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가 우리 땅에 언제 들어왔을까?

우리나라에 자전거가 도입된 때를 정확히 확정하기는 어렵다. 처음 자전거를 탄 사람 또는 최초의 자전거 운행에 관해 여러 설이 있다. 자전거를 처음 소개한 인물이 조선해관(朝鮮海關) 책임자로 부임한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수행하여 1883년 6월 조선에 온 F. 보리오니라는 기록이 있지만 확정하기 어렵다. 1896년 예조시랑 고희성이 서울 거리에서 처음 자전거를 탔다고도 하고, 같은 해 서재필 박사가 독립문 건축 현장에 타고 간 것이 처음이라 하기도 한다. 주한 미국 공사를 지낸 알렌은 1884년 미국 공사관에 무관으로 근무하던 해군 장교가 자전거를 타고 서울 거리를 누볐다고 기록했고, 의사 올리버 애비슨은 1886년 미국 선교사 달젤 벙커가 서울 거리에서 자전거를 탔다고 기록했다.

 

두 바퀴로 달리는 자전거를 처음 본 사람들이 신기해한 것은 당연한 일. 고종 황제는 올리버 애비슨의 자전거를 보고 ‘어떻게 넘어지지 않고 달릴 수 있는지’ 궁금해 했다. 이에 애비슨이 ‘처음에는 균형을 잡기 어렵지만 오래 타면 넘어지지 않는다’고 답하고 타는 시범을 보였다. 당시 애비슨은 고종 황제가 직접 타보겠다고 나설까봐 크게 긴장했다고 한다. 애비슨은 1895년 고무튜브 타이어를 들여왔다 하니, 우리나라 자전거 초기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미국 공사 알렌은 1896년에 잡지 기고문에서 ‘조선에는 자전거 14대가 운행되고 있는데, 자전거 타고 가다가 장옷 입은 여인을 만났을 때와 개를 만났을 때 가장 무서웠다’고 말했다. 아마도 1883~1886년 사이를 자전거 최초 도입 시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전거는 도입 초기 자행차(自行車), 축지차(縮地車) 등으로도 불리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지만 초기부터 빠르게 보급되지는 못했다. 도로 사정 탓이었을 수도 있겠으나 자전거 타는 사람을 보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1907년 윤치호의 기록이 말해주듯, 새로운 문물에 대한 거부감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1908년 11월 13일 황성신문에 ‘군부(軍部)가 긴급 공무에 사용하기 위해 자전거 2대를 구입했다’는 기사가 실린 것으로 보아, 자전거의 편리함과 효용성은 인정받고 있었다. 1906년 4월 22일 훈련원에서(을지로 5, 6가 일대) 대한제국 육군참위 권원식과 일본인 요시카와가 우승을 다툰 자전거 경주대회가 우리나라 최초의 대회였다.

 

 

조선의 자전거 스타 탄생

‘장충단의 자전거 경주회. 일등은 엄복동 군. 21일 장충단에서 윤업회(輪業會) 주최 자전거 대 경주회가 있었는데, 마침 일요일이 되자 일기가 좋으므로 군중은 수만 명에 달하는 대성황에 이르렀으며, 아침 9시부터 여러 가지 재미있는 경주가 있은 후 오후 5시 경에는 선수 총 경주회가 있었는데, 이 경주회는 운동장을 40번이나 도는 것으로 만장의 갈채 리에 엄복동 군이 제 1착이 되어 영광스러운 우승기는 엄군의 손에 떨어졌는데. 대판(오사카)에서까지 멀리 승리를 기약하고 온 일본인 선수들은 그만 낙담실망이 되었고, 이와 같이 성황 중에 오후 6시에 무사히 폐회하였다더라.’ (1922년 5월 23일자 동아일보)

