들은 목 잘린 나체의 여인 몸뚱이가 물속에 꼿꼿이 서있는 걸 발견하고 기겁을 했다. 시체는 짙푸른 호수 물에 뜬 듯 잠긴 듯 흔들거리고 있었다. 부리나케 마을로 돌아와 사람들을 데리고 다시 현장에 와보니 시체 주변에선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을사람들은 현명하게도 시체를 확인만 하고 건지지 않은 채 경찰에 신고했다. 이튿날 아침 부리나케 현장에 온 경찰이 시체를 인양해보니 그야말로 참혹하게 훼손돼 있었다. 머리가 잘린 것은 물론 몸에도 큰 칼질을 한 흔적이 뚜렷했다. 양손은 칡넝쿨로 묶었고 양말만 신은 양발은 새끼로 묶은 다음 큰 돌을 매달아 놓았다. 몸통을 발견한지 이틀 후 현장에서 스웨터에 싸인 머리 부분도 인양했는데 역시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훼손해 놓았다.


낫은 발견 못해
1965. 5. 31 [경향신문] 7면

치정이나 원한에 의한 살인이 분명했다. 신원확인이 불가능하도록 시체를 훼손한 점으로 미루어 흉기를 잘 다루는 범죄꾼 소행으로 추정됐다. 춘천경찰서는 워낙 엽기적인 사건 행태에 넋을 놓았다. 그곳 형사들 실력으로는 사건해결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부랴부랴 치안국에 보고해 지휘를 받기로 했고 언론에는 사건을 꽁꽁 숨겼다. 부검 후 경찰은 숨진 여인이 20~23세, 아기를 낳은 적이 없으며 25일 전쯤 숨진 것으로 추정했다.

경찰, 피해자 신원도 밝히지 못한채 '깜깜이 수사'

춘천호의 피살 여인, 신원은 판명
1965. 5. 26 [동아일보] 3면


나중에 밝혀졌지만 이건 모두 실수였다. 피해자는 숨진 지 4개월 만에 발견된 것이고 나이는 32세, 술집 접대부 출신이었으며 최소한 세 남자와 동거했다. 살인 및 시체 은닉이 한참 전에 이루어졌으니 언론을 통해 신원을 확인하는 게 제일 쉬웠다. 하지만 경찰이 숨기는 바람에 1주일 동안이나 피해자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현장주변만 맴돌며 탐문하는 ‘깜깜이 수사’를 펼 수밖에 없었다. 수사가 한 발짝도 앞으로 못나간 이유다.


시체 발견 8일째인 24일. 신문에 ‘춘천호반 여인 토막살해사건’ 기사가 특종으로 실렸다. 수사가 영 진전이 없자 본부에서 한 간부가 넌지시 기자에게 흘린 것이었다. 무슨 영화 같은, 엽기적인 사건 뉴스에 온 나라가 흔들렸다. “기사를 보고 소름이 쭈뼛 끼쳤다”거나 “도대체 경찰은 시체 발견 후 열흘 가까이 뭘 했기에 범인을 못 잡는 거냐?”는 질책이 쏟아졌다. 치안국은 “전국의 민완형사를 모두 이 사건에 투입한다.”고 부랴부랴 발표했다.

신문에 기사가 나간 덕에 피해자의 신원이 금세 확인됐다. 원래 춘성 출신이며 춘천 정선 등지에서 술집 접대부로 일했던 32세 이 모 여인이었다. 그녀는 정선에서 접대부로 일할 때 술집 주인과 동거를 시작해 63년 함께 춘성으로 돌아왔다. 그 동거남이 여인의 세 번째 남편이며 “작년부터 사이가 틀어져 걸핏하면 ‘헤어지자’며 싸우곤 했다”는 주변진술도 받아냈다. 경찰은 전현 남편 등 3명을 제1, 제2, 제3 용의자로 찍어 바로 전국에 수배했다.

용의선상에 오른 3명 아닌 제3의 인물 검거

여기서 또 엄청난 실수가 있었던 얘기는 나중에 하자. 범인은 그 셋 중 한 명이 아니었다. 피해자 이 여인과 과거가 있는 사람도 아닌 살해현장 주변에서 주막집을 열고 있는 45세 남자였다. 그는 4개월 전 눈 내리는 겨울밤 우연히 자기 주막에 들른 피해자를 욕보이려다 반항하자 꽁꽁 언 호수로 끌고나가 죽이고 시체를 난도질해 수장한 것이었다. 젊은 날 일본군 오장으로 남양군도 전투에 참가한 경력이 있어 흉기를 잘 다루는 건 맞았다.


사건 경위는 이렇다. 이 여인은 남편에게서 도망쳐 살 요량으로 “고향인 경남 남해에 가서 농사자금을 만들어 오라”고 꼬드겨 1월 하순 남편을 경남에 내려 보냈다. 1월27일 밤. 여인은 이삿짐을 꾸려 산길로 8km 떨어진 새집에 한번 옮겨놓았다. 그리고 다시 옷가지와 이불을 넣은 트렁크를 가지고 가다 눈보라를 만났다. 짐은 무겁고 날은 추워 길가 주막에 들어갔더니 주인은 아내와 딸을 친척집 결혼식에 보내 놓고 혼자 주막을 지키고 있었다.


