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洋洋)한 압록강수(鴨綠江水)는 밤낫으로 흘너가는 곳 어데이뇨
유유(悠悠)한 나의 심사(心思)
너를 라 거지업다
외외(巍巍)한 금수봉(錦繡峯)아!
흘립천장(屹立天丈) 놉히서기
깁흔 담장안 너 그러워
탄식하는 너의 녯 주인(主人)
창공(蒼空)에 밝아 잇는 저 명월(明月)
아- 누구를 위하여서!
교교(皎皎)히 벗치엿는 창공(鐵窓)에
깁흔 한(恨)은
망국혼(亡國魂)이 늑기워라
언제나 언제나 붉은 담 붉은 옷
버서나
사랑하는 너를 질길소냐?


1926년 신의주형무소에서 선생이 지은 시(《동아일보》1926년 9월 26일자)

을사늑약 체결되자 열 여섯 살에 의병 선봉장. “토왜복수” 외치며 서울 진공 작전 참가

편강렬(片康烈, 1892.2.28~1929.1.16) 선생의 집안은 경북 김천에서 대대로 살아왔으며 할아버지 대에 황해도 연백으로 이주했다. 선생은 1892년 2월 28일 황해도 연백군 봉서면 현죽리 목동에서 편상훈(片相薰)의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전국 각지에서는 토왜복수(討倭復讎)를 외치며 의병이 일어났다. 1907년 선생은 연고지인 경상도 지방에서 일어난 이강년 의병진의 소집장 겸 선봉장으로 참전하여 경상․충청도 일대에서 큰 공적을 세웠다. 1908년 전국의 의병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13도 창의대진소(13道 倡義大陣所)를 결성하고 서울 진공작전을 결행하였다. 이때 선생은 중군장 허위(許蔿)의 휘하에서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출하여 싸웠으나 부상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 선생은 일경의 감시를 피하여 평양의 숭실학교에 진학하였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비분강개하여 다시 국권회복운동에 나섰다.


선생은 국권회복을 위하여 조직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황해도 지회에서 은밀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다가 일제가 날조한 ‘사내(寺內)총독 암살 모의사건’(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2년여간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출옥 후에도 나라를 구하겠다는 선생의 높은 뜻은 조금도 변함이 없어, 영남일대의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인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하여 결사대와 선전반을 조직하여 맹렬한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선생의 이러한 굳은 뜻은 의병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것이다. 의병을 높이 평가한 박은식(朴殷植)은 “수 십 년 이래로 적에게 죽어간 우리 의병은 15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했다. 그리고 “의병이란 바로 우리 민족국가의 정수(精粹)”라고 추앙하면서, “나라는 멸망시킬 수 있어도 의병과 의병정신은 멸할 수 없다.”고 역설하였다. 곧 선생의 생애는 바로 이러한 의병정신을 몸소 실천한 산 기록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편강렬 선생 판결문.(1913년 3월 20일, 경성복심법원) 편강렬 선생은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3.1 독립만세 이후 황해도 안악에 군사주비단 조직. 장차 있을 국내 진공 작전 준비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무렵 선생은 한동안의 유랑생활을 청산하고 동지들의 권고와 후원으로 연안읍에서 사기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때문에 장날이면 많은 사람들이 상점을 드나들었다. 따라서 같은 뜻을 품은 동지들도 물건을 사러 가는 것처럼 해서 무난하게 그곳을 드나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을 거사계획의 본부로 삼는 것은 불안하였다. 그래서 해성면 초장리의 유지 정종호의 집 뒷산에 모여 이 지방의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그러나 일경의 심한 감시로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고, 3월 15일 이후에야 여러 곳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가질 수 있었다.

3․1독립만세 이후 선생은 동생인 덕렬(德烈)을 상해의 임시정부에 파견하였고, 이 해 가을에는 황해도 안악에서 최명식(崔明植)․간병제(簡秉濟) 등과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을 조직하여 안악군 대표를 맡았다. 군사주비단은 “군립군의 국내 진입시 원조를 목표”로 광범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듬해 5월 밀정의 밀고로 이 사실이 일경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황해도 경찰부에서는 각 군에 비상경계망을 내리고 검거에 착수했으며, 이때 선생도 붙잡혀서 1919년 9월 해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2월 형을 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의성단과 편강렬 선생의 활동 보도 기사. (왼쪽은 《시대일보》1924년 5월 19일자)· 오른쪽은《독립신문》1924년 5월 31일자) 의성단은 1923년 겨울 편강렬 선생과 양기탁·남진 등이 조직하였는데, 여기서 선생은 단장에 추대되어 활약하였다.