일본인 선수들을 낙담실망시키며 당당히 우승을 차지한 엄복동(嚴福童, 1892~1951). 그는 1910~20년대 주요 대회를 석권하며 당시 유행하던 노래 ‘이팔청춘가’의 멜로디에 가사를 바꾼 ‘떴다, 올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달린다, 내려 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라는 노래를 낳은 최고 인기 스포츠 스타였다. 형편이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남의 집 일을 해주며 끼니를 잇기도 하고 두부공장 직공으로 일하기도 했던 엄복동은 평택의 자전거 판매점 일미상회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엄복동은 평택에서 서울까지 자전거를 팔러 다니는 행상단에 속해 일하면서 자전거 실력을 키워갔다. 별도의 전문적인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을테니 그의 남다른 노력과 자질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엄복동이 그야말로 ‘혜성과 같이 나타난’ 것은 그의 나이 21살 때인 1913년 4월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였다. 경성일보사와 매일신보사가 공동주최한 이 대회는 인천(12일), 용산(13일) 평양(27일)에서 차례로 열렸다. 중고 자전거를 갖고 출전한 엄복동은 4월 13일 용산에서 일본 선수 4명을 따돌리고 1위를 차지했고, 27일 평양 경주에서도 1위를 차지하여 우승했다. 특히 평양 역전 광장에서 열린 27일 경주에서는 엄복동이 1위, 황수복이 3위를 차지하면서 조선 관중들을 크게 열광시켰다. 문자 그대로 ‘스타 탄생’의 순간이었다. 엄복동의 등장과 함께, 그전까지 친목 동호회 행사이거나 자전거업계의 판촉행사 성격이 강했던 자전거 경주대회는 관객들이 구름같이 모여드는 명실상부한 스포츠 행사가 되었다. 이후 엄복동의 자전거는 거칠 것이 없었다.

 

 

식민지 조선의 희망과 자부심의 아이콘

‘엄복동 군 우승. 대련에서 1등 해. 자전거의 대장 노릇을 하는 엄복동 군은 지나간 20일 대련시 봉판전 운동장에서 열린 자전거 대 경주회에 원정차로 떠났었는데.…일본서 온 자전거 대왕이라는 일류선수 일본인과 또는 중국인, 조선인, 연합의 경쟁이므로 조선인은 더욱 뛰놀았다.…엄 선수가 일등 선착이 되고 일본인이 이착이 되고, 중국인이 삼착으로 끝을 마치어. 만세성미에 엄 선수는 우승기와 순금시계와 만주 일일신문사 기증의 금메달을 타가지고 대련 거주 조선동포 환호 중에 다섯 채 자동차에 엄 선수를 태워가지고 시내를 일주할 때 마다 조선인의 만세성은 우레 같아서 미증유의 성황을 이루었는데.’

1923년 5월 20일 중국 대련에서 열린 대회에서 엄복동이 우승한 소식을 전하는 당시 신문 기사의 일부다. 엄복동의 활동 무대가 조선을 넘어 동아시아 무대였음을 알 수 있다. ‘대련 거주 조선동포 환호’, ‘조선의 만세성은 우레 같아서’ 등의 표현이 눈길을 끈다. 엄복동은 단순한 스포츠 스타가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자괴감을 조금이나마 씻어주는 희망과 자부심의 아이콘이었다. 나라가 없으니 국가대표선수도 있을 수 없었지만, 적어도 조선인들의 마음속에서 엄복동은 국가대표선수이자 민족대표선수였던 것이다.

‘엄복동 군과 다른 일본 선수 한 사람만 남아 승부를 겨루게 되었는데. 그것도 엄복동 군은 30여 회를 돌고 다른 일본 사람이 엄군보다 몇 회는 뒤떨어져 영예의 1등은 의심 없이 엄군의 어깨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심판석에서는 별안간 중지를 명하여 엄군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이것은 꼭 협잡으로 나를 일등을 아니 주려고 하는 교활한 수단이다!” 부르짖으며 우승기 있는 곳으로 달려들어 “이 가짜 우승기를 두었다가 무엇 하느냐”고 우승기를 잡아 꺾으며, 옆에 있는 일본 사람들이 일시에 달려들어, 엄군을 구타하여 엄군은 마침내 목에 상처를 내고 피까지 흘리게 되어, 일반 군중들은 소리를 치며, 엄복동이가 맞아 죽는다고 운동장으로 물결같이 몰려들어.’