토막 살해 사건 진범 체포
1965. 5. 28 [경향신문] 3면

증거 못찾는 범행
1965. 6. 2 [경향신문] 7면


꽁꽁 언 여인은 주막주인에게 술을 청했고 두 남녀는 막걸리를 네 되나 함께 마셨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술이 취해 각각 따로 눕긴 했으나 이내 주인이 여인을 덮쳤다. 여인은 온힘을 다해 반항하며 부엌에서 칼까지 들고 와 남자의 뺨을 때리고 항의했다. 그러나 욕정에 이성을 잃은 남자에게 그건 오히려 분노와 증오만 끓게 하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이불로 덮어 여인을 제압한 주막주인은 꽁꽁 얼어붙은 춘천호로 그녀를 끌고 갔다.


눈보라가 치는 곳에서 여인을 살해한 남자는 낫으로 얼음을 깨고 물속에 시체를 밀어 넣었다. 나중에 그는 “몸은 모든 시비의 근원이었기 때문에, 얼굴은 너무 미운 나머지” 훼손했다고 말했다. 핏자국은 씻어내기도 했지만 내린 눈이 감춰주었다. 그는 범행에 쓴 흉기는 불에 녹여 엿을 바꿔 먹었고 트렁크에 든 옷가지와 이불은 춘천 장에 가지고 나가 3700원에 팔아 증거를 인멸했다. 2개월간은 현장이 뻔히 뵈는 주막에 살다 나중 이사를 갔다.

범죄와 관계없는 남편을 호송하는 해프닝도..

그가 잡힌 것은 서울 등에서 차출된 민완형사들 때문이 아니었다. 수사본부가 옛 남편과 현 남편들 검거에 힘을 쏟을 때 춘천서의 두 순경은 여인이 1월 말 이웃사람에게 “남편이 시골가고 없으니 이삿짐을 좀 옮겨 달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냥 흘릴 수도 있었지만 두 순경은 여인의 이사 정보를 샅샅이 캤고 흔적이 주막에서 끊긴 것을 확인했다. 주막주인을 찾아 심문하자 그는 “그러잖아도 가책을 느꼈다”며 범행을 자백했다.


그러나 진범의 자백을 받기 전, 남편을 잡으러 남해에 간 형사대는 그를 포승줄로 묶고 수갑을 채워 연행하고 있었다. 남편은 “나도 아내를 찾으려 했다. 아내의 빚이 있다는 말을 듣고 3만 원을 갚아주기도 했다”며 범인이 아니라고 항변했으나 막무가내였다. 배와 기차를 번갈아 타고 춘천으로 압송되는 도중 기차가 대전에 왔을 때쯤 “주막집 주인이 진범이며 자백도 했다”는 소식을 들은 형사들이 풀어줬지만 온갖 수모를 다 당한 뒤였다.


짓밟힌 인권
1965. 5. 28 [경향신문] 3면

주막집 주인에겐 사형이 선고됐다. 살인 시체모욕 시체유기 횡령 등 죄목이 붙었다. 그는 감옥에서 종교에 귀의하고 아내와 딸에게 죄를 뉘우치는 편지를 썼지만 이 ‘해방 후 최고로 흉한 범죄’에 동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건의 여진도 엄청나 60년대 말까지 사람들은 가장 끔찍한 범죄로 춘천호반 사건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학생들까지 화가 나면 “토막 내 죽이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게 된 것도 이 사건의 여파였다.

각종 모방범죄로 온 사회가 '들썩'

이렇게 사람들 가슴에 큰 멍을 들였으니 카피 캣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67년 6월2일 새벽 마산경찰서 관내인 경남 창원군 동면 국도변 보리밭에서 머리가 잘려나가고 팔다리와 동체도 분리된 소년의 시체가 발견돼 사람들은 다시 토막살인 악몽에 빠져 들었다. 17세가량인 소년의 시체는 미제 비옷과 비닐 백에 둘둘 말려 버려져 있었는데 경찰은 끝내 피해자 신원을 밝혀내지도 못하고 범인도 잡지 못했다.


토막 살인은 재일 한국인 사회에도 번졌다. 67년 11월 도쿄 경찰은 아카사카 나이트클럽 여급(호스티스)을 죽이고 시체를 토막 내 개천에 내다버린 재일 한국인청년을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범인은 돈 문제로 자신의 집에 찾아온 여급이 자신을 “죠센징!”이라며 멸시하는 투로 불러 화가 나 죽이고 시체도 훼손해T다고 밝혔다. 당시 일본 신문들은 이 사건을 사회면 톱으로 다루며 춘천호반 사건을 모방한 것이라는 분석 기사를 싣기도 했다.


그해 12월에는 인천에서 또 토막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술집 접대부와 동거하던 30대 남자가 돈 문제로 다투다 여인을 죽여 시체를 훼손했다. 그는 시체를 종이상자에 넣어 몰래 옮기려고 마루에 내놓았다 수상하게 여긴 주민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혔다. 살해는 순간적 격정에 의한 것이었지만 사체 훼손 등 증거인멸을 노린 것은 역시 춘천 사건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토막사건이 나면 검찰은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구형하고 법원도 그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법에 정해진 대로 당연한 구형이고 선고였지만 카피 캣이 두려워 예비살인자에게 경고를 보낸다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카피 캣은 그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극성을 부렸다. 서울 부산 대구에서 춘천사건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끔찍하기 짝이 없는 사건이 속속 터졌다. 특히 부산에서는 몇 달 사이 대여섯 건의 사건이 연속으로 일어나 시민들을 공포에 질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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