만주로 이동하여 무장투쟁단체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하고 일제를 압박

1921년 극도로 쇠약한 몸으로 출옥한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부인과 가족들은 일제의 탄압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점포는 모두 채권자에게 탈취당한 뒤였다. 선생은 다시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북경과 상해 등지를 전전하며, 동지들과 조국광복의 방략을 논의하였으나 무장항쟁이 최선의 수단이라고 판단하고 만주에 정착했다.

그 후 1923년 10월경 산해관(山海關)에서 선생은 강진지(姜震之)․양기탁(梁起鐸)․남정(南正) 등과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추대되었다. 의성단은 광활한 만주를 무대로 열과 성과 담력으로 시종일관 하면서 민족운동사상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 그것은 우리 민족에 대한 중국인들의 존경심을 고양하고, 자칫 자포자기하기 쉬웠던 교민들에게 무한한 희망과 삶의 의욕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의성단은 주로 장춘선(長春線) 공주령(公主嶺)으로부터 장춘에 이르는 철도 연선의 양측 2백여리 지역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250여명의 단원을 무장시켜 장차 국내에 진입할 수 있는 거점 마련에 주력했다.

장춘성 일본 영사관, 일제의 만철병원 습격. 일제, 경찰과 밀정 총동원하여 선생 체포에 혈안

1924년 선생은 단원들과 함께 장춘성 내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였다. 7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적 60여 명을 살상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대낮에 봉천(현재의 심양) 시내 만철병원(滿鐵病院)을 습격하여 다수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고 본부로 돌아오기도 했다. 당시 일제 총독부에서는 이 사건에 크게 당황하였다. 그래서 일제는 만주에 있던 경찰력과 밀정들을 총동원하고 총독부 사무관이던 홍모(洪某)를 특파하여 선생을 체포코자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장춘 시내에 ‘아사홍생 아생홍사(我死洪生 我生洪死 : 홍가와 나와 죽기 아니면 살기 내기다)’라는 야유 섞인 벽보를 붙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독립운동전선 통합에 나서. 하얼빈에서 일경에 포위 당해 장시간 총격전 끝에 체포

1924년 선생은 만주지역에 독립운동 단체들이 수없이 난립하여 그 실행방법과 활동방법이 다르고, 이 때문에 일반 동포들이 오히려 많은 곤란을 겪게 될 뿐 아니라 독립운동 전선에 약화를 가져오게 됨을 간파하고 이의 통합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1924년 7월 길림(吉林)에서 전만통일의회주비회(全滿統一議會籌備會)의 개최를 주도하여, 서로군정서․길림주민회․광정단․대한독립단․통의부․노동친목회 등의 대표들과 함께 독립군 조직의 통합을 논의하였다.

8월에는 부하 10여 명을 거느리고 전가전(傳家甸)으로 가서 군자금 4~5백 원을 모집하고 하얼빈으로 갔다. 이곳에서 독립운동 단체의 대표들과 만나 통일회(統一會)를 조직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미리 탐지한 일경이 비상소집되어 불행하게도 포위를 당했으며, 장시간의 총격전 끝에 마침내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1924년 8월 22일 신의주로 압송된 선생은 1925년 3월 30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7년 형이 확정되었다. 판결언도가 있었던 재판정에서 선생은 앙천대소(仰天大笑)하며 의연하게 돌아서서 재판관과 방청객을 놀라게 했다.

편강렬 선생의 옥중시.(《동아일보》1926년 9월 26일자)

투병 중인 편강렬 선생. (《동아일보》1928년 9월 8일자). 병으로 신의주형무소에서 출감한 직후 편강렬 선생은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선천 미동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기간이 오래됨에 따라 주변의 도움도 줄어들고 병원에서도 치료비를 요구하여, 할 수 없이 반신불구의 몸을 이끌고 다시 만주로 떠나게 되었다. 당시 병 상태가 매우 심각한 선생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나라 찾기 전에는 고국으로 이장하지 마라.” 장기간 옥고와 고문으로 순국

2년 이상을 신의주 감옥에서 고문과 옥고로 시달릴 대로 시달린 선생은 피골이 상접하여 죽음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일제도 1926년 9월 28일 병보석으로 선천 미동병원에 입원하도록 허가했다. 그러나 장기간의 입원에도 불구하고 골수에 맺힌 병마가 물러가지 않아서, 가족과 친지들이 의료시설이 구비된 일본인 병원으로 옮길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죽어도 왜놈에게는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완강히 거절했다. 1929년 1월 16일 선생은 “나 죽거든 유골을 만주 땅에 묻어줄 것이요, 나라를 찾기 전에는 고국으로 이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일생을 마감했다.

편강렬 선생 타계 기사. (《동아일보》1929년 1월 20일자) 1929년 1월 16일 병으로 고생하던 편강렬 선생이 타계한 사실을 알리고 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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