1920년 5월 2일 경복궁(창경궁이라는 설도 있음)에서 열린 시민대운동회 자전거 경주 소식을 전하는 당시 신문 기사다. 엄복동의 우승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심판이 경기 중단을 선언해버렸고, 이에 엄복동이 격렬히 항의하자 일본인들이 엄복동을 구타한 사건이다. 당시 일본인 심판들은 일몰을 이유로 경기를 중단시켰으나, 주요 대회마다 우승을 차지하는 엄복동이 눈엣가시였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1922년 4월 2일 상주에서 열린 대회에서는 엄복동이 일본인 선수의 방해로 큰 부상을 당하기까지 했다.

‘자전거 선수로 유명한 엄복동 군은 지난 2일에 경상도 상주에서 개최한 자전거 운동을 하는 중, 최종의 70회를 돌던 중, 같이 돌던 일본 선수가 두 번이나 떼밀어서 중상을 당하여 방금 황금병 일미상회에서 치료중이라 하더라.’

 

자전거 영웅의 비극적인 말년과 최후


엄복동은 1920년 시민대운동회 경주부터 영국 자전거 회사에서 만든 자전거를 타고 경주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영국 러지사 로고와 회사 이름(RUDGE-WHITWORTH), 시리얼 넘버(1065274)가 찍힌 동판이 부착되어 있는 엄복동의 자전거는 2010년 8월 등록문화재 제466호로 지정되었다. 영국 러지사가 1910~14년 사이에 판촉용으로 특별 제작해 일본에 보낸 이 자전거는 엄복동이 근무하며 후원을 받던 일미상회가 수입해 들여온 것이었다. 이 자전거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엄복동이 1920~30년대에 타다가 후배 선수 조수만에게 넘겨 준 자전거, 즉 우리나라 스포츠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자전거이기 때문이다.

 

엄복동은 특유의 레이스 운영과 습관으로도 유명했다. 중반 레이스까지는 중간 그룹에 끼어 페이스를 조절하며 달리다가 종반이 되면 갑자기 엉덩이를 한 번 치켜 올렸다가 페이스를 급격히 끌어올려 승부를 결정짓는 작전을 구사했던 것. 마지막 한 바퀴를 남기고 치고 나가 역전 우승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관객들은 엄복동이 언제 엉덩이를 치켜 올릴지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았으며, 엄복동의 엉덩이가 치켜 올라가는 순간 일제히 ‘올라간다!’ 소리를 질렀고, 엄복동이 1위로 치고 나와 질주하는 모습에 환호하며 열광했다. 상대 선수와 부딪혀 넘어져도 심한 부상이 아니면 곧바로 레이스에 합류하여 대역전극을 펼쳐 우승하는 투혼을 발휘하기도 했다.

 

엄복동은 1929년 체력 저하를 이유로 사실상 현역 선수 생활에서 은퇴했다. 그러나 1932년 4월 20일 전조선남녀자전거대회 1만 미터 종목에 출전하여 41세 나이로 우승을 차지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선수 시절 적지 않은 우승 상금과 상품을 타기도 했지만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갔고 광복 후에는 자신의 전성기 시절 경기 모습이 담긴 사진을 팔아야 할 정도로 생계가 어려워졌다. 그는 동두천과 연천 일대에서 사실상 방랑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6.25전쟁 발발 전 해에 서울에서 지인들에게 목격된 적이 한 차례 있었다. 전쟁이 난 이후 그의 종적은 묘연했다. 동두천 부근 야산에서 폭격을 당해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의정부종합운동장 앞에 ‘사이클 영웅 엄복동 선수상’